• 최종편집 2024-05-21(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1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9
  • 특색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문화
    루마니아 인종들은 민족성 자체가 밝다. 그리고 매우 긍정적이고 성격은 다혈질이며 루마니아 인들은 전반적으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어디를 가든 가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는 음주가무의 천국인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전통은 가수나 악단을 불러 밤새도록 춤추고 먹고 마시는 것이 보통이며,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악단이 집집마다 연주하며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루마니아 특유의 국민성이다. 어찌나 춤을 많이 추는지 장거리 고속버스 안에서도 관광버스처럼 춤추고 노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이다. 루마니아는 국민 종교인 정교에 대한 종교심은 깊은 편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와는 달리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할로윈 파티 귀신분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제법 많은 것에 비하면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당장 국민 1인당 술 소비량 부터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마녀가 직업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드라큘라부터가 사실상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국민 귀신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컬러 TV의 도입이 가장 늦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안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나(Televiziunea Română)의 TV방송 시작은 1956년에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TV 송출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컬러 방송은 북한보다도 10년이나 늦은 1983년부터 송출되었다. 그마저도 컬러 방송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도 이후에서야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모두 흑백방송으로 채워진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컬러 중계는 모두 외국이나 서유럽에서 송출된 것이고 루마니아 국영으로 방송된 것들은 모두 흑백이라 보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방송이 위주였고 그나마 1980년대에는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방송시간을 평일 2시간, 주말 3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TV 채널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이면서 사실상의 국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외국 프로그램도 상당량 수입하였는데 특히 달라스나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같은 미국 TV프로그램도 편성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반소감정이 있고 친중 및 친북을 했던 국가였기에 생각보다 소련의 방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북한의 채널들을 많이 수입했었다고 한다. 필자의 루마니아 지인들의 당시 회상을 듣다보면 북한 김일성의 교시도 그대로 송출이 되어 자신들도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좋아하고 그의 정책 모델을 상당수 따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루마니아 TVR이 BBC와 제휴를 맺으면서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정도로 제법 선진적인 방송을 도입했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침체가 이어지자 이 방송들조차도 거의 방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조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TV 채널을 줄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국 TV 채널을 버리고 이웃인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헝가리의 TV 방송을 몰래 시청했고, 불가리아 TV 편성 정보도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TV 만화와 불가리아 영화도 이 시기 루마니아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으며 불가리아의 당시 연예인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었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국영방송을 공영방송으로 전환하고 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에서도 하던 광고방송을 그동안 하지 않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광고, CF 방송을 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시간도 다시 확대했으며, 민영방송을 허용하면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송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많아 낙하산 문제라든가 정치 언론의 유착 문제 등이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매우 재미있어지고 다채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마니아의 방송 환경은 대만과도 비슷한데 시청률 10%를 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고 자국의 지상파 채널은 시청률이 더 낮아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존폐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도 드라마, 터키 드라마, 텔레노벨라 등 다양한 외국 드라마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되었고 K-POP도 흥행을 타면서 루마니아의 지상파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 현재는 시청률이 다른 케이블 방송 못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배우자 간 결합' 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8년 10월 6일과 7일에 실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을 통해 동성 결혼의 허용을 막으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 지지파로는 보수성향의 비정부 기구인 '가족 연대' 와 루마니아 정교회 등이 대표적으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예배 후 투표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마니아에서 동성결혼은 현재도 불법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헌법상 결혼이 '배우자 간 결합'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리 결혼 개념을 '남녀간 결합'으로 못박아 놓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율이 최소 30%를 넘어야 하는데 결국 투표율이 5.72%로 저조해 자연히 무산되었다. 당시 루마니아 인들에게 있어 남녀 간의 결혼이나 결합은 당연한데 굳이 이런 것까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투표율이 턱없이 낮았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의하면 루마니아는 2월, 3월, 7월, 8월, 9월, 10월에는 공휴일이 전혀 없으며 대체휴일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면 12월 1일 국경절 이후 1월 24일 통일의 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게 되는데 이는 루마니아 인들은 열심히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빚어진 차우셰스쿠의 노동 정책의 반영 때문이다. 루마니아 인들의 정서상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다는 것은 당연한 문화라고 보기에 이 공휴일 많지 않은 노동 정책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가장 공휴일이 적은 나라가 루마니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룩하게 쉬어야 하는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가는데 소금 광산을 개조한 살리나 투르다(Salina Turda)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놀이공원으로 무려 지하 120m에 달한다. 매 일요일마다 살리나 투르다 같은 놀이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중남미의 파나마, 내일 대선과 총선을 조망해본다.
    그 동안 파나마는 글로벌 물류를 담당하고 있는 운하가 거대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2023년 여름부터 일일 통과 선박을 35→31→21척 등으로 각각 줄여 왔다. 그리고 현 2024년 2월에는 다시 18척으로 축소했다. 이는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인해 수량이 부족해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 역할을 맡고 있다. 현대의 함선들은 크기가 워낙 거대해져 통과 선박 크기에 제한이 있다. 파나마 운하의 높이는 해수면보다 최대 26m로 높은 편이다. 선박들은 도크에 들어온 뒤 물을 채워 더 높은 위치의 도크로 올라가게 되고 운하 중간에 위치한 가툰 호수를 거쳐 다시 도크로 들어가 물을 빼 내려가며 계단식으로 운하를 통과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갑문 엘리베이터에 사용되는 물은 가툰 호수에서 끌어다 쓰고 있는데 현 파나마 최악의 가뭄은 가툰 호수의 물을 말려 바닥을 드러낼 위험에 처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툰 호수의 위기는 곧 파나마 운하의 효용성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파나마 운하는 갑문식으로 만들어져서 비록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무려 20,000km 이상을 돌아가야 하는 것에서 단 하루 정도로 건너갈 수 있게 되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과 반대로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게 되었다. 결국 파나마 운하는 건설비에 들어간 비용 이상을 통행수수료로 쉽게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인데 파나마 국가 경제의 80% 이상을 이 운하의 통행수수료로 충당하고 있다. 파나마는 1인당 GDP가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나라로 2010년대 중남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와 함께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인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상 이 운하 하나로 중남미에서 일약 잘 사는 나라로 손꼽히게 됐는데 1인당 GDP가 14,618달러로 개발도상국 수준을 넘어 중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하루아침에 최빈국으로 나락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글로벌 물동량 5%, 화물선의 약 40%가 통과하는 파나마 운하의 통과 선박 감소는 글로벌 물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데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파나마 다음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받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 통과 선박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남해와 북해가 없는 미국 입장에서 해운으로의 동, 서 무역 연결은 파나마 운하 밖에 방법이 없다. 미국 입장에서도 파나마 운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 정부에 반환하면서 이를 관리할 관리비를 비롯, 상당 양의 달러를 파나마에 퍼줬다. 그렇기 때문에 파나마 운하의 위기는 미국 경제의 위기, 미국 국가 안보의 위기로도 직결된다. 자국을 방어하는 미 해군 군함들이 동서를 왕래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두 운하에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면 글로벌 해상통상로가 (무역선들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과 남미 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돌아가야 했던) 18세기로 퇴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는 당사 국가인 파나마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니카라과 운하 프로젝트(Nicaragua Canal Project)이다. 사실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은 20세기 초에 미국이 추진하다가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프랑스로부터 4,000만 달러에 넘겨받으면서 포기한 프로젝트였다. 이후 니카라과가 친러, 친중 국가가 되면서 2012년 9월 26일, 니카라과 정부와 중국의 홍콩 니카라과 운하 개발(HongKong Nicaragua Canal Development, 이하 HKND)은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하기로 협의하고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니카라과 운하 건설업체로 선정된 HKND는 왕징(王靖) 대표가 설립한 회사로, 이 프로젝트의 총 건설비가 400억~5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를 위해 니카라과의 의회는 HKND의 개발 참여를 승인했고 이를 통해 HKND는 니카라과 운하 개통 후 100년간의 운하의 건설과 관리, 개발의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운하 건설과정에 필요한 보조도로, 항만, 공항, 철도 등의 건설도 허가받았다. 태평양 연안의 브리토 강에서 나카라과 호수를 거쳐 카리브 해 연안의 푼타 고르다 강까지 총 길이가 278km에 달한다. 니카라과 운하의 폭은 최소 230m에서 최대 520m이며, 수심은 27.6m로 확장 공사를 한 파나마 운하는 길이 82km, 폭은 55m, 수심은 18.3m로 니카라과 운하보다 규모가 작다. 파나마 운하는 최대 8만 t의 선박이 오갈 수 있는데 니카라과 운하는 선박의 최대 적재톤수가 최대 25만 t이나 된다. 이게 완성되기라도 하면 이미 파나마 운하와의 경쟁력에서 앞서게 되는 것이다. 이게 완공되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통해 니카라과 운하를 갖게 되면 향후 100년 동안 미국의 동, 서 물류와 무역의 항로까지 틀어 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징의 금융 손실로 인해 HKND가 니카라과 프로젝트에서 손을 땠고 2018년 2월에 HKND는 홍콩 본사를 폐쇄한 채 유령 회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곳을 중국 정부가 다시 손을 대기 위해 니카라과와 서서히 접촉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은 파나마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데 니카라과가 안 되면 언제든지 파나마로 옮길 수 있게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일종의 보험용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있을 5월 5일 파나마의 대선에 당선이 유력한 호세 라울 물리노(Jose Raul Mulino) 전 공공 안전부 장관이 친미성향을 갖고 있지만 친중성향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도 가장 먼저 참여했던 국가 중에 하나이고 물리노도 중국과의 관계와 미국과의 관계를 두고 중립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되,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 없이 계속 실행하겠다고 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마르티넬리는 부패 혐의로 미국 입국이 금지된 반면, 물리노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파나마 대선이 총선과 함께 치뤄지는 이유는 전 대통령인 리카르도 마르티넬리(Ricardo Martinelli)가 최근 공공 자금을 세탁한 혐의를 받고 유죄 판결이면서 대통령으로써의 자격이 박탈당했다. 따라서 8명의 대통령 후보자가 나타나 5월 5일 선거를 치르게 된다. 파나마 시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피치 레이팅스(Fitch Ratings)가 최근 투자 등급에서 파나마의 신용 등급을 강등시킨 가운데 파나마의 경제적 안정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파나마 운하 문제의 해결, 그로 인한 최근 떨어진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마틴 토리호스(2004~2009) 전 대통령과 2019년 선거에서 2위로 머무른 로물로 루(Rómulo Roux)는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강조하면서 경제 안정을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바탕으로 유세를 벌였고 리카르도 롬바나(Ricardo Lombana)는 노동자들, 특히 구리 광산 시위 당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면 철저한 좌파 성향인 인물로 우파의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마르티넬리의 후임자로 지명된 호세 라울 물리노(José Raúl Mulino)의 공약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그는 파나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물리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 모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미국은 반도체와 같은 산업 분야의 협력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파나마에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고 중국은 파나마 인프라 개선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미국보다는 중국에 쏠려 있는 경향이 다소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인 파나마 운하의 담수를 해결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내일 그들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5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후편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한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에도 그리스에서 반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나 모두 진압에 성공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그리스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리스 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리는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크레타와 모레아를 얻으며 자신의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으며 그리스 독립군에 의해 한시가 급했던 술탄은 알리의 요구를 수용했다. 곧바로 알리는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그리스로 파견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군 내부에서는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끼리의 내전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스만-이집트 연합군과 맞서 전투를 치뤄야 했고 결국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당하고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리스에서 이집트 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 파괴를 일삼았으며 포로가 된 그리스 인들은 모두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아 버렸다.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그리스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그리스 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이집트 인들을 차출해 그리스에 정착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대 열강들이 그리스 독립군의 지지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들 3대 열강들은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그리스의 반란 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 산하의 자치국으로 남기는 내용의 타협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기 직전,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는 열강의 제안을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열강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기에 나바리노(Navarino)에서 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후 열강들의 군사력으로 인해 그리스 일대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을 무장해제시키며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집단 서방 열강들과 러시아는 그리스 민족에게 자결권이 있음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직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추가로 전쟁을 선포하여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술탄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고 결국 얻지 못한 메흐메트 알리는 대신 시리아라도 주고 자신이 맡고 있는 이집트 태수직위를 자손들한테 세습할 수 있게 제도를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단 서방이나 러시아에 몰려 있는 술탄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메흐메트 알리는 1831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알리는 프랑스 장교들을 훈련 교관으로 영입하고 이집트 군의 지휘를 맡긴 상태였다. 이로써 이집트 군은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탄지마트 개혁이 완료되지 않았고 신식군대로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숙청된 예니체리들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이집트 군에게 쉽게 패배한 심각한 졸전이었다. 이집트 군은 여세를 몰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고 오스만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까지 진출했다. 알리를 막아낼 수단이 없어진 메흐메트 술탄은 다급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를 승락하여 아나톨리아로 내려와 이집트 군을 상대했다. 여기에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넣어 완전히 지중해로 내려올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개입하여 메흐메트 알리와 메흐메트 2세 술탄에게 휴전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1833년 오스만 제국은 나라를 보전하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았으나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을 모두 메흐메트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크게 굴욕을 당한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한테 복수하고 상실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지도하는 탄지마트 개혁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와 같은 오스만 재국의 대대적인 근대화에 오스만 제국은 조금씩 근대적인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는 오스만과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다시 불화가 시작되었고 휴전을 맺은지 6년 후인 1839년 근대화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한 메흐메트 2세는 8만 대군으로 시리아 침공을 지시한다. 그러나 오스만 군이 완전히 근대화 되어 서구 열강처럼 강군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오스만 군은 헤지브 전투에서 4만여 명의 이집트 군에게 대패했고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함대 전체가 알리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는 홧병으로 쓰러져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었고 결국 사망했다. 급사한 메흐메트 2세를 승계하여 어린 나이의 압둘메지트 1세가 갑자기 술탄 자리에 올랐고 권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메흐메트 알리는 옛 이집트-시리아 왕국을 재건하여 독립하는 것을 넘어 코스탄티니예까지 정복해 오스만 제국을 승계할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가 지중해로 내려오는 것을 막는 완충국가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와 같은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세력의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개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이던 러시아, 그리고 또 다른 열강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제국까지 이 사태에 개입하였기에 메흐메트 알리에게 시리아 영유를 조건으로 여기까지 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배경을 두고 있던 메흐메트 알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와 시리아 해안을 포격해 붕괴시키고 열강 연합군에 의해 이집트 군이 크게 패하자 결국 메흐메트 알리는 열강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게 된다. 결국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를 반환하고 군대 규모를 축소한다. 그러나 처음 전쟁의 목표였던 이집트 태수 직위의 세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는데 성공했을 뿐, 그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다. 이후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 독립하게 된다. 메흐메트 알리와 그의 후손들은 195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태수(Khediv)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상 한 나라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집트는 이후로도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게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 중 가장 세입이 높은 지역이 남동 유럽 다음으로 이집트였을 정도였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188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게 세금 납부를 중단하였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알리는 1848년 장남 이브라힘 파샤에게 태수 자리를 양위했으나 이브라힘 파샤가 결핵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차남 투순 파샤의 아들인 손자 압바스 파샤에게 태수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메흐메트 알리는 1849년 8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여 시신은 카이로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메흐메트 알리의 생애에 대해 이집트의 경제학자 아민은 강력한 독립국가와 근대화를 달성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의 생애와 공통된 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메흐메트 알리가 이끄는 군사적인 연전연승은 맘루크 왕조의 명군 바이바르스에 필적된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레바논의 역사가 필립. K. 히티(Philip Kindred Hyti)가 주장하기를 19세기 이집트의 역사는 메흐메트 알리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 그 위대함을 평가하기도 했다. 알리는 프랑스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군제, 세제, 행정, 통상, 농업,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많은 개혁을 실시해 이집트를 근대화시켰다. 메흐메트 알리 그 자신도 청결을 중시하고 검소하며,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후일 이집트 왕국을 전복시키고 공화국으로 만든 압델 나세르조차도 알리는 높게 평가했으며, 메흐메트 알리는 현재도 이집트에서 근대화 되기 전, 마지막 불꽃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역사를 떠나 객관적인 평가로 볼 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경쟁과 중동 특유의 가문 및 혈족 중심 지배 체제의 기원, 그리고 중동 근대화 과정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4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전편
    제국주의 영국에게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집트에서 전 아랍을 대신하여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이다. 메흐메트 알리는 현 그리스 영토인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카발라에서 알바니아인 상인 집단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타고난 상업 실력으로 숙부에게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카발라의 징세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뒤이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자 숙부에 의해 이집트를 재점령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된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제국군 용병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집트에 온 알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집트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완벽히 평정한 공으로 1805년 오스만 술탄인 셀림 3세로부터 이집트 태수 자리를 임명받게 된다. 이후 알리는 이집트 군벌로 군림해 온 맘루크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만의 절대적 권력을 강화해 사실상 국왕으로 군림했다. 알리는 총독직을 세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반기들어 오스만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로 인헤 이집트의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이집트 역사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이라 여기며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긴 했었으나 오스만과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세력을 겨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맘루크 왕조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맘루크들이 반 자치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직접 파견되어 온 태수한테 반항적으로 굴면서 그들의 세를 과시했고 이에 굴복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켜 태수를 궁지에 모는 등,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아주 큰 근심거리였다. 특히 1760년대 들어서 알리 베이 엘 케비르(Ali Bey El-Kebir)와 그의 부관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가 연이어 국가의 원로 직위인 '셰이크 알 빌라드' (Sheik Al Bilad) 직위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였고, 오스만 조정이 보낸 총독의 권력은 유명무실 할 수밖에 없었다. 1768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알리 베이와 팔레스타인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Zahir Al Umar)는 러시아 제독 알렉세이 오를로프(Алексей Орлов)와 동맹을 맺어 본격적인 반란에 나서기도 하였다. 1772년 알리 베이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축출하고 집권한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는 오스만 정부와 타협했으나 교섭이 이어지는 도중인 1775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부하들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알리 베이의 심복이던 이스마일 베이와의 내전을 벌인 끝에 1778년 연립 정권을 세우며 대놓고 오스만 정부와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맘루크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집트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일은 당시 쇠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786년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반란을 진압한 유능한 제독인 하산 파샤 휘하의 부대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함대를 보내 이집트를 장악했고 이스마일 베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듬해 재차 러시아와의 전쟁이 터지며 오스만 제국 군이 러시아와의 전장으로 철수하자 1791년 무라드 & 이브라힘 베이의 연립 정권이 부활하게 된다. 그런데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와 맘루크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차지했지만 이어 영국군에게 밀려 나폴래옹의 군대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고 영국군 역시 얼마 안 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무주공산이 된 이집트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맘루크가 쇠퇴한 틈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정부와 이집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맘루크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마침 이집트에 와 있던 메흐메트 알리에게 있어 이집트의 권력 공백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알바니아인 용병들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이와 같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이용하여 알리는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토착 지배층이었던 맘루크의 숙청 과정은 먼저 자신이 약탈을 연출했고 이를 통해 울라마, 상인, 민중을 선동해 맘루크를 그들 스스로 추방하게 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 행정부가 임명한 이집트 태수의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이 이끄는 알바니아인 부대를 이용하여 이집트 전역에 조세 행정부를 설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알바니아인 부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동시에 알바니아인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에 자신이 몰아냈던 맘루크들에게 환영식을 열어준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숙청한 후,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몽골군의 침공 이후 이집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맘루크 계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집트 태수가 된 알리는 맘루크와 친 오스만 계파들을 동시에 숙청한 이후 알바니아 인 혈족과 이집트 현지인을 고용해 가신으로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정권을 강화했고, 동시에 자신의 영지가 된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이집트의 주요 수자원인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농민들을 동원해 면화와 곡물 재배에 투입하며, 무역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 차익을 서구식 인프라와 교육, 산업, 보건, 국방 등에 전면적으로 투자하여 이집트를 근대화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서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장교까지 초빙해 이집트 군의 훈련을 실시하면서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코스탄티니예의 오스만 중앙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에게 세금을 바쳤다. 비록 한 때 콥트어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면서 오스만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알리의 군사력과 이집트에서 코스탄티니예로 들어오는 안정된 세입이 있었기에 알리를 용인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이집트의 성과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오스만 행정부도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지만 이집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메흐메트 알리의 강압적인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일 강 정비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관세로 이집트의 산업을 보호하며 성장시켰으나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강제 동원된 자들이라 이들의 원성은 실로 대단했다. 의무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리는 반인권적인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으며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력의 뒤에는 인구의 약 2.6%를 열악한 처우의 군대로 강제로 동원하는 등, 비인간적인 징병까지 존재했다. 징병 명령에 대해 저항하기라도 하면 메흐메드 알리는 이들을 유혈 진압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심지어 병역을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모아 장애인 부대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게 되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4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와하브파의 등장은 칼리프 칭호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가까운 이집트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는 메흐메트 알리에게도 충분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또한 오스만 정부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오스만 정부의 호의를 얻어 정치적인 입지를 견고히 구축할 수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미 쇠퇴를 시작한 오스만 제국이 일개 오지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자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오스만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공백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불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의 명령을 받들어 와하브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알리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이브라힘 파샤는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곧바로 이집트 진압군은 사우드 가문의 근거지인 네지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메흐메트는 후일 반란의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 여에 걸친 추격전 끝에 사우그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완전히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조용히 혈통을 이으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우드 가문은 이집트에 대한 원한이 강한데 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헸다. 당시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음 공격 목표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했으며 손쉽게 제압이 가능한 곳이었다. 1820년 알리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 군은 센나르 술탄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되었고 이집트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수단도 함께 영국의 식민지로 합병되는 원인이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4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5년 전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한 중국 대사관 터를 다녀오다.
    나는 오늘 1999년 5월 7일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했던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현지를 다녀왔다. 폭격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잔상은 사라지고 대사관 터에는 비석 두 개만이 다수의 꽃다발들과 함께 남아 있다. 주변의 있는 건물둘은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Novi Beograd) 부지들을 재단장할 때 갈아 엎어져 새 건물들로 도색되어 있다. 신도심지라 불리는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는 사바 강 건너 구 베오그라드 시가지를 마주 보고 있는 신도시형 계획 부지다. 노비 베오그라드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구 베오그라드에 대한 개발보다 새로운 형태의 신도시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요시프 티토는 1945년 11월 11일 총선거를 통해 왕정 폐지를 선언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이루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에 대한 개발을 강화했으며 이곳에서 공산당 대회당을 짓고 티토 자신도 이곳 공관에서 근무했다. 티토가 미, 소 양대 강국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지키며 나름 독자적인 제3 세계 국가의 초석을 이루려 했던 곳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였으며 유고의 모든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할당된 주거지, 공산진영이든, 자유진영이든 할 것 없이 각 국 대사관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지어졌다. 즉, 세르비아어로 Novi는 "새로운"을 뜻한다. 말 그대로 신(新) 베오그라드였다. 중국은 1949년 공산화 된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수교하면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노비 베오그라드에 개설된 중국 대사관은 두 번째로 지어졌으며 첫 대사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 수교 및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도 수교한 뒤에는 교류, 협력을 자주 했다. 티토의 사후, 1980년대부터 유고슬라비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내 공화국들이 독립국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유고슬라비아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 사상 유래 없는 의리를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세르비아만큼은 중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려면서 코소보 전쟁 와중, 나토군이 군사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는데 그만 중국 대사관마저 폭격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 대사관 직원 3명이 죽고 세르비아 현지인도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떤 기사나 기록에서는 이날 죽은 중국인이 대사관 직원인지, 언론인인지 상이하게 나타나 정확한 신분은 햇갈린다. 다만 중국 측에서는 이들을 언론인, 기자라고 했다. 이날 폭격으로 인해 대사관 건물 또한 파괴되었다. 그리고 주변 건물들도 상당수 초토화 되었다. 중국 내에서 극렬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를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고,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의 조달 이사회를 목표로 진행한 폭격 임무였다고 했다. CIA 국장 조지 테넷은 폭격 위치 입력을 잘못했다고 청문회에서 시인했다. 이후, 1999년 8월, 미국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하기로 합의를 했고 대사관 복구에 대한 보상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2000년 미중관계법 제정으로 인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미중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은 중국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비춰지면서 많은 동정표를 받았다. 홍콩 시사잡지 '첸사오(前哨)' 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미발간 회고록을 입수하여 폭로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과 관련한 비화가 소개되어 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나토 공습으로 인해 국방, 정보, 경찰본부 등이 모두 파괴되자 중국에 세르비아 정보요원들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도 매우 혼란한 상황에 옐친 대통령에서 푸틴 대통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코소보 전쟁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장쩌민 주석은 당시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사관 지하에 당시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는 중국이 대사관으로 넘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국의 주권을 걸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난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전에 이미 밀로세비치와 협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세르비아 측과 공조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대사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요격했다면 중국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사관이라고 하는 곳은 이미 그 나라의 영역이다. 미국이 이를 대사관을 공격했다면 상대가 누구든 대사관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그 나라의 주권에 해당되기 때문에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당시 중국은 티베트-신장위구르의 분리 문제로 인해 미국과 갈등이 첨예했던 상황이었고 이런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일환으로 미국과 나토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정보 요원들을 숨겨 주었던 것이다. 당초 나토군의 공습이 확대되자 중국 외교부는 장 쩌민에게 베오그라드에서 직원들을 철수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미 러시아 대사관도 철수한 상태였고 중국이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 개인적으로 밀로셰비치와의 걱별한 우정과 의리 등을 생각했었던듯 싶다. 장쩌민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남아 있으라 지시했다. 나토가 설마 국제법을 어기고 대사관을 폭격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상 외로 중국 대사관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폭격 직후 당시 주 세르비아 중국 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당했다"며 이는 국제법상 위법이라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중국 언론의 전파를 탔다. 북경대학에서는 세르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의 폭격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시민과 대학생 1만여 명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이며 미국은 살인자라고 외치며 반미 시위를 계속했다. 중국 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크게 분노하자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 이미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이 중국 대사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와 같은 정보를 캐치하고 오폭을 가장한 조준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인터넷이라던지, 개인 영상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일단 질러 놓고 오폭이라 주장하면서 조사 위원들을 나토 위원들로 구성해 꾸리고 현장을 조작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이는 명백한 조준이다. 당시 조달 이사회는 모든 인원들이 철수한 상황이었고 나토 공습 당시에 이사회 건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후일, 기밀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당시 조달 이사회 건물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느 누가 조달 이사회 건물을 표적으로 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증거를 내놓은 것을 보면 이는 이미 조준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이 중국 대사관에 대한 폭격은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절차상 미국은 중국에게 이같은 유고슬라비아 요원들의 스파이 행위의 증거를 들이밀고 이들을 내놓으라 협상을 할 수도 있었고 중국 정부에게 강한 경고를 하며 이들은 전범이니 넘겨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다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국답게 중국 대사관을 표적으로 삼고 대놓고 폭격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날 포격한 이들에 대한 국제 사법 처리는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아무도 이같은 전쟁 범죄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무마되었다. 국제적인 부분, 국제법적인 것으로 따져 보자면 이는 엄연한 국제법 위반에 국제형사재판소에 마땅히 재소되어야 하는 전쟁범죄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으로 지하실에 있던 세르비아 정보요원 10여명이 죽었는데도 중국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보도로는 세르비아인 14명이 부상이라 했지만 그 중 10명이 정보요원이고 나머지 4명은 대사관 직원인 세르비아 인일 것이다. 아마 중국도 이를 암묵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제 관계, 국제 사회는 이처럼 냉혹한 것이다. 국익을 위해,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 인간적 양심과 선악, 그리고 도덕성은 깔끔히 무시되고 때에 따라서 묻어둬야 할 진실이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냉혹한 현실을 잘 모른다. 물론 이 사건은 미국이 오폭을 사과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중국은 반미 시위가 번지는 것을 막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미국 또한 이 사건이 더욱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한 수 접은 이유는 뻔하다. 코소보 전쟁에 이어 중동 상황도 슬슬 좋지 않아지고 그러면서 중국과의 마찰은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도 당시만 해도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던 때였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막후에서 외교적으로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내가 내일 세르비아에서 나간 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세르비아를 방문한다. 아마 5월 7~8일 미국과 나토가 중국 대사관을 폭격했던 그 날짜에 맞출 것이다. 내가 왔던 이곳을 일주일 뒤, 시진핑이 와서 참배하고 부치치 대통령과 대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 주제는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핫한 주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난 시진핑보다 일주일 앞서 이곳을 먼저 방문해보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3
  • 실증사학의 대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와 일본식 실증사학의 비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증사학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가 주장하는 것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을 면밀히 보면 Wie es eigentlich gewesen, 즉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보고 판별하자는 것이다. 비판적인 방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사료 속에 담겨진 순수한 사실을 발견해 내는 것이 바로 실증사학의 기본 원리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사관을 다른 열강 국가들은 진정한 객관성이 아닌 제국주의적 지배 사관에 입각하여 객관적 타당성(Objective validity)을 내세우며 지배 논리를 정당화했다. 랑케가 개체적 사실들의 연관을 발전으로 파악했으며, 그 발전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지배적 이념을 통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이것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일본식의 실증사관(實證史觀)으로 불려 주관적으로 해석해 그로 인한 비도덕적 행위, 연구 윤리를 벗어난 행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관은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의 역사학자들이 랑케가 누군지, Empirical history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했었겠는가? 랑케가 주장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그 사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실증사학 연구 방법론은 크게 '사실해명중시' 또는 '사료비판중시'로 나뉘는데 사실해명중시론은 정확한 사료를 통해서 연역적 추론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방법을 말하고 사료비판중시론은 사료 외의 고고학적 근거, 기타 비(非) 사료적 요소로 발견적 또는 귀납적 추론으로 분석하는 방법인데 나는 둘 다 중시한다. 그래서 랑케가 주장했던 실증사학론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후대에 이용하고 주관적인 추론에 맞추는 자들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은 군국주의적 사관에 맞추어 이용되어 왔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점이 있다.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에 대하여 비교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그런 논의도 없었고 재야에서는 실증사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혼동하고 있으며 모두 제국주의적 학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직 연구방법론에 대해 학문적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은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라도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분리하여 비교하고 연구에 있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없어져야 할 것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실증이란, 확실한 고증과 토론과 논란을 통해 최대한 접근한 근거,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3요소 모두 맞물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5-03
  •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 사건의 테러범들이 가게 될 흑돌고래 교도소
    흑돌고래 교도소는 러시아의 최고등급 교도소로 카자흐스탄 국경과 가까운 지역인 오렌부르크 주에 위치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연방 정부 기관 - 오렌부르크 주 러시아 연방교정청 관할 제 6 교도소'(Исправительная колония № 6)이며, 흑돌고래 교도소라는 이름은 교도소에 있는 검은 돌고래 조형물에서 따온 별칭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악명 높은 교도소는 많고, 미국의 ADX 플로렌스 교도소 같은 슈퍼맥스급 교도소가 유명하지만, 흑돌고래 교도소는 그것과 비교가 불가능한 악명 높은 시설이다. 그 특성을 보면 사실상 이름만 교도소고 실제론 합법적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가석방 금지 무기수'들이 수용되는 곳이고 교화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사형제가 있는 나라였으면 진작 죽었을 인간 쓰레기 말종들과 국외 살인범들만 고르고 골라서 평생동안 종신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최초로 이 교도소가 세워진 것은 1745년으로 이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강제 노역소였으나 코사크의 푸가초프 농민 반란이 진압된 이후인 1773년부터 교도소로 변경되었으며, 2000년 11월부터 지금의 악명 높은 교도소가 되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흑돌고래 교도소는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이며 다른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들과 차별되는 이 교도소만의 특징이 있다. 이는 가석방 불허 무기징역을 받은 흉악한 범죄자만 수감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교도소가 전반적으로 인권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교화 자체를 포기하는 정도는 아닌데, 여기만큼은 애초부터 교도소 운영 기조에 교화라는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을 때까지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갱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로 보내지지 않는다. 실제 재심으로 감형되어 더 나은 교도소로 이감된 재소자가 5명 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물론 재심 조건이 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전부 뒤집어쓴 정말 억울한 사안이거나 실제로는 종범인데 주범의 죄까지 뒤집어 쓴 수준의 공범 정도가 아니라면 재심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재소자들의 악행은 극악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다. 단순 강간, 살인 따위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평균 5명 이상의 살인 전과, 그것도 유괴살인 혹은 아동 성폭행 정도 되어야 러시아에서도 보내는 곳이다. 즉, 김근식이나 조두순 같은 자들이 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은 식인을 하거나, 테러 조직이나 마피아 등의 두목인 경우도 체포 당하면 이곳으로 끌려오기도 한다. 실제로 일가족 5명을 몰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흉악범 니콜라이 아스탄코프와 같은 극악 살인마가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 러시아 체스판 연쇄살인사건의 살인마 알렉산드르 피추시킨 역시 이곳에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밝히기로는 여기가 아니라 그나마 흑돌고래 교도소보다 처우가 더 나은 흰올빼미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한다. 현재도 사형을 실시하는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러시아가 한국과 더불어 사형 유예국으로 분류되는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이 교도소에서는 교도관이 당당하게 "수감자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고 말한다. 즉, 이 감옥은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증오하며,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도관들도 사람인지라 재소자들을 상대로 모질게 행동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그런 거 없다. 물론 이런 반응에는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그냥 살인 정도로 잡혀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돌고래 교도소와 같은 높은 보안등급에 속하는 연방 교정청 교도소에서는 수감자를 호송하는 방식은 뒤로 수갑을 채운 후 이동시 허리를 90도로 굽혀 고개가 바닥을 보게 해서 이동하는데, 이는 교도소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수감자가 쉽게 반항하지 못하게 작은 것부터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좀 심하다 싶은 수감자는 눈가리개까지 씌우게 하고, 수감자를 이동시킬 때에는 항상 수감자 1인당 6명의 교도관들이 교도견과 같이 와서 데리고 다닌다. 이렇게까지 삼엄하게 호송하는 이유는 감방이 기본적으로 2인 1실이기 때문이다. 즉, 초극악 범죄자가 둘이나 있으므로 언제든지 감방에서 사건이 터질 수 있으며 수감자 한 명을 이동시킬 때는 나머지 한 명도 잘 감시해야 한다. 또한 감시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 놓는데, 죄수는 자살 방지 명목으로 이불을 머리까지 덮을 수도 없게 되어있다. 또한, 취침 시간 외의 시간에 침대에 누우면 바로 교도관들에게 구타 당한다. 추운 겨울철 한파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난방 기구는 없고 담요도 한 사람 당 한 장씩만 제공된다고 한다. 더운 여름철에도 선풍기 하나 없는 곳에서 폭염 무더위를 버텨야 한다. 다른 교도소들과 달리 이곳의 교도관들은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무장한다. 흑돌고래 교도소에서는 2선이긴 해도 군용 화기인 AKM 자동소총과 마카로프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극악무도한 수감자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매일 하루에 15분 간 죄수들을 간이 감방에 옮기고, 그 사이에 교도관들은 그 방을 샅샅이 수색하는 작업을 한다. 만약 죄수들이 밀반입품을 감방 내에 가지고 왔을 경우 그냥 놔두면 탈옥, 자해, 폭행, 살인 등을 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CCTV로 감시하고 있으며 목을 매거나 손목을 그으면 어떻게든 와서 살려둔다. 다만 흑돌고래 교도소 소장이 "자살하고 싶다면 교도관에게 심하게 대들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총으로 바로 쏴서 죽이는 게 아닌, 본보기로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분을 구타하거나 총으로 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최악의 경우 죽지도 못하고 고통만 받는 상태로 살게 된다. 그리고 이 수색을 매일 한다. 식사 역시 물과 빵과 수프밖에 없다. 독방에 갇힌 수용자들에겐 수프밖에 안 주며, 이것마저도 식당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용이나 똥을 퍼담을 때 쓸 것 같이 생긴 통에 담아 가져온 뒤, 개 밥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퍼담아서는 쓰레받기가 달린 장대로 감방 안에 밀어 넣어서 식사를 준다. 맛도 지독하게 없어서 굶어 죽지 않고자 억지로 먹어야 할 수준이라고 한다. 죄수들의 생명 유지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맛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교도소에 공동 묘지가 딸려 있고 수감자가 사망하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시신은 교도소 내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교도소 공동 묘지에 묻힌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이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는 영원한 무기징역을 받는 곳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초강력범들은 여기만큼은 안 들어가려고 있는 없는 돈을 죄다 퍼부어가며 특급 변호사들을 고용하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김근식, 조두순 같은 아동 성범죄자들은 러시아 같음 흑돌고래 교도소에서 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을 살텐데 한국은 참 좋은 나라다. 그런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감옥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2
  • 인도의 신목(神木) 숭배에 대하여
    신목에 대해 물어보니 아라케(Arake), 신당을 쉬라타(Shirata)라고 부른다. 아마 그 용어들은 비하르(Bihar) 방언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시대에 비하르 왕조라는 마가다 계열의 난다 왕조 직전의 왕조가 있었는데 이들은 티베트 계열의 민족이 세운 왕조였고 장기간 비하르 계통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유로 티베트어계의 언어가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목은 나무를 끼고 힌두교의 주신인 브라흐만, 시바, 비슈누, 크리슈나, 칼리, 하누만, 가네샤, 데바, 수리야, 인드라, 아이야나르 등의 신들을 숭배하기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하누만이 많이 나타남으로 인해 칼리와 하누만이 수호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개 나무를 끼고 영적인 기운을 느끼며 성직자가 영매를 맞이하는데 이를 불의 신인 수리야가 초나 꽃을 태워 재를 만들고 이것이 자신들의 조상을 만나게 하는 환각을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 재를 버부티(Berbuti)라고 하는데 성스러운 재라는 뜻이다. 보통 가정의 무사행복, 안녕, 그리고 부(富)와 특별히 이루고 싶은 소원을 비는데 대개 그 소원은 하누만이 듣고 이를 브라흐만에 전달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네팔과 가까운 접경 지역에는 브라흐만 대신 석가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특히 시바 신을 모신 신당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 드리고 간다. 브라만 신관이 고대 시대에는 주도했지만 이제는 일반 신관이 주도하여 제를 지낸다. 보통 신당 공중에는 바나나와 사과가 걸려있다. 바나나는 남성을 상징하고 사과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바나나로 축복하고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사과로 축복한다. 신목은 신당의 양쪽에 대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깃발이 매달려 있다. 이는 소도를 뜻하는 기둥으로 아샬리(Asahali)라 부른다. 즉, 아삼-비하르 방언에 의하면 아샬리는 신성한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쪽에 염소가 묶여 있는데 듣기론 내일 아침에 제사에 쓰일 소라는 것이다. 시바 신에게 바치는 염소는 주로 새끼 염소이며 그것도 어느 정도 성년 나이가 되가는 소를 잡는다. 시바 신이 파괴의 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살육을 좋아할 수 있을듯 싶다. 물론 대부분 힌두교인들은 소는 신성시여기지만 염소는 잡아도 되는 동물인듯 싶다. 일반인들 식탁에는 이 제물이 올라오지 않으며 염소를 먹는 풍습조차 없다. 신당에서 나타나는 칼리는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우주의 영원한 에너지와 관계가 있는 여신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칼리는 칼라(Kala)라는 일반 명사에서 왔는데 칼라는 검은색, 시간,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의 신을 뜻한다. 칼라카(Kalaka)는 "시간에 관계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힌디어의 보통 명사다. 칼리는 흔히 "검은 피부색을 가진 자" 또는 "파괴의 여신"으로 해석되며 이는 최초로 데바나가리 문자의 기초인 산스크리트어에 남아있다. 이러한 시기의 시작은 베다 아리아 시대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 들어가는 신상(神像)과 사상, 인더스의 신(神), 갠지스의 신과 사상이 통합된 베다 문명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 시대를 나는 문화, 언어 융합의 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이 때부터 비슈누, 하누만, 크리슈나, 시바, 파르바티, 나라시마, 락슈미 등의 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두르가, 바마나, 수리야, 파드마파니 등의 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카스트 제도가 도입되어 유목적 신분 제도가 성립되니 그 모든 출발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계의 아리아 인의 정복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2
  • 퉁구스어, 민족, 퉁구스족에 대한 이야기
    동호(東胡)는 동쪽의 호족(胡族)으로 유목민족이다. 당시 한(漢)나라나 진(秦)나라 등은 호(胡)와 이(夷)의 개념을 아마도 동일한 족속으로 보았을 듯 하다. 이는 후대에 적(狄), 융(戎), 이(夷), 호(胡)를 같은 오랑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 서, 남, 북 방위에 따라서 오랑캐를 뜻하는 한자 표기만이 달라졌을 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족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민족들은 서로간의 치열한 전쟁이 있었을지라도 같은 계통의 민족이 대를 이어 자리를 잡았으며 북방도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흉노-선비-돌궐-거란처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민족이 그 민족이었다. 흉노의 뒤를 이어 몽골고원이나 만주 지역에 나타난 민족들 대부분 "흉노의 별종이다." 라는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글귀처럼 흉노와는 다른 종자지만 그럼에도 흉노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이들과 흉노의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은 달라진게 없었다. 어느 한 민족이 쇠퇴하면 또 다른 민족 중 그 한 민족에 복속되었던 세력이 성장하여 그 자리를 차고 앉았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청(淸)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호는 흉노에게 패망하였지만 동쪽으로 패주하여 두 민족으로 갈라진다. 이러한 동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선비 6부 중 하나인 우문부(宇文部)는 시라무렌이라 부르는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에 정착했다. 모용선비의 모용황이 우문선비를 공격하자 우문선비는 패배하여 송막(松漠) 사이 땅으로 도망가서 정착하였고 이들이 통합되어 거란이 되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웠고 요나라누 금나라 멸망하자 몽골고원에 자리 잡고 케레이트(Kereit)의 부족을 흡수했다. 케레이트(Kereyid~Geryid)라는 이름은 케레이(Kereyi~Gereyi)의 복수형으로 라시드 앗 딘의『집사(集史)』에 따르면,「케레이」의 의미는 그 선조의 얼굴 색이 검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까마귀"의 몽골어인 케리예(keriy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케레이트의 옹칸은 테무친을 맞아들여 사위로 삼았고 이후 케레이트는 몽골제국에 멸망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뒤 동호는 몽골제국, 원(元)나라가 되어 중국을 통치했고 이후 청나라 때는 만주족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만들었고 몽문과 만문의 형태가 같고 발음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음에 따라 이를 두고 언어학자들이 동북아시아의 언어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알타이’라는 명칭은 이들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이 분열하기 전의 원주지가 알타이산맥 부근이었다는 구스타프 람스테드와 포페의 가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알타이어계는 크게 투르크 · 몽골 · 퉁구스의 세 어군(語群)으로 나뉘어진다. 람스테드는 알타이 제민족의 원주지를 흥안령(興安嶺) 부근으로 추정하고 약 4, 000년 전 퉁구스인과 한국인의 선조는 동쪽, 몽고인과 투르크인은 그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포페는 알타이 공통 조어에서 투르크어와 몽골어 · 만주, 퉁구스어가 분열하고, 후자에서 다시 몽골어와 만주, 퉁구스어가 분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한국어는 알타이 조어에서 제일 먼저 직접 분열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퉁구스는 몽골어와 만주어로 한자인 동호(東胡)를 발음한 말이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있어 동호=퉁구스의 역사가 지대하다는 것을 서양 언어학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알타이 범주에 집어 넣음으로써 중앙아시아, 몽골, 동북아시아까지 한번에 묶어 규정했다. 그러나 람스테드의 주장대로 알타이 민족의 원주지가 흥안령 부근이라면 서쪽으로 뻗어나간 알타이어로 명칭을 붙이면 안되는 것이다. 기원지가 동북아시아 흥안령인데 중앙아시아, 몽골, 동북아시아 언어는 왜 우랄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인가? 이들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언어의 기원지가 동북아시아로 인정했던 람스테드와 포페는 그 언어의 명칭도 동북아시아 이름이자 가장 고대, 중세, 근대까지 번성했던 동호어, 혹은 퉁구스어를 제민족 언어의 중심으로 명명했어야 했다. 퉁구스어에서 알타이어, 투르크어, 몽골어 세 어군으로 나뉘고 그 외의 부족들의 언어들을 나열해야 했다. 모든 역사의 중심이 유라시아로 바뀌면 다음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그것은 아시아와 유럽 각국이 혈연적 종족 체계, 언어 체계에 대한 재연구를 해서 편향적이지 않은 채계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1
  • 포르투갈의 고인돌 문화,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하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로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만이 유럽 문명의 뿌리는 아니다. 그리스 인들이 '갈라타이' '켈트이', 로마인들이 '갈리아'라고 불렀던 켈트인은 유럽 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갈리아 원정은 켈트 문화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후 게르만 민족의 유럽 지배는 이 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북부에 있는 갈라시아와 포르투 지역은 로마인의 지배 이전에 켈트 문화의 독자적인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경부터는 로마 교회의 적극적인 포교로 이 지역들의 켈트 사회는 기독교화되었고, 그 결과 독자적인 켈트식 카톨릭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켈트 문화는 후에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 건너가 명맥을 유지했고 11세기부터 유럽 각지에 전파된 로마네스크 미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켈트인은 유럽의 역사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켈트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면, 도대체 켈트인의 유적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고전 문화는 견고한 '돌의 문화'로, 자신들의 문화를 돌로 남겨놓았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켈트의 문화는 이러한 정형화된 문화와는 달랐다. 자연을 숭배했던 켈트인들은 '나무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축 유산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었는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19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 지역, 현재의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의 스페인 지역 및 아스투리아스 서부 및 레온 북부 지역에서 동기 시대 B.C 9 세기경의 끝에서 로마 문화가 창궐한 B.C 1 세기 경에 포함될 때까지 존재했던 켈트 문화인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가 그것이다. 특히 산타 테클라산에 있는 갈리시아 요새에서 발굴(發掘)된 켈트 상징물인 트리스켈(Triskel)이 다수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는 다수의 고인돌과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포르투 시내 곳곳의 서점에는 이러한 포르투갈 고대 유적에 대한 서책이 판매되고 있고 포르투 역사박물관에도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1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