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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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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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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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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9
  • 특색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문화
    루마니아 인종들은 민족성 자체가 밝다. 그리고 매우 긍정적이고 성격은 다혈질이며 루마니아 인들은 전반적으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어디를 가든 가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는 음주가무의 천국인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전통은 가수나 악단을 불러 밤새도록 춤추고 먹고 마시는 것이 보통이며,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악단이 집집마다 연주하며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루마니아 특유의 국민성이다. 어찌나 춤을 많이 추는지 장거리 고속버스 안에서도 관광버스처럼 춤추고 노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이다. 루마니아는 국민 종교인 정교에 대한 종교심은 깊은 편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와는 달리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할로윈 파티 귀신분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제법 많은 것에 비하면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당장 국민 1인당 술 소비량 부터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마녀가 직업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드라큘라부터가 사실상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국민 귀신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컬러 TV의 도입이 가장 늦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안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나(Televiziunea Română)의 TV방송 시작은 1956년에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TV 송출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컬러 방송은 북한보다도 10년이나 늦은 1983년부터 송출되었다. 그마저도 컬러 방송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도 이후에서야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모두 흑백방송으로 채워진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컬러 중계는 모두 외국이나 서유럽에서 송출된 것이고 루마니아 국영으로 방송된 것들은 모두 흑백이라 보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방송이 위주였고 그나마 1980년대에는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방송시간을 평일 2시간, 주말 3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TV 채널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이면서 사실상의 국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외국 프로그램도 상당량 수입하였는데 특히 달라스나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같은 미국 TV프로그램도 편성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반소감정이 있고 친중 및 친북을 했던 국가였기에 생각보다 소련의 방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북한의 채널들을 많이 수입했었다고 한다. 필자의 루마니아 지인들의 당시 회상을 듣다보면 북한 김일성의 교시도 그대로 송출이 되어 자신들도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좋아하고 그의 정책 모델을 상당수 따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루마니아 TVR이 BBC와 제휴를 맺으면서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정도로 제법 선진적인 방송을 도입했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침체가 이어지자 이 방송들조차도 거의 방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조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TV 채널을 줄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국 TV 채널을 버리고 이웃인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헝가리의 TV 방송을 몰래 시청했고, 불가리아 TV 편성 정보도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TV 만화와 불가리아 영화도 이 시기 루마니아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으며 불가리아의 당시 연예인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었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국영방송을 공영방송으로 전환하고 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에서도 하던 광고방송을 그동안 하지 않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광고, CF 방송을 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시간도 다시 확대했으며, 민영방송을 허용하면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송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많아 낙하산 문제라든가 정치 언론의 유착 문제 등이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매우 재미있어지고 다채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마니아의 방송 환경은 대만과도 비슷한데 시청률 10%를 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고 자국의 지상파 채널은 시청률이 더 낮아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존폐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도 드라마, 터키 드라마, 텔레노벨라 등 다양한 외국 드라마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되었고 K-POP도 흥행을 타면서 루마니아의 지상파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 현재는 시청률이 다른 케이블 방송 못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배우자 간 결합' 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8년 10월 6일과 7일에 실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을 통해 동성 결혼의 허용을 막으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 지지파로는 보수성향의 비정부 기구인 '가족 연대' 와 루마니아 정교회 등이 대표적으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예배 후 투표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마니아에서 동성결혼은 현재도 불법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헌법상 결혼이 '배우자 간 결합'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리 결혼 개념을 '남녀간 결합'으로 못박아 놓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율이 최소 30%를 넘어야 하는데 결국 투표율이 5.72%로 저조해 자연히 무산되었다. 당시 루마니아 인들에게 있어 남녀 간의 결혼이나 결합은 당연한데 굳이 이런 것까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투표율이 턱없이 낮았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의하면 루마니아는 2월, 3월, 7월, 8월, 9월, 10월에는 공휴일이 전혀 없으며 대체휴일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면 12월 1일 국경절 이후 1월 24일 통일의 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게 되는데 이는 루마니아 인들은 열심히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빚어진 차우셰스쿠의 노동 정책의 반영 때문이다. 루마니아 인들의 정서상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다는 것은 당연한 문화라고 보기에 이 공휴일 많지 않은 노동 정책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가장 공휴일이 적은 나라가 루마니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룩하게 쉬어야 하는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가는데 소금 광산을 개조한 살리나 투르다(Salina Turda)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놀이공원으로 무려 지하 120m에 달한다. 매 일요일마다 살리나 투르다 같은 놀이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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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바라보는 몰도바의 입장
    몰도바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두 나라 간의 드니스트르 강을 중심으로 상호교류는 매우 활발하다. 2017년 1월 4일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 제2의 도시 벤데르에서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과 바딤 크라스노셀스키 트란스니스트리아 대통령이 양측 역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8년에 벌어진 유엔 총회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파견된 모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친 서방 성향의 몰도바 정부가 주도하여 조지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캐나다 등이 함께 마련한 결의 안에 대해 찬반 표결을 벌였고 투표에 참여한 162개국 가운데 64개국이 찬성표, 15개국이 반대표를 던졌으며 83개국은 기권함으로써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옛 소련 국가인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 등이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쿠바 등이었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트란스니스트리아로부터 러시아 평화유지군을 철수하도록 규정한 유엔 총회 결의는 이 지역 분쟁 해결에 대해 훼손할 우려가 있다면서 몰도바가 제안한 결의 안은 아주 증오스럽고 위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몰도바 지도부에서도 유엔 총회 결의에 대해 통일된 견해가 없다면서 러시아는 이 결의를 반러 정서에 기대하여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얻으려는 몰도바 내 특정 정치 세력의 명백한 선동주의적 행보로 간주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배경에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있다며 미국과 서구권도 한데 몰아 비난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몰도바 총리 측이 유엔 표결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다른 반러 행보를 취했다면서 집권 연정은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 흔들린 국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무대를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6년 11월 결선 투표 끝에 대통령에 선출된 친러시아주의자 도돈은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는 파벨 필립 총리 내각과 줄곧 갈등을 빚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파벨 필립 총리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총리가 이와 같은 독단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은 내각책임제를 통치 체제의 근간으로 채택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총리가 운영하고 대통령은 제한적 권한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과 함께 지난 2014년 6월, 파벨 필립 총리 정권이 EU와 FTA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유럽화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2008년 조지아로부터 분리 및 독립을 선포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두 나라밖에 없으며 이 두 나라의 독립도 러시아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는 1992년 몰도바와 맺은 협정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 고작 수 천명의 군대가 몰도바와 유럽에서는 위협이 된다고 철수를 촉구하는 것이다. 한편 트란스니스트리아 독립 정부도 러시아군 철수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서구와 몰도바 총리 정부의 결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백히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서방 몰도바 총리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의 결의를 근거로 러시아군 철수 조치를 강행시키려 할 경우 트란스니스트리아 내 러시아인들이 반발하면서 2014년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된 것과 유사한 '제2의 크림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은 이와 같은 결정이 취소되었지만 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 사태는 우크라이나-돈바스 사태 못지 않은 또 다른 동유럽의 새로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1일 중립 지역에 대한 차량 번호판이 도입이 러시아의 주도로 유엔에서 주최되어 가결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은 몰도바를 포함한 다른 국가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5년 몰도바의 차량 번호판 체계를 따르면서 글꼴이 다르고 몰도바 국가 표식이 없는 대신 "MD" 스티커로 몰도바 차량임을 표시하는 새로운 번호판이 도입되었다. 해당 번호판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외부에서는 몰도바의 차량으로 취급받으며, 2021년 9월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차량의 입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란스니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몰도바의 MD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정부를 달래면서 러시아와 연결될 수 있는 조치였음을 상기시켜 준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친서방 성향의 마이아 산두가 당선되면서 갈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두 대통령은 당선 직후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와 다른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몰도바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일부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몰도바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자국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막지 않고 있다. 다만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은 친서방 몰도바 인사가 아닌 친러 몰도바를 인사를 찍으며 자신들의 현 상황을 우선 유지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친러 성향의 몰도바 후보자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방문해 유세하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미승인국이면서 내륙국이기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몰도바의 1인당 GDP가 유럽 최하로 나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인 것도 있다. 소련시절에는 발전된 공업 지대였지만 분리독립 선언 이후로 내륙국인데다가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까지 겹쳐서 낙후되어 버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경제적인 지원을 보내주고는 있지만 미승인국이라 대규모 지원을 보내주기에도 외교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공장을 건설한다 해도 수출을 하거나 러시아로 물자를 공급하려면 반드시 우크라이나를 거쳐야 되다 보니 그 효과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의 사실상 주 소득원은 러시아 등으로 가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러시아 루블을 자국에 송금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외화벌이가 국가의 주 수입원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몰도바가 EU 가입을 선언하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은 이미 소련과 분리된 이후에 했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수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러시아의 위협이 가속화 된다 생각한 몰도바에서 EU 가입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에 적극 협력하겠다 밝혔고 자국에 러시아군 1,500명이 주둔한 상태라 이들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변수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몰도바의 군대는 예비군까지 합쳐 8만 명도 되지 않아 러시아군 1,500명의 숫자가 매우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우크라이나 측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가는 물류를 끊어 버리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고립되었다. 그래서 몰도바에게 인도적인 물자 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까지 왔다. 러시아도 오데사와 미콜라이프도 아직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라, 몰도바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완전히 멸망 혹은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다. 러시아 군이 수송기로 물자를 실어날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몰도바에 대한 경제 원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수송기가 자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왕래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공망 체계가 붕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5월 9일, 러시아 전승기념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수도 티라스폴에서는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어 나치 독일의 축출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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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됐지만 북한의 국가체계를 세워준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유지로 자리 잡은 고려인들
    대조국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군은 그곳의 조선인들과 함께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곳의 조선인들은 국가 건설은커녕 행정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일제 부역자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일부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구역 당ㆍ공산주의청년동맹ㆍ콜호즈(집단농장)ㆍ기업체ㆍ교육기관ㆍ군 등에서 일하며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1945년부터 49년까지 약 500명의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 하에서 민족적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민이었다. 북한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이들은 자신이 ‘파견’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귀향’한다고 생각했을까?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련에서 포시에트 구역 공산청년동맹(콤소몰) 비서로 일한 바 있는 허가이는 1946년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의 규약과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당 중앙위원회 제1 비서와 부위원장에까지 오른 조선로동당의 산파였다. 사마르칸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기석복은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의 주필로 일하며 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찬가지로 타슈겐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유성훈은 내각 간부학교 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옴스크의 고리키사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조기천은 1947년 서사시 <백두산>을 발표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이 되었다. 소련 중앙은행 산하 재정대학을 졸업하고 동 은행 포시에트 지부장을 지낸 김찬은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일하면서 1947년 화폐개혁을 주도했다. 로스토프의 운수대학에서 철도운수를 전공한 박의완은 1948년 초대 내각의 교통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한 리동화는 조선인민군 군의국장을 맡아 한국전쟁 시기 야전병원에서 동분서주하였다. 한국전쟁 때 북측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석한 남일 또한 잘 알려진 파북 고려인 중 한 사람이다. 콜호즈에서 다른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에 이르는 쌀을 생산해 내었고, 일부 작업반들은 심지어 8톤까지도 생산하면서 농업적 성과와 김병화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소련 당국이 1948년에 처음으로 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이후 1951년에는 콜호즈 건설과 목화 및 벼 수확고의 성과에 따른 결과로 다시 레닌훈장과 ‘낫과 망치’ 금메달을 받았다. 이곳 콜호즈는 강제이주라는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갔던 고려인 동포사회의 희망이셨다. 소련 당시 고려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즈베키스탄 콜호즈(집단농장)은 20개에 달했는데 한결같이 우즈베키스탄인들에게 ‘백만장자’ 콜호즈로 불리우며 부러움 샀다고 한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에는 도시지역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이 거의 없었지만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콜호즈들은 자체 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생산해내어 콜호즈 전체에 가로등까지 설치해서 우즈베키스탄 인들이 단체 견학을 올 정도로 발전되었다.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이 김병화 선생에게 3번째로 노동영웅을 수여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이 3번에 거쳐서 노동영웅을 수여받기보다는 우즈베키스탄사람이 상을 수여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며 사양한 적이 있다. 이것은 선생의 겸손과 고려인 동포, 우즈베키스탄인 사이의 화합과 단합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59년에 당시 베트남 호치민 주석이 소련 방문 시에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 선생의 콜호즈를 방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서기장 등 소련의 정치지도자와 사회주의권의 다른 지도자들도 자주 농장을 방문하여 선생과 고려인 농장원들의 놀라운 성과를 살펴보는 일정을 가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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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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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꼴까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1886)
    그는 힌두교의 개혁가로 성자이자 인도의 영혼이라고도 한다. 그는 꼴까타 교외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브라만으로 벵갈어를 제외하곤 모든 언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정규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19세에 닥신네스와르 칼리 사원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칼리 여신이 살아있다 믿었고 명상한지 1년만에 신이 살아있음을 체험했다 한다. 너무 열심히 순수하게 숭배했기 때문에 때때로 기도에 열중할 때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후에 숲속에 들어가 12년 동안의 고행을 하여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명상과 고행을 중시하는 열렬한 힌두 비슈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힌두교 뿐 아니라 이슬람과 기독교도 섭렵하게 되었고 이해 또한 깊었으며 종교의 진리는 결국 각 종교의 구별을 초월한 곳에 귀결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인도에서 유일한 종교 다원주의자였고 소박하게 닥신네스와르 사원 한 켠에서 사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한다. 이 때 신을 체험한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방과 사원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시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신 거기 끝없이 지즈냐나(지혜)의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하여 파도 쳐오는 저 즈냐나뿐이었다. 잠시 후, 그 바다의 파도들은 나에게 몰려와서 내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너무나 강렬한 이 충격으로 하여 나는 의식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후 칼리 사원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인 체험을 했다. “내 몸과 마음이 경험한 영적인 세계의 4분의 1만 경험하더라도 보통사람 같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날들의 대부분이 영원한 어머니(칼리 여신)의 성스러운 비전에 대한 법열로 지나가버렸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졸음조차도 내 눈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모든 감각이 나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리고 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영원한 어머니로부터 내 몸 쪽으로 마음이 거꾸로 돌아올 때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의 쿤달리니 각성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발에서 머리로 진동하는 감각과 함께 무엇인가가 상승했다. 이 감각이 대뇌에 이르기 전에는 아직 의식의 불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뇌에 이르는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시각과 청각은 정지해버렸고, 말하는 것조차 전혀 불가능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이 신비로운 영력이 여기까지, 또는 여기까지(자신의 가슴과 목을 가리키며) 차올라 올 때의 느낌은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영력이 이곳을 넘어가자(목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마음과 느낌은 더 이상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미간의 반대쪽 여섯 번째 차크라를 가리키며) 마음이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신의 비전을 경험하면서 사마디에 들어갔다. 여기 신과 나 사이는 오직 엷은 막이 쳐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엷은 막을 통해서 그 신을 느낄 수 있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말년에 후두암을 앓다가 죽었다. 이 때 한 학자가 그에게 왜 어머니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이 육체를 완전히 잊게 된다. 그래서 육체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목 어디엔가에 상처가 난, 인간 육체에 쌓인 무한한 영혼이다.” 어느 날, 그는 칼리 사원의 강으로 난 목욕통 돌계단에 서 있었다. 그때 두 개의 조각배가 강에서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한쪽 배에 탄 사공이 다른 쪽 배에 탄 사공의 등을 노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라마크리슈나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을 듣고 그의 조카인 흐리다이가 달려가 보니 그의 등에는 심한 매 자국이 나 있었다고 한다.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 인성이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요점은 ‘나’와 ‘너’의 구별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이 때의 ‘너’는 자신을 제외한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라마크리슈나는 그 무분별로 인하여 뱃사공이 노로 맞는 것을 보고 고통을 느끼는 차원에까지 이르렀다 인도 5파 철학의 권위자인 나라얀 샤스트리와 베단타와 니야야 철학의 권위자인 파드말로챤은 라마크리슈나를 신의 화신으로 인정했다. 동시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성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경전에 기록된 진리의 육화임에 틀림없다.” 라마크리슈나는 "힌두는 물을 빠니, 무슬림은 잘, 영국인들은 워터라고 한다. 이 3개의 말은 다르지만 물이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다. 같은 이치로 어떤이는 하느님, 어떤이는 알라, 어떤 이는 라마, 칼리, 브라마로 부를 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힌두와 이슬람을 화해시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그는 성자의 반열에 올라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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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5
  • 다양성의 간극!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
    동네 주민을 위해 오백만 원을 가지고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오백만 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돈일 수도 있고 적은 돈일 수도 있다. 나는 동네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초청하려는 예술인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개인 독주회를 개최하는 수준 높은 연주자들이었다. 연주자 세 명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그들을 초청하는데 오백만 원은 매우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런 연주자들을 잘 아는 분의 도움으로 오백만 원의 경비로 동네 공원에서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동네 축제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예상하지 못한 반발이 있었다. “왜 오백만 원을 예술인들에게 주는가?” “오백만 원을 가지고 주민들이 만드는 축제를 기획하면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할 수 있다.” “왜 내가 외국 여행가는 날 개최하느냐?” 심지어 동네에서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제시했다. “그 돈이면 우리도 멋있게 행사를 꾸려나갈 수 있다.” 여러 가지의 반대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반대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었다.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는 날짜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내가 계획했던 그 날이 우리 단체의 한 명이 외국 여행을 가고 없는 날이었다. 그는 날짜를 변경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도 그의 이야기를 존중해서 예술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스케줄 때문에 일정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날짜로 강행하고자 하였다.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의 내심은 이번 행사에 행정관료나 정치인들도 초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중심이 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이 행사의 취지가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바람잡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었던 마음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도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듯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의 기획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술인과 함께라는 나의 기획의 핵심인 예술인들도 사실은 동네 주민이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반대 논리에 온종일 답글로 대응했다. 그것도 어느 시간이 지나니 지치게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중이 절을 바꾸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결단했다. 내가 떠나기로 했다. “알아서들 잘하세요!” 자신들이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다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주민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나 역시 주민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다만 주민을 위한다는 말에 있어서 그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또한 나는 행사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을 원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행정관료나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자기 얼굴을 내보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떤 단체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단체는 그런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모두 읽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짐작할 뿐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 나오는 전경과 후경의 그림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이리 보면 사람 얼굴이고 저리 보면 컵인 것과 유사했다. 그 관점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하루를 시달리고 나니 그 일들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기로 결단했던 것이었다. 나의 결단을 뒤늦게 알게 된 한 의원이 전화가 왔다. “위원장님! 너무 아쉬워요. 위원장님이 계셔서 그나마 동네의 예술인들과 주민들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왔는데...”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지요! 이제는 말 많은 것이 싫어졌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봤다. “말 많은 것이 싫다.” 그렇다. 이제는 정말로 말 많은 것이 싫어졌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졌다. 내가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하나?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도피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를 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했다. 나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처럼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나를 버릴 수 있는 나를 찾는 것이 참된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천여 년 전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영원한 것은 없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조금 전의 나와는 다르다. 그렇게 매 순간 변화하는 무상의 나가 나에 집착한다는 것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여기 이 순간의 깨달음이 소중하다. 그것이 게슈탈트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최근의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의 입에서 그리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잘 해결하시지 그랬어요!” 아내의 말에 수긍이 갔다. 잘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과 인내라는 노력이 필요했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이 머릿속에서는 쉬운데, 현실에서 서로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아내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부처는 아마도 아상을 가지라고 말했을 껄요?” 서로 웃고 말았다. 현실 정치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가 현실 정치에서 실행된다면 우리는 극락에서 살게 될 텐데, 그것이 안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창밖으로 비 온 뒤의 회색빛 구름 사이로 푸른색 하늘이 웃는 모습을 하고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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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4월 24일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선거일 -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최대 단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에 대하여
    내일 24일 북마케도니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다. 분석이 마무리 되면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선거와 그리스와 영토 분쟁 및 아직도 들끓고 있는 국호 문제에 관해 정리해 올려볼까 한다.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최대 단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 이 민족주의 조직은 1893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트라키아 영토인 테살로니키에서 설립된 "마케도니아인 혁명 기구"가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직은 이후, 불가리아 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조직은 마케도니아를 독립된 영역으로 간주하였기에 마케도니아의 주민들은 어떤 민족인지에 상관 없이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흐리스토 타타르체프(Hristo Tatarchev)가 설립한 이 조직은 타타르체프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최초의 조직 명칭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라고 하였다.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설립 당시에 5개의 기본 원칙을 마련했다. ① 혁명 기구는 마케도니아에서 조직되고 활동해야 한다. 그리스인, 세르비아인은 혁명 기구를 불가리아 정부의 도구로 삼을 수 없다. ② 혁명 기구의 설립자는 마케도니아에 거주하는 주민이어야 한다. ③ 혁명 기구의 정치 목표는 마케도니아의 자치여야 한다. ④ 혁명 기구는 비밀로 독립한 것이 다른 독립 국가 정부와의 관련성이 없어야 한다. ⑤ 불가리아, 불가리아 사회에 거주하는 마케도니아인의 이민은 마케도니아의 혁명 투쟁에 대한 정신적, 물적 지원만 부여해야 한다. 1896년, 혹은 1897년에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혁명위원회라는 비공식적 명칭으로 활동했다. 1903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린덴 봉기(Ilinden Uprising)를 일으키면서 크루셰보(Крушево)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게 된다. 일린덴 봉기는 한국의 3.1절 운동과 비슷한 비폭력 봉기였다. 이 봉기 자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대의 진압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에서는 일린덴 봉기를 국가와 민족, 종교에 대한 상징적인 투쟁이자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이 실패로 끝난 비폭력 봉기는 마케도니아 민족 독립 투쟁의 시초가 되었다. 일렌덴 비폭력 운동을 주도한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혁명위원회는 오스만투르크의 경찰들이 끈질기게 추적하자 1905년에 내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 조직은 소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고 그와 함께 체결된 불평동 조약인 뇌이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를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내주었으며 혁명 기구 또한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등으로 분류되어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조직은 분열되었다.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는 1922년부터 1934년 사이에 그리스로 편입된 서부 트라키아, 스트루마 강, 로도피 산맥을 거점으로 하여 비폭력적인 혁명 조직에서 무장 투쟁 조직으로 전환되어 활동하게 된다. 1920년에 설립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위성 조직이었던 내부 서부 실지 혁명 기구를 설립하게 된다. 이 단체는 불가리아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편입된 디미트로프그라드, 보실레그라드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1923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화해를 모색하고 이들의 관계에 안정화를 꾀하던 불가리아의 알렉산데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를 두고 그가 사회주의자로써 불가리아 민족의 위험스러운 적으로 보고 그를 체포해 고문 끝에 살해했다. 이와 같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코민테른과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혁명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결국 이들은 그토록 증오하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험악한 관계를 정리하고 서로 연대를 구축해 통일 마케도니아 혁명 운동을 정립하기 위해 논의했다. 소련은 이와 같은 계획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어떠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1925년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주요 인사들이 살해되면서 좌우 진영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좌파 계열 인사들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를 결성하면서 공산주의 단체와의 연계 활동을 전개했다. 이반 미하일로프(Ivan Mihailov)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수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1934년 10월 9일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에서 활동하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데르 1세 국왕, 프랑스의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을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켜 이 단체를 유럽 내 테러단체로 인정되어 서유럽 민족주의 단체들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거리를 두게 된다. 1941년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군대는 마케도니아 바르다르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로부터 "해방군"으로 여겨졌고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구성원들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의 통치 기구였던 불가리아 활동 위원회를 창설하고 여기에 크게 관여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방침에 반대하는 불가리아 군대를 점령군으로 여기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1943년에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반(反) 불가리아 저항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는 이와 같은 방침을 포기했다. 1944년 8월 2일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의 구성원들이 유고슬라비아의 프로호르 프친스키 수도원(Prohor Pčinjski)에서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 반(反) 파시스트의 첫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요시프 티토에 의해 수립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구성국 가운데 하나인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에 관여했던 것이다.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체제에 들어가면서 존재하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가 부활할 수 있는 방법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불가리아, 북마케도니아에서 정당 형식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Вна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 - 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за македонско национално единство)이 창립되었고 불가리아에서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불가리아 국민운동(ВМРО – Българско национално движение)이 1991년 소피아에서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불가리아 국민운동 정당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를 계승한 정당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현대적인 민족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보수주의 애국 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 친러 세력의 중추이기도 하다. 이 정당은 불가리아 민족의 정신적 통합, 범불가리아 민족주의 운동을 지향하고 있고 불가리아 민족주의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는 아주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을 포함하는 대(大) 불가리아 연합의 실현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의 권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터키인이나 롬인이라 불리는 집시, 그리고 불가리아 정교회를 제외한 비(非) 전통적인 종교 신자와는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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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지난 17일 크로아티아 총선에 대한 분석 - 친서방 정당인 여당의 승리와 새로운 다크호스의 등장
    이번 크로아티아의 선거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2000년 선거 이후 무려 24년만에 실시되는 평일 선거였던데다 대통령인 조란 밀라노비치(Zoran Milanović)가 대통령 직함을 내려 놓고 스스로 사민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대통령이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헤프닝을 벌인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2000년 개헌 이후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의 당적 소유를 금지하고 있다. 밀라노비치는 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3월 18일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는 밀라노비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지 않는 한 후보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밀라노비치는 이러한 헌재의 판결에 불복하고 사실상 총리 후보로 행세하면서 사민당 주도 정의의 물결 연합 유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정당한 탄핵 사유가 될 수 있기에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과 그의 정적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가 밀라노비치의 탄핵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선거는 예상대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주도하는 HDZ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현직 총리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의 3기 정부가 출범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 되었자만 HDZ 연합이 집권에 필요한 단독 과반인 76석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밀라노비치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은 어려울 전망이다. 그래서 플렌코비치 총리는 4월 18일부터 3기 정부 구성을 위한 연정 협상에 나서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HDZ 집권 후 2018년부터 연이어 부패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은데다 국민들 상당수가 크로아티아 사민당을 더 싫어했기 때문에 HDZ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 많았다. 즉, 사민당이든, HDZ든 둘 다 싫은데 그나마 덜 싫은 쪽으로 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더불어 EU와 나토를 비판한 국수주의 포퓰리즘 정당인 사민당이 2위로 부상하였지만 HDZ에 실망하는 국민들 또한 늘어나면서 사민당에 표를 던진 결과이기도 하다. 더불어 고물가로 인해 민생 경제가 어려워지고, 집권 세력의 부패 범죄에 대한 분노가 양측의 대립을 팽팽하게 했다는 분석 또한 나타나고 있다. 크로아티아 사민당이 이끄는 범좌파 야권 연대인 정의의 물결은 고작 2석을 늘리는데 그쳤다. 반대로 HDZ는 전체 의석 151석 중 60석을 차지했다. HDZ는 지난 2020년 총선에서는 66석을 차지했지만, 6석 줄어들었다. 이는 제3의 정당,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했다는 얘기다. 물론 사민당은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무시하고 탄핵을 각오하면서 유세에 나섰지만 목표였던 정권 교체에 이르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사민당의 대표인 페자 그르빈(Peja Grvin)은 더 나은 결과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소감을 밝힌 뒤, 우선 야당 정부 구성 관련한 회담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HDZ는 좌파 혹은 우파 정당과 과반인 76석을 확보해야 내각을 꾸릴 수 있다. 원래 HDZ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갑자기 사민당 후보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판세가 요동쳤다. 1991년 독립 이래 한 번도 권력을 내준 적 없는 HDZ, 현 정권에 대한 군중들의 심판론까지 작동한 것이다. HDZ가 집권하면서 크로아티아의 EU 가입과 유로화 도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극도의 쇠락을 보인 크로아티아 경제에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이 때만 해도 EU는 지금의 EU와 달리 매우 정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무려 30명의 장관이 임기 중에 부패로 사임했다. 더불어 제조업이 매우 약해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와 더불어 독일을 중심으로 한, EU 보조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율, 지나치게 의존율 높은 관광업, 이와 같은 취약한 경제 구조에 대한 개혁을 이끌어 내지 못하여 국민들의 신뢰도 점차 잃어갔다.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은 크로아티아 경제 특성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와 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는 유권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한 HDZ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괴뢰 정부에 부역한 이들이 많고 우스타샤(Ustaša) 파시즘 출신들이 많다. 우스타샤 출신자들, 이들의 후예들은 대를 이어 크로아티아 정계를 장악해왔고 온갖 비리와 부패의 주범이 됐다. 나치의 부역한 이들이 처벌받지 않고 버젓이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어도 EU는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발칸 지역의 나치들에 대한 청산률은 2~30%에 불과했는데 이처럼 낮은 청산률과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에도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EU 또한 나치와 공범이나 다를 바 없다. 나치의 절멸을 천명한 러시아가 EU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비판해왔던 것이다.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현 HDZ 정권의 부패 정치인들과 경제 실정을 비판하면서 자국 경제에 부담을 주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꾸준히 반대해왔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내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대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개선을 촉구했었다. 이러한 밀라노비치의 행동에 러시아는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했다.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EU, 미국, 나토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중에 하나다. 크로아티아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이후 서방 동맹에 대한 확고한 지지 의사는 모든 정당에 걸쳐 내려진 합의였지만, 밀라노비치는 이를 뒤집은 셈이다. 플렌코비치 총리는 그 이전에도 밀라노비치 대통령의 친러시아 정책을 반복적으로 비난해왔다. 그러나 밀라노비치의 이와 같은 정치적 스탠스는 크로아티아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사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성원으로 인해 그는 원내 최대 야당의 대표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벌인 지난 2년여 동안 크로아티아는 EU 회원국들 중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확실한 국가로 분류되었으나, 이제 그 입장은 밀라노비치 대통령과 사민당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려 있게 된 것이고 민주연합이 연정에 실패한다면 크로아티아 헌법과 선거법에 따라 재선거를 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연합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이전과 같은 발언권이 매우 약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난민 받아들이기 등에 크로아티아 국민들이 매우 피로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로아티아 국민들의 반응도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할 때와 사뭇 다르다. 그때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며 러시아를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규탄했지만 이제는 크로아티아가 최악의 경제난을 벗어날 수 있다면 러시아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번 크로아티아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로아티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날 투표율이 61.83%로 2020년 마지막 선거의 47%에 비해 상승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제는 사민당과 HDZ를 대신할, 제3의 정당이 새로운 닼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그 정당이 바로 조국운동 연합당(Domovinski pokret)이다. 2019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낙선했던 미로슬라브 스코로(Myroslav Skoro)가 이듬해인 2020년 2월 29일 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정당으로 강성 우파 성향을 갖고 있다. 조국운동당이 이번에 14석을 확보하면서 양대 정당을 저울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조국운동 당 대표 이반 페나바(Ivan Penava)는 조국운동 연합이 앞으로 크로아티아의 운명을 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당 성향 상으로는 HDZ 쪽이 상대적으로 가깝긴 하지만, 양당 내에 연정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반면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정의의 물결은 아예 HDZ를 배제한 거국 내각을 구성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조국운동의 행보에 따라 추후 정권 구성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HDZ보다 더더욱 우익적인 면모를 과시할 것으로 보여 EU, 친서방보다는 다극화 세계의 일환으로써 크로아티아 경제 회복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다크호스의 향방에 따라 크로아티아가 어떤 길로 방향을 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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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파키스탄 신디족 이야기
    신디족은 인도-아리안 그룹이며 이전에는 인도의 일부분이었던 파키스탄의 신드(Sindh) 지방에서 오래 거주하던 민족이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된 후 대부분의 신디족은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이 많았다. 신디족 중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인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오늘날 신디족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존재하는데 인도 신디족은 주로 힌두교도들신 반면 파키스탄 신디족은 주로 무슬림들이다. 파키스탄 내에서도 신드 주의 독립을 외치는 신디족들이 있다. 이들의 시위는 파키스탄 정부에서도 대단히 위협적이다. 듣기로는 신디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라치에서 분리 독립 선거를 개별적으로 했다는데 인구 1,000만의 카라치는 신디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듯 싶다. 파키스탄에 잔류함으로써 시위도 이전보다 줄어들은 양상이라고 한다. 그나마 신디 사막 유목족의 전통을 지키려고 쉼터를 만들거나 주거지를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노력을 하고 있다. 드라비다계 민족인 신디족은 드라비다어족의 언어인 신디어를 쓴다. 그리고 신드 주와 인접한 인도 구자라트도 같은 계통이다. 실제로 인도 구자라트 주에는 신디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물론 종교가 힌두교이고 신드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인도, 인더스라는 이름의 원형이기도 하다. 신드 지역은 인더스 강의 인더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두(Sindhu)라고 하였는데 인더스 강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라 하여 그 이름이 사용된 것이다. 힌디어와 힌두어는 고대 페르시아인이 "s"를 "h"로 발음했기 때문에 신드(Sindh)와 신두 (Sindhu)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고 힌두가 여기에서 나온다. 같은 방식으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지역의 사람들을 힌디어 사람들, 힌두어, 고대부터 이 지역에 사용된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나중에 인도 하위의 전체 북부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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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1992년 루마니아의 선거, 루마니아의 대변혁 시기
    1992년 루마니아 선거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당은 루마니아 민주공회를 떠난 민족자유당(The National Liberal Party, NLP)이었다. 공산주의적 정당들은 선거 이후 민주민족구국전선을 중심으로 연립하여 무소속 출신의 기술 관료인 니콜라에 바카로유(Nicolare Vacaroiu)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연립 내각은 내부에서 약간의 변동을 거쳐 1996년 가을 선거까지 지속되었다. 인민주의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통령제의 구조하에서 바카로유 내각은 여러 사안들의 주요 쟁점에서 의회와 타협하는 입장을 취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 내각은 정치적 권위의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국립 언론 매체나 국가 안보에 대한 감시, 그리고 국가 통제의 역할을 결코 의회에 내주지 않았다. 1992년 선거 이후 헝가리와 근접해 있는 트란실바니아와 기타 루마니아 지역 사이의 유권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점차 양극화되어 가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와 같은 양극화는 전통주의적 민족주의적 정당들과 근대화 및 유럽화를 지향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일리에스쿠 정부는 실질적으로 반(反) 서구적, 반(反) 지성적, 반(反) 자본주의적 성향을 뚜렷하게 나타내면서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낫지만 차우셰스쿠 막장 행각 못지 않은 성격을 드러냈다. 이로 인하여 루마니아에서는 자연스럽게 개인 사유화나 시장 경제 체제로 향하는 경제적 변혁의 속도는 매우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인권 문제를 중심으로 소수 민족을 위한 권리와 제도 수립을 위해 그에 대한 변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루마니아의 국내 정치의 불안정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통합하려고 하는 외교적 노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유럽 공동체는 루마니아에게 부회원 국가의 지위를 부여했다. 1993년 7월 선거에서 일리에스쿠의 정당은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여 유럽으로부터 개혁적 좌파 정당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청은 유럽의 입장에서 공산주의 독재정권의 연장으로 인식되어 기각되었다. 대체로 불가리아에 비하여 루마니아의 개혁 내용이나 속도는 크게 뒤지고 있었기에 당시 유럽 공동체는 불가리아와 비교해서 루마니아를 보곤 했다. 이러한 루마니아의 정치 구조는 권력을 평화적으로 야당에 이양시킬 수 있는 정도의 단합성이나 성숙성, 그리고 정치적 협상의 능력은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루마니아 야당들은 정치적 철새의 경향이 여전히 심하며 1995년 초, 하원에 22명의 의원들이 무소속, 상원에 15명의 무소속 의원을 위시하여 15개 정당이 존재하고 있다. 정당들의 분열과 합병은 같은 계보 내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점차적으로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들이 우세해지는 경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민주적이거나 자유주의적 정당은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주화를 추진시키기 위한 시민적 조직이나 운동들이 차츰 증가하고 있지만 지도부들이 아직도 공통의 이해보다는 개인적 경쟁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내분이 심하여 여당의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1992년 선거에서 승리한 일리에스쿠 정부는 공산주의 붕괴의 여파로 인하여 권위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체제를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996년 자유 의회 선거 이후에도 루마니아가 민주주의적 전환에 들어 선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적 전환의 이전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큰 논란이 일었고 이에 과도기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1990년대 루마니아의 정치와 체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물론 1996년 11월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변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더 유력하지만 과거 차우체스쿠 체제의 낡은 유산과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민주주의 외양을 가졌지만 권위주의와 정치적 통제, 그리고 여론 조작은 공산독재만큼이나 심각했다. 루마니아의 이와 같은 지연된 정치 체제의 발전은 발칸 지역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그 중에서 루마니아가 가장 낙후되었다. 민족구국전선(National Salvation Front)과 일리에스쿠를 중심으로 한 전통정파들은 여전히 과거 공산당 간부들이 운영하던 루마니아식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서구적 정치 경제 모델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루마니아 변혁은 여전히 관료적, 중앙 집권적인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한 국가주의적 전통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제도화된 민주 절차를 공공연히 무시하고 사회적 선동, 정치적 카리스마를 이용한 정치적 야합을 행사하여 권력을 독점했다. 국수주의자들은 1989년 혁명 당시 민중들의 민족주의적인 감상과 일리에스쿠 정부와의 야합으로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점점 더 맹렬하게 민족적 공산주의 시각을 선전하였다. 한편,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에 지친 루마니아 국민은 약체인 자유 민주주의적 정당보다는 민족적 색채를 띄면서 자신들의 복지와 생활을 보장해 주는 공산주의적 정당들의 연합과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발칸 지역의 국제 정세와 여론에서 고립하여 존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자유 선거, 언론의 자유, 인권, 시장 경제 등의 국제적 기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는게 루마니아의 현실이기도 하다. 국내 정치의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정부는 계속하여 서유럽 대서양측과의 통합에 참가하여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1996년 11월의 의회와 대통령 선거는 루마니아의 정치에 있어 크게 획기적인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올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야당이 의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거머쥔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크게 두드러진 부정 행위는 보고 되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고 역대 선거 중에서 가장 깨끗한 선거로 알려지고 있다. 루마니아 민주공회는 라두 바실(Radu Vasile)이 지도하는 민족농민당과 1996년 이전에 피터 로만이 창당하여 여당과 끊임없이 대립해온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Union)의 지원을 받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루마니아 민주공회는 30.2%의 득표율과 의회의 122석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루마니아 민주 정치에서 야당의 첫 승리였다. 1996년 루마니아의 사민련은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소수 민족 정당인 헝가리 민주연합당(Democratic Alliance of Hungarians in Romania, RMDSZ)이 본격으로 의회에 참여함으로서 빅토르 쵸르베아(Victor Ciorbea)를 수상으로 하여 새로운 연립 내각을 형성할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공회에서 후보자로 선출된 에밀 콘스탄티네스쿠(Emil Constantinescu)가 1차 투표에서는 28.2%의 득표율로 32.2%를 획득한 이온 일리에스쿠에 이어 2위를 하였으나 2차 투표에서는 야당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54.4%를 획득하여 일리에스쿠를 누르고 승리하였다. 이와 같은 선거의 결과는 루마니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다. 1997년 2월 빅토르 쵸르베아는 루마니아 경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경영과 개인 사유화를 위해 여러 충격 요법을 위한 긴축 정책을 선언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쵸르베아는 다시 적자를 양산하는 대규모 국유 산업체에 대해 폐쇄 조치를 하고 국제 정치면에서도 새로운 개방을 위한 정책을 시도하였다. 수상은 3월 헝가리를 방문하여 5개 협정안에 서명하여 외교에 있어서도 본격적으로 개방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양국 사이의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국내에서는 루마니아의 헝가리 민주연합이 양국의 관계 정상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루마니아는 또한 우크라이나와 호혜 상호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사이에 오랫동안 역사적 쟁점으로 남겨져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1997년의 루마니아 선거는 루마니아 국내 민주화와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 주었다. 루마니아는 시장 경제 도입이나 개인 사유화 정책, 그리고 경제적 경쟁력 회복의 속도가 매우 지연되어 왔으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적 절차 및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 후반기에 들어 발족된 루마니아의 정치적 지도부가 위기 관리 면에서 능력을 발휘해 민주화의 길에 성공을 거둘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다시 민중이 오랫동안 누적된 불만으로 인하여 권위적 인민주의 체제로 돌아 설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함께 재기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발칸 지역의 새로운 정책적 모델로서 모든 유럽인들의 공통된 관심사 및 현대사적 토론 과제로 남게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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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솔로몬 제도 총선, 친중파인 마네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 현 총리의 승리와 여당의 절대적인 유리한 형세
    우선 인도-태평양 지역 내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주요 대응 전략은 첫째, 아태 재균형전략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과 둘째, 가장 갈등이 심한 지역인 동남아 지역 내 미국의 영향력 유지 확대, 셋째, 중국의 시진핑 체제 하에 진행된 ‘일대일로’ 구상에 대한 적극적인 맞대응 및 팽창 저지 넷째,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를 완화하기 위한 미중 무역 전쟁의 개시 등으로 이루어진다. 중국 역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자국의 경제, 안보의 위기라는 우려 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중국의 기본 인식은 첫째, 2010년대 초반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재균형 전략과 이후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큰 차이가 없으며, 둘째, 대중국 봉쇄가 그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G2 국가로 부상하면서 독자적으로 특히 시진핑 집권기 때 ‘중국의 꿈’으로 불리우는 공세적인 대국화 전략을 추진해왔다. 중국의 이와 같은 국화 전략을 중국식 인도-태평양 전략이라 지칭하고 있다. 미국에 맞서기 위한 중국의 이와 같은 일련의 대응전략은 여러 가지로 추진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경제 활로를 열어 무역전선의 확장을 노리는 일대일로, 이어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러시아의 안보협력, 그리고 상하이 협력기구(SCO)의 확대 및 강화, 미국 · 일본 · 인도 · 호주 4개국이 중심이 된 QUAD 파열구 전략,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가장 갈등적인 지역인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반도를 포용하는 전략 등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다. 우선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을 추구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경제력을 통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인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미, 중 전략 경쟁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주변국들 중 미국과 군사협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동맹 및 안보 우호국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의 팽창적인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은 직접적인 갈등에 더해 주변국들의 우호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것에 있어서도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인 경쟁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미국과는 동맹국으로서의 관계를 고려한 군사 협력을 잘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경우, 오히려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을 끌어들여 국가 경제와 인프라의 개선을 노리고 중국의 영향력 하에 존속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호주 등이 진행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깨뜨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의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호주와 미국의 활동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게다가 파투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 매우 낙후되어 있는 자국에 투자와 더불어 어느 정도 안보에 도움을 주겠다고 미국과 호주가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소가바레 총리는 중국으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 국가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경제발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다. 이전에는 미국과의 연대를 통해 해양 영유권 확보 등 안보를 위한 군사 협력 관계를 지속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거액을 쏟아 붓고 지원하고 있으며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지원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편 호주는 오세아니아 일대에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미 갖춘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명확하게 최우선시하고 중국과의 마찰을 되도록 줄이는 방향으로 경제, 외교, 군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가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에는 무리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친중 정권이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 속에 17일에 치러진 솔로몬 제도 총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마네시 소가바레 총리가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소가바레 총리는 동브 슈아죌 선거구에서 49%를 득표해 42%를 얻은 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친중파로 구성된 여당의 승리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솔로몬 제도 민주당의 전 대표 매슈 웨일 등 주요 야당 후보들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여당에 저항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이 당선이 확정되면서 친서방, 미국, 호주를 배경으로 한 야당 의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특히 재스퍼 하이우드 선거 관리 국장에 의하면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경찰의 삼엄한 보안 하에 개표 작업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내주 초 정확한 총선 결과가 나올 예정이지만 워낙 무소속 후보가 많아 어느 당이 연정을 구성해 정권을 잡을 것인지 확정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50명의 국회의원을 뽑으며 새로 뽑힌 의원들이 현역 의원들 가운데 총리를 선출하게 되는데 현재 80% 정도의 개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현 집권 여당이 60%의 이상 득표율을 보여 승리가 거의 확정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다. 소가바레 총리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매우 우호적인 정치인 가운데 1명으로 지난 포스팅에서 솔로몬과 중국의 관계 및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일대일로의 충돌지가 솔로몬과 파푸아뉴기니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소가바레 총리는 권좌에 복귀하면 중국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더 밀착되어 미국이나 호주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 재검토 및 수정을 하거나 각종 버티기 전략을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토목공정집단(CCECC)이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 있는 호니아라 항구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면서 해군기지 건설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이전과 같이 안일하게 인도-태평양 지역을 대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중동의 위기가 계속되고 어제 20일에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호주는 자국의 북쪽 해안과 변경 지역 안보에 언제든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놓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호주는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는 중과부족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과 연계를 해야 하지만 미국이 현재 신경쓰고 있는 지역이 매우 포괄적이라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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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와 미하일 1세의 통치 시대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Pozarski) 공작은 이듬해인 1613년에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했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All free classes)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이 때는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조선 왕조에 해당하고 광해군 시기로 생각된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Ⅳ세의 첫 번째 황후의 오빠의 손자이다. 그는 최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친 필라레트 로마노프(Filaret Romanov)가 돌아와 1613~1633년의 기간에 공동차르(Cotsar)로 선언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국민군과 그리고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 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국민과의 협조를 통한 통치보다는 모스크바 대공국 때 굳어진 전제 정치에 의존했다.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왕조 탄생의 토대로 자리 잡았던 국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지만, 모스크바 귀족 가문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로마노프 가문의 선조는 ‘코빌라(암말)’ 라는 별칭을 가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Andrei Ivanovic)이다. 그는 1347년 벨리키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공후였던 시메온 이바노비치 고르디(Simeon Ivanovic Gordi)를 위해 봉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손인 표트르 니키티치 자하린(Piotr Nikitic Jaharin),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Milkail Piodrvic)의 부친인 총주교 필라레트(Pillaret)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부칭에서 ‘로마노프(Romanov)’라는 성(姓)을 정한 것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노프 가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면서부터이다. 1547년 로만 유리예비치의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Romanov Jaharina)가 이반 4세의 왕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류리크 왕조가 절멸하고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로마노프 가문은 왕권 경쟁의 후보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613년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표트르비치 로마노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전제군주제의 기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섭정이나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시기도 있었고, 재능 있는 인물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 사안은 군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국가 발전의 행로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제정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이 ‘아버지 차르’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의지하는 가부장적 국가형태가 조성되었다. 전제정치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정치 체제를 지탱한 것은 관료제였다.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위해 복무할 관료들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전제정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다. 이들 귀족 관료들의 부패와 피지배 계층과의 갈등은 원활한 국가 통치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시기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정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왕조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관료제 확립은 국가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유럽러시아 지역과 예니세이 강 서안의 서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대외 정책은 이른바 ‘동란 시대’로 알려진 폴란드-스웨덴과의 전쟁과 침략으로 함락된 북서부 지역의 영토 회복과 남부 국경 지대의 국방력 강화에 집중되었다. 초기 통치자들은 군사력 강화 정책을 통해 스웨덴, 폴란드에 대항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척은 성공적으로 이끌어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한편 이러한 로마노프 왕조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 확보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북서부의 스웨덴, 서부의 폴란드, 남부의 오스만투르크와의 관계는 러시아 대외 정책에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였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러한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러시아를 유럽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 1세는 오스만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아조프 해 연안 지역과 잉구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란디야(Esttandia), 리플란디야(Liplandia) 지역 등 러시아 북부 및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 2차 투르크 전쟁의 승리로 흑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세 차례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함으로써 벨로루시 및 발트 해 지역의 영토들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東) 그루지야(1801년), 핀란드(1809년), 베사라비야(Besarabia, 1812년), 아제르바이잔(1813년), 폴란드 왕국(1815년)을, 알렉산드르 2세는 중앙아시아, 북카프카스, 극동, 바투미 등을 병합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존속했던 300여 년 동안 러시아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으로 발트 해와 흑해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볼 때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이래로 정교회는 모든 러시아 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상의 관습에서부터 교육, 문학, 예술들, 특히 회화, 건축, 음악, 정치에 이르기까지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전제 체제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정교회를 특별히 중요시하며 통치의 기제로 활용했다. 특히 차르였던 알렉세이(Alexei) 시대에는 니콘의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권에 대한 세속 권력의 우월성을 확인했고, 표트르 1세는 신성종무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이었던 교회 행정 체계를 정부산하 기구로 편입시켰다. 교회와 그 수장인 총주교의 권위를 세속 권력에 복속시킴으로써 군주의 위상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실질적인 정교 왕국이자 간접적인 제정일치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전개 과정에서 러시아는 평화적 교류나 물리적인 충돌을 통해 다양한 이민족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유입된 타 문화의 요소들이 고유의 슬라브적 문화를 기반으로 융합됨으로써 러시아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의식주의 물질적 요소에서부터 언어나 관습의 제도적 요소, 종교적 관념과 가치관의 정신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융합의 흔적들은 현대 러시아의 삶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수입된 서구의 문화는 러시아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 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이러한 성과는 문화 예술의 강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였으며 역으로 모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어 다른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 스타니슬라브스키와 체호프의 사실주의 연극 미학, 디야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말레비치와 칸딘스키, 샤갈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은 로마노프 왕조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가 서유럽 가문과의 혼인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는 차르 미하일 1세의 통치 시기였다. 차르의 부친 필라레트는 국제정치 속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왕가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실제로 서유럽, 북유럽 왕실과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 러시아와 스웨덴 간의 북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외교를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한 후 쿠를리안디야(Kurliandia)로 알려진 지금의 라트비아 서부 지역, 게르만 계 공국들을 점령하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표트르 1세와의 회동을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 했다. 그리하여 표트트 1세와의 회동을 요청했고, 1709년 10월 마리엔베르데르(Marienberder)에서 만난 두 군주는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약정하고, 그 증표로서 왕실 간의 혼인을 합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1710년 10월 프로이센 왕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표트르 1세의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둘째 딸 안나(Anna)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안나의 언니 예카테리나도 국익의 차원에서 독일 메클렌부르크(Meclinburg) 시베린(Siberin) 공국의 카를 레오폴드(Karl Leopold)와 1716년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브라운시베이크(Brawnsibeik) 공후 안톤 울리히(Antonio Julichi)와 결혼하여 이후의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 이반 6세를 낳았다.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와 딸 안나도 서유럽의 유력 가문과 혼인시켰다. 첫째 부인 예프도키야(Yevdokiya)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세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처제인 브라운시베이크 공녀 소피아(Sopia)와 1711년 결혼했다. 이들의 아들은 1727년 표트르 2세로 러시아 황제에 즉위했다.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스웨덴 왕 카를 12세의 조카인 독일 고르시테인(Gorsitein) 고토르프(Gotorv) 공후 카를 프리드리히(Karl Pridrichi)와 1725년 결혼했다. 이처럼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유력 가문과의 혼인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성립되었다. 이것은 로마노프 왕조가 유럽의 유력 혈통 속에 용해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직계는 1730년 표트르 2세 사후 단절되었다. 후계와 연관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 이반 5세의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했다.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1730~1740)와 증손자 이반 6세(Ivan VI, 1740~1741)의 재위 기에는 브라운시베이크 가문의 대리인들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통치했다. 1741년 러시아 내부의 정변으로 인하여 제위는 표트르 1세의 후손들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직계 후손들을 가지지 못한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beta Petrovna)는 제위를 자신의 조카인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공국의 표트르 3세에게 물려주었다.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가문은 덴마크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의 직계로 표트르 3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로마노프의 러시아 제위를 계승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명문 가문과의 혼인 전통은 계속되었다. 파벨(Pavel I) 1세는 뷔르템베르크(Biltemberg) 공국, 알렉산드르 1세는 바덴(Baden) 공국,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 왕국, 알렉산드르 2세는 게센(Gesen) 공국, 알렉산드르 3세는 덴마크 왕국, 니콜라이 2세는 게센 공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들 가문과 인연을 가지게 됨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는 유럽 여러 가문들과 혼혈된 가문으로 점점 그 순수혈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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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 태국의 대나무 외교와 서구화 개혁
    최근 영화 애나 앤드 킹(Anna And The King)을 보며 느낀 점, 그리고 태국의 대나무 외교와 서구화 개혁을 연구하면서 가진 의문점이 있다. 몽꿋 왕과 다음 대인 쭐랄롱꼰 왕은 분명 태국 차크리 왕조의 명군이다. 태국의 서구화 개혁 중심에는 두 왕이 있었고 두 왕으로 인해 태국은 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 빠르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선진화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능한 중립 외교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특히 쭐랄롱꼰 왕의 시대에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섭정 기간 동안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서구의 문물과 교육 제도 등에 견문을 넓히고,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우의를 다졌다. 그는 시암으로 돌아온 후 정치와 경제, 사회적 개혁에 주력하였다. 20개의 작은 왕국들로 분산되었던 왕국을 중앙집권 체제로 변화시키고, 서구와 같은 근대화된 내각 제도를 도입하는 등 행정조직을 개편하였으며 군대는 서양식 무기와 제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태국 화폐인 바트(Baht)화를 발행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조세를 국가가 직접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지방 귀족들의 탈세를 방지하였다. 또한 국민의 교육을 장려하고, 시암 최초의 병원과 의료 교육 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노력과 전통적 노예 제도와 부복(Prostration)을 철폐했다. 이어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치외 법권의 철폐 등 불평등 조약에 대한 개정에 노력하여 국권 회복과 보존에 주력했다. 이어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시암의 근대화에 성공하였지만, 식민화를 노리는 제국주의는 철저히 배격하였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시암 내 철도 부설을 약속했지만, 철도 사업으로 인한 시암의 주권 약화를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대신 영국 단독 사업이 아닌 유럽의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철도 부설 계획 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주권을 잃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취하는 균형외교를 펼쳤다. 186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지배하에 있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노로돔(Sianuk Nordom) 국왕이 축출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의 프랑스로 양도가 공식화되었다. 당시에 캄보디아를 구성하고 있는 바탐방, 씨엠립, 스리소폰은 시암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강압에 의하여 이 지역들이 최초의 영토 양도가 되었다.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복속시켰다. 쭐랄롱꼰 왕은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태국 근대사의 기점을 이룩한 국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 근대화는 사실 일본보다 앞섰다. 지정학적으로 일본은 태국의 뒤에 있었기에 서구열강의 영향력이 태국보다 늦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몽꿋 왕이나 쭐랄롱꼰 왕의 시대에 빠른 근대화가 이루어진 태국은 현재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가 되어있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보다도 더 떨어지는 경제력에 엄청난 빈부격차는 태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되었다. 태국과 일본은 근대화가 된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10년은 태국이 앞서 있었지만 일본에게 추월당했고 우리 한국에게도 뒤쳐지는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이 되었다. 우리와 일본보다도 앞서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우리와 일본보다도 태국은 왜 뒤쳐진 국가가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태국의 현대사를 좀 더 연구하면 알 수 있을듯 싶은데 쉽사리 이 미스테리가 해소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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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 내일 20일에 벌어질 미국 하원에서의 표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존폐를 가른다.
    미국이나 우크라이나를 추가로 지원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내일 있을 미국 하원의 표결 결과에 따라 달려 있다. 이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관심사 중 하나다. 서로 다른 성격, 다른 유형의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에 따라 여기에 대처하는 미국의 핵심 외교 정책, 이를 둘러싼 국제 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더불어 미국은 남부 국경 지대인 텍사스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난민에 대해 안보를 강화할 지에 대한 여부도 여기에 달려 있다.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두 진영으로 갈라져 소위 '이민 전쟁'까지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실상 3개의 전선이 서로 작용, 반작용을 하면서 그로 인해 이해 충돌로 생기는 예산안 처리들이 6개월 가까이 지연된 것이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보인다. 현재까지의 이러한 혼전은 내일 20일에 있을 미국 하원 본회에서 표결로 종결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지원 안 외에도 이스라엘, 대만 지원 관련 예산 안과 대러 제재 강화 법안 등 모두 4개 법안이 내일 표결에 부쳐진다. 표결이 모두 가결되거나 일부 부결되는 법안 있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부분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안 관련 부분이다. 이 추가 지원 안이 통과될 경우, 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전체에 안겨주는 심리적 효과는 실제로 지원해주는 효과보다 훨씬 크게 나타날 것이다. 미국이 아직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가질 것이고 나아가 러시아에 승리할 수 있다눈 기대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예상은 근소한 차이로 대 우크라이나 지원이 확정될 것으로 보여진다. 불리한 전쟁을 2년 동안 끌고 온 서방과 미국이다. 여기서 만약 부결되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그동안 그럴꺼면 우크라이나를 왜 지원했는지, 그동안의 지원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각 곳에 성토의 십자포화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지원 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그 책임에 대해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직결된다. 그렇게 되면 올 11월 대선 때 바이든과 민주당의 패배는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대외적인 미국의 자존심도 여기에 걸려 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을 철수하고 시리아와 중동, 아프리카 각 지역의 미군 부대들의 철수의 압박과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그렇다 쳐도 러시아와의 대결은 다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라이벌로 부상한 러시아와의 대리전에서 철수하게 되거나 지원을 하지 않게 된다면 이미지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사실을 바이든 뿐 아니라 트럼프도 잘 알고 있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는 시작하는 것보다 끝이 더 어려운 법이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이익에 덜 손해를 보게 하면서 차악의 방식으로 마무리 짓게 하는 것은 수 많은 생각과 전략을 짜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형식들로 인해 공화당과 트럼프 또한 일견 동의할 것으로 생각된다. 잘 끝내고 종결짓기 위해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지원 안에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내 예상은 이 법안 결국 통과될 것이다. 그 다음은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관련 문제다. 지난 13일 미국 등 서방 측의 방공 지원을 받아 이란의 대대적인 미사일과 드론 공습에 그나마 드론 대부분을 요격하고 탄도미사일에 피해를 입었지만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심리적으로 서방 측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이 팽배했을 것이다. 대 우크라이나 지원 안 예산 통과는 이러한 좌절감을 딛고 다시 러시아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을 찾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여부를 놓고 미국 백악관과 의견 대립이 심각했던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은 지난 17일 우크라이나에 607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하는 안보 예산안 등 4개의 법안을 20일 표결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백악관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대만을 지원하는 예산을 모두 하나의 법안에 묶어 의회 통과를 시도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는 남부 국경지대의 안보 강화 조치가 부족하고 난민들이 계속 몰려 들어 치안이 더욱 불안해졌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존슨 의장이 남부 국경 지대에 대한 요구 조건을 철회하고, 백악관의 원래 법안과 다를 게 없는 법안을 단순하게 4개로 분리한 뒤 따로 표결에 부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후세의 역사적 평가가 미국의 행위를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경파 동료 의원들의 해임 위협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안이 통과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마이크 존슨은 미국 청소년들이 총알받이가 되도록 참전하는 것보다는 우크라이나에 총알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이에 스트라나.ua는 존슨 의장의 아들이 올 가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기술했으며 러시아가 나토를 공격할 경우, 그의 아들도 참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에 발표한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의 주요 내용들을 보면 총 지원액 607억 5천만 달러 중 230억 달러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따른 미국의 재고 무기 충원에 예산이 책정되며 113억 달러는 지역 내 지속적인 미국의 군사작전에 사용된다. 즉, 이 돈은 중동 지역이나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미군 군사작전 비용으로 돈을 낭비한다는 말이다. 또 138억 달러는 미 육군과 동맹국을 위한 최신 무기 구입에 쓰인다. 다만, 우크라이나 경제 지원용 78억 달러는 차관 형태로 지원된다. 이 말은 그 전까지 공짜로 퍼주다시피 했던 지원을 차관, 즉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금액이다. 그런데 이것 저것 벌려 놓은게 많은 우크라이나가 78억 달러 조차도 갚을 능력이 되는지 모르겠다. 우선 미 국방부는 이 예산안이 통과될 경우, 국방부 비축 무기를 우선 우크라이나로 이전하고, 통과된 예산으로 부족분을 보충할 것으로 에상된다. 그런데 상원을 통과한 기존의 백악관 안과 차별화된 부분은 우크라이나 경제 지원 예산이 무상 지원이 아니라 차관 형태로 바뀐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우크라이나가 결국 상환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은 법안 채택 후 60일 내에 우크라이나 정부와 차관 상환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 선거인 11월 5일에 끝난 뒤인 11월 15일 이후 대 우크라이나 채무를 최대 50% 탕감할 수 있는 권리를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또 2026년 1월 1일 이후에는 모든 채무를 탕감할 수 있다. 탕감 권한을 두 대통령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탕감할 경우,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이 예상된다. 그리고 백악관 안에 추가된 것은 에이테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의 제공 부분이다. 우크라이나는 줄곧 ATACMS 장거리 미사일을 요구해왔는데 제공 여부 결정은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까지 사정거리 300km에 이르는 장거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전선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ATACMS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본다. 존슨 의장은 '지금 우크라이나를 돕지 않으면 러시아가 나토를 공격할 것'이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표결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전대통령조차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도 우크라이나 지원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우크라이나가 멸망하지 않은 한, 대통령이 트럼프로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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