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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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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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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Generation Z: Navigating a New World
    Previous generations reveled in tales of their student years, reliving love stories that didn't go as planned, laughing about regrettable tattoos, and reminiscing about late-night adventures that defined their youth. But what will Generation Z, born into a world of unprecedented challenges and rapid technological change, remember from these formal years. Stephen Bartlett, a 31-year-old British entrepreneur and podcaster, shares a poignant reflection on his Gen Z experience. His student years were overshadowed by the coronavirus pandemic, which confined him to his room, turned university meals into solitary events, and transformed short walks into the highlight of his social life. For many in Generation Z, crucial milestones such as their student years and the brief window of carefree living before entering the workforce were marked by isolation and disruption. One might assume that these hardships forged a generation of hyper-resilient individuals ready to tackle the world's challenges. However, Bartlett argues that this isn't necessarily the case. In a recent article in The Economist, Generation Z is described as the “least resilient” generation. Bartlett echoes this sentiment, noting that he and his peers are often viewed as sensitive, socially awkward, and prone to hiding behind screens. Critics suggest that frequent job changes, absenteeism, and mental health issues are now common among Gen Z, attributing these trends to a deeper malaise. The Struggles and Criticisms of Gen Z Bartlett paints a somber picture of his generation, describing how many struggle to integrate into the adult world. The intense focus on academic success often leaves them ill-prepared for real-world problem-solving and critical thinking. The emphasis on university education saddles many with debt for degrees that may not align with their career paths, discouraging risk-taking and unconventional career choices.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The heightened focus on mental health, while important, can sometimes create a sense of fragility. Bartlett acknowledges that mental health awareness is crucial, but he warns that the constant analysis of emotions can lead to an overwhelming sense of vulnerability. The perpetual engagement with social media exacerbates this issue, fostering a desire for instant gratification and eroding attention spans. This constant digital presence has real-world implications. For instance, job applications have become gamified, which can diminish the seriousness with which they are approached. This shift affects work culture, reducing the ability to persist through challenging tasks or endure less satisfying roles. Adapting to Modern Challenges The result, Bartlett argues, is a generation unaccustomed to discomfort, lacking perseverance, and unprepared for life's inevitable challenges. Adding to this is an ongoing anti-establishment sentiment that portrays society as fundamentally flawed and oppressive. Social media and around-the-clock influencers distort perceptions of reality, exacerbating these feelings. Fifty years ago, generational divides were defined by differences in culture, music, and fashion. Today, technology and a paradoxical overload of information have deepened these divides, altering how we live, think, and interact. In this landscape, truth has become subjective, and independent thought seems restricted. Society appears more divided and uncivilized, with individuals increasingly distant from one another, avoiding meaningful interactions. Yet, there is hope. If Generation Z can cultivate the resilience and determination necessary for modern life, they may navigate these challenges successfully. Embracing discomfort, fostering critical thinking, and learning to engage constructively with differing viewpoints will be crucial. By doing so, perhaps we can ensure that the next generation will have a brighter, more connected future to look forward to, with stories of resilience and triumph to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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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Mystery of the Pyramids Unveiled: The Hidden River of the Sahara
    The Enigma of the Pyramids' Location Discovery of the Lost River The Role of the Ahramat River Unearthing the Past The River's Disappearance A New Chapter in Egyp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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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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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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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실시간 칼럼 기사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上편)
    유고슬라비아가 1992년에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2개의 공화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마침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이 때도 국민투표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 때의 국민투표는 예상과 다르게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기초하게 된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면서 신(新) 유고슬라비아로 불리게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 불리며 국제 무대에 정식 승인되었다. 몬테네그로 지역은 1992년부터 벌어지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내전 등을 피해갈 수 있었으며 이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달리 실제 전쟁을 통한 이해 당사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신 유고슬라비아 구성 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지지했던 국가였다. 이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2년 국민투표에서도 96%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잔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은 독립파는 국민투표를 보이콧 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열할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의 전쟁과 보스니아 내전, 이후에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서 신유고슬라비아가 매우 실망스런 행적을 보이게 되면서,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피폐해지자, 몬테네그로의 독립파들은 이를 근거로 세르비아와의 연합파를 공격하는 테러를 저지른다. 이 사건은 티토그라드 (현 포드고리차)의 국영 우체국과 인근 경찰서에 총격을 벌이는 테러를 저지른 것인데 이로 인해 보스니아 지역에 비해 치안이 그나마 안전한 몬테네그로으 민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지지했던 모미르 불라토비치(Momir Bulatović) 몬테네그로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를 받아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국민들 다수가 독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독립파의 중심 인물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는 세르비아를 버리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밀로셰비치 정권과 협력했으나으로 밀로셰비치 정권의 지지가 약화되고 블라토비치도 지지력이 떨어지자 독자행동으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다. 사실 몬테네그로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세르비아인과는 같은 민족이었으며 같은 문화도 향유했다. 그러나 여기에 민족적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크로아티아와 같이 이탈리아와 가까이 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왕국의 직할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즉 정체성이 세르비아와 이탈리아, 양 국가 및 민족에서 혼선이 빚어진 셈이다. 특히 몬테네그로 남부, 쉬코데르 호수 일대 거주민들은 알바니아계가 많았기에 사실상 몬테네그로의 정체성은 어디에다 특정지어야 할지 명확한 결론조차도 없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때는 세르비아인이어도 몬테네그로에 살면 몬테네그로인이라는 식으로 인구 조사에 응답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딱히 세르비아인이라는 판단보다는 지역적, 속지주의적(Territorial principle)인 입장을 상당수가 고수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본인 정체성을 세르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몬테네그로 인구의 30% 가까이 되지만 나머지는 속지주의적 정체성을 고수해 몬테네그로 토착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집단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자주 교역하던 이탈리아의 관계도 끊기게 되었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보다 상황이 더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한 집단 서방의 제재는 몬테네그로 내 지독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디에도 지원 받지 못한 채,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 때 주카노비치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내세운 것은 그동안 사용해 온 화폐인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신유고슬라비아는 1994년부터 화폐 개혁을 통해 노비 디나르(Novi Dinar)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예 고정환을 독일 마르크로 정하고 통화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방지했다. 그로 인해 통화가 부족하여 한동안 이로 인해 은행 앞 집단 시위로 혼란을 가져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 인플레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한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무려 500,000,000,000디나르 지폐까지 나오고 두 달 뒤에 정상적으로 화폐의 단위를 내렸지만 이 또한 20일 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디나르 화폐를 다시 도입하는 등, 혼란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지라 주카노비치 총리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1996년 주카노비치는 독일로 가서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주카노비치는 몬테네그로의 화폐 단위로 독일 마르크를 전격으로 도입하기로 합의를 보고 독일을 위시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이에 지지의사를 밝혀오면서 결국 독일 마르크가 몬테네그로의 고정 화폐가 된다. 블라토비치 대통령과 세르비아계는 이에 집단반발했다. 세르비아계는 주카노비치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배경으로 신유고슬라비아 자채를 해체시키며 근간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주카노비치의 조부인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의 전쟁 범죄 이력까지 공개하며 "아직도 나치를 끊지 못하고 있다(Још увек не може да престане да буде нациста)."며 적극 비난했다. 이 얘기가 나온 이유는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트니치에 속한 상태에서 수많은 유태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체트니치 소속의 중장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몬테네그로를 점령했던 당시 고위 협력자였다. 그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오그라드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체트니치에서 활동 이력은 연좌제처럼 대를 이어 손자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유고로부터 독립에 찬성하는 독립파들은 독일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항변한 불라토비치 대통령은 1998년에 총리 주카노비치에 의해 밀려나 대통령을 사임했다. 주카노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최악인 상태에서 이를 해결해 보기 위해 산업 민영화 정책을 시행했다. 1998년 당시 가치가 45억 달러로 추정되었던 몬테네그로의 산업은 결국 총 7억 3500만 달러에 매각되었고 이 매각한 개인 자본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다시 사들였다. 결국 몬테네그로의 산업 민영화로 인한 국고 충당은 영국과 미국, 독일에게 대부분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1998년에서 2014년 사이에 민영화된 198개 기업 중 176개가 파산했다. 국가 노동력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고 빈곤이 극에 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는 동안, 주카노비치의 재산은 눈덩이 불듯 불어났다. 2010년 5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주카노비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도자 20인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그와 같은 부의 축적이 시작된 것 또한 1998년 몬테네그로 산업 민영화 사태 때부터였다. 인디펜던트에 의하면 주카노비치의 약 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부의 출처를 "신비적"인 일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니 얼마나 급격히 재산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주카노비치의 민영화 과정에서 그의 친인척들과 그와 유착된 몬테네그로 마피아들에게 많은 국가 자산이 넘어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몬테네그로의 검은 돈은 돌고 돌아 판도라 페이퍼스(Pandora papers)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같은 상황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다를게 없다. 다만 지금은 몬테네그로에서 그러한 악습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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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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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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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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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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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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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Seismologists Warn of Imminent Earthquake Risk in Izmir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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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LGBTQ+ Attacks Rise in Europe Despite Drop in Discrimination
    New research from the European Union's Fundamental Rights Agency (FRA) reveals that while discrimination against LGBTQ+ individuals has decreased slightly over the past three years, the incidence of physical and sexual assaults has increased. The research, released on Tuesday, highlights a rise in violent attacks on members of the LGBTQ+ community. Conducted online in June, July, and August 2023, the poll surveyed over 100,000 self-identified LGBTQ+ individuals. The findings show only minor overall changes compared to a similar poll conducted three years ago. "More LGBTQ+ people in Europe are now open about their identity. But at the same time, they face more violence, harassment, and intimidation than before," the Vienna-based FRA stated. Data adjusted for comparison between the two surveys indicate that 14% of respondents from the 27 EU member states reported experiencing physical or sexual assault due to their LGBTQ+ identity in the five years preceding the poll, up from 11% in the previous survey. "Being an open member of the LGBTQ+ community in Europe should not be a struggle. Although we are seeing signs of progress, bullying, harassment, and violence remain constant threats," said FRA head Shireen Rotio. The research identified Bulgaria (18%) and Latvia (17%) as countries where LGBTQ+ individuals are most vulnerable. Bisexual and intersex people reported the highest rates of attacks. In the year before the latest survey, 36% of respondents across the EU felt discriminated against in at least one area of their lives due to their LGBTQ+ identity, down from 42% in the previous survey. Bulgaria and Cyprus had the highest percentages of discrimination at 48%. Intersex (61%) and transgender (54%) individuals reported the highest rates of discrimination. The survey covered various aspects of life, including the workplace, education, healthcare, interactions with public services, and treatment in shops, restaurants, bars, and nightclubs. Additionally, the survey included countries with EU candidate status, namely Albania, North Macedonia, and Ser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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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Billboard Collapse in Mumbai Kills 14, Injures 60+ During Thunderstorm
    At least 14 people have died and over 60 were injured after a billboard collapsed during a thunderstorm in Mumbai, India. The billboard, measuring 70 meters by 50 meters (totaling 3,500 square meters), fell onto a petrol station and several houses in Mumbai's Ghatkopar district amid heavy rainfall and strong winds on Monday night. Security camera footage captured the moment the metal structure crashed into cars, trapping dozens of people before hitting the ground. Rescue efforts are underway involving the fire brigade, police, disaster response teams, and other authorities, according to the Brihanmumbai Municipal Corporation, the entity responsible for managing Mumbai. Authorities are investigating whether the agency that installed the billboard had the necessary permissions, as reported by NDTV. Maharashtra state Chief Minister Eknath Shinde announced on social media that the municipal administration has been instructed to investigate the incident and file a case of manslaughter against those responsible. Chief Minister Shinde also stated that the government would cover the medical expenses of the injured and provide approximately $6,000 to the families of the dece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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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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