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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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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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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Generation Z: Navigating a New World
    Previous generations reveled in tales of their student years, reliving love stories that didn't go as planned, laughing about regrettable tattoos, and reminiscing about late-night adventures that defined their youth. But what will Generation Z, born into a world of unprecedented challenges and rapid technological change, remember from these formal years. Stephen Bartlett, a 31-year-old British entrepreneur and podcaster, shares a poignant reflection on his Gen Z experience. His student years were overshadowed by the coronavirus pandemic, which confined him to his room, turned university meals into solitary events, and transformed short walks into the highlight of his social life. For many in Generation Z, crucial milestones such as their student years and the brief window of carefree living before entering the workforce were marked by isolation and disruption. One might assume that these hardships forged a generation of hyper-resilient individuals ready to tackle the world's challenges. However, Bartlett argues that this isn't necessarily the case. In a recent article in The Economist, Generation Z is described as the “least resilient” generation. Bartlett echoes this sentiment, noting that he and his peers are often viewed as sensitive, socially awkward, and prone to hiding behind screens. Critics suggest that frequent job changes, absenteeism, and mental health issues are now common among Gen Z, attributing these trends to a deeper malaise. The Struggles and Criticisms of Gen Z Bartlett paints a somber picture of his generation, describing how many struggle to integrate into the adult world. The intense focus on academic success often leaves them ill-prepared for real-world problem-solving and critical thinking. The emphasis on university education saddles many with debt for degrees that may not align with their career paths, discouraging risk-taking and unconventional career choices.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The heightened focus on mental health, while important, can sometimes create a sense of fragility. Bartlett acknowledges that mental health awareness is crucial, but he warns that the constant analysis of emotions can lead to an overwhelming sense of vulnerability. The perpetual engagement with social media exacerbates this issue, fostering a desire for instant gratification and eroding attention spans. This constant digital presence has real-world implications. For instance, job applications have become gamified, which can diminish the seriousness with which they are approached. This shift affects work culture, reducing the ability to persist through challenging tasks or endure less satisfying roles. Adapting to Modern Challenges The result, Bartlett argues, is a generation unaccustomed to discomfort, lacking perseverance, and unprepared for life's inevitable challenges. Adding to this is an ongoing anti-establishment sentiment that portrays society as fundamentally flawed and oppressive. Social media and around-the-clock influencers distort perceptions of reality, exacerbating these feelings. Fifty years ago, generational divides were defined by differences in culture, music, and fashion. Today, technology and a paradoxical overload of information have deepened these divides, altering how we live, think, and interact. In this landscape, truth has become subjective, and independent thought seems restricted. Society appears more divided and uncivilized, with individuals increasingly distant from one another, avoiding meaningful interactions. Yet, there is hope. If Generation Z can cultivate the resilience and determination necessary for modern life, they may navigate these challenges successfully. Embracing discomfort, fostering critical thinking, and learning to engage constructively with differing viewpoints will be crucial. By doing so, perhaps we can ensure that the next generation will have a brighter, more connected future to look forward to, with stories of resilience and triumph to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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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Mystery of the Pyramids Unveiled: The Hidden River of the Sahara
    The Enigma of the Pyramids' Location Discovery of the Lost River The Role of the Ahramat River Unearthing the Past The River's Disappearance A New Chapter in Egyp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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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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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실시간 칼럼 기사

  • 오늘부터 시작되는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선거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국명문제와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다가 2019년에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는 마케도니아 고대사의 종주권 문제, 역사적 문제까지 함께 동반되고 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이래 그리스와 20년 넘게 이를 두고 갈등을 빚어온데다 2019년 국명을 마케도니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하여 국명 갈등의 종지부를 찍은 현재에도 북마케도니아에서 발행하는 여러 서적들과 일반 북마케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의 명칭을 제우스, 헤라, 아테나, 아르테미스 등의 그리스식 명칭이 아닌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디아나 등 로마식 명칭으로 표기하거나 부를 정도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에 국호 문제로 충돌하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보수우파인 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에서 보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다시 선거의 쟁점으로 띄웠다. 사실 고대 시대부터 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족들이 북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현 북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인들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트라키아인들이 지배했었다. 더불어 도리아인을 융합한 마케도니아가 세력이 점차 강력해짐에 따라 트라키아 주민은 이에 굴복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군대 내에서 대다수 기마병을 담당하면서 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80년 이전까지 그리스나 불가리아 학계에서는 트라키아의 계보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트라키아 인이 완전히 정착한 시기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었다. 전체적으로 고고학에 치중되었던 트라키아 연구는 1980년 이후부터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을 통해 본격적인 서지학적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언어적인 부분을 유추한 결과 인도유럽어 종류를 사용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사카 종족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까지 근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언어적 연구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의 주민이라는 것까지 나타났고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을 통해 트라키아 인들이 스키타이와 동일 선상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 언급된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 후일 로마의 타키투스, 요르다네스 등의 기록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사르마트, 훈족에 관한 그들의 유목 생활 기록 등을 볼 때 트라키아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초원 유목 세력과 친연 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 시기 때도 그리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스의 신화 중 캔타우루스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전설은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발칸 지역의 켈트족 중 기마 부족들은 스키타이와 매우 유사하였기에 그들을 캔타우루스의 후예로 여겼을 정도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북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위인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이냐, 현재 슬라브인과 혈통이 섞인 북마케도니아 측 위인이냐의 역사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후 불가르족이 현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슬라브인들을 통치했고 그 슬라브인들이 현 북마케도니아에 밀려 들어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인의 국가가 된다. 게다가 그리스와 혼혈한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이 북마케도니아에 들어와 슬라브인과 혼혈해 버리니 이들은 불가리아 제국, 비잔틴 제국에 교대로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고 19세기에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서 독립하자 북마케도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늦게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와 관계 갖게 된다. 1944년 8월 2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비밀리에 민주연방 마케도니아(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лна Македонија)를 선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1990년 정치 체제가 의원내각제로 이행된 뒤, 1991년 나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으로 바뀌면서 나라가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른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낙후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와 같이 온전한 남슬라브도 아니었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이탈리아계 슬라브인도 아닌 사실상 그리스계 슬라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이 전쟁을 겪은 반면 마케도니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으며 집단서방 또한 마케도니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마케도니아는 매우 안전했고 내전과 더불어 나토의 공습을 받아 피폐해진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에 비해 마케도니아는 내전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립 이후 수차례 마케도니아 병합을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한 것은 터키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누구보다도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에 병합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대립하고 있던 터키 또한 이 부분에서 그리스와 입장이 같았다. 그 이유는 불가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가 잘 나가면 전통의 원수지간인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이 위협 받을 위기에 놓일 수 있고 그리스 또한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트라키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동북부, 동트라키아 지역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삼각으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 분쟁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특히 마케도니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주도한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는 테살로니키와 동트라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해당 영토에 대한 귀속을 요구하여 재판을 걸었던 이력도 있다. 더불어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남슬라브 계열의 마케도니아인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서부의 알바니아계들을 홀대하고 배척했다. 그러면서 민족 및 지역 간 갈등이 증폭되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내전은 그리스가 비록 종교도 다르고 이민족이나 다름없지만 아알바니아계 무장세력들을 부추기고 지원해 일으킨 내전이라 불가리아의 총리였던 시메온 2세가 마케도니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나토군이 들어오면서 알바니아계의 반란은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현재도 상당수의 알바니아인들 북마케도니아 서쪽 변경에 거주하고 코소보 남쪽까지 걸쳐 거주하는 측으로 합의를 보면서 오늘날까지 함께 살고 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할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 북동부의 지방명이자 과거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주장하며 정식 국가로서의 승인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리스 북동부의 해안 지방은 마케도니아 주(州)로서 오랫동안 그리스가 차지해왔다. 알렉산더 역시 그리스계라 믿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라는 단어의 국제 지명도마저 그리스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독립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측에서 국명 사용을 포기하지 않자 내륙국인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사용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항을 봉쇄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여기에 나토와 EU가 개입하니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항구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결국 2018년 6월 12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조란 자에프 마케도니아 공화국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입장에서는 국민투표도 아닌 여당 총리가 단독으로 결정하여 벌인 일이었기에 야당은 여기에 집중 반발했다. 결국 프레스파 협정(Prespa Agreement)에 서명하면서 이 문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북마케도니아 총선에서도 이 문제는 재언급되었고 이번 대선에서도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제1 야당인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우선 대통령부터 바꾸고 5월 8일에 있을 총선에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세르비아와도 관계를 개선하고 그리스를 비판하여 북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테살로니키가 속해 있는 동트라키아에 대한 영유권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혁신당이 대세를 잡게 된다면 그리스-터키-불가리아를 둘러싼 4개국 간의 영토 분쟁, 그리스와는 역사 논쟁과 국호 문제가 다시 불거져 평지풍파를 일으킨 대단히 높다고 본다. 대선 과정은 2024년 4월 24일에 1차 투표가 실시되며, 과반 투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5월 8일에 결선투표가 실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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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25
  • 인도 구자라트계의 출현과 성장의 역사, 문화인류학적 분석
    대략 350,000,000명의 구자라트 족이 인도 중앙의 서부 지역 전역과 구자라트 지방에서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구자라트 지방은 인도에서 가장 산업화 된 지방의 하나로써 이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무역과 관광 산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하였다. 비폭력적인 힌두교의 문화는 힌두교도들이 다른 나라에 지배를 받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도는 이슬람교도, 모굴인, 마라타, 그리고 영국에 의해 지배를 당하였다. 구자라트 족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를 지켜온 민족이다. 그들의 재능과 사업수완은 세계 여러 곳에서 부를 축척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자라트 족의 언어는 구자라트어로써 인도계-아리안 계통의 방언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계-아리안 어는 지역과 카스트 제도, 그 공동체에 따라 서로 다른 아주 다양한 계통을 가진 언어이다. 구자라트 지방 70% 이상의 농가들이 면화를 주요 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사탕수수, 담배, 땅콩버터 등을 재배했다. 밀도 구자라트 지방의 주요 작물 중 하나로써 쌀과 함께 습한 지역에서 재배된다. 구자라트 족의 농경 기술이 향상되면서 트랙터를 이용해 농작물의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나이 어린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족한 생산량을 보충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 뿐 아니라 구자라트 지역에서 생산되는 섬유, 플라스틱, 화학, 중공업의 현장에서 어린이 인력이 사용되고 있다. 구자라트 족의 사회 계층은 다수의 힌두교도들과 소수의 자티스(Jatis)로 분류되어진다. 카스트의 제도는 사회적 진출 뿐 아니라 관습, 예절, 습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브라만 계급인 성직자와 학자들은 최상위 계급으로써 세습되며, 빈민 계층의 사람들은 결코 진출할 수 없는 직업이다. 소수의 자티스가 다수의 하층민을 지배하고 있다. 각 계층마다 판차야트(Panchayat)라 불리우는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있어서 사회적 관습을 수호한다. 구자라트 족 힌두교도들의 사회에서 전사와 상인은 브라만에 이어 두 번째의 상류층에 속한다. 바니아(상인, Bania)은 인도에 섬유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최고의 부를 축척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직물을 짜는 직공이었으나 현재는 실크 산업을 예술적으로 발전시켰다. 구자라트 족의 목공 기술과 금속 기술, 황금 세공 기술과 도자기는 유명하다. 목축을 사육하거나 우유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존경을 받고 있다. 노동자와 어부, 기름과 쌀의 생산인, 재단사, 이발사, 가죽 기술자들은 그 다음 계층이다. 그리고 죽은 동물이나 쓰레기를 처리하는 인부들은 최하위 그룹이다. 구자라트 족 가운데 이슬람교도들은 상인과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같은 계층 내부에서만 결혼하며 결혼할 때 신부를 베일로 가려 다른 곳에 분리시켜두는 푸르다(Purdah)의 관습을 지켜오고 있다. 구자라트 족의 88%가 힌두교도이다. 윤회설 또는 죽음과 출생의 반복설은 힌두교리의 중요한 핵심 교리이다. 구자라트 족은 그들의 신에게 헌신하고 사람들만큼 동물을 사랑하고 감사하면 다음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의 위치가 훨씬 더 좋아진다고 믿는다. 구자라트 족 가운데 이슬람교도는 약 6.6%로써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도들의 다신 숭배를 경멸하며 오로지 알라 신만을 섬긴다. 나머지 4%는 힌두교에서 파생된 자인교(Jains) 의 교도들이다. 많은 상인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자라트 족에게 있어 브라만 계급은 최상의 계층으로써 삶의 윤회를 통해서 닿을 수 있는 절대적인 평화의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5
  • 꼴까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1886)
    그는 힌두교의 개혁가로 성자이자 인도의 영혼이라고도 한다. 그는 꼴까타 교외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브라만으로 벵갈어를 제외하곤 모든 언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정규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19세에 닥신네스와르 칼리 사원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칼리 여신이 살아있다 믿었고 명상한지 1년만에 신이 살아있음을 체험했다 한다. 너무 열심히 순수하게 숭배했기 때문에 때때로 기도에 열중할 때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후에 숲속에 들어가 12년 동안의 고행을 하여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명상과 고행을 중시하는 열렬한 힌두 비슈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힌두교 뿐 아니라 이슬람과 기독교도 섭렵하게 되었고 이해 또한 깊었으며 종교의 진리는 결국 각 종교의 구별을 초월한 곳에 귀결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인도에서 유일한 종교 다원주의자였고 소박하게 닥신네스와르 사원 한 켠에서 사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한다. 이 때 신을 체험한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방과 사원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시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신 거기 끝없이 지즈냐나(지혜)의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하여 파도 쳐오는 저 즈냐나뿐이었다. 잠시 후, 그 바다의 파도들은 나에게 몰려와서 내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너무나 강렬한 이 충격으로 하여 나는 의식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후 칼리 사원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인 체험을 했다. “내 몸과 마음이 경험한 영적인 세계의 4분의 1만 경험하더라도 보통사람 같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날들의 대부분이 영원한 어머니(칼리 여신)의 성스러운 비전에 대한 법열로 지나가버렸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졸음조차도 내 눈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모든 감각이 나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리고 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영원한 어머니로부터 내 몸 쪽으로 마음이 거꾸로 돌아올 때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의 쿤달리니 각성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발에서 머리로 진동하는 감각과 함께 무엇인가가 상승했다. 이 감각이 대뇌에 이르기 전에는 아직 의식의 불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뇌에 이르는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시각과 청각은 정지해버렸고, 말하는 것조차 전혀 불가능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이 신비로운 영력이 여기까지, 또는 여기까지(자신의 가슴과 목을 가리키며) 차올라 올 때의 느낌은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영력이 이곳을 넘어가자(목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마음과 느낌은 더 이상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미간의 반대쪽 여섯 번째 차크라를 가리키며) 마음이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신의 비전을 경험하면서 사마디에 들어갔다. 여기 신과 나 사이는 오직 엷은 막이 쳐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엷은 막을 통해서 그 신을 느낄 수 있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말년에 후두암을 앓다가 죽었다. 이 때 한 학자가 그에게 왜 어머니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이 육체를 완전히 잊게 된다. 그래서 육체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목 어디엔가에 상처가 난, 인간 육체에 쌓인 무한한 영혼이다.” 어느 날, 그는 칼리 사원의 강으로 난 목욕통 돌계단에 서 있었다. 그때 두 개의 조각배가 강에서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한쪽 배에 탄 사공이 다른 쪽 배에 탄 사공의 등을 노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라마크리슈나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을 듣고 그의 조카인 흐리다이가 달려가 보니 그의 등에는 심한 매 자국이 나 있었다고 한다.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 인성이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요점은 ‘나’와 ‘너’의 구별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이 때의 ‘너’는 자신을 제외한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라마크리슈나는 그 무분별로 인하여 뱃사공이 노로 맞는 것을 보고 고통을 느끼는 차원에까지 이르렀다 인도 5파 철학의 권위자인 나라얀 샤스트리와 베단타와 니야야 철학의 권위자인 파드말로챤은 라마크리슈나를 신의 화신으로 인정했다. 동시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성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경전에 기록된 진리의 육화임에 틀림없다.” 라마크리슈나는 "힌두는 물을 빠니, 무슬림은 잘, 영국인들은 워터라고 한다. 이 3개의 말은 다르지만 물이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다. 같은 이치로 어떤이는 하느님, 어떤이는 알라, 어떤 이는 라마, 칼리, 브라마로 부를 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힌두와 이슬람을 화해시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그는 성자의 반열에 올라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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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5
  • 다양성의 간극!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
    동네 주민을 위해 오백만 원을 가지고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오백만 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돈일 수도 있고 적은 돈일 수도 있다. 나는 동네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초청하려는 예술인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개인 독주회를 개최하는 수준 높은 연주자들이었다. 연주자 세 명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그들을 초청하는데 오백만 원은 매우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런 연주자들을 잘 아는 분의 도움으로 오백만 원의 경비로 동네 공원에서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동네 축제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예상하지 못한 반발이 있었다. “왜 오백만 원을 예술인들에게 주는가?” “오백만 원을 가지고 주민들이 만드는 축제를 기획하면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할 수 있다.” “왜 내가 외국 여행가는 날 개최하느냐?” 심지어 동네에서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제시했다. “그 돈이면 우리도 멋있게 행사를 꾸려나갈 수 있다.” 여러 가지의 반대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반대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었다.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는 날짜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내가 계획했던 그 날이 우리 단체의 한 명이 외국 여행을 가고 없는 날이었다. 그는 날짜를 변경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도 그의 이야기를 존중해서 예술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스케줄 때문에 일정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날짜로 강행하고자 하였다.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의 내심은 이번 행사에 행정관료나 정치인들도 초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중심이 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이 행사의 취지가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바람잡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었던 마음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도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듯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의 기획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술인과 함께라는 나의 기획의 핵심인 예술인들도 사실은 동네 주민이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반대 논리에 온종일 답글로 대응했다. 그것도 어느 시간이 지나니 지치게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중이 절을 바꾸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결단했다. 내가 떠나기로 했다. “알아서들 잘하세요!” 자신들이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다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주민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나 역시 주민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다만 주민을 위한다는 말에 있어서 그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또한 나는 행사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을 원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행정관료나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자기 얼굴을 내보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떤 단체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단체는 그런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모두 읽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짐작할 뿐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 나오는 전경과 후경의 그림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이리 보면 사람 얼굴이고 저리 보면 컵인 것과 유사했다. 그 관점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하루를 시달리고 나니 그 일들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기로 결단했던 것이었다. 나의 결단을 뒤늦게 알게 된 한 의원이 전화가 왔다. “위원장님! 너무 아쉬워요. 위원장님이 계셔서 그나마 동네의 예술인들과 주민들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왔는데...”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지요! 이제는 말 많은 것이 싫어졌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봤다. “말 많은 것이 싫다.” 그렇다. 이제는 정말로 말 많은 것이 싫어졌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졌다. 내가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하나?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도피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를 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했다. 나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처럼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나를 버릴 수 있는 나를 찾는 것이 참된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천여 년 전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영원한 것은 없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조금 전의 나와는 다르다. 그렇게 매 순간 변화하는 무상의 나가 나에 집착한다는 것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여기 이 순간의 깨달음이 소중하다. 그것이 게슈탈트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최근의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의 입에서 그리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잘 해결하시지 그랬어요!” 아내의 말에 수긍이 갔다. 잘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과 인내라는 노력이 필요했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이 머릿속에서는 쉬운데, 현실에서 서로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아내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부처는 아마도 아상을 가지라고 말했을 껄요?” 서로 웃고 말았다. 현실 정치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가 현실 정치에서 실행된다면 우리는 극락에서 살게 될 텐데, 그것이 안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창밖으로 비 온 뒤의 회색빛 구름 사이로 푸른색 하늘이 웃는 모습을 하고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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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Denmark Unveils 1,800-Year-Old Miniature Portrait of Alexander the Great
    "I nearly toppled from my chair," exclaims Danish archaeologist Freerck Oldenburger, recounting the electrifying moment when he laid eyes on a miniature bronze likeness of Alexander the Great, discovered right in Denmark. Speaking to Live Science, Oldenburger marvels at the piece's intricacies and notes its striking resemblance to the legendary conqueror. "It bears all the hallmarks of Alexander the Great, from his iconic wavy locks to the symbolic ram's horns," he remarks. Metal detectorists Finn Ibsen and Lars Danielsen stumbled upon the remarkable artifact during a routine survey in a field outside Ringstedt, a quaint town nestled on the island of Zealand, a mere 50 kilometers southwest of Copenhagen, Denmark's bustling capital. Measuring a mere 2.7 cm in diameter and crafted from a bronze alloy, the find was promptly handed over to the esteemed West Zealand Museum, where Oldenburger plies his trade. Dating back to around 200 AD, during the reign of the enigmatic Roman Emperor Caracalla, the miniature portrait offers a tantalizing glimpse into a bygone era of fascination and emulation. "Caracalla's infatuation with Alexander the Great is well-documented," explains Oldenburger. "He not only emulated Alexander's style but fervently believed himself to be the reincarnation of the illustrious conqueror." Despite Denmark lying a staggering 2,000 kilometers from Alexander's birthplace in Macedonia, the ancient world's allure transcended geographical boundaries. Another likeness of Alexander had previously been unearthed, albeit in gold-plated silver. "Remarkably, this newly discovered portrait bears striking similarities, albeit in cast bronze," Oldenburger observes, highlighting its unique composition and craftsmanship. The bronze's high lead content suggests a meticulous casting process, possibly involving repurposing a bronze statuette. "This find is unparalleled in Scandinavian history, intimately linking our region with one of antiquity's most revered figures," Oldenburger asserts, his excitement palpable. In a world where history continues to surprise, this miniature marvel stands as a testament to the enduring allure of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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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Domestic Violence Crisis: Police Flooded with 147 Daily Calls - Unveiling the Daily Toll of Violence
    The latest data streaming in from the police on recorded incidents of domestic violence sends shockwaves through the Greek nation. In a stark declaration, law enforcement underscored the sheer magnitude of the domestic violence crisis gripping Greece. Over the past week, from April 15th to April 21st, 2024, the volume of distress calls flooding police lines staggered, averaging nearly 147 per day. Alarmingly, daily, over 10 women found themselves in such dire straits that police deemed it necessary to equip them with panic buttons. Within this tumultuous timeframe, officers nationwide swiftly answered 1,025 calls to the Rapid Response call center. Meanwhile, 81 women were provided quickly with the Panic Button application, a lifeline in the face of danger. The Hellenic Police grappled with 633 harrowing incidents, leading to 379 apprehensions. Furthermore, 23 victims found themselves whisked away to safety in Hellenic Police vehicles. It's imperative to note that within every police directorate nationwide, one or more sanctuaries, known as "safe houses," stand ready to provide short-term refuge for female victims of domestic violence, along with their vulnerable family members, including minor children, who seek protection from harm. Under the vigilant watch of the Greek Police, these sanctuaries serve as bastions of hope, offering shelter and comprehensive support. Collaboration with the Ministry of Family and Social Cohesion, local government entities, the Church, and various state and non-state social organizations ensures that victims receive the holistic care they urgently requ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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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Pyramid Temple Revelations: Mayan Kings' Charred Remnants Illuminate Political Shifts
    In the heart of Guatemala, amid the lush landscape veiled in the secrets of ancient civilizations, lies a pyramid temple in Ucanal. Here, archaeologists have unearthed a profound discovery that illuminates the enigmatic world of the Mayan kings. The charred remnants of Mayan royalty lie in a meticulously excavated royal tomb nestled within the temple's depths. The scene is one of intrigue and mystery, where the ashes of power and the echoes of political upheaval reverberate through time. Dr. Christina Halperin, an esteemed archaeologist from the University of Montreal, spearheaded the excavation. "While the presence of a royal tomb within a pyramid temple is expected, what we uncovered surpassed all expectations," she reveals, her eyes glinting excitedly. Thousands of charred bones and fragments of ornaments, numbering in the thousands, reveal a narrative of ancient rituals. The remains, discovered in 2022, bear the unmistakable signs of ritualistic burning, a symbolic act marking the dawn of a new political era. Detailed analysis of the bones unveiled a somber truth—at least two adults had met their fate in the flames, their identities forever lost to the annals of time. Yet, their legacy lives on through the remnants of opulent adornments, including seashell beads and fragments of majestic malachite objects. "This discovery is unprecedented," Dr. Halperin muses, her voice tinged with reverence. "While previous excavations hinted at the practice of burning royal remains, the ceremonial deposition of these ashes within the pyramid temple is a revelation." Indeed, the enigma deepens as the question of public spectacle arises. Were the royal remains subjected to the scrutiny of the masses as they were engulfed by fire? Dr. Halperin's words echo with uncertainty, yet a tantalizing possibility lingers in the air. As the veil of time is gently lifted, a pivotal moment in Mayan history emerges. The ashes tell a tale of political intrigue woven against the backdrop of a shifting landscape. Between 773 and 881 CE, the reign of Papmalil ushered in a new era marked by profound transformation. "It is a testament to the resilience of the Maya civilization," Dr. Halperin reflects, her gaze wandering over the ancient ruins. "In the wake of regime change, Ucanal blossomed anew, a testament to the enduring spirit of a civilization shrouded in mystery." In the hallowed grounds of Ucanal, where the echoes of the past whisper through time, each discovery unveils a fragment of a bygone era. As the sun sets over the majestic temple, the legacy of the Mayan kings endures a beacon of enlightenment amidst the shadows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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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4월 24일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선거일 -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최대 단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에 대하여
    내일 24일 북마케도니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다. 분석이 마무리 되면 북마케도니아 대통령 선거와 그리스와 영토 분쟁 및 아직도 들끓고 있는 국호 문제에 관해 정리해 올려볼까 한다.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최대 단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Въ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юционна организация)" 이 민족주의 조직은 1893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트라키아 영토인 테살로니키에서 설립된 "마케도니아인 혁명 기구"가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직은 이후, 불가리아 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조직은 마케도니아를 독립된 영역으로 간주하였기에 마케도니아의 주민들은 어떤 민족인지에 상관 없이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흐리스토 타타르체프(Hristo Tatarchev)가 설립한 이 조직은 타타르체프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최초의 조직 명칭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라고 하였다.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설립 당시에 5개의 기본 원칙을 마련했다. ① 혁명 기구는 마케도니아에서 조직되고 활동해야 한다. 그리스인, 세르비아인은 혁명 기구를 불가리아 정부의 도구로 삼을 수 없다. ② 혁명 기구의 설립자는 마케도니아에 거주하는 주민이어야 한다. ③ 혁명 기구의 정치 목표는 마케도니아의 자치여야 한다. ④ 혁명 기구는 비밀로 독립한 것이 다른 독립 국가 정부와의 관련성이 없어야 한다. ⑤ 불가리아, 불가리아 사회에 거주하는 마케도니아인의 이민은 마케도니아의 혁명 투쟁에 대한 정신적, 물적 지원만 부여해야 한다. 1896년, 혹은 1897년에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혁명위원회라는 비공식적 명칭으로 활동했다. 1903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하여 일린덴 봉기(Ilinden Uprising)를 일으키면서 크루셰보(Крушево)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게 된다. 일린덴 봉기는 한국의 3.1절 운동과 비슷한 비폭력 봉기였다. 이 봉기 자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대의 진압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에서는 일린덴 봉기를 국가와 민족, 종교에 대한 상징적인 투쟁이자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이 실패로 끝난 비폭력 봉기는 마케도니아 민족 독립 투쟁의 시초가 되었다. 일렌덴 비폭력 운동을 주도한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혁명위원회는 오스만투르크의 경찰들이 끈질기게 추적하자 1905년에 내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 조직은 소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고 그와 함께 체결된 불평동 조약인 뇌이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를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내주었으며 혁명 기구 또한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등으로 분류되어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조직은 분열되었다.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는 1922년부터 1934년 사이에 그리스로 편입된 서부 트라키아, 스트루마 강, 로도피 산맥을 거점으로 하여 비폭력적인 혁명 조직에서 무장 투쟁 조직으로 전환되어 활동하게 된다. 1920년에 설립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위성 조직이었던 내부 서부 실지 혁명 기구를 설립하게 된다. 이 단체는 불가리아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편입된 디미트로프그라드, 보실레그라드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1923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화해를 모색하고 이들의 관계에 안정화를 꾀하던 불가리아의 알렉산데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를 두고 그가 사회주의자로써 불가리아 민족의 위험스러운 적으로 보고 그를 체포해 고문 끝에 살해했다. 이와 같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코민테른과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혁명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결국 이들은 그토록 증오하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험악한 관계를 정리하고 서로 연대를 구축해 통일 마케도니아 혁명 운동을 정립하기 위해 논의했다. 소련은 이와 같은 계획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어떠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1925년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주요 인사들이 살해되면서 좌우 진영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좌파 계열 인사들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를 결성하면서 공산주의 단체와의 연계 활동을 전개했다. 이반 미하일로프(Ivan Mihailov)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수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1934년 10월 9일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에서 활동하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데르 1세 국왕, 프랑스의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을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켜 이 단체를 유럽 내 테러단체로 인정되어 서유럽 민족주의 단체들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거리를 두게 된다. 1941년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군대는 마케도니아 바르다르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로부터 "해방군"으로 여겨졌고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구성원들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의 통치 기구였던 불가리아 활동 위원회를 창설하고 여기에 크게 관여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방침에 반대하는 불가리아 군대를 점령군으로 여기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1943년에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반(反) 불가리아 저항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는 이와 같은 방침을 포기했다. 1944년 8월 2일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연합파의 구성원들이 유고슬라비아의 프로호르 프친스키 수도원(Prohor Pčinjski)에서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 반(反) 파시스트의 첫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요시프 티토에 의해 수립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구성국 가운데 하나인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에 관여했던 것이다.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체제에 들어가면서 존재하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가 부활할 수 있는 방법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불가리아, 북마케도니아에서 정당 형식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Внатрешна 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 - 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за македонско национално единство)이 창립되었고 불가리아에서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불가리아 국민운동(ВМРО – Българско национално движение)이 1991년 소피아에서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불가리아 국민운동 정당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를 계승한 정당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현대적인 민족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보수주의 애국 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 친러 세력의 중추이기도 하다. 이 정당은 불가리아 민족의 정신적 통합, 범불가리아 민족주의 운동을 지향하고 있고 불가리아 민족주의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는 아주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을 포함하는 대(大) 불가리아 연합의 실현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의 권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터키인이나 롬인이라 불리는 집시, 그리고 불가리아 정교회를 제외한 비(非) 전통적인 종교 신자와는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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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지난 17일 크로아티아 총선에 대한 분석 - 친서방 정당인 여당의 승리와 새로운 다크호스의 등장
    이번 크로아티아의 선거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2000년 선거 이후 무려 24년만에 실시되는 평일 선거였던데다 대통령인 조란 밀라노비치(Zoran Milanović)가 대통령 직함을 내려 놓고 스스로 사민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대통령이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헤프닝을 벌인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2000년 개헌 이후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의 당적 소유를 금지하고 있다. 밀라노비치는 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3월 18일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는 밀라노비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지 않는 한 후보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밀라노비치는 이러한 헌재의 판결에 불복하고 사실상 총리 후보로 행세하면서 사민당 주도 정의의 물결 연합 유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정당한 탄핵 사유가 될 수 있기에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과 그의 정적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가 밀라노비치의 탄핵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선거는 예상대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주도하는 HDZ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현직 총리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의 3기 정부가 출범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 되었자만 HDZ 연합이 집권에 필요한 단독 과반인 76석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밀라노비치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은 어려울 전망이다. 그래서 플렌코비치 총리는 4월 18일부터 3기 정부 구성을 위한 연정 협상에 나서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HDZ 집권 후 2018년부터 연이어 부패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은데다 국민들 상당수가 크로아티아 사민당을 더 싫어했기 때문에 HDZ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 많았다. 즉, 사민당이든, HDZ든 둘 다 싫은데 그나마 덜 싫은 쪽으로 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더불어 EU와 나토를 비판한 국수주의 포퓰리즘 정당인 사민당이 2위로 부상하였지만 HDZ에 실망하는 국민들 또한 늘어나면서 사민당에 표를 던진 결과이기도 하다. 더불어 고물가로 인해 민생 경제가 어려워지고, 집권 세력의 부패 범죄에 대한 분노가 양측의 대립을 팽팽하게 했다는 분석 또한 나타나고 있다. 크로아티아 사민당이 이끄는 범좌파 야권 연대인 정의의 물결은 고작 2석을 늘리는데 그쳤다. 반대로 HDZ는 전체 의석 151석 중 60석을 차지했다. HDZ는 지난 2020년 총선에서는 66석을 차지했지만, 6석 줄어들었다. 이는 제3의 정당,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했다는 얘기다. 물론 사민당은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무시하고 탄핵을 각오하면서 유세에 나섰지만 목표였던 정권 교체에 이르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사민당의 대표인 페자 그르빈(Peja Grvin)은 더 나은 결과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소감을 밝힌 뒤, 우선 야당 정부 구성 관련한 회담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HDZ는 좌파 혹은 우파 정당과 과반인 76석을 확보해야 내각을 꾸릴 수 있다. 원래 HDZ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갑자기 사민당 후보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판세가 요동쳤다. 1991년 독립 이래 한 번도 권력을 내준 적 없는 HDZ, 현 정권에 대한 군중들의 심판론까지 작동한 것이다. HDZ가 집권하면서 크로아티아의 EU 가입과 유로화 도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극도의 쇠락을 보인 크로아티아 경제에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이 때만 해도 EU는 지금의 EU와 달리 매우 정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무려 30명의 장관이 임기 중에 부패로 사임했다. 더불어 제조업이 매우 약해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와 더불어 독일을 중심으로 한, EU 보조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율, 지나치게 의존율 높은 관광업, 이와 같은 취약한 경제 구조에 대한 개혁을 이끌어 내지 못하여 국민들의 신뢰도 점차 잃어갔다.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은 크로아티아 경제 특성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와 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는 유권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한 HDZ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괴뢰 정부에 부역한 이들이 많고 우스타샤(Ustaša) 파시즘 출신들이 많다. 우스타샤 출신자들, 이들의 후예들은 대를 이어 크로아티아 정계를 장악해왔고 온갖 비리와 부패의 주범이 됐다. 나치의 부역한 이들이 처벌받지 않고 버젓이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어도 EU는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발칸 지역의 나치들에 대한 청산률은 2~30%에 불과했는데 이처럼 낮은 청산률과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에도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EU 또한 나치와 공범이나 다를 바 없다. 나치의 절멸을 천명한 러시아가 EU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비판해왔던 것이다.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현 HDZ 정권의 부패 정치인들과 경제 실정을 비판하면서 자국 경제에 부담을 주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꾸준히 반대해왔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내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대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개선을 촉구했었다. 이러한 밀라노비치의 행동에 러시아는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했다.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EU, 미국, 나토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중에 하나다. 크로아티아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이후 서방 동맹에 대한 확고한 지지 의사는 모든 정당에 걸쳐 내려진 합의였지만, 밀라노비치는 이를 뒤집은 셈이다. 플렌코비치 총리는 그 이전에도 밀라노비치 대통령의 친러시아 정책을 반복적으로 비난해왔다. 그러나 밀라노비치의 이와 같은 정치적 스탠스는 크로아티아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사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성원으로 인해 그는 원내 최대 야당의 대표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벌인 지난 2년여 동안 크로아티아는 EU 회원국들 중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확실한 국가로 분류되었으나, 이제 그 입장은 밀라노비치 대통령과 사민당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려 있게 된 것이고 민주연합이 연정에 실패한다면 크로아티아 헌법과 선거법에 따라 재선거를 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연합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이전과 같은 발언권이 매우 약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난민 받아들이기 등에 크로아티아 국민들이 매우 피로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로아티아 국민들의 반응도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할 때와 사뭇 다르다. 그때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며 러시아를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규탄했지만 이제는 크로아티아가 최악의 경제난을 벗어날 수 있다면 러시아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번 크로아티아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로아티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날 투표율이 61.83%로 2020년 마지막 선거의 47%에 비해 상승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제는 사민당과 HDZ를 대신할, 제3의 정당이 새로운 닼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그 정당이 바로 조국운동 연합당(Domovinski pokret)이다. 2019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낙선했던 미로슬라브 스코로(Myroslav Skoro)가 이듬해인 2020년 2월 29일 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정당으로 강성 우파 성향을 갖고 있다. 조국운동당이 이번에 14석을 확보하면서 양대 정당을 저울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조국운동 당 대표 이반 페나바(Ivan Penava)는 조국운동 연합이 앞으로 크로아티아의 운명을 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당 성향 상으로는 HDZ 쪽이 상대적으로 가깝긴 하지만, 양당 내에 연정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반면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정의의 물결은 아예 HDZ를 배제한 거국 내각을 구성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조국운동의 행보에 따라 추후 정권 구성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HDZ보다 더더욱 우익적인 면모를 과시할 것으로 보여 EU, 친서방보다는 다극화 세계의 일환으로써 크로아티아 경제 회복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다크호스의 향방에 따라 크로아티아가 어떤 길로 방향을 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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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파키스탄 신디족 이야기
    신디족은 인도-아리안 그룹이며 이전에는 인도의 일부분이었던 파키스탄의 신드(Sindh) 지방에서 오래 거주하던 민족이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된 후 대부분의 신디족은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이 많았다. 신디족 중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인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오늘날 신디족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존재하는데 인도 신디족은 주로 힌두교도들신 반면 파키스탄 신디족은 주로 무슬림들이다. 파키스탄 내에서도 신드 주의 독립을 외치는 신디족들이 있다. 이들의 시위는 파키스탄 정부에서도 대단히 위협적이다. 듣기로는 신디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라치에서 분리 독립 선거를 개별적으로 했다는데 인구 1,000만의 카라치는 신디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듯 싶다. 파키스탄에 잔류함으로써 시위도 이전보다 줄어들은 양상이라고 한다. 그나마 신디 사막 유목족의 전통을 지키려고 쉼터를 만들거나 주거지를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노력을 하고 있다. 드라비다계 민족인 신디족은 드라비다어족의 언어인 신디어를 쓴다. 그리고 신드 주와 인접한 인도 구자라트도 같은 계통이다. 실제로 인도 구자라트 주에는 신디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물론 종교가 힌두교이고 신드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인도, 인더스라는 이름의 원형이기도 하다. 신드 지역은 인더스 강의 인더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두(Sindhu)라고 하였는데 인더스 강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라 하여 그 이름이 사용된 것이다. 힌디어와 힌두어는 고대 페르시아인이 "s"를 "h"로 발음했기 때문에 신드(Sindh)와 신두 (Sindhu)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고 힌두가 여기에서 나온다. 같은 방식으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지역의 사람들을 힌디어 사람들, 힌두어, 고대부터 이 지역에 사용된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나중에 인도 하위의 전체 북부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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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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