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우크라이나, 충격적이고 추악한 "러시아 민항기 납치 계획 사건"의 전모
    워싱턴포스트에서 밝혀낸 미국 펜타곤 기밀문건의 내용 중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충격적인 내용도 들어가 있는데 이같은 내용에 대해 "바이러시아 21"에서도 TOP 기사로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내막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러시아군이 시리아에 주둔한 것은 2015년 9월 30일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주도의 시리아 내전에서의 공습이 IS에 대한 타격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입증되자 시리아의 동맹국인 러시아는 시리아 내 라타키아 항 근처의 공군 기지에 자국의 전투기와 장비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IS 및 반군과의 내전에서 패배 직전에 몰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러시아군의 지원은 아사드 대통령 정권을 기사회생시켰다. 시리아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최대의 정치 협의체인 아랍연맹(Arab League)에 재가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최근에는 친 서방주의를 표방하는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에 나섰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현재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게 되면서 다른 우회적 전략으로 러시아군에게 타격을 주려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공격 작전 및 테러, 사보타주(비밀 폭파작전)와 같은 부분이다. 먼저 무인항공기인 드론을 이용해 시리아 내 러시아군의 주요 군사 시설이나 러시아 관련 석유 인프라 등을 타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무인함정인 드론 보트를 이용해 러시아가 옛 소련 시절부터 운용하고 있는 시리아 서부 해안의 타르투스 해군기지를 목표했다. 이어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민간 용병업체인 바그너 그룹의 기지를 노리며 바흐무트에서 전투 중인 바그너 그룹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으며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 민주군(SDF)의 전사들을 동원해 러시아 관련 시설물들을 폭파한다는 마치 테러와 같은 행위들을 기획했다고 폭로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테러 작전은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 젤렌스키가 2022년 12월 29일에 작전 계획을 전면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압박 및 보급로 문제가 걸려 있고 드론 공격의 한계성과 공격 성공에 대한 의구심 등 여러 이유로 공격 작전을 주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고 하였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실제로 작전을 수행했다면, 시리아 지역에서 미국을 표적으로 한 러시아의 맞대응이 촉발되어 미국 또한 참전할 수 있는 명분이 세워졌을 수 있음을 예측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대응 수위가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된 목표물들은 시리아 라타키아 공항 내 '러시아군 핵심 시설', '석유 및 가스 시설', '바그너 그룹' 기지 순서였다. 여기에서 다소 충격적인 사실 하나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 민항기 납치 작전"이다. 이는 영국의 네티즌들이 조직한 탐사보도 매체인 <벨링캣(Bellingcat)>에 의해 처음으로 폭로된 이 작전은 우크라이나 정보국이 지난 4월 21일에 납치 작전을 주도했던 전 정보국 요원인 로만 체르빈스키(Роман Червінський)를 권한 남용 혐의로 체포하고 키예프 대법원에 기소했다. 그러나 체르빈스키는 자신에 대한 체포가 오로지 정치적의 결정이라고 항변했다. 여기에 대해 우크라이나 매체 Страна.ua에 의하면 <러시아 민간 항공기 납치 계획>은 체르빈스키가 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부 세력과 독단적으로 진행하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것이 우크라이나 정보국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다. 과연 이러한 에어크레프트 하이재킹(Aircraft Hijacking, 비행기 납치)과 같은 엄청난 테러 범죄가 로만 체르빈스키(Роман Червінський)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을까? 이와 같은 엄청난 테러 범죄는 몇몇 개개인의 정보 요원들이 단독으로 개시하지 않는다. 보통 정보국의 사보타주와 같은 작전은 정부 수반의 지시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정보국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지시하에 움직에게 되어 있다. 결국 체르빈스키의 배후에는 젤렌스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이와 같은 테러 작전인 비행기 납치는 사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체르빈스키는 지난 2022년 7월 돈으로 매수한 러시아 민항기 조종사로 하여금 항공기가 고장난 것처럼 관제탑을 속인 뒤에 기수를 우크라이나로 돌려 카나토보 공항에 비상 착륙할 수 있도록 하는 유도 작전을 진행했다. 하지만 예정된 날인 7월 23일 여객기 대신 러시아군의 미사일이 날라와 계획은 무산된다. 그 결과로 인해 현장에 출동해 있던 우크라이나군 부대장이 전사하고 군인 17명 부상, 전투기 2대 파괴, 활주로와 장비, 건물이 크게 손상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FSB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조종사를 매수하고 여객기 납치 계획을 사전에 분쇄했다면서 관련 영상을 공개했으며 조종사가 이같은 계획을 알림으로써 러시아가 사전 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정보국의 가장 뼈아픈 작전 실패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는 작전 실패로만 끝나지 않고 러시아군의 보복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카나토보 공항에 출동한 부대의 부대장이 사망하고, 공항 시설도 다수 파괴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야만적인 <러시아 민간 항공기 납치 사건>은 다행히 미수로 끝났고 결국 국내뉴스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은 펜타곤 기밀문서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폭로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11
  • 2023년 터키-시리아 동남부 지역 지진 당시 쿠르드족 이야기
    터키-시리아 동남부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해 많은 현지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지만 이 지진이 발생했던 지진대에는 터키인과 시리아인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진대 지역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쿠르드인이고 그 다음으로 많은 숫자가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이번 지진이 발생했던 지역은 쿠르드인들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이다. 이번 지진이 발생하면서 터키인과 시리아인에 비해 쿠르드인들이 엄청난 주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쿠르드인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이 줄고 있다. 적어도 서방이 터키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관계에 있어 첨병으로 이용해 먹을만한 민족은 쿠르드족이다. 터키계 아르메니아인의 경우, 대부분 정교 신도들이 많은데다 러시아의 비호를 받고 있기에 이들보다는 적어도 국적도 없고 중동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디아스포라를 겪고 있는 민족은 쿠르드족이다. 게다가 이번에 지진이 발생한 시리아 북부 지역의 경우,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Autonomous Administration of North and East Syria)라 하는 로자바(Rojava) 연방이 존재하고 있다. 즉, 시리아의 쿠르드족 자치지역에 국가를 세운 셈인데 아무도 승인을 안해주고 있는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미승인국이다. 이들은 애초부터 무장조직에서 시작했다. 따라서 인민방위대(Yekîneyên Parastina Gel, 속칭 YPG)를 갖고 있다. 비슷한 조직으로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자치기구인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무장조직인 페쉬메르가(Peshmerga)가 존재한다. 2004년 시리아 쿠르드 위원회에 의해 창설되었던 이 조직은 사설 군사단체로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에 인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알라위파와 마론파 기독교도, 쿠르드 등을 우대했고 바샤르가 수니파를 탄압하는데 이들 조직을 이용했으며 그 역할을 충실히 따라줬기 때문이다. 다만 정당으로써 보자면 쿠르드 민주 연방이 PKK와 연계되어 이들이 다마스쿠스에서 시위를 벌였었고 아사드 정권에 의해 탄압받은 전적이 존재하였지만 수니파를 탄압하는데 적극적이었기에 바샤르로부터 간접적으로나마 인정을 받은 셈이다. 이후 소위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시리아 내전으로까지 분화되자 시리아 정규군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함에 따라 사설 방위대가 재조직되어 쿠르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특히 알 카에다와 ISIS가 준동하니 자유 시리아군 분파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한 위협에서 2014년, 마슈드 바르자니(Mesûd Barzanî)를 주축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 독립된 쿠르드 연방이 생성되었고 2016년 3월 17일 '북시리아 연방 - 로자바(Federasyona Bakûrê Sûriyê – Rojava)'를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국가 형태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로자바(Rojava)는 쿠르드어로 서쪽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시리아 쿠르디스탄, 혹은 서(西) 쿠르디스탄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2016년 12월 28일 새 헌법을 채택하면서 정식명칭을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Sîstema Federaliya Demokratîka Bakûrê Sûriyê‎)'로 개정했다. 수도 카미실리(Qamishli)로 정했지만 터키와 국경 근처였기에 비교적 후방인 아인 이사로 천도했다. 이들 로자바 쿠르드인들은 ISIS에 맞서 터키와의 국경도시인 코바니를 두고 공성전 양상의 전투를 벌였다. 분명히 쿠르드족에게 유리한 형세이지만, 전세가 소모전으로 빠져버린 상태에서 로자바 쿠르드인들 상당한 손실을 보았다. 이들 YPG는 세 지역으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고립된 형세라 한쪽이 위기에 빠지면 구원할 방법이 없다. 오로지 터키를 통해 이동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PKK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터키 정부로 인해 YPG는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YPG는 2015년 결국 ISIS와의 공성전에서 코바니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아시리아 기독교도들과의 협공으로 오히려 공세로 전환해 시리아 북부 대부분을 탈환하고 IS의 수도 라카에 가장 근접한 무장세력이 되었다. 이라크 북부가 사실상 페슈메르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처럼 시리아 북부는 YPG에 의해 사실상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더불어 로자바 당국은 민주사회주의, 직접민주주의, 양성평등에 기반한 세속주의를 추구하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를 지지하면서 시리아 평화회담 당시 쿠르드족 자치 지역 창설을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우선 알 아사드 정권인 시리아에 소속된다고 선언하긴 했는데 기타 중동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아랍연맹이 로자바의 존재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와 더불어 터키 국경지역에 YPG의 세력범위가 늘어나고 터키 남부의 내전 상황이 격화되면서 PKK와의 연계를 우려하는 터키의 견제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2019년 10월 터키군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로자바의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터키와 전쟁이 시작된다. 미국, 쿠르드, 시리아 반군은 IS에 공동으로 맞섰지만 터키가 이미 2018년에 로자바를 테러단체로 지정하면서 로자바와의 동맹에 대해 터키는 미국에 격렬히 항의했다. 당시 미국 일각에서도 미국-터키와의 관계가 무너진다며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2019년 10월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밝혔고 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하면서 로자바의 쿠르드족은 IS 토벌을 위해 미국에게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미국의 대 IS 전선에서 쿠르드는 1만여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참여할 정도로 미국의 IS 공세에 매우 협조적이었기에 미군의 철수는 터키군에게 쿠르드족을 던져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는 미국의 철군 선언 사흘 만에 로자바가 점유한 영토에 대해 터키군이 공습을 개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쿠르드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쿠르드의 존재 자체가 미국 입장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하고 있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또 다른 미군을 희생시키는 전장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리아 내전이 초반에는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반군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가 이후 다에시가 개입했고 반군과 IS가 몰락한 뒤로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대리 전쟁 양상으로 변질되어 굳이 미국이 이슬람 종파 간의 내전에서 군대를 희생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터키와 쿠르드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발 빼는게 이득이었던 셈이다. 터키는 그동안 쿠르드 무장단체들과 꾸준하게 무력 분쟁을 이어왔고 국민들 정서 또한 전체적으로 쿠르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쿠르드의 독립 자체는 매우 비현실적인 방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설령 쿠르드를 친미로 끌어들여 독립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결국 터키와의 정치적 마찰을 겪어야 함은 물론, 전 아랍 연맹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독립한 쿠르드와 터키 간에 전쟁이 발발하고 아랍 연맹이 쿠르드를 독립시킨 미국에 반발한다면 그동안 안정적으로 수급해오던 석유 경제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터키의 반미정서가 친 러시아 정서로 이어져 미국, 서방과 러시아 간의 대리 전쟁 양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더불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조차도 재빠르게 외교 차관 발표를 통해 쿠르드족이 시리아 정부로 귀속해올 것을 제안하며 터키의 군사행동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인 거주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배치하였지만 여기에 또 러시아가 개입했다. 러시아는 터키의 편을 들어 쿠르드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시리아하고도 동맹국이다. 러시아는 터키와 시리아 사이를 조정하며 쿠르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푸틴 대통령은 실무 방문 형식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을 10월 말 러시아로 초청했으며, 에르도안이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모스크바에서 회담이 성사되었다. 이는 시리아 전선에 러시아가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과 더불어 러시아군이 기존의 시리아 정부군 지원에서 벗어나 시리아 내의 분쟁을 관리하는 역할로 격상됐음을 의미한다. 한편 터키와 시리아 국경 도시들에는 2021년 1월경의 공식 통계로 364만 5557명의 시리아 난민과 쿠르드인들이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이들에 대해 인도적 거주허가를 내렸으나 경제적인 원인으로 난민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며, 그나마도 EU와 국제단체의 지원금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시리아 난민들은 가지안테프와 샨리우르파, 디야르바크르 등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퍼져 슬럼가를 형성하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요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터키와 시리아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지만 아직 이 지역들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국가가 미승인국,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디아스포라 민족이기에 관심이 식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9
  •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러시아 군부에 대한 이야기
    러시아의 군부는 여전히 세르게이 쇼이구(Сергей Шойгу)와 발레리 게라시모프(Валерий Герасимов)가 양분하여 맡고 있다. 쇼이구는 현재 국방장관이고 게라시모프는 총참모장이다. 이 두 인물을 통제하는 인물은 역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그 아래로는 연방 육군 총사령관으로 올렉 살류코프(Олег Салюков), 우리 공군에 해당하는 항공우주군 총사령관에는 세르게이 수로비킨(Сергей Суровикин), 연방 해군 총사령관인 니콜라이 예브메노프(Николай Евменов)이 자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인사들로 볼 때 러시아 군의 단점은 가장 중요한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Сергей Шойгу)가 군과 전혀 상관이 없는 크라스노야르스크 공과대학에 전공이 건축이라는 것이고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수로비킨(Сергей Суровикин)은 공군이 아닌 육군 출신이다. 수로비킨은 2017년에 전역한 빅토르 본다레프(Виктор Бондарев)의 후임으로 항공우주군 총사령관이 된 인물이라 공군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에 나토와 전쟁 시 나토에 대한 주 공습과 항공 대전을 벌일 때 얼마나 유동성 있는 공격을 감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군 체계 중, 무엇보다 중요한 공군에서 총사령관 자체가 그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전략적으로 러시아 군의 하늘을 책임질지 알 수 없다. 지난번에 내가 쇼이구를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정통 군인인 발레리 게라시모프(Валерий Гера́симов)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그는 전형적인 루스 슬라브의 러시아인이 아니라 타타르족과 혼혈이다. 그는 타타르 자치공화국의 카잔에서 타타르족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임업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타타르족의 정체성이 없어지고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게라시모프는 군인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여 카잔에 위치한 카잔 수보로프 군사 학교, 타타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회의 카잔 고등전차사령부 학교, 소비에트 연방 원수 말리노프스키 기갑 군사 아카데미, 러시아 합동군사참모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전형적인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카잔 고등전차사령부 학교를 졸업한 이후, 게라시모프는 기계화 보병 소대, 중대 사령관을 역임했고 육상 전차 공격과 보병으로 전투에서 육박전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게라시모프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된 때는 제2차 체젠 전쟁 때이다. 모스크바 군 제1부사령관과 북카프카스 제58군 사령관을 맡아 그로즈니 시의 시가전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로즈니를 장악하는 도중 강간 및 살해 등을 저지른 유리 부다노프(Юрий Буданов)를 체포하여 모스크바를 압송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붉은 광장에서 승전 기념일 퍼레이드를 네 차례 지휘했으며, 2012년 아나톨리 세르듀코프가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을 사임한 후, 새로운 국방장관 세르게이 쇼이구의 제안으로 러시아 연방군 총참모장 겸 러시아 연방 국방부 제1차관에 임명되었다. 2014년 러시아 육군 최고위직인 육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했다. 그는 같은 해, 크림반도 진입 작전을 전격 지휘했고 크림 일대를 보호하여 주민 투표를 거행할 수 있도록 외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크림 반도에 진입하여 러시아군을 주둔시키는 등, 크림 합병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와 같은 역할로 인해 게라시모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EU의 제제 대상이 되었다. 그는 현대 러시아 군사학이라는 학구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2013년 2월, 방위 산업지(Военно-Промышленный Курьер)에 ‘군사과학의 가치는 예측에 있다(Ценность военной науки заключается в предсказании)’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해당 논문은 미래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인 시각과 군사학에 대한 함의의 본질을 다루었다. 게라시모프는 러시아 군사과학계에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실질적이고 의미있는 수준에서 21세기 미래 전쟁의 도전에 대한 현대 러시아 군사사상을 논문에 집약했다. 이와 같은 논문의 발표 이후 사람들은 이를 <게라시모프 독트린(Доктрина Герасимова)>이라고 불렀다. 게라시모프의 논리에 의하면 “전쟁은 더 이상 선전포고로 시작되지 않고, 일단 시작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주 논조라 볼 수 있겠다. 2000년대 중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오렌지 사태’와 2010년경 시작된 ‘아랍의 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외부 세력의 침투에 의한 정보의 왜곡, 프로파간다, 페이크 뉴스의 유포, 여론의 조작 등과 마찬가지로 아군과 적군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 간의 분열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사회적인 대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게라시모프 독트린(Доктрина Герасимова)>으로 나선의 러시아의 정보전은 2015년 시리아 내전 개입 및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반군 지원 등의 작전도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게다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사’라는 푸틴의 칭송을 들었고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왔다. 올해 67세인 그는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러시아 내 군부에서 쇼이구 다음으로 최고의 실세였으며 러시아군 최고위 현역 장성이었다. 그는 군 현대화를 비롯해 각종 작전 계획과 전술 등을 수립하고 오랜 기간 동안 실험 및 실전에 적용해왔다. 2월 24일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도 게라시모프의 작전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의 목표에 대해 예측해 본다면 개전 3일 내 수도 키예프 등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젤렌스키 대통령 등 지도부를 제거한 후 친(親) 러시아 정권을 수립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그가 그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면 현재까지 전황으로 볼 때 완전한 실패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은 전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법이다. 러시아의 군사작전의 시작과 전략은 예측만 가능할 뿐, 자세한 내막은 일반인이나 전문가들도 군사기밀이라 알 수 없다. 그저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9
  • 2023년 3월, 러시아 국방부의 1차 군사작전의 종료 발표와 군사작전의 성과를 주목하며
    러시아 국방부는 1차 군사작전의 종료를 알리며 군사작전의 결과에 대해 언급했다. 현재까지 약 한 달 이상 이루어진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에서 지금까지 참전했던 군인 1,351명이 사망하고 3,825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또한 군사 작전의 첫 번째 단계의 주요 임무가 완료되었다며 우크라이나군의 전투 역량이 크게 파괴되어 주요 목표인 돈바스 지역을 해방시키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말인즉,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시설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그에 따른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는 발표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 군 측의 발표이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만큼 실효성 있게 목표한데로 군사작전을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러시아 국방부 측은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8년 동안 돈바스 방어를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며 러시아군과 돈바스 지역 인민공화국의 군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격 작전은 주요 거점에 대한 폭격이 우선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돈바스에 주둔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측은 59,000명 중 14,000여 명이 사망하고 약 16,000명이 부상당해 돈바스 지역 내에서는 러시아군과 돈바스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공군과 방공시스템이 사실상 거의 파괴되었으며, 해군도 완전히 궤멸되었음을 강조했다. 더불어 국방부 대변인 이고르 코나셴코프는 우크라이나 군대에 훈련된 예비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며 훈련을 받지 못한 인력의 충원은 큰 인명 피해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다.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이 운용하던 2,416대의 탱크와 전투 장갑차 중 1,587대가, 군용기 152대 중 112대, 헬리콥터 149대 중 75대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국방부는 군사작전이 민간인 등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주장했다. 이어 작전 개시와 함께 첫 이틀 동안은 제공권을 장악했고, 키예프, 하르코프, 체르니고프, 수미, 니콜라예프는 러시아군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남부 헤르손과 자포로제의 대부분은 통제 하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오늘 브리핑에서 키예프 인근 칼리노프카 마을의 연료 저장 시설을 칼리브르 순항 미사일로 파괴했다고 밝혔다. 이 연료 저장 시설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육군의 연료 보급기지로 지금까지 유지하는 연료 저장 시설 가운데 최대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 군은 빈니차의 우크라이나 공군 사령부에 칼리브르 미사일 공격을 가해 중요 기반 시설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고 밝혔는데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공격과 파괴의 전과는 사실인듯 하다. 국방부는 또 '밤의 사냥꾼'으로 알려진 Ka-52, Mi-28N 공격용 헬기가 지난 밤 우크라이나군 탱크 7대를 포함해 24대의 군사 장비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또한 우크라이나 북서부 리보프 인근의 용병 훈련소를 공격하는 이스칸데르 미사일 영상을 공개했다. 러시아 측은 지난 13일 용병들의 1차 집결지로 알려진 리보프 인근 스타리치 군사 기지를 공격했다고 밝혔었다. 러시아 국방부는 또한 우크라이나군이 체르니히프를 연결하는 다리들이 폭파됐다며 이는 민간인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체르니히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떠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다리 파괴는 러시아군의 도시 진입을 막기 위한 방어용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또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말 그대로 민간인들이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퇴로를 차단한 것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국방부의 말대로라면 전황은 돈바스 지역 이내로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될 경우, 국지전의 양상으로 앞으로의 전쟁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앞으로의 일은 모르기에 러시아 국방부의 성명만으로는 온전히 믿기는 어렵다. 어쨌든 우크라이나 전 국토 점령의 목적이 아닌 우크라이나 군의 무력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러시아가 원하는 작전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15명의 장성과 1,350여 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전차 및 탱크, 지상군의 각종 무기들의 손실, 게라시모프가 설계했던 하이브리드 전쟁에서의 패배는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작전을 종료했다 해도 뒷맛이 매우 씁쓸할 것이다. 이제 남은 관건은 미국과 서구 측의 제재에 맞서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지이다. 2차 군사작전은 언제 개시되고 제재에 대한 소리없는 전쟁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9
  •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의 원조, 스테판 반데라의 이야기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의 원조격인 스테판 반데라는 폴란드 시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을 조직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반데라가 나치와 협력했으며 그의 조직 부하들이 다른 민족들을 학살한 것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도저히 옹호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에 의하면 독립투쟁은 인정하지만 학살 방조자라는 전과도 크기 때문에 기념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개별적으로 추모단체들을 만들어 그를 추모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개인들이 가지는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에 굳이 막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치에 가까운 부분들이 오히려 러시아가 전쟁을 기획하는 빌미가 되고 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이 적극 돕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스테판 반데라가 협력했던 나치 인종 청소 대명사는 독일 보안 경찰 및 보안국 특수 작전 부대로 알려졌던 특수 인종 청소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은 기본적으로 SS와 게슈타포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이들은 당시 친위대 국가 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00~1945)와 독일 보안국(SD)과 보안경찰(SiPo)의 총사령관이며 친위대 돌격대지도자(SS소령)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의 감독과 지시하에 부대가 창설되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권은 1942년 5월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영국 특수작전행정부(SOE)의 요원들과 체코인들에게 암살당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고 이후에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Ernst Kaltenbrunner, 1903~1946)가 지휘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대조국전쟁에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대량학살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다. 이 때 아인자츠그루펜은 A대, B대, C대, D대의 각각 4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휘하에 아인자츠코만도와 존더코만도라는 부대들을 창설하게 된다. 소련의 점령지에서 독일군에 대한 파르티잔 게릴라전 활동이 격렬해지자 아인자츠그루펜과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당원들은 공산주의자 등의 혐의가 의심되면 무조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민간인의 피해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만 갔다. 그리고 전쟁 중에 나치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추진했기에 더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희생자 숫자는 여타 동유럽의 제노사이드보다 더 처절하고 참혹하게 변해갔다. 스테판 반데라 등의 극우주의자들과 그의 그룹 OUN은 아인자츠그루펜의 보조 경찰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소련인들과 폴란드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밀고하고 직접 살해하면서 인종혐오 행위를 지속해왔다. 반데라당원(Бандеровці)들은 소련 내 분리주의자의 대명사로 통하면서 소련에 의해 철저히 탄압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컸다. 독일군은 아인자츠그루펜에 물자와 운송 수단, 주거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경비병의 형태로 인력을 지원하고 수감자들을 수송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주로 유태인 남성들만을 총살했지만 1941년 늦여름 경부터 아인자츠그루펜은 가는 곳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유태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총살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신속하게 소련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도주할 여유도 없이 갑자기 들어온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 부대는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가서는 모든 유태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로마니(집시)들도 잡아갔다. 희생자들은 귀중품을 내놓고 옷을 벗도록 강요 받았는데, 그러한 귀중품들은 나중에 독일에 보내지거나 지역 협력자들에게 배급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때에 따라 지역 정보 제공자인 우크라이나 극우당원들과 OUN, 통역관들의 도움으로 우크라이나 각 지역의 유태인들을 지목하여 지정된 장소에 모이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행군을 하거나 트럭을 타고 참호가 미리 준비된 학살 장소로 이동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이와 같은 과정도 생략해버리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에서 발견하자마자 총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인자츠그루펜은 희생자들을 따로 구분해낸 뒤, 희생자들을 묻기 위해 이들을 점령지 마을과 도시의 외곽에 있는 공터, 숲 및 협곡으로 행진하도록 만들었고 그곳에 미리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곳에 이르거나 총살당할 피해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몰수하고 강제로 탈의하게 한 다음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열린 참호 앞에 서거나 엎드리게 했고 그 후 2명 이상의 사수를 세워 연발로 총을 쏴 살해한 다음 희생자들이 떨어진 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땅을 밟아 평평하게 해 놓아 흔적을 없앴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스차로 학살한 다음 대형 매장지에 시체들을 버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할 때 부족한 인원은 점령지에 주둔한 독일군이나 점령지의 치안유지를 맡은 경찰 조직, 그리고 강제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점령지 주민들을 동원하였고, 주민들은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이 길거리나 공터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3개월 후인 1941년 9월 19일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외곽에 위치한 골짜기인 바비야르에서 겨우 36시간 만에 37,771명을 살해하였는데 이를 바비야르 학살이라고 부른다. 동쪽으로 진군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온 독일군이 29일간의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입성했으나 곧 시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탄 공격으로 수많은 독일 병사를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 사건은 소련의 엔카베데(NKVD)에 의해 실시된 테러 공작이었으나 이를 유태인들의 테러로 오판한 SS는 테러 행위를 보복하는 의미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 키예프에 거주 중이던 유태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명령을 변형시켜 부역자 등을 제외한 키예프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으로 변형되었다. 이와 같이 끔찍한 학살을 두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Дмитрий Шостакович,1906~1975)는 <교향곡 13번>에서 예브게니 예프투셴코(Евгений Евтушенко, 1933~2017)의 시를 가사로 삼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러시아 내 반 유태인 정서를 비판한 예프투셴코의 시를 인용한 교향곡 13번은 1962년 12월 18일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대학살의 주범 아인자츠그루펜에 협력하여 같은 대학살의 만행을 벌인 스테판 반데라는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독립 투쟁을 이끈 면모가 발굴되면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몸을 담았던 OUN은 이후 미국, 서유럽 등지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을 중심으로 명목을 이어갔고,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독립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치를 이루는 세력의 한 축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반데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려서, 비교적 러시아의 영향을 덜 받고 독립 의지가 강했던 서부에서는 독립영웅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리비우 등 서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는 반데라 동상과 반데라 거리가 여러 군데 있고, 도시들마다 반데라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할 정도이다. 하지만 나치와의 협력 문제가 있고 특히 그의 조직원들이 우크라이나 유태인들과 폴란드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러시아인들은 물론이고, 유태인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나치 부역자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망령은 올해 2022년 1월 1일, 스테판 반데라의 생일에도 여지 없이 떠돌아 다녔다. 스테판 반데라를 기리는 ‘횃불 행렬’이 벌어졌으며 집회에 참가한 약 3,500명의 시민들은 반데라의 초상화를 들고 “반데라, 와서 질서를 회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영광”, “돈바스는 우리 땅” 등을 외치는 소리도 이어졌다. 시내 중심가를 가로지른 이들 네오나치들의 행렬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마무리되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나치 독일에 의해 무려 2,700만의 사망자가 존재하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이는 푸틴으로 하여금 최고 의회인 두마를 설득하고 전범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역설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된다. 그리고 이런 네오나치들의 극우 행위들을 묵인하고 있는 현 우크라이나 정부와 젤렌스키 대통령도 같은 네오나치의 무리들로 정의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군사작전은 대외적으로 볼 때 그 명분을 인정받기 어렵지만 우크라이나 또한 네오나치들을 오랫동안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굳이 이 부분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는 다른 명분들을 내세워 군사작전을 벌였을 것은 자명하지만 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9
  •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할 때 분노하라.
    분노(憤怒)라고 하면,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분개(憤慨)해서 성을 낸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분노를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에게 분노를 가라앉히라는 말을 주로 건넨다. 거기에는 이제 마음을 다시 잡고, 감정적으로 나가지 말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마음의 불씨를 가라앉히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적인 차원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공적인 차원이라면 이러한 방식은 자칫 공분(公憤)의 원인을 제거함이 없이 그저 마음의 수양으로 귀결해 버릴 우려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없다면, 우리의 분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공분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하는 것은 가장 좋지 못한 태도라 하겠다. 필자는 우연히 『분노하라(Indignez-vous!)』라는 소책자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이 소책자의 저자는 슈테판 프레데릭 에셀(1917-2013)다. 그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었고, 대사이기도 했으며,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도 역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작가로서 인권, 환경 등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한 세기에 가깝게 치열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사실 그는 독일 베를린 출신이었지만, 프랑스로 귀화했다. 이후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바로 입대를 해서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1890-1970)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거기에서 레지스탕스 회원으로 활동을 하던 중에,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던 그는 악명 높은 독일의 강제 수용소인 부헨발트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강제 수용소를 걸쳐 살아남았다. 어찌 보면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남았던 것도 거기에는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것은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의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슈테판 에셀 지음, 임휘근 옮김, 『분노하라』 2013, 15쪽). 슈테판 에셀에게 분노는 그야말로 삶의 동기였고,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상에는 역사의 진보와 낙관주의를 표방했던 헤겔, ‘참여’(Engagement)를 강조했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신체의 구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세계를 유기적으로 이해했던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가 서로 어울려 있다. 그 때문에 그의 분노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인권침해에 대한 분노이며, 그 누구든 어떤 국가든 어떤 특정한 단체든 정치세력이든 예외가 없어야 한다. 흔히 인권이라고 하면 이를 가치적으로 접근해서 오히려 인권의 담론을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권침해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인권문제라고 하면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중심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권을 나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더 증가시킬 뿐 감소시키지 않는다. 필자는 과거에 소위 스스로 진보주의자로 자처했던 분이 전쟁에 찬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전쟁보다 평화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전쟁광이라니 그는 진보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망치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진보의 발걸음을 막는 것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지 평화로운 봉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인들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 하도 많다 보니 우리는 사실 무감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말조심하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말로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 필자는 바로 분노할 때 분노하지 않고 그냥 마음에 담아 두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넘어가다 보니, 상대방이 그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나중에 큰 상처로 남게 된다. 물론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바로 분노할 때 분노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차별·조롱·멸시·비하 등에 대해 우리 각자 스스로 분노로 맞서면, 설령 당장 별 효과가 없어 보이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해 존중조차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우리가 존중해 줄 필요가 전혀 없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엄함을, 고귀함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면 분노할 때 분노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분노를 자제한다고 해서 분노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같은 태도는 분노를 더 유발할 뿐이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물론 분노를 유발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아직 머나먼 얘기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를 방치할 수 없다. 세상에 분노할 일이 많은데, 분노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노를 자제하라는 말로 위로는 별로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분노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공감하고, 이를 위해 연대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분노가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이다. 에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같은 책, 26쪽). 우리 각자의 시선을 넓혀서 주변을 둘러보면,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보인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만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분노할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 무엇을 할지도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폴 아뤼에르(1905-1952)가 『삶(Vivire)』에서 “환희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명철함으로 모든 존재를 통해 땅 위의 시간, 구름 속의 시간을 거치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분노는 분노로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분노를 일반적으로 열기라든가, 적개심이라든가, 난폭한 행동과 연관되어 생각한다. 분노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할 때 느껴지는 좌절감·모욕·멸시 등등으로 인해 느껴지는 불쾌감에서 오는 흥분된 감정 상태를 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나 자신의 존재다. 그 때문에 많은 상담 프로그램에서는 이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분노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은 매우 단순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스스로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분노할 때 분노를 삭이기보다는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그 분노를 혼자만의 분노가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 함께 분노하면 분노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내 자신이 바로 살아야 할 이유로서 말이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노할 때 분노하라! 그것이 어쩌면 나의 존재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입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눈으로 보면, 죽음과 같은 고독이란 없다. 이것은 어쩌면 작은 용기일 수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절망의 구덩이보다 희망의 메시지를 갖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8
  • 2022년 러시아 푸틴 대통령, 적대국들에 가스 공급 대금을 루블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에 대한 생각
    2022년 3월 23일 푸틴 대통령은 정부 회의에서 적대국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대금 지급 방법을 루블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었다. 푸틴 대통령은 일주일 내에 달러와 유로화 대신 루블 결제로 바꾸기 위한 체계를 만들라고 중앙은행에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EU나 미국에 러시아 상품을 선적하고 달러나 유로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 유럽에 수출한 가스 대금으로 주로 유로를 받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뒤 EU와 미국 등 각국은 러시아 경제제재를 발표했고,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터키 리라화 수준으로 폭락했다. 우크라이나에 군사작전 개시하기 전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75루블 수준이었는데 3월 초 한때 110루블 이상으로 사상 최저치로 가치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100루블 수준으로 조금 회복되었다. 러시아는 경제제재에 반발해 경제제재에 동참한 나라들인 EU 회원국과 미국, 영국, 한국, 일본 등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비우호국에 대해서는 러시아 정부와 기업이 졌던 채무를 달러가 아닌 루블로 상환할 수 있게 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따라서 러시아 외환 보유액 중 서방 은행에 맡긴 자금 상당액은 제재 여파로 동결된 상태인데다 이 때문에 러시아 디폴트 우려가 제기되었었지만 지금은 한 고비 넘긴 상태에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루블화로 가스를 결제하라는 조치는 에너지 전쟁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다. 유럽 등 비우호 국가들을 대상으로 천연가스 매각 대금을 유로나 달러가 아닌 자국 루블화로만 받겠다는 선언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 루블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그에 대한 조치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 비중이 높은 독일은 계약 위반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재를 강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입장에서 내놓은 자구책인데 유럽이나 미국이라 러시아에 했던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가스를 판매국인 러시아가 자기 마음대로 결제 수단을 선택하겠다는데 미국이나 유럽이 이와 같은 러시아의 행위를 과연 예상하지 못하고 제재를 가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가 천연가스나 원유 공급 대금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받는 것이 어려워지게 만든 것은 미국과 서방이다. 그래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제재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은 셈이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 장관은 루블화로만 결제하라는 요구는 계약 위반이라고 했으며 유럽 협력국들과 대응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천연가스 수요량의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리투아니아 국유 가스 기업인 이그니티스도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으로부터 가스 구매를 중단하고 루블화 결제도 하지 않겠다며 반발했다. 오스트리아 화학회사 OMV의 알프레드 스턴은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하기를 천연가스 비용을 지속적으로 유로를 내며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푸틴 대통령의 발표 이후 공급 차질 우려로 급등하게 되었다. 유럽 시장의 천연가스 가격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이날 MWh당 117.00유로로 18.49% 올랐다.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예상대로 상승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이날 8% 넘게 올라 96루블대에 진입했다. 제이슨 투비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번 조치가 폭락한 자국 통화 가치를 복원하고 러시아의 서구 금융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반면 투비는 푸틴 대통령 결정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WSJ는 루블화 의무화가 러시아의 에너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수요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천연가스 뿐 아니라 원유 수출 대금도 루블화로 받을려 하고 있다. 국제 유가도 러시아의 루블화 결제에 대한 충격으로 5% 넘게 올랐다. 이날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된 브렌트유 5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5.3% 뛴 배럴당 121.60달러를 기록했다. 같은 날 미국 뉴욕 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5월물은 5.2% 상승한 114.93달러에 마감했다. 러시아의 이와 같이 루블화 결제로 선회하자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 못지 않은 가스와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으로 방향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남한보다 더 작은 아제르바이잔 본국이 가진 석유와 가스만으로도 유럽에 수십여년을 수출해도 크게 문제 없다는 분석이 있는데다 카스피해를 통해 역시 가스 부국으로 알려진 투르크메니스탄과도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다. 그와 같은 가스관 연결의 시작이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조지아의 트빌리시, 터키의 제이한을 연결하는 BTC 파이프라인을 말함인데 이와 같이 터키까지 도착한 아제르바이잔의 석유와 가스를 터키에서 시작해 유럽 이탈리아까지 연결하는 것이 나부코 가스 파이프라인으로 점철된다. 여러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없던 일로 되었지만 2019년에 트랜스 아나톨리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TANAP)이 개통 공사에 들어가면서 이와 같은 고심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이 생겼다. 나부코 라인이 아제르바이잔-조지아-터키- 불가리아-알바니아-이탈리아까지 연결되는 기획이었는데 불가리아가 빠지고 그리스가 들어간 게 트랜스 아나톨리아 라인이라 볼 수 있다. 총연장 3,500㎞에 달하는 남방가스통로(SGC)로써 이어지는데 러시아로써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응원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들이 대부분인 국가이고 터키와 중앙아시아 일대와 연결되어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범투르크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미국과 유럽이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과제가 남아있다. 더불어 투르크메니스탄이 친서방, 유럽으로 과연 넘어올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투르크메니스탄은 굳이 유럽이나 미국과 교역 없이도 러시아와 이란의 사이에서 무역을 하며 이미 먹고 사는데는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며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독재와 국내 인권 탄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8
  • 이슬람 사회주의(Islamic socialism), 이슬람과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있었을까?
    이슬람 사회주의란 것은 이슬람과 사회주의의 만남을 지향하는 사상이지만 두 이데올로기가 서로 양립이 가능할까에 대해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 있었다. 물론 이와 유사한 사례로 유교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신비주의나 토속신앙에 근거한 사회주의 등이 존재했지만 신을 경멸하고 터부시 되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볼 때 신은 절대적이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슬람과는 매우 모순되고 대치되는 논리였다.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겹치는 교리가 있고, 경제에 대한 관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보니까 사회 정의적 차원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었다. 이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접한 아랍인 사상가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코민테른에 참가하고 나서 이슬람에서 나타난 평등의 논리를 내세워 사회주의를 내세워 흡수하려 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사회주의와 이슬람을 결합한 정치이론이 여럿 탄생했다. 특히 레닌의 경우, 1916년의 저서인 <제국주의론>에서는 식민지에서 억압받는 무슬림 민족들을 혁명의 주체 중 하나로 삼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무슬림 소수민족들에게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워 상당수 무슬림 사상가들에게 호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이론가들은 과거 이슬람 제국이 초창기에 복지국가로써의 면모를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이슬람 사회주의 이론이 탄생하게 된다. 아랍 사회주의나 아랍 민족주의와는 같은 사상이 아니지만 서로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실제로 이집트의 가멜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라던지, 리비아의 무하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의 카다피주의를 포함하는 자마히리야(Jamahiriya)와 시리아의 바트당이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아랍권 국가에서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한 많은 조직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파와 함께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모태라 볼 수 있는 무슬림 형제단(The Muslim Brotherhood) 등과 협력하였기 때문애 함께 궤멸되어 버렸다. 현재 남아 있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국가는 모리타니와 같이 서아프리카에서 멸망되기 직전에 가까운 국가와 더불어 수단, 차드가 패망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탈레반 정권으로 바뀌면서 사회주의를 버렸기 때문에 구소련을 포함한 공산권의 붕괴 이후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사회주의답게 기독교와 쿠르드, 투아레그 등을 비롯한 타 종교와 소수 민족들을 강력히 탄압하고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아랍인을 우대하는 등 민족 차별까지 감행하면서 존속의 정당성을 잃게 되었다. 반면 소련에 들어와 있는 이슬람계는 보통 자디드 운동이라는 이슬람 모더니즘(Islamic Modernism)애 통용되고 있었다. 이슬람 사회주의는 주로 특정 국가와 정권의 정치 사상을 분류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소련에서는 이슬람 순니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인 <사히 알 부카리(Sahih al-Bukhari)>가 편찬되어 역사적 상징성이 강했던 우즈베크 부하라에 이슬람 신학교를 새웠다. 이들은 제3 세계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사회주의를 홍보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슬람 사회주의도 내부에서 계파가 크게 갈리는 편이다. 아랍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란,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은 진보주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측이 보수주의로 대략 분류가 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주의의 진보는 기존 공산권과 밀착하면서 세속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서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이슬람 사회주의의 보수는 신정정치 및 반 세속주의적인 모습을 더 보였던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공산권과 함께 이슬람 사회주의 진보가 무너지고, 이슬람 사회주의 보수도 기본적인 문맹 퇴치를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후진국의 이념이라는 오명까지 함께 받던가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테러 조직과 협력하여 신정 정치 체제를 세운다던가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대부분이 패망하거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원리주의로 회귀해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8
  • 미얀마 민주화 시위와 소말리아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2020년, 유엔의 개입과 적극적인 중재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군부와 시민들 간 대화의 장을 만들고 이를 유엔이 중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엔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고 미얀마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서로 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미얀마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중재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유엔의 책임이자 역할이다. 그것이 미얀마 민주화로 인해 흘린 많은 피들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엔이 개입해서 역할을 해야 중국 정부가 단독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일 수 있으며 군부가 시민들을 탄압하여 사상 최악의 사태로 흘러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유엔이 수많은 내전을 마주하며 많은 내전들이 해결된 경우가 많지만 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 유엔 사상 최악의 오점으로 남고 있는 사태가 하나 있다. 그것이 지금도 10여 년째 무정부인 상태로 기나긴 내전을 겪고 있는 소말리아다. 소말리아는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969년 군 장성 무함마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후 바레는 22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으면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1991년 1월 무장 군벌인 무함마드 파라흐 아이디드(Mohamed Farrah Idid)가 반군 단체인 통일소말리아회의(USC)를 구축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바레를 축출하였다. 아이디드는 소말리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알리 마디 모하메드(Ali Madi Mohamed)를 임시 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으나, 둘 사이에 권력다툼이 발생하면서 소말리아는 무정부 상태로 돌입했다. 이때부터 소말리아는 크게 아이디드 파와 알리 마디 모하메드 파, 오스만 아토(Osman Ato) 파 등으로 정부의 지지자들이 3등분되어 내전에 들어갔다. 1991년에 대규모적인 가뭄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수십만 명의 아사자들이 속출하자, 1992년 4월 국제 연합은 소말리아 활동(UNOSOM)을 결의하였으며 1993년까지 2차에 걸쳐 35,300명의 평화유지군(PKO)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군벌 사이의 무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평화 유지군에 대한 공격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미국을 중심으로 편성된 다국적군은 소말리아 군벌들에 대한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 1994년 3월 분쟁 당사자 간에 정전 및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평화적인 합의를 주도하게 된다. 이에 유엔은 이제야 소말리아가 안정되었다여겨 모든 소말리아의 군사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1995년 3월 완전히 다국적군을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엔의 최악의 악수였고 다국적군이 철수하자 결국 소말리아 전체가 내전과 기근으로 인해 파산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바레 정권 이래로 군부가 정권을 잡았고 그 군부는 서로 간의 이해 관계로 인해 서로 쪼개져 각자의 활동 지역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물론 1996년 5월, 아이디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으나, 3개월 후, 아이디드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소말리아 정권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지만 이 역시 세습을 반대하는 군부들이 1996년 1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소말리아의 26개 정파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 교전하는 내전 상태로 다시 돌입하게 된다. 2000년 8월,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아브디카심 살라드 하산(Abdikassim Salad Hassan)이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 6월 평화 회담을 통해 450명으로 구성된 연방의회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지만 소말리아 전국에 걸친 군부들을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모가디슈 중앙 정부의 통제와 명령이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면서 살라드 하산 정부는 유명무실화 되어버린다. 이에 유엔은 다시 소말리아 문제에 개입하려 했지만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어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어 2005년 이후 현재까지 무정부 상태로 전 보다 심각한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경작이 가능한 지역은 1.6%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사막이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어업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미주와 유럽 강대국들이 핵폐기물들을 매립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등 미래 없는 현실로 인해 소말리아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모두 붕괴되었다. 그리고 무허가 혹은 부패한 정부 관료와 결탁한 다른 나라 어선들이 불법으로 어종들을 확보하는 상황으로 인해 수확량이 낮아졌다. 게다가 아프리카 특유의 높은 출산율로 인해 딸린 가족 수도 많다 보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 해적질이었다. 유엔이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소말리아에서 철수한 결과가 소말리아를 지옥보다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유엔의 활동이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결과가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을 불렀던 것이다. 유엔은 이를 두고 소말리아에서의 활동을 국제연합이 탄생된 이후, 최악의 오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미얀마도 언제든지 소말리아와 같은 상황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군부와 시민군이 내전을 벌일 가능성도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중국이 관여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얼마 전에 EU가 미얀마 군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그와 같이 갑작스런 원조 중단으로 인해 군부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반중시위도 격화되고 있으며 사태가 악화일로로 가고 있다. 지금 현 시점에서 유엔이 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봄이 어떠한가? 내정간섭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모든 인류는 지구 아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으며 이는 1948년에 발표한 세계 인권 헌장(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 부합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7
  •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벨벳 혁명에 대한 이야기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가 경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라는 체제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시장 경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 개혁이 추진되면서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개혁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8년 8월 소련군의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체코에서는 다시 공산 체계에 들어가면서 감시와 통제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60년대 "프라하의 봄"이라는 동유럽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위가 발생한 이후 20년에 걸친 구스타브 후사크(Gustav Husak) 정권은 1989년 동유럽에 확산된 민주화의 물결이 이어지고 소련에서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함에 따라 전환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두 번째로 타오른 민주화는 공산 정권이 반대 세력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1989년 11월 17일 청년사회주의연맹 소속 젊은이들이 프라하에서 독일 나치 정권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당시 반(反) 나치 시위를 벌이다 살해 당한 대학생의 50주년 추도식을 열게 된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참가 인원은 15,000명으로 늘어났고 추모행사는 다시 한번 22년만에 바츨라프 광장을 뒤덮은 민주화 시위로 바뀌게 된다. 시위대는 공산 정권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프라하 시내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이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막아서게 되자 시위대들은 1968년 시위 때와는 다르게 경찰에 꽃을 건네며 평화적 시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경찰은 곤봉으로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며 해산에 나섰다. 진압 과정에서 최소 167명이 부상을 입었고, 경찰의 강경 진압은 걷잡을 수 없는 민주화 시위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었다. 프라하 뿐 아니라 현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등에서도 12월 1일부터 27일까지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연일 이어지게 된다. 특히 1968년 ‘프라하의 봄’에도 참여했던 극작가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1936~2011)을 중심으로 하여 ‘시민포럼’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엇고, 슬로바키아에서도 ‘폭력에 반대한 민중’(VPN)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조직적으로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다. 체코 공산정권은 시위가 격화되자 프라하의 봄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 개혁을 하겠다는 성명을 보내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마하려 했다. 당시 체코 대통령은 프라하의 봄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구스타프 후사크가 장기 집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후사크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점점 거세지자, 후사크는 결국 자신을 포함한 공산당 지도부의 총 사퇴를 발표하면서 11월 24일 온건파로 꼽히는 카렐 우르바네크(Karel Urbanek)를 공산당 서기장에 일방적으로 선출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겉으로 한 발 물러선 것으로 보이면서, 실제로는 권력을 쥐고 언젠가는 다시 복귀하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가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했다. 발표 다음날인 25일과 26일, 당시 인구 1,500만 명 가량이었던 체코에서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 구시청사 광장으로 나왔다. 12월 27일에는 전체 인구의 75%가 약 2시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전국에서 총파업에 참여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공산 독재정권의 화장술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1999년 벨벳 혁명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라디오 프라하>는 벨벳 혁명을 회고하는 글을 적기도 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시위를 이끄는 시민 포럼과 대화하기로 결정했다. 시민 포럼은 공산당의 정치 지도권을 규정한 헌법 체제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공산당은 이를 수용했다. 그리고 후사크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30일 사임을 발표했으며 시민 포럼의 수장인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전체 의회에서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후사크 전 대통령은 이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지만 독재 정치의 전력에 대해 처벌받지 않았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40년 만의 자유로운 총선거도 열렸다. 벨벳 혁명은 성공한 비폭력 무혈 혁명의 대명사가 됐다. 벨벳은 체코어로 ‘부드러운, 조용한’ 이란 뜻을 갖고 있다. 벨벳 혁명이 일어나던 같은 시기에 같은 동구권인 루마니아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벌어져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면서 루마니아의 민주화 운동이 성공했다. 이와 같은 체코의 체제 변동 과정을 볼 때 크게 탈공산화 시기와 ‘정상화’ 시기, 민주화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탈공산화 시기는 1963년 지식인들의 개혁운동부터 1968년 프라하의 봄까지이며 정상화 시기는 후사크 정권 등장 이후 20년 간을 말한다. 민주화 시기는 공산정권의 붕괴와 1990년의 선거를 포함하는 기간을 일컫고 있다. 체코에서는 이행 선거를 통해 공산당 일당 독재가 종식되었고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지만 많은 시행착오와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정당의 형성 과정이 단기간에 참여하는 시민 조직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당의 분열은 이념 및 정책과 더불어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와 더불어 민족주의 우파 개혁 세력들이 무능했다는 부분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전문성과 관리 능력의 한계는 많은 정책의 실패를 유발하게 되었으며 무능한 정부로 전락되는 측면이 존재했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민족주의 우파 개혁 세력에 대한 반발은 좌파 세력의 재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체코의 체제 이행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민주주의 정부로 출범한 하벨 정권은 정치 개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의 조건을 형성시키는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벨벳 혁명 발발한지 33년이 지났지만 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각자 민주 제도의 안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현 시점이라 볼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