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분노 .jpg
이미지 사진이다

 

분노(憤怒)라고 하면,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분개(憤慨)해서 성을 낸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분노를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에게 분노를 가라앉히라는 말을 주로 건넨다. 거기에는 이제 마음을 다시 잡고, 감정적으로 나가지 말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마음의 불씨를 가라앉히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적인 차원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공적인 차원이라면 이러한 방식은 자칫 공분(公憤)의 원인을 제거함이 없이 그저 마음의 수양으로 귀결해 버릴 우려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없다면, 우리의 분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공분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하는 것은 가장 좋지 못한 태도라 하겠다.


필자는 우연히 『분노하라(Indignez-vous!)』라는 소책자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이 소책자의 저자는 슈테판 프레데릭 에셀(1917-2013)다. 그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었고, 대사이기도 했으며,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도 역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작가로서 인권, 환경 등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한 세기에 가깝게 치열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사실 그는 독일 베를린 출신이었지만, 프랑스로 귀화했다. 


이후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바로 입대를 해서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1890-1970)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거기에서 레지스탕스 회원으로 활동을 하던 중에,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던 그는 악명 높은 독일의 강제 수용소인 부헨발트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강제 수용소를 걸쳐 살아남았다. 어찌 보면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남았던 것도 거기에는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것은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의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슈테판 에셀 지음, 임휘근 옮김, 『분노하라』 2013, 15쪽).


슈테판 에셀에게 분노는 그야말로 삶의 동기였고,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상에는 역사의 진보와 낙관주의를 표방했던 헤겔, ‘참여’(Engagement)를 강조했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신체의 구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세계를 유기적으로 이해했던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가 서로 어울려 있다. 그 때문에 그의 분노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인권침해에 대한 분노이며, 그 누구든 어떤 국가든 어떤 특정한 단체든 정치세력이든 예외가 없어야 한다. 흔히 인권이라고 하면 이를 가치적으로 접근해서 오히려 인권의 담론을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권침해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인권문제라고 하면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중심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권을 나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더 증가시킬 뿐 감소시키지 않는다.


필자는 과거에 소위 스스로 진보주의자로 자처했던 분이 전쟁에 찬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전쟁보다 평화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전쟁광이라니 그는 진보의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망치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진보의 발걸음을 막는 것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지 평화로운 봉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인들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 하도 많다 보니 우리는 사실 무감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말조심하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말로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 필자는 바로 분노할 때 분노하지 않고 그냥 마음에 담아 두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넘어가다 보니, 상대방이 그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나중에 큰 상처로 남게 된다. 


물론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바로 분노할 때 분노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차별·조롱·멸시·비하 등에 대해 우리 각자 스스로 분노로 맞서면, 설령 당장 별 효과가 없어 보이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해 존중조차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우리가 존중해 줄 필요가 전혀 없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엄함을, 고귀함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면 분노할 때 분노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분노를 자제한다고 해서 분노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같은 태도는 분노를 더 유발할 뿐이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물론 분노를 유발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아직 머나먼 얘기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를 방치할 수 없다. 세상에 분노할 일이 많은데, 분노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노를 자제하라는 말로 위로는 별로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분노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공감하고, 이를 위해 연대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분노가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이다. 에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같은 책, 26쪽).


우리 각자의 시선을 넓혀서 주변을 둘러보면,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보인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만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분노할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 무엇을 할지도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폴 아뤼에르(1905-1952)가 『삶(Vivire)』에서 “환희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명철함으로 모든 존재를 통해 땅 위의 시간, 구름 속의 시간을 거치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분노는 분노로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분노를 일반적으로 열기라든가, 적개심이라든가, 난폭한 행동과 연관되어 생각한다. 분노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할 때 느껴지는 좌절감·모욕·멸시 등등으로 인해 느껴지는 불쾌감에서 오는 흥분된 감정 상태를 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나 자신의 존재다. 그 때문에 많은 상담 프로그램에서는 이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분노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은 매우 단순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스스로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분노할 때 분노를 삭이기보다는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그 분노를 혼자만의 분노가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 함께 분노하면 분노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내 자신이 바로 살아야 할 이유로서 말이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노할 때 분노하라! 그것이 어쩌면 나의 존재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입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눈으로 보면, 죽음과 같은 고독이란 없다. 이것은 어쩌면 작은 용기일 수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절망의 구덩이보다 희망의 메시지를 갖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할 때 분노하라.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