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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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의 현판이다.(사진=김규용 기자)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자리 잡고 있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사방을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한 명당자리에 위치한다. 삼보(三寶)는 불교의 신행 귀의 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로 통도사가 불(佛), 해인사가 법(法), 송광사가 승(僧)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곳 송광사에는 유심히 보면 어느 절에나 있는 석등과 석탑이 없다. 우화각에 하나 달린 풍경을 제외하면 풍경도 없어 송광사 삼무(三無)라 말한다. 석등과 석탑이 송광사 풍수지리상 터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이라 무거움을 상징하는 석탑과 석등을 세우면 가라앉을 수 있다. 또 풍경 소리는 스님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 한다.


송광사는 창건에 대한 자료는 정확히 없다. 그러나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승평속지(昇平續誌)에 보면 신라 말에 혜린 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여 당시 길상사(吉祥寺)라 불렸다. 승려 수는 3·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이에 대한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를 설명하면 

 

신라 말의 고승 혜린 대사가 제자들과 함께 산천을 돌며 수행했다. 그런데 제자들과 더불어 역병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은 꼼짝없이 산속에서 병으로 죽는 것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제자들을 다독이며 이 고통을 참아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독려했다.


이후 기도를 위해 정결한 장소를 찾으니 마침 눈앞에 큰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고 못가에는 문수보살의 돌부처가 있었다. 혜린 대사는 문수보살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돌부처 앞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기도일 꿈에 석가여래가 나타나 “너는 더 배울 불도가 없다. 그러니 새로운 절을 세워 중생구제를 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역병으로 죽어가는 제자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이에 석가여래는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안심하라”라고 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혜린 대사가 합장 배례하고 눈을 뜨니 석가여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제자들의 역병이 다 나았다는 함성이 들리며 돌부처가 늙은 스님으로 변했다. 늙은 스님은 자신이 석가여래의 분부를 받고 왔다면서 불보(佛寶) 세 가지[붉은 가사 한 벌, 향나무 불발(佛鉢),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를 건네주었다.

 

라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이후 1200년(신종 3)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이곳으로 옮기며 정혜결사(定慧結社:불교계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가 세속화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를 추구하였다. 몇 년 뒤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했다. '寺'가 아닌 '社'를 붙인 것에 대해 불교에서 해탈·열반을 목표로 뜻을 같이하며 수행·정진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결사'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 뒤 그의 제자였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연이어 이곳 송광사에서 배출되며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삼보사찰(三寶寺刹)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1828년에 지은 “연천옹유산록”이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의 사찰에 삼보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부처님 두골(頭骨)이 있으므로 불보라 하고,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라 하고, 송광사는 승보라 하는데 보조국사 이후 16 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19세기 이전에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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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을 뵈었다.(사진=김규용 기자)

 

불일암(佛日庵) 무소유를 주장하신 법정 스님의 숨결을 느끼며 


송광사에 오르다 보면 처음 갈림길 왼쪽은 불일암(佛日庵)으로 오른다. 불일암은 법정(法頂) 스님(1932~2010)이 17년간 머무셨다는 작은 암자다. 1992년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셨다. 이후 2010년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한 후 이곳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산골 했다. 불일암은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본디 이곳은 16 국사 중 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이 있던 터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법정 스님이 걸었다던 무소유의 길이 펼쳐진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지며 작은 개울이 흐르며 맑은 물소리가 난다. 20여 분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뿌리를 드러낸 나무 사잇길이 있다. 그리고 돌계단이 시작되는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불일암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 초반 불교계 인사 중에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했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박해받을 때마다 증오심이 생기며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며 불일암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폐허이던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불일암이란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불일암에서 한 달에 한 편의 글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리고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사찰 수련회의 시금석을 놓았다. 작은 암자 댓돌에 스님이 신었다던 삭은 고무신이 놓여있다. 작은 암자 왼쪽으로 나무 테이블과 나무를 잘라놓은 의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 우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정 국사 부도 묘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를 한단 내려가면 스님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듯 텃밭이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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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거주하시던 작은 암자 불일암(사진=김규용 기자)

 

불일암을 뒤로하고 송광사라 향하는 산등성이를 넘다 보면 감로암(甘露庵)이 있다. 감로암은 송광사의 제6대 원감 국사 충지(冲止)가 창건한 사찰이다. 일찍이 충지가 김해 감로사(甘露寺)에서 수행하였던 것을 기념해 이름을 ‘감로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감로암은 총림의 4개 기관(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중 염불원이 있다.


감로암을 지나 구불구불 길을 내려오면 부도전을 앞에 보조국사 비가 있다. 이 비는 보조국사 지눌의 출가 이후 행적과 업적을 적은 비석이다. 1210년 당시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행장을 모아 제자 혜심 중심으로 왕에게 탑비를 세울 것을 주청해 세웠다. 그러나 이후 어떤 연유에서 파괴되었고 현재 탑비를 1678년(숙종 4년)에 다시 세웠다. 부도전 옆으로 율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율원이 있다.


송광사(松廣寺)로 향해...


조계산(曹溪山) 이란 이름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중국의 대감 선사가 당나라 불교의 제6대 조종이 되었다. 대감 선사는 황제에게 매화나무 인장을 받아 허리에 차고 황금 지팡이를 앞세우며 영남지방의 소조 부의 조 씨 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의 촌장인 조서량과 마을 사람들이 평상시 대사님의 덕을 흠모하였던 터여서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가까운 쌍봉산 큰 골짜기에 수나라 말에 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어 있는 보림의 옛 절터(계림)에 절을 세우고 스님을 모셨다. 이후 대감 선사(혜능 스님) 조계산에서 40년간 설법했다. 


대감 스님이 일으킨 선풍을 조계선(曹溪禪)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조계종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계산 송광사는 불교계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선종 사찰의 근본 도량 역할로 보조국사를 조계종의 실질적 시조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도의 선사가 조계종의 시조로 돼 있다.


대사가 계신지 아홉 달 정도 된 이후 떠나면서 조 씨의 은혜 보답을 위해 산의 이름을 조서량의 ‘조’와 쌍계의 ‘계’를 한자씩 따서 ‘조계’라 지었다. 이처럼 중국의 ‘조계’가 태어난 유래라고 전해오고 있다. 위치는 지금의 곡강현의 동남쪽 약 12km 지점인 광동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있는 커다란 산줄기 남쪽 쌍봉(산) 밑 골짜기에 있다.


순천의 조계산은 선암사 쪽과 송광사 쪽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두 사찰과 산의 이름의 변천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효령봉을 주산으로 송광산·길상사(신라), 송광산·수선사(고려), 조계산·송광사(조선)라 변천했다. 선암사는 장군봉을 주산으로 청량산·해천사, 청량산·선암사, 조계산·선암사로 변천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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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송광사는 절 이름에 대해 세 가지 설화


첫째. 18명의 큰스님이 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송광사의 '송(松)'을 풀어 보면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며 18명의 큰스님이 불법을 만천하에 펼 절이라는 뜻이다.


둘째로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연관된 전설로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다. 그랬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했다. 육당 최남선이 이 전설을 토대로 송광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로 해석하고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셋째는 예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다. 그래서 송광산이라 불렀고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산이 솔갱이(‘소나무’ 사투리)가 많아 ‘솔메’로 부르고 광(廣)은 언덕을 의미하는 강(岡)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광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1902년에 고종의 요청으로 성수전(현 관음전)을 건립한 이후에 설치했다. 성수전은 과거 황실 기도처였으며 성수전이 있는 사찰이라 예우를 한 것이다. 


일주문에 달린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僧禪宗 松廣寺)란 현판을 지나면 곧바로 고향수(枯香樹)가 발길을 끈다. 고향수는 지눌 스님이 처음 송광사에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다. 스님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爾我同生死 이아동생사 

我謝爾亦然 아사이역연 

會看爾靑葉 회간이청엽 

方知我亦然 방지아역연

너와 나는 같이 살고 같이 죽으니

내가 떠날 때 너도 떠나고 

너의 푸른 잎을 다시 보게 되면

나도 그런 줄 알리라”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살아있는 동안 잎이 무성하게 자라다 스님이 입적하자 말라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자들이 마른 향나무에 다시 잎이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고향수 뒤쪽 척주당과 세월각 이란 작은 사체가 있다. 이곳은 죽은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이곳에 먼저 죽은 자의 위폐를 두고 법당으로 가기 전에 세속의 때를 벗는 곳 즉, 남녀 위폐를 각각 척주당과 세월각으로 나뉘어 정화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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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를 넘다보면 안쪽에 '송광사'라는 현판이 있다.(사진=김규용 기자)

삼청교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해볼까.


이제 삼청교(三靑橋)를 통해 송광사 경내로 들어간다. 삼청교는 1976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청교는 능허교(凌虛橋)라고도 불린다. 「송광사성공중창록(松廣寺成功重刱錄)」에 의하면, 이 홍교(虹橋:네모난 돌 19개로 무지개 모양)는 1707년(숙종 33)에 다리를 만들고 그 뒤 70여 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보수했다.


삼청교 밑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19개의 4각 장대석을 각지게 맞춰 홍예(虹蜺)를 이루고 양쪽 측면으로는 막돌이 아닌 4각 판석을 쌓아 올렸다. 또 홍예 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돌이 나와 있다. 이 홍교(虹橋)는 다리와 위에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의 통행과 건물이라는 이중효과를 내며 독특한 구조이다.


삼청교를 건너다보면 입구의 모양은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하고 있고 출구의 모양은 사람인(人)의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우화각에 걸린 송광사(松廣寺) 편액은 근대 서화가·사진가로 유명한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1868-1933) 선생이 글을 쓰고 과 고종의 대령숙수 명월관 창립자로 유명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1871-1942) 난과 대나무를 쳤다는 작품이다. 그리고 삼청교와 우화각은 도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이다. 우화각 안으로 천왕문이 붙어 있다. 


삼청이란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세 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다른 능허교(凌虛橋)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화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로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온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의 구절이다. 이는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라는 뜻이다. 


삼청교와 연결된 왼쪽이 임경당(臨鏡堂)이다. 이는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으로 물가로 튀어나와 물에 살포시 들어앉은 정자는 육감정(六鑑亭)이다. 몸은 물질인 눈(眼)·귀(耳)·코(鼻)·혀(舌)·피부(身)와 정신작용의 마음(意)을 더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에서 비롯된다. 육감정(六鑑亭)이란 정자가 이 모두를 느끼는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송광사 최고의 경관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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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에서 바라 본 침계루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우화각 우측으로 하천가(신평천)에 축대를 쌓아 2층으로 기둥을 세워 누각 형태의 건물이 침계루(枕溪樓)이다. 침계루는 ‘계곡을 베고 누워있는 것’을 의미한다. 삼청교나 밖에서 보면 중층으로 보이지만 안쪽에서 보면 누각이 아닌 대형 단층 건물로 보인다. 안쪽의 건물 현판은 사자루(獅子樓)라고 걸려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전방에 ‘종고루’가 보인다. 원래 천왕문과 대웅보전 사이에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 법왕문이 있었다. 1951년에 전쟁으로 공비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 ‘종고루’만 복원돼 아쉬움이 많다. 이때 대웅보전도 함께 소실되어 1961년 복원해 1988년 중창하며 규모를 더 키웠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바라보며...


대웅보전은 정면 일곱 칸과 측면 다섯 칸의 아(亞) 자형 전각이다. 특히 대웅전 기둥이 주련에 걸쳐 있지 않다. 이는 대웅전뿐 아니라 전각 대부분이 주련이 없다, 이는 복원 시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경계해 주련을 걸지 않았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는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섯 가지 수행으로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수단을 말한다.


첫째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은 일체 탐욕을 떠나 남을 대할 때는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정신으로 주고 베푸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둘째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은 계율을 지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되 피해는 주지 말며 사물에 있어서 후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은 몸과 뜻과 입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행동을 참고 이기며 오로지 자비로운 마음이면 모든 일을 이루리라. 

넷째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은 일체 부정과 불법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바른 일을 위해서는 끈기 있게 노력하라. 

다섯째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은 잡된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깨끗하고 맑고 티 없는 마음으로 삼매에 들도록 노력하라. 

여섯째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은 부처님의 법과 자비에 입각 오로지 선정으로 미련하고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는 지혜를 갖도록 노력하라.

이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에는 다섯 번째 선정에 달마대사의 9년 면벽 장면과 여섯 번째 지혜에는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진 물을 먹은 뒤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현재 대웅전에는 과거 부처님인 연등불과 현재 부처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과 문수·보현·지장·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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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3대 보물 바사리구시(사진=김규용 기자)

 

승보전의 비사리구시


승보전은 송광사를 상징하는 법당이다. 1988년 대웅보전 중창 시 예전 전각을 옮겨 승보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승보전 옆에는 ‘비사리구시’라 불리는 나무 밥통이 3개가 있다. 이는 송광사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기록에 의하면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해 만들었다. 나라의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으로 약 4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에 대한 유명한 설화가 있다. 그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순천 땅 어느 고을에 할머니가 살았다. 일찍 남편을 여읜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았다.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오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이 걸리는 데도 불공드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70이 되었어도 할머니는 무척 정정해 다들 처녀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점심을 먹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숨졌다. 너무도 조용히 숨져서 자식들은 처음엔 할머니가 돌아가진 지도 몰랐다.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망자가 줄을 서 있었다. 할머니는 궁금해서 앞 사람에게 물으니 ”염라대왕이 재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이 순천 송광사를 무척 좋아하여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염라대왕의 물음에 너도나도 가보았다며 염라대왕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은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길이가 얼마며, 높이나 폭이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그러자 가본 적이 없는자들이 우물쭈물 엉터리로 대답했다.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며 지옥으로 보냈다. 앞으로 나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역시 염라대왕이 비사리구시의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살아 있을 때 해마다 초파일에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에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바사리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정직한 사람이라며 크게 칭찬하며 좀 더 살다 오라 하였다. 할머니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죽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자 아들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아들에게 저승에게 겪은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는 즉시 송광사에 있는 비사리구시를 재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그길로 아들과 함께 자를 들고 송광사에 가서 비사리구시를 재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렸다. 방법을 찾던 아들은 명주실로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할머니의 빨간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러면서 "어머니, 나중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너비는 요만큼입니다라고 답하세요"하였다.


할머니는 100살 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에 비사리구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로 한때 이곳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구시를 자로 잰 후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전각이 아주 많다. 과거 8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외침과 화재 등에 의해 소실된 전각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그래도 현재 50여 동이 복원되었다. 송광사는 수행을 우선 하는 승보사찰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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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전이 관음전이 되었다.(사진=김규용 기자)

성수전이 관음전이 된 사연


관음전은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聖壽 : 임금의 나이, 望六 : 51세)을 맞아 사액(賜額, 임금이 내린 편액)된 황실 기도처였다. 3단의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로 팔각지붕으로 건조되었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 합의 창호와 중앙 석축 앞 계단 소맷돌이 거북 모양으로 특이하다. 


그리고 건물 외벽 3면에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하고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전각을 ‘성수전’이란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내렸다. 황실 기도처였던 까닭에 국내 어는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벽화가 있다. 가운데 불단 좌·우측 벽에 정1품과 정2품 신하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 있다. 어간 좌우 기둥 위에는 바깥으로는 용두(龍頭:용 머리)와 내부에는 용미(龍尾:용 꼬리)를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 좌우에 태양과 달은 고종과 명성왕후를 상징한다. 성수전은 이후 1957년 부근 관음전이 크게 낡아 이를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을 이곳으로 옮겨 안치하며 관음전으로 바뀌게 됐다. 또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62년 비운의 왕자인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 조성한 불상이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는 할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과 어머니 강빈 또한 인조에게 사약을 받았다. 또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가 제주 유배 생활 중 사망하고 경안군만 살아남아 효종 때 복권됐다. 복장 유물이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며 쪽빛 저고리와 발원문 등이 나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웅보전 뒤편 하사당(下舍堂)은 1963년 지정된 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주로 선실(禪室)로 사용되었다. 조선 말기 수선사(修禪社)에서 정진하는 선객(禪客)이 공양하던 곳이나 응진전(應眞殿)의 일을 맡은 임원들이 묵는 노전(爐殿)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남향으로 자리한 건물의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온돌방에는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있고 천장은 종이 천장이다. 부엌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으로 지붕 밑의 가구(架構)가 모두 보인다. 곧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高柱)부터 뒷면의 평주(平柱)까지 통보[通樑]로 걸렸다. 


건물 안의 살미첨차는 위아래의 것이 합쳐져 보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인 보아지[樑奉]로 되었다. 옆면에는 덩굴무늬[唐草文]가 조각되었다. 부엌 칸의 지붕 위에는 작은 맞배지붕을 올린 네모난 환기 구멍이 나 있다. 이는 다른 건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자 요사(寮舍)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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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국사전의 모습이다.(사진=김규용 기자)

 국사전에서 느끼는 16 국사의 기운


국사전은 송광사 전각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 있는데 담장 등에 가려 건물 일부만 볼 수 있다. 국사전은 송광사에서 배출한 16 국사의 진영을 모신 곳이다. 1369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어진 건물로 별로 남아있지 않다.


1971년 국사전을 해체 보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을 통해 1501년 ‘조사영자전(祖師影子殿)’을 개창(改創)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1558년 중수했다. ‘송광사지’에는 ‘자음당(慈蔭堂)’으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었다. 1722년(경종 2), 1807년(순조 7), 1918년에 각각 중수와 석축을 1926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 1990년에도 전각을 수리하고 현재 2018년에 새로 조성한 16 국사 진영을 봉안했다. 하지만 1995년 송광사 배출 16 국사의 진영을 도둑이 들어 13점을 도난당한 아쉬운 일도 있었다. 


세월각과 척주각에서 관욕을 마친 후 우화각을 건너 사찰안으로 들어선 영가는 지장전(地藏殿)으로 다시 모셔지게 된다. 지장전에서 영가천도의 재가 이뤄진다. 승보전과 함께 대웅보전의 좌·우 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이다. 중건 이전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다. 


3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원형 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었다. 건물 전면은 2, 4분 합의 빗살문을 창호로 가설해 전면을 제외한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3면에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를 비롯해 인로왕보살도(引路王菩薩圖)ㆍ동자도(童子圖) 등 수많은 불교 벽화가 단청 되어 있다.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ㄷ’자형 불단 위에는 목조 지장보살좌상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저승의 시왕 등 명부 권속들이 협시해 있다. 후불탱으로는 1987년 금어 조연우(曺延宇)가 그린 지장탱(地藏幀)을 비롯하여 1963년 일섭 스님이 그린 시왕탱(十王幀) 등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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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칸으로 구성된 약사전(사진=김규용 기자)

 가장 작은 불전을 바라보며


약사불(藥師佛)을 봉안한 불전(佛殿)을 약사전이라 한다. 송광사의 약사전은 경내 가장 규모이다. 1974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1631년(인조 9)과 1751년(영조 27)에 각각 중건됐다. 정면 1칸과 측면 1칸 규모로 단층 팔작지붕으로 4면이 모두 1칸씩으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 건물이다. 후불탱화로는 1904년에 조성된 석가모니 후불탱을 모셨다.


건물 규모에 비해 기둥이나 부재들은 굵직한 목재를 사용했다. 처마 밑을 받친 공포(栱包)가 이출목(二出目)으로 앙서(仰舌: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의 수는 3개로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내부 구조는 대들보가 없고 공포는 삼출목(二出目)으로 네 모퉁이의 귀살미부터 부재(部材)가 중앙에서 서로 교차해 천장을 이룬다. 


문은 정면에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고 측면에 출입문을 내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조각 수법을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전은 건축학적 매우 중요한 특성이 있어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의 다른 이름은 팔상전(八相殿)이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 보물 제303호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약사전과 비슷한 모습이다. 내부에 목조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의 영산회상도를 후불탱으로 배치했다. 또한 삼면 벽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탱이 묘사돼 있다.


영산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되었다. 상호와 신체 비례가 원만한 조선 후기 목불 좌상이다. 얼굴이 네모 넓적한 형태로 턱선은 둥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반월형 눈썹 그리고 큰 눈과 코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도톰한 입술에 먼지 미소는 매우 온화한 느낌을 준다,


본존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725년(영조 1)에 조성됐다. 가로 186.5㎝, 세로 214㎝의 비단에 채색했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 청중들을 여실히 표현했다. 또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다. 송광사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우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했다. 현재 건물은 1973년에 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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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암 쌍향수 이다.(사진=김규용 기자)

 

천자암을 지은 담당국사는 정말 천자의 아들이었을까.


천자암(天子庵)은 송광사의 제9대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했다. 담당(湛堂)이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의 셋째 아들이었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담당이 천자암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천자암은 무엇보다 쌍향수(곱향나무)로 두 그루가 나란한 쌍처럼 서 있고 주요 줄기가 몹시 꼬여 가지를 밑으로 내려뜨리고 나란히 서 있다. 혹자는 이 모습을 흡사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공경하며 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곱향나무는 중국과 백두산에 한정해 자생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자암의 곱향나무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곱향나무이다. 쌍향수는 비사리구시, 능견난사와 더불어 송광사의 3대 명물이다.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았다. 이때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서 가지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자라는 듯한 오늘날의 쌍향수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자암은 그 뒤 1633년(인조 11) 설묵대사(雪默大師)가 중창하고 1730년(영조 6) 자원대사(自願大師)가 중건했다. 1740년 지수(指修)·자징(慈澄) 등이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고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두월(斗月)이 중건하며 1893년(고종 30) 구연대사(九淵大師)가 성산각(星山閣)을 신축했다. 1924년 기산(綺山)·해은(海隱)이 중수, 1939년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칠성각을 건립했고 1992년에 법당을 지었다.


현재 법당을 비롯해 나한전·산신각·법왕루·요사 등이 갖춰져 있다. 암자의 뒤쪽 쌍향수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적 차이가 100여 년이나 차이나 이 전설을 믿기는 어렵다. 담당은 송광사 16 국사 중 9대 국사로 행적과 출생, 생몰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천년 사찰을 돌아보며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을 그리 집착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신 법정 스님도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만을 남겼다. 다음 이에게 무엇인가 남기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이 아닐까? 굽이굽이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며 이리 굽은 길들이 모두 이유가 있어 굽어진 길로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굽어진 길은 편히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산을 직선으로 오르면 오르다 지친다. 굽이굽이 돌아가면 조금 더디지만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굽어 가는 것을 낙담할 것이 아니라 내가 견딜 수 있게... 또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굽은 것을 시련이라 말하면 아마도 선인들이 말한 삶은 견딜만큼 시험이 온다는 말이 이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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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松廣寺)로 향한 발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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