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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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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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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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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르코르뉘 총리의 불신임안 부결, 가시밭의 프랑스 정국
    프랑스의 르코르뉘 총리가 취임 27일 만에 전격 사임했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르코르뉘를 다시 총리에 임명했다. 마크롱은 달리 대안이 없는 까닭에 르코르뉘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국가의 의무를 강조했다. 르코르뉘가 사표를 냈던 것은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지지를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자신이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을 현실적으로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 출신인 르코르뉘는 처음에 임명될 때에는 내년도 예산안을 일부 조정하면서 그 정도면 충분히 야당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르코르뉘는 야당과 정치적 타협에 실패했고, 각 정당들이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비판하면서 전격적으로 사임했으며, 마크롱도 이를 수락했다. 문제는 현재 마크롱의 지지율이 형편없고 집권당의 지지율도 낮으며,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선뜻 총리로 나설 인사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마크롱의 선택은 자신의 충복인 르코르뉘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남은 대통령 임기를 채우려고 했다. 당연히 야당은 이에 반발했으며, 총리 불신임안을 좌파 연합 정당인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와 극우 정당인 ‘국민 연합’이 각각 의회에 제출했다. 이 두 불신임안 중 하나라도 과반수(289표)로 통과가 되었더라면, 르코르뉘는 무조건 사임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 불신임안은 좌파 진영에서 제출한 첫 번째 불신임안은 271표가 나왔으며, 극우 정당에서 제출한 두 번째 불신임안은 144표가 나와서 모두 부결되었다. 이에 르코르뉘는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그러면 이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르코르뉘 총리가 연금개혁안을 2027년 대통령 선거까지 보류하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로 사회당을 설득했고, 이에 좌파 연합에서 사회당의 상당수가 표결에 불참하면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던 것이다. 좌파 진영 전체에서 보면 사회당이 그나마 타협의 여지가 있었는데, 사회당이 이번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명분도 사실 있었다. 극좌와 극우의 득세를 막기 위해 비교적 온건파인 사회당 지도부로서는 마크롱이 연금 개혁을 현 정부에서 더 이상 추진만 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당으로서는 두 개의 카드를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가 연금 개혁 보류였고 다른 하나가 부유세 도입이었다. 둘 중 연금개혁안 보류가 르코르뉘와 정치적 타협을 해도 정치적으로 손해가 볼 것이 없고, 부유세 도입의 경우에 다른 야당 세력들과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고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얼마든지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르코르뉘는 마크롱의 최측근이고, 그런 점에서 현재 마크롱을 그나마 보좌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다. 르코르뉘는 지금의 상황에서 마크롱이 다소 양보만 하면 현재 프랑스 정국을 그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이번 총리 불신임안의 부결에서 최대 승리자는 사회당과 르코르뉘라고 하겠다. 사회당은 이후에도 내년도 예산안에서 부유세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나름대로 존재감을 키울 것이다. 르코르뉘는 젊고 활기차면서도 여여소야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적 수완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르코르뉘가 내년도 예산안을 야당과 제대로 협상다운 협상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르코르뉘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더 나아가 르코르뉘가 한갓 관리자로서 역할만을 할지 아니면 차기 정치적 지도자로서 면모를 과시할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프랑스의 지금과 같은 위기는 마크롱의 섣부른 정책 탓이다.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에게 ‘프랑스의 희망’을 주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이젠 ‘프랑스의 절망’을 가져다 주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으로 갈라져서 서로 정권 교체도 있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두 진영 모두를 경험하다 보니, 좌든 우파든 상관 없이 모두 정치적 불신과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마크롱의 중도층 공략은 정치적으로 승리를 주었지만, 마크롱의 실정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를 초래했다. 아직 1년 이상 마크롱의 대통령 임기가 남아 있어서 야당과 시민 그리고 언론은 모두 마크롱의 사임을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크롱은 정치적으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는데, 전 리비아 국가 지도자였던 무하마드 가다피로부터 수백만 유로의 불법 자금 조달을 공모한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 받은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을 엘리제궁에서 만났다는 점이다. 파리 법원은 사르코지가 가다피의 불법 정치 자금을 직접 수수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공모 혐의만으로도 유죄판결은 정당하다. 프랑스 법원이 정치인의 불법 정치 자금에 대해서 최근 상당히 엄격하게 판결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반발도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사르코지의 범죄 혐의는 매우 중대하다. 마크롱은 물론 인간적으로 전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왜 지금 시점에서 굳이 유죄판결을 받은 전임 대통령을 그것도 엘리제궁으로 초청해서 면담 형식으로 만났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마크롱은 사법부의 독립적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점이 묘하다는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르코지의 변호인단이 사르코지가 교도소 밖에서 항소심을 받을 수 있도록 석방 요구서를 법원에 제출한 그날 바로 마크롱이 사르코지를 면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크롱이 대통령의 권한인 사면권 – 프랑스의 경우 사면권 남용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어렵다 – 을 통해 사르코지를 교도소 밖에서 전자팔찌를 차고 가택연금 상태로 항소심을 받을 수 있게 사전 면담을 한 것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현재 프랑스의 정국을 보면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더 나아가 어느 정당도 과반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처럼 대통령 권한이 상당히 큰 경우 정국이 안정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마크롱의 사임 압력이 거센 것도 결국 마크롱이 예산안을 상정하면서 의회를 건너뛰고 비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는 데에 대한 야당의 반발 때문이다. 물론 현재 프랑스의 상황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각종 위기가 만연하고 있어 이에 합당한 예산안을 추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총선이라는 민심에 역행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마크롱처럼 하기 위해서는 집권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않으면 사실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독일처럼 의원내각제도 아니니까 정당들 사이에 연정 구성도 어렵다. 프랑스가 그래도 나름대로 총선 결과에 따라 좌우 동거 정부도 있었고 좌파와 우파가 번갈아 가면서 정권 교체도 있었지만, 이때는 집권당이 어떤 식으로든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 국정 운영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현재는 의회의 협조 없이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한데, 마크롱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다 보니 어떤 안이든 의회가 찬성하지 않으면 내각은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냉정히 말해 이번에 르코르뉘 총리의 불신임안이 부결된 것도 마크롱 정부가 의회에 굴복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권력의 축이 정부보다는 의회로 서서히 이동하는 것인데, 문제는 프랑스 정치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상당히 예외적이어서 과연 정당 간의 정파 간의 정치적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프랑스 정치판에서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인사가 현재로서는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르코르뉘가 그 시험대에 오른 것인데, 관건은 마크롱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 어느 정도까지 수습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르코르뉘의 불신임안이 부결되었지만,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은 한 단계 더 떨어지면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면 아직 한참 멀어 보인다. 현재로서는 프랑스의 정국도 경제적 위기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이 만연하고 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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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9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5
  • 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지난 10월 12일 서아프리카의 또 다른 국가 카메룬에서 대선이 있었다. 이 대선에서 지난 11대 대통령이었던 폴 비야(Paul Biya)가 다시 한 번 당선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려 8선이나 대통령을 해먹었고, 현 나이 92세로 세계 최고령 현직 대통령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카메룬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등록 제한 규정이 없어 무제한으로 후보 등록이 가능한 셈이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82년 폴 비야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직을 물려받은 이후, 43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7년 전, 직전 선거에서도 71%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는 야권 후보가 11명이나 난립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거부하고 헌법위원회가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출마가 무산됐다. 사실상 폴 비야에게 대항할 의미 있는 경쟁자가 없어진 셈이다. 폴 비야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선거 유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또 다시 당선되고 난 후, 1933년 2월 생인 그가 사실상 100세까지 현직 대통령 직위를 보장 받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어느 누구라도 사실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지리적으로 사막과 밀림, 고원, 대서양 연안의 해안 지대끼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국가 안에 열대지방, 온대지방, 해양성기후에 아열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국가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250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룬에서 100세까지 임기를 거칠 대통령이 출현하는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선거 결과 폴 비야 대통령은 승리했고, 내년 202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폴 비야는 1982년 11월 4일에 첫 대통령인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Ahmadou Babatoura Ahidjo, 1924~1989)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총리였던 폴 비야가 1982년 11월 6일에 대통령에 등극했다. 이후 아히조는 1983년 4월에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카메룬은 아프리카 내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아히조와 비야가 현재까지 카메룬의 국권을 지키며 내실을 든든히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1984년 1월 14일에 비야는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99.98%라는 경이적인 득표수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이는 북한에서 있을 법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당연히 부정선거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민주적인 선거기 치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 때부터 폴 비야가 대놓고 권력투쟁에서 아히조를 압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카메룬을 통일시킨 공로를 가진 아히조에 비해 폴 비야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카메룬의 독립에 기여헸단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 폴 비야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히조는 위기에 몰려 결국 병을 핑계로 사임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983년에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아히조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비야는 아히조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결국 아히조는 1989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객사한 이후 현재까지도 고국인 카메룬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묻혀 있다. 이후, 1984년 아히조 대통령의 복귀를 노린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1988년 4월 24일에 카메룬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이래,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폴 비야는 다당제와 서구식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저질러 계속 대통령에 재선해 독재자로 변모했고, 2008년에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며 영구 집권을 하게되었다. 이후 나이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통치 능력에서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경제난 속에 각계에서 사임 요구들이 지속되었지만, 비야는 이를 일축하면 독재를 계속했다. 지난 12일에 치뤄진 카메룬 대선은 왕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집중되어 몰려 있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의 아프리카 정치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30년 이상 집권 중인 현직 대통령의 7명 중 5명이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대통령은 현재 나이로 83세로 계속 집권 중이고, 197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이던 숙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뒤 46년 동안 권좌를 수성하고 있으며, 아들을 부통령으로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반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1997년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현 나이 81세다. 1986년 집권한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두 차례 헌법을 수정하여 3선 제한과 75세 출마 금지 조항을 모두 삭제해 40년 집권 시대를 열었고 현재 나이 81세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내년 1월의 열일 우간다의 대통령 선거에도 재출마를 선언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werki) 대통령은 올해 나이 79세로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일 언급할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또한 앞서 언급한 대통령에 미치지 못하지만 15년을 독재했고, 곧 있을 25일 대선에도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 또한 나이가 83세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독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장기 집권자들은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만한 자리와 국가 이권 및 금전적 보상을 두둑히 쥐어주며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적 혈연, 그리고 가족 중심의 씨족들과 향토 지역끼리 똘똘 뭉치는 연고주의 등을 이용해 가장 강력한 충성 엘리트 집단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군사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규군과 별개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친위 부대들을 운영해 이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근대 국가 역사는 매우 짧아 완연한 안정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서구 열강에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해방자 등으로 포장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북한과도 매우 비슷하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독립투사 중 하나로 포장하여 영웅이자 해방자가 되었고, 그가 아니면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삼았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후진국과 후진국의 수장들이 독재를 일삼는 정치적 정당성은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2011년 장기 집권 권력자들을 연이어 축출되었던 ‘아랍의 봄’은 사하라 이남으로 번지지 않은 이유가 인종과 종교, 사회 구조들이 이슬람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아랍의 봄이 본격화 되던 2011년 UN의 도움으로 수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남수단의 초대 지도자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대통령 또한 예정된 선거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참고로 그 또한 올해 나이 74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장기 집권하고 있던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간간히 축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가봉에서는 56년 동안 이어졌던 봉고 부자 대통령 시대가 2023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짐바브웨를 37년 동안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2019)도 2017년 서방이 조작한 색깔혁명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된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었고 수단을 30년 동안 장기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도 2019년 쿠데타로 추방되어야 했다. 게다가 다른 대륙에 비해 전체 인구 중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가 인터넷과 IT의 발달로 인해 선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각 국 국민들이 시위를 벌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하거나 장기 집권이 저지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영상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예전처럼 철권 통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도양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지난 주에 벌어진 대선에서 야당 후보 패트릭 에르미니(Patrick Ermini)가 현직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대통령을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2024년 마키 살(Macky Sall) 당시 대통령이 예정되어진 대선을 연기하고 장기 집권을 노리는 꼼수를 벌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아프리카의 갈 길은 멀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의 8선째 재선을 보며 카메룬의 미래가 암담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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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5-10-22
  •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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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21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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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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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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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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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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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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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지난 10월 12일 서아프리카의 또 다른 국가 카메룬에서 대선이 있었다. 이 대선에서 지난 11대 대통령이었던 폴 비야(Paul Biya)가 다시 한 번 당선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려 8선이나 대통령을 해먹었고, 현 나이 92세로 세계 최고령 현직 대통령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카메룬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등록 제한 규정이 없어 무제한으로 후보 등록이 가능한 셈이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82년 폴 비야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직을 물려받은 이후, 43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7년 전, 직전 선거에서도 71%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는 야권 후보가 11명이나 난립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거부하고 헌법위원회가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출마가 무산됐다. 사실상 폴 비야에게 대항할 의미 있는 경쟁자가 없어진 셈이다. 폴 비야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선거 유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또 다시 당선되고 난 후, 1933년 2월 생인 그가 사실상 100세까지 현직 대통령 직위를 보장 받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어느 누구라도 사실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지리적으로 사막과 밀림, 고원, 대서양 연안의 해안 지대끼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국가 안에 열대지방, 온대지방, 해양성기후에 아열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국가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250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룬에서 100세까지 임기를 거칠 대통령이 출현하는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선거 결과 폴 비야 대통령은 승리했고, 내년 202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폴 비야는 1982년 11월 4일에 첫 대통령인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Ahmadou Babatoura Ahidjo, 1924~1989)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총리였던 폴 비야가 1982년 11월 6일에 대통령에 등극했다. 이후 아히조는 1983년 4월에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카메룬은 아프리카 내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아히조와 비야가 현재까지 카메룬의 국권을 지키며 내실을 든든히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1984년 1월 14일에 비야는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99.98%라는 경이적인 득표수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이는 북한에서 있을 법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당연히 부정선거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민주적인 선거기 치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 때부터 폴 비야가 대놓고 권력투쟁에서 아히조를 압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카메룬을 통일시킨 공로를 가진 아히조에 비해 폴 비야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카메룬의 독립에 기여헸단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 폴 비야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히조는 위기에 몰려 결국 병을 핑계로 사임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983년에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아히조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비야는 아히조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결국 아히조는 1989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객사한 이후 현재까지도 고국인 카메룬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묻혀 있다. 이후, 1984년 아히조 대통령의 복귀를 노린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1988년 4월 24일에 카메룬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이래,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폴 비야는 다당제와 서구식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저질러 계속 대통령에 재선해 독재자로 변모했고, 2008년에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며 영구 집권을 하게되었다. 이후 나이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통치 능력에서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경제난 속에 각계에서 사임 요구들이 지속되었지만, 비야는 이를 일축하면 독재를 계속했다. 지난 12일에 치뤄진 카메룬 대선은 왕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집중되어 몰려 있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의 아프리카 정치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30년 이상 집권 중인 현직 대통령의 7명 중 5명이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대통령은 현재 나이로 83세로 계속 집권 중이고, 197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이던 숙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뒤 46년 동안 권좌를 수성하고 있으며, 아들을 부통령으로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반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1997년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현 나이 81세다. 1986년 집권한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두 차례 헌법을 수정하여 3선 제한과 75세 출마 금지 조항을 모두 삭제해 40년 집권 시대를 열었고 현재 나이 81세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내년 1월의 열일 우간다의 대통령 선거에도 재출마를 선언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werki) 대통령은 올해 나이 79세로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일 언급할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또한 앞서 언급한 대통령에 미치지 못하지만 15년을 독재했고, 곧 있을 25일 대선에도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 또한 나이가 83세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독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장기 집권자들은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만한 자리와 국가 이권 및 금전적 보상을 두둑히 쥐어주며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적 혈연, 그리고 가족 중심의 씨족들과 향토 지역끼리 똘똘 뭉치는 연고주의 등을 이용해 가장 강력한 충성 엘리트 집단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군사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규군과 별개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친위 부대들을 운영해 이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근대 국가 역사는 매우 짧아 완연한 안정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서구 열강에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해방자 등으로 포장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북한과도 매우 비슷하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독립투사 중 하나로 포장하여 영웅이자 해방자가 되었고, 그가 아니면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삼았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후진국과 후진국의 수장들이 독재를 일삼는 정치적 정당성은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2011년 장기 집권 권력자들을 연이어 축출되었던 ‘아랍의 봄’은 사하라 이남으로 번지지 않은 이유가 인종과 종교, 사회 구조들이 이슬람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아랍의 봄이 본격화 되던 2011년 UN의 도움으로 수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남수단의 초대 지도자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대통령 또한 예정된 선거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참고로 그 또한 올해 나이 74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장기 집권하고 있던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간간히 축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가봉에서는 56년 동안 이어졌던 봉고 부자 대통령 시대가 2023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짐바브웨를 37년 동안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2019)도 2017년 서방이 조작한 색깔혁명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된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었고 수단을 30년 동안 장기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도 2019년 쿠데타로 추방되어야 했다. 게다가 다른 대륙에 비해 전체 인구 중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가 인터넷과 IT의 발달로 인해 선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각 국 국민들이 시위를 벌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하거나 장기 집권이 저지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영상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예전처럼 철권 통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도양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지난 주에 벌어진 대선에서 야당 후보 패트릭 에르미니(Patrick Ermini)가 현직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대통령을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2024년 마키 살(Macky Sall) 당시 대통령이 예정되어진 대선을 연기하고 장기 집권을 노리는 꼼수를 벌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아프리카의 갈 길은 멀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의 8선째 재선을 보며 카메룬의 미래가 암담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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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5-10-22
  •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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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21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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