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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슬라, 슈퍼차저 네트워크 확장 계획에 5억 달러 이상 투자 발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슈퍼차저 충전망 확장에 5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테슬라가 충전 네트워크 관련 부서 직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충전망 확대 속도를 늦추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지 일주일 만의 발표로, 전기차 시장에서의 경쟁 심화와 인력 감축 이슈에도 불구하고 충전 인프라 확장에 대한 회사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머스크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 X에 올린 게시물에서 "테슬라는 올해 수천 개의 새로운 충전기를 설치하기 위해 5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투자는 신규 부지 확보 및 충전망 확장 비용에 집중되며, 운영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주 테슬라는 전 세계적으로 인력을 10% 이상 감축하고, 충전 인프라 담당자들을 대거 해고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중에서도 충전 인프라 담당 책임자 레베카 티누치를 포함한 약 500명의 슈퍼차저 인프라 직원이 해고되었다. 해고 조치 이후 머스크는 신규 충전소 설치를 늦추고 기존 충전소 확장에 집중할 계획을 밝혔다. 이는 테슬라의 충전 규격인 북미충전표준(NACS)을 채택한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국의 대형 정유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미국의 충전 인프라 기업 블링크는 테슬라의 충전망 확장 속도 조절 발표를 계기로 시장에서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BP는 테슬라가 해고한 직원들을 재고용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며, 블링크의 CEO 브렌든 존스는 "테슬라의 속도 조절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머스크는 과거에도 사업 방향을 갑작스럽게 바꾸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2019년에는 대부분의 매장을 폐쇄하고 온라인 판매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건물주들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하고 대신 전기차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테슬라는 전기차 시장에서 충전소 사업을 선도해왔으며, 북미 지역 초고속 충전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EV어덥션에 따르면, 테슬라는 올해 3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한 1526개의 충전포트를 설치했다. 이런 가운데, 테슬라의 독일 베를린 기가팩토리 인근에서는 공장 확장 계획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주가가 약 2% 하락했다. 시위대는 기가팩토리의 확장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 뉴스
    • 경제
    2024-05-11
  • 인도네시아 오랑우탄, 자가 치료 위해 약초 사용하는 모습 최초 포착
    5월 3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는 오랑우탄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사용하는 독특한 행동이 과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목격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비인간동물 중에서도 약효가 입증된 식물을 직접 사용하여 상처 치료를 시도한 첫 사례로, 이는 동물 행동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전문가들은 밝혔다. 독일 막스 플랑크 동물행동연구소의 이사벨 라우머 박사와 연구팀은 수마트라 섬 북부 구눙 르우제르 국립공원에서 수컷 오랑우탄 '라쿠스'가 아카르 쿠닝이라는 덩굴식물의 잎을 씹어 그 즙을 자신의 얼굴 상처에 바르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 덩굴식물은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에 자생하며, 항균 및 항염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인도네시아 전통 의학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연구진에 따르면, 라쿠스는 상처 부위에 약초 즙을 여러 번 도포한 후, 씹은 잎으로 상처를 덮어 추가적인 보호를 제공했다. 이 행동은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치료 시작 후 5일 만에 상처가 봉합되었고, 한 달 이내에 완전히 치유되어 흉터만 남았다. 이번 연구는 비인간동물이 자신의 질병이나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식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증거를 추가로 제공한다. 라우머 박사는 이 사례가 약초의 선택과 사용에서 오랑우탄이 보여준 명확한 의도와 지식을 드러내며, 유인원과 인간의 공통 조상에서 비롯된 행동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라쿠스의 치료 행동이 다른 오랑우탄 사회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지, 아니면 개별적인 사례인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발견은 인간과 비인간동물 간의 유사성을 탐구하고, 야생 동물의 복잡한 행동 양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 과학 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게재되었다.
    • 뉴스
    • 사회
    2024-05-03
  • BMW그룹코리아,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최신 R&D센터 개관
    BMW그룹코리아가 22일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BMW그룹 R&D센터 코리아'를 새롭게 개관했다고 발표했다. 이 센터는 2015년 처음 인천 BMW 드라이빙센터 내에 설립된 이후 9년 만에 확장 이전하였으며, 2019년 한국 방문 당시 BMW그룹 본사 임원들이 발표한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완공되었다. 이날 개관식에는 요헨 골러 고객·브랜드·세일즈 부회장과 장 필립 파랑 아시아태평양·중동·동유럽·아프리카 지역 총괄 시니어 부사장, 다니엘 보트거 완성차 연구개발 총괄 시니어 부사장 등 BMW 본사 임원들과 BMW코리아 한상윤 대표, 부산·울산·경남 딜러 동성모터스 석상우 대표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새롭게 문을 연 R&D센터는 대지 5296㎡, 연면적 2813㎡ 규모의 단층 건물로, 사무 공간뿐만 아니라 정비·시험실, 인증 시험실, 전기차 충전기 시험동 등 다양한 테스트랩을 갖추고 있다. 센터에는 약 50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국내에 수입되는 BMW 차량의 인증과 제품 개발을 담당한다. 또한, 국내 기업, 연구시설, 대학과의 협력을 통해 내비게이션, 음성인식, 사용자환경(UI) 프로토타입 등의 개발을 진행할 예정이다. 다니엘 보트거 부사장은 “이곳에서 진행되는 테스트, 상품개발, 인증 작업을 통해 한국 협력업체들과의 협력을 강화할 BMW 테크놀리지 오피스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국내 출시 전 차량의 유지·관리 체계와 시험 절차를 구축하고, 집중 테스트를 통해 성능과 품질을 강화할 계획임을 언급했다. 이외에도 한국 자동차 관련 기술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BMW 스타트업 개러지’도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는 독일, 미국, 중국, 이스라엘,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6개 국에서 운영 중인 프로그램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판로를 만들고자 하는 테크 관련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요헨 골러 부회장은 신규 R&D센터 설립 이유에 대해 “한국은 BMW그룹 내에서 5번째로 큰 시장이며, 최신 기술에 능한 한국 고객들과 최첨단 기술을 테스트하기에 적합한 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BMW코리아는 지난해 한국 시장에서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높은 판매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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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24-04-23
  • 이탈리아 G7 정상회의 불참, 대통령실 '이탈리아 결정 존중' 밝혀
    2023년 6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될 예정인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에 대해 대통령실은 이탈리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탈리아는 올해 G7 의장국으로, 아프리카 및 지중해 지역 이슈에 초점을 맞춰 초청국을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은 이탈리아가 자국의 이민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들을 중점적으로 초청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존중한다고 전했다. G7 정상회의에는 의장국이 그해의 주요 의제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국가들이 초청ehls다. 한국은 2020년 이후 세 차례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았으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의 초청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각각 의장국이던 2020년과 2021년에 초청받은 바 있다. 하지만 올해 한국은 이탈리아와 꾸준히 협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청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과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의장국이었던 해에는 모든 초청국을 아프리카 국가로만 구성한 사례를 들며, 올해 초청 결정에 대한 이해를 당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G7 플러스 외교 전략이 실패했다며 외교 정책 기조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당 대변인 강선우는 "윤석열 정부는 국제 정세를 논의할 중요한 자리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과 다름없다"며 정부의 실패한 외교·안보 정책을 성찰하고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로 정책 기조를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대통령실은 G7과의 협력이 정상회의 참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중 상시적으로 국제 현안에 대한 공조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은 올해 다수의 G7 장관급 회의에 이미 참여하였거나 참여할 예정dl다. 또한,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에서도 한국의 G7 참여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한국의 G7 참여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대통령실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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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4-21

스포츠 검색결과

  • 분데스리가 한국 선수 대결, 김민재, 정우영 맹활약…슈투트가르트, 뮌헨 제압
    대한민국의 '괴물 수비수' 김민재(28·바이에른 뮌헨)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직전 경기에서의 부진을 극복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소속팀 뮌헨은 슈투트가르트에 1-3으로 패하며 리그 2위 자리마저 위태로워졌다. 이 경기에서 승리를 이끈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국 대표팀 공격수 정우영(25·슈투트가르트)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헤더골을 기록하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뮌헨은 4일(한국시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독일 분데스리가 32라운드 슈투트가르트와의 원정 경기에서 1-3으로 패했다. 이로써 뮌헨은 리그 우승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2위 자리를 지키는 것도 불안해졌다. 현재 뮌헨은 22승 3무 7패로 리그 2위에 위치해 있지만, 이날 3위 슈투트가르트에 패하면서 두 팀의 승점 차는 2점으로 줄어들었다. 이날 경기에서 김민재는 에릭 다이어와 함께 선발 센터백으로 출전했다. 김민재는 지난 1일 열린 유럽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경기에서 부진해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 이에 명예 회복이 필요했고, 다행히 토마스 투헬 감독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김민재는 풀타임을 소화하며 태클 2회, 걷어내기 3회, 가로채기 2회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공중볼 경합에서도 4차례 모두 승리해 성공률 100%를 기록했고, 패스 성공률도 91%로 높았다. 덕분에 김민재는 3실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점을 받았다.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은 그에게 평점 6.92를, 소파스코어는 평점 7.0을, 풋몹은 평점 6.5를 부여했다. 반면, 슈투트가르트의 정우영은 슈퍼조커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후반 27분 교체로 들어간 정우영은 1-1이던 후반 38분에 실라스 카톰파 음붐파의 크로스를 강력한 헤더 슈팅으로 연결해 골망을 흔들었다. 이는 월드 클래스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도 막을 수 없는 골이었다. 이는 정우영의 시즌 첫 골이기도 했다. 지난 해 여름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한 그는 올 시즌 리그 24경기에 출전해 1골 2도움을 기록했다. 골을 넣은 후 정우영은 두 팔을 벌리며 슈투트가르트 팬들을 향해 뛰어가는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정우영은 이날 경기에서 볼터치 17회, 패스 성공률 92%, 태클 1회를 기록했다. 후스코어드닷컴 기준으로 정우영은 평점 7.34를, 소파스코어는 평점 7.6을, 풋몹은 평점 7.7을 부여했다. 이날 경기의 첫 골은 슈투트가르트의 레오니다스 스테르기우가 전반 29분에 기록했다. 뮌헨은 전반 37분 해리 케인이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케인의 36호 골이자 시즌 리그 32경기에서 기록한 골이었다. 그러나 슈투트가르트는 후반 38분 정우영의 헤더골로 다시 리드를 잡았다. 후반 추가 시간에는 정우영의 골을 도왔던 음붐파가 쐐기골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슈투트가르트가 뮌헨을 잡고 승점 3을 챙겼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5-05
  • 토마스 투헬, 김민재 실수로 무너진 승리에 날선 비판
    바이에른 뮌헨의 토마스 투헬 감독이 김민재 선수의 결정적인 실수로 인해 무너진 승리에 대해 날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1일 독일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레알 마드리드와 2-2로 비겼다. 이 경기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해리 케인의 페널티킥 골로 잠시 역전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후반 38분 김민재의 파울로 인한 페널티킥을 비니시우스 주니오르에게 허용하며 승리를 지키지 못했다. 김민재는 이 경기에서 두 차례 큰 실수를 범했는데, 첫 번째는 비니시우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상황에서 뒷공간을 비우는 잘못을 저지르고, 두 번째는 경기 막판 페널티킥을 내주는 결정적인 파울을 범한 것이다. 투헬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실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김민재는 수비할 때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 공을 따낼 수 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큰 리스크를 초래한다"고 지적하며, "그는 너무 탐욕스럽고, 공에 대한 압박감이 부족하다. 그렇게 쉽게만 생각해서는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투헬 감독은 라커룸에서도 김민재에게 동료들 앞에서 같은 지적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팀 동료인 케인은 "투헬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비밀스럽게 지적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매우 직설적이다"라고 전했다. 이날의 실수로 김민재는 향후 주전 경쟁에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통계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과 골닷컴은 김민재에게 각각 매우 낮은 평점을 부여하며 그의 부진을 강조했다. 특히 골닷컴은 "세리에A를 지배했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짝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을 가했다. 바이에른 뮌헨은 이번 무승부로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위해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팀 내부에서는 김민재의 실수를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팀워크를 다잡을지 주목되고 있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5-01
  • 프리미어리그 팀들, 유럽 대항전에서 일제히 탈락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 위기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2023-2024 UEFA 유럽 대항전에서 줄줄이 탈락하며, 영국 축구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스날, 맨체스터 시티, 리버풀, 그리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각각의 경기에서 패배하며, 토너먼트에서의 여정을 조기에 마감했습니다. 아스날은 18일 독일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0-1로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는 홈에서 2-2로 비긴 1차전 이후, 합산 스코어 3-2로 아스날이 탈락하며 종결되었습니다. 같은 날, 맨체스터 시티도 레알 마드리드와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의 승부차기 끝에 3-4로 패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경기 후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큰 실망감을 나타내며 경기장에서 좌절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어진 유로파리그 경기에서도 리버풀과 웨스트햄은 각각 탈락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리버풀은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열린 8강 2차전에서 1-0으로 승리하였으나, 1차전에서 0-3으로 큰 패배를 당한 바 있어 합산 1-3으로 탈락했습니다. 웨스트햄 또한 독일의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합산 스코어 1-3으로 패하며 유럽 무대에서의 도전을 마쳤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탈락은 토트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적은 토트넘의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능성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스톤 빌라만이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하며 소속 리그의 마지막 희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챔피언스리그 포맷에 따라, UEFA 리그 계수 상위 1, 2위 리그의 전 시즌 5위까지의 팀이 본선 진출권을 얻게 됩니다. 현재 토트넘은 리그 5위를 달리고 있지만, 아스날과 맨시티의 탈락으로 인한 프리미어리그의 계수 하락은 토트넘의 직접 진출권 획득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트넘은 남은 경기에서 4위 이상을 확보해야만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가능하다는 중압감을 안고 있습니다. 토트넘은 이제 남은 경기에서 리그 내 경쟁자들과의 대결이 남아있습니다. 손흥민과 팀은 아스날과의 중요한 북런던 더비를 앞두고 있으며, 이 경기가 토트넘의 유럽 무대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4-19

문화 검색결과

  • 웹툰 작가 권리 침해 문제, 공정위 시정 조치에도 업계 불공정 계약 여전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웹툰 플랫폼 사업자들의 불공정 약관을 적발하고 시정 조치를 취했지만, 웹툰 작가들의 2차 저작물 작성권을 침해하는 문제는 여전히 업계 전반에 걸쳐 자주 발생하고 있다. 특히 소설과 웹툰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원작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리는 상황에서, 출판사나 플랫폼이 자신들의 권리를 극대화하려는 불공정한 계약 조항을 추가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난해 웹소설 공모전을 주최한 A사는 공모전 상금에 '원 소스 멀티 유즈(OSMU) 원고료'를 포함한다고 공지했다. 이는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가 A사에 우선적으로 귀속되며, 2차 저작물이 만들어지더라도 작가의 수입은 순수익의 일정 비율로 제한된다는 의미다. 이 같은 계약 형태는 과거 큰 논란이 됐던 '구름빵' 사례와 유사하며, 공정위의 기존 판단과도 배치된다. 공정위는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나 수익 배분은 원작자와 별도로 합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최근 유명 작가 B씨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출판 계약서에 새롭게 등장한 2차 저작물 관련 조항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B씨는 별도 에이전시와 전속 계약을 맺고 2차 저작물 제작·중개 실무를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가 여전히 2차 저작물 관련 수익 배분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지난해 '검정고무신'의 고 이우영 작가 사망을 계기로 콘텐츠 업계의 불공정 계약 관행을 조사하고 있다. 네이버웹툰과 레진엔터테인먼트 등 주요 웹툰 플랫폼들의 약관을 점검하고, 불공정 사항을 시정했다. 공정위는 이어서 오는 3분기에 출판사와 제작사 등이 사용한 콘텐츠 계약 약관 심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추가보상청구권 도입을 통해 원작자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도록 법적 보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럽연합(EU), 독일, 미국 등은 이미 작가와 플랫폼 사이의 불균형이나 불공정 계약으로 인해 양자 간 이익이 현격히 벌어질 경우, 작가 측이 적절한 보수를 청구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저작권법 개정안 4건이 발의됐으나 아직 국회 소관 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는 21대 국회의 임기 종료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해결해야 할 긴급한 문제로 남아 있다.
    • 문화
    • 문학
    2024-05-10

과학 검색결과

  • 한글과컴퓨터, '한컴 데이터 로더' 출시로 AI 데이터 추출 혁신 이끈다.
    한글과컴퓨터가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인 '한컴 데이터 로더'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PDF 문서뿐만 아니라 오피스 문서에서도 텍스트와 다양한 데이터를 추출하여 AI가 학습하기 용이한 포맷으로 변환하는 기능을 제공된다. 변환 가능한 포맷에는 JSON, CSV, TXT, XML 등이 포함된다. 한컴은 이미 국내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이 제품의 시범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이번 출시를 통해 유럽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컴은 스페인의 AI 보안 솔루션 회사 '페이스피'와의 협업을 통해 유럽 시장에 접근할 예정다. 한컴은 또한 글로벌 시장 확대를 목표로 다양한 언어(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어)를 지원하는 해외향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한컴의 AI 기술과 SDK 기술을 국제 고객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한컴 데이터 로더'의 개발 배경에는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실시간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정확한 텍스트를 생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검색 증강 생성(RAG)' 기술의 중요성이 있다. RAG 기술은 데이터베이스나 문서에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여 LLM에 적용, 실시간으로 정보가 갱신되어 정확도가 높은 텍스트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구조화되지 않은 데이터를 AI 학습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한컴의 이 기술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한컴의 대표 김연수는 "올해를 글로벌 빅테크 기업으로의 전환을 위한 원년으로 삼고, 인수, 투자 및 협력을 통해 AI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한컴 데이터 로더를 통해 글로벌 AI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설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전략은 한컴이 글로벌 기술 시장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4-18

칼럼 검색결과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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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현재 민족 갈등 우려에도 EU 가입 지속 추진 중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 독일과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복 장관은 2024년 3월 5일에 갑자기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지정학적 필요성(Geopolitical Necessities)’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에 대한 통합과 가입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2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국무총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지위 부여를 축하하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들며 보스니아의 조속한 가입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 유럽 5개국은 지난 2022년 7월 EU 이사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조속한 가입 후보국 지위의 부여와 가입 절차 개시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와 달리 보스니아의 가입에 대한 협상 개시를 망설이는 EU 집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4년 1월 26일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무장관은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코나코비치 장관을 만난 이후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같은 해, 7월부터 시작되는 자국의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과 에너지 및 야망을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통합과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지난 해, 2023년 11월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 인터뷰에서 EU 집행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 가입 요청에 대해 홀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샬렌베르크 장관은 이미 2016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던 보스니아에 앞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가입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EU의 서부 발칸 지역 확장이 지정학적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은 1995년 이후에도 보스니아로부터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편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은 2016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신청서 제출과 2022년 11월 분리주의 성향 도딕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딕 대통령은 1998~2010년 사이 두 차례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2018~2022년 동안 세르비아계의 몫으로 돌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0년과 2015년에 이어 2022년 7월 스르브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3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재임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꾀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도딕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스르브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국방, 사법, 조세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도딕 대통령은 1995년의 데이턴 협정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보스니아라는 단일 국가로 편성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묶어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내 UN 평화유지 활동과 데이턴 협정 이행을 감독하는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 대표는 2023년 10월 도딕 대통령이 데이턴 협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보스니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딕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압력이 거세지자 2024년 1월 8일 로이터(Reuters)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쟁이나 혁명을 통한 분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외세를 배제한 보스니아 내 다른 정파들과는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치권 존중을 주장했을 뿐이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9일 그는 스르브스카 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공화국의 날을 맞이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다시금 보스니아 중앙 정부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 중앙정부는 스르브스카에서 기념하고 있는 공화국의 날을 자국 내 민족 갈등을 조장하는 불법 행사로 규정 및 규제하고 있지만 도딕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날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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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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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아프가니스탄, 무엇이 문제였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상징인 탈레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 카불이 점령되고 내전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정정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그 역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탈레반이 축출된 이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에서부터 불거진 지독한 부정부패에 있었다. 그래서 본 지면에는 아프가니스탄 민주정 초대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의 일생과 그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일대기를 알아본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칸다하르 출생으로 파슈툰족 7개 씨족 중 하나인 포팔자이족 출생으로 정통 파슈툰족으로 나타나며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자이르 샤의 사촌인 무함마드 다우드의 외가 집안이기도 했다. 그런 영향인지 그는 유년시절 왕가의 도움으로 인도 펀자브 지역에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펀자브 지역에 살고 있는 파키스탄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때마침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카르자이는 펀자브에서 친해진 자신의 파키스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에 입국하여 파슈툰 주에 들어가 대소련 항거단체인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친소파인 극좌파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집권하고 있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소련 측의 무한 지원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 무자헤딘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 진영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전쟁 막바지에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게 되고 반(反) 나지불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무자헤딘의 공격을 받아 결국 패망했다.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카불을 장악한 무자헤딘의 지도자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나지불라를 비롯한 전임 정권 지도자들에 대해 온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많은 무자헤딘들 중에 강경파들은 전임 정권 인사들에 대해 숙청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여러 생각들과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권들이 같은 무자헤딘들도 분열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이들은 마침내 서로 간의 내전으로 승화되어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탈레반 세력이 대두하여 전면 등장하게 된다. 탈레반 세력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두된 이유는 정치와 종교, 사회가 이슬람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계시 아래 하나로 뭉쳐 이 위기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러한 주장들이 힘을 받았기 때문에 탈레반이 1990년대 초반에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카르자이는 외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정부와 군벌이자 헤즈비 이슬라미 단체의 수장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의 중재를 담당하고있었다. 그러나 이후, 카르자이는 굴부딘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지만 굴부딘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퀘타로 망명하여 왕정복고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 그의 아버지가 탈레반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분노한 카르자이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북부동맹 계열로 돌아서게 된다. 전향한 카르자이는 2000년~2001년 유럽과 미국을 돌며 반(反) 탈레반 세력을 알리며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그 당시 유럽과 미국은 탈레반의 정권 탈취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외의 반(反) 탈레반 세력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마수드와 카르자이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서로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고 이는 9.11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마수드가 9.11 테러 이틀 전에 알카에다의 자폭테러로 인해 사망하였기에 미국은 반 탈레반 세력의 중심인물로 카르자이를 선택하게 된다. 사실 카르자이는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미국이 미리 잠재적 대항마로 점찍었던 압둘 하크가 탈레반 전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했다가 잡혀서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하자 카르자이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카르자이가 떠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미국의 국제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카르자이 본인이 아프가니스탄 명문가인 왕가의 친척 출신이라는 정통성 문제의 해소에 당시 드물게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써 펀자브 유학생 출신으로 고학력 엘리트였다. 게다가 인도에서 배운 영어로 미국과 소통했기 때문에 탈레반을 축출하고 싶은 미국에게는 최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리더를 잃은 북부동맹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중재자로 자리했다는 것도 그가 대통령으로써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의 요인이 되었다. 또한 카르자이의 행적을 놓고 보면 그는 나지불라 정권 이후 모자데디 대통령 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내본 것 외에는 정계 요직에 거의 전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그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때문에 탈레반이나 카르자이의 정적은 그를 미국이 세운 허수아비라고 비난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2001년 12월 독일에서 열린 모임에서 아프가니스탄 과도내각을 조직하였고 카르자이는 수반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한 카르자이는 순식간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지도자 0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탈레반이 축출되고 민주선거가 최초로 치뤄지면서 55.4%라는 압도적인 표를 받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통합적인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으로는 6대 대통령이지만 민주선거로 이루어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는 정부수립 최초의 대통령으로 간주되고 있다. 내일 포스팅에는 카르자이의 대통령으로써 재임하는 시기와 엄청난 부정부패, 그리고 아슈라프 가니의 등장에 대해 언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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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슬라브계 인종끼리의 이른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
    183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포고딘(М. П. Погодин, 1800~1875)에 의해 작성된 논문 <서구의 중요성>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슬라브족의 우월성과 모든 슬라브족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 범슬라브 민족주의 시작이다.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모든 슬라브족들을 하나로 합쳐 외세를 방어하고 슬라브 민족만의 전통과 사상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국내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팽창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로 평가해 왔다. 19세기 들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들이 독립하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땅과 인구가 줄어들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새로 생겨나는 슬라브 민족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밀착하여 새로운 친러 세력을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큰 이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독립하는데 있어 같은 계열의 민족이자 강대국인 러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유리한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이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면서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같은 슬라브이기 때문에 도운 것도 있었지만 발칸 반도의 자원이나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항 확보의 정당성, 서구로 나아가기 위한 러시아의 패권 진출 등 다양한 플렌도 존재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계획과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이 원하는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짐에 따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서남부에 유고슬라비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최초로 주창했던 미하일 포고딘은 러시아의 지도하에서의 슬라브 민족들의 통일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정당성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Николай Данилевский, 1822~1885)는 슬라브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설파하여 범슬라브주의의 교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1867년에 모스크바에서 범슬라브계 민족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러시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 민족들이 반발했고 이와 같은 급진적 운동은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한 러시아인들은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영토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라브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욕설하고 폭행 등의 물리적인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 등은 옛 슬라브인들의 영토이고 이들을 학살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영토라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국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 슬라브족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정체성이 슬라브와 다르고, 스스로 슬라브가 아니라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더불어 스스로를 슬라브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범슬라브 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범게르만주의에 필적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인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오스트로 슬라브주의(Австрославиз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얀 콜라르(Ján Kollár, 1793~1852)나 파벨 샤파리크(Pavel Šafárik, 1795~1861) 등이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언어적의 유사성과 문화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체코의 프란치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가 제국 내 슬라브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여 1848년에는 모스크바 범슬라브계 회의보다 앞서 프라하에서 최초의 슬라브계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1814~1876)이 참가하기도 했다. 뒤이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1860년대의 러시아에 범슬라브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에서 촉발된 이유는 크림 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이민족인 영국,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에게 그 자존심이 꺾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패권을 함께 다투고 있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영국, 프랑스에게의 패배는 소련의 해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때부터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설은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슬라브인을 결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주의와 애국심이 범슬라브주의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 극우적인 발상의 범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 하나의 이념으로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대함과 그에 따른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게 되었고 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범게르만주의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것은 범슬라브주의 주창하는 자들의 특성이 자국민 슬라브족이 우선이라는 국가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개념의 민족주의는 국가 외적으로까지 분포한 민족개념에서 국가론으로 축소한 것인데 같은 계통의 민족이어도 국가를 벗어나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이는 서방의 민족주의와 다르게 슬라브권 국가들은 전제 군주가 통치해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민족이나 같은 슬라브계여도 무조건 학살하고 보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범슬라브주의이지만 동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론이고 무조건 국가가 먼저이다. 국외는 어찌됐건 동맹국이 아니면 동류의 민족이어도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을 없애는 “제노사이드”를 통해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싹인 자신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아 이식하여 번성케 해야 한다는 급진적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인종들 중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당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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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임기 시작과 그와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운명
    이틀 전 7일부터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오늘 79년째 전승기념일이다.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 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은 러시아 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왜 오전 10시냐면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간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이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또 얼마나 격렬했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틀 전, 푸틴 대통령은 5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행사를 치뤘다. 2018년에도, 2024년에도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은 2,000여 명이나 되는 초청 인사들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한 뒤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고 취임을 선서했다. 이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는 이유는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 시절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중세 노보고르드 공국은 베체(Вече)라는 의회에서 대공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대공은 오른 손으로 공국의 법전 위에 손을 올리고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맹세를 큰 소리로 포고하여 취임식을 치르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을 수호하고 이를 계승하는 나라다. 푸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서하며 포고하게 되어 있다. "나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러시아 헌법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국가의 주권과 독립, 안보, 정체성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Я обязуюсь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права и свободы народа,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Конституцию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осуществлять полномочия Президента для защиты суверенитет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безопасности и самобытности страны и служить народу.)" 이 포고가 끝나면 헌법재판소장이 연단 위로 올라와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하게 된다.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의 베체 의장이 올라와 대공 취임을 공식 선포한 것처럼 러시아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날은 발레리 조르킨(Валерий Зорькин) 소장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는 "안보와 전략적 안정에 대해 서방 측과 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오직 서로의 이익을 존중하는 대등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그와 같은 대등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라고 했다. 또 특수 군사작전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러시아는 하나로 단결한 위대한 국민이고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극복하며 함께 승리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야외 광장으로 나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속에 대통령 근위대의 사열을 받은 이후, 성모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으로 가서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감사 기도에 참석했다. 이 날 대통령 취임식과 동시에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이끄는 기존 정부는 자동 해산되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들은 대행 자격을 받으며 업무를 이어간다. 총리 후보는 전승절이 끝나고 난 10일, 장관 후보들은 13일 의회 인준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크게 변수가 없는 한, 현 각료 대부분이 그대로 인준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처럼 분위기가 좋은 러시아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초상집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내무부는 이달 4일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1978년 1월 25일 크리프이 리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젤렌스키는 러시아 연방 형법 조항에 따라 수배 중(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еленский, родившийся 25 января 1978 года в селе Крыпили, разыскивается по статьям Уголовного кодекс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이라고 올렸다. 이는 우선 형사 사건으로 입건하고 수배 영장을 때리면 우크라이나 헌법 상 임기가 마무리 되는 5월 20일 이후,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뒤이어 포로셴코 전 대통령도 수배자 명단에 올렸지만 아직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무부 측은 우크라이나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입건 혐의나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 이유야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을 꺾고 당선된 젤렌스키의 대통령 공식 임기는 오는 20일에 종료된다. 이는 현 우크라이나의 계엄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계염령은 대통령 선거를 연기한다는 것이지 대통령 임기를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겨냥해 '젤렌스키 흔들기'의 일환으로 그를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러시아가 그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압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그를 추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터폴에서 젤렌스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 러시아 정보부는 그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체포할 수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대통령 두 사람 외에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우크라이나 국방안보회의 서기(사무총장, 장관급)와 알렉산드르 쉴라파크 전 재무장관, 스테판 쿠비바 전 중앙은행 총재를 3일 수배자 명단에 올리면서 젤렌스키 임기 종료와 더불어 공식 체포 영장을 발부할 계획이다. 이제 젤렌스키는 서방을 방문할 때도 본인이 언제, 어디서든 체포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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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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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 불가리아의 경제사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공업화를 추진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로 체제변화를 시도했다. 불가리아는 전통적인 농업 강국이었으나, 구소련권 경제에 편입된 이후에 군수공업과 철강, 화학, IT산업이 발전하게 된다. 1990년 기점으로 불가리아는 자본주의 체제로 다시 편입하였다. 하지만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 이전 공산주의 시절에 비해 경쟁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고, 농업도 이전의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불가리아는 공산체제 이후 30년 동안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EU에 안전하게 정착하여 개방형 시장에 기반한 경제체제를 구축하면서 산업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 불가리아처럼 지하자원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부족하고 인구수도 1992년 기준으로 500만이 채 안 되는 국가는 발전이 쉽지 않다. 농업이나 공업 집단화는 오히려 불가리아 같은 국가에게는 차라리 나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체제 전환 시기 직후부터 불가리아의 경제는 10년 동안 아주 느린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일찌기 없었던 국가 부채는 높아지고 국고의 손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불가리아는 구소련 지역의 시장에 대한 의존에서 점차 EU으로의 수출을 증가시켰다. 불가리아는 1997년 이후 경제적 문제점을 극복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2000년에는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6.5%로 높아졌다. 이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구조 개혁과 통화위원회 도입, 그리고 EU 가입에 대한 기대는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향상된 생활 수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1999년 불가리아는 중앙 유럽 자유 무역 협정(CEFTA)에 가입했는데, 그 회원국들 (크로아티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과 함께 중요한 무역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2004년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EU 가입은 CEFTA 무역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2004년 불가리아 수입무역의 54%와 수출무역의 58%가 EU 회원국과의 교역이었다. 불가리아는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이스라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북마케도니아, 몰도바, 터키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다. 그러나 2008년의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불가리아가 계획한 완전한 경제 발전을 성공하지 못하였고 다시 침체기를 맞이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탄화수소 연료가 중요한 수입품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총 수입에서 이러한 상품의 비중이 1996년 29%에서 2004년 13%로 크게 감소했다. 이 기간 동안, 기계와 장비, 소비재, 자동차의 양이 증가하면서 수입품의 다양화가 개선되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은 가공해 재수출하는 옷감, 금속광석, 석유 등의 원자재가 차지하고 있다. 2005년에 가장 중요한 수입품은 기계와 장비, 금속과 광석, 화학과 플라스틱, 연료와 광물이었다. 주요 수입원은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였다. 2005년에 불가리아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은 이탈리아, 독일, 터키, 그리스, 벨기에였다.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의류, 신발, 철과 철강, 기계와 장비, 그리고 연료였다. 2005년 불가리아의 수출액은 총 117억 달러, 수입액은 총 159억 달러로 42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냈다. 2000년대 초반 불가리아 상품 시장이 급격히 위축된 러시아와의 무역 적자는 특히 심각하다. 불가리아의 막대한 외화 부채는 공산주의 시대 내내 경제적 부담이었다. 이에 2005년 말, 불가리아는 2002년과 예년에 비해 가치가 증가했지만 GDP의 백분율로 감소한 152억 달러의 대외 부채를 보고했다. GDP 대비 대외채무는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불가리아의 평균 임금은 2015년 3월 기준 600 레바, 한화로 40만 원 정도 되지만 현재는 750 레바, 약 50만 원 정도로 10만원 정도 오른 상태라 보면 된다. 하지만 물가 수준은 소득에 비해서 상당히 비싸 불가리아 인들은 타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노동력이 부족해져 산업 역군들을 채용하기 쉽지 않다. 2005년에 불가리아의 노동인구는 약 33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004년에는 11%가 농업, 33%가 산업, 56%가 서비스 분야에서 일했다. 실업률은 공산주의 시대 이후 내내 두자릿수를 기록하여 2000년에는 19%라는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 이후 민간기업과 국영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서 그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2005년의 공식 수치는 2002년 말의 16.9%와 비교해 11.5%였다. 그러나 2003년에 약 50만 명의 불가리아인들이 실업자였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는 않았다. 2005년 1월 정부는 최저임금을 매달 90달러로 25% 인상했다. 2017년 불가리아의 1인당 GDP는 16,230달러이며 실업률은 5.3%였다. 최근 불가리아는 EU의 평균 소득 수준을 따라 잡고 유럽 시민 공동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연간 최소 4%의 경제성장률을 맞추는 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불가리아의 금융 부문은 아직 저개발 상태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세계 은행(World Bank)에서 평가하기를 2019년 불가리아 비즈니스 용이성 점수에서 불가리아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전력 공급과 파산 해결 분야로 나타났다. 불가리아의 전력 90%가 화력발전으로 나타나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나 원유, 석탄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현재 불가리아는 2023년까지 친환경 에너지를 총 전력 생산의 23%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EU 회원국이라면 당연히 맞춰야 하는 기준이며, 이를 위해 EU는 많은 보조금을 불가리아에 지원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원유 매장량은 2016년 기준 1,200만 배럴이며, 천연가스 매장량은 2015년 기준으로 4억 입방미터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불가리아에서는 좋은 소식이 있다. 불가리아가 크로아티아와 더불어 EU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가입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는 2020년 7월에 발표한 성명에서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가 '유럽환율조정장치 2(ERM Ⅱ)'에 가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ERM Ⅱ는 유로존 가입 사전 단계로 두 국가는 앞으로 2년 간 유로화와 자국 통화 간에 환율 변동 폭을 제한하며 유로화에 대한 적응 단계를 거치게 된다. 두 국가는 이후 통화를 유로화로 전환하기 위한 실무과정을 진행해 이르면 2023년 최종적으로 유로존에 가입할 전망이다. 현재 19개국이 회원국인 유로존에서 마지막으로 가입한 국가는 리투아니아로 지난 2015년 가입했다. 이제 불가리아도 2023년부터 자국 화폐인 레바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유로화를 쓸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레바를 사용하고 있다. 유로화폐를 2025년부터 사용할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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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 발칸의 나치, 우스타샤에 협조한 카톨릭의 어두운 과거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멸망했고 나치독일과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고 이 괴뢰국에 루이 바르투(Louis Barthou)라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르비아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 보슈냐크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세르비아인 250,000명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330,000명에서 390,000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과 37,000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이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약 200,000명이 고문과 협박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이를 주도한 비밀 경찰청장이라는든지 세르비아인 학살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카톨릭 사제 출신 인사들이 차지했다.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건립하고 이를 담당한 수용소 소장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 출신이었다. 야세노바치 강제 수용소에서는 60,000명에서 70,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오늘날 야세노바치 수용소에는 이곳에서 살해당한 수감자 75,15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내일 나는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답사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하도록 하자. 당시 크로아티아의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는 1941년 4월 14일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벌였다. 이와 같은 엄청난 얘기는 현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선한 종교 천주교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경악스러운 얘기였다. 그리고 스테피나츠가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방국의 지도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와 우리의 지도자이신 안테 파벨리치로 하여금 무력으로 우리의 압제자를 쫓아내도록 인도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를! 안테 파벨리치에게 무한한 충성을!(Bog je vodio Adolfa Hitlera, vođu naših saveznika, i Antu Pavelića, našeg vođu, da silom istjeraju naše tlačitelje. Slava Bogu! Hvala ti Adolf Hitler! Bezgranična odanost Anti Paveliću!)"이라고 외치면서 선동했던 것은 당시 나치와 파시즘의 행패에 침묵하고 비호했던 로마 교황청과 연관이 있다. 당시 교황은 비오 12세(Pius XII)였다. 비오 12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뮌헨에서 머물고 있을 때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의 좌익 폭동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주교 관저로 쳐들어와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을 겪었어도 주교관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비오 12세가 뮌헨에서 머물 때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고 이처럼 그는 반공을 위해서라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당시 바티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태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나온 것은 괜히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비오 12세는 독일 공산당의 뮌헨 지부를 가리켜 무질서하고 추잡하며, 유태인 천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Hitler's Pope)>이라는 전기에 의하면 유태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심지어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축복했는데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가 비오 12세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고 썼다. 존 콘웰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은폐된 나치 학살의 배후(The person behind the Nazi massacre covered up by the power of Almighty God)"라고 비난했다. 교황의 비호에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의 전범 파벨리치를 축복했다. 우스타샤는 종교적인 학살을 묵인 받은 셈이 되었다. 파벨리치는 순수한 카톨릭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제도들을 도입한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준수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정부와 학교에서 비(非) 카톨릭교도는 모두 추방했다. 더불어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성경 및 책을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탄압했다. 더불어 카톨릭 신자가 유태인 등 이교도와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다. 모든 공공시설 입구에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워 놓고 인종 청소 작업도 병행했다. 파벨리치 정부는 이것을 '위험 인물(Undesirables) 제거 작업'이라 했다. 당시 파벨리치에 의해 규정된 위험 인물은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 비(非) 카톨릭교도들이었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들 완전히 절멸되어야 한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험 인물들을 청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이와 대량 학살의 전모에 대해 <바티칸 대학살(The Vatican's Holocaust Archived>이라는 책에 서술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조직적으로 자행했다 밝히고 있다. 가히 파벨리치의 목적은 크로아티아를 카톨릭 신정국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르비아인 학살에 있어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우스타샤들의 무기는 같은 카톨릭 국가들인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통해서 지원되었고 이 또한 바티칸이 계획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과 친카톨릭 독립 국가 또한 바티칸이 설계하고 기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바티칸에게 상당한 지원을 받았고 금전적인 지원으로 인해 불가리아인을 고용하여 유고슬라비아 국왕을 암살했다. 그리고 우스타샤를 이끌고 세르비아인과 유태인들을 학살함과 동시에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진두 지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패배하자 파벨리치는 남미로 도주했는데 이 또한 바티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우스타샤의 대부분이 카톨릭 사제들과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야세노바치 강제수용소 등 대부분의 절멸 수용소의 간부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었다. 아브로 맨하탄은 이를 두고 바티탄이 기획한 학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정권을 잡은 파벨라치는 모든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강제 개종법을 통과시키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다. 우스타샤는 이 법에 따라 세르비아인들을 개종시키며 상당한 양의 돈도 뜯어냈다. 1인당 180 디나르(Dinar)를 내고 고해성사를 하면 '개종 증명서'를 발행해줬다. 이와 같은 학살에 두려움을 느낀 세르비아인들 가운데 30%가 학살을 피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와 같은 강제 개종 소식은 교구 게시판, 즉 대주교 스테피나크가 담당하는 자그레브 주교 관할 기관인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스테피나크는 이를 바티칸에 보고했다. 1941년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 38호지에 의하면 "부딘치 마을의 모든 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2,300명 영혼의 새로운 교구가 만들어졌다(Svi mještani sela Budinci prešli su na katoličanstvo, čime je nastala nova župa s 2300 duša)."고 보도하였다. 만약 이러힌 개종에 대해 단체적으로 저항할 경우 무자비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어졌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바라즈딘(Varaždin)에 있는 카프치네 수도원 사제 암브로지아 노바크(Ambrozija Novak)는 우스타샤와 함께 모스타니(Mostanika) 마을을 포위한 이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사형에 선고되었다. 사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카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Srbi su osuđeni na smrt. Jedini način da se izbjegne smrtna kazna je da se prihvati katoličanstvo)."라고 포고문을 돌리기도 했다. 20세기에 중세 시대에서나 볼법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였다. 참고로 바라즈딘은 우스타샤에 의해 크로아티아 최초의 유덴프라이(Judenfrei)가 선언된 곳이었다. 유덴프라이는 "유태인이 없는 땅"이라는 독일어이다. 한편 리브노(Livno)에서 가까운 고리카(Gorika) 수도원 신부 스레치코 피리크(Srečiko Pirik)는 대학살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든 세르비아인을 죽여라. 학살을 마친 후에 이 교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의 행위를 고백하고 네 죄를 사해 줄 것이다(Pobijte sve Srbe. Nakon što završiš svoj posao, dođi ovamo u crkvu i ja ću ispovjediti tvoja djela i osloboditi te tvojih grijeha)." 이와 같은 말들로 인하여 1941년 8월 10일에 리브노 지방에서 대학살이 존재했으며, 5,600명 이상의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은 잔악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이는 중세 시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무슬림들을 학살했는데 이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체포한 정교회 신도들을 산 채로 생매장시켰고 도끼로 목을 잘라 살해했으며 눈알을 빼서 눈알을 화환처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한편 붙잡힌 정교회 사제들은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들은 맨발에 말 편자를 못 박아 불길을 걷게 하면서 태워 죽였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Jasenovac)에서는 정교회 신자들과 사제들을 소각로에 던져져 산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굶어 죽거나 갓난 아이들은 벽에 던져져 머리가 깨진 채 죽었다. 우스타샤는 정교회 신자들을 편리하게 죽이기 위해 일명 세르비안 칼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조직적인 학살을 진두 지휘한 많은 전범들이 카톨릭 성직자들이라는 것에서 대단한 충격을 받고 있다. 상당수 카톨릭 사제와 수도원의 수사들은 정교회 사제들과 신도들의 사형 집행을 주도했다. 1941년 대학살을 주도한 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투고미르 솔도(Tugomir Soldo) 수사였다. 한편 보지다르 브랄로프(Božidar Bralov) 신부는 180명의 세르비아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후 시신을 쌓아놓고 그 앞에서 춤을 췄다는 보고도 존재한다. 나치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Dragutin Camber)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을 명령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Gregori Rozman)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전격 수배되었다. 한편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Ivan Sarik) 주교는 세르브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한 사제였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여 독일 나치들조차 놀라게 한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앞서 첫 단락에서 언급한 프란시스카 수도회의 사제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 그리고 레온 드라가노비츠(Leon Draganowicz) 신부는 전시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탈출시킨, 이른바 쥐구멍 라인(Rat Line)으로 불리는 탈출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크로아티아에서의 나치를 두둔하여 학살을 주도한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는 나치 전범에 학살자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 받아도 모자랄 인물이다. 티토는 전범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기소했다. 티토는 세르비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6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는 이에 반발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스테피나츠 대주교의 사면과 석방을 국제사회를 통해 압박한다. 그리고 스테피나치 대주교를 오히려 추기경으로 승진시켜버렸다. 이어 그의 사후, 충격적이게도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면서 시복되었다. 이러한 나치와 협력 행위에 대해 로마 카톨릭과 바티칸 교황청의 지금 입장은 어떨까? 학살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사과와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현재 스테피나츠는 자그레브 대성당에서 편안하게 영면하고 있다. 이런걸로 볼 때 크로아티아는 사과와 반성 없는 나치 국가가 맞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8
  • 최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후예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크로아티아의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는 지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승리했고 여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Socijaldemokratska partija Hrvatske)의 세가 강하다. 게다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정치적인 실권은 없지만 친러시아 성격을 갖고 있어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중국 기업을 끌어들여 일대일로 아드리아 해 사업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화해 구도를 열어가기 위해 접촉 중인데 곧 세르비아를 방문할 시진핑 주석이 오는 시기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중인듯 싶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바는 없다. 이에 크로아티아 극우세력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자그레브 내에서 연일 시위를 열고 있다. 이에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우스타샤의 후예라고 비난 했고 플렌코비치 총리를 "파벨리치의 아들(Потомци Павелића)"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에 자그레브에서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우스타샤의 표어를 앞세워 반러, 반중, 반세르비아 정서를 강화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반 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면서 철저히 극우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카톨릭이 섞인, 종교 전체주의(Religious Totalitarianism)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이 강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도 "고대 로마제국의 영향을 살리겠다(Faremo rivivere la gloria dell'antico Impero Romano)"는 극우주의적 표어로 선전, 선동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표어 제작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실상 우스타샤는 무솔리니의 자금지원까지 받아서 활동했었다. 특히 우스타샤의 창설자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889~1959)는 무솔리니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 및 달마티아의 병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 프랑코프치(Frankopci)에 입당했는데 당은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가 지도하고 있었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는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이해(Comprendere il ruolo degli italiani nell'impero coloniale italiano)"라는 제목에서 “Illuminano il mondo con la loro arte, insegnano con la loro conoscenza e forniscono una forte organizzazione nazionale nel nuovo territorio attraverso le loro capacità e abilità di governo (그들의 예술로 세상을 밝히고,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며, 그들의 통치 기술과 능력을 통해 새 영토에 튼튼한 국가 조직을 마련할 것)”이라 주장했었다. 이것을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라고 한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여기에 박수치고 있었던 인물이고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이를 크로아티아의 실정에 맞게 시도하고자 했던 인물인 것이다. 프랑크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파벨리치는 프랑크 밑에서 개인 비서 역할을 했고 1927년 자그레브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무장단테 조직인 우스타샤(Ustaša)를 탄생시킨다. 우스타샤(Ustaša)라는 이름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인 'Ustati', Bставать (일어서다)의 슬라브어인 Usta, 중세 이탈리아어인 Scalatia (오르다의 중세어)를 합성해 만든 단어다.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반란(Pobuna)"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이들은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우스타샤의 표어였다. 이같은 구호는 나치 독일의 'Sieg Heil'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면서 독립한 세력에 가깝다. 본래 남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원하고 있던 세르비아와 협력해 크로아티아인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가 위협당할까봐 두려워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남슬라브의 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란을 주도했으며 결국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조직을 옮겼다. 역시 이들은 이탈리아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이후의 얘기다. 한편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알렉산데르 1세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내의 경제마저 파탄에 이르자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시위가 빗발치게 되고 파벨리치는 이를 이용해 알렉산데르 1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1세는 프랑스와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를 방문한다. 프랑스 외무장관이자 총리를 역임했던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과 회담을 진행했다. 한편 파벨리치는 불가리아의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손을 잡고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을 의뢰하게 된다. 이 때 의뢰를 받은 인물이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 1897~1934)이다. 체르노젬스키는 회담장에 뛰어들어 알렉산데르 1세에게 한 발, 장 루이 바르투에게도 한 발의 권총을 발사했고 알렉산데르 1세는 그 자리에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했다. 한편 장 루이 바르투는 국왕을 지키려다 팔에 총알이 관통했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바르투의 경우, 빨리 지혈했으면 살 수 있었지만 동맥에 총을 맞은데다 그걸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병원에 옮겨진 지 1시간 뒤에 사망했던 것이다.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체르노젬스키가 의뢰를 받은 것은 알렉산데르 1세 한 명이었다고 한다. 즉, 바르투가 죽은 것은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 파장은 엄청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우스타샤의 소행임으로 밝혀내고 파벨리치의 소환을 이탈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마무리했으며 그 마저도 3개월만에 풀려났다. 사실상 무솔리니가 풀어준거나 다름없는데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독일로 넘어가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히틀러에게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숙청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파벨리치는 자신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을 세우게 된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나치와 파시즘이 교합된 괴뢰국이었고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 왕조 방계인 사보이아오스타(Duca d'Aosta) 가문의 아이모네를 국왕 토미슬라브 2세(Tomislav II, 1900~1948)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토미슬라브 2세는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왕이었지만 정작 크로아티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왕위 자체는 일단 수락하였으나, 본인이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병합의 현실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문과 안전 보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이름 뿐인 왕인데 굳이 파벨리치가 자행한 숙청의 피바람을 지켜봐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벨리치는 우스타샤들과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적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살해하고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1/3은 추방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이들은 같은 슬라브계인 세르비아를 학살하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나치 추종 세력 중 가장 악질적인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 집단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집단으로 꼽히고 있는 이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대다수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크로아티아인이나 가톨릭교도인 척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을 총살은 물론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 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의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사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혹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만행은 당시 발칸반도에 주둔하던 나치 독일군들조차도 그 잔혹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자그레브에 위치한 독일 점령군 사령부는 그들의 잔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히려 히틀러에게 우스타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에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이 우스타샤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학살의 만행이 끝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들은 인종청소를 당하다가 나치 독일이나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인종 절멸에서 구해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파벨리치는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을 개정하여 아예 비 크로아티아 시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면서 철저하게 세르비아인들을 솎아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 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자발적 아리아인이 된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1941년 6월 15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에 파벨리치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9월에 파벨리치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Slavko Kvatelnik)를 공식 해임한 이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더불어 1943년에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그는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아인자츠그루펜이나 SS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총 한 번 쏘지 않고 편리하고 쉽게 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업을 열었고 나치 친위대원들이 이를 배워가기까지 했으며 여기에서 배운 아인자츠그루펜은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인 일명 OUN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우스타샤는 민병대들을 이용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22만~5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심지어 당시 카톨릭계는 이들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이들을 고트족의 후예라 하며 선동했기 때문에 학살을 면할 수 있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남슬라브인들 중, 세르비아인이면 모를까 크로아티아인은 고트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편 홀로코스트 수용소 중에도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필두로 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져 있던 것이 30곳이나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민병대 체트니치가 조직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게릴라 전을 벌이며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민병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민병대들은 1945년 1월,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에 흡수되었지만 이미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군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철군했다. 결국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궤멸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피하여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고 해방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망명 중이던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네오나치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우스타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부터의 민족적 독립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일 우스타샤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에 의해 복원된다. 학살 대상은 세르비아 인뿐만 아니라 보슈냐크 무슬림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투지만이 서구권으로부터의 비난 여론을 감수한 끝에 우스타샤를 해산했지만 그 뿌리는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인한 세르비아인 학살은 반 크로아티아 감정을 세르비아 인들에게 남기기 충분했고 현재도 세르비아의 체트니치와 더불어 서로를 증오하는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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