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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드론 5회 북한 침투…특검 “북풍 기획 의혹 수사 중”
[서울=2025.07.11.] 尹 정부 시절 북한 드론 작전, 정치 쟁점화…특검 "북풍 기획 가능성 배제 못해" 지난해 10~11월,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북한에 대한 무인기(드론) 정찰이 최소 5차례 이상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내란 및 외환죄 혐의를 수사 중인 조은석 특별검사팀은 11일 오후 2시 구속된 윤 전 대통령을 상대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이번 무인기 작전은 당시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공천 개입 의혹과 ‘디올백’ 논란 등 정국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집중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역 장교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드론작전사령부는 “윤 전 대통령 지시로 평양에 5차례 드론을 보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은 이 작전이 단순 군사 대응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북풍 몰이’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드론 출격 시점은 김 여사 관련 특검법 재의요구권 행사 직후로, 국면 전환을 위한 고도의 기획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반면, 북한이 당시 화성-19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오물 풍선을 보내는 등 도발을 이어간 점을 고려하면 군사적 맞대응 차원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특검은 또 최근 해당 무인기 작전에 활용됐을 것으로 의심되는 드론 통제 차량이 폐차 직전에 보전 조치된 사실도 확인했다. 해당 차량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드론 시험용으로 쓴 것으로 추정되며, 평양에 투입된 무인기와 동일 모델일 가능성이 있어 폐차 시도 자체가 증거인멸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에서 일부 국무위원만 참석시켜 형식적 요건을 채우고, 비화폰 정보 삭제 및 허위 공보 지시 등으로 내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새벽 구속돼, 124일 만에 재수감됐다. 특검은 향후 20일간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하고, 계엄 공범 및 외환 혐의 관련자들까지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특히 무인기 침투로 인해 우리 군사기술이 노출됐을 가능성에 따라 ‘일반이적죄’ 적용 여부도 검토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군사작전 논란을 넘어, 정권 차원의 여론몰이 및 권력 남용 의혹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라 정국에 중대한 파장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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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박스쿨 논란 일파만파…尹정부 청와대 '지원 압박' 정황 드러나
대통령실, 특정 역사 단체 지원 압박 의혹… 교육계 정치 개입 논란 확산 [서울, 2025년 7월 11일] – 윤석열 정부 용산 대통령실이 특정 민간 역사 교육 단체인 '리박스쿨' 관련 단체 지원을 교육부에 압박했다는 의혹이 7월 10일 국회 청문회에서 제기되며 한국 교육계에 정치 개입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박스쿨은 최근 대선 당시 댓글 조작팀 운영 의혹과 함께 극우 성향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활동이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번 청문회는 교육부 국정감사 차원에서 열렸으며, 여야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는 청문회에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며 의혹을 부인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내부 문건과 교육 활동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교육부 간부,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직접 연락받았다" 증언 김천홍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은 청문회에서 손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글로리사회적협동조합'을 잘 챙겨달라는 요청을 "용산 대통령실 비서관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는 압력으로 느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정책관은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해석했다"며 "행정부 내에서 이런 식의 연락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해당 조합은 지난해 '늘봄학교' 사업 공모에 참여했으나 평가 결과 탈락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탈락 이후에도 대통령실에서 지속적으로 관련 문의와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통령실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공정성 훼손에 대한 교육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정부 사업 선정 과정의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공모 사업은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라며 "외부 압력이나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원칙적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 대통령실과의 연락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습니다. 강사 159명 배출… 공교육 이념 편향 우려 증폭 교육부 전수조사 결과, 리박스쿨 연관 단체에서 자격증을 받은 '늘봄학교' 강사는 기존 43명에서 116명이 추가로 확인돼 총 159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과학 및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공교육 내 이념 편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강사들은 전국 132개 초등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과 경기 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일부 강사들은 정규 교육과정 외에도 특별활동 시간을 활용해 역사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어 교육 내용의 적절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공교육 현장에 특정 이념을 가진 단체의 강사들이 무분별하게 투입되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라며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내부 문건에 "전두환 명예회복" TF 명시 한겨레는 리박스쿨 내부 문건을 공개하며, **"전두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사 문제 연구회' 결성 회의 자료, 보수 우파 강사 양성 계획, 좌익 단체 대항 조직화 등의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공개된 문건에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한 좌편향 교육 극복"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활동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손 대표는 이에 대해 "역사를 왜곡한 적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전두환 명예회복이라는 표현 자체가 역사 왜곡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한 내부 문건에는 "교육청 및 교육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계획도 포함되어 있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계 진출 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손효숙 대표, 현직 민주평통 자문위원 겸직 논란 경향신문은 손효숙 대표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직을 겸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임기는 2023년 9월부터 오는 8월 말까지로 현재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위촉 경위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통일 정책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으로, 손 대표의 겸직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의 정치적 성향과 자문위원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자문위원 위촉 과정의 투명성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습니다. 민주평통 관계자는 "자문위원 위촉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덕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된다"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소속 단체 활동은 위촉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명했습니다. 청문회 불출석 논란까지 불거져 한편, 리박스쿨과 연관된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손자 생일잔치'를 이유로 청문회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해 비난을 샀습니다. 김 이사장은 리박스쿨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기관의 책임자로, 청문회에서 핵심 증인으로 채택되었으나 개인적 사유를 들어 불출석했습니다. 국회 의원들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재출석을 요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손 대표 역시 청문회 당일이 되어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연락이 닿지 않아 논란이 있었습니다. 교육계 "정치적 중립성 훼손" 우려 확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육계에서는 공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육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며 "관련자들의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습니다. 교육부는 늘봄학교 강사 운영 지침을 재검토하고, 향후 강사 선정 과정에서 더욱 엄격한 심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현재 활동 중인 강사들에 대해서도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한 점검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야당은 이번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며, 대통령실의 교육정책 개입 의혹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여당은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라며 선을 긋고 있어, 관련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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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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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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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최저임금 2.9% 인상…17년 만의 노사 합의, 노동계는 ‘퇴장’
2026년 최저임금, 17년 만에 노사 합의에도 노동계 거센 반발 [세종=2025.07.10.]– 2026년도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320원으로 최종 결정되며, 2008년 이후 17년 만에 노사 합의로 도출된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최저임금 심의라는 세간의 큰 기대와는 달리 2.9%의 낮은 인상률을 기록하며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번 결정은 7월 10일 오후 11시 18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제12차 전원회의에서 내려졌다. 2025년 1만30원에서 290원 인상된 1만320원이라는 수치는 수치상 노사 합의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노동계는 합의 과정과 결과 모두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집단 퇴장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다. 노동계,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률" 강력 규탄 민주노총은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심의촉진구간(1만210원~1만440원)**이 지나치게 사용자 측 입장을 대변하며 저임금 기조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반면, 한국노총은 막판까지 협상 테이블에 남아 숙고 끝에 합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노동계 전체의 실망감은 감추지 못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공익위원들이 사실상 사용자 측의 손을 들어준 기만적인 제안을 했다"고 강도 높게 비난하며, "이번 결정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한 처사"라고 규탄했다. 실제로 이번 최저임금 인상률 2.9%는 최저임금제 도입 이래 역대 7번째로 낮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특히,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의 첫해 인상률(2.7%)을 제외하면, 역대 정부 임기 첫해 최저임금 인상률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기대했던 노동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경영계 "민생경제 고려한 양보"…실질 인건비 부담 호소 반면, 경영계는 영세·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고려할 때, 사실상 최저임금 동결까지도 검토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경제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양보했다고 설명했다. 사용자 측은 최저임금에 주휴수당과 사회보험 부담까지 더하면 실질적인 인건비는 시간당 1만4,000원에 달한다며,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소상공인들의 경영난을 꾸준히 호소해 왔다. 이들은 이번 인상 역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월 환산 최저임금 215만 원…향후 고용노동부 고시 예정 이번 결정에 따라 2026년도 월 환산 최저임금은 주 40시간, 월 209시간 기준으로 215만6,880원이 된다. 이는 야간·연장근로 수당 및 사회보험료 등 각종 수당 및 보험료 인상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출한 최종안은 고용노동부가 8월 5일까지 고시해야 하며, 2026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노동계는 이번 결정에 대해 이의 제기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과거 사례를 비추어 볼 때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급변하는 경제 현실 속에서 노동 존중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회적 고민을 반영하는 핵심 이슈로 계속해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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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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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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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 상가 옥상 추락 사고…11세 테니스 유망주 모녀 참변
경기 광주 상가 건물 추락사고로 3명 사망... "옥상 출입문 관리 제도 개선 필요" [경기 광주=2025.07.07] 지난 7일 오후 2시 36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13층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추락 사고로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고 경위 18세 여성 A양이 해당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A양은 1층 거리를 지나던 모녀와 20대 남성 위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A양과 11세 소녀가 현장에서 사망했고, 소녀의 모친(45세)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다음 날 숨졌다. 20대 남성은 어깨 등을 다쳐 치료 중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테니스 유망주의 안타까운 죽음 사고로 숨진 11세 소녀는 테니스 유망주 피루희 양으로 확인됐다. 대한테니스협회는 "피루희 선수는 씩씩하고 당찬 선수였으며, 지난 소년체전 선발전 탈락 후에도 '내년엔 꼭 갈 거예요'라며 꿈을 향한 열정을 보였다"고 애도했다. 피루희 양은 오는 11일 전북 순창 주니어 테니스 대회 출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준비 중이었다. 협회는 해당 대회 경기장에 애도 공간을 마련하고, 참가 선수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옥상 출입문 개방' 제도의 딜레마 이번 사고는 현행 건축법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건축법 시행령과 소방시설법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상가건물은 재난 발생 시 대피를 위해 옥상문을 닫은 상태로 유지하되 잠그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기도 한 건축직 공무원은 "옥상문을 물리적으로 잠그는 것은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화재나 지진 등 긴급상황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장치지만, 자살 시도나 사고로 인한 2차 피해가 빈발하면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반복되는 유사 사고들 옥상을 통한 투신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3년 5월 대구 남구 상가 건물 옥상에서 20대 여성이 투신해 지나가던 80대 여성을 덮쳐 양측 모두 중상을 입었고, 2017년 경기 용인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상가건물의 옥상은 외부인 출입이 자유롭고 관리 인력이 부족해 안전사각지대가 되기 쉬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의 기술적 해법 제안 전문가들은 옥상 출입을 차단하는 대신 기술적 제어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동현 전주대 소방안전공학과 교수는 "다수가 이용하는 상가는 사고 시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 센서와 경고음, 출입 기록 시스템 등을 탑재한 출입문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위험군에 대한 선제적 대응 체계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찰 수사 현황 경찰은 현재 A양의 투신 경위를 조사 중이며, 유서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A양은 사고 당일 해당 상가 건물에 입주한 정신과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뒤 옥상으로 올라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의료기록과 병원 관계자 진술 등을 바탕으로 정확한 사고 배경을 조사하고 있다. 사회적 과제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도시 설계와 법 제도의 공백이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재난 대응과 자살 예방, 사전 안전망 구축이라는 다층적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고위험군 청소년과 그 가족에게 보다 촘촘한 돌봄과 심리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자살 예방 상담전화: ☎ 1393 (24시간 운영)청소년 전화: ☎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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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비평] 윤석열 전 대통령 124일 만에 재구속,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나?
윤석열 전 대통령 재구속 보도 분석: 언론의 시각과 정보 전달 방식 사건 개요 2025년 7월 10일 새벽,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4일 만에 재구속되었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증거인멸 우려"를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의 두 번째 구속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주요 언론사별 보도 특징 분석 1. 중앙일보: 절차적 정확성과 균형감 강점: 가장 상세한 시간대별 타임라인 제공 (4페이지에 걸친 상세 일지) 특검팀과 변호인단의 주장을 균형있게 소개 178쪽 PPT 프레젠테이션 등 구체적 수치 제공 법정 공방 과정을 상세히 기술 특징: "조은석 특검 속도전 통했다"는 제목으로 특검의 신속한 수사를 강조 박근혜 전 대통령 사례와의 비교를 통한 맥락 제공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관련 후속 수사까지 포괄적 다룸 2. 동아일보: 핵심 포인트 중심 강점: "'무인기 의혹' 등 말맞추기 차단"이라는 명확한 분석 제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정보 전달 구속의 실질적 의미(외환 혐의 수사 가능성) 강조 특징: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핵심만 압축 향후 수사 방향에 대한 전망 제시 3. 경향신문: 인간적 디테일 강조 강점: 구치소 내 생활 환경에 대한 구체적 묘사 (3평 독거실, 에어컨 없음, 미니치즈빵 등)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생활밀착형 정보 제공 "머그샷" 촬영 등 구속 절차의 세부사항 설명 한계: 정치적 의미나 법적 쟁점보다 가십성 정보에 치중 4. 한겨레: 비판적 시각 강점: 특검팀의 논리와 전략을 상세히 분석 변호인단의 반박 논리도 충실히 소개 사진 설명까지 정확하고 상세함 특징: "내란 우두머리 혐의"라는 표현으로 사안의 심각성 강조 구속의 법적 근거와 향후 수사 전망을 균형있게 다룸 5. 한국일보: 실용적 정보 제공 강점: 영장심사 과정의 시간대별 진행 상황 상세 기록 특검팀의 178쪽 PPT 등 구체적 증거 자료 언급 향후 20일간의 구속 수사 계획 명시 특징: 절차적 정확성을 중시하는 보도 스타일 법적 절차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정보 제공 6. 조선일보: 간결한 팩트 중심 강점: 핵심 사실을 간명하게 전달 외환 혐의에 대한 특검의 향후 수사 방향 강조 지지자들의 반응까지 포함한 현장감 있는 보도 한계: 상대적으로 분석이나 배경 설명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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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첫 재구속…윤석열, 내란·허위공문서 등 혐의로 서울구치소 수감
윤석열 전 대통령, 124일 만에 재구속…특검 “비상계엄·외환 혐의 정조준” [서울=2025.07.10.]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4일 만에 다시 구속됐다. 조은석 특별검사팀이 12·3 비상계엄 선포 의혹을 수사하기 시작한 지 22일 만에 신병을 확보한 것으로,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두 차례 구속되는 초유의 사례가 기록됐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0일 새벽 2시7분께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직권남용, 특수공무집행방해, 허위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구속 사유에 대해 법원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명시했다.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구속은 지난 3월 8일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이후 124일 만이며, 이번 구속으로 인해 조 특검은 외환 혐의 등 추가 혐의 수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유리한 국면을 맞았다. “증거인멸 우려”에 구속…영장심사 6시간 넘게 공방 윤 전 대통령은 전날 오후 2시22분부터 9시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다. 총 6시간40분에 걸친 공방은 검찰과 변호인단이 치열하게 맞선 결과였다. 조은석 특검팀은 박억수 특검보, 김정국·조재철 부장검사 등 10명의 검사들이 178쪽 분량의 PPT와 300쪽에 달하는 의견서를 통해 윤 전 대통령의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핵심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를 주도했으며, 재범 위험이 크고, 수사에 비협조적이며 증거인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특검은 특히 윤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 심의 과정에서 일부 국무위원을 배제하고, 허위 계엄 선포문을 사후에 작성하게 했으며, 외신 대응용 허위 공보문 작성도 지시한 점을 강조했다. 또한 지난 1월 대통령경호처에 총기를 소지하도록 한 의혹과 비화폰 통신기록 삭제 지시 혐의도 구속 사유에 포함됐다. 이에 맞선 윤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해당 혐의들은 이미 내란 사건과 함께 기소된 내용으로, 별도의 재구속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윤 전 대통령도 직접 최후 진술에 나서 “계엄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야당의 입법 폭거를 견제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환 혐의 본격 수사 예고…“무인기 북파 의혹” 정조준 이번 구속영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의 외환 혐의 수사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의혹은 윤 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북측의 군사 도발을 유도했다는 혐의다. 특검은 이 계획이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군 관계자와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참고인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특검은 앞으로 20일간의 구속 기간 동안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할 예정이며, 외환 혐의를 포함한 추가 기소도 검토 중이다. 3평 독방, 무더위 속 구치소 생활…대통령 경호도 중단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도착한 뒤 일반 구속 피의자와 동일한 절차로 수감됐다. 수용번호가 부여되고, 머그샷 촬영 및 신체검사를 거친 후 미결 수용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용된 방은 약 3평(10㎡) 규모로, 침대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야 하며,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아침 식사는 미니치즈빵, 찐감자, 종합견과류였다. 윤 전 대통령에게 제공되던 대통령경호처의 경호는 구속과 동시에 중단됐다.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속 상태에서는 경호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검의 전략적 구속, 정국에 미칠 파장 주목 이번 구속은 조은석 특검의 전략적 속도전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특검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핵심 인물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수사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시에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외환 혐의 수사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되면서, 향후 윤 전 대통령뿐 아니라 관련 인물로 지목된 군 고위 인사들과 정치권까지 수사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구속을 두고 “사법 정의 구현”과 “정치 보복”이라는 상반된 해석이 엇갈린다. 여당은 특검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협조를 예고한 반면, 야당은 “검찰권의 정치적 남용”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조은석 특검팀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윤 전 대통령을 기소할지, 그 과정에서 외환 혐의의 실체가 드러날지는 향후 정국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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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드론 5회 북한 침투…특검 “북풍 기획 의혹 수사 중”
[서울=2025.07.11.] 尹 정부 시절 북한 드론 작전, 정치 쟁점화…특검 "북풍 기획 가능성 배제 못해" 지난해 10~11월,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북한에 대한 무인기(드론) 정찰이 최소 5차례 이상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내란 및 외환죄 혐의를 수사 중인 조은석 특별검사팀은 11일 오후 2시 구속된 윤 전 대통령을 상대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이번 무인기 작전은 당시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공천 개입 의혹과 ‘디올백’ 논란 등 정국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집중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역 장교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드론작전사령부는 “윤 전 대통령 지시로 평양에 5차례 드론을 보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은 이 작전이 단순 군사 대응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북풍 몰이’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드론 출격 시점은 김 여사 관련 특검법 재의요구권 행사 직후로, 국면 전환을 위한 고도의 기획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반면, 북한이 당시 화성-19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오물 풍선을 보내는 등 도발을 이어간 점을 고려하면 군사적 맞대응 차원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특검은 또 최근 해당 무인기 작전에 활용됐을 것으로 의심되는 드론 통제 차량이 폐차 직전에 보전 조치된 사실도 확인했다. 해당 차량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드론 시험용으로 쓴 것으로 추정되며, 평양에 투입된 무인기와 동일 모델일 가능성이 있어 폐차 시도 자체가 증거인멸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에서 일부 국무위원만 참석시켜 형식적 요건을 채우고, 비화폰 정보 삭제 및 허위 공보 지시 등으로 내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새벽 구속돼, 124일 만에 재수감됐다. 특검은 향후 20일간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하고, 계엄 공범 및 외환 혐의 관련자들까지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특히 무인기 침투로 인해 우리 군사기술이 노출됐을 가능성에 따라 ‘일반이적죄’ 적용 여부도 검토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군사작전 논란을 넘어, 정권 차원의 여론몰이 및 권력 남용 의혹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라 정국에 중대한 파장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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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박스쿨 논란 일파만파…尹정부 청와대 '지원 압박' 정황 드러나
대통령실, 특정 역사 단체 지원 압박 의혹… 교육계 정치 개입 논란 확산 [서울, 2025년 7월 11일] – 윤석열 정부 용산 대통령실이 특정 민간 역사 교육 단체인 '리박스쿨' 관련 단체 지원을 교육부에 압박했다는 의혹이 7월 10일 국회 청문회에서 제기되며 한국 교육계에 정치 개입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박스쿨은 최근 대선 당시 댓글 조작팀 운영 의혹과 함께 극우 성향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활동이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번 청문회는 교육부 국정감사 차원에서 열렸으며, 여야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는 청문회에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며 의혹을 부인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내부 문건과 교육 활동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교육부 간부,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직접 연락받았다" 증언 김천홍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은 청문회에서 손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글로리사회적협동조합'을 잘 챙겨달라는 요청을 "용산 대통령실 비서관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는 압력으로 느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정책관은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해석했다"며 "행정부 내에서 이런 식의 연락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해당 조합은 지난해 '늘봄학교' 사업 공모에 참여했으나 평가 결과 탈락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탈락 이후에도 대통령실에서 지속적으로 관련 문의와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통령실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공정성 훼손에 대한 교육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정부 사업 선정 과정의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공모 사업은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라며 "외부 압력이나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원칙적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 대통령실과의 연락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습니다. 강사 159명 배출… 공교육 이념 편향 우려 증폭 교육부 전수조사 결과, 리박스쿨 연관 단체에서 자격증을 받은 '늘봄학교' 강사는 기존 43명에서 116명이 추가로 확인돼 총 159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과학 및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공교육 내 이념 편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강사들은 전국 132개 초등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과 경기 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일부 강사들은 정규 교육과정 외에도 특별활동 시간을 활용해 역사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어 교육 내용의 적절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공교육 현장에 특정 이념을 가진 단체의 강사들이 무분별하게 투입되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라며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내부 문건에 "전두환 명예회복" TF 명시 한겨레는 리박스쿨 내부 문건을 공개하며, **"전두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사 문제 연구회' 결성 회의 자료, 보수 우파 강사 양성 계획, 좌익 단체 대항 조직화 등의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공개된 문건에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한 좌편향 교육 극복"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활동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손 대표는 이에 대해 "역사를 왜곡한 적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전두환 명예회복이라는 표현 자체가 역사 왜곡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한 내부 문건에는 "교육청 및 교육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계획도 포함되어 있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계 진출 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손효숙 대표, 현직 민주평통 자문위원 겸직 논란 경향신문은 손효숙 대표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직을 겸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임기는 2023년 9월부터 오는 8월 말까지로 현재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위촉 경위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통일 정책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으로, 손 대표의 겸직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의 정치적 성향과 자문위원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자문위원 위촉 과정의 투명성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습니다. 민주평통 관계자는 "자문위원 위촉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덕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된다"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소속 단체 활동은 위촉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명했습니다. 청문회 불출석 논란까지 불거져 한편, 리박스쿨과 연관된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손자 생일잔치'를 이유로 청문회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해 비난을 샀습니다. 김 이사장은 리박스쿨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기관의 책임자로, 청문회에서 핵심 증인으로 채택되었으나 개인적 사유를 들어 불출석했습니다. 국회 의원들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재출석을 요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손 대표 역시 청문회 당일이 되어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연락이 닿지 않아 논란이 있었습니다. 교육계 "정치적 중립성 훼손" 우려 확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육계에서는 공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육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며 "관련자들의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습니다. 교육부는 늘봄학교 강사 운영 지침을 재검토하고, 향후 강사 선정 과정에서 더욱 엄격한 심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현재 활동 중인 강사들에 대해서도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한 점검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야당은 이번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며, 대통령실의 교육정책 개입 의혹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여당은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라며 선을 긋고 있어, 관련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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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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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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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최저임금 2.9% 인상…17년 만의 노사 합의, 노동계는 ‘퇴장’
2026년 최저임금, 17년 만에 노사 합의에도 노동계 거센 반발 [세종=2025.07.10.]– 2026년도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320원으로 최종 결정되며, 2008년 이후 17년 만에 노사 합의로 도출된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최저임금 심의라는 세간의 큰 기대와는 달리 2.9%의 낮은 인상률을 기록하며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번 결정은 7월 10일 오후 11시 18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제12차 전원회의에서 내려졌다. 2025년 1만30원에서 290원 인상된 1만320원이라는 수치는 수치상 노사 합의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노동계는 합의 과정과 결과 모두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집단 퇴장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다. 노동계,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률" 강력 규탄 민주노총은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심의촉진구간(1만210원~1만440원)**이 지나치게 사용자 측 입장을 대변하며 저임금 기조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반면, 한국노총은 막판까지 협상 테이블에 남아 숙고 끝에 합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노동계 전체의 실망감은 감추지 못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공익위원들이 사실상 사용자 측의 손을 들어준 기만적인 제안을 했다"고 강도 높게 비난하며, "이번 결정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한 처사"라고 규탄했다. 실제로 이번 최저임금 인상률 2.9%는 최저임금제 도입 이래 역대 7번째로 낮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특히,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의 첫해 인상률(2.7%)을 제외하면, 역대 정부 임기 첫해 최저임금 인상률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기대했던 노동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경영계 "민생경제 고려한 양보"…실질 인건비 부담 호소 반면, 경영계는 영세·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고려할 때, 사실상 최저임금 동결까지도 검토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경제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양보했다고 설명했다. 사용자 측은 최저임금에 주휴수당과 사회보험 부담까지 더하면 실질적인 인건비는 시간당 1만4,000원에 달한다며,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소상공인들의 경영난을 꾸준히 호소해 왔다. 이들은 이번 인상 역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월 환산 최저임금 215만 원…향후 고용노동부 고시 예정 이번 결정에 따라 2026년도 월 환산 최저임금은 주 40시간, 월 209시간 기준으로 215만6,880원이 된다. 이는 야간·연장근로 수당 및 사회보험료 등 각종 수당 및 보험료 인상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출한 최종안은 고용노동부가 8월 5일까지 고시해야 하며, 2026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노동계는 이번 결정에 대해 이의 제기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과거 사례를 비추어 볼 때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급변하는 경제 현실 속에서 노동 존중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회적 고민을 반영하는 핵심 이슈로 계속해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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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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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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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 상가 옥상 추락 사고…11세 테니스 유망주 모녀 참변
경기 광주 상가 건물 추락사고로 3명 사망... "옥상 출입문 관리 제도 개선 필요" [경기 광주=2025.07.07] 지난 7일 오후 2시 36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13층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추락 사고로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고 경위 18세 여성 A양이 해당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A양은 1층 거리를 지나던 모녀와 20대 남성 위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A양과 11세 소녀가 현장에서 사망했고, 소녀의 모친(45세)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다음 날 숨졌다. 20대 남성은 어깨 등을 다쳐 치료 중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테니스 유망주의 안타까운 죽음 사고로 숨진 11세 소녀는 테니스 유망주 피루희 양으로 확인됐다. 대한테니스협회는 "피루희 선수는 씩씩하고 당찬 선수였으며, 지난 소년체전 선발전 탈락 후에도 '내년엔 꼭 갈 거예요'라며 꿈을 향한 열정을 보였다"고 애도했다. 피루희 양은 오는 11일 전북 순창 주니어 테니스 대회 출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준비 중이었다. 협회는 해당 대회 경기장에 애도 공간을 마련하고, 참가 선수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옥상 출입문 개방' 제도의 딜레마 이번 사고는 현행 건축법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건축법 시행령과 소방시설법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상가건물은 재난 발생 시 대피를 위해 옥상문을 닫은 상태로 유지하되 잠그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기도 한 건축직 공무원은 "옥상문을 물리적으로 잠그는 것은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화재나 지진 등 긴급상황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장치지만, 자살 시도나 사고로 인한 2차 피해가 빈발하면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반복되는 유사 사고들 옥상을 통한 투신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3년 5월 대구 남구 상가 건물 옥상에서 20대 여성이 투신해 지나가던 80대 여성을 덮쳐 양측 모두 중상을 입었고, 2017년 경기 용인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상가건물의 옥상은 외부인 출입이 자유롭고 관리 인력이 부족해 안전사각지대가 되기 쉬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의 기술적 해법 제안 전문가들은 옥상 출입을 차단하는 대신 기술적 제어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동현 전주대 소방안전공학과 교수는 "다수가 이용하는 상가는 사고 시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 센서와 경고음, 출입 기록 시스템 등을 탑재한 출입문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위험군에 대한 선제적 대응 체계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찰 수사 현황 경찰은 현재 A양의 투신 경위를 조사 중이며, 유서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A양은 사고 당일 해당 상가 건물에 입주한 정신과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뒤 옥상으로 올라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의료기록과 병원 관계자 진술 등을 바탕으로 정확한 사고 배경을 조사하고 있다. 사회적 과제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도시 설계와 법 제도의 공백이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재난 대응과 자살 예방, 사전 안전망 구축이라는 다층적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고위험군 청소년과 그 가족에게 보다 촘촘한 돌봄과 심리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자살 예방 상담전화: ☎ 1393 (24시간 운영)청소년 전화: ☎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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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비평] 윤석열 전 대통령 124일 만에 재구속,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나?
윤석열 전 대통령 재구속 보도 분석: 언론의 시각과 정보 전달 방식 사건 개요 2025년 7월 10일 새벽,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4일 만에 재구속되었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증거인멸 우려"를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의 두 번째 구속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주요 언론사별 보도 특징 분석 1. 중앙일보: 절차적 정확성과 균형감 강점: 가장 상세한 시간대별 타임라인 제공 (4페이지에 걸친 상세 일지) 특검팀과 변호인단의 주장을 균형있게 소개 178쪽 PPT 프레젠테이션 등 구체적 수치 제공 법정 공방 과정을 상세히 기술 특징: "조은석 특검 속도전 통했다"는 제목으로 특검의 신속한 수사를 강조 박근혜 전 대통령 사례와의 비교를 통한 맥락 제공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관련 후속 수사까지 포괄적 다룸 2. 동아일보: 핵심 포인트 중심 강점: "'무인기 의혹' 등 말맞추기 차단"이라는 명확한 분석 제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정보 전달 구속의 실질적 의미(외환 혐의 수사 가능성) 강조 특징: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핵심만 압축 향후 수사 방향에 대한 전망 제시 3. 경향신문: 인간적 디테일 강조 강점: 구치소 내 생활 환경에 대한 구체적 묘사 (3평 독거실, 에어컨 없음, 미니치즈빵 등)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생활밀착형 정보 제공 "머그샷" 촬영 등 구속 절차의 세부사항 설명 한계: 정치적 의미나 법적 쟁점보다 가십성 정보에 치중 4. 한겨레: 비판적 시각 강점: 특검팀의 논리와 전략을 상세히 분석 변호인단의 반박 논리도 충실히 소개 사진 설명까지 정확하고 상세함 특징: "내란 우두머리 혐의"라는 표현으로 사안의 심각성 강조 구속의 법적 근거와 향후 수사 전망을 균형있게 다룸 5. 한국일보: 실용적 정보 제공 강점: 영장심사 과정의 시간대별 진행 상황 상세 기록 특검팀의 178쪽 PPT 등 구체적 증거 자료 언급 향후 20일간의 구속 수사 계획 명시 특징: 절차적 정확성을 중시하는 보도 스타일 법적 절차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정보 제공 6. 조선일보: 간결한 팩트 중심 강점: 핵심 사실을 간명하게 전달 외환 혐의에 대한 특검의 향후 수사 방향 강조 지지자들의 반응까지 포함한 현장감 있는 보도 한계: 상대적으로 분석이나 배경 설명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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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첫 재구속…윤석열, 내란·허위공문서 등 혐의로 서울구치소 수감
윤석열 전 대통령, 124일 만에 재구속…특검 “비상계엄·외환 혐의 정조준” [서울=2025.07.10.]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4일 만에 다시 구속됐다. 조은석 특별검사팀이 12·3 비상계엄 선포 의혹을 수사하기 시작한 지 22일 만에 신병을 확보한 것으로,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두 차례 구속되는 초유의 사례가 기록됐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0일 새벽 2시7분께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직권남용, 특수공무집행방해, 허위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구속 사유에 대해 법원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명시했다.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구속은 지난 3월 8일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이후 124일 만이며, 이번 구속으로 인해 조 특검은 외환 혐의 등 추가 혐의 수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유리한 국면을 맞았다. “증거인멸 우려”에 구속…영장심사 6시간 넘게 공방 윤 전 대통령은 전날 오후 2시22분부터 9시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다. 총 6시간40분에 걸친 공방은 검찰과 변호인단이 치열하게 맞선 결과였다. 조은석 특검팀은 박억수 특검보, 김정국·조재철 부장검사 등 10명의 검사들이 178쪽 분량의 PPT와 300쪽에 달하는 의견서를 통해 윤 전 대통령의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핵심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를 주도했으며, 재범 위험이 크고, 수사에 비협조적이며 증거인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특검은 특히 윤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 심의 과정에서 일부 국무위원을 배제하고, 허위 계엄 선포문을 사후에 작성하게 했으며, 외신 대응용 허위 공보문 작성도 지시한 점을 강조했다. 또한 지난 1월 대통령경호처에 총기를 소지하도록 한 의혹과 비화폰 통신기록 삭제 지시 혐의도 구속 사유에 포함됐다. 이에 맞선 윤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해당 혐의들은 이미 내란 사건과 함께 기소된 내용으로, 별도의 재구속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윤 전 대통령도 직접 최후 진술에 나서 “계엄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야당의 입법 폭거를 견제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환 혐의 본격 수사 예고…“무인기 북파 의혹” 정조준 이번 구속영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의 외환 혐의 수사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의혹은 윤 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북측의 군사 도발을 유도했다는 혐의다. 특검은 이 계획이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군 관계자와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참고인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특검은 앞으로 20일간의 구속 기간 동안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할 예정이며, 외환 혐의를 포함한 추가 기소도 검토 중이다. 3평 독방, 무더위 속 구치소 생활…대통령 경호도 중단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도착한 뒤 일반 구속 피의자와 동일한 절차로 수감됐다. 수용번호가 부여되고, 머그샷 촬영 및 신체검사를 거친 후 미결 수용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용된 방은 약 3평(10㎡) 규모로, 침대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야 하며,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아침 식사는 미니치즈빵, 찐감자, 종합견과류였다. 윤 전 대통령에게 제공되던 대통령경호처의 경호는 구속과 동시에 중단됐다.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속 상태에서는 경호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검의 전략적 구속, 정국에 미칠 파장 주목 이번 구속은 조은석 특검의 전략적 속도전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특검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핵심 인물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수사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시에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외환 혐의 수사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되면서, 향후 윤 전 대통령뿐 아니라 관련 인물로 지목된 군 고위 인사들과 정치권까지 수사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구속을 두고 “사법 정의 구현”과 “정치 보복”이라는 상반된 해석이 엇갈린다. 여당은 특검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협조를 예고한 반면, 야당은 “검찰권의 정치적 남용”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조은석 특검팀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윤 전 대통령을 기소할지, 그 과정에서 외환 혐의의 실체가 드러날지는 향후 정국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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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라이프 7월호 표지 촬영
<2025년 7월호 표지 촬영> 모델:한수영(가수 겸 작곡가), 최홍림(코미디언 겸 가수) 총연출:그레이스(박준뷰티랩 명동점 대표원장) 헤어:연서(박준뷰티랩 명동1호점 원장) 메이크업:이수빈(에코쟈뎅 경복궁점 실장) 사진:박제승(오리지날스튜디오 대표) 7월호(창간 26주년 기념호) 표지 모델은 가수 겸 작곡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한수영 양과 유명 코미디언 겸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최홍림 씨다. 두 분은 듀엣으로 ‘핸드폰이 어딨나’를 히트시키며 인기몰이 중. 진한 우정 관계로 맺어진 두 사람은 찰떡호흡을 자랑한다. 스튜디오 분위기도 유쾌 상쾌 발랄함은 물론이다. 두 분의 멋진 하모니 기대하시라. 총연출은 ‘박준뷰티 명동점’ 그레이스 대표원장이 맡아 의미를 더했다. 그레이스 원장은 성공적인 미용실 운영으로 우리 미용계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녀만의 노하우를 표지 연출 인터뷰에서 탐하시라. 헤어는 연서(박준뷰티랩 명동1호점 원장), 메이크업은 이수빈(에코쟈뎅 경복궁점 실장)이 맡아 7월호를 멋지게 장식했다. 옆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박준 회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표지 촬영 후의 뒤풀이에서는 소맥 파티. 최홍림 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고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다. 술과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다. 신난 우리 곁을 음료수를 마시며 묵묵히 지켜주고 있다. 한수영 가수는 기자와 오랜 친분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볼수록 사랑스러운 그녀! 박준 회장님의 유머는 항상 즐겁다. 우리 모두 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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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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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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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미국·프랑스처럼…‘스마트폰 없는 학교’ 법제화 가속
"스마트폰 없는 교실" 법제화 파장... 교실이 바뀐다 [서울=2025.07.08.] 수업 중 울리는 카톡 알림음, 몰래 게임하는 학생들, 교사를 몰래 찍어 SNS에 올리는 영상들... 이제 이런 풍경이 교실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이 드디어 '스마트폰 없는 교실' 실현을 위한 법적 칼날을 빼들었다. 하지만 이 칼날을 둘러싸고 "교권 회복의 희망"과 "학생 인권 침해"라는 상반된 목소리가 격돌하고 있어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내년 3월부터 '스마트폰 금지'...드디어 법으로 정해진다. 지난 7월 8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펼쳐졌다.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되면서, 내년 3월부터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수업 중 스마트폰 사용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게 된 것이다. 이번 법안의 핵심은 단순한 '사용 금지'를 넘어선다. 교사와 학교장이 학생의 스마트기기 소지 자체를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까지 부여받게 된다. 기존의 교육부 지침이 "권고"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법적 구속력을 갖춘 "명령"이 된 셈이다. 교실 현장의 절규... "더 이상 못 참겠다" 왜 이런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을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답이 명확하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지난 5월 발표한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이를 웅변한다. 교사 10명 중 7명(66.5%)이 "수업 중 학생들의 휴대폰 사용으로 인해 수업이 방해받았다"고 토로했다. 현장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수업 중 학생이 게임 소리를 끄지 않아 주의를 주었더니 '선생님이 뭔데?'라며 대들었어요." 서울 모 중학교 교사 A씨의 경험담이다. 또 다른 교사는 "학생이 수업 내용을 몰래 녹음해서 편집한 뒤 SNS에 올려 조롱당했다"며 교권 침해의 새로운 양상을 호소했다. 심지어 일부 교사들은 스마트폰 사용을 제지하다가 폭언과 폭행까지 당한 사례들을 증언하며, "이제 법적 뒷받침 없이는 교실을 지킬 수 없다"고 절규하고 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디지털 디톡스' 열풍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전 세계가 학교 내 스마트폰 규제에 나서고 있으며,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50개 주 중 26개 주가 교내 스마트폰 금지법을 시행 중이다. 뉴욕시는 2024-2025학년도부터 모든 공립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캘리포니아주도 주 차원의 금지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중학교에서는 스마트폰 금지 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평균 5% 향상되었다는 내부 보고서가 나왔다. 사이버 괴롭힘은 감소하고, 학생 간 직접적인 소통은 늘어났다. 프랑스는 더욱 과감하다. 2018년부터 초·중학생의 학교 내 스마트폰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시행했고, 일부 학교에서는 등교 시 스마트폰을 수거해 하교 후 돌려주는 방식까지 도입했다. 프랑스 교육당국은 이를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며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율성 vs 보호"... 뜨거운 논쟁의 중심 하지만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인권단체 '아수나로'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자율적인 규칙을 마련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법제화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학생들과 일부 학부모들은 "스마트폰이 학습 도구로도 활용될 수 있고, 비상시 연락 수단으로서의 필요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문가들은 더욱 강경 입장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 과의존 아동의 뇌에서는 전두엽 기능 저하가 관찰되었고, 이는 학업 성취도 저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자기 통제력이 낮아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이 매우 높으며, 이는 주의력 결핍, 충동성 증가, 수면 장애 등 다양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새로운 위협: 딥페이크까지 등장한 교실 문제는 단순한 중독을 넘어서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교사를 조롱하거나, 사이버 폭력을 행사하는 전례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교권 침해를 넘어 학생들 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학교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균형점을 찾아라...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 결국 이번 법제화는 단순한 기술 규제를 넘어, 교육권·인권·안전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가치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고 있다. 교권 회복과 아동 보호라는 대의와 학생 자율성 간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위한 심도 깊은 논의와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스마트폰 없는 교실'이 우리 교육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까? 내년 3월, 전국의 교실에서 그 답이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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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폭우 동시에…서울 도심이 멈췄다, 7월 8일 긴박했던 현장"
서울, 117년 만의 최악 폭염에 갑작스런 폭우까지… '날씨의 역습' 서울, 2025년 7월 8일 – 서울 시민들이 "이런 날씨는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오늘 서울은 무려 117년 만에 가장 뜨거운 7월 초순을 보냈는데, 저녁에는 갑자기 태풍 수준의 비까지 쏟아지며 시민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찜통더위에 지친 채 집으로 향하던 직장인들은 갑작스러운 폭우에 발이 묶이며 하루 종일 날씨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서울이 '가마솥'이 되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오늘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은 37.8°C였습니다. 이는 1908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7월 상순 최고 기록으로, 작년 같은 날(34.2°C)보다 무려 3.6°C나 높았습니다. 서울 주변 지역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경기 광명에서는 40.1°C, 파주에서는 40.5°C를 기록하며 수도권 전체가 말 그대로 '끓어올랐습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는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태백산맥을 넘으면서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변해 서쪽 지역을 달궜기 때문입니다. 이 폭염은 전국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7월 7일까지 전국에서 온열질환(열사병, 일사병 등)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997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450명)의 두 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공식 집계된 사망자가 7명이나 된다는 점입니다. 구미의 한 건설 현장에서는 50대 남성이 작업 중 쓰러져 숨졌고, 의성에서는 70대 농민이 밭일을 하다가 폭염으로 사망했습니다. 봉화에서는 등산객이, 영덕에서는 혼자 살던 노인이 더위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폭염은 단순히 '덥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이 되었습니다. 퇴근길을 덮친 '물폭탄' 기록적인 더위가 이어지던 저녁, 서울 서남쪽 지역에 시간당 최대 68.5mm의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는 태풍이 와도 이 정도는 안 온다는 수준의 비였습니다. 기상청은 오후 6시 50분 호우주의보를 내린 지 10분도 안 되어 바로 호우경보로 올렸을 정도였습니다. 갑작스러운 물폭탄에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등 서울 서남부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오목교 동쪽 지하차도는 물에 잠겨 차량 통행이 막혔고, 올림픽대로 일부 구간도 침수로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일부 구간은 선로에 물이 차서 운행이 중단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발이 묶였습니다. 퇴근 시간과 겹친 집중호우는 도로와 지하철을 모두 마비시키며 시민들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었습니다. 한 직장인은 "아침엔 더위에 녹아내릴 것 같았는데, 저녁엔 비에 발이 묶여 집에 못 가겠다"며 하루 종일 날씨와 전쟁을 치렀다고 말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날씨가 계속될까? 기상청은 최소 이번 주말까지는 폭염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저녁 소나기가 잠시 더위를 식혀주는 듯했지만, 폭염경보는 여전히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극단적인 날씨가 이제 '뉴노멀(새로운 일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극심한 더위와 집중호우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는 무더위 쉼터를 열고, 냉방 조끼를 나눠주고, 생수를 비치하는 등 응급 대응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임시방편을 넘어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도시의 방재 시스템을 강화하고, 기후 변화에 견딜 수 있는 건물과 도로를 만들고, 폭염과 호우에 취약한 노인이나 야외 근로자들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시 계획과 사회 시스템을 바꿔 미래의 '기후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벌어진 기록적인 폭염과 태풍급 폭우는 기후 위기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변화하는 기후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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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드론 5회 북한 침투…특검 “북풍 기획 의혹 수사 중”
[서울=2025.07.11.] 尹 정부 시절 북한 드론 작전, 정치 쟁점화…특검 "북풍 기획 가능성 배제 못해" 지난해 10~11월,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북한에 대한 무인기(드론) 정찰이 최소 5차례 이상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내란 및 외환죄 혐의를 수사 중인 조은석 특별검사팀은 11일 오후 2시 구속된 윤 전 대통령을 상대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이번 무인기 작전은 당시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공천 개입 의혹과 ‘디올백’ 논란 등 정국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에 집중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역 장교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드론작전사령부는 “윤 전 대통령 지시로 평양에 5차례 드론을 보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은 이 작전이 단순 군사 대응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북풍 몰이’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드론 출격 시점은 김 여사 관련 특검법 재의요구권 행사 직후로, 국면 전환을 위한 고도의 기획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반면, 북한이 당시 화성-19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오물 풍선을 보내는 등 도발을 이어간 점을 고려하면 군사적 맞대응 차원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특검은 또 최근 해당 무인기 작전에 활용됐을 것으로 의심되는 드론 통제 차량이 폐차 직전에 보전 조치된 사실도 확인했다. 해당 차량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드론 시험용으로 쓴 것으로 추정되며, 평양에 투입된 무인기와 동일 모델일 가능성이 있어 폐차 시도 자체가 증거인멸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에서 일부 국무위원만 참석시켜 형식적 요건을 채우고, 비화폰 정보 삭제 및 허위 공보 지시 등으로 내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새벽 구속돼, 124일 만에 재수감됐다. 특검은 향후 20일간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하고, 계엄 공범 및 외환 혐의 관련자들까지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특히 무인기 침투로 인해 우리 군사기술이 노출됐을 가능성에 따라 ‘일반이적죄’ 적용 여부도 검토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군사작전 논란을 넘어, 정권 차원의 여론몰이 및 권력 남용 의혹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라 정국에 중대한 파장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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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박스쿨 논란 일파만파…尹정부 청와대 '지원 압박' 정황 드러나
대통령실, 특정 역사 단체 지원 압박 의혹… 교육계 정치 개입 논란 확산 [서울, 2025년 7월 11일] – 윤석열 정부 용산 대통령실이 특정 민간 역사 교육 단체인 '리박스쿨' 관련 단체 지원을 교육부에 압박했다는 의혹이 7월 10일 국회 청문회에서 제기되며 한국 교육계에 정치 개입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박스쿨은 최근 대선 당시 댓글 조작팀 운영 의혹과 함께 극우 성향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활동이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번 청문회는 교육부 국정감사 차원에서 열렸으며, 여야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손효숙 리박스쿨 대표는 청문회에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며 의혹을 부인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내부 문건과 교육 활동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교육부 간부, "대통령실 비서관에게 직접 연락받았다" 증언 김천홍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은 청문회에서 손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글로리사회적협동조합'을 잘 챙겨달라는 요청을 "용산 대통령실 비서관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는 압력으로 느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정책관은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해석했다"며 "행정부 내에서 이런 식의 연락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해당 조합은 지난해 '늘봄학교' 사업 공모에 참여했으나 평가 결과 탈락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탈락 이후에도 대통령실에서 지속적으로 관련 문의와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통령실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공정성 훼손에 대한 교육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정부 사업 선정 과정의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공모 사업은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라며 "외부 압력이나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원칙적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 대통령실과의 연락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습니다. 강사 159명 배출… 공교육 이념 편향 우려 증폭 교육부 전수조사 결과, 리박스쿨 연관 단체에서 자격증을 받은 '늘봄학교' 강사는 기존 43명에서 116명이 추가로 확인돼 총 159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과학 및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공교육 내 이념 편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강사들은 전국 132개 초등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과 경기 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일부 강사들은 정규 교육과정 외에도 특별활동 시간을 활용해 역사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어 교육 내용의 적절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공교육 현장에 특정 이념을 가진 단체의 강사들이 무분별하게 투입되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라며 "철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내부 문건에 "전두환 명예회복" TF 명시 한겨레는 리박스쿨 내부 문건을 공개하며, **"전두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사 문제 연구회' 결성 회의 자료, 보수 우파 강사 양성 계획, 좌익 단체 대항 조직화 등의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공개된 문건에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한 좌편향 교육 극복"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활동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손 대표는 이에 대해 "역사를 왜곡한 적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전두환 명예회복이라는 표현 자체가 역사 왜곡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한 내부 문건에는 "교육청 및 교육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계획도 포함되어 있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계 진출 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손효숙 대표, 현직 민주평통 자문위원 겸직 논란 경향신문은 손효숙 대표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직을 겸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임기는 2023년 9월부터 오는 8월 말까지로 현재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위촉 경위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통일 정책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으로, 손 대표의 겸직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의 정치적 성향과 자문위원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자문위원 위촉 과정의 투명성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습니다. 민주평통 관계자는 "자문위원 위촉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덕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된다"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소속 단체 활동은 위촉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명했습니다. 청문회 불출석 논란까지 불거져 한편, 리박스쿨과 연관된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손자 생일잔치'를 이유로 청문회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해 비난을 샀습니다. 김 이사장은 리박스쿨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기관의 책임자로, 청문회에서 핵심 증인으로 채택되었으나 개인적 사유를 들어 불출석했습니다. 국회 의원들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재출석을 요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손 대표 역시 청문회 당일이 되어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연락이 닿지 않아 논란이 있었습니다. 교육계 "정치적 중립성 훼손" 우려 확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육계에서는 공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육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며 "관련자들의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습니다. 교육부는 늘봄학교 강사 운영 지침을 재검토하고, 향후 강사 선정 과정에서 더욱 엄격한 심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현재 활동 중인 강사들에 대해서도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한 점검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야당은 이번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며, 대통령실의 교육정책 개입 의혹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여당은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라며 선을 긋고 있어, 관련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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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사진 : Fatimid Empire at Its Greatest Extent, 출처 : Facts and Details Fatimids (A.D. 969-1171)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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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사진 : 로마의 시민 보병,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