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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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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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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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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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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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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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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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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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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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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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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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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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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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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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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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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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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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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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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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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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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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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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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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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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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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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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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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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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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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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 동, 서파키스탄의 상황이 매우 극단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동파키스탄의 무지부르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들 앞에 나와 연설을 하면서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서파키스탄 정부에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게 된다. 무지부르 라흐만, 그는 다카 외곽의 파리드푸르(ফরিদপুর জেলা) 지역의 가난한 뱅골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공립학교에 3등급으로 입학했으나 1934년 눈 수술로 인해 그만두었고 이후 수술로 인한 느린 시력 회복으로 일찍 결혼했다.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쓴 돋보기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전인도 무슬림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진출했고 캘커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94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 참가하면서 중단된다. 1946년 이슬라미아 대학생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 벵골인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았다. 인도인과 서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벵골인들은 영국으로부터도 뿌리 깊은 차별을 받도 있었다. 그러한 벵골인들의 상황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켈커타 대학을 떠나 동부 벵골로 돌아온 뒤 다카 대학에서 다시 법률을 공부해 동파키스탄 무슬림 학생 연맹을 설립하고 지방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다카 외곽의 가난한 집안의 벵골인이 이제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벵골인들의 빈곤과 실업, 가난한 생활 등을 대변하여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받아들였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벵골민족주의를 사회주의와 융합하여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구축한 셈인데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는 벵골인들에게 정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벵골인들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안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벵골인의 불복종 운동과 파키스탄 군의 유혈 진압으로 인하여 사태는 점차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에 대응해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 시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마침내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1971년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나게되었으며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야히야 칸 자신은 벵골의 영토를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며 다소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 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방글라데시를 완전히 토벌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 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 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 군의 벵골인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린 셈이 되었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 정식적으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 인해 동, 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한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 군은 마침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동파키스탄 정당인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면서 라흐만을 파키스탄의 반역자로 규정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은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면이 있었던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무조건 보이는데로 죽이고 강간하며 파괴하는 엄청난 살육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당시 동서 파키스탄을 주목하고 있던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날아와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게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동파키스탄의 독립 선언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리고 이어진 그의 체포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가져왔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우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사이예드 나즈룰 이슬람(Saiyed Najrul Islam)을 세웠다. 이어 이슬람의 뒤를 타주딘 아흐메드(Tajudin Ahmad)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M.A.G. 오스만니(M.A.G Osmani) 대령은 방글라데시 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어 방글라데시의 군을 총지휘했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 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와 동파키스탄의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Mukti Fauz)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되었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자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이에 놀라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 군 간의 전쟁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 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크게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서파키스탄 군에 크게 열세였던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인들에게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며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당시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 운동 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된 다카 대학에서는 파키스탄 군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화를 저지른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독립에는 전세계 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많은 고심 끝에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 및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학살에 경악했으며 이들은 본국인 미국 행정부와 상원에게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보고 미군의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집단 망명을 선포하면서 인도가 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력도 쇠퇴할 것을 우려하여 크게 기대했지만, 인도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주목은 인도-파키스탄의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의 적이 되었디. 게다가 엄청난 인적 자원이 존재하는 인도 입장에서 또한, 수백만 명의 난민은 큰 부담이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더 저렴하게 먹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기 때문에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되었다가는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추방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의 많은 수가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와 같은 동파키스탄의 게릴라 부대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수피즘에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이었던 파키스탄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에 그쳤었지만 국경지대가 폭격 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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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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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 살라딘의 이름을 전부 서술하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로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Al Malik An Nasir), 승리의 아버지(Abu Al Muzafar), 신앙을 품은 정의(Slakh Ad Din),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Marwan)의 아들인 샤디(Shadi)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يوسف)가 본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꾸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Yusuf, 요셉)와 아이유브(Ayyub,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Ad)은 원래 정관사 알(Al)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Ram)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 받침과 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살라흣 딘이라 읽히게 된다.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Gasan Masud)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다. 살라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Tikrit)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Nazim Ad Din Ayyub)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 셀주크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Byhruz)와 인연이 이어져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 Din Zangi)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에 분노하여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Balbek)을 함락시킨 이후 아이유브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살라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이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Buri) 왕조의 아타베그(Atabeg)인 무장 앗 딘 우누르(Ad Din Unur)가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얼마 동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Nur Ad Din)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 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Unur)가 사망한 이후, 왕권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이용하여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하여 그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명성을 누렸던 아버지 장기도 장악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살라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후일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Wajir, 재상)였던 샤와르(Shawar)가 경쟁자인 디르감(Dirgam)에게 축출당한 이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Amori I)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부터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 시르쿠와 살라딘은 같은 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스스로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Harim)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같은 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딘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 해 3월 18일, 알 바베인(Al-baboim)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 기병들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직행으로 카이로에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딘은 얼마 전만 해도 전투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으로 인해 살라딘은 숙부를 범칭국으로 삼았고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가를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지 싶었으나 그 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딘이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권력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딘은 겉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히여 오히려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하여 비잔틴 제국과 연합해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계속 실패한 끝에 폭풍우로 인해 모두 침몰당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이를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주했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면 그들과 대적할 정도로 더욱 큰 힘을 얻은 상황에 놓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3일 동안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1182년 11월 10일에 더욱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수도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살라딘은 킨다(Khinda)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Taz Al Mulk,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Imadya)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Hisin Kayfa)의 누르 앗 딘의 “다리들의 문”을 맡게 된다. 하지만 한 달 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Shinzar)를 포위하였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고 이를 주장했지마,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atillon, 1125~1187)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취소되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제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인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결합하여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해 리처드 1세 또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것이니 그 때 결판을 내자고 약속하였으며 살라딘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살라딘은 약속 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 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 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사용하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 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딘은 대신 타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Al Kamil)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카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전쟁을 벌이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이에 어떻게 결사반대한 참모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로 인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매우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 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적은 없었으며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함락당할 것이라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카톨릭 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측에서는 살라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큰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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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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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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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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