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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가 중시하는 '상호신뢰', 푸틴과 메르켈의 관계
    필자는 러시아 볼가 강변의 큰 도시 사마라를 방문했을 때 사마라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있는데 TV를 통해 Россия 24 방송에서 전 독일 총리인 메르켈이 슈피겔과 자이트와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면서 카페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러시아 현지인들이 일제히 분노했다. "Сука! (쑤까, 러시아어 욕)" 러시아에서는 상호 신뢰(Взаимное доверие)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믿음을 매우 중시하기에 국가와 국가 간에 있어서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다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러시아인이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거나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러시아에서는 비즈니스가 기본적으로 사람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인들이 밝히는 신뢰는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밝힌 후 토론을 통해 묘안을 짜내서 결국 양쪽이 원하는 결과를 내는 단계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과 어떻게 그것을 함께 할지 모색하는 것에 익숙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데 하물며 국가와 국가 사이는 더욱 그러하다. 푸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가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메르켈이 2002년 당시 독일 야당 기독민주연합(CDU) 대표였던 시절에 모스크바 크레믈린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푸틴 대통령을 만나 “KGB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농담을 건내기도 했다. 첫 만남 이후, 2005년 9월 푸틴 대통령이 이번에는 베를린을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유력 차기 총리 후보인 메르켈 CDU 대표를 만났고, 양국 협력 확대 등을 약속했다. 메르켈은 당시 만남을 회상하며 "매우 열려 있었던 대화"였다며 흡족해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독일어로 대화했다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푸틴 대통령이 KGB 시절 동독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독일어가 유창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차례 틀어진 것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문이었다. 이 때 메르켈은 무력으로 이 지역 위기를 증폭한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맹비난했지만 그녀와의 신뢰를 쌓아오고 있었던 푸틴 대통령은 그래도 메르켈을 믿어주었다. 메르켈을 믿었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2015년 민스크 협정에 참여했다. 독일, 프랑스가 중재한 이 협정은 메르켈이 아니었으면 푸틴 대통령이 협정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메르켈이 짜놓은 판이었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그녀를 믿고 협정에 조인했던 것이다. 처음 맺어졌던 민스크 협정은 총 1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조인되었지만 모호한 항목이 많아 몇 가지 더 수정 보안해 2차 민스크 협정을 체결했다. 1. 중무기를 전선 30km 뒤로 후퇴시키며, 양 측 전선 사이 30km 크기의 완충지대를 만든다. 2. 공세 작전을 금지한다. 3. 안전지대 너머 전투기의 비행을 금지한다. 4. 분쟁 지역 내의 모든 외국인 용병을 후퇴시킨다. 5. 민스크 협정 이행을 감시하는 OSCE 임무를 이행한다. 이 5가지 협정은 결국 하나도 지키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계속 협정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돈바스 주민들을 학살했다. 메르켈이 퇴임한 이후, 러시아의 2022년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특수 군사 작전이 감행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메르켈은 슈피겔과 자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하게 된다. "민스크 협정의 목적은 평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 이라고 하였다. 결국 민스크 협정은 평화가 아닌 러시아와 돈바스 주민들을 상대로 "협잡질"을 했다는 것을 실토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신뢰를 저버리고 야비한 협잡질(Шулерство)을 하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야비한 협잡질에 충격을 받았고 러시아인들도 메르켈의 야비한 행위에 분노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로스발트와의 인터뷰에서 "서방 측과의 협상에 대한 신뢰가 거의 제로(0)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협상은 해야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그 과정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은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제 타협과 협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될 일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메르켈의 이러한 폭로는 오히려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의 정당성을 세워준 꼴이 되었다. 현지 사마라에서도 이 같은 독일과 서구의 기만(Обман) 행위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구의 협잡질과 기만 행위는 오히려 러시아인들을 더욱 단결시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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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서 부각된 북아일랜드의 문제
    영국과 아일랜드에 남아있는 두 국가 민족의 기본적인 문제는 이주 영국인과 토착 아일랜드인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현재 영국 내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겉으로는 없어 보이지만 현재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요크셔, 북아일랜드 지역이 서로 맞물려 대립하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외부에는 아일랜드도 개입되어 있다. 이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대립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에 있어 아일랜드 섬에는 개신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들이 영국으로의 잔류를 희망했다. 이들은 영국 국기를 걸어 놓은 반면, 반대로 아일랜드인들이 독립국인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바라면서 아일랜드 국기를 내걸었다. 영국은 개신교도들과 카톨릭교도의 종교 분쟁이라 주장하고 있고 아일랜드인들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이념적인 분쟁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 본토,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민족 구분은 혈통이 아니라 출신 지역별로 구분하는 경우가 대다수로 나타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출신의 부모를 가진 아이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면 이 아이는 아이리쉬(Irish)로 분류했고 21세기에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로 분류하며 간접적으로 차별하고 있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거두였던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같은 경우 아이리쉬(Irish)로 분류된다. 또한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족보나 가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앵글로 아이리쉬(Anglo-Irish)였으며 본인도 개신교 신자였다. 이와 같은 분류를 싫어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고 아이리쉬(Irish)라면 공기 중에서 태어나면 에어리쉬(Airish)겠구나라며 신랄하게 비판한 적 있다. 참고로 조지 버나드 쇼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써 두 국가의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현재 북아일랜드의 갈등은 아이리쉬(Irish)와 잉글랜드인(English), 아이리쉬(Irish)와 스코티쉬(Scottish)의 민족적인 갈등보다는 종교로써 신교와 구교, 왕당파와 공화파, 연합주의 및 아일랜드 민족주의 사이의 다양한 종교, 이념, 사상 등 모든 것이 융, 복합된 갈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는 개신교 지역과 카톨릭 지역이 벽으로 확실하게 나뉘어 있는 분단된 것과 비슷한 도시로 거리 곳곳에 지지 정파를 드러내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영국의 다른 지역과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중세 시대부터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영국의 지주로부터 큰 수탈을 당해 왔고 산업 사회가 되면서 영국 산업 자본의 하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되었다. 영국이 이와 같은 북아일랜드를 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 영국군이 퇴각할 경우 이주 영국인과 개신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토로의 이주를 강권하게 된다면 이주는 할 수 없다 하고 막대한 지원금 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사용할 만한 산업 기반이나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은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독립으로 자극을 받은 스코틀랜드까지 독립을 선언한다면 연합 왕국이라는 체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인 것도 있다. 북아일랜드 지역의 무장 단체로는 IRA가 유명하고 영국 충성파가 만든 UDA 등 반 IRA 폭력 단체도 북아일랜드 내 사회적 안정을 해치는 요인이 되었다. 일단 IRA는 2005년에 무장 해제를 선언해 극소수 원칙주의자를 제외한 IRA의 무장은 공식적으로 해체된 상태에 있다. 그래도 산발적으로 테러가 발생하기도 한다. 우선 북아일랜드는 다른 영국의 지역에 비해 광범위한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편이다. 북아일랜드는 좌우 이념 갈등도 있어 대개 영국 충성파는 우익이고 반대로 독립파는 좌익으로 분류되어 있다. 1920~1960년대 사이 IRA는 노골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주장했고 IRA가 이것에 집착해 실제로 카톨릭 신자인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반발했다. 1960년대 후반에 분리해 나간 다수파 PIRA도 반민족주의적 극좌 성향을 배격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슬로건은 여전히 통일된(United),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주의(Socialist)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의 성립을 유지하고 조직에도 단순한 반영 민족주의를 넘어 이와 같은 성향이 있다. 아일랜드 의회인 신 페인(Sinn Féin)도 사회 민주주의적인 정책을 많이 미는 등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좌익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 페인은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는 20세기 초반의 신 페인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1970년 IRA가 북아일랜드에서의 무장 투쟁의 지속 여부를 놓고 분열되었을 당시 신 페인 역시 분열되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한 세력은 신 페인에 잔존했고, 반대한 세력은 아일랜드 노동자당(Workers' Party)이라는 신당을 창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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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헌정위기 이후, 옐친의 시대와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Oлигархи)의 등장
    1994년 12월에 치러진 러시아 총선에서 옐친의 여당은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다. 그리고 야당이자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으며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다. 이어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이후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면서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좁아지게 된다. 당시 자유민주당은 11%로 제2당을 차지했으며 여당인 러시아-우리집 당은총 득표 10%대를 유지하며 제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 제도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옐친은 잦은 음주로 인한 심장마비로 투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친(親) 서민적 이미지메이킹을 시도한 결과 초반 지지율 6%에서 다시 지지율이 고속성장해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옐친의 정적이자 라이벌인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Геннадий Зюганов)를 54%대 41%로 약 14% 가량 크게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정치자금을 받는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신흥 재벌들인 올리가르히(Oлигархи)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이른바 정경유착 강화 등의 약속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범죄적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들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옐친의 라이벌인 겐나디 주가노프(Геннадий Зюганов)는 러시아를 공산주의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로 1966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70년 오룔 주 대의원을 시작으로 활발히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로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당시 러시아 내 소련 공산당 지지세력 중 가장 상위에 있었던 그는 1991년 RSFSR 대선 후보인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신임을 얻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정적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에는 두마 최고회의가 강제 해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보리스 옐친과 가장 먼저 타협을 시도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주요 경쟁자들이 옐친의 정치 보복으로 인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당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처음 선거를 지휘했던 1995년의 총선에서 옐친을 이기고 공산당이 원내 1당에 등극하는데 성공했으며 친(親) 옐친파 정당들이 1993년 두마 선거와 마찬가지로 참패하면서 야당의 영수로써 주가노프는 유력한 차기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기세로 1996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았으나 엘친이 소비에트로 다시 돌아가면 러시아는 회생이 불가능해질 것 등으로 네거티브 선거 전략에 말리게 되었다. 더불어 올리가르히 언론사들은 의도적 옐친을 밀어주는 것으로 선거 막판에 판세가 뒤집히며 낙선하였고, 그로 인해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입어 정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를 육성하는 시절 군대를 키우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 국가들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의존했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의 소득에서 얻었다. 이러한 자원의존형 구조 형태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졌고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에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가스를 담당하는 국영기업 가즈프롬(Газпром)이나 알루미늄 제련 및 제조 기업인 루살(Русал)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나름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다. 문제는 이러한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들과 시장 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 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들에게 넘어감으로써 소련이 해체됨과 동시에 모두 벼락부자들이 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이 집권한지 몇 년만에 세계적인 부호로 성장할 정도로 큰 재산들을 축적했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수학자 및 공학자 출신으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 재임 시 로고바자 그룹 회장인 보리스 베레좁스키(Борис Березовский)와 석유재벌이자 유태계인 로만 아브라모비치(Роман Абрамович)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들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은 미국과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 가량의 자산가들이 된다. 물론 이들 뿐 아니라 구소련 국가였던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올리가르히들의 영향력들이 강하게 나타났고 경제 규모가 더욱 좁은 국가들인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는 체감상 더욱 심한 경우가 있었다. 후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페트로 포로셴코(Петро Порошенко)도 대표적인 올리가르히 중 하나였으며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으로 카자흐스탄 최대의 구리 광산 기업인 카작무스의 CEO인 블라디미르 김(Владимир Ким)도 중앙아시아 최고 올리가르히 중에 하나였다. 이들 올리가르히의 일부는 러시아 마피아와 결탁하여 사업을 벌리기도 했으며 이들을 이용해 다수의 스킨헤드들을 양성하여 유색인종들을 탄압함으로써 다수의 사회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에 올리가르히들은 부정부패가 대단했고 그에 따른 사치향락은 매우 악명이 높았다. 90년대 러시아인들 대다수가 암흑기를 겪으며 물가폭등과 더불어 이로 인한 모든 재산 들이 휴지 조각이 되어 크게 고통받고 있을 때 올리가르히들은 호화스러운 해외여행이나 고급 호화 별장과 같은 것들을 지어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투자해야 할 금액을 외국으로 반출했다. 이와 같은 부분도 러시아 세무법 상 명백한 "외환관리법 위반"이었지만 옐친을 비롯한 각 정부 각료들이 이를 눈감아 주면서 사법 처리의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옐친에게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대준 자들도 이들 올리가르히들이고 이를 미끼로 옐친과 각료들은 올리가르히들의 이익을 보호해줬던 일종의 공생관계였던 셈이다. 당연히 공업화를 위해 공장을 짓거나 투자해야 할 돈이 외국으로 흘러 나갔으니 일자리는 줄어들게 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또한 올리가르히들은 마피아들도 이용했고 정경유착과 뇌물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불법과 탈법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러시아의 경제를 좀먹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는 올리가르히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푸틴이 집권한 2000년대에 이르러 부패와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그 정도가 줄어들었기는 했지만 그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얘기들이 많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민영화 정책으로 인한 최대 수혜자들이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옐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특히 민영 TV방송에서 공산당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소련을 암울하게 그린 뉴스나 다큐를 집중적으로 방영하게 하면서 온갖 흑색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예상을 깨고 53%로 재선에 성공을 거둔 것도 올리가르히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9년 8월, 옐친은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고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으며 그 해 말인 12월 31일 옐친은 건강 문제로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임했고,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이 때도 베레좁스키를 비롯한 올리가르히들은 푸틴에게도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푸틴은 올리가르히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올리가르히의 행태가 그동안 매우 악명이 높았기에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 데다 이들이 많은 금액을 이용하여 다른 인물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기에 결국 상당수의 올리가르히들을 부패 척결 명목으로 숙청했다. 이들 올리가르히 세력들은 푸틴을 지원하고도 토사구팽 당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살아 남은 올리가르히들은 때마침 러시아의 경제가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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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우크라이나의 군 전력 분석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군사 장비들과 병력을 재편성하여 우크라이나만의 독자적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면서 12월 6일에 우크라이나 국방부을 개관하는 개관식 때 국군 창설을 발표했다. 그래서 매년 12월 6일은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로, 올해 얼마 전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은 30주년을 맞이해 성대히 행사를 거행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군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에서 키예프, 오데사, 자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군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해당 부대들은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립 후, 우크라이나 첫 세대가 되었으며 현 우크라이나 국방부 주요 인사들이 바로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로 구성되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의 병력은 78만 명, 전차 6,500대, 전술기는 1,500대로 우크라이나에 주둔했었던 소련군의 전력을 그대로 이전받았기 때문에 군사력이 막강했으며 전체 유럽 내에서의 그 위상을 놓고 본다면 러시아를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다음이었을 정도로 대단한 강군이었다. 더불어 핵무기로만 놓고 보면 소련 다음으로 개수로는 영국, 프랑스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유럽은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통해 영토주권의 보호와 더불어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폐기하기 어려웠으므로 러시아나 서방의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랍추크(Леонид Кравчук)는 우크라이나 내 만연하고 있는 경제 위기로 인해 막강한 군대를 운영하는데 부담이 생기자 수백 대의 전차를 제외하고 도저히 가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재래식 무기들은 폐기, 혹은 제3세계 등에 헐값으로 내놓게 되는데 이러한 우크라이나가 헐값에 내놓은 무기를 가장 많이 사간 나라가 바로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소말리아였다. 나머지는 비축하면서 사실상 현역으로 남는 중무기들은 10분의 1 수준으로 급격히 축소되었고 무기 개발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있는 무기들을 개량해서 재활용했다. 이런 무기들의 성능이 당연히 좋을리 없었고 핵도 폐기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국방은 사실상 미국을 비롯한 나토에 맡긴거나 다름 없었다. 다만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국토에 인구가 약 4천만 가량 되었으니 군사들의 머릿수를 채우는 것은 가능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긴밀히 협조했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라크에 다국적군의 주둔이 시작되며 우크라이나는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병들을 파견한다.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친(親) 서방으로 기울게 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 체제를 찬성하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특히 러시아에 해군기지를 대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러시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2010년 2월 25일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러시아와의 냉각된 관계가 급속도로 해빙되기 시작한다. 같은 해 4월, 문제가 되던 해군기지를 러시아에 대여할 수 있게 취소 결정을 철회하고 2030년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의 해군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연장하였다. 게다가 2013년에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군의 군축 협상에 합의했고 10월에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약화되었었지만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우크라이나 군의 군사 무기들이 삽시간 폐기되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돌리다보니 당시만 해도 거의 50만에 달하던 정규군이 20만 남짓으로 줄어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른바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를 두고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3대 만행"으로 이 사건이 들어가는데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2013년에 폐기된 무기를 아프리카에 내전 중인 국가들에게 팔고 그 자금은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던 최악의 "대통령 방산비리"가 터져 엄청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어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해 야누코비치 정권은 붕괴되었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과 돈바스 전쟁이 발생하자 군대보다 더 치명적인 내부 분열이 터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영토 내부에는 친러 계열, 즉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나 크림 지역은 거의 80%에 달할 정도였고 수도 키예프에서는 약 20%, 옛 소련의 군항인 오데사에는 러시아계가 45%에 달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소련에게 독립하면서 소련 주민이었던 자들이 우크라이나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남은 사람들인데 거의 반 강제적으로 소련 국적이 아닌 우크라이나 국적을 갖다시피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親) 서방 정책은 이들 러시아계의 목소리가 전혀 배제된 상태에서의 국정 운영이었으며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며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다가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친러 정권이 유로마이단으로 축출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러시아로의 귀속을 원한다며 크레믈린에 귀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공문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가 이제껏 사용해온 공용어인 러시아어로의 표기를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만의 표기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친러 계열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동부 지역인 도네츠크, 루한스크에 친러계열 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내전은 심화되었다. 러시아 내에서도 자국민을 구하기 위한 군사 행위를 촉구하게 되자 마침내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공격해 합병하게 된다. 그러자 다시 징병제가 부활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 군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말 그대로 모병제였다가 다시 징병제가 되니 군인들의 사기도 떨어지는데다 그로 인해 군 내에서도 소요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을 아무리 모아봤자 20만 남짓이지만 죄다 오합지졸에 당장 나가서 러시아 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는 10만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전력 전반에서 러시아에게 절대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군용기는 수송기를 포함해 200여 대에 불과하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013년 러시아와 군축협의에 합의하면서 겨우 남은 수준이 저 정도인 것이다. 육군 또한 별다른 미사일 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같은 상태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100전 100패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당시의 약속을 근거로 나토군 파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당장 군대를 파견할 계획은 없다 밝혔다. 그러면서 무기와 탄약 등 우크라이나 군을 지원하기 위한 6,000만 달러(약 704억원) 규모의 군수물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러한 물자를 아무리 보내봤자 쓸모가 없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은 군사적 개입이지 이와 같은 지원 품목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우크라이나에 미군이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른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의 에너지 제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라 군 투입 역시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전례 없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하지만 2015년 제재보다 더 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모로 우크라이나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시사점은 무엇일까? 외세에 의존도를 높이는 국방력보다 우리도 혹시 모를 대비를 위해 우리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전례없는 국민분열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친러와 반러대립이 우크라이나를 최악의 위기로 몰고 있다면 우리는 좌우대립, 남녀대립, 지역대립, 세대대립 등등 각종 이분법식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나마 우리가 우크라이나보다 나은 것이 우리 스스로의 국방력을 갖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미 공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흑해 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그리고 현대사의 뼈 아픈 교훈을 새기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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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서유럽 최초의 성문법, 프랑크 제국의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
    813년 9월 11일 루이는 아헨에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국왕 겸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814년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는 아헨에서 늑막염과 우울증 등으로 사망했고 루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상속받고 이후 로마로 건너가 Vivat Imperator의 Ludovicus라 하여 황제로 축성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서자인 드로고 3세(Drogo Ⅲ)는 메츠의 주교에, 후고(Hugo) 생 퀘틴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친척들인 조카 베른하르트의 친손자들 아달하르트(Adalhard)와 왈라(Wala 또는 Walacho), 테오도리히(Teodorihy)는 엑샹 라샤펠 수도원에 보낸다. 또한 각 수도원과 성당에 각종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과 친인척인 니타르트(Nitart) 등 친척을 중용하였다. 그 밖에 유산 상속을 우려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과 친척들을 결혼 협정을 맺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인접국가로 시집보내는 대신에 수녀로 만들어 수녀원에 보냈고, 몇몇 이복형제들과 조카들, 친척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와 수녀로 삼았다. 또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첩들도 수녀로 만들었다. 이는 형제들을 황위와 권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정치적인 보복, 혹은 견제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부분은 루이 본인의 신앙심과는 별개의 부분으로 판단된다. 루이는 나이가 들수록 대외 활동보다는 신앙에 의지하려 했다. 이는 형제들이 사망하고 그가 물려받은 황제의 지위와 권력은 루이가 형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통성이 크게 결여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리적인 위협에서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루이의 신앙심과 가까이 하려는 정책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채용하여 정치를 위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영주와 기사들이 성직자를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정책에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영주와 기사들의 불만은 루이의 사망 이후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 때 루이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펼친 루트비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따라서 장남 로타르나 차남 피핀은 아버지 루이의 정책을 이어 받으려다가 귀족들이 이에 찬성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핀은 아버지의 정책을 변환시켜 귀족과 기사들이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것에 있어 우선순위로 두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바이에른 대공으로써 첫 중점 과제는 카를루스 대제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항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조항 중에서 루이는 제국을 분할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보았다. 즉위 직후 루이는 814년 8월 로타르를 바이에른 국왕으로, 피핀을 아키텐 공작으로 봉했다. 또한 카를루스 대제가 813년 자신에게 물려주었으며 둘째 형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자리인 롬바르드의 왕위를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상스(Sangs)의 테오델린트(Theodellint)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상스 백작 아르눌프의 몫으로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루이가 상속령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아헨에서 루이 1세는 성당에서 궁정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가다가 지붕이 붕괴되어 죽을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루이는 왕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왕위계승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루이와 에르망가르드(Ermangard) 사이에서는 이미 장성한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모두 프랑크 족의 전통에 따라 왕국을 동등하게 분할 상속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고 있던 루이는 로마제국과 같은 통일적인 영토의 유지를 통해 제국 내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성직자들의 정치적 조언 또한 존중하였다. 이러한 원칙적인 부분과 동등한 분할 계승, 장자에 의한 단일한 계승을 적절히 절충했고 814년 7월 루이는 ‘황제칙령’이라 불리는 상속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장남 로테르는 아버지 루이와 공동 황제로 대관식을 받고 루이 1세가 사망하면 제국 대부분을 계승하며 차남인 피핀은 아키텐 및 인근 지역, 셋째인 루트비히 2세는 알자스-로렌과 바이에른 및 남독일 지역, 그리고 루이의 형이었던 이탈리아 왕 피핀 4세의 아들이며 루이의 조카인 베른하르트는 이탈리아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여 루이는 동등한 분할상속 대신 장자에게 황제 특권을 부여하고 왕이 되는 동생들이 황제에게 종속되는 방식으로 제국의 분할을 방지하고 제국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다. 817년 7월에 루이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다시금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당초 그는 아버지의 사후 아들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프랑크 족의 전통 살리카 법 대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일찍 다른 아들들에게는 일부의 영지만을 봉하고 장자인 로타르에게 넘겨주어 장자상속을 확립하려 했지만, 일부 관료들만 루트비히 경건왕의 뜻을 이해했을 뿐 다른 아들들은 자기 몫의 봉토를 차지하려 했고, 대다수의 귀족, 궁재들이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루이의 뜻은 실패하고 만다. 베른하르트는 루이의 군대와 대치했으나 숙부인 루이는 화해하는 척 하고 베른하르트를 불러들인 뒤 두 눈을 뽑고 근육을 지져 불구로 만들어 추방했다. 이어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군주로 봉하고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 분국왕에 봉했다. 사실 루이 1세가 베른하르트에게 실명형을 내린 것은 그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이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하여 818년에 사망했고 루이는 이후 오랫동안 베른하르트를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822년 유월절 때 아르덴(Arden)의 부지에(Vouziers)와 아팅기(Attigny)의 수도원에서 교황 파스칼 1세에게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가 죽은 것과 충실한 조언자인 베네딕트의 병사 등 대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공개 참회와 속죄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베른하르트의 죽음에 대한 공개적인 참회 의식에 대해 이는 왕국 내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먼저 성직자들은 루이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옹호했던 반면 귀족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황제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냐며 조소하였다. 815년 루이는 장남인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아헨(Aachen)에서 즉위시켰다. 이어 루이는 공식적인 상속령을 발표하여 로타르는 총괄 국왕 겸 황제로, 피핀은 아키텐과 가스코뉴(Gascony), 툴루즈, 카르카손 (Carcassonne), 오툉(Autun), 아발론(Avalon)과 낭베르(Nangber)를,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및 작센 등을 상속령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분국왕으로 임명된 세 아들의 사후 세 아들의 아들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정했다. 818년 4월 17일 루이는 장남 로타르 1세에게 제국의 제위와 함께 롬바르드를 넘기기로 정하고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왕으로 임명한 뒤 교황 파스칼리스(Pascalis)에게 보내 축성과 황제의 제관을 받게 하였다. 이에 루이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선포,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다며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이라는 명칭으로 프랑크 제국의 성문법으로 남겨졌다. 이 때 루이는 에르망가르드와의 사이에서 왕자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에르망가르드 황후가 818년에 사망하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Udite)와 재혼했다. 821년 루이의 스승이자 조언자이기도 한 베네딕트가 사망했다. 같은 해 황후 유디트 바이에른에게서 딸 기셀라(Gisela)와 822년 6월 13일 4남 카를 2세가 출생했다. 루이의 막내아들 카를은 루이 1세가 왕비 에르망가르드 사망 후 새로 왕비로 맞은 유디트의 아들로 제위와 왕위를 보장받은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2세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루이는 제국 단일성 유지가 흔들릴 위험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디트의 아들인 카를에게도 일정한 영토를 나누어 주려고 했다. 한편 루이의 조카 베른하르트가 사망하면서 세 아들 사이의 위계적인 왕위 계승 계획이 큰 도전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디트는 피핀, 루트비히 2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크 족 전통에 따른 동등한 분할 상속을 주장했다. 유디트의 움직임에 격분한 공동 황제 로타르는 817년의 황제칙령에 대한 어떠한 개정도 거부하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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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2
  • 스페인 내 바스크 분리주의와 현실
    바스크 민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로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게르만·라틴족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해 왔다. 바스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바스크어는 유럽의 다른 언어들과 이질적이면서도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계통상의 고립어로 들어간다. 현재 스페인에는 약 260만 명의 바스크인이 살고 있고 프랑스에는 약 30만 명이 살고 있다. 스스로를 바스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정도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고, 조상 중에 바스크인이 있거나 바스크 계통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추가한다면 이보다 더 많아진다. 또한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중남미 멕시코와 콜롬비아, 칠레, 필리핀, 아르헨티나, 카나리아 제도 등 해외에도 바스크 인들이 상당수 이주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 이름인 가르시아(Garcia) 같은 이름은 바스크계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을 추산한다면 바스크인의 숫자는 1억을 넘긴다. 스페인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수의 바스크인들이 중남미 등지로 이민가기도 했다. 칠레는 바스크계 성씨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인구의 27%에 달하며, 페루는 18%,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10%, 콜롬비아는 5%, 멕시코는 2%가 바스크 혈통을 지녔다고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바스크인들의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붉은 모발, 녹색 눈동자와 헤이즐색 색깔의 눈, 벽안 등을 가지고 있으며 혈액형 중에서 O형이 많은 편이고, Rh- 형 혈액형 또한 유달리 많다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 Rh- 형 비율은 16% 정도라고 하는데 바스크인들은 무려 36%의 비율을 갖고 있다. 즉, Rh- O형이 흔한데, 적혈 모구증 때문에 유산 및 사산율이 높아 다수 민족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넓은 의미에서 표기되는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영토의 남부 바스크 지방과 프랑스 영토의 북부 바스크 지방에 걸쳐져 있는 총 7개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고 있다. 바스크 주의 표어는 '일곱이서 하나(Zazpiak Bat)'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정작 이 중 3개 주가 프랑스 영토, 4개의 주는 스페인 영토에 속한다. 바스크 주의 면적은 20,947㎢, 인구는 약 320만 명 정도이다. 이들 주(州) 중 현재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남부 바스크 지방이다. 이들 남부 바스크지방 중 기푸스코아(Gipuzkoa / Guipúzcoa), 아라바(Araba / Álava), 비스카이아(Bizkaia / Vizcaya) 등 3개의 도(Province)로 구성된 바스크 광역 자치주로써 좁은 의미에서 바스크 지역은 이 곳만을 지칭하고 있다. 분리주의 성향을 가진 지방이라 한다면 이 바스크 자치주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자치주 지역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최소 B.C 3000년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단일 정체성과 문화가 분명한 단일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근이 피레네 산맥과 마주하고 있는데다 그 지세가 험준하여 이동이 쉬운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스크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선주민들 중 하나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바스크인들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다양한 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유전자 분석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에 피레네 산맥 부근에 수천 년간 정주민으로 살던 원시 바스크인(Proto-Basque people)과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주민인 라틴 종족들 간에 혼혈화된 후손이라는 것이유력하다는 가설이다. 이들 원시 바스크인들은 여타 토착 서유럽 인들과 거의 동일한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엄연한 코카소이드계 인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 수천 년간 유럽의 여타 민족들과 거의 섞이지 않아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이 유달리 강하게 남았을 뿐이라는게 명확한 분석이라 하겠다. 혈액형 비율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것일 뿐 특이한 사항은 아니며 고대 크로마뇽인의 마지막 후손이나 심지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가설도 있었지만, 유전적으로 볼 때 그저 평범한 서유럽 인종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바스크와 같이 고립된 언어와 정체성을 가진 민족은 고대 로마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드물지 않았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어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고, 알프스 산맥 동부에서 쓰이던 라이티아어도 인도유럽어와 다른 어느 계통에 속하지 않은 고착어 수준이었다. 그나마 그리스-로마 문명에 가까웠던 덕택에 기록에 남은 것이고 이러한 기층 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들이 확산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다소 피레네 산맥 아래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던 바스크족의 언어만 서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바스크 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을 통해 보면 전통적인 바스크 인의 거주 지역은 피레네 산맥을 중앙에 두고 프랑스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와 해안에 걸쳐 있었다. 바스크인들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정착민으로 거주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스크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 시대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에 점점 산지로 이동하며 요새화되는데, 이는 다른 유럽계 민족들과의 마찰이 빈번하여 이를 피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이전부터 바스크족 어부들은 대서양에서 참치잡이로 부를 축적했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들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비공식적으로 여러차례 갔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참치잡이를 위해 먼 바다까지 갔다가 우연히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5세기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것 역시 당시 포르투갈의 국가 기간 산업이었던 어업을 후원한 엔리크 왕자가 참치 어장을 찾아 어선을 이용해 대서양 일대를 헤집다가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관련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된 빈란드와는 달리 바스크인들의 아메리카 도달설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서 아직 가설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도 존재하고 있는데, 캐나다에 있는 바스크족의 포경기지 유적인 레드베이 기지를 근거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을 캐나다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분석해본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이르게 잡아도 1530년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1492년에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콜럼버스보다는 진출이 늦었던 셈이다. 현재까지 콜럼버스보다 더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음이 분명히 밝혀진 유라시아계 사람들은 10세기경에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일대를 탐험한 바이킹들 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시기라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한 건 맞다. 우선 바스크인들이 스스로 주장한대로, 바스크인 포경업자들이 타국의 지원도 없이 독자적으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바스크족은 참치 뿐만 아니라 대구잡이로도 유명한 민족이다. 당장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생선 요리가 말린 대구인 바칼랴우(Bacalhau)라 볼 수 있다. 특수부대에서 쓰는 베레모가 바스크인들의 전통 모자인데, 그 때문에 유럽에서는 바스크인들이 강한 불굴의 전투 민족으로 유명하다. 많은 전쟁을 거치며 바스크인을 공격하는 군대는 이기든 지든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다. 고대 로마의 군단이 바스크족을 동맹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베리아 반도 곳곳의 다른 켈트족과 이베리아 종족들의 성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로마 군단병으로 입대해 카이사르와 함께 오늘날의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도 활약했다. 카를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의 군대 또한 바스크족에게 크게 패해 피해를 입었고,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침공해 전선이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까지 밀렸을 때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방어하여 이슬람 세력을 격파했다.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의 준동에 프랑스 측 용병으로 참전하여 활약한 바 있으며, 위그노 전쟁에서는 프랑스 왕실의 외가로 참전하여 왕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 당시 프랑스군도 바스크인들의 소규모 유격전술로 인해 지배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술을 두고 스페인어로 '전쟁'을 뜻하는 "Guerra"에 '작은(small)'을 뜻하는 접미사 "illa"가 합쳐진 이름인 게리아(Guria)라고 불렀다. 이는 후일 게릴라 (Guerrilla) 라는 어원의 유래가 되었다. 바스크인들은 최근까지도 ETA 등 테러 단체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슬람을 상대로만 800여 년 동안 방어 전선을 형성하였고, 통합 스페인 왕국이 창립된 이후 16~17 세기 유럽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의 육, 해군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바스크인들은 고대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면서도 여전히 많은 바스크인들은 산지에 있는 성들의 자치권을 얻어 고유 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인으로써 완전히 동화되었다. 로마가 멸망하고 난 한참 이후까지도 바스크의 전통 종교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이 상당히 느렸다가 중세 초기에 유럽의 대세를 따라 결국에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1-22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러시아가 중시하는 '상호신뢰', 푸틴과 메르켈의 관계
    필자는 러시아 볼가 강변의 큰 도시 사마라를 방문했을 때 사마라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있는데 TV를 통해 Россия 24 방송에서 전 독일 총리인 메르켈이 슈피겔과 자이트와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면서 카페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러시아 현지인들이 일제히 분노했다. "Сука! (쑤까, 러시아어 욕)" 러시아에서는 상호 신뢰(Взаимное доверие)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믿음을 매우 중시하기에 국가와 국가 간에 있어서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다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러시아인이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거나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러시아에서는 비즈니스가 기본적으로 사람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인들이 밝히는 신뢰는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밝힌 후 토론을 통해 묘안을 짜내서 결국 양쪽이 원하는 결과를 내는 단계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과 어떻게 그것을 함께 할지 모색하는 것에 익숙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데 하물며 국가와 국가 사이는 더욱 그러하다. 푸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가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메르켈이 2002년 당시 독일 야당 기독민주연합(CDU) 대표였던 시절에 모스크바 크레믈린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푸틴 대통령을 만나 “KGB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농담을 건내기도 했다. 첫 만남 이후, 2005년 9월 푸틴 대통령이 이번에는 베를린을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유력 차기 총리 후보인 메르켈 CDU 대표를 만났고, 양국 협력 확대 등을 약속했다. 메르켈은 당시 만남을 회상하며 "매우 열려 있었던 대화"였다며 흡족해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독일어로 대화했다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푸틴 대통령이 KGB 시절 동독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독일어가 유창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차례 틀어진 것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문이었다. 이 때 메르켈은 무력으로 이 지역 위기를 증폭한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맹비난했지만 그녀와의 신뢰를 쌓아오고 있었던 푸틴 대통령은 그래도 메르켈을 믿어주었다. 메르켈을 믿었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2015년 민스크 협정에 참여했다. 독일, 프랑스가 중재한 이 협정은 메르켈이 아니었으면 푸틴 대통령이 협정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메르켈이 짜놓은 판이었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그녀를 믿고 협정에 조인했던 것이다. 처음 맺어졌던 민스크 협정은 총 1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조인되었지만 모호한 항목이 많아 몇 가지 더 수정 보안해 2차 민스크 협정을 체결했다. 1. 중무기를 전선 30km 뒤로 후퇴시키며, 양 측 전선 사이 30km 크기의 완충지대를 만든다. 2. 공세 작전을 금지한다. 3. 안전지대 너머 전투기의 비행을 금지한다. 4. 분쟁 지역 내의 모든 외국인 용병을 후퇴시킨다. 5. 민스크 협정 이행을 감시하는 OSCE 임무를 이행한다. 이 5가지 협정은 결국 하나도 지키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계속 협정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돈바스 주민들을 학살했다. 메르켈이 퇴임한 이후, 러시아의 2022년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특수 군사 작전이 감행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메르켈은 슈피겔과 자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하게 된다. "민스크 협정의 목적은 평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 이라고 하였다. 결국 민스크 협정은 평화가 아닌 러시아와 돈바스 주민들을 상대로 "협잡질"을 했다는 것을 실토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신뢰를 저버리고 야비한 협잡질(Шулерство)을 하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야비한 협잡질에 충격을 받았고 러시아인들도 메르켈의 야비한 행위에 분노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로스발트와의 인터뷰에서 "서방 측과의 협상에 대한 신뢰가 거의 제로(0)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협상은 해야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그 과정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은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제 타협과 협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될 일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메르켈의 이러한 폭로는 오히려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의 정당성을 세워준 꼴이 되었다. 현지 사마라에서도 이 같은 독일과 서구의 기만(Обман) 행위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구의 협잡질과 기만 행위는 오히려 러시아인들을 더욱 단결시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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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1-23
  •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서 부각된 북아일랜드의 문제
    영국과 아일랜드에 남아있는 두 국가 민족의 기본적인 문제는 이주 영국인과 토착 아일랜드인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현재 영국 내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겉으로는 없어 보이지만 현재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요크셔, 북아일랜드 지역이 서로 맞물려 대립하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외부에는 아일랜드도 개입되어 있다. 이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대립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에 있어 아일랜드 섬에는 개신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들이 영국으로의 잔류를 희망했다. 이들은 영국 국기를 걸어 놓은 반면, 반대로 아일랜드인들이 독립국인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바라면서 아일랜드 국기를 내걸었다. 영국은 개신교도들과 카톨릭교도의 종교 분쟁이라 주장하고 있고 아일랜드인들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이념적인 분쟁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 본토,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민족 구분은 혈통이 아니라 출신 지역별로 구분하는 경우가 대다수로 나타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출신의 부모를 가진 아이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면 이 아이는 아이리쉬(Irish)로 분류했고 21세기에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로 분류하며 간접적으로 차별하고 있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거두였던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같은 경우 아이리쉬(Irish)로 분류된다. 또한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족보나 가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앵글로 아이리쉬(Anglo-Irish)였으며 본인도 개신교 신자였다. 이와 같은 분류를 싫어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고 아이리쉬(Irish)라면 공기 중에서 태어나면 에어리쉬(Airish)겠구나라며 신랄하게 비판한 적 있다. 참고로 조지 버나드 쇼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써 두 국가의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현재 북아일랜드의 갈등은 아이리쉬(Irish)와 잉글랜드인(English), 아이리쉬(Irish)와 스코티쉬(Scottish)의 민족적인 갈등보다는 종교로써 신교와 구교, 왕당파와 공화파, 연합주의 및 아일랜드 민족주의 사이의 다양한 종교, 이념, 사상 등 모든 것이 융, 복합된 갈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는 개신교 지역과 카톨릭 지역이 벽으로 확실하게 나뉘어 있는 분단된 것과 비슷한 도시로 거리 곳곳에 지지 정파를 드러내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영국의 다른 지역과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중세 시대부터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영국의 지주로부터 큰 수탈을 당해 왔고 산업 사회가 되면서 영국 산업 자본의 하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되었다. 영국이 이와 같은 북아일랜드를 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 영국군이 퇴각할 경우 이주 영국인과 개신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토로의 이주를 강권하게 된다면 이주는 할 수 없다 하고 막대한 지원금 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사용할 만한 산업 기반이나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은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독립으로 자극을 받은 스코틀랜드까지 독립을 선언한다면 연합 왕국이라는 체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인 것도 있다. 북아일랜드 지역의 무장 단체로는 IRA가 유명하고 영국 충성파가 만든 UDA 등 반 IRA 폭력 단체도 북아일랜드 내 사회적 안정을 해치는 요인이 되었다. 일단 IRA는 2005년에 무장 해제를 선언해 극소수 원칙주의자를 제외한 IRA의 무장은 공식적으로 해체된 상태에 있다. 그래도 산발적으로 테러가 발생하기도 한다. 우선 북아일랜드는 다른 영국의 지역에 비해 광범위한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편이다. 북아일랜드는 좌우 이념 갈등도 있어 대개 영국 충성파는 우익이고 반대로 독립파는 좌익으로 분류되어 있다. 1920~1960년대 사이 IRA는 노골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주장했고 IRA가 이것에 집착해 실제로 카톨릭 신자인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반발했다. 1960년대 후반에 분리해 나간 다수파 PIRA도 반민족주의적 극좌 성향을 배격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슬로건은 여전히 통일된(United),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주의(Socialist)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의 성립을 유지하고 조직에도 단순한 반영 민족주의를 넘어 이와 같은 성향이 있다. 아일랜드 의회인 신 페인(Sinn Féin)도 사회 민주주의적인 정책을 많이 미는 등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좌익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 페인은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는 20세기 초반의 신 페인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1970년 IRA가 북아일랜드에서의 무장 투쟁의 지속 여부를 놓고 분열되었을 당시 신 페인 역시 분열되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한 세력은 신 페인에 잔존했고, 반대한 세력은 아일랜드 노동자당(Workers' Party)이라는 신당을 창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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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1-23
  • 헌정위기 이후, 옐친의 시대와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Oлигархи)의 등장
    1994년 12월에 치러진 러시아 총선에서 옐친의 여당은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다. 그리고 야당이자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으며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다. 이어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이후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면서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좁아지게 된다. 당시 자유민주당은 11%로 제2당을 차지했으며 여당인 러시아-우리집 당은총 득표 10%대를 유지하며 제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 제도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옐친은 잦은 음주로 인한 심장마비로 투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친(親) 서민적 이미지메이킹을 시도한 결과 초반 지지율 6%에서 다시 지지율이 고속성장해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옐친의 정적이자 라이벌인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Геннадий Зюганов)를 54%대 41%로 약 14% 가량 크게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정치자금을 받는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신흥 재벌들인 올리가르히(Oлигархи)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이른바 정경유착 강화 등의 약속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범죄적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들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옐친의 라이벌인 겐나디 주가노프(Геннадий Зюганов)는 러시아를 공산주의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로 1966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70년 오룔 주 대의원을 시작으로 활발히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로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당시 러시아 내 소련 공산당 지지세력 중 가장 상위에 있었던 그는 1991년 RSFSR 대선 후보인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신임을 얻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정적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에는 두마 최고회의가 강제 해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보리스 옐친과 가장 먼저 타협을 시도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주요 경쟁자들이 옐친의 정치 보복으로 인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당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처음 선거를 지휘했던 1995년의 총선에서 옐친을 이기고 공산당이 원내 1당에 등극하는데 성공했으며 친(親) 옐친파 정당들이 1993년 두마 선거와 마찬가지로 참패하면서 야당의 영수로써 주가노프는 유력한 차기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기세로 1996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았으나 엘친이 소비에트로 다시 돌아가면 러시아는 회생이 불가능해질 것 등으로 네거티브 선거 전략에 말리게 되었다. 더불어 올리가르히 언론사들은 의도적 옐친을 밀어주는 것으로 선거 막판에 판세가 뒤집히며 낙선하였고, 그로 인해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입어 정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를 육성하는 시절 군대를 키우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 국가들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의존했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의 소득에서 얻었다. 이러한 자원의존형 구조 형태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졌고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에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가스를 담당하는 국영기업 가즈프롬(Газпром)이나 알루미늄 제련 및 제조 기업인 루살(Русал)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나름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다. 문제는 이러한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들과 시장 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 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들에게 넘어감으로써 소련이 해체됨과 동시에 모두 벼락부자들이 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이 집권한지 몇 년만에 세계적인 부호로 성장할 정도로 큰 재산들을 축적했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수학자 및 공학자 출신으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 재임 시 로고바자 그룹 회장인 보리스 베레좁스키(Борис Березовский)와 석유재벌이자 유태계인 로만 아브라모비치(Роман Абрамович)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들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은 미국과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 가량의 자산가들이 된다. 물론 이들 뿐 아니라 구소련 국가였던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올리가르히들의 영향력들이 강하게 나타났고 경제 규모가 더욱 좁은 국가들인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는 체감상 더욱 심한 경우가 있었다. 후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페트로 포로셴코(Петро Порошенко)도 대표적인 올리가르히 중 하나였으며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으로 카자흐스탄 최대의 구리 광산 기업인 카작무스의 CEO인 블라디미르 김(Владимир Ким)도 중앙아시아 최고 올리가르히 중에 하나였다. 이들 올리가르히의 일부는 러시아 마피아와 결탁하여 사업을 벌리기도 했으며 이들을 이용해 다수의 스킨헤드들을 양성하여 유색인종들을 탄압함으로써 다수의 사회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에 올리가르히들은 부정부패가 대단했고 그에 따른 사치향락은 매우 악명이 높았다. 90년대 러시아인들 대다수가 암흑기를 겪으며 물가폭등과 더불어 이로 인한 모든 재산 들이 휴지 조각이 되어 크게 고통받고 있을 때 올리가르히들은 호화스러운 해외여행이나 고급 호화 별장과 같은 것들을 지어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투자해야 할 금액을 외국으로 반출했다. 이와 같은 부분도 러시아 세무법 상 명백한 "외환관리법 위반"이었지만 옐친을 비롯한 각 정부 각료들이 이를 눈감아 주면서 사법 처리의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옐친에게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대준 자들도 이들 올리가르히들이고 이를 미끼로 옐친과 각료들은 올리가르히들의 이익을 보호해줬던 일종의 공생관계였던 셈이다. 당연히 공업화를 위해 공장을 짓거나 투자해야 할 돈이 외국으로 흘러 나갔으니 일자리는 줄어들게 되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또한 올리가르히들은 마피아들도 이용했고 정경유착과 뇌물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불법과 탈법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러시아의 경제를 좀먹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는 올리가르히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푸틴이 집권한 2000년대에 이르러 부패와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그 정도가 줄어들었기는 했지만 그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얘기들이 많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민영화 정책으로 인한 최대 수혜자들이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옐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특히 민영 TV방송에서 공산당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소련을 암울하게 그린 뉴스나 다큐를 집중적으로 방영하게 하면서 온갖 흑색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예상을 깨고 53%로 재선에 성공을 거둔 것도 올리가르히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9년 8월, 옐친은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고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으며 그 해 말인 12월 31일 옐친은 건강 문제로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임했고,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이 때도 베레좁스키를 비롯한 올리가르히들은 푸틴에게도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푸틴은 올리가르히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올리가르히의 행태가 그동안 매우 악명이 높았기에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 데다 이들이 많은 금액을 이용하여 다른 인물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기에 결국 상당수의 올리가르히들을 부패 척결 명목으로 숙청했다. 이들 올리가르히 세력들은 푸틴을 지원하고도 토사구팽 당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살아 남은 올리가르히들은 때마침 러시아의 경제가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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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우크라이나의 군 전력 분석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군사 장비들과 병력을 재편성하여 우크라이나만의 독자적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면서 12월 6일에 우크라이나 국방부을 개관하는 개관식 때 국군 창설을 발표했다. 그래서 매년 12월 6일은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로, 올해 얼마 전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은 30주년을 맞이해 성대히 행사를 거행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군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에서 키예프, 오데사, 자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군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해당 부대들은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립 후, 우크라이나 첫 세대가 되었으며 현 우크라이나 국방부 주요 인사들이 바로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로 구성되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의 병력은 78만 명, 전차 6,500대, 전술기는 1,500대로 우크라이나에 주둔했었던 소련군의 전력을 그대로 이전받았기 때문에 군사력이 막강했으며 전체 유럽 내에서의 그 위상을 놓고 본다면 러시아를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다음이었을 정도로 대단한 강군이었다. 더불어 핵무기로만 놓고 보면 소련 다음으로 개수로는 영국, 프랑스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유럽은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통해 영토주권의 보호와 더불어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폐기하기 어려웠으므로 러시아나 서방의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랍추크(Леонид Кравчук)는 우크라이나 내 만연하고 있는 경제 위기로 인해 막강한 군대를 운영하는데 부담이 생기자 수백 대의 전차를 제외하고 도저히 가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재래식 무기들은 폐기, 혹은 제3세계 등에 헐값으로 내놓게 되는데 이러한 우크라이나가 헐값에 내놓은 무기를 가장 많이 사간 나라가 바로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소말리아였다. 나머지는 비축하면서 사실상 현역으로 남는 중무기들은 10분의 1 수준으로 급격히 축소되었고 무기 개발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있는 무기들을 개량해서 재활용했다. 이런 무기들의 성능이 당연히 좋을리 없었고 핵도 폐기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국방은 사실상 미국을 비롯한 나토에 맡긴거나 다름 없었다. 다만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국토에 인구가 약 4천만 가량 되었으니 군사들의 머릿수를 채우는 것은 가능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긴밀히 협조했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라크에 다국적군의 주둔이 시작되며 우크라이나는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병들을 파견한다.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친(親) 서방으로 기울게 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 체제를 찬성하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특히 러시아에 해군기지를 대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러시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2010년 2월 25일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러시아와의 냉각된 관계가 급속도로 해빙되기 시작한다. 같은 해 4월, 문제가 되던 해군기지를 러시아에 대여할 수 있게 취소 결정을 철회하고 2030년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의 해군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연장하였다. 게다가 2013년에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군의 군축 협상에 합의했고 10월에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약화되었었지만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우크라이나 군의 군사 무기들이 삽시간 폐기되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돌리다보니 당시만 해도 거의 50만에 달하던 정규군이 20만 남짓으로 줄어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른바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를 두고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3대 만행"으로 이 사건이 들어가는데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2013년에 폐기된 무기를 아프리카에 내전 중인 국가들에게 팔고 그 자금은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던 최악의 "대통령 방산비리"가 터져 엄청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어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해 야누코비치 정권은 붕괴되었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과 돈바스 전쟁이 발생하자 군대보다 더 치명적인 내부 분열이 터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영토 내부에는 친러 계열, 즉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나 크림 지역은 거의 80%에 달할 정도였고 수도 키예프에서는 약 20%, 옛 소련의 군항인 오데사에는 러시아계가 45%에 달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소련에게 독립하면서 소련 주민이었던 자들이 우크라이나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남은 사람들인데 거의 반 강제적으로 소련 국적이 아닌 우크라이나 국적을 갖다시피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親) 서방 정책은 이들 러시아계의 목소리가 전혀 배제된 상태에서의 국정 운영이었으며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며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다가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친러 정권이 유로마이단으로 축출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러시아로의 귀속을 원한다며 크레믈린에 귀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공문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가 이제껏 사용해온 공용어인 러시아어로의 표기를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만의 표기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친러 계열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동부 지역인 도네츠크, 루한스크에 친러계열 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내전은 심화되었다. 러시아 내에서도 자국민을 구하기 위한 군사 행위를 촉구하게 되자 마침내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공격해 합병하게 된다. 그러자 다시 징병제가 부활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 군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말 그대로 모병제였다가 다시 징병제가 되니 군인들의 사기도 떨어지는데다 그로 인해 군 내에서도 소요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을 아무리 모아봤자 20만 남짓이지만 죄다 오합지졸에 당장 나가서 러시아 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는 10만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전력 전반에서 러시아에게 절대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군용기는 수송기를 포함해 200여 대에 불과하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013년 러시아와 군축협의에 합의하면서 겨우 남은 수준이 저 정도인 것이다. 육군 또한 별다른 미사일 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같은 상태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100전 100패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당시의 약속을 근거로 나토군 파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당장 군대를 파견할 계획은 없다 밝혔다. 그러면서 무기와 탄약 등 우크라이나 군을 지원하기 위한 6,000만 달러(약 704억원) 규모의 군수물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러한 물자를 아무리 보내봤자 쓸모가 없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은 군사적 개입이지 이와 같은 지원 품목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우크라이나에 미군이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른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의 에너지 제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라 군 투입 역시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전례 없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하지만 2015년 제재보다 더 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모로 우크라이나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시사점은 무엇일까? 외세에 의존도를 높이는 국방력보다 우리도 혹시 모를 대비를 위해 우리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전례없는 국민분열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친러와 반러대립이 우크라이나를 최악의 위기로 몰고 있다면 우리는 좌우대립, 남녀대립, 지역대립, 세대대립 등등 각종 이분법식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나마 우리가 우크라이나보다 나은 것이 우리 스스로의 국방력을 갖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미 공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흑해 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그리고 현대사의 뼈 아픈 교훈을 새기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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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서유럽 최초의 성문법, 프랑크 제국의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
    813년 9월 11일 루이는 아헨에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국왕 겸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814년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는 아헨에서 늑막염과 우울증 등으로 사망했고 루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상속받고 이후 로마로 건너가 Vivat Imperator의 Ludovicus라 하여 황제로 축성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서자인 드로고 3세(Drogo Ⅲ)는 메츠의 주교에, 후고(Hugo) 생 퀘틴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친척들인 조카 베른하르트의 친손자들 아달하르트(Adalhard)와 왈라(Wala 또는 Walacho), 테오도리히(Teodorihy)는 엑샹 라샤펠 수도원에 보낸다. 또한 각 수도원과 성당에 각종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과 친인척인 니타르트(Nitart) 등 친척을 중용하였다. 그 밖에 유산 상속을 우려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과 친척들을 결혼 협정을 맺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인접국가로 시집보내는 대신에 수녀로 만들어 수녀원에 보냈고, 몇몇 이복형제들과 조카들, 친척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와 수녀로 삼았다. 또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첩들도 수녀로 만들었다. 이는 형제들을 황위와 권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정치적인 보복, 혹은 견제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부분은 루이 본인의 신앙심과는 별개의 부분으로 판단된다. 루이는 나이가 들수록 대외 활동보다는 신앙에 의지하려 했다. 이는 형제들이 사망하고 그가 물려받은 황제의 지위와 권력은 루이가 형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통성이 크게 결여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리적인 위협에서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루이의 신앙심과 가까이 하려는 정책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채용하여 정치를 위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영주와 기사들이 성직자를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정책에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영주와 기사들의 불만은 루이의 사망 이후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 때 루이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펼친 루트비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따라서 장남 로타르나 차남 피핀은 아버지 루이의 정책을 이어 받으려다가 귀족들이 이에 찬성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핀은 아버지의 정책을 변환시켜 귀족과 기사들이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것에 있어 우선순위로 두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바이에른 대공으로써 첫 중점 과제는 카를루스 대제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항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조항 중에서 루이는 제국을 분할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보았다. 즉위 직후 루이는 814년 8월 로타르를 바이에른 국왕으로, 피핀을 아키텐 공작으로 봉했다. 또한 카를루스 대제가 813년 자신에게 물려주었으며 둘째 형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자리인 롬바르드의 왕위를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상스(Sangs)의 테오델린트(Theodellint)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상스 백작 아르눌프의 몫으로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루이가 상속령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아헨에서 루이 1세는 성당에서 궁정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가다가 지붕이 붕괴되어 죽을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루이는 왕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왕위계승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루이와 에르망가르드(Ermangard) 사이에서는 이미 장성한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모두 프랑크 족의 전통에 따라 왕국을 동등하게 분할 상속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고 있던 루이는 로마제국과 같은 통일적인 영토의 유지를 통해 제국 내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성직자들의 정치적 조언 또한 존중하였다. 이러한 원칙적인 부분과 동등한 분할 계승, 장자에 의한 단일한 계승을 적절히 절충했고 814년 7월 루이는 ‘황제칙령’이라 불리는 상속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장남 로테르는 아버지 루이와 공동 황제로 대관식을 받고 루이 1세가 사망하면 제국 대부분을 계승하며 차남인 피핀은 아키텐 및 인근 지역, 셋째인 루트비히 2세는 알자스-로렌과 바이에른 및 남독일 지역, 그리고 루이의 형이었던 이탈리아 왕 피핀 4세의 아들이며 루이의 조카인 베른하르트는 이탈리아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여 루이는 동등한 분할상속 대신 장자에게 황제 특권을 부여하고 왕이 되는 동생들이 황제에게 종속되는 방식으로 제국의 분할을 방지하고 제국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다. 817년 7월에 루이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다시금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당초 그는 아버지의 사후 아들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프랑크 족의 전통 살리카 법 대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일찍 다른 아들들에게는 일부의 영지만을 봉하고 장자인 로타르에게 넘겨주어 장자상속을 확립하려 했지만, 일부 관료들만 루트비히 경건왕의 뜻을 이해했을 뿐 다른 아들들은 자기 몫의 봉토를 차지하려 했고, 대다수의 귀족, 궁재들이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루이의 뜻은 실패하고 만다. 베른하르트는 루이의 군대와 대치했으나 숙부인 루이는 화해하는 척 하고 베른하르트를 불러들인 뒤 두 눈을 뽑고 근육을 지져 불구로 만들어 추방했다. 이어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군주로 봉하고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 분국왕에 봉했다. 사실 루이 1세가 베른하르트에게 실명형을 내린 것은 그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이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하여 818년에 사망했고 루이는 이후 오랫동안 베른하르트를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822년 유월절 때 아르덴(Arden)의 부지에(Vouziers)와 아팅기(Attigny)의 수도원에서 교황 파스칼 1세에게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가 죽은 것과 충실한 조언자인 베네딕트의 병사 등 대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공개 참회와 속죄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베른하르트의 죽음에 대한 공개적인 참회 의식에 대해 이는 왕국 내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먼저 성직자들은 루이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옹호했던 반면 귀족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황제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냐며 조소하였다. 815년 루이는 장남인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아헨(Aachen)에서 즉위시켰다. 이어 루이는 공식적인 상속령을 발표하여 로타르는 총괄 국왕 겸 황제로, 피핀은 아키텐과 가스코뉴(Gascony), 툴루즈, 카르카손 (Carcassonne), 오툉(Autun), 아발론(Avalon)과 낭베르(Nangber)를,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및 작센 등을 상속령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분국왕으로 임명된 세 아들의 사후 세 아들의 아들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정했다. 818년 4월 17일 루이는 장남 로타르 1세에게 제국의 제위와 함께 롬바르드를 넘기기로 정하고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왕으로 임명한 뒤 교황 파스칼리스(Pascalis)에게 보내 축성과 황제의 제관을 받게 하였다. 이에 루이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선포,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다며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이라는 명칭으로 프랑크 제국의 성문법으로 남겨졌다. 이 때 루이는 에르망가르드와의 사이에서 왕자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에르망가르드 황후가 818년에 사망하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Udite)와 재혼했다. 821년 루이의 스승이자 조언자이기도 한 베네딕트가 사망했다. 같은 해 황후 유디트 바이에른에게서 딸 기셀라(Gisela)와 822년 6월 13일 4남 카를 2세가 출생했다. 루이의 막내아들 카를은 루이 1세가 왕비 에르망가르드 사망 후 새로 왕비로 맞은 유디트의 아들로 제위와 왕위를 보장받은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2세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루이는 제국 단일성 유지가 흔들릴 위험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디트의 아들인 카를에게도 일정한 영토를 나누어 주려고 했다. 한편 루이의 조카 베른하르트가 사망하면서 세 아들 사이의 위계적인 왕위 계승 계획이 큰 도전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디트는 피핀, 루트비히 2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크 족 전통에 따른 동등한 분할 상속을 주장했다. 유디트의 움직임에 격분한 공동 황제 로타르는 817년의 황제칙령에 대한 어떠한 개정도 거부하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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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1-22
  • 스페인 내 바스크 분리주의와 현실
    바스크 민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로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게르만·라틴족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해 왔다. 바스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바스크어는 유럽의 다른 언어들과 이질적이면서도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계통상의 고립어로 들어간다. 현재 스페인에는 약 260만 명의 바스크인이 살고 있고 프랑스에는 약 30만 명이 살고 있다. 스스로를 바스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정도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고, 조상 중에 바스크인이 있거나 바스크 계통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추가한다면 이보다 더 많아진다. 또한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중남미 멕시코와 콜롬비아, 칠레, 필리핀, 아르헨티나, 카나리아 제도 등 해외에도 바스크 인들이 상당수 이주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 이름인 가르시아(Garcia) 같은 이름은 바스크계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을 추산한다면 바스크인의 숫자는 1억을 넘긴다. 스페인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수의 바스크인들이 중남미 등지로 이민가기도 했다. 칠레는 바스크계 성씨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인구의 27%에 달하며, 페루는 18%,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10%, 콜롬비아는 5%, 멕시코는 2%가 바스크 혈통을 지녔다고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바스크인들의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붉은 모발, 녹색 눈동자와 헤이즐색 색깔의 눈, 벽안 등을 가지고 있으며 혈액형 중에서 O형이 많은 편이고, Rh- 형 혈액형 또한 유달리 많다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 Rh- 형 비율은 16% 정도라고 하는데 바스크인들은 무려 36%의 비율을 갖고 있다. 즉, Rh- O형이 흔한데, 적혈 모구증 때문에 유산 및 사산율이 높아 다수 민족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넓은 의미에서 표기되는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영토의 남부 바스크 지방과 프랑스 영토의 북부 바스크 지방에 걸쳐져 있는 총 7개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고 있다. 바스크 주의 표어는 '일곱이서 하나(Zazpiak Bat)'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정작 이 중 3개 주가 프랑스 영토, 4개의 주는 스페인 영토에 속한다. 바스크 주의 면적은 20,947㎢, 인구는 약 320만 명 정도이다. 이들 주(州) 중 현재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남부 바스크 지방이다. 이들 남부 바스크지방 중 기푸스코아(Gipuzkoa / Guipúzcoa), 아라바(Araba / Álava), 비스카이아(Bizkaia / Vizcaya) 등 3개의 도(Province)로 구성된 바스크 광역 자치주로써 좁은 의미에서 바스크 지역은 이 곳만을 지칭하고 있다. 분리주의 성향을 가진 지방이라 한다면 이 바스크 자치주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자치주 지역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최소 B.C 3000년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단일 정체성과 문화가 분명한 단일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근이 피레네 산맥과 마주하고 있는데다 그 지세가 험준하여 이동이 쉬운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스크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선주민들 중 하나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바스크인들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다양한 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유전자 분석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에 피레네 산맥 부근에 수천 년간 정주민으로 살던 원시 바스크인(Proto-Basque people)과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주민인 라틴 종족들 간에 혼혈화된 후손이라는 것이유력하다는 가설이다. 이들 원시 바스크인들은 여타 토착 서유럽 인들과 거의 동일한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엄연한 코카소이드계 인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 수천 년간 유럽의 여타 민족들과 거의 섞이지 않아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이 유달리 강하게 남았을 뿐이라는게 명확한 분석이라 하겠다. 혈액형 비율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것일 뿐 특이한 사항은 아니며 고대 크로마뇽인의 마지막 후손이나 심지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가설도 있었지만, 유전적으로 볼 때 그저 평범한 서유럽 인종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바스크와 같이 고립된 언어와 정체성을 가진 민족은 고대 로마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드물지 않았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어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고, 알프스 산맥 동부에서 쓰이던 라이티아어도 인도유럽어와 다른 어느 계통에 속하지 않은 고착어 수준이었다. 그나마 그리스-로마 문명에 가까웠던 덕택에 기록에 남은 것이고 이러한 기층 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들이 확산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다소 피레네 산맥 아래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던 바스크족의 언어만 서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바스크 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을 통해 보면 전통적인 바스크 인의 거주 지역은 피레네 산맥을 중앙에 두고 프랑스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와 해안에 걸쳐 있었다. 바스크인들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정착민으로 거주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스크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 시대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에 점점 산지로 이동하며 요새화되는데, 이는 다른 유럽계 민족들과의 마찰이 빈번하여 이를 피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이전부터 바스크족 어부들은 대서양에서 참치잡이로 부를 축적했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들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비공식적으로 여러차례 갔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참치잡이를 위해 먼 바다까지 갔다가 우연히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5세기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것 역시 당시 포르투갈의 국가 기간 산업이었던 어업을 후원한 엔리크 왕자가 참치 어장을 찾아 어선을 이용해 대서양 일대를 헤집다가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관련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된 빈란드와는 달리 바스크인들의 아메리카 도달설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서 아직 가설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도 존재하고 있는데, 캐나다에 있는 바스크족의 포경기지 유적인 레드베이 기지를 근거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을 캐나다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분석해본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이르게 잡아도 1530년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1492년에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콜럼버스보다는 진출이 늦었던 셈이다. 현재까지 콜럼버스보다 더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음이 분명히 밝혀진 유라시아계 사람들은 10세기경에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일대를 탐험한 바이킹들 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시기라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한 건 맞다. 우선 바스크인들이 스스로 주장한대로, 바스크인 포경업자들이 타국의 지원도 없이 독자적으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바스크족은 참치 뿐만 아니라 대구잡이로도 유명한 민족이다. 당장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생선 요리가 말린 대구인 바칼랴우(Bacalhau)라 볼 수 있다. 특수부대에서 쓰는 베레모가 바스크인들의 전통 모자인데, 그 때문에 유럽에서는 바스크인들이 강한 불굴의 전투 민족으로 유명하다. 많은 전쟁을 거치며 바스크인을 공격하는 군대는 이기든 지든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다. 고대 로마의 군단이 바스크족을 동맹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베리아 반도 곳곳의 다른 켈트족과 이베리아 종족들의 성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로마 군단병으로 입대해 카이사르와 함께 오늘날의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도 활약했다. 카를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의 군대 또한 바스크족에게 크게 패해 피해를 입었고,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침공해 전선이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까지 밀렸을 때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방어하여 이슬람 세력을 격파했다.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의 준동에 프랑스 측 용병으로 참전하여 활약한 바 있으며, 위그노 전쟁에서는 프랑스 왕실의 외가로 참전하여 왕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 당시 프랑스군도 바스크인들의 소규모 유격전술로 인해 지배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술을 두고 스페인어로 '전쟁'을 뜻하는 "Guerra"에 '작은(small)'을 뜻하는 접미사 "illa"가 합쳐진 이름인 게리아(Guria)라고 불렀다. 이는 후일 게릴라 (Guerrilla) 라는 어원의 유래가 되었다. 바스크인들은 최근까지도 ETA 등 테러 단체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슬람을 상대로만 800여 년 동안 방어 전선을 형성하였고, 통합 스페인 왕국이 창립된 이후 16~17 세기 유럽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의 육, 해군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바스크인들은 고대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면서도 여전히 많은 바스크인들은 산지에 있는 성들의 자치권을 얻어 고유 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인으로써 완전히 동화되었다. 로마가 멸망하고 난 한참 이후까지도 바스크의 전통 종교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이 상당히 느렸다가 중세 초기에 유럽의 대세를 따라 결국에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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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1-22
  • 이슬람 및 중동, 아랍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어떤 이들은 이슬람 및 중동, 아랍 문화와 역사를 몰라도 여태까지 중동과 석유 거래를 하며 잘 지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현재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 중동과 아랍의 역사와 문화, 관습을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현재까지 우리가 그들을 몰라도 경제적인 협력 등으로 인해 잘 지냈던 것은 그들도 우리를 몰랐고 미국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며 우리의 건설회사들이 중동의 인프라를 만들어 주고 중동으로부터 석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재의 경제적으로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일극에서 다극으로 변화하는 시기이자 아랍이 옛 이슬람 문화, 문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도약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리야드 엑스포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던 것은 이러한 도약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중세 시기, 국제성과 보편성이 뛰어난 이슬람 문화는 과학을 중심으로 무슬림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동서양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중세 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주어 후일 근대과학의 진보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과 문화적 성취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미 그런 전력이 있는 세계가 이제는 IT와 과학으로 승부를 보려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중동과 아랍이 "오일머니" 밖에 없다며 비웃고 조롱하지만 그 돈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과거 경제개발과 그로 인한 10대 경제대국 안에 들어가는 성과의 돈을 국민 복지, 국토 개발 등에 쓰고 있지만 이제는 좁은 국토와 출생률 0% 대의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동과 아랍은 인구도 적절히 늘려가며 광대한 국토 개발로 인한 네움 시티 건설, 첨단 IT와 과학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그 돈을 써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국의 문화와 역사 등을 널리 알리는 것에도 상당한 양의 돈을 투자하고 있다. 나는 두바이의 사라크 알 하디드(Saruq Al-Hadid) 고고학박물관에서 웅장한 CG의 스캐일을 보고 소름이 돋은 바 있다. 이게 당시 찍어온 아래의 사진들인데 고고학 발굴도 첨단 IT 과학을 접목시켜 진행하고 있다. 유적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 CG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랍에미리트가 단순히 경제적으로 돈만 많은 그런 지역인줄 알았는데 이제 고고학도 한국을 뛰어넘는 수준이 되었다. 역사나 고고학사가 훨씬 더 우리보다 짧은 아랍에미리트는 우리의 고고학을 이미 추월했다. 오일머니니 뭐니하고 저들은 경제나 비즈니스 밖에 모른다면서 인문학적으로 매우 무식하다고 무시했던 중동 고고학의 수준이 우리가 무시할 수준이 아니구나를 느끼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멀리 7,000km 이상 떨어진 중동과 아랍인데 이제 첨단 IT 과학 기술의 진보로 인해 점점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다. 중동과 아랍의 역사와 문화, 관습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비즈니스를 위해, 이제는 필히 알아두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슬람 및 중동, 아랍 문화와 역사를 몰라도 여태까지 중동과 석유 거래를 하며 잘 지내왔다고 하는데 그것인 이제 구태적인 과거의 얘기이고 달라진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 말들을 하는 분들은 QR 코드 결제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난 시절과 요즘, 미래에도 같을거라 생각하며 남의 나라 문화와 역사, 관습은 안 배워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스스로 또 다른 갈라파고스를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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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1-20
  • 4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위기를 바라보는 러시아 현지 역사학자인 필자의 생각
    2021년 후반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 전 유럽이 이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데 한국이나 동북아시아 측에는 이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최근 러시아 측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10만 명의 군병력을 주둔시켰다.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베르댠스크(Бердянск)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해안 중 중요한 두 항구가 존재하는데 베르댠스크와 마리우폴을 연결하는 수역인 아조프 해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해양 군사적 요충지다. 그렇기에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케르치 해협을 가로지르는 케르치 대교를 건설한 것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가장 큰 위협인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흑해 해안 지역을 보면 오데사와 미콜라이프가 항구로써 대단한 중요성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크림반도를 상실한 상태에서 해안 반경이 매우 좁은 지역이다. 두 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루마니아 영해 수역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 반경이 매우 부자유스럽다는 단점이 존재하기에 베르댠스크(Бердянск)와 마리우폴 지역은 우크라이나가 해안 지역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르치 대교가 세워면서 아조프 해안가 역시 통제되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케르치를 운 좋게 벗어난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터키와 조지아의 공동 해안 수역에 도달하게 되니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흑해 해안에서 경제적, 군사적인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지리학적, 지정학적인 부분이 국가 간의 분쟁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이유가 이와 같은 주변 국가들의 이해도가 겹쳐 있는 부분이 많이 때문이다. 전 우크라이나의 국방 장관인 알렉세이 레즈니코프(Алексей Резников)는 리보프 출신이자 어머니가 폴란드인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우크라이나 소련군 806 항공 연대 64 공수에서 복무한 인물로 후일 우크라이나가 소련 해체 후 독립했을 때 우크라이나 공군 소속 공수부대를 창설하는데 가장 공로가 큰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본래 친(親) 서방주의자로 포르센코의 집권 시기 때부터 이미 반러 활동을 해왔고 돈바스 전쟁 때 돈바스 친러 의용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전적을 쌓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Володимир Зеленський)의 국방 측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해군의 중요성을 판단하고 앚조프 해 지역의 베르댠스크(Бердянск)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에 러시아 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 해군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아조프 해에 대한 순찰을 강화했다. 레즈니코프 못지 않고 국방력 강화에 힘써온 키릴 부다노프(Кирилл Буданов)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에 상당수의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고 무기 체계를 증강하며 언제든지 공세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사실 크림 반도의 러시아 군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로스토프 온 돈과 인근 크라스노다르와 쿠반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쿠반 지역의 본군이다.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 크림 반도에 주둔 중인 러시아 군보다 이 로스토프 온 돈과 크라스노다르에 버티며 크림 반도를 지원하는 러시아 군이다. 러시아의 정예군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 지역 또한 로스토프 온 돈과 쿠반, 돈 강 일대의 러시아 군 주둔 지역이고 이들은 크림반도도 지원하면서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친러 의용군들을 모두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곳이기에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대단히 위협적이고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 11월 23~24일에 로스토프 온 돈의 러시아군과 크림 지역의 러시아 군이 흑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했다. 주요 훈련 내용은 흑해에서 가상으로 설정된 적의 군함에 함께 공격을 가하는 훈련으로 크라스노다르에 주둔 중인 남부군관구 비행단 소속인 수호이(Su)-27SM3, Su-30M2 등의 전투기들이 흑해 상공에서 적함을 공격하며 흩어지는 비행 훈련이었다고 전한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적의 해상 목표물을 공격할 때 함대와의 공조 능력을 실험했고 흑해 함대 소속 초계정인 바실리 비코프와 소형 대잠함 카시모프, 예이스크가 참여했다. 수호이 전투기들은 또 적 공군의 해상 기지 공격을 격퇴하는 훈련도 했다. 이와 같은 훈련은 친(親) 서방 노선의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과 나토가 지난 12일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진행한 것에 대한 대응 훈련이었으며 이러한 해상 훈련 자체가 돈바스 지역의 친러 인민공화국 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다며 크레믈린 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돈바스 지역에 끊임없이 러시아 군이 집결되고 있으며 그 숫자사 17만~18만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이들이 당장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 돈바스 의용대 지원하는 측면으로 갈지 알 수 없지만 올 연말에서 내년 초를 볼 때 나의 관심사는 이 흑해 위기에서 터키의 행동이라 볼 수 있겠다. 미국과 서방의 제재로 인해 터키도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었다. 최근에도 터키 화폐인 리라의 환율이 추락하고 있고 그로 인해 미국과 서방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 터키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좋고, 중국과도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이는 터키 뿐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란의 경우, 러시아와 중국과 관계를 강화시켜 미국과 서방의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입장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흑해 위기에서 터키가 러시아의 편을 들어 지중해에서 흑해로 진입하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과 나토군의 흑해 진입은 어려울 것이고 이 봉쇄 기간 안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굴복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터키가 미국과 나토에 협력한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서방에서는 터키에 대헤 당근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터키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고 터키 정부의 오랜 숙원이었던 EU 가입을 허용한다는 등이다. 터키는 오랜 기간 동안 EU의 문을 두드려 왔지만 현재까지 EU 가입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미국과 서방이 터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가장 큰 당근이 그런 부분이지만 이 또한 EU 협정을 위배하면서까지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계속되어 고조되는 흑해 위기 속에서 터키는 어떤 노선을 선택하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1-20
  • 일본 제국의 동남아시아 지배와 바나나 머니의 등장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했을 때 놀란 것은 끝없이 펼쳐진 정글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섬,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켜지고 있는 이상한 관습들, 이에 대한 일례로 살해한 사람들의 해골을 달고 다니는 것, 그리고 오랑우탄과 같은 다른 그 어느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다양한 동식물의 존재였다. 그러자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1년 2모작, 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작물의 재배에 유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인식한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에 세계의 다양한 식물들을 가져다 심기도 했는데, 17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서아시아에서 인도를 거쳐 자바 섬에 심은 커피, 19세기 말 영국이 각각 브라질과 아프리카에서 가져와 말레이 반도에 심은 고무나무와 기름야자인 팜 오일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특히 고무와 팜 오일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1차 산품의 대량 공급이 필요해진 유럽의 근대 제국에게 절실한 자원이었고, 그 외에 주석과 같은 지하자원이나 쌀, 양귀비(아편), 사탕수수와 같은 작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때부터 유럽의 동남아시아 식민 정책은 더 착취적으로, 더욱 약탈적으로 급변하게 된다. 유럽 제국들 사이의 제국주의 식민지 장악 및 부국강병 경쟁이 심해질수록 동남아시아에서의 자원 착취 역시 정교해지고 강력해져 갔다. 1950년 기준 전 세계 쌀과 주석의 50%, 고무의 75%, 팜 오일의 25%, 코코넛오일의 75%가 동남아시아로부터 생산되었다. 특히 고무와 팜 오일의 경우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생산량 1위, 2위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 나타난다. 먹고 살기 위한 작물 재배가 아닌, 유럽인들의 수요에 따른 강제적 작물 재배는 현지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유럽인들은 작물을 재배한 현지인들로부터 국제 시장 가격에 한참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으로 사들임으로써 현지인들을 이중으로 착취하였다. 이는 천혜의 환경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1942년 서구 제국들이 일본에 패해 동남아시아에서 퇴각한 이후에도 비극은 계속되는데, 일본 역시 서구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까지 대략 3년 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점령이 동남아시아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대만을 할양받은 이래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거쳐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 중부, 동남 지역의 일부까지 점령하게 된다. 중국 전역을 장악하는 듯 보였던 일본군은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버린 장개석 국민정부의 회피 전략에 서서히 고전하기 시작한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으로 전비 조달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만주국 뿐 아니라 본국까지도 생산의 한계에 다다르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군사 행동으로 촉발된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있어 또 다른 기회였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과 군사적 남진을 통해 1942년 초, 홍콩과 동남아시아 점령을 완료하게 된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동남아시아 식민지 권역을 재분할하고, 군정(軍政)을 싱가포르에 두어 관리하였다. 크게 ‘갑(甲)’과 ‘을(乙)’이라고 명명한 두 권역으로 분할하였는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분류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경우 ‘을(乙)’,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인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해양 지역은 ‘갑(甲)’에 해당하였다. 더불어 ‘을’ 지역은 프랑스가 일본의 동맹인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기존 식민지 통치 체계를 유지하는 간접적인 통치 방식을 적용하였고, ‘갑’ 지역의 경우 적국인 연합군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직접적인 통치 방식을 적용하여 그 지배 방식을 구분하였다. 영국에 의해 건설되어 개항한 동남아시아 금융 및 물류 허브 도시인 싱가포르는 그 명칭마저 쇼난토(昭南島, Syonan-to)라고 개칭하게 된다.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 불리던 이 광범한 권역 내에서 동남아시아의 역할은 분명했다. 전쟁의 핵심 지역이자 주요 격전지였던 중국 전역과 태평양 전선에 원자재와 인력, 자본을 공급해주는 역할이었다. 당시 1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노동력에 더해 고무, 주석, 철, 석유, 쌀 등의 각종 산품이 풍부한 이 지역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기지로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한테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공급 받을 자원에 대해 지불할 자금이 없었다. 당시 중국 내에서 무분별하게 발행되던 군정 화폐인 군표와 식민지 화폐로 인해 촉발된 인플레이션은 매우 심각할 정도였고, 일본 본국 역시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내의 일본군과 행정 관료들은 자급자족을 최우선 목표로 알아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 아래 대장상(大藏相, 재무장관)을 지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1889~1977)의 선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941년 11월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기 직전 오키노리의 연설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은 반드시 남방인 동남아시아에서 자급자족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현재의 노동력을 계속 활용해야 한다. 화폐 가치 하락의 시기와 앞으로 계속될 경제적 고립을 무시하면서 이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물산과 보급품을 공급받기 위해 지급해야 할 자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이 선택한 방법은 영국 식민 정부를 모방한 아편 판매를 통한 예산의 확보, 화교들로부터의 자금 동원, 그리고 돈이 없으면 만드는 것이었다. 초기 군표를 동남아시아에 풀던 일본군은 이 군표의 신용도가 급격하게 하락하자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내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 1942년 3월30일 싱가포르에 ‘남방개발금고(南方開発金庫)’를 설립하였다. 아울러 이 기관에서 발행되는 화폐인 ‘남발권(南發券)’을 기존에 유통되던 군표를 대체하는 유일 화폐로 채택하였다. 이는 자급자족해야 할 동남아시아 지역을 금융적으로 통괄하는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초석이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남방개발금고(南方開発金庫)에서 수없이 많은 화폐가 발행되어 유통되는데, 이 화폐들의 앞면에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그림들이 새겨졌다. 특히 바나나가 주로 등장하면서 해당 화폐를 ‘바나나 머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바나나만 새겨진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과일들과 말레이 지역의 정글, 강 등이 화폐에 등장하는데, 당시 일본군이 이 동남아시아 지역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본 것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근대의 화폐는 신뢰의 산물로 나타난다. 신뢰의 대상은 다름 아닌 해당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인 국가를 향하고 있다. 현재 시민들이 금속이 아닌, 종이에 불과한 달러를 신봉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영향력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가 보증하는 화폐 역시 가치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일본은 당시 동남아시아인들, 특히 상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단체들의 경우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다. 각지에서 이루어진 일본군의 학살과 무력시위 아래 대량으로 발행된 남발권을 기반으로 물자를 공급했지만, 대부분은 집안에 영국의 식민시기에 발행되었던 화폐를 숨겨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홍콩이나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홍콩 상하이 은행(HSBC)이 일본 침공 이전 발행한 홍콩 달러(HKD)나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1935년에 단행한 화폐 개혁 이후 발행한 법정 화폐(法幣)를 그들끼리 몰래 사용하거나 숨겨 놓고는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나 남발권과 같은 식민지 화폐를 배척하거나 사용하는 척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일본의 자금 동원이나 물자 공급에 차질을 빚어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주었다.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일본군이 각지에서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도록 독려하였지만, 갈수록 패배가 확실시 되어가고 있던 전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현지인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화폐를 더욱 남발하는 악순환이 벌어져 결국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남발된 화폐들은 그대로 동남아시아와 홍콩의 각 가정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베이와 같은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2015년까지도 일련의 홍콩인들이 같은 시기 식민을 겪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현 시세 수백 만 달러의 군표를 가지고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청한 바 있다. 결국 바나나 머니와 군표를 포함하여 일본이 발행한 전쟁 시기의 화폐는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면서 휴지 조각으로 변모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를 다시 지배하러 온 영국 식민정부는 일본이 발행한 화폐를 철저히 무시하였다. 사실 초기 낮은 가격으로 환전해 주는 방안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영국 역시 미국에 밀려 경제력이 파탄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휴지 조각으로 거래한 셈이 된 동남아시아 인들의 경제적 피해는 극심했다. 전쟁 이전의 자본을 이미 해외로 유출한 상태였던 화교 자본가들을 제외하고 현지인들의 피해가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일본의 말레이 지역 점령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와 일본이라는 두 제국의 점령과 착취를 차례로 받으면서 현지인들은 그 어느 제국도 그들 공동체와 운명을 함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프랑스가 가져다 준 근대의 화려한 물질 문명도, 일본이 언급하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통치라는 침략의 명분도 모두 공허하다는 것이 가혹한 착취로 증명되었다. 일본 식민 체제의 경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지금 전 세계 시민들이 보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1945년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차례로 선언하거나 협상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 시기에 발행된 화폐는 사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고 손해만 크게 안겨 주는 것이었지만, 그 가치 없음이 남긴 유산은 동남아시아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후 세대에 이르러 독립과 건국, 민족주의가 생성되었고 이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남아시아는 현대 시대에 이르러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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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0
  • 중국계 쿨리들의 싱가포르 정착과 싱가포르 화인의 형성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 반도 남단의 섬으로 쿨리로 구성된 청나라 남쪽의 당시 광동, 복건, 해남 등 중국 남부 지역,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 및 대만 출신 중국인 쿨리들인 이민단이 건너와 개척한 섬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는 출신지인 청나라 남방 광동, 복건 및 해남 지역과 유사하다. 영국인들은 19세기 이 섬을 개척할 때 말레이 반도에 대규모 식민지를 만들던 중 말레이 반도 중부에서 주석 광산이 대규모로 채굴되었고 수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쿨리가 되어 말레이 반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일부는 농업 노동자로도 왔다. 쿨리들은 최초 페락, 이포, 페낭 등에 정착했고 이후 콸라룸푸르를 개간했으며 점차 남쪽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조호르바루와 말라카 그리고 더 나아가 현재의 싱가포르에도 건너왔다. 그리고 리콴유의 조상과 같이 직통으로 싱가포르에 오는 경우도 많이 존재했다. 특히 싱가포르는 인구가 희박했던 섬으로 말레이인 어부들이나 거주하던 황무지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이 어느덧 말레이인보다 인구가 많아졌다. 이는 페낭이나 말라카 같은 타 해협식민지와 같은 과정이었다. 특히 말라카는 싱가포르하고 거의 한 지역으로 포함되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1997년 홍콩 반환을 대비해 피난처를 찾던 홍콩인, 인근 국가에서 거주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베트남 전쟁으로 패망한 남베트남에서 보트피플로 전락한 중국계 베트남인 등 새로운 이민자들도 건너오고 있고, 중국 대륙 출신 이주 노동자들도 유입되고 있다. 씽공(星港)이라는 광동어에서 차용된 중국식 이름도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붙게 된다. 여기서 성(星)은 1990년대까지 한국 언론에서 싱가포르의 약자로 사용하던 한자이다. 1990년대 이전 대만-싱가포르 협정에서는 타이싱(臺星) 간의 협정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 신문은 1990년대까지 한자어를 적극 혼용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도 美, 中, 日, 英, 佛, 獨, 伊, 臺, 加, 濠 등 주요 국가들은 물론 동남아시아 역시 필리핀은 比, 베트남은 越, 태국은 泰, 말레이시아는 聯 혹은 馬聯, 인도네시아는 印尼 등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국계 인구는 아직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이전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침공해왔을 때 집중적으로 탄압, 학살당했던 경험이 있다. 특히 공항 근처에 있는 황무지나 현재도 교도소로 사용되는 창이 교도소에서 학살당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는 중화민국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인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대부분은 광동 동부와 복건 출신이 대다수이며 그 외 객가 및 해남성 출신 해남인 그리고 1997년 홍콩 반환을 전후로 건너온 홍콩인 및 이웃 마카오 인들이다. 특히 정치적 불안을 느끼던 홍콩인들이 대거 건너왔으며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실패와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 후 현재도 대거 건너오는 중이다. 마침 싱가포르는 2020년 싱가포르 총선을 기점으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홍콩에서 2022년 이후 싱가포르로 대거 건너왔다.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톈진, 충칭, 다롄 등 북부 지역 계통의 주민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 역시 카지노 위주의 경제 구조 문제, 중공의 간섭, 협소한 경제 규모 등으로 싱가포르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카오 인 중 홍콩에서 다시 싱가포르에 이주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이베리아 형식의 성씨를 사용하는 포르투갈인과 중국인 혼혈 토생포인(土生葡人)들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계 그룹은 객가-복건인-광동인-해남인 순서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정점의 민족은 역시 복건인으로 불리는 현재 복건성 출신들이었다. 복건인들이 주류였기 때문에 싱가포르 일대에 지명, 인명 등에 민남어가 많이 남았다. 참고로 싱가포르의 중국계 중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陳, 黃, 李, 劉, 林, 吳, 葉 등인데 陳씨는 복건식으로는 탄(Tan), 광동식으로는 찬(Chan), 표준중국어로는 첸(Chen)으로 표기된다. 대부분 객가어, 민어, 광동어로 본인의 성을 표시하지만 이름은 표준 중국어로도 자주 표기하는데 성씨와 이름을 각각 다른 독음으로 호적에 올릴 수 있어서이다. 영국은 성공회를 싱가포르에 들여오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개종하며 영어를 배운다. 그리고 중화권의 전통을 지키고 불교, 도교, 유교를 믿는 중국계 싱가포르인과 영어를 사용하고 개신교, 카톨릭을 믿는 중국계 싱가포르인이 공존하고 있다. 중국계의 문화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 문화와 중화권의 전통 문화가 공존하는데 특히 이전 세대일수록 중국 전통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젊은 세대로 갈수록 서구화되어 있다. 당연히 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대개 젊은 층들이다. 특히 학력이 높은 중국계 싱가포르인일수록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결혼식과 장례식 등 관혼상제도 중국식과 영국식이 섞여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수의를 입힐 때 서양식으로 정장이나 드레스, 원피스를 입히는 등의 습관이 있으며 결혼식의 경우도 젊은 세대는 교회에서의 결혼식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다. 결혼식과 장례식부터가 서구화된 셈이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정체성은 중국인(Chinese)이 아닌 싱가포르인(Singaporean)으로 두고 있으며 중국인이라 불리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한다. 싱가포르인들은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홍콩과도 철저히 구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계 싱가포르인, 특히 아세안 정체성을 갖고 영어가 더 능숙한 10대 및 20대와 접근할 때는 굉장히 주의해야 한다. 처음부터 중국과 대만 모두 이들에게는 남의 나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아시아인이 기원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사람들과는 성향 자체가 크게 다르다. 싱가포르인들의 모어는 광동어, 민어, 객가어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영국식 영어와 표준 중국어이다. 실제로는 영어를 표준 중국어에 비해 많이 사용한다. 싱가포르가 완전한 영어 사용 국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중화권 국가들과의 큰 차이이며 싱가포르가 중화권이 아닌 영미권으로 포섭되어지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는 민족과 인종의 통합 정책을 사용하여 중국계 사회의 공용어로는 표준 중국어를 지정했고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의 특성상 영어가 공용어이다. 중국어 방언인 광동어, 민어, 객가어 등 다양한 방언들의 경우 각 가정에서 사용된다. TV 등 방송 송출은 영어, 말레이어, 표준 중국어, 타밀어로만 송출되며 중국어 방언이나 말레이어 방언 송출이 금지된다. 공식 문서 역시 영어로만 혹은 영어, 말레이어, 표준 중국어, 타밀어 4개 언어로 작성된다. 그래서 이들은 표준 중국어로 된 대만 영화, 대만 드라마, 대중가요를 소비하고 광동어 사용권에서 제작된 홍콩 영화나 드라마, 대중가요 등은 표준 중국어로 된 대만 판을 수입해서 이용한다. 같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하더라도 출신 고향과 방언이 다른 경우 집에서 부부가 서로 표준 중국어 및 영어로 대화하고 밖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며 이러한 경우 자녀들도 모어로 영어 및 부모 양가의 방언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처럼 자란 아이들도 학교 교육에서 표준 중국어, 영어를 접한다. 이렇게 자란 사람들은 본인들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한다고 설문조사에 응답하고 있다. 3개 인종 및 민족, 4개 언어가 나뉜 싱가포르는 학교에서 각 민족 별로 각자 모국어 습득을 위해 언어 수업을 나누며 이 때에 중국계는 한자를 학습하고, 표준 중국어를 배운다. 싱가포르에서 한자는 법적으로는 간체자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정체자도 사용한다. 중국어 신문 및 인터넷 등 언론 보도 내용, 신생아 명명 등에서 정체자에 대한 제한은 없다. 리셴룽 총리도 정체자로 본인 이름을 등록했다. 문자는 간체자 위주이지만 실제로 정체자도 흔하게 사용된다. 인터넷 중문 신문도 정체자로 서술된 것들이 있고 대만이나 홍콩에서 도서를 수입하기도 한다. 단지 젊은 세대는 주로 대화할 때만 중국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한자 실력이 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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