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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검색결과

  • 인도네시아, 기니에 패해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23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아프리카의 기니에 0-1로 패하며 2024 파리 올림픽 남자축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경기는 9일(현지시간) 프랑스 클레르퐁텐에서 열린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치러졌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달 초 열린 AFC U-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4위를 기록하며 아시아에 배정된 3장의 올림픽 직행 티켓 중 하나를 확보하지 못했다. 대회 8강에서 황선홍 감독이 지휘하는 한국을 승부차기로 꺾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이라크에 연이어 패하며 결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기니와의 경기에서 인도네시아는 전반 29분 페널티킥으로 인해 기니에 선제골을 허용했으며, 후반에도 또 다른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위기를 맞았다. 신태용 감독은 판정에 격하게 항의하다가 연이어 경고를 받고 퇴장당했다. 퇴장 후에도 신 감독은 벤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항의를 이어갔고, 이에 인도네시아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페널티킥 실축으로 인해 추가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는 결국 패배를 막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다. 이로써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올림픽 본선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기니는 U-2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4위에 오른 후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인도네시아를 꺾으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기니의 마지막 파리행 티켓 확보로 이번 올림픽 남자축구에 참가할 16개국이 모두 확정되었다. 이번 올림픽에는 개최국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 도미니카공화국, 스페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모로코, 이집트, 말리, 뉴질랜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일본,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기니 등이 출전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9대회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은 36년 만에 올림픽 본선 무대를 관전만 하게 됐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5-10

과학 검색결과

  • 한글과컴퓨터, '한컴 데이터 로더' 출시로 AI 데이터 추출 혁신 이끈다.
    한글과컴퓨터가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인 '한컴 데이터 로더'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PDF 문서뿐만 아니라 오피스 문서에서도 텍스트와 다양한 데이터를 추출하여 AI가 학습하기 용이한 포맷으로 변환하는 기능을 제공된다. 변환 가능한 포맷에는 JSON, CSV, TXT, XML 등이 포함된다. 한컴은 이미 국내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이 제품의 시범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이번 출시를 통해 유럽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컴은 스페인의 AI 보안 솔루션 회사 '페이스피'와의 협업을 통해 유럽 시장에 접근할 예정다. 한컴은 또한 글로벌 시장 확대를 목표로 다양한 언어(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어)를 지원하는 해외향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한컴의 AI 기술과 SDK 기술을 국제 고객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한컴 데이터 로더'의 개발 배경에는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실시간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정확한 텍스트를 생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검색 증강 생성(RAG)' 기술의 중요성이 있다. RAG 기술은 데이터베이스나 문서에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여 LLM에 적용, 실시간으로 정보가 갱신되어 정확도가 높은 텍스트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구조화되지 않은 데이터를 AI 학습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한컴의 이 기술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한컴의 대표 김연수는 "올해를 글로벌 빅테크 기업으로의 전환을 위한 원년으로 삼고, 인수, 투자 및 협력을 통해 AI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한컴 데이터 로더를 통해 글로벌 AI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설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전략은 한컴이 글로벌 기술 시장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4-18

칼럼 검색결과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9
  • 최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후예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크로아티아의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는 지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승리했고 여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Socijaldemokratska partija Hrvatske)의 세가 강하다. 게다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정치적인 실권은 없지만 친러시아 성격을 갖고 있어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중국 기업을 끌어들여 일대일로 아드리아 해 사업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화해 구도를 열어가기 위해 접촉 중인데 곧 세르비아를 방문할 시진핑 주석이 오는 시기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중인듯 싶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바는 없다. 이에 크로아티아 극우세력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자그레브 내에서 연일 시위를 열고 있다. 이에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우스타샤의 후예라고 비난 했고 플렌코비치 총리를 "파벨리치의 아들(Потомци Павелића)"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에 자그레브에서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우스타샤의 표어를 앞세워 반러, 반중, 반세르비아 정서를 강화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반 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면서 철저히 극우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카톨릭이 섞인, 종교 전체주의(Religious Totalitarianism)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이 강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도 "고대 로마제국의 영향을 살리겠다(Faremo rivivere la gloria dell'antico Impero Romano)"는 극우주의적 표어로 선전, 선동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표어 제작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실상 우스타샤는 무솔리니의 자금지원까지 받아서 활동했었다. 특히 우스타샤의 창설자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889~1959)는 무솔리니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 및 달마티아의 병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 프랑코프치(Frankopci)에 입당했는데 당은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가 지도하고 있었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는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이해(Comprendere il ruolo degli italiani nell'impero coloniale italiano)"라는 제목에서 “Illuminano il mondo con la loro arte, insegnano con la loro conoscenza e forniscono una forte organizzazione nazionale nel nuovo territorio attraverso le loro capacità e abilità di governo (그들의 예술로 세상을 밝히고,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며, 그들의 통치 기술과 능력을 통해 새 영토에 튼튼한 국가 조직을 마련할 것)”이라 주장했었다. 이것을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라고 한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여기에 박수치고 있었던 인물이고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이를 크로아티아의 실정에 맞게 시도하고자 했던 인물인 것이다. 프랑크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파벨리치는 프랑크 밑에서 개인 비서 역할을 했고 1927년 자그레브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무장단테 조직인 우스타샤(Ustaša)를 탄생시킨다. 우스타샤(Ustaša)라는 이름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인 'Ustati', Bставать (일어서다)의 슬라브어인 Usta, 중세 이탈리아어인 Scalatia (오르다의 중세어)를 합성해 만든 단어다.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반란(Pobuna)"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이들은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우스타샤의 표어였다. 이같은 구호는 나치 독일의 'Sieg Heil'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면서 독립한 세력에 가깝다. 본래 남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원하고 있던 세르비아와 협력해 크로아티아인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가 위협당할까봐 두려워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남슬라브의 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란을 주도했으며 결국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조직을 옮겼다. 역시 이들은 이탈리아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이후의 얘기다. 한편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알렉산데르 1세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내의 경제마저 파탄에 이르자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시위가 빗발치게 되고 파벨리치는 이를 이용해 알렉산데르 1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1세는 프랑스와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를 방문한다. 프랑스 외무장관이자 총리를 역임했던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과 회담을 진행했다. 한편 파벨리치는 불가리아의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손을 잡고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을 의뢰하게 된다. 이 때 의뢰를 받은 인물이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 1897~1934)이다. 체르노젬스키는 회담장에 뛰어들어 알렉산데르 1세에게 한 발, 장 루이 바르투에게도 한 발의 권총을 발사했고 알렉산데르 1세는 그 자리에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했다. 한편 장 루이 바르투는 국왕을 지키려다 팔에 총알이 관통했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바르투의 경우, 빨리 지혈했으면 살 수 있었지만 동맥에 총을 맞은데다 그걸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병원에 옮겨진 지 1시간 뒤에 사망했던 것이다.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체르노젬스키가 의뢰를 받은 것은 알렉산데르 1세 한 명이었다고 한다. 즉, 바르투가 죽은 것은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 파장은 엄청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우스타샤의 소행임으로 밝혀내고 파벨리치의 소환을 이탈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마무리했으며 그 마저도 3개월만에 풀려났다. 사실상 무솔리니가 풀어준거나 다름없는데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독일로 넘어가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히틀러에게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숙청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파벨리치는 자신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을 세우게 된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나치와 파시즘이 교합된 괴뢰국이었고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 왕조 방계인 사보이아오스타(Duca d'Aosta) 가문의 아이모네를 국왕 토미슬라브 2세(Tomislav II, 1900~1948)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토미슬라브 2세는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왕이었지만 정작 크로아티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왕위 자체는 일단 수락하였으나, 본인이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병합의 현실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문과 안전 보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이름 뿐인 왕인데 굳이 파벨리치가 자행한 숙청의 피바람을 지켜봐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벨리치는 우스타샤들과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적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살해하고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1/3은 추방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이들은 같은 슬라브계인 세르비아를 학살하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나치 추종 세력 중 가장 악질적인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 집단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집단으로 꼽히고 있는 이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대다수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크로아티아인이나 가톨릭교도인 척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을 총살은 물론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 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의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사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혹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만행은 당시 발칸반도에 주둔하던 나치 독일군들조차도 그 잔혹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자그레브에 위치한 독일 점령군 사령부는 그들의 잔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히려 히틀러에게 우스타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에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이 우스타샤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학살의 만행이 끝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들은 인종청소를 당하다가 나치 독일이나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인종 절멸에서 구해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파벨리치는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을 개정하여 아예 비 크로아티아 시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면서 철저하게 세르비아인들을 솎아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 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자발적 아리아인이 된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1941년 6월 15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에 파벨리치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9월에 파벨리치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Slavko Kvatelnik)를 공식 해임한 이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더불어 1943년에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그는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아인자츠그루펜이나 SS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총 한 번 쏘지 않고 편리하고 쉽게 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업을 열었고 나치 친위대원들이 이를 배워가기까지 했으며 여기에서 배운 아인자츠그루펜은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인 일명 OUN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우스타샤는 민병대들을 이용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22만~5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심지어 당시 카톨릭계는 이들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이들을 고트족의 후예라 하며 선동했기 때문에 학살을 면할 수 있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남슬라브인들 중, 세르비아인이면 모를까 크로아티아인은 고트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편 홀로코스트 수용소 중에도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필두로 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져 있던 것이 30곳이나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민병대 체트니치가 조직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게릴라 전을 벌이며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민병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민병대들은 1945년 1월,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에 흡수되었지만 이미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군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철군했다. 결국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궤멸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피하여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고 해방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망명 중이던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네오나치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우스타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부터의 민족적 독립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일 우스타샤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에 의해 복원된다. 학살 대상은 세르비아 인뿐만 아니라 보슈냐크 무슬림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투지만이 서구권으로부터의 비난 여론을 감수한 끝에 우스타샤를 해산했지만 그 뿌리는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인한 세르비아인 학살은 반 크로아티아 감정을 세르비아 인들에게 남기기 충분했고 현재도 세르비아의 체트니치와 더불어 서로를 증오하는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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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포르투갈의 고인돌 문화,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하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로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만이 유럽 문명의 뿌리는 아니다. 그리스 인들이 '갈라타이' '켈트이', 로마인들이 '갈리아'라고 불렀던 켈트인은 유럽 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갈리아 원정은 켈트 문화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후 게르만 민족의 유럽 지배는 이 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북부에 있는 갈라시아와 포르투 지역은 로마인의 지배 이전에 켈트 문화의 독자적인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경부터는 로마 교회의 적극적인 포교로 이 지역들의 켈트 사회는 기독교화되었고, 그 결과 독자적인 켈트식 카톨릭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켈트 문화는 후에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 건너가 명맥을 유지했고 11세기부터 유럽 각지에 전파된 로마네스크 미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켈트인은 유럽의 역사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켈트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면, 도대체 켈트인의 유적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고전 문화는 견고한 '돌의 문화'로, 자신들의 문화를 돌로 남겨놓았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켈트의 문화는 이러한 정형화된 문화와는 달랐다. 자연을 숭배했던 켈트인들은 '나무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축 유산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었는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19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 지역, 현재의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의 스페인 지역 및 아스투리아스 서부 및 레온 북부 지역에서 동기 시대 B.C 9 세기경의 끝에서 로마 문화가 창궐한 B.C 1 세기 경에 포함될 때까지 존재했던 켈트 문화인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가 그것이다. 특히 산타 테클라산에 있는 갈리시아 요새에서 발굴(發掘)된 켈트 상징물인 트리스켈(Triskel)이 다수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는 다수의 고인돌과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포르투 시내 곳곳의 서점에는 이러한 포르투갈 고대 유적에 대한 서책이 판매되고 있고 포르투 역사박물관에도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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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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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16년 만에 승인하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 약칭 '두카지니(Dukagjini)'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ë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얼마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š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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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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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 멕시코 혁명(Revolución mexicana)
    20세기 초까지 절대적으로 멕시코를 지배했던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íaz, 1830~1915)는 1860년대 프랑스 제2 제국인 나폴레옹 3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당시 프랑스는 멕시코 제2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앉혔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즈는 멕시코 제국을 제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의 절대 권력 독재 통치 시기라고 한다. 물론 중간에 후안 네포무세노 멘데스(Juan Nepomuceno Méndez, 1820~1894)가 두 달 동안 대통령 직위에 있었으나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고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Manuel González Flores, 1833~1893) 가 1880~1884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마누엘은 디아즈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행했다. 디아즈 정권은 산업을 진흥시키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으며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외자 도입으로 인해 철도 부설이 진행되는 등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면 빈부격차는 극도로 확대되었다. 디아즈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 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원래부터 토지 소유라는 개념이 없었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즈는 '토지제도의 근대화(Modernización del sistema territorial)'라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이후 외국 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상당수의 멕시코 농민의 대다수가 토지를 잃고 '페옹(Feong)'이라 불린 농업 노동자들로 전락했다. 이처럼 돈을 버는 자들은 대장원을 소유한 '아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 뿐이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즈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거나 잇달아 선거로 인한 투표들을 조작하는 등 멕시코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치를 펼쳐나갔다. 토지를 되찾기 위한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디아즈에 저항했으나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시프리아노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Cipriano Ricardo Flores Magón), 엔리케 플로레스 마곤(Enrique Flores Magón), 가스파르 헤수스 멜초르 플로레스 마곤(Gaspar Jesús Melchor Flores Magón) 등 이른바 '마곤 형제'는 아나코-코뮤니즘(Anarco-Communism)을 내세워 멕시코 농민들을 선동했고 이 형제들의 사상을 마곤주의(Magonismo)라 불렀다. 1900년 반(反) 디아즈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출간했지만 디아즈 정권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1905년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즈가 권력을 쥐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멕시코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1906년 미국 자본의 소유였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다. 디아즈의 후원을 받은 광산 회사 측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는 군인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발포해 죽이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령에도 권력 욕심을 놓지 못한 디아즈는 191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시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1857~1930)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즈와 대선에서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신흥 대농장주이자 청년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1873~1913)가 등장했다. 마데로의 지지세는 34년째 지속된 디아즈 독재 정권에 질린 멕시코 여론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에 디아즈 정권은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야당 대표를 탄압한 디아즈는 자신이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 대선은 누가 봐도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자 석방된 마데로는 미국 텍사스로 망명하여 10월 25일에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했고 이에 따라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멕시코 북부 도시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은 무력에 의한 디아즈 정권의 타도를 천명한 무력 투쟁 선언이었다. 미국에 있던 마데로의 주위에는 같은 목표를 가진 멕시코인 동지들이 집결했는데 그 사이 멕시코 국내에서는 마데로에게 동조하는 운동이 차례로 발생하게 된다. 11월 18일에 마데로의 동지였던 아길레스 세르당(Aguiles Cerdán)이 푸에블라 시에 있던 저택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가 발각되면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멕시코 시티의 남쪽 모렐로스 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북부 일대에서는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Francisco Pancho Villa, 1878~1923), 파스쿠알 오로스코 바스케스(Pascual Orozco Vazquez, 1882~1915), 베누스티아노 카란자(Venustiano Carranza, 1859~1920),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 1880~1928) 등이 차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디아즈 대통령의 나이는 80세를 넘겼기 때문에 정치적인 수완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디아즈 대통령의 측근이 그의 정치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멕시코 각지의 수많은 세력들은 '디아즈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마데로를 중심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부유 계층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이는 디아즈를 축출한 후에도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미국의 국제적인 파워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구스타보 아돌포 마데로 곤살레스(Gustavo Adolfo Madero González, 1875~1913)를 미국에 보내 상, 하원에서 로비 활동을 펼치게 했다. 이를 통해 '트러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사업가 찰스 란네트 플린트(Charles Ranlett Flint, 1850~1934) 등의 재벌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의 혁명가들에게 불리하지 못하게 법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북부 지역에서 메히칼리, 시우다드 후아레스, 치와와 등이 혁명군에게 함락되었으며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쿠아우틀라를 점령했다. 이처럼 혁명군의 세력이 넓어질수록 그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혁명군들은 디아즈 축출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하나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마곤주의자들은 메히칼리와 티후아나를 포함하는 코뮌 자치정부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반 디아즈 정권을 창립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가장 하층민이 세운 이 자치정부는 디아즈가 물러난 이후 마데로에 의해 진압된다. 혁명을 진압할 수 없었던 디아즈는 자신이 권좌에서 축출로 인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고 결국 마데로와 협상을 벌였다. 그동안 디아즈의 평화(Pax Porfiriato)라는 영광에 안주해 왔던 디아즈 정권에게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하는 혁명군을 진압할 수 있는 군사적인 준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부군인 연방군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이긴 무적의 군대라는 명성의 이면에 군대 조직에서 장교들의 무능과 부패, 군 지휘부의 노쇠화 등 여러 병폐들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허점들은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주요 전투에서 정부군이 잇달아 혁명군에게 패배하고 혁명군이 농촌 지방의 대부분과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자 지방 군벌, 소농민, 상인, 관료층, 전문 지식인, 자본가 계층이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이 점차 혁명군에 우호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1년 5월 21일 체결된 시우다드 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으로 인해 5월 25일 디아즈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하게 된다. 이처럼 디아즈가 퇴진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 1863~1939)가 5개월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선거에서 마데로가 압도적인 표차를 당선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디아즈의 축출은 멕시코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으로 중남미 최초의 대규모 혁명으로 남미 국가들의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의 저항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티브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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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8
  • 독일 언론의 과도한 김민재 흔들기를 보며 이 또한 독일 내에서 만연해진 인종차별의 일환일까?
    독일 언론에서 계속 김민재를 흔들고 있다. 독일 대표팀 출신의 안토니오 뤼디거와 스왑딜이나 인터 밀란 이적설 등 루머가 계속 나오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부진에 대한 과도한 비난 몰이에 이어 이제는 토마스 투헬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이나 스페인도 이처럼 과도하게 선수를 흔들지 않는다. 시즌 내내 김민재의 기량에 의구심을 제기해온 독일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혹평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 빌트, TZ ,키커 등은 하이덴하임 전 이후 일제히 김민재에게 출전 선수 중 최저 평점인 6점을 부여했다. 특히 키커는 지난 7일 아예 김민재에 대한 특집 기사까지 내면서 작심하여 비판했다. 김민재가 유럽 진출 이후 터키와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했던 지난 2년 동안의 활약에 비하여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김민재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한 독일 언론의 편파적인 태도라는 것에 있다. 김민재는 뮌헨 입단 이후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백업 수비수가 부족한 팀 내 사정에 따라 '혹사' 논란이 나올 만큼 전반기 내내 거의 모든 경기에서 휴식없이 풀타임을 소화했다. 김민재는 비시즌 기초군사훈련 일정을 소화하느라 쉴 틈이 없었고, 소속팀 일정 중에 국가대표팀 소집을 위하여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뮌헨은 올시즌 무관 위기에 몰리며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칼컵에서는 이미 조기에 탈락했고, 리그에서는 레버쿠젠의 우승이 거의 확정적이라 2위 수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유일한 희망은 8강까지 진출한 유럽 챔피언스리그만이 남았는데 여기서도 경기력이 좋지 못해 우승후보들과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이는 김민재만의 부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약화된 선수단 스쿼드와 구단의 부실한 선수 영입, 투헬 감독의 전술 운용 문제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분데스리가에 처음 입성한 김민재의 헌신이나 공헌도는 철저히 무시하고, 몇몇 부진했던 장면만 부각시켜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이유는 유색 인종에 대한 독일의 혹독한 평가와 인종차별성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을 구성하고 있는 총 인구의 4분의 1은 이민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로 되어 있다. 내부 집단을 구성하는 토착 독일인들과 외부 집단을 구성하는 외국인을 포함한 이민자들 사이에는 민족, 문화, 종교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내부집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차별화 생성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이는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의 다른 점,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인식 속에 어느 새 고정관념이 자리하게 되는 일명 고착화(Adhesion)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차별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나치 시기와 비교할 때 많이 완화되었지만 현재에도 독일에서는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났던 상황, 이 모든 잘못된 형태를 자국의 문제에서 찾지 않고 외부로 돌려 그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다. 특히 독일처럼 냉철하고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국민성과 시스템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특성 가진 국가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원리원칙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은 외부인을 매우 경멸한다. 뭔가 자기만의 선을 그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우 미개하다 여기며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그저 무늬만 존재한다. 필자는 학술적인 부분에서 학술회의, 혹은 연구차 독일을 많이 왕래했다. 유럽에서 주로 행해지는 국제 학술회의, EU권 내 학술회의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독일에 많은 친구와 학자들과 사귀고 소통했다. 지금도 소통하는 독일 친구들도 많다. 그러면서 이 친구들의 행동, 민족성 등을 하나하나 겪어보니 사람으로써 혹은 친구로써 배울 점이 많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인간답다 여겨진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명정대, 원리원칙 등등 온갖 좋은 수식어는 다 갖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건 인정하지만 이들에게서 인간적인 정(情)은 느껴진적이 없었다. 속칭 말해서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그어 놓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의 측면에서 그 범주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지능이 낮은 인종으로 취급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인종차별이 안 날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문화와의 소통은 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상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원칙에 벗어난다면 이 또한 용납을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필자에게 물어본다. 일본은 여태까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데 독일은 사과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독일이 훨씬 개념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을 보면 개개인적으로 이중적인 면이 많다. 고집스러울 정도 억지스러운 면도 있으며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 경제력 등으로 볼 때 이들에게 사과를 하더라도 매우 표면적이다. 필자가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정치인들이 꽃다발 놓고 추모하고 있는 장면을 본적이 있는데 진심으로 추모하는 사람은 몇 없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숙인 고개 사이에서 살짝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한 바 있어 소름이 끼친적이 있었다. 그저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표면적으로 사과는 하지만 과연 그 사과가 진심인지는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6~70년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와서 일했을 때, 이들도 대놓고 언론에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종차별을 상당히 경험했다. 독일인 동료들은 키 작고 힘 약한 동양인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파독 광부들은 몇 차례 불법파업을 하면서 독일인과 동등한 임금, 체구에 맞는 노동분야, 외국인 혐오 금지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착취적이고 불공평한 노동 관행과 제도에 맞서 많은 광부들은 정기적으로 유급병가제도를 역으로 이용했다. 결국 1979·1980년 파독 광부들은 집단적 인권운동에서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의 해체를 요구해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켰고, 마지막까지 광부로서 일하던 800여명은 자유로운 직장 선택과 체류 허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2022년 6월부터 11월까지 독일 통합 및 이주 연구 센터 DeZIM는 독일 내 21,000명 이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독일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을 조사했다고 한다.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인종차별을 가장 많이 경험한 인종은 흑인으로 흑인의 54%가 인종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 비율로는 흑인 여성의 19%가 반복적인 위협이나 괴롭힘과 같은 인종차별을 경험한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남성은 18%로 조사되었다. 또한 지속해서 미묘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한 흑인 남성은 37%, 여성은 20%였으며 백인에 비해 남성은 4배, 여성은 5배 더 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 차별을 당하는 이유에는 연령, 장애 및 만성질환 여부, 언어 능력 미숙, 독일식 이름이 아닌 경우, 종교, 피부색, 성별, 성적 취향, 계층, 소득 등 다양하다. 2021년 6월 9일 35세 대한민국 남성이 베를린 지하철 역에서 4명의 신원 미상의 남성으로부터 외국인 혐오 및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또는 혐오성 범죄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공지까지 내려왔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김민재에 대한 독일 언론의 혹독한 평가는 어쩌고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자국 선수들보다 잘 하는 한국 선수는 차범근 하나로 족하며 독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동양인 선수가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투헬 감독이 뮌헨을 떠날 때, 김민재 선수 또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함께 김민재 선수가 뛴다면 필자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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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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