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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축구,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서울=2025.06.07.]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시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2026년 북중미에서 열릴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 11회 연속 진출하며,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의 쾌거를 달성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6일(현지시간) 이라크 바스라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 최종예선 B조 9차전에서 이라크를 2-0으로 완파했다. 이 승리로 승점 19점(5승 4무)을 기록한 한국은 남은 1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조 2위 이내를 확정 지으며 본선 직행 티켓을 확보했다. 이날 경기에서는 후반 18분 김진규(전북 현대)가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기록했고, 이어 후반 37분 전진우(전북)의 크로스를 오현규(헹크)가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세 선수 모두 후반 교체 투입된 ‘조커’ 카드였고, 홍 감독의 전술적 선택이 적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본선 무대를 밟고 있다. 통산 12번째 본선 진출이자, 연속 진출 횟수로는 브라질(22회), 독일(18회), 이탈리아·아르헨티나(14회), 스페인(12회)에 이어 전 세계 6번째다.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잔니 인판티노 회장도 이 위업에 대해 직접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인판티노 회장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고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룬 것은 매우 인상적인 성과”라며, “선수, 감독, 코치진, 그리고 열정적인 한국 팬 모두의 집합적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6일 오후 자신의 SNS를 통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공식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멕시코 대회부터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본선 무대를 밟은 우리 선수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며 “아시아 축구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지켜낸 성과”라고 강조했다. 또한 대통령은 “축구대표팀이 이룬 쾌거가 어려운 시기에 국민께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며, “남은 준비 기간 동안 부상 없이 잘 준비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대표팀은 경기 다음 날인 6일 오후 전세기를 통해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했다. 입국장에는 수백 명의 팬들이 모여 선수들과 코치진을 환영했고,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홍명보 감독과 주장 손흥민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며 격려했다. 홍 감독은 귀국 인터뷰에서 “지금 있는 멤버로 수비수나 공격수 모두 충분히 젊은 선수들로 스쿼드를 꾸릴 수 있다”며, “남은 쿠웨이트전에서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본선을 대비한 장기적 구상과 전력 테스트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대표팀은 오는 1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예선 마지막 경기인 쿠웨이트전을 치른 뒤, 본격적인 본선 대비 체제로 돌입한다. 8일 오후 2시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 다시 모여 훈련을 재개할 예정이며, 부상 중인 손흥민의 출전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홍명보 감독은 “이번 본선은 48개국 체제로 확대되었지만, 경쟁 또한 그만큼 치열해졌다. 조별리그 이후 32강 토너먼트를 통과해야 한다”며 “선수단 구성부터 체력, 전술, 멘탈까지 모두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축구가 이룬 역사적 대기록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본선에서의 경쟁력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일부 팬들은 홍명보 감독의 전술 유연성 부족을 지적하며, “강호들과의 본선 무대에서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의 실패를 딛고 다시 대표팀을 이끄는 데 성공했다. 이번이 그의 두 번째 월드컵 본선 지휘이자, 명예 회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 간 쌓아온 시스템, 선수들의 희생, 팬들의 끊임없는 지지의 결정체다. 이제 대한민국 축구는 또 하나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 대표팀이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을지,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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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7
  • 손흥민,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 품고 귀국…“이제 나는 레전드”
    [서울=2025.05.23.] 손흥민의 첫 메이저 우승, 기다림과 헌신의 이름으로 “오늘만큼은 나도 토트넘의 레전드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22일,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손흥민(33·토트넘 홋스퍼)은 트로피를 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는 15년 유럽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그가 처음으로 맛본 우승의 감격이자, 수많은 좌절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손흥민이 이끄는 토트넘은 2024-25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는 브레넌 존슨의 전반 42분 결승골에 힘입은 토트넘의 완승으로 끝났다. 손흥민은 후반 22분 히샬리송과 교체 투입돼 그라운드를 누볐다. 스프린트 대신 수비 가담과 조직력으로 팀의 리드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토트넘은 이번 시즌 잦은 부상과 부진한 리그 성적(17위)으로 많은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앙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리그보다 유로파리그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고, 그 전략이 적중했다. 손흥민 역시 시즌 중반 발 부상으로 6경기를 결장했으나, 결승전을 앞두고 몸 상태를 끌어올리며 팀을 위해 끝까지 준비해왔다. 손흥민은 201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2019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리버풀에 패했고, 리그컵 두 차례 결승에서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FIFA 푸스카스상, 발롱도르 후보 등 화려한 개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우승 없는 스타'라는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우승 직후 손흥민은 기내에서도 트로피를 안고 귀국했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태극기를 두른 채 환한 미소로 메달을 목에 건 손흥민의 모습은 전 세계 축구팬의 마음을 울렸다. 우승 직후 공개된 영상에서 그는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트로피를 들다가 밀쳐져 생긴 상처”라며 웃음을 지었다. 또한 결승전 직후 손흥민은 관중석에 있던 아버지 손웅정 씨와 뜨겁게 포옹하며 오열했다. 축구인생 전 과정을 함께한 아버지와의 이 장면은 '인내와 헌신의 결실'이란 점에서 큰 울림을 안겼다. 손흥민 이전에도 유럽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한국 선수는 있었다. 차범근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UEFA컵을 두 차례 들어올렸고,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경험이 있다. 하지만 결승전 엔트리에 들지 못한 박지성과 달리, 손흥민은 주장으로 경기에 직접 나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 주장이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을 이끈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또한 이날 우승 세리머니에서 UEFA가 준비한 메달이 부족해 손흥민을 비롯한 몇몇 주축 선수들이 수여받지 못하는 해프닝이 발생했으나, 곧 라커룸에서 메달을 전달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손흥민은 이 장면에서도 특유의 여유와 유머로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토트넘은 5월 26일 프리미어리그 최종전 브라이턴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미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이 경기는 시즌을 마무리하는 축제로 치러질 전망이다. 토트넘 구단은 에드먼턴 그린부터 스타디움까지 우승 퍼레이드를 준비 중이며, 손흥민은 팬들과 기쁨을 나눌 예정이다. 손흥민의 이번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선 상징적 사건이다. '스타는 떠났지만 캡틴은 남았다'는 말처럼, 그는 수많은 이적 제안을 마다하고 토트넘에 남아 헌신했고, 결국 레전드로 기록됐다. 눈앞의 영광보다 팀과의 동행을 택한 그의 선택은 오늘날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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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칼럼 검색결과

  • 무슬림 이민자들로 인한 포르투갈의 사회문제와 현 미국 LA 폭동 및 사회문제의 유사한 현실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로 건너온 흑인 무슬림들이 포르투갈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무전취식에 욕설에 더럽게 공공시설을 쓰는가하면 관광객들의 돈을 뜯고 떼거지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닌다. 그리고 마리화나 같은 마약도 몰래 팔고 있다. 대개 불법체류자가 많아 범죄가 발생하면 포르투갈 경찰도 손쓰기 힘들다고 한다. 불법체류자의 경우 지문이 등록되있는게 아니니 잡기 쉽지 않다. 게다가 나이지리아 이슬람 무장세력 보코하람이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포르투갈을 선택했다는 설이 나오면서 당국도 긴장하는 상황에 있다. 비자를 강화하고 아프리카 불법체류자 단속하면 인도주의나 인권을 중시하는 인권주의자들이 포진해 있으니 그것도 골치 아픈 문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대개 EU에 포진되어 있고 이자들은 EU의 진정한 적폐다. 이런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면 이들 인권단체들은 떼지어 들고 일어난다. 그러다가 해당 국가에 범죄가 발생하면 결코 범죄피해자를 옹호하고 규탄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법체류자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여 동정론을 이끌어내 가해자들인 불체자들을 변호하기 바쁘다. 그렇게까지 비난을 받으며 가해자인 불체자들을 옹호하는 이유는 다른거 없다. 결국 돈 때문이다. 이들은 EU에서 매년 수억 유로씩 예산을 지원받으며 아프리카 난민, 중동 이슬람 난민들을 돕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들을 살기 좋은 유럽에 정착시키고 온갖 혜택을 주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불체자들의 행위를 배격하고 피해자를 옹호한다면 자신들이 세웠던 명분이 무너지고 EU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체자들을 옹호해야 하는 것이다. EU에서 예산이 수억 유로씩 나와야 불체자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횡령도 하고 인권단체의 명분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대개 유럽에서 돈벌려고 들어오는 타국 불체자들 중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스페인-포르투갈로 입국하는 흑인들이 많다. 질 좋고 유럽 사회에 도움이 되는 흑인보다 질 안좋고 남 괴롭히는걸 좋아하는 흑인들이 한몫 챙길려고 유럽에 오는 것이다. 고로 그런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그런 질 떨어지는 흑인들을 EU 소속 인권단체가 불쌍하다며 안아주자하니 당연히 그런 편견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슬람을 연구하고 전공한 학자로써 그에 대한 입장을 말하자면 7세기부터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기독교처럼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여태까지 그와 같은 이슬람 개혁을 외치는 이맘들이 있었지만 대개 최후가 좋지 않았고 꾸란과 하디스, 샤리아에 기초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라도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움직임을 가져야 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 아랍하면 테러라는 문구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흑인 무슬림들 하면 불법체류자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가 세계 종교계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이슬람교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간 흐르면서 진보적인 방식과 형식을 추가하며 변화해왔고 원칙은 유지하되 전 세계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보편적으로 접근 할 수 있도록 변화에 성공한 종교가 됐지만 이슬람은 7~8세기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성향은 종교의 순수성을 떠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리잡았다는 것에서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슬람도 이제 변해야 한다. 지금은 칼리프 시대가 아니고 술탄의 지배하에 모든 것이 용인되는 종정일치(宗政一治)의 7~8세기가 아니라 21세기 세계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반대 지역인 미국에서는 내전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한 이후부터, 전시상황에서 적국의 위험 인물들을 추방할 수 있다는 외적법(Alien Enemies Act)을 근거로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미국이 전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같은 외적법은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에도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LA와 같은 폭동이 잘 없다. 왜 그럴까? 러시아는 애초부터 이민을 선별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차도 까다롭다. 첫째, 임시 또는 영주권을 취득하려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매우 우호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계 또한 철저한 심사를 거친다. 취업, 학업, 러시아 친척 또는 혈통, 투자 또는 부동산 구매 등의 사유로 이민이 허가될 수 있다. 그리고 임시 거주 허가를 받은 후, 1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둘째, 영주 허가를 받은 후 5년이 지나면 러시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셋째, 러시아어 원어민, 러시아 시민의 배우자, 고학력 전문가, 러시아에 대한 투자자 등은 1~3년 거주 후,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다 했다. 다만 난민의 경우, 최소 5년은 이민청에서 철저히 관리, 감독한 다음 소정의 심사과정을 통해 통과하면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난민이나 이주민들, 불법체류자 등에 대해 매우 까다롭게 관리해왔다. 미국이 LA 폭동과 같은 사태를 맞이한 것은 민주당 정권 때부터 이를 방만하게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권주의자들이 난민과 이주민들, 불법체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답시고, 이들에게도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를 적용해달라 주장하면서 이것이 적극 법에 반영되었다. 그런 상황에 이제 와서 불법 이민 단속과 대규모 추방을 공언하여 실행하니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애초부터 이 정책은 연방 정부가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하다보니 이를 억제하는 측면에서 반발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 사유로 허용되었던 임시 보호 조치들을 일괄 폐기했고 미국 국토안보부(DHS)와 산하 기관인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에서 대규모 불법 이민자 단속을 실시하니 이민자 사회에서의 반발과 그에 따른 저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LA 카운티 전역에서는 시위가 확산되었는데 이같은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일 가능성이 있다. LA 뿐 아니라 미국 연방 도시들 곳곳에서 이와 같은 사태가 터질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이다. LA 현지에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개빈 뉴섬, 캐런 배스 등 민주당 및 캘리포니아 현지 정치인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이민자 단속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6월 7일 저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00명의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로스앤젤레스에 배치하라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이에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자국민에게 군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은 광기"라며 반발했다. 이와 같은 부분들로 볼 때, 민주당을 지지했던 주와 도시들에도 유사한 반발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강제 진압이 거세지게 되면 최악의 경우, 시민들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다. 총기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은 시민들이 무장하며 저항하게 되면 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다. 이쯤되면 러시아에서 3년 전, 코로나에 걸려 세상을 떠난 자유민주당의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 1946~2022)가 미국이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서, 선거는 없을 것이고, 트럼프가 미국의 마지막 연방 정부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이상하게 조금씩 맞아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 폭동은 사실 다문화 정책으로 혼혈화 되어 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닥칠 수 있는 위험이다. 이게 비단 미국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원칙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미국의 현 상황을 봤을 때, 마치 로마 제국 말기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미국에 대한 가짜뉴스에만 젖어 "역시 천조국"이라며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미국의 어두운 면과 지금과 같은 최악의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똑똑히 목도해야 한다. 세상 어느 제국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속성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대항해 시대 당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발견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도로 진출하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두 국가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그 경쟁이 심화되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라는 도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양에서 새로 발견되었거나 발견된 땅을 어느 군주에게 귀속시킬지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교황에게 승인 받은 상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라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고 통일하여, 이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콜롬부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콜롬부스가 발견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위도 상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포르투갈 양측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의 중재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사이의 가운데 지역인 대서양 한 가운데 경선을 기준선으로,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귀속은 서쪽이 스페인으로, 동쪽의 땅은 모두 포르투갈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제2차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전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북아메리카 카리브와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페인의 영토가 되고 브라질 혼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다. 지금 브라질의 해안가 지역은 기준선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준선 동쪽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까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해서 서유럽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긴 했지만 동쪽에는 무슨 국가들이 있는지에 거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 지구를 양분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교황이 그냥 둘이 정쟁을 벌이자 말리고자 했던 하나의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조약을 맺는 과정 중에 당초 교황이 제시한 카보베르데 기준 서쪽 100리그 경선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주장으로 370리그 경선으로 더 밀어낸 것과 관련해 콜롬부스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밀어 붙였다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공식 기록상으로 브라질은 1500년에 발견되었으나,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대서양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갔다는 점과 발견 당시 항해 기록이나 이를 보고 받은 포르투갈 왕실이나 새로운 땅을 발견해 놓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다. 그나마 이러한 진실을 밝혀줄 수 있었을 기밀 항해 기록은 리스본 테주 강변에 위치하던 왕궁의 문서 보관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1755년 11월 1일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연이은 지진 해일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태다. 당초 조약대로라면 스페인 측이 보장받은 부분이 훨씬 컸는데도 포르투갈은 후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을 차지하였는데 아마존 강 하구가 조약 기준선 기준으로 포르투갈 관할이었던 덕택이다. 당시 유럽인 탐험가들은 배를 타고 다녔고 내륙은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하필 안데스 산맥에 막혀 거의 아마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바다같이 넓은 아마존 강의 하구를 확보한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나중에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아마존 상류와 지류를 거슬러 올라 항해하여 아마조니아 곳곳에 깃발을 꽂고 포르투갈어를 이식하여 개척하면서 결국 지금의 거대한 브라질 영토가 완성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완성된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 된다. 이에 기아나 지역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남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반을 차지한 셈이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신대륙 전체로 본다면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및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스페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분이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등 서부 지역,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및 앨라배마 연안 지역 등은 모두 원래 스페인의 영토였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도 원래는 스페인이 발견해 차지했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후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1526), 미겔 로페스 레가스피(Miguel Lopez Legazpi, 1502~1572) 등이 동남아시아에도 필리핀 도독령을 설치했다. 이에 태평양 측도 문제가 되어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도 동경 142도까지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 선에서는 서쪽이 포르투갈, 동쪽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 차지가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되어 조약의 양 당사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속령의 확보에 나서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들 나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기들끼리 맺은 조약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종교 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조약의 권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약대로라면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이 세계의 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몇 항 몇 조에 있는지 보여주라며 비아냥거렸고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이 조약을 근거로 19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현재는 먼로 독트린을 통하여 촉발된 아메리카 패권 성향이나,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장 중남미 지역의 쿠바만 하더라도 스페인이 19세기까지 주권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3위가 스페인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언어가 식민 통치 시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카톨릭과 함께 중남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 축구로 유명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최우선 진출 대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부 프로축구 리그인 라 리가, 프리메라 리가일 정도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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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09
  • 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 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 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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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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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포토뉴스 검색결과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대항해 시대 당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발견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도로 진출하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두 국가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그 경쟁이 심화되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라는 도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양에서 새로 발견되었거나 발견된 땅을 어느 군주에게 귀속시킬지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교황에게 승인 받은 상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라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고 통일하여, 이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콜롬부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콜롬부스가 발견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위도 상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포르투갈 양측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의 중재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사이의 가운데 지역인 대서양 한 가운데 경선을 기준선으로,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귀속은 서쪽이 스페인으로, 동쪽의 땅은 모두 포르투갈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제2차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전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북아메리카 카리브와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페인의 영토가 되고 브라질 혼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다. 지금 브라질의 해안가 지역은 기준선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준선 동쪽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까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해서 서유럽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긴 했지만 동쪽에는 무슨 국가들이 있는지에 거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 지구를 양분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교황이 그냥 둘이 정쟁을 벌이자 말리고자 했던 하나의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조약을 맺는 과정 중에 당초 교황이 제시한 카보베르데 기준 서쪽 100리그 경선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주장으로 370리그 경선으로 더 밀어낸 것과 관련해 콜롬부스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밀어 붙였다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공식 기록상으로 브라질은 1500년에 발견되었으나,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대서양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갔다는 점과 발견 당시 항해 기록이나 이를 보고 받은 포르투갈 왕실이나 새로운 땅을 발견해 놓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다. 그나마 이러한 진실을 밝혀줄 수 있었을 기밀 항해 기록은 리스본 테주 강변에 위치하던 왕궁의 문서 보관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1755년 11월 1일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연이은 지진 해일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태다. 당초 조약대로라면 스페인 측이 보장받은 부분이 훨씬 컸는데도 포르투갈은 후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을 차지하였는데 아마존 강 하구가 조약 기준선 기준으로 포르투갈 관할이었던 덕택이다. 당시 유럽인 탐험가들은 배를 타고 다녔고 내륙은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하필 안데스 산맥에 막혀 거의 아마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바다같이 넓은 아마존 강의 하구를 확보한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나중에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아마존 상류와 지류를 거슬러 올라 항해하여 아마조니아 곳곳에 깃발을 꽂고 포르투갈어를 이식하여 개척하면서 결국 지금의 거대한 브라질 영토가 완성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완성된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 된다. 이에 기아나 지역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남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반을 차지한 셈이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신대륙 전체로 본다면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및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스페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분이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등 서부 지역,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및 앨라배마 연안 지역 등은 모두 원래 스페인의 영토였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도 원래는 스페인이 발견해 차지했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후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1526), 미겔 로페스 레가스피(Miguel Lopez Legazpi, 1502~1572) 등이 동남아시아에도 필리핀 도독령을 설치했다. 이에 태평양 측도 문제가 되어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도 동경 142도까지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 선에서는 서쪽이 포르투갈, 동쪽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 차지가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되어 조약의 양 당사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속령의 확보에 나서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들 나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기들끼리 맺은 조약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종교 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조약의 권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약대로라면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이 세계의 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몇 항 몇 조에 있는지 보여주라며 비아냥거렸고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이 조약을 근거로 19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현재는 먼로 독트린을 통하여 촉발된 아메리카 패권 성향이나,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장 중남미 지역의 쿠바만 하더라도 스페인이 19세기까지 주권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3위가 스페인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언어가 식민 통치 시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카톨릭과 함께 중남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 축구로 유명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최우선 진출 대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부 프로축구 리그인 라 리가, 프리메라 리가일 정도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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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 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 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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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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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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