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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이란 핵시설 정밀 타격... 호르무즈 해협 위기 고조
    [서울=2025.06.23.] 미국, 이란 핵시설 전격 타격… 중동 정세 긴장 최고조 2025년 6월 21일(현지시간), 미국이 이란 본토 핵시설 3곳에 대한 정밀 폭격을 단행하며 중동 정세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미드나잇 해머(Midnight Hammer)’로 명명된 이번 작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획됐으며, 미군은 B-2 스텔스 폭격기 7대를 투입해 이란 포르도, 나탄즈, 이스파한의 핵시설을 정밀 타격했다. 작전은 이란 현지 시각으로 22일 새벽 2시10분에 시작되어 25분 만에 종료됐다. 미국 합참은 “이번 작전은 전례 없는 기습 공격으로, 이란 방공망이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특히 벙커버스터 GBU-57이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총 14발이 투하되어 핵시설을 관통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격 직후 “포르도는 끝장났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게시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공습은 이스라엘의 선제 타격 이후 9일 만에 미국이 본격 개입한 첫 사례로,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이 이란 본토를 직접 타격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은 공격의 목적이 ‘정권 교체’가 아니라 ‘핵 개발 억제’라고 설명했으나, 이란은 이를 “국제법에 대한 전면적 위반”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이란은 수시간 만에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향해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호람샤르-4를 발사하며 보복에 나섰다. 미사일 일부는 이스라엘 수도권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 떨어져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으며, 최소 86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벤구리온 국제공항과 군사기지, 지휘통제소를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이란은 보복 수위를 한층 높여, 22일 자국 의회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최종 결정은 최고국가안보회의에 맡겨졌지만, 세계 석유 수송량의 20% 이상이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봉쇄한다는 발언만으로도 국제유가는 130달러를 넘볼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란은 미국을 향해 “중동 내 모든 미군과 미국 시민이 정당한 표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후티 반군과 하마스 등 친이란 무장세력도 보복에 동참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라크, 시리아, UAE 등지에 주둔 중인 4만여 명의 미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의 목표는 평화이며, 이란은 협상의 기회를 가졌다”며 재차 외교적 해법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이란이 또다시 도발한다면 훨씬 더 강력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며 경고했다. 미국 국방부는 “이번 작전은 이란 군이 아닌 핵시설만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란 정권의 교체는 목표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공격이 단기적인 성과를 넘어서 이란 정권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핵 기술과 인적 자원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핵무기 개발이 재개될 수 있으며, 이란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중동에서 발생한 이번 군사 충돌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안보 질서를 뒤흔드는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수입하는 원유의 9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만큼, 봉쇄가 현실화될 경우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세계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과 이란의 다음 대응을 주시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확전으로 이어질지, 혹은 협상의 계기가 될지는 아직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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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3

칼럼 검색결과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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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1
  • 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미국의 개입으로 불안정한 중동 정세
    이란과 이스라엘의 12일 전쟁은 미국이 이란을 직접 폭격했지만,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대응으로 가기 직전에 – 이란 의회를 의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종 승인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 트럼프 대통령의 휴전 선언으로 끝났다. 미국은 B2 스텔스 폭격기로 이란의 핵 시설과 농축 우라늄 시설이 있는 나탄즈, 포르도 및 이스파한을 정밀 타격했고, 이란은 이에 맞서 중동의 미군 기지 두 곳(카타르와 이라크)을 미사일로 공격했다. 이때 이란은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미국에 이를 통보했고 미군은 미리 대피했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란의 이 두 가지는 사실상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사용하면서 미국의 공격에 대해 결사 항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자랑했지만, 이란은 지상의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을 뿐이다. 특히 미국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시설 및 핵 시설이 있는 포르도와 나탄즈에 스텔스 폭격기를 동원해서 벙커버스터인 GBU-57를 12발을 투하했다. 이스파한은 미군 잠수함에서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24발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공습 이전에 이란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농축 우라늄을 빼돌렸거나 다른 기존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 시설로 옮겼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실제로 이란의 핵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면, 방사능은 분명히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은 과연 트럼프의 말대로 이번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란이 핵 개발을 한층 촉진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고, 테러 지원국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서방으로부터 각종 경제적 제재를 받고 있어서 이 기회에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라는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최근 이란은 이번 미국의 공격을 방관한 국제 원자력 기구를 압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습에서 트럼프는 미군이 더 이상 국제적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스스로 어겼으며, 미국 의회의 승인조차 거치지 않았다. 트럼프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이란의 공습에 대해 찬반으로 갈리면서 내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철저한 기만전술과 비밀작전으로 이스라엘의 요청을 받아들면서도 동시에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휴전으로 만들어야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보여주려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자신의 휴전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또다시 이란을 폭격하려고 하자, 곧바로 이스라엘 총리와 설전을 벌인 직후 이스라엘의 조종사들이 되돌아가는 상황도 있었다. 이것은 트럼프 자신의 결정에 반기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불과 12일간의 전쟁이었지만, 이란과 이스라엘도 각각 피해가 컸지만, 다행스럽게도 본격적인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피해에 차이가 있다면 이란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보다는 각종 인프라와 건물 및 군 기지 등에서 피해가 컸다. 민간인들은 방공호로 대피해서 인명피해가 비교적 적었지만, 이란에 의한 대량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뚫으면서 좁은 지역에 밀집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주로 핵 시설과 군 지휘부를 겨냥해서 이루어졌고, 방공호가 별로 없는 이란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초기에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미국 대 이란의 전쟁으로 진화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국이 서로 승리를 자화자찬하면서 공식적으로 휴전이 성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는 정치적 승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지율 상승으로 가자 전쟁에 집중하는 조건을 만들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부의 문제를 무마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휴전을 이끌어 내는 해결사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는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반미를 통해 이란 내부의 지지를 공고히 하면서 자신의 후계 구도를 만드는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승리들은 전쟁의 부수적 결과로 얻어진 것일 뿐, 중동의 평화를 실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서서히 드러나는 사실은 미국의 이번 이란 공격이 사실 트럼프의 말과 반대로 이란의 핵 사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이란의 핵 과학자들과 군 수뇌부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제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폭격으로 이란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는 명분만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따라 취약한 방공망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방공망을 구축할 것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드론과 탄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섞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란의 취약한 공군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충돌과정에서 상당히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중국의 전투기에 이란은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란이 이번 기회에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밀착하면서 중국의 신실크로드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면, 이른바 반미동맹으로 대표되는 듯이 보였던 CRINK에서 중국-이란이 가까워지고 러시아-북한이 밀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 공격이 향후 중동 문제를 실타래처럼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요청으로 인한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격이 이란의 핵 무기화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트럼프는 시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면서 이란도 미국의 요구대로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으면 또다시 폭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이란이 현재로서 미국과의 협상에 나올 가능성은 없다. 쉽게 말해 이란이 굳이 그래야 할 명분도 이익도 현재로서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위권을 어느 정도 갖추기 전에는 이란이 미국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대리전 역할을 그동안 수행했던 시아파 벨트가 이스라엘의 공격에 상당히 주춤하고 시리아가 내전으로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탓에, 이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축소될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후티가 버티고 있어서 이란으로서는 그래도 중동에서 영향력은 유지될 것이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당분간 자력갱생으로 버틸 것인데, 문제는 시리아가 과연 안정된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다. 현재로서는 장담하기 매우 어렵고 서서히 악명 높은 IS도 출현하고 있어서 매우 불투명하다. 이번 미국과 이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중동 전체에 복잡한 현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란의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으로 – 비록 약속 대련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 중동 국가들은 방공망 구축을 위해 미국과 서방에 손을 내밀 것이다. 중동에서 이란이 고립되고,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이 서로 이익에 의해 가까워진다고 해서 중동의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쩌면 민심과 한참 거리가 먼 정치적 야합으로 이스라엘에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이것이 중동의 화약고를 스스로 건드리는 꼴이 될 수 있음을 중동의 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동의 불안정한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치열한 샅바 싸움과 아직 끝나지 않은 가자전쟁 그리고 시리아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이것은 중동의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제대로 된 첫 단추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2
  • 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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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30
  • 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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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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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7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과 휴전으로 얻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득
    트럼프도 이번 휴전으로 얻는게 있었다. LA 폭동 같은 미국 국내의 뉴스가 중동 사태 때문에 죄다 묻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인들과 관심과 눈은 중동으로 향했다. 어쩌고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부추겨 이란을 선제 타격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럼 한동안 혼란스러워져 있던 미국의 민심은 저절로 이스라엘에 촉각이 모인다. 이렇게 네타냐후와 거래를 통해 미국 내 불량한 분위기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전쟁의 두려움을 확산시켜 아무도 폭동에 관심을 갖게 하고 물가 인상, 인플레, 유가 상승, 주가 하락까지 모든 것에 대해 간접 블러핑으로 그 불안 요소를 한 곳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은 매우 고도의 정치 전략이다. 모두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는 동안, 미국 각지에서 폭동들에 대해 관심이 줄었다. 어떠한 시위나 폭동이든, 관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들 만의 외침으로 전락해 아무 의미 없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전략은 폭동 진압에 있어 엄청 큰 유효타를 때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천재적인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터키의 에르도안이다. 본인에게 오는 모든 불만을 시기에 따라 적절히 외부로 타겟을 돌려 위기를 넘겼다. 경제 위기로 터키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HTS를 움직이고 지원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시리아 내정을 장악했다. 시리아의 북부의 땅은 현재 터키의 영토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터키 국민들은 다시금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이스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를 투옥시켜 전 국민의 분노를 샀을 때, 여태까지 사형 판결을 받고도 갇혀 있던 쿠르드족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과 거래해, 극단 쿠르드족인 PKK의 무장을 해산시켜 터키에 대한 테러리즘이 사라졌다고 공표해 이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마모울루의 투옥에 항거하여 저항하던 시위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타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에르도안의 정치력만큼은 세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창 열기를 뿜던 홍콩 민주화 시위는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집회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홍콩 민주화 시위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게다가 전 세계가 펜데믹에 주목하는 바람에 홍콩 시위는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결국 미국 폭동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폭동이 자연스럽게 해산되게 만들고 본인의 정치력을 극대화하는 이득을 챙겼다. 그냥 장사치 경제인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정치 능력 또한 많이 성장했다. 이제 트럼프는 매우 노련한 정치력까지 갖춘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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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6
  • 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 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B.C 900년에 사카 계통의 종족들이 점차 서진하면서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얌나야 문화를 영위하고 있던 민족들을 밀어내면서 또 다른 대이동의 시작이 이루어진 이후, 카프카스 지역에도 새로운 종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B.C 9세기 내내 유라시아 전 지역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극동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유라시아 땅에서 정주민에 대한, 또는 정주국가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B.C 822년 사카의 영향을 받은 서부 중앙아시아, 키질쿰 지역의 유목 부족들이 남하하여 힌두쿠시 지역을 공격했던 전쟁, B.C 824년에서 B.C 823년까지 역시 사카 종족의 대이동에 따른 영향으로 인더스 지역에서 농민들과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쟁을 벌인, 이른바 인더스 내전, B.C 821년 이란 북부에서 메디아 왕국과 또 다른 사카계 민족인 사르마트 족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메르브 전투, B.C 816년에서 B.C 815년까지 카스피 해 남부 타바리스탄의 도시들이 아시리아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B.C 858~B.C 824)의 이민족 탄압 정책에 항거해 아브작(Abzak)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와 싸운 ‘아브작 전쟁’, B.C 826년부터 B.C 823년까지 8차례나 벌어진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와의 전쟁 등 각종 약탈 전쟁도 이어 발생했다. 약탈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각종 학대와 학살로 단순화하여 서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이미 정주 국가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각 약탈을 빌미로 상대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주 전장지인 서부 이란 지역의 경우, B.C 815년 9월에 메디아와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흐샤트리타(Khshathrita)를 이어 메디아의 왕으로 즉위한 데이오케스(Deiokes)는 젤리라바트(Cəlilabad)에서 메디아와 사카의 일족인 파르시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파르시 족이 메디아 왕국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데이오케스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에 정착한 파르시 족들이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메디아 국왕에게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사카계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파르시와 달리 메디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엘람 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인 조로아스터교를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비록 파르시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메디아 시민들이 파르시와 통혼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메디아의 왕은 파르시 인을 후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메디아 왕국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보호자로서 수메르 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아시리아와 소수의 북방 메소포타미아 원주민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중동은 정주민과 유목민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약탈을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B.C 9세기 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져온 상업적인 부흥으로 고대 중동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면서 다량의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B.C 8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하여 중동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중동의 도시 인구의 4분의 3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바빌론의 경우 B.C 7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5,000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5,000명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수메르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매우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들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역청을 발라 석성을 쌓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늘어난 병력 수요를 고대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도시 국가 왕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후와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각 귀족들의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가난해져서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측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화제로 전소된 가옥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부유해지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이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와의 또 다른 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 도시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맞게 아시리아 제국처럼 단일 통치 국가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바래왔었다. 그래서 국왕들 일부가 아시리아와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각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B.C 810년 이후 생긴 파르시의 존재는 각 도시 국가의 야심들에 부응해 파르시 부족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아시리아에 속한 북부 수메르의 국왕들은 반대로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한 독립을 염원했고, 그와 같은 목표 의식들은 다른 수메르 도시 국가의 국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이미 데이오케스 왕 때 메디아와 하나였던 파르시는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사카, 스키타이 민족이라는 인연으로 이란 지역에서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메디아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파르시와 두 종족과 국가를 양쪽으로 상대하던 아시리아를 긴장시켰다. 특히 메디아 왕국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아시리아나 시리아와 같은 인근의 강대국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미 B.C 790년대 초에는 유프라테스 강, 자그로브 산맥, 지중해와 카스피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B.C 788년, 무려 3개의 혜성이 나타나면서 오리엔트 지역의 정치권에는 일종의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많은 점성가들이 이를 분석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종교는 종교일 뿐, 큰 사건, 한 시대가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B.C 7세기 말, 파르시 족은 중부 이란과 남부 이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180만㎢, 인구는 20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였다. 그 국가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아케메네스는 사트라프(Satraf)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는 그 출신이 불분명했지만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 중의 왕이 수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영토의 오리엔트에서 북적대며 거주하던, 200만의 인구인 수메르,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는 적극적으로 강병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의 엘람과 북쪽의 메디아 왕국을 병합해야 했다. 이는 남쪽의 엘람을 정벌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북쪽인 메디아 왕국과 협상을 통해 통합하여 이란 자체를 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아리아 인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다. 이는 한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치적인 논리에 있었다. 더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도 대군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립된 지 아직 반세기 정도 만에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매우 넓어지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도 닿지 않는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했다.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 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복속시킨 지 얼마 안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후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파르시 족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가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분리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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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5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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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2
  •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유사성 : 가짜 프로파간다 정보로 인한 심리전의 강화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니 마치 2022년 2월 24일부터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판박이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파간다로 인한 심리전이다. 푸틴 대통령이 말한적도 없는 3일만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똑같이 돌아간다.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내용들에 의하면 현재 테헤란 시내 ATM은 사이버 공격으로 전부 마비, 러시아 대사관은 철수 명령 내려와서 철수 중이라 한다. 근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우크라이나의 사이버 공격으로 ATM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이미 Swift 제재도 들어간 상황에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어 러시아의 국방부도 해커인 "어나니머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키예프에는 러시아군의 공습과 진입이 시작된다며 각 국 대사들과 체류 국민들을 대피시켰다. 당시 러시아군은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이르핀과 부차에 와 있었다. 그러니 키예프 소재 각국 대사관과 체류 국민들을 부랴부랴 대피시킨 것이고, 당시 부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프로파간다를 오지게 뿌려대서 부차는 러시아 학살 피해의 성지(聖地)로 둔갑했다. 그리고 판박이로 이번에는 미군의 공중급유기와 일부 항공기 40대가 서쪽으로 이동했고 20대가 이스라엘로 향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B2 폭격기 수대가 이란 핵시설 타격을 위해 초대형 벙커 버스터 연속 폭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과 키예프 인근 부차와 이르핀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의 위협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미국이 직접 B2로 폭격하려는 상황도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미군 폭격기로 러시아 돈바스와 모스크바를 직접 타격하려고 하는 모습을 전쟁 초창기 때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군 폭격기로 아무것도 못했다. 인도-태평양 미군 기지들에게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되어 경계 태세가 강화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대량으로 중동에 빠져나간 상태에서 중국군이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의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타이완 (대만)을 상대로 중국이 어떤 작전을 벌일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도련선을 통과하기도 했던 중국 함대가 어찌 나올지 미국조차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의식한다면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테헤란 영상들 보면 현재 소개 명령으로 고속도로가 장난이 아닌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공격이 심화될 때, 전쟁 초, 이웃 국경으로 고속도로와 기차가 넘어갔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난민이 되었다. 러시아 또한 부분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군대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고속도로의 정체가 장난 아니었다. 결국 이것도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란의 내부 시위도 이스라엘 폭격과 함께 격화되는 중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는 반전 시위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알렉세이 나발니를 중심으로 반전 시위를 했고 이 또한 격화되어 푸틴의 목숨이 오늘 내일한다고 프로파간다 방송을 한 것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와 우크라이나였다. 과거의 왕정시대의 자유로원던 이란의 모습 비디오들이 엄청 방류 중이라는데 러시아군이 패배하는 방송만 열심히 띄운 것도 미국이나 서구, 우크라이나의 합작품이다. 다들 그거보고 세계 2위의 군사력이 별거 아니라며 한국인들은 떠들어 러시아를 우습게 보았고 러시아의 무력이 쓰레기이자 그 무기들이 거품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냐고 떠들기도 했다. 탱크와 전차가 다 작살나서 없다고 보고한 것도 그들이고 냉장고의 부품을 뜯어 탱크와 전차에 사용했다고 했던 자들도 그들이며, 멀쩡히 있던 러시아의 마트가 사재기로 물건이 없어 난리라고 거짓 보도했던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인해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망할 줄 알았을 것이다. 푸틴이 참수되고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해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란-이스라엘 전쟁의 프로파간다에 또 다시 데자뷰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도 내일이면 러시아가 망할수도 있다고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결국 러시아의 절대적인 우세로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고,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네타냐후는 서구 유럽과 미국에게 도와 달라고 손 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역전이 되었는지 내일이면 이란이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란이 같을 수 없겠지만 이란은 자원부국에 8,5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동안 무기를 축적해왔고, 최근 이란이 벌인 전쟁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러시아-중국-북한-시리아와 가까워지면서 그들과 연계를 통해 전략, 전술, 무기 등을 착실히 축적해왔고, 미국의 공격을 받을 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40년 넘게 훈련을 거듭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이란이다. 그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란은 러시아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라다. 아마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의 데자뷰처럼 남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초기, 필자의 분석을 두고, 러뽕이니, 러시아 간첩이니 하면서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조소를 했던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몰리면서 러시가 이기고 있는 것이 보이니 일제히 입을 함구하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했고,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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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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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6

포토뉴스 검색결과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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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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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30
  • 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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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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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7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과 휴전으로 얻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득
    트럼프도 이번 휴전으로 얻는게 있었다. LA 폭동 같은 미국 국내의 뉴스가 중동 사태 때문에 죄다 묻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인들과 관심과 눈은 중동으로 향했다. 어쩌고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부추겨 이란을 선제 타격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럼 한동안 혼란스러워져 있던 미국의 민심은 저절로 이스라엘에 촉각이 모인다. 이렇게 네타냐후와 거래를 통해 미국 내 불량한 분위기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전쟁의 두려움을 확산시켜 아무도 폭동에 관심을 갖게 하고 물가 인상, 인플레, 유가 상승, 주가 하락까지 모든 것에 대해 간접 블러핑으로 그 불안 요소를 한 곳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은 매우 고도의 정치 전략이다. 모두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는 동안, 미국 각지에서 폭동들에 대해 관심이 줄었다. 어떠한 시위나 폭동이든, 관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들 만의 외침으로 전락해 아무 의미 없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전략은 폭동 진압에 있어 엄청 큰 유효타를 때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천재적인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터키의 에르도안이다. 본인에게 오는 모든 불만을 시기에 따라 적절히 외부로 타겟을 돌려 위기를 넘겼다. 경제 위기로 터키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HTS를 움직이고 지원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시리아 내정을 장악했다. 시리아의 북부의 땅은 현재 터키의 영토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터키 국민들은 다시금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이스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를 투옥시켜 전 국민의 분노를 샀을 때, 여태까지 사형 판결을 받고도 갇혀 있던 쿠르드족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과 거래해, 극단 쿠르드족인 PKK의 무장을 해산시켜 터키에 대한 테러리즘이 사라졌다고 공표해 이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마모울루의 투옥에 항거하여 저항하던 시위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타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에르도안의 정치력만큼은 세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창 열기를 뿜던 홍콩 민주화 시위는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집회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홍콩 민주화 시위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게다가 전 세계가 펜데믹에 주목하는 바람에 홍콩 시위는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결국 미국 폭동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폭동이 자연스럽게 해산되게 만들고 본인의 정치력을 극대화하는 이득을 챙겼다. 그냥 장사치 경제인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정치 능력 또한 많이 성장했다. 이제 트럼프는 매우 노련한 정치력까지 갖춘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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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6
  • 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 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B.C 900년에 사카 계통의 종족들이 점차 서진하면서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얌나야 문화를 영위하고 있던 민족들을 밀어내면서 또 다른 대이동의 시작이 이루어진 이후, 카프카스 지역에도 새로운 종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B.C 9세기 내내 유라시아 전 지역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극동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유라시아 땅에서 정주민에 대한, 또는 정주국가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B.C 822년 사카의 영향을 받은 서부 중앙아시아, 키질쿰 지역의 유목 부족들이 남하하여 힌두쿠시 지역을 공격했던 전쟁, B.C 824년에서 B.C 823년까지 역시 사카 종족의 대이동에 따른 영향으로 인더스 지역에서 농민들과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쟁을 벌인, 이른바 인더스 내전, B.C 821년 이란 북부에서 메디아 왕국과 또 다른 사카계 민족인 사르마트 족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메르브 전투, B.C 816년에서 B.C 815년까지 카스피 해 남부 타바리스탄의 도시들이 아시리아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B.C 858~B.C 824)의 이민족 탄압 정책에 항거해 아브작(Abzak)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와 싸운 ‘아브작 전쟁’, B.C 826년부터 B.C 823년까지 8차례나 벌어진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와의 전쟁 등 각종 약탈 전쟁도 이어 발생했다. 약탈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각종 학대와 학살로 단순화하여 서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이미 정주 국가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각 약탈을 빌미로 상대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주 전장지인 서부 이란 지역의 경우, B.C 815년 9월에 메디아와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흐샤트리타(Khshathrita)를 이어 메디아의 왕으로 즉위한 데이오케스(Deiokes)는 젤리라바트(Cəlilabad)에서 메디아와 사카의 일족인 파르시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파르시 족이 메디아 왕국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데이오케스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에 정착한 파르시 족들이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메디아 국왕에게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사카계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파르시와 달리 메디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엘람 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인 조로아스터교를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비록 파르시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메디아 시민들이 파르시와 통혼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메디아의 왕은 파르시 인을 후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메디아 왕국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보호자로서 수메르 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아시리아와 소수의 북방 메소포타미아 원주민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중동은 정주민과 유목민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약탈을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B.C 9세기 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져온 상업적인 부흥으로 고대 중동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면서 다량의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B.C 8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하여 중동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중동의 도시 인구의 4분의 3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바빌론의 경우 B.C 7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5,000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5,000명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수메르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매우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들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역청을 발라 석성을 쌓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늘어난 병력 수요를 고대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도시 국가 왕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후와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각 귀족들의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가난해져서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측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화제로 전소된 가옥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부유해지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이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와의 또 다른 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 도시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맞게 아시리아 제국처럼 단일 통치 국가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바래왔었다. 그래서 국왕들 일부가 아시리아와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각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B.C 810년 이후 생긴 파르시의 존재는 각 도시 국가의 야심들에 부응해 파르시 부족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아시리아에 속한 북부 수메르의 국왕들은 반대로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한 독립을 염원했고, 그와 같은 목표 의식들은 다른 수메르 도시 국가의 국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이미 데이오케스 왕 때 메디아와 하나였던 파르시는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사카, 스키타이 민족이라는 인연으로 이란 지역에서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메디아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파르시와 두 종족과 국가를 양쪽으로 상대하던 아시리아를 긴장시켰다. 특히 메디아 왕국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아시리아나 시리아와 같은 인근의 강대국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미 B.C 790년대 초에는 유프라테스 강, 자그로브 산맥, 지중해와 카스피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B.C 788년, 무려 3개의 혜성이 나타나면서 오리엔트 지역의 정치권에는 일종의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많은 점성가들이 이를 분석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종교는 종교일 뿐, 큰 사건, 한 시대가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B.C 7세기 말, 파르시 족은 중부 이란과 남부 이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180만㎢, 인구는 20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였다. 그 국가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아케메네스는 사트라프(Satraf)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는 그 출신이 불분명했지만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 중의 왕이 수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영토의 오리엔트에서 북적대며 거주하던, 200만의 인구인 수메르,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는 적극적으로 강병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의 엘람과 북쪽의 메디아 왕국을 병합해야 했다. 이는 남쪽의 엘람을 정벌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북쪽인 메디아 왕국과 협상을 통해 통합하여 이란 자체를 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아리아 인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다. 이는 한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치적인 논리에 있었다. 더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도 대군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립된 지 아직 반세기 정도 만에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매우 넓어지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도 닿지 않는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했다.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 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복속시킨 지 얼마 안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후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파르시 족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가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분리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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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5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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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2
  •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유사성 : 가짜 프로파간다 정보로 인한 심리전의 강화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니 마치 2022년 2월 24일부터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판박이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파간다로 인한 심리전이다. 푸틴 대통령이 말한적도 없는 3일만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똑같이 돌아간다.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내용들에 의하면 현재 테헤란 시내 ATM은 사이버 공격으로 전부 마비, 러시아 대사관은 철수 명령 내려와서 철수 중이라 한다. 근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우크라이나의 사이버 공격으로 ATM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이미 Swift 제재도 들어간 상황에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어 러시아의 국방부도 해커인 "어나니머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키예프에는 러시아군의 공습과 진입이 시작된다며 각 국 대사들과 체류 국민들을 대피시켰다. 당시 러시아군은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이르핀과 부차에 와 있었다. 그러니 키예프 소재 각국 대사관과 체류 국민들을 부랴부랴 대피시킨 것이고, 당시 부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프로파간다를 오지게 뿌려대서 부차는 러시아 학살 피해의 성지(聖地)로 둔갑했다. 그리고 판박이로 이번에는 미군의 공중급유기와 일부 항공기 40대가 서쪽으로 이동했고 20대가 이스라엘로 향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B2 폭격기 수대가 이란 핵시설 타격을 위해 초대형 벙커 버스터 연속 폭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과 키예프 인근 부차와 이르핀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의 위협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미국이 직접 B2로 폭격하려는 상황도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미군 폭격기로 러시아 돈바스와 모스크바를 직접 타격하려고 하는 모습을 전쟁 초창기 때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군 폭격기로 아무것도 못했다. 인도-태평양 미군 기지들에게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되어 경계 태세가 강화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대량으로 중동에 빠져나간 상태에서 중국군이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의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타이완 (대만)을 상대로 중국이 어떤 작전을 벌일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도련선을 통과하기도 했던 중국 함대가 어찌 나올지 미국조차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의식한다면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테헤란 영상들 보면 현재 소개 명령으로 고속도로가 장난이 아닌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공격이 심화될 때, 전쟁 초, 이웃 국경으로 고속도로와 기차가 넘어갔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난민이 되었다. 러시아 또한 부분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군대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고속도로의 정체가 장난 아니었다. 결국 이것도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란의 내부 시위도 이스라엘 폭격과 함께 격화되는 중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는 반전 시위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알렉세이 나발니를 중심으로 반전 시위를 했고 이 또한 격화되어 푸틴의 목숨이 오늘 내일한다고 프로파간다 방송을 한 것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와 우크라이나였다. 과거의 왕정시대의 자유로원던 이란의 모습 비디오들이 엄청 방류 중이라는데 러시아군이 패배하는 방송만 열심히 띄운 것도 미국이나 서구, 우크라이나의 합작품이다. 다들 그거보고 세계 2위의 군사력이 별거 아니라며 한국인들은 떠들어 러시아를 우습게 보았고 러시아의 무력이 쓰레기이자 그 무기들이 거품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냐고 떠들기도 했다. 탱크와 전차가 다 작살나서 없다고 보고한 것도 그들이고 냉장고의 부품을 뜯어 탱크와 전차에 사용했다고 했던 자들도 그들이며, 멀쩡히 있던 러시아의 마트가 사재기로 물건이 없어 난리라고 거짓 보도했던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인해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망할 줄 알았을 것이다. 푸틴이 참수되고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해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란-이스라엘 전쟁의 프로파간다에 또 다시 데자뷰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도 내일이면 러시아가 망할수도 있다고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결국 러시아의 절대적인 우세로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고,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네타냐후는 서구 유럽과 미국에게 도와 달라고 손 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역전이 되었는지 내일이면 이란이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란이 같을 수 없겠지만 이란은 자원부국에 8,5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동안 무기를 축적해왔고, 최근 이란이 벌인 전쟁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러시아-중국-북한-시리아와 가까워지면서 그들과 연계를 통해 전략, 전술, 무기 등을 착실히 축적해왔고, 미국의 공격을 받을 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40년 넘게 훈련을 거듭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이란이다. 그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란은 러시아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라다. 아마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의 데자뷰처럼 남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초기, 필자의 분석을 두고, 러뽕이니, 러시아 간첩이니 하면서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조소를 했던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몰리면서 러시가 이기고 있는 것이 보이니 일제히 입을 함구하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했고,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9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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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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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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