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7(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발언…현실은 무력 충돌 격화
    [신문기사] 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올 것" 주장…현실은 보복과 확전 [서울=2025.06.1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두 국가 간 "곧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이스라엘과 이란은 협상해야 하며, 내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설득했던 것처럼 협상을 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트럼프는 "많은 통화와 회의가 진행 중이며,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국민은 이해해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세르비아-코소보, 이집트-에티오피아 분쟁 등 과거 국제 중재에 성공한 전례를 언급했다. 이어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스라엘-이란 사태에 대한 통화를 공개하며 "푸틴도 중재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과 달리, 현지 상황은 악화일로다. 이스라엘은 지난 13일부터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시작으로, 14일에는 세계 최대 가스전인 '사우스파르스' 등 에너지 인프라까지 공습하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이란은 텔아비브, 하이파 등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 미사일 보복을 단행했으며, 보복은 계속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은 민간인을 사전에 계획해 살해했다"고 비난했으며, 이란 혁명수비대는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군사적 보복을 공식화했다. 이번 충돌로 현재까지 이스라엘 측 최소 13명, 이란 측 최소 7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이란 핵합의(JCPOA) 파기와 이후의 강경 정책이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란은 현재 일주일 내 핵무기 생산이 가능할 정도의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미국은 이미 중동에 항모 전단을 급파하고 핵 협상을 중단한 상태다.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 공습 이전부터 주중동 외교 공관 직원들을 철수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 시도는 현실과의 괴리 속에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이 갈등에 본격 개입할 가능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중동에서의 무력 충돌이 장기화할 경우, 세계 에너지 시장에도 심각한 파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 뉴스
    • 지구촌
    2025-06-16
  • "이스라엘 공습에 이란 즉각 보복…‘진실의 약속3’ 개시"
    [서울=2025.06.14.] 이란, 이스라엘 공습 17시간 만에 보복…미사일 수백 발 발사로 중동 긴장 최고조 2025년 6월 13일 밤(현지시간), 이란은 이스라엘을 향해 수백 발의 탄도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며 보복 공습에 나섰다. 이는 같은 날 새벽 이스라엘이 이란 중부 이스파한의 나탄즈 핵시설을 포함한 주요 군사 거점을 전격 공습한 데 대한 대응이다. 양국의 군사 충돌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중동 전역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돌입했다. 이번 보복은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지 불과 17시간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진실의 약속3’이라는 작전명 아래 감행됐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텔아비브, 예루살렘, 하이파 등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 대해 정밀 타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이란 국영 IRNA 통신은 “시온주의자 정권의 잔혹한 침공에 단호히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탄도미사일이 발사됐다”고 전했다. 현지 시각 오후 9시경 시작된 이란의 공격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군은 “이란에서 쏘아 올린 미사일과 드론 다수를 탐지해 요격했다”고 밝혔지만, 일부는 방공망을 뚫고 이스라엘 내 9개 이상 지역에 낙하해 폭발을 일으켰다. 텔아비브, 예루살렘, 하이파 등지에서는 큰 폭발음과 연기가 목격됐으며, 이로 인해 최소 35명의 민간인이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부상자 중 일부는 중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벤구리온 국제공항을 폐쇄하는 등 전면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 병원들은 입원 환자들을 지하로 옮기고 외래 진료를 중단했으며, 시민들에게는 대피소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스라엘 군은 이날 작전을 ‘일어서는 사자(Rising Lion)’로 명명하고, 추가 공습 가능성을 경고했다. 국제사회도 긴급히 움직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요청으로 뉴욕 본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해 이번 사태를 논의했다. 이란의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유엔 서한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제 모든 선을 넘었으며, 국제사회는 이러한 범죄 행위를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자위권에 따른 대응임을 강조했다. 미국은 이란의 미사일 공격 감지 직후 이스라엘 방공망에 일부 기술적 지원을 제공했다고 밝혔고, 프랑스와 독일은 자국민의 대피 조치를 시작했다. 독일은 공군 수송기를 키프로스로 파견했고, 영국은 이스라엘 전역에 대한 여행 경보를 최고 단계로 격상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이란의 도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외교적 해법 복귀를 촉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양국 간의 충돌을 넘어,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안보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이란 간 진행 중이던 핵 협상은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이란은 향후 통보 전까지 협상 불참을 공식화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 정상과 통화하며 중재 의사를 밝혔지만,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일 전망이다. 이스라엘의 초기 공습으로는 이란의 핵시설과 함께 모하마드 바게리 이란군 참모총장, 호세인 살라미 혁명수비대 총사령관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이란의 군 수뇌부 교체와 보복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반면 이란은 이스라엘 전투기 2대를 격추시켰고, 여성 조종사 1명을 생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스라엘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충돌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적 군사 충돌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양국이 상호 보복을 계속할 경우,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예멘의 후티 반군 등 이란과 연계된 무장 단체들이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중동 전체가 불안정한 국면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국제 유가는 이번 사태로 인해 하루 만에 배럴당 7% 이상 급등했으며, 금융시장과 에너지 시장도 급격히 요동치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현재까지 교민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지 대사관을 통해 긴급 대응 체계를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양측 모두 “이번 대응은 시작일 뿐”이라고 밝힌 만큼, 향후 사태의 추이는 전 세계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2025-06-14
  • 외교관 겨눈 총성, 중동 분쟁 미국까지 번지다
    [워싱턴DC=2025.05.21.]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2명, 워싱턴서 총격 사망…외교관 사격 이어지는 중동 긴장 고조 2025년 5월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2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오후 9시경 유대인 박물관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피해자들은 약혼을 앞둔 남녀 직원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용의자는 30세 남성 엘리아스 로드리게스로, 범행 당시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사건 현장에서는 미국 유대인위원회(AJC)가 주최한 리셉션이 열리고 있었다. 용의자는 행사 종료 후 귀가하던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들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을 ‘반유대주의 테러’로 규정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모두 강경한 규탄 입장을 밝혔다. FBI는 현지 경찰과 공조해 추가 수사에 착수했다. 한편, 이 사건과 거의 동시에 중동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요르단강 서안 지구 제닌에서 이스라엘군이 현장을 시찰 중이던 외국 외교관들에게 경고 사격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현장에는 EU,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등 20여 개국의 외교관들이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외교관들이 “허가되지 않은 지역에 진입했다”고 주장하며 사과했지만, 각국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EU는 이 사건을 조사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했다. 일부 유럽 국가는 이스라엘과의 무역 협정 재검토에 나섰다. 최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재개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으며,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앞서 1월 미국과 바이든 전 정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 중재에 성공했으나, 이스라엘은 3월 이를 깨고 공세를 재개했다. 미국의 적극적 개입 여부가 중동 정세 안정의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2025-05-22
  • 교황 레오 14세 즉위…“평화와 사랑의 세상을 위하여”
    [바티칸=2025.05.18.] 교황 레오 14세 즉위…"평화와 사랑의 세상 만들자" 2025년 5월 18일(현지시각),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시선이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집중됐다. 가톨릭 역사상 첫 미국 출신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69세)가 이곳에서 공식 즉위 미사를 집전하며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여정을 시작했다. 이날 미사에는 전 세계 180여 개국의 대표단과 2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운집해 새 교황의 탄생을 축하했다. 레오 14세는 미사에 앞서 **교황 전용차량 '포프모빌'**을 타고 광장에 등장했다. 방탄 장비 없이 열린 차량 위에서 그는 군중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안아 축복하는 모습으로 따뜻한 첫인상을 남겼다. 이후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안장된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하고 기도를 올린 뒤 야외 제단으로 나아가 역사적인 미사를 시작했다. 즉위 미사의 핵심 의식,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착용 즉위식의 하이라이트는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착용 의식이었다. 팔리움은 흰 양털로 만든 띠로,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선한 목자'를 상징한다. 레오 14세는 도미니크 맘베르티 추기경으로부터 팔리움을 서서 전달받았는데, 이는 앉아서 받았던 전임 교황들과 차별화된 겸손한 자세였다. 이어서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이 레오 14세의 **오른손 약지에 '어부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 순금 반지는 교황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인장으로, 'LEO XIV'라는 라틴어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교황은 반지를 응시하며 두 손을 모아 깊은 기도를 올렸고, 이 경건한 순간은 신자들의 뜨거운 박수갈채 속에 감동을 자아냈다. 사랑과 일치,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 첫 강론에서 레오 14세는 강한 울림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증오와 폭력, 편견, 차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경제 논리가 만든 상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며, **"우리는 이러한 분열을 사랑과 일치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일치(unity)'라는 단어를 일곱 차례, '화합(harmony)'을 네 차례 언급하며 분열된 세계와 교회를 향한 화해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미얀마,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분쟁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그는 "모든 협상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전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바티칸을 전쟁 종식 협상의 장소로 제안했다. "교황청의 도덕적 권위가 평화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국제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계 지도자들과의 외교 무대 개막 즉위 미사에는 전 세계 지도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미국의 J.D. 밴스 부통령,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 등 20여 개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참석해 새 교황의 즉위를 축하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장면은 미사 직후 로마 주재 미국 대사관저에서 이루어진 젤렌스키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비공식 회동이었다. 두 인물은 악수를 나누고 30여 분간 회담을 가졌는데, 이는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벌어진 공개 설전 이후 첫 공식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바티칸 외교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해결의 중재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새로운 교황의 상징과 철학 레오 14세는 전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소박한 행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전통적인 붉은 신발 대신 검은 신발을 신었고, 미사 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전통 망토인 '모체타'를 착용해 교황으로서의 권위와 겸손함을 동시에 드러냈다. 또한 그는 순금이 아닌 금도금 반지를 선택함으로써 절제와 소박함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도 이날 행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사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정부 경축 사절단과 유흥식·염수정 추기경,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등 한국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해 깊은 연대감을 표현했다. 레오 14세의 즉위는 단순한 교황직 승계를 넘어 **분열된 교회와 혼란한 세계에 전하는 '화해와 사랑의 선언'**이었다. 세계가 분열과 갈등 속에서 방향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새 교황의 등장은 인류가 다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2025-05-19

칼럼 검색결과

  •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7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6
  • 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5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4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현재까지 남아있는 무함마드의 직계, 현 요르단 하심(Hashim) 왕가
    하심 가문은 현대 요르단의 왕가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헤자즈 왕국,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이라크 왕국의 왕가이기도 하였다. 하심 가문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 이름의 유래는 무함마드의 증조부 이름인 “하심”에서 유래된다. 다만 무함마드의 증조부 씨족인 “하심 씨족(بنو هاشم‎, Banu Hashim)”과 현대에 지칭되어지는 하심 가문(الهاشميون, Hashemites)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들 하심 씨족들은 하심의 자손들 전반적인 면들을 포함하지만, 하심 가문은 메카 아미르 작위를 세습했던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중시하고 더 좁게는 아라비아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와 요르단의 건국 시조가 된 후세인 빈 알리(Husein Bin Ali, 샤리프 후세인)의 후손들만으로 한정된다. 1916년, 메카의 태수였던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토착 군대를 이끌고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아라비아 반란을 성공시키면서 오스만투르크를 축출하고 나라를 세웠다. 1924년 3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자,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른바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의 샤리프 칼리프 왕국이라 하는데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후세인의 칼리프 참칭을 빌미로 이븐 사우드(Ibn Saude,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사우드 왕조의 시조)가 침략해왔고, 패배가 임박하자 장남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ein)에게 양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복당하면서 헤자즈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헤자즈 왕실은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피했다. 헤자즈 지역을 정벌한 네지드 토후국의 경우, 1926년 헤자즈-네지드 왕국(مملكة الحجاز ونجد)으로 개편했다가 2개 국가 왕위를 1932년에 통합하여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게 한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단 4개월 동안만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1918년 10월 5일 건국을 선언했고, 1919년 11월 26일 영국이 시리아 남부 지역에서 철수하자 토후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왕국으로서 새롭게 건국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Faysal I)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크 협정 당시 1920년 7월 25일 프랑스 제3 공화국에 항복하여 멸망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영국에게 이라크의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카이로 평화회담을 통해 이라크에 군주제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이라크 왕국을 건설하게 하였다.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온 적도 없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일부러 내세운 인물이었다. 파이살은 얼마 전까지만 시리아 왕국의 왕이었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프랑스한테 넘기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시리아 왕국은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복속되었다.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이라크 지역 주민이 아니었던 데다 실세는 영국이다 보니 초기부터 저항이 크게 발생했다. 또한 파이살은 수니파였고 이라크에는 시아파가 더 많았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시아파 지역은 수니파 지역과 분리되어 통치되기를 바랬었지만 영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질적인 지역들을 한 통합했다. 영국은 파이살 1세를 자신들의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후, 시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수니파와 유태인,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시아파를 중심으로 1920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라크인 453명이 사망하고 영국인도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 영국은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민간인들을 공습하는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라크의 봉기를 진압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쿠르드 독립 국가 건설,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기독교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료 우대 정책을 펼쳐 시아파의 반발을 샀고 파이살 1세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의 화해와 국방력 건설, 자주권 확보에 노력하게 되자 영국은 각 부족들의 친영국파 내각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1932년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지만 실상은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요르단은 하심(Hashim)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아라비아 왕정국가로 나타난다. 하심 가문은 7세기 무렵 이슬람을 창시했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한 가계로서,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무함마드의 43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하심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홍해 연안의 서부 지역인 히자즈에서 통치 가문으로의 역할을 해왔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히자즈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의 지원 하에 히자즈 왕국(1916~1925), 이라크 왕국(1921~1958), 요르단 왕국(1921~현재) 등을 차례로 건국했다. 이 가운데 요르단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왕국이다. 과거에 요르단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용어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지칭한다. 1921년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라는 국명으로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6년 5월 25일 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명을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 이후 1949년 4월 요르단은 다시 오늘날의 국명인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요르단은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 원수인 동시에 최고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으며 국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요르단은 기독교도, 유태교도, 무슬림이 聖地라고 부르는 지역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요르단은 중요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아라비아 지역의 국가 중 이집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국가이기도 하다. 1946년에 독립한 이후 요르단은 총 4명의 왕이 통치했고 세 차례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 형식상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부친이 사망한 이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건국자이자 1대 국왕인 압둘라 1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탈랄 빈 압둘라(Talal Bin Abdullah)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탈랄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유로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인 후세인 1세가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세인 1세는 1952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요르단을 통치했고, 1965년에 자신의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Hassan Bin Al Talal)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후세인 1세는 사망하기 2주일 전인 1999년 1월 25일에 34년 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하산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부친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된 지 2주 후인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라 2세의 왕위 등극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매우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후세인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이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압둘라 2세의 모친은 영국인 출신으로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1971년에 이혼한 상태였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누르 왕비를 총애했고, 따라서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에게 어떠한 사건이 생길 경우, 그녀의 장남이었던 함자 빈 알 후세인(Hamza bin Al Hussein)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1999년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두고 후세인 1세는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후계자를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는 누르 왕비의 청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 함자를 후계자로서 신중히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여 왕위를 승계받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37살이었던 장자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대신 함자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함자를 1999년 2월 7일 왕세제로 책봉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28일 압둘라 2세는 전격적으로 함자를 왕세제로부터 해임했다. 당시 그는 함자에게 서한을 보내 “상징적인 직위 때문에 너는 행동의 자유를 구속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무도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 (Because of your symbolic position, you have been restricted in your freedom of action. And because of that, you have not been given any responsibility, even though you are more than qualified to do so).”고 말하며 해임의 사유를 밝혔다. 그는 함자의 해임 이후 약 5년 동안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가 2009년 2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후세인 빈 압둘라(Hussein bin Abdullah)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 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1995년 카타르 쿠데타는 1995년 6월 27일 카타르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써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가 타니 가문의 지지 하에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프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5년 쿠데타는 1992년부터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에게 주었던 일부 권한을 아버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사니가 다시 회복하려 했다. 이는 1995년 초부터 부자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1972년 2월 쿠데타를 통해 전 국왕이었던 하마드 빈 알리 알 타니가 이란으로 순방을 간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카타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은 근대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1977년 5월에는 차남이었던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공석이었던 왕세자 자리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칼리파 국왕이 1990년대 이후 차남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넘겨주던 권력 이양을 중지하고 전 석유 및 재무 장관이자 1992년에 하마드 빈 칼리파의 영향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던 압델 라지즈 빈 칼리파 알 타니(Abdelaziz bin Khalifa Al Thani)에게 권력을 다시 넘겨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의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위원회는 슈라 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하마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헌법에 따른 강제적인 왕위 이앙 절차를 마쳤다. 또한 하마드 왕세자는 쿠데타 직후 짧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오늘 일어난 일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단행되어야만 했던 일이고 나는 이를 해야만 했다(What happened today is not pleasant, but it had to happen and I had to do it.)”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해외 외교관들은 쿠데타가 형제 간 왕위계승권 문제 및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영향이라 분석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자신의 아들을 “멍청한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계속해서 카타르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국 카타르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아들 하마드 빈 칼리파는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려고 미국의 로펌회사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1996년 2월에는 전 경제부 장관이었던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의 주도 하에 전 국왕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복권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역으로 시도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미수에 그쳐 실패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같은 전통적인 아랍 지역의 카타르 동맹국들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강제로 퇴위당한 칼리파 빈 하마드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가 2004년 고국인 카타르로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제한 및 여러 가지 검열 정책을 폐지했으며, 여성 활동을 일부 허용했다. 1996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은 1996년 2월 14일 카타르에서 발생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에 대한 폐위 시도이자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나타난다. 카타르 정부는 이 쿠데타 미수를 “아부 알리 작전(Operation Abu Ali)”이라 부르고 있다. 2017~2018년에 발발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언론사인 알 자지라는 1996년 당시 카타르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바레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된다. 1995년 6월 27일,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는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이미르에 스스로 등극하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이 스위스 제네바로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무혈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 격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 위원회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는데 성공한다. 하마드 빈 칼리파의 통치 첫 해에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한 아버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걸프 협력 회의(GCC)가 새로 왕위에 등극한 하마드 빈 킬리파와 자주 충돌하는 것을 이용하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연달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퇴위한 전 아미르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알 타니 가문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역으로 자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 카타르는 1996년의 쿠데타 미수 사태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등 해외 각국의 지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으며 19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일부 익명을 요구한 서방 외교관은 쿠데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2018년에는 2017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알 자지라가 다큐멘터리 보도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며 정식으로 보도했다. 이와 같은 알 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 음모의 핵심이 무장 괴한들이 카타르 왕궁에 진입하여 하마드 빈 칼리파를 납치해 알라이얀 도로에 있는 자택에 연금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납치 작전은 2월 16일 오전 5시로 예정되었으나 발각될 가능성 때문에 급하게 작전 시기를 2월 14일로 앞당겼다. 카타르 정보부에 따르면 이러한 작전 변경은 당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Muhammad bin Zayed Al Nahyan)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정보부는 카타르의 군사 시설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실행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타르 정부는 2월 20일 쿠데타 관련 주동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알 자지라에서는 전 프랑스 육군 사령관인 폴 바릴(Paul Baril)이 아랍에미리트에서 카타르 쿠데타 작전 시행을 요청받아 무기를 받고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외무부 장관인 안와르 가르가시(Anwar Gargash)는 알 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폴 바릴은 아부다비를 방문했던 전 국왕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의 보안요원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내용은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 아랍에미리트라는 선동적인 내용이라 비난했다. 쿠데타의 주동자로 아미르의 사촌이자 전 경제부 장관인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가 지목되었다. 수 년 동안의 망명 생활 끝에 하마드 빈 자심은 1999년 7월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2월, 하마드 빈 자심을 포함한 32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은 내란 음모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에 연루된 85명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석한 피고인들은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나아가 1997년 자국에서 열린 아라비아 경제 회의에서 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이스라엘과 수교국인 이집트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비난했다. 1998년에는 왕이 절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게 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외국으로 유학을 나간 여성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회의도 가지고, 여성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여성 정치가 활동 및 언론 활동까지 전면 허용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3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2
  • 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1970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바레인에 대한 주권요구를 포기하게 하고 바레인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5일 바레인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8월 바레인의 샤이크 이사(Shaikh Isa) 국왕은 토후 명칭을 아미르(Amir)로 바꾸고, 1973년 5월 26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 내 급진 좌익 세력들의 침투로 인해 왕정 위협과 혼란이 우려되었고 이사 국왕은 결국 칙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및 사법, 행정 등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레인은 1975년 8월의 국회 해산과 더불어 정당 활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고, 강력한 국왕 중심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레인의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역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나타난다. 알 칼리파 가문은 아라비아 종족 연맹체인 바니 우트바(Bani Utbah)를 계승한 수니파 상인 가문 중 하나로 분류되며 1766년 본거지인 쿠웨이트에서 알 주바라,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카타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안에는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국고를 채울 수 있었고 1783년 알 칼리파 가문은 오만이 지배하고 있던 카타르 동쪽의 바레인 섬을 침공하여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카타르의 침공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인물이 아흐메드 빈 무함마드(Ahmed Bin Muhammad)로 그가 카타르의 1대 국왕으로 알려진 알 하킴(Al Haqim)이다. 하킴이라는 이름은 “정복자 아흐메드”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흐메드 알 파테(Ahmed Al Fat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칼리파 가문이 무력으로 이익을 장악한 것은 이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아흐메드의 통치 이후 바레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이집트의 위협도 존재했고 오만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오만의 식민 통치를 받기도 했다. 1803~1809년의 시기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전락했고 1810년부터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20년 영국이 중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바레인에 이르게 되자 바레인 정부는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식 근대 국가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레인은 부족 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 관련 문제는 종교 법정에서 관할했다. 위원회는 진주 생산과 팜 농장, 어업 등 경제 전반을 관여했으며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1869년부터 192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바레인을 통치한 이사 빈 알리(Isabin Ali)는 바레인의 최장기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부터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하마드 빈 이사(Hamad Bin Isa, 재위 : 1923~1942)는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를 고문으로 두고 사실상 영국이 통치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레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막대한 양의 석유다. 바레인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해 1932년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다. 이후 바레인 경제는 어업과 진주 생산에서 석유 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오일머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현재 바레인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로 나타나고 통치 세력인 수니파는 소수 종파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 되는 의회 해산은 종파 갈등으로 전이되었으며 이후 바레인은 지금까지도 시아파의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시아파 수장 국가인 이란과의 관계도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이란에서 파생된 ‘바레인 해방 이슬람 전선’이 바레인의 지도 세력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대국의 힘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인정받는 것은 중동의 작은 나라 왕실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바레인 왕실은 특히 서구와의 관계 처세에 능숙한 국가다.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탄생지이면서 모범국가인 영국, 미국과 아주 친한, 친 서구 국가이다. 사실 오늘날 바레인 왕국의 탄생은 영국의 힘이나 다름없다. 중동에서 영국이 만든 두 개의 괴뢰 국가가 있는데 하나는 바레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예부터 상인이던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것은 1820년 영국과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1861년에는 영구적인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은 바레인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영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에서 소국(小國)들의 입지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강대한 국가가 탄생하여 자국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바레인 침공을 막아내며 독일 등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26~1957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바레인의 최고행정관(Chief Administrator)을 역임한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 경은 바레인의 민, 형사 사법체계를 만들고 경찰 기능을 구성했으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대중화 된 교육을 도입하는데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레인의 지방분권화와 석유 탐사에도 크게 공헌했다. 당시 중동지역 여학교도 1928년에 처음으로 설립됐고 노예제도 폐지됐다. 전화 도입, 신문 발행, 영화관, 방송국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나타난다. 이어 바레인 왕실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 영국 왕실과도 친밀했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할 때 중동의 군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왕자나 공주들을 보냈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의 결혼식에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아랍의 봄’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2012년 5월엔 윈저성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비공식 오찬에도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한 데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방영이 좌절되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도 영국 서리(Surrey)에 있는 애플가스 컬리지에 진학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리즈 학교(Leys School)에 다녔다. 이후 햄프셔의 엘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68년 졸업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영국군 장교로도 복무한다. 하마드 국왕의 아들인 살마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왕세자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나마에 영국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칼리드 빈 하마드 바레인 외무장관과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이 건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 의지하던 바레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질서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마드 국왕은 영국에서 독립한 다음 해인 1972년 왕세자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대학 학부는 워싱턴D. C. 아메리카 대학 출신으로 알려진다. 미국과의 친분은 중동 내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깊은 관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격화되자 사우디군 1,000여 명이 바레인에 파견되었다. 역시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 역시 50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바레인의 치안을 이루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30

포토뉴스 검색결과

  •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7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6
  • 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5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현재까지 남아있는 무함마드의 직계, 현 요르단 하심(Hashim) 왕가
    하심 가문은 현대 요르단의 왕가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헤자즈 왕국,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이라크 왕국의 왕가이기도 하였다. 하심 가문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 이름의 유래는 무함마드의 증조부 이름인 “하심”에서 유래된다. 다만 무함마드의 증조부 씨족인 “하심 씨족(بنو هاشم‎, Banu Hashim)”과 현대에 지칭되어지는 하심 가문(الهاشميون, Hashemites)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들 하심 씨족들은 하심의 자손들 전반적인 면들을 포함하지만, 하심 가문은 메카 아미르 작위를 세습했던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중시하고 더 좁게는 아라비아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와 요르단의 건국 시조가 된 후세인 빈 알리(Husein Bin Ali, 샤리프 후세인)의 후손들만으로 한정된다. 1916년, 메카의 태수였던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토착 군대를 이끌고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아라비아 반란을 성공시키면서 오스만투르크를 축출하고 나라를 세웠다. 1924년 3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자,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른바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의 샤리프 칼리프 왕국이라 하는데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후세인의 칼리프 참칭을 빌미로 이븐 사우드(Ibn Saude,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사우드 왕조의 시조)가 침략해왔고, 패배가 임박하자 장남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ein)에게 양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복당하면서 헤자즈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헤자즈 왕실은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피했다. 헤자즈 지역을 정벌한 네지드 토후국의 경우, 1926년 헤자즈-네지드 왕국(مملكة الحجاز ونجد)으로 개편했다가 2개 국가 왕위를 1932년에 통합하여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게 한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단 4개월 동안만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1918년 10월 5일 건국을 선언했고, 1919년 11월 26일 영국이 시리아 남부 지역에서 철수하자 토후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왕국으로서 새롭게 건국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Faysal I)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크 협정 당시 1920년 7월 25일 프랑스 제3 공화국에 항복하여 멸망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영국에게 이라크의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카이로 평화회담을 통해 이라크에 군주제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이라크 왕국을 건설하게 하였다.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온 적도 없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일부러 내세운 인물이었다. 파이살은 얼마 전까지만 시리아 왕국의 왕이었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프랑스한테 넘기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시리아 왕국은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복속되었다.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이라크 지역 주민이 아니었던 데다 실세는 영국이다 보니 초기부터 저항이 크게 발생했다. 또한 파이살은 수니파였고 이라크에는 시아파가 더 많았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시아파 지역은 수니파 지역과 분리되어 통치되기를 바랬었지만 영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질적인 지역들을 한 통합했다. 영국은 파이살 1세를 자신들의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후, 시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수니파와 유태인,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시아파를 중심으로 1920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라크인 453명이 사망하고 영국인도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 영국은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민간인들을 공습하는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라크의 봉기를 진압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쿠르드 독립 국가 건설,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기독교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료 우대 정책을 펼쳐 시아파의 반발을 샀고 파이살 1세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의 화해와 국방력 건설, 자주권 확보에 노력하게 되자 영국은 각 부족들의 친영국파 내각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1932년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지만 실상은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요르단은 하심(Hashim)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아라비아 왕정국가로 나타난다. 하심 가문은 7세기 무렵 이슬람을 창시했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한 가계로서,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무함마드의 43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하심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홍해 연안의 서부 지역인 히자즈에서 통치 가문으로의 역할을 해왔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히자즈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의 지원 하에 히자즈 왕국(1916~1925), 이라크 왕국(1921~1958), 요르단 왕국(1921~현재) 등을 차례로 건국했다. 이 가운데 요르단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왕국이다. 과거에 요르단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용어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지칭한다. 1921년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라는 국명으로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6년 5월 25일 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명을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 이후 1949년 4월 요르단은 다시 오늘날의 국명인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요르단은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 원수인 동시에 최고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으며 국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요르단은 기독교도, 유태교도, 무슬림이 聖地라고 부르는 지역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요르단은 중요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아라비아 지역의 국가 중 이집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국가이기도 하다. 1946년에 독립한 이후 요르단은 총 4명의 왕이 통치했고 세 차례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 형식상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부친이 사망한 이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건국자이자 1대 국왕인 압둘라 1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탈랄 빈 압둘라(Talal Bin Abdullah)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탈랄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유로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인 후세인 1세가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세인 1세는 1952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요르단을 통치했고, 1965년에 자신의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Hassan Bin Al Talal)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후세인 1세는 사망하기 2주일 전인 1999년 1월 25일에 34년 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하산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부친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된 지 2주 후인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라 2세의 왕위 등극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매우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후세인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이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압둘라 2세의 모친은 영국인 출신으로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1971년에 이혼한 상태였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누르 왕비를 총애했고, 따라서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에게 어떠한 사건이 생길 경우, 그녀의 장남이었던 함자 빈 알 후세인(Hamza bin Al Hussein)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1999년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두고 후세인 1세는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후계자를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는 누르 왕비의 청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 함자를 후계자로서 신중히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여 왕위를 승계받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37살이었던 장자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대신 함자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함자를 1999년 2월 7일 왕세제로 책봉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28일 압둘라 2세는 전격적으로 함자를 왕세제로부터 해임했다. 당시 그는 함자에게 서한을 보내 “상징적인 직위 때문에 너는 행동의 자유를 구속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무도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 (Because of your symbolic position, you have been restricted in your freedom of action. And because of that, you have not been given any responsibility, even though you are more than qualified to do so).”고 말하며 해임의 사유를 밝혔다. 그는 함자의 해임 이후 약 5년 동안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가 2009년 2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후세인 빈 압둘라(Hussein bin Abdullah)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 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1995년 카타르 쿠데타는 1995년 6월 27일 카타르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써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가 타니 가문의 지지 하에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프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5년 쿠데타는 1992년부터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에게 주었던 일부 권한을 아버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사니가 다시 회복하려 했다. 이는 1995년 초부터 부자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1972년 2월 쿠데타를 통해 전 국왕이었던 하마드 빈 알리 알 타니가 이란으로 순방을 간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카타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은 근대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1977년 5월에는 차남이었던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공석이었던 왕세자 자리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칼리파 국왕이 1990년대 이후 차남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넘겨주던 권력 이양을 중지하고 전 석유 및 재무 장관이자 1992년에 하마드 빈 칼리파의 영향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던 압델 라지즈 빈 칼리파 알 타니(Abdelaziz bin Khalifa Al Thani)에게 권력을 다시 넘겨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의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위원회는 슈라 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하마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헌법에 따른 강제적인 왕위 이앙 절차를 마쳤다. 또한 하마드 왕세자는 쿠데타 직후 짧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오늘 일어난 일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단행되어야만 했던 일이고 나는 이를 해야만 했다(What happened today is not pleasant, but it had to happen and I had to do it.)”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해외 외교관들은 쿠데타가 형제 간 왕위계승권 문제 및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영향이라 분석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자신의 아들을 “멍청한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계속해서 카타르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국 카타르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아들 하마드 빈 칼리파는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려고 미국의 로펌회사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1996년 2월에는 전 경제부 장관이었던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의 주도 하에 전 국왕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복권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역으로 시도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미수에 그쳐 실패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같은 전통적인 아랍 지역의 카타르 동맹국들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강제로 퇴위당한 칼리파 빈 하마드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가 2004년 고국인 카타르로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제한 및 여러 가지 검열 정책을 폐지했으며, 여성 활동을 일부 허용했다. 1996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은 1996년 2월 14일 카타르에서 발생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에 대한 폐위 시도이자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나타난다. 카타르 정부는 이 쿠데타 미수를 “아부 알리 작전(Operation Abu Ali)”이라 부르고 있다. 2017~2018년에 발발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언론사인 알 자지라는 1996년 당시 카타르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바레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된다. 1995년 6월 27일,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는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이미르에 스스로 등극하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이 스위스 제네바로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무혈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 격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 위원회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는데 성공한다. 하마드 빈 칼리파의 통치 첫 해에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한 아버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걸프 협력 회의(GCC)가 새로 왕위에 등극한 하마드 빈 킬리파와 자주 충돌하는 것을 이용하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연달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퇴위한 전 아미르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알 타니 가문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역으로 자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 카타르는 1996년의 쿠데타 미수 사태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등 해외 각국의 지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으며 19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일부 익명을 요구한 서방 외교관은 쿠데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2018년에는 2017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알 자지라가 다큐멘터리 보도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며 정식으로 보도했다. 이와 같은 알 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 음모의 핵심이 무장 괴한들이 카타르 왕궁에 진입하여 하마드 빈 칼리파를 납치해 알라이얀 도로에 있는 자택에 연금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납치 작전은 2월 16일 오전 5시로 예정되었으나 발각될 가능성 때문에 급하게 작전 시기를 2월 14일로 앞당겼다. 카타르 정보부에 따르면 이러한 작전 변경은 당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Muhammad bin Zayed Al Nahyan)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정보부는 카타르의 군사 시설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실행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타르 정부는 2월 20일 쿠데타 관련 주동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알 자지라에서는 전 프랑스 육군 사령관인 폴 바릴(Paul Baril)이 아랍에미리트에서 카타르 쿠데타 작전 시행을 요청받아 무기를 받고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외무부 장관인 안와르 가르가시(Anwar Gargash)는 알 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폴 바릴은 아부다비를 방문했던 전 국왕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의 보안요원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내용은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 아랍에미리트라는 선동적인 내용이라 비난했다. 쿠데타의 주동자로 아미르의 사촌이자 전 경제부 장관인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가 지목되었다. 수 년 동안의 망명 생활 끝에 하마드 빈 자심은 1999년 7월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2월, 하마드 빈 자심을 포함한 32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은 내란 음모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에 연루된 85명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석한 피고인들은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나아가 1997년 자국에서 열린 아라비아 경제 회의에서 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이스라엘과 수교국인 이집트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비난했다. 1998년에는 왕이 절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게 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외국으로 유학을 나간 여성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회의도 가지고, 여성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여성 정치가 활동 및 언론 활동까지 전면 허용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3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2
  • 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1970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바레인에 대한 주권요구를 포기하게 하고 바레인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5일 바레인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8월 바레인의 샤이크 이사(Shaikh Isa) 국왕은 토후 명칭을 아미르(Amir)로 바꾸고, 1973년 5월 26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 내 급진 좌익 세력들의 침투로 인해 왕정 위협과 혼란이 우려되었고 이사 국왕은 결국 칙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및 사법, 행정 등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레인은 1975년 8월의 국회 해산과 더불어 정당 활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고, 강력한 국왕 중심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레인의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역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나타난다. 알 칼리파 가문은 아라비아 종족 연맹체인 바니 우트바(Bani Utbah)를 계승한 수니파 상인 가문 중 하나로 분류되며 1766년 본거지인 쿠웨이트에서 알 주바라,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카타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안에는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국고를 채울 수 있었고 1783년 알 칼리파 가문은 오만이 지배하고 있던 카타르 동쪽의 바레인 섬을 침공하여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카타르의 침공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인물이 아흐메드 빈 무함마드(Ahmed Bin Muhammad)로 그가 카타르의 1대 국왕으로 알려진 알 하킴(Al Haqim)이다. 하킴이라는 이름은 “정복자 아흐메드”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흐메드 알 파테(Ahmed Al Fat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칼리파 가문이 무력으로 이익을 장악한 것은 이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아흐메드의 통치 이후 바레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이집트의 위협도 존재했고 오만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오만의 식민 통치를 받기도 했다. 1803~1809년의 시기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전락했고 1810년부터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20년 영국이 중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바레인에 이르게 되자 바레인 정부는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식 근대 국가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레인은 부족 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 관련 문제는 종교 법정에서 관할했다. 위원회는 진주 생산과 팜 농장, 어업 등 경제 전반을 관여했으며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1869년부터 192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바레인을 통치한 이사 빈 알리(Isabin Ali)는 바레인의 최장기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부터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하마드 빈 이사(Hamad Bin Isa, 재위 : 1923~1942)는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를 고문으로 두고 사실상 영국이 통치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레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막대한 양의 석유다. 바레인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해 1932년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다. 이후 바레인 경제는 어업과 진주 생산에서 석유 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오일머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현재 바레인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로 나타나고 통치 세력인 수니파는 소수 종파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 되는 의회 해산은 종파 갈등으로 전이되었으며 이후 바레인은 지금까지도 시아파의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시아파 수장 국가인 이란과의 관계도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이란에서 파생된 ‘바레인 해방 이슬람 전선’이 바레인의 지도 세력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대국의 힘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인정받는 것은 중동의 작은 나라 왕실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바레인 왕실은 특히 서구와의 관계 처세에 능숙한 국가다.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탄생지이면서 모범국가인 영국, 미국과 아주 친한, 친 서구 국가이다. 사실 오늘날 바레인 왕국의 탄생은 영국의 힘이나 다름없다. 중동에서 영국이 만든 두 개의 괴뢰 국가가 있는데 하나는 바레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예부터 상인이던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것은 1820년 영국과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1861년에는 영구적인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은 바레인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영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에서 소국(小國)들의 입지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강대한 국가가 탄생하여 자국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바레인 침공을 막아내며 독일 등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26~1957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바레인의 최고행정관(Chief Administrator)을 역임한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 경은 바레인의 민, 형사 사법체계를 만들고 경찰 기능을 구성했으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대중화 된 교육을 도입하는데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레인의 지방분권화와 석유 탐사에도 크게 공헌했다. 당시 중동지역 여학교도 1928년에 처음으로 설립됐고 노예제도 폐지됐다. 전화 도입, 신문 발행, 영화관, 방송국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나타난다. 이어 바레인 왕실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 영국 왕실과도 친밀했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할 때 중동의 군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왕자나 공주들을 보냈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의 결혼식에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아랍의 봄’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2012년 5월엔 윈저성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비공식 오찬에도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한 데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방영이 좌절되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도 영국 서리(Surrey)에 있는 애플가스 컬리지에 진학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리즈 학교(Leys School)에 다녔다. 이후 햄프셔의 엘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68년 졸업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영국군 장교로도 복무한다. 하마드 국왕의 아들인 살마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왕세자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나마에 영국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칼리드 빈 하마드 바레인 외무장관과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이 건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 의지하던 바레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질서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마드 국왕은 영국에서 독립한 다음 해인 1972년 왕세자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대학 학부는 워싱턴D. C. 아메리카 대학 출신으로 알려진다. 미국과의 친분은 중동 내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깊은 관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격화되자 사우디군 1,000여 명이 바레인에 파견되었다. 역시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 역시 50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바레인의 치안을 이루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