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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첫 데뷔…실용외교 시험대
- [서울=2025.06.07.]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참석…취임 후 첫 다자외교 데뷔 이재명 대통령이 오는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대통령실은 7일 공식 브리핑을 통해 이 사실을 발표하며, 이는 이 대통령의 취임 이후 첫 국제무대 데뷔이자 다자 정상외교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대통령은 G7 회의 참석에 앞서 6일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정상 외교의 서막을 열었다. 통화는 약 20분간 이어졌으며, 두 정상은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뢰를 쌓는 데 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은 통화 중 암살 위협을 겪은 경험을 나누는 장면도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은 G7 회원국은 아니지만, 의장국인 캐나다의 초청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G7 정상회의에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등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참여하며, 주요 글로벌 이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한국은 과거 2020년부터 세 차례 초청받은 바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성사 여부도 주목된다. 특히 다음 달 9일 종료 예정인 미국의 상호관세 유예 조치와 관련해 양국 간 관세 협상도 핵심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재배치, 한일 정상회담 및 한미일 3자 회담 개최 여부 등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야권은 “정상회의가 국가 위상 회복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평가했지만, 여권은 “실질적 외교 성과를 내야 한다”며 경계심을 나타냈다. 특히 일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대중국 친화적 이미지와 북한 인권 문제 대응을 문제 삼으며 “신뢰 회복을 위한 명확한 태도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이번 회의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할 방침이며,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외교 균형도 고려한 메시지 조율이 이뤄질 전망이다. 회의 이후 미국으로 향해 트럼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질 가능성도 열려 있지만, 대통령실은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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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첫 데뷔…실용외교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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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헌’ 판결…무역 질서 판도 흔든다
- [워싱턴=2025.5.28.] 미국 연방국제통상법원(CIT)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시행한 '상호관세 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28일(현지시간) “관세 부과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 권한”이라며, 트럼프의 상호관세 발효를 영구 금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 이른바 ‘해방의 날’ 행사에서 수입국에 비례한 관세 부과 정책을 공식 발표하며, 10%의 보편 관세와 최대 25%의 국가별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뉴욕 소재 기업 5곳이 헌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관세 부과가 과도한 권한 행사라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향후 미·중·한 등 주요 통상 파트너국과의 협상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중국은 “관세 전면 철폐”를 요구했고, 일본은 “판결의 영향 신중히 검토”라는 입장을 냈다. 한국은 당초 7월 8일까지였던 관세 협상 마감 기한이 무의미해지면서 협상 시간을 벌게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항소를 제기했으며, 무역법 232조나 301조 등 우회 경로를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대통령의 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쓰는 행위를 부정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이 향후 행정권 남용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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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헌’ 판결…무역 질서 판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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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이름 불러주던’ 스타벅스, 이제 무인 주문으로 변신
- [서울=2025.05.27.] 스타벅스, 한국·일본 매장에 첫 ‘무인 키오스크’ 도입…대면 주문 원칙 깨져 스타벅스가 한국과 일본 매장에 처음으로 무인 주문기 ‘키오스크’를 도입하며, 고수해 온 ‘대면 주문’ 전통을 공식적으로 깨뜨렸다. 이번 조치는 서울 명동과 제주도 등 관광 및 오피스 상권 내 일부 매장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며, 다음 주부터 본격 운영에 들어간다. 스타벅스는 그간 “직원과 고객 간의 소통”을 중시하며, 커피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드물게 키오스크 도입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 증가에 따른 언어 장벽 문제와 직장인 수요 집중 시간의 주문 효율성 확보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이번에 도입되는 키오스크는 기존 사이렌 오더와 진동벨 시스템과 함께 ‘비대면 주문 채널’로써 병행 운영될 예정이다. 스타벅스코리아 관계자는 “대면 서비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객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특히 명동 지역은 외국인 방문객이 집중되는 지역으로, 키오스크 도입을 통해 언어 문제로 인한 불편을 해소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제주 지역 매장 일부에도 6월 초부터 확대 도입이 이뤄질 예정이다. 한편, 삼성전자도 최근 윈도 운영체제를 탑재한 신형 키오스크를 글로벌 시장에 출시하며, 무인화 트렌드에 대응하고 있다. 국내외 키오스크 시장은 코로나19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향후 디지털 접근성 강화와 고령층 배려 정책과의 충돌도 예상된다. 고객 소통을 중시하던 스타벅스의 이번 결정은 브랜드 철학에 대한 재정립과 시장 환경 변화에 따른 전략적 전환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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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이름 불러주던’ 스타벅스, 이제 무인 주문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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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밖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다와다 요코, 한국 독자와의 대화
- [서울=2025.05.23.]일본 출신의 세계적 작가 다와다 요코(65)가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2025 세계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참석하여 한국 독자들과의 교류를 마쳤다.이번 방한은 2011년 이후 세 번째로, 대산문화재단과 교보문고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도쿄에서 태어난 다와다 요코는 1979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이주한 후, 일본어와 독일어 두 언어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그녀는 '이중언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모국어와 외국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다.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와다 작가는 “문학은 모국어 밖으로 나가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며, 모어 바깥의 언어적 ‘뒤섞임’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또한, “같은 소리의 단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고방식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며 언어유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의 대표작인 『헌등사』와 『히루코 3부작』(『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 등은 이러한 언어 실험과 경계 넘나들기의 결과물로,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다와다 작가는 AI 번역 기술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번역 정보를 학습하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문장도 늘어나게 된다”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또한, “침묵은 매우 위험하다. 대화하고 수다를 떨지 않으면 모든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의문”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다와다 요코는 19일 교보인문학석강 강연을 시작으로, 20일 서울대 독일어문화권연구소 주최 낭독회, 21일 은행나무 주관 북토크, 22일 민음사 주관 북토크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한국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다.또한, 22일에는 김혜순 시인과 비공개 특별 대담을 진행하였으며, 해당 내용은 다음 달 발간되는 계간 문예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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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밖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다와다 요코, 한국 독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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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 [서울=2025.05.2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 복귀 이후,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2만8500명 중 4500명을 괌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 내 미군 병력의 약 16%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지시간 22일 복수의 국방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구상은 아직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는 않았으며, 북한에 대한 정책 옵션의 하나로 비공식 검토가 진행 중인 단계다. 국방부는 관련 질의에 “발표할 내용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피트 응우옌 대변인도 병력 이전에 대한 언급 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이번 주한미군 재배치 검토는 단순한 병력 이동 이상의 전략적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 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실제로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전략 축은 중국군의 대만 침공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군사전문가들은 주한미군 철수 시 한반도 안보 공백이 우려되며,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 미국의 지역 동맹국들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지난달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새뮤얼 퍼파로 인태사령관은 병력 감축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WSJ는 “만일 주한미군 병력을 괌 등 인태 내 타지역에 계속 주둔시키는 방식이라면 이 같은 우려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괌은 중국군의 접근이 어렵고 전략적 위치상 핵심 병력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방안은 국방전략(NDS) 수립 과정에서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2일 NDS 수립 지시를 내리며, 중국 억제와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주요 지침으로 제시했다. 주한미군의 재배치 여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국의 군사지원 정책 변화 등과 맞물려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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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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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임신 협박’ 사건…여성과 공범 구속영장 신청
- [서울=2025.05.16.] 손흥민 ‘임신 협박’ 피해…3억 갈취·추가 요구한 공갈 일당 구속영장 신청 2025년 5월 15일, 서울 강남경찰서는 축구 국가대표이자 토트넘 홋스퍼 주장 손흥민(33) 선수를 상대로 허위 임신을 주장하며 금품을 요구한 20대 여성 A씨와 그녀의 지인인 40대 남성 B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A씨는 공갈 혐의, B씨는 공갈미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기 행위를 넘어, 유명인의 사생활을 악용해 거액을 갈취하고 추가로 협박까지 시도한 범죄로, 사회적 충격이 크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6월 손흥민과의 사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아이를 임신했다”며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전달했고, 해당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총 3억 원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결별한 A씨는 자신이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B씨와 공모해, 올해 3월 손흥민 측에 6,500만 원을 추가로 요구하며 언론 폭로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협박을 이어갔다. 손흥민의 소속사 ‘손앤풋볼리미티드’는 “이번 사건은 명백한 공갈이며, 선수는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어떠한 선처 없이 강력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손흥민은 수개월 간 협박에 시달렸고, 최근에서야 매니저를 통해 해당 사실을 보고받은 후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경찰은 지난 14일 두 피의자를 체포하고, 주거지를 압수수색해 휴대전화 및 관련 증거자료를 확보한 상태다. 이 사건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해외 언론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 BBC는 “손흥민이 허위 임신을 주장한 여성에게 협박을 당했으며, 한국 경찰이 형사고발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전하며, “서울 경찰이 두 명의 용의자를 각각 공갈 및 공갈미수 혐의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더 가디언, 데일리 메일, 미러 등 유력 매체들도 관련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 언론들도 “유명인의 사생활을 악용한 충격적 사건”이라며 주요 뉴스로 보도 중이다. 수사당국은 A씨가 제시한 초음파 사진의 진위 여부와 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손흥민 측의 진술과 A씨가 주장하는 임신 시점 사이에 명백한 불일치가 있다”며 “사진의 출처와 조작 정황, 공모관계 등을 집중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 간의 갈등이 아닌 조직적·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공인인 유명 인사가 개인적 관계를 악용당해 심각한 사생활 침해와 경제적 손해를 입은 사례로, 사회 전반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악의적인 공갈 범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손흥민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로 전해졌으며, 오는 5월 22일 예정된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토트넘의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손흥민은 경기 출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팀 전체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공범자 간의 통신 내용과 금융 거래 기록 등을 분석하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은 이번 주 후반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스포츠 스타의 피해 사례를 넘어, 유명인을 겨냥한 사생활 협박 범죄의 심각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이에 따라 공인 보호와 관련한 제도적 보완과 함께, 디지털 증거에 대한 법적 대응 방안 강화 필요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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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임신 협박’ 사건…여성과 공범 구속영장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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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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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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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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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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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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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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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정원 2000명 증원, 실패한 의료개혁의 민낯"
- 서론: 의료개혁인가, 정치적 강박인가 2024년, 윤석열 정부가 강행한 의대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은 그 자체로 국가 의료체계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과학적 추계도, 실질적 합의도 없었다. 숫자 ‘2000’에 집착한 결정은 결국 의료 현장과 국민 모두를 불안에 빠뜨렸다. 정부의 일방적 드라이브는 의료개혁이 아닌 ‘정책의 주술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사건 개요 윤 정부는 2024년 초, ‘의사 부족’을 명분으로 의대 정원을 한 해 2000명씩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수급 추계, 지역별 의료공백 분석, 진료과별 인력 분포 조사 없이 발표된 이 결정은 의료계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렀다. 결과는 의대 집단 휴학, 진료 거부, 의사 부족 사태로 이어졌고, 지금도 그 파장은 이어지고 있다. 발생 원인 의대 증원이라는 중대한 정책 결정은 철저히 비공개 속에서 이뤄졌다. 정책 결정 회의록은 물론 위원 명단조차 비공개로 남았고, 과학적 근거보다 정치적 계산이 우선했다. 일각에서는 숫자 ‘2000’이 주술적 상징을 가졌다는 해석까지 나왔다. 풍수학자 김두규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윤 정부의 ‘2000’ 집착이 일종의 비보술(秘補術)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피해 규모 2025년 현재, 의대 수업을 정상적으로 듣는 학생은 전체 재학생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연간 약 3000명의 신규 의사 배출이 정상인데, 올해는 300명도 되지 않을 전망이다. 이는 10년 후 의료 인력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리스크다. 실제로 의료 소비는 계속 증가 중이다. 2022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는 103만5411원으로 3년 만에 33%나 늘었다. 현재 상황 정부는 의협과의 협의를 통해 갈등 봉합을 시도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는 여전히 의사 면허 관리 권한을 놓지 않으려 하며, ‘비전문가 관료’들이 의료정책을 주도하는 구조는 그대로다. 의료계의 자율규제를 반영하자는 제안도 복지부는 번번이 거부하고 있다. 향후 대응 방안 첫째, 일본처럼 과학적 의사 수급 추계를 통한 중장기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둘째, 면허 관리와 의료정책 결정에 의사 전문가들의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병상 구조를 재편하고 회복기 병상 확대 등 고령사회 대응 전략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개된 정책’이다. 국민과 전문가 앞에서 떳떳하게 수치를 설명할 수 없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위한 의료개혁 의료정책은 복지와 직결된 생존의 문제다.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된 이번 정책은 그 숫자의 위력보다, 비전문가 행정과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의 위험성을 더 또렷이 드러냈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의료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숫자가 아니라 사람 중심, 환자 중심, 전문가 중심의 의료개혁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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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정원 2000명 증원, 실패한 의료개혁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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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빅딜’ 협상을 통해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145% 관세를 30%로,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125% 관세를 10%로 낮추기로 서로 합의했으며, 관세 인하 시한을 또한 90일로 정한 이후 추후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을 뒤집고 일종의 깜짝쇼처럼 비출 수 있는 합의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국에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면서 마치 어느 쪽도 물러날 뜻이 없이 끝까지 간다는 발언들이 나왔던 시점에서 보면 선뜻 이번 합의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이번 회담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덧붙이고 있고, 미국은 중국이 경제가 붕괴하고 있어서 중국 관리들이 미국과 거래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진술을 보면 공통으로 상대방의 사정으로 이번 회담은 성사될 명분은 충분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보복성 관세를 계속 부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현재 서로의 문제를 교착화만 시킬 뿐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당장 상품 수출이 막히게 되니까 그대로 수출 상품이 창고에 쌓이게 되고, 이와 대로 미국은 소비재가 공급부족에 따라 물가 상승에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각각 협상 타결의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상대방의 양보를 얼마나 얻어내느냐에 있어서 말하자면 계산이 분명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은 노동절 연휴와 러시아 전승절 참석 이후가 미국과의 협상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 당국은 노동절 연휴에 내수경기를, 러시아 전승절 참석으로 수출 시장의 다변화를 일단 한번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하면서 대비 협상에 임했을 수 있다. 또 중국은 자국의 생산기지를 일부 동남아로 옮기면서 미국으로부터 각종 제재를 피하면서 실속을 챙기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 중국은 쉽게 말해 미국과 거래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따라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경기 침체와 성장률 둔화, 내수 침체에 따라 민심을 안정시키고 돈 풀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은 우선 관세 전쟁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경기 위축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대미무역 흑자국에 대해 강력한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중국은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인데, 중국이 수입하는 중국산 품목은 전자제품(컴퓨터, 휴대폰, TV), 가전제품(냉장고, 세탁기 등), 의류 및 섬유(의류, 신발 등), 가구(사무용, 가정용), 장난감(완구류 등), 배터리(전기차용, 기타), 철강 및 알루미늄(건축 및 제조업용), 반도체, 핵심 광물(희토류 등) 등이다. 중국은 그동안 이들 품목을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대량 수출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취득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액은 약 2,956억 달러로 유럽연합이나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국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 정도로 그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과 반대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상품 품목은 곡물 및 종자류(대두, 옥수수, 밀 등), 석유 및 천연 가스, 기계 부품, 의약품, 항공 및 우주 관련 장비 등이며, 약 1,5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은 대중국 무역적자 외에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지적하고, 중국의 기술 향상과 경제적 영향력으로 농수산물 분야를 제외하면 미국산이 중국에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 최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이 아직 미국에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차후에는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을 관세라고 보고, 이를 잣대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시진핑 주석은 미국의 압박을 버티면서, 오히려 미국에도 보복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처음부터 관세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다. 하여튼 미국과 중국의 이번 합의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의 득실을 따져 보면 중국은 오히려 소매 판매와 산업 생산이 모두 상승하고, 동남아와 유럽연합에 대한 수출을 늘렸다.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소비가 문제였지 생산이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물가 상승에다 국가 신용등급 강등, 재정적자라는 트레마(3중 딜레마)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 침체 가능성으로 인해 미국의 주식·채권·달러를 팔고 안전자산인 금으로 큰 손들이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여전히 관세 카드를 이용해서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의 다음 상대는 어디인가? 한국의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모 후보는 트럼프에 대한 막연한 신뢰로 직접 정상회담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 후보는 반트럼프 전선으로 세계와 연대를 통해 대응하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친중국 정책이 대미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자는 논지를 펼쳤다.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별로 신통치는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이번 미국과 중국의 관세 협상은 차후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있어 하나의 카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협상 태도는 치밀한 계산과 집요한 버티기를 통해 오히려 미국에 명분과 체면을 세워 주었다. 중국은 겉으론 손해를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보다는 실속을 챙긴 셈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성급할 필요가 없고, 철저한 준비와 대응책을 충분히 갖고 미국과 협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섣불리 미국과 협상에 임했다간 자칫 한국은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수출 위주의 한국 경제가 만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3년 동안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치중한 탓에, 한국의 입지가 좁아져서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한국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미국이 관세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주한 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입장에 맞서 한국이 이를 분리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관세율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느냐에 있다. 일본도 처음에는 미국과의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가 현재는 관망하는 태도로 선회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그대로 관세를 부과한 것을 보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아무것도 미국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손해만 보았다는 생각에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망하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에서 우리가 심사숙고할 사항은 대미협상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철저한 준비와 대안을 갖고 서둘려 협상에 나서기보다 차분히 상황을 주시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아마도 최악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되었음을 뜻한다. 아직도 성장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향에 눈을 감고 있다. 고도의 성장률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갖고 전진하는 도전의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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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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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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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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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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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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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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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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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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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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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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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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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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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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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