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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의 독도 방문, 일본 기자 질문에 대처법
    2024년 5월 13일,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양국 간의 긴장이 다시금 고조되었다. 이날 일본 후지TV의 기자가 조국 대표에게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라고 질문하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조 대표는 이에 대해 "누구시죠? 누구신지.. 일단 처음 뵙는 분이라서"라며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자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 장면은 일본 FNN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FNN은 조 대표를 '양파 남자(玉ねぎ男)'에 비유하며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 한국 제3당 조국 대표 다케시마 향해 출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양파 남자'라는 별명은 조 대표가 딸 조민 씨와 배우자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가 입시 비리에 연루되고, 본인도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등 여러 의혹이 계속 드러나는 것을 빗대어 일본 언론에서 사용해온 것이다. 독도 방문의 의의와 조국 대표의 발언 조국 대표는 독도에 도착한 후 성명을 통해 "우리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독도는 바로 그 부속 도서 중 하나"라며 독도의 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불과 2년 만에 다시 일본 식민지가 된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국익과 국토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하라"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또한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1년 팔도총도, 1737년 조선왕국전도 등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사료들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그리워하는 것이냐. 대한민국의 해방을 부인하고,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이냐"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일본에 경고한다. 이제 그만 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일본 정부의 반응 일본 정부는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외무성은 "사전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강행됐다"며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으로 독도는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 간의 영토 분쟁과 역사 인식 차이를 다시금 부각시키며 양국 관계에 긴장감을 더했다. 일본 언론은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며 한국 정치인들의 행동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한편, 한국 내에서는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국토 수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조국 혁신당 대표의 독도 방문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양국 간의 역사와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양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해결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뉴스
    • 정치
    2024-05-15
  • 2040년대를 위한 군 전략, 한국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대폭 증강 필요성 강조
    최근 대전에서 개최된 '에어로스페이스 콘퍼런스 2024'에서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2040년대 한국 공군의 전략적 방향성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KIDA에 따르면,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하이급' 전투기의 비율을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이 제안은 한국이 이미 F-35A 전투기 40대를 도입했으며, 최근 20여 대를 추가 구입하기로 한 배경에 더해, 더 많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KIDA는 국방정책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전략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향후 군의 전략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찬우 KIDA 군사발전연구센터장은 세미나에서 "현재 우리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비율은 주변국에 비해 낮은 편"이라며, 이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미래 전장에서의 공중우세 확보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사이버 및 우주공간 확장, 인공지능(AI) 및 유무인 복합체계의 활용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전투기 430대 운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중 하이급 전투기는 100대(23.3%)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KIDA는 이 비율이 향후 전략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특히 5세대 이상의 스텔스 기능을 갖춘 전투기의 비율 증가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 센터장은 미래 전투기 개발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KF-21 '블록3' 같은 다음 세대 스텔스 전투기의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 6세대 전투기 개발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영국, 이탈리아와 함께 차세대 전투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며, 한국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센터장은 기술력 향상을 통해 전투기 무장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라며, 2040년대에는 유무인 복합전투기가 도입될 경우 유인 전투기 한 대에 두 대의 무인기를 붙이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전통적인 공군 작전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전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KIDA의 이번 분석과 제안은 미래 한국 공군의 전략 방향성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는 국방 전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뉴스
    • 정치
    2024-05-13
  • 운동 습관화 전략: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상에 운동을 녹여내자
    운동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막상 운동을 가야 할 때면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운동을 습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신에게 맞는 운동 찾기 운동이 자신에게 과도하게 힘들거나 재미가 없다면 더욱 하기 싫어진다. 자신의 신체 상태, 나이, 정서에 맞는 운동을 찾아보자. 활동적인 움직임을 즐긴다면 달리기, 축구, 테니스, 복싱 등을 하고 정적인 운동을 하고 싶으면 스트레칭, 요가, 필라테스 등이 좋다. 해보지 않았던 운동을 도전하는 것도 스스로 배우고 발전하는 것을 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만성질환자의 경우 질환에 도움이 되거나 해로운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해 적합한 운동을 찾아야 한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하기 너무 거창한 운동을 하려고 하면 쉽게 지친다. 운동할 수 있는 장소를 시간 내 찾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상 운동이 많다. 특히 걷기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이다. 자연환경이 조성된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은 정신 건강과 기억력에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집 안에서는 ▲짐볼 ▲폼롤러 ▲덤벨 등 간단한 운동기구를 이용하면 좋다. 또한 평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친구와 함께 운동하기 누군가와 함께 운동하기로 약속하면 혼자 할 때보다 운동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일이 줄어든다. 운동하면서 대화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장시간 운동해도 지루하지 않다. 직접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하면서 걷거나, 영상통화를 켠 채 집에서 스마트폰을 세워두고 운동하면 심심함을 달랠 수 있다. 음악 들으며 운동하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하는 것도 좋다. 음악의 리듬과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지루함이 줄어든다. 동시에 운동 효율도 올라갈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 연구팀에 따르면, 유산소 운동(러닝머신 걷기)과 고강도 운동(레그프레스 머신)을 할 때 빠른 박자의 음악을 들으면 음악을 듣지 않거나 느린 박자의 음악을 들을 때보다 심박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심박수가 증가하면 에너지 소모가 커지는 등 체력 향상에 효과적이다. 껌 씹으며 운동하기 적게 운동하더라도 효과를 높이고 싶다면 껌을 씹으며 운동해보자. 2018년 일본 와세다대 연구팀이 21~60세 남녀 46명을 대상으로 한번은 껌을 씹고 15분간 걷게 했고, 다른 한번은 껌 성분의 가루(위약군)를 먹으며 15분 걷게 했다. 그 결과, 껌을 씹었을 때 1분당 칼로리 소모량이 평균 2kcal 많았다. 전문가들은 운동할 때 껌을 씹으면 리듬감 있는 외부 자극이 가해져 심박 수가 상승하면서 운동 효과가 커진다고 분석했다. 우선 6개월만 해보기 운동은 건강을 위해 평생 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이를 습관으로 만들려면 일단 6개월의 목표를 잡고 해보자. 실제로 운동이 습관이 되려면 평균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미국의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연구에서는 헬스장에 방문하는 빈도수가 많을수록, 방문주기가 짧을수록 꾸준히 운동을 이어갈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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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행사
    2024-05-12
  • 행정안전부, 민방위 교육 영상에서 독도 일본 영토로 잘못 표기
    행정안전부는 최근 2024년 민방위 사이버 교육용으로 제작한 영상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지도가 사용된 것을 확인하고 즉각 삭제 조치했다. 해당 지도는 미국 방송의 영상을 인용한 것으로, 지진 대응 요령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문제의 영상은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 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7.6의 강진 당시 일본 기상청이 발표한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자료에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인 것처럼 표기되어 있어, 과거에도 한국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한 바 있는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행안부는 이러한 지도를 사용한 것에 대해 "사전 검토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자료가 활용되어 이를 즉시 삭제하고 다른 교육 영상으로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행안부는 또한 "앞으로 민방위 교육 영상에 사용되는 모든 자료에 대해 보다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민방위 교육 영상 제작 과정에서의 사전 검증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며, 앞으로의 교육 자료 검토 및 사용 절차에 대한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교육 영상은 행안부가 의뢰한 세 개의 업체 중 하나가 제작했으며, 행안부는 해당 업체에 대한 지도 및 감독을 강화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행안부는 관련 내부 절차를 재정비하고, 향후 유사한 오류가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기준을 강화할 예정이다.
    • 뉴스
    • 사회
    2024-05-11
  • 다양한 학생들 참여... 스탠퍼드대 '반 이스라엘' 시위
    "반 이스라엘 시위가 아랍계나 무슬림이 주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다양한 인종의 스탠퍼드대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유대계부터 중국계, 한국계 학생들까지 다양합니다."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미국 서부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대. 지난 3일(현지시간) 스탠퍼드대 중심부의 화이트 메모리얼 분수대 앞 잔디밭을 반 이스라엘 시위대의 텐트 수십 개가 점거했다. 이곳은 대학 내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관광객들도 가장 많이 찾는 '스탠포드대 서점' 바로 앞이다. 평소에는 학생들이 한가롭게 누워 햇빛을 쬐던 이곳이 현재는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대의 현수막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장에서 만난 스탠퍼드대 컴퓨터 공학과 여학생 A씨는 이번 시위에 대학 내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아랍계나 무슬림뿐만 아니라 백인, 흑인, 아시아계까지 참여하고 있다"며, 이번 시위는 무슬림과 기독교 간의 충돌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시위 현장에서는 '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한국어로 쓰인 구호도 발견할 수 있었다. A씨는 싱가포르에서 온 중국계 미국인이다. A씨는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박해하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며 핍박했던 것과 비슷하다. 결국 일본 때문에 한국이 둘로 나눠진 것처럼 팔레스타인도 나눠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탠퍼드대는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나자 가장 먼저 반 이스라엘 캠프를 설치한 곳"이라며 "120일 만에 물러났지만 동부의 컬럼비아대나 UC버클리도 우리로부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A씨는 캠프에서 계속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학교가 우리를 징계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면서, 시위에 참여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기도 했다. 시위대는 대학이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 측은 전쟁과 관련된 기업에 직접투자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대학 측은 또한 교내 야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로 시위 참여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준비하고 있다. 스탠퍼드대는 화이트 플라자에서 하마스 조직원이 착용하는 녹색 머리띠를 쓴 개인의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유포되면서 긴장하고 있다. 스탠퍼드대는 공식 성명을 통해서 이 사진을 FBI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불안하기는 시위대도 마찬가지다. 스탠퍼드대와 UC버클리에서는 아직 컬럼비아대나 UCLA처럼 무력충돌이 일어나거나 경찰의 강제연행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시위대에 대한 위협이 늘어나고 있다. 현지 매체 KTVU2에 따르면, 지난 3일 저녁 한 남성이 시위대에 고함을 지르고 밀치는 행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의과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고 있다는 B씨는 "사실 시위는 그동안 학부생들이 참여하는 것이었고 대학원생들에게는 무관한 일이었다"면서 "하지만 미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연행되고 화이트 메모리얼 분수대 앞에 캠프가 설치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 뉴스
    • 지구촌
    2024-05-05
  • 파리 여행 중 연락 두절된 한국인 남성, 외교부 수색 나서
    프랑스 파리에서 홀로 여행하던 30대 한국인 남성이 2주째 연락이 끊겨, 외교부가 소재 파악에 나섰다.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은 현지 경찰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하는 등 가족들에게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 김기훈 씨는 홀로 여행을 하며 일본과 인도를 거쳐 지난달 17일 프랑스로 입국했다. 파리에 도착해 SNS를 통해 "프랑스에 있다"고 알렸고, 이틀 뒤엔 에펠탑 사진을 올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가족과 지인들에게 아무런 소식 없이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김 씨의 마지막 행적이 확인된 곳은 파리 1구에 있는 '로열 오페라' 카페다. 김 씨는 이곳에서 현지 시각 18일 오후 4시쯤 지인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 그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면서 가족과 지인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외교부는 사건 인지 직후부터 김 씨의 가족과 소통하며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은 프랑스 경찰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하는 등 현지 당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김 씨는 1993년생으로 키 178cm의 보통 체격이며, 팔에 문신이 있다. 대사관 측은 SNS에 실종 전단을 올리고, 김 씨의 행방을 알고 있거나 목격한 사람은 대사관으로 제보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지 경찰은 김 씨의 마지막 행적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 중이며, 가족들은 김 씨의 안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국에서 홀로 여행을 떠난 한국인 남성의 행방이 파리에서 끊겨 가족들과 지인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고 있다.
    • 뉴스
    • 사회
    2024-05-05
  • BMW그룹코리아,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최신 R&D센터 개관
    BMW그룹코리아가 22일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BMW그룹 R&D센터 코리아'를 새롭게 개관했다고 발표했다. 이 센터는 2015년 처음 인천 BMW 드라이빙센터 내에 설립된 이후 9년 만에 확장 이전하였으며, 2019년 한국 방문 당시 BMW그룹 본사 임원들이 발표한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완공되었다. 이날 개관식에는 요헨 골러 고객·브랜드·세일즈 부회장과 장 필립 파랑 아시아태평양·중동·동유럽·아프리카 지역 총괄 시니어 부사장, 다니엘 보트거 완성차 연구개발 총괄 시니어 부사장 등 BMW 본사 임원들과 BMW코리아 한상윤 대표, 부산·울산·경남 딜러 동성모터스 석상우 대표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새롭게 문을 연 R&D센터는 대지 5296㎡, 연면적 2813㎡ 규모의 단층 건물로, 사무 공간뿐만 아니라 정비·시험실, 인증 시험실, 전기차 충전기 시험동 등 다양한 테스트랩을 갖추고 있다. 센터에는 약 50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국내에 수입되는 BMW 차량의 인증과 제품 개발을 담당한다. 또한, 국내 기업, 연구시설, 대학과의 협력을 통해 내비게이션, 음성인식, 사용자환경(UI) 프로토타입 등의 개발을 진행할 예정이다. 다니엘 보트거 부사장은 “이곳에서 진행되는 테스트, 상품개발, 인증 작업을 통해 한국 협력업체들과의 협력을 강화할 BMW 테크놀리지 오피스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국내 출시 전 차량의 유지·관리 체계와 시험 절차를 구축하고, 집중 테스트를 통해 성능과 품질을 강화할 계획임을 언급했다. 이외에도 한국 자동차 관련 기술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BMW 스타트업 개러지’도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는 독일, 미국, 중국, 이스라엘,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6개 국에서 운영 중인 프로그램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판로를 만들고자 하는 테크 관련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요헨 골러 부회장은 신규 R&D센터 설립 이유에 대해 “한국은 BMW그룹 내에서 5번째로 큰 시장이며, 최신 기술에 능한 한국 고객들과 최첨단 기술을 테스트하기에 적합한 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BMW코리아는 지난해 한국 시장에서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높은 판매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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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이탈리아 G7 정상회의 불참, 대통령실 '이탈리아 결정 존중' 밝혀
    2023년 6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될 예정인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에 대해 대통령실은 이탈리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탈리아는 올해 G7 의장국으로, 아프리카 및 지중해 지역 이슈에 초점을 맞춰 초청국을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은 이탈리아가 자국의 이민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들을 중점적으로 초청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존중한다고 전했다. G7 정상회의에는 의장국이 그해의 주요 의제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국가들이 초청ehls다. 한국은 2020년 이후 세 차례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았으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의 초청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각각 의장국이던 2020년과 2021년에 초청받은 바 있다. 하지만 올해 한국은 이탈리아와 꾸준히 협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청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과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의장국이었던 해에는 모든 초청국을 아프리카 국가로만 구성한 사례를 들며, 올해 초청 결정에 대한 이해를 당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G7 플러스 외교 전략이 실패했다며 외교 정책 기조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당 대변인 강선우는 "윤석열 정부는 국제 정세를 논의할 중요한 자리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과 다름없다"며 정부의 실패한 외교·안보 정책을 성찰하고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로 정책 기조를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대통령실은 G7과의 협력이 정상회의 참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중 상시적으로 국제 현안에 대한 공조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은 올해 다수의 G7 장관급 회의에 이미 참여하였거나 참여할 예정dl다. 또한,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에서도 한국의 G7 참여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한국의 G7 참여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대통령실은 덧붙였다.
    • 뉴스
    • 정치
    2024-04-21

연예 검색결과

  • 뉴진스, 도쿄돔 팬미팅 전석 매진... 일본서 압도적 티켓 파워 과시
    걸그룹 뉴진스(NewJeans)가 일본 도쿄돔에서 개최하는 팬미팅을 전석 매진시키며 강력한 티켓 파워를 입증했다. 14일 소속사 어도어(ADOR)에 따르면, 뉴진스(민지, 하니, 다니엘, 해린, 혜인)가 내달 26일과 27일 양일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팬미팅 'Bunnies Camp 2024 Tokyo Dome'의 티켓이 모두 매진됐다. 뉴진스의 도쿄돔 입성은 데뷔 1년 11개월 만으로, 이는 해외 아티스트로서 데뷔 후 최단 기간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아직 정식 데뷔하지 않은 그룹이 이렇게 빠르게 도쿄돔을 채우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뉴진스의 일본 내 위상과 영향력은 이미 여러 무대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지난해 8월 일본 대표 음악 페스티벌 '서머소닉'의 메인 무대에 올랐을 때, 낮 12시 공연으로는 페스티벌 역사상 가장 빠르게 관객 입장이 제한될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다. 또한 뉴진스는 일본 최대 연말 가요제 '홍백가합전'에 초대되어 스페셜 무대를 꾸몄고, '일본 레코드 대상' 연말 무대에서도 3곡을 완곡 공연했다. 이는 일본에서 정식 데뷔하지 않은 해외 아티스트에게 주어진 파격적인 대우로 큰 화제를 모았다. 뉴진스는 6월 21일 일본 데뷔 싱글 'Supernatural'을 발매할 예정이다. 이 싱글에는 동명의 타이틀곡 'Supernatural'과 수록곡 'Right Now', 그리고 각 곡의 연주곡(Instrumental) 등 총 4곡이 실린다. 'Supernatural'은 세계적인 팝스타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곡으로, 프로듀서 250이 뉴잭스윙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Right Now'는 롯데 제로(ZERO) 광고 CM송으로 일부 공개되어 주목받았다. 뉴진스는 도쿄돔 팬미팅에서 5월과 6월에 공개되는 신곡 4곡을 포함해 총 24곡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일본 혼성 듀오 요아소비(YOASOBI)와 싱어송라이터 리나 사와야마(Rina Sawayama)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다. 앞서 뉴진스는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히로시 후지와라(Hiroshi Fujiwara) 등 문화 예술계 거장들과 협업 소식을 전하며 일본 데뷔 활동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이 외에도 도쿄 대형 쇼핑몰 시부야109에 뉴진스의 대형 사진이 내걸리고, 팝업스토어가 열리는 등 뜨거운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뉴진스는 오는 24일 새 더블 싱글 'How Sweet'을 발매하고 한국에서 먼저 컴백한다. 선공개된 수록곡 'Bubble Gum' 뮤직비디오는 서정적인 영상미와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폭넓은 연령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Bubble Gum'은 유튜브 한국 주간 인기 뮤직비디오 부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글로벌 주간 차트에서도 상위권을 유지 중이다. 뉴진스의 이번 도쿄돔 팬미팅 매진 사례는 일본 내에서의 높은 인기를 증명하는 동시에, 글로벌 무대에서도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팬들의 기대 속에서 뉴진스가 앞으로 어떤 활동을 펼칠지 주목된다.
    • 연예
    • 음악
    2024-05-14
  • 베이비몬스터, 글로벌 인기 고공행진…스포티파이 톱 송 차트 4주 연속 진입
    YG 신인 걸그룹 베이비몬스터의 글로벌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2일(현지시간) 스포티파이 발표에 따르면, 베이비몬스터의 미니 1집 타이틀곡 'SHEESH'는 위클리 톱 송 차트에서 76위에 올랐다. 지난 4월 11일 첫 진입한 이후 4주간 차트에 머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곡은 스포티파이 데일리 톱 송 차트에서도 32일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누적 스트리밍 횟수는 6,300만 회를 넘어섰으며, 월별 리스너(최근 28일간 청취자 수)는 연일 자체 최고 수치를 달성해 현재 1,000만 명에 육박한다. 스포티파이 외에도 주요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SHEESH'는 미국 빌보드 글로벌 200과 빌보드 글로벌(Billboard Global Excl. U.S) 차트에서 각각 33위, 16위를 기록하며 자체 최고 순위를 경신했다. 또한 국내 주요 음원 차트인 멜론, 벅스, 지니, 플로에서도 최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베이비몬스터는 다수의 음악방송 활동을 통해 완벽한 라이브 퍼포먼스와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을 입증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음악 팬들의 호평을 얻으며 인기 롱런에 돌입했다는 관측이다. 지난 4월 1일 발매된 이후 한 달이 지났음에도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어 앞으로의 추이 또한 주목된다. 한편, 베이비몬스터는 오는 11일과 12일 양일간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를 시작으로 아시아 5개 지역(일본 도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싱가포르, 타이페이, 태국 방콕)에서 팬미팅 투어를 개최한다. 또한, 일본 최대 음악 페스티벌인 '서머소닉 2024'에도 출연하며 글로벌 팬들과 더욱 가까이 호흡할 전망이다. 베이비몬스터의 성공은 YG 엔터테인먼트의 차세대 스타로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그룹의 활약이 계속되면서 글로벌 K팝 시장에서의 입지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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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
    2024-05-04

스포츠 검색결과

  • 인도네시아, 기니에 패해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23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아프리카의 기니에 0-1로 패하며 2024 파리 올림픽 남자축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경기는 9일(현지시간) 프랑스 클레르퐁텐에서 열린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치러졌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달 초 열린 AFC U-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4위를 기록하며 아시아에 배정된 3장의 올림픽 직행 티켓 중 하나를 확보하지 못했다. 대회 8강에서 황선홍 감독이 지휘하는 한국을 승부차기로 꺾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이라크에 연이어 패하며 결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기니와의 경기에서 인도네시아는 전반 29분 페널티킥으로 인해 기니에 선제골을 허용했으며, 후반에도 또 다른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위기를 맞았다. 신태용 감독은 판정에 격하게 항의하다가 연이어 경고를 받고 퇴장당했다. 퇴장 후에도 신 감독은 벤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항의를 이어갔고, 이에 인도네시아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페널티킥 실축으로 인해 추가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는 결국 패배를 막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다. 이로써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올림픽 본선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기니는 U-2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4위에 오른 후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인도네시아를 꺾으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기니의 마지막 파리행 티켓 확보로 이번 올림픽 남자축구에 참가할 16개국이 모두 확정되었다. 이번 올림픽에는 개최국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 도미니카공화국, 스페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모로코, 이집트, 말리, 뉴질랜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일본,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기니 등이 출전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9대회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은 36년 만에 올림픽 본선 무대를 관전만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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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종합
    2024-05-10
  • 전북 현대, 운명의 잔혹함에 눈물... 2025 FIFA 클럽월드컵 출전 실패
    전북 현대가 2025년 FIFA 클럽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에서의 연이은 불운과 라이벌 울산 HD의 탈락이 전북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갔다. 전북 현대는 이번 ACL 시즌에서 클럽월드컵 진출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는 클럽월드컵 출전권을 4장 배정했는데, 그중 2장은 이미 2021년과 2022년 우승팀인 알힐랄(사우디아라비아)과 우라와 레즈(일본)에게 돌아갔다. 나머지 두 장은 클럽랭킹을 기준으로 결정되었으며, 8강전 전까지 알힐랄이 1위, 전북(79점)과 울산(71점)이 그 뒤를 이었다. 전북은 울산과의 ACL 8강 1차전에서 1대1 무승부를 거둔 뒤, 2차전에서 0대1로 패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는 자력으로 클럽월드컵 진출을 확정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여전히 기회는 남아 있었다. 알힐랄이 이번 시즌 ACL에서 정상에 오르거나, 울산이 우승을 차지할 경우, AFC 클럽랭킹 3위인 전북까지 출전권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힐랄은 1차전에서 UAE의 알아인에게 2대4로 패하며 34연승의 마법을 깨고 말았고, 2차전에서 2대1로 이겼지만 합계 4대5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전북의 마지막 희망은 울산에게 걸렸다. 울산은 요코하마 마리노스를 상대로 4강 1차전에서 1대0 승리를 거두며 결승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2차전에서 0-3으로 끌려가다가 2-3까지 추격했음에도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로써 전북 현대는 2025년 FIFA 클럽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해졌다. 이번 탈락은 단순히 한 토너먼트의 실패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클럽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023~2024시즌 ACL 결승에 오른 요코하마 마리노스 또는 알아인 중 승자에게 마지막 출전권이 돌아가게 됐다. 내년 6월 미국에서 한 달간 열리는 클럽월드컵은 32개국 클럽팀이 참가하는 진정한 클럽팀의 월드컵이 될 전망이다. 전북 현대는 이번 실패를 발판 삼아 다음 기회에 더 큰 도약을 꿈꾸며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4-25

문화 검색결과

  • 리디, 일본 웹툰 시장 돌풍… ‘품격을 배반한다’ 연재 2주. 거래액 10억 원 돌파
    콘텐츠 플랫폼 기업 리디(대표 배기식)가 자사의 웹툰 ‘품격을 배반한다’가 일본 최대급 웹툰 플랫폼 ‘메챠코믹’에서 연재 2주 만에 거래액 10억 원을 돌파했다고 16일 밝혔다. 일본 골든위크 기간에 맞춰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연재와 동시에 주간 종합 랭킹 1위에 오르며 단숨에 인기작으로 떠올랐다. 웹툰 ‘품격을 배반한다’는 재정난에 빠진 가문의 헌신적인 장녀와 오만한 국왕의 외조카 간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리디의 글로벌 웹툰 구독 서비스 ‘만타(Manta)’에서 지난해 연간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하며 이미 글로벌 로맨스 판타지 팬들의 큰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인기는 일본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지난달 26일 연재를 시작한 이후 2주 만에 거래액 10억 원을 돌파하며 놀라운 흥행세를 과시했다. 일본 시장을 사로잡은 현지화 전략 리디는 ‘품격을 배반한다’의 일본 현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 독자의 특성을 고려해 많은 정보를 담은 프롤로그를 과감히 삭제하고,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는 섬세한 번역을 통해 일본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러한 현지화 전략은 작품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 리디의 또 다른 흥행작 ‘상수리나무 아래’ 역시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지난 2월 ‘메챠코믹’에서 연재 30일 만에 거래액 25억 원을 돌파했으며, 3개월 연속 월간 종합 랭킹 1위에 오르며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리디는 ‘상수리나무 아래’와 ‘품격을 배반한다’ 등 흥행작을 중심으로 일본 웹툰 시장 내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리디 관계자는 “리디의 경쟁력 있는 웹툰이 연이어 흥행하면서 일본 웹툰 시장 내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도 리디의 고품질 IP를 중심으로 참신한 작품을 선보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리디의 성공 비결은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독자의 취향을 고려한 작품 선정에 있다. 일본 웹툰 시장은 타국 작품이 자리잡기 어려운 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리디는 이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리디는 앞으로도 다양한 장르와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일본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또한,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고, 지역별 독자의 취향을 반영한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할 방침이다. 리디의 웹툰 ‘품격을 배반한다’가 일본에서 거둔 성공은 한국 웹툰의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독자의 취향을 반영한 작품 선정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앞으로 리디가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지 주목된다.
    • 문화
    • 문학
    2024-05-16
  • 문재인 전 대통령, 가지산 정상 등정과 신간 발표
    지난 8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7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발 1241미터 가지산 정상에 오른 것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인증하며 건강함을 과시했다. 이와 동시에 퇴임 후 첫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발간 소식을 공유하며, 지적 활동 능력 또한 여전함을 드러냈다. 문 전 대통령은 8일 오후 3시 42분경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재 가지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게시했다. 이 사진에는 어버이날을 맞아 아들 문준용, 딸 문다혜 씨 가족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지참한 모습이 담겼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의 등반을 '어버이날 선물'로 묘사하며 "어버이날효도는 뭐니뭐니해도 건강"이라는 해시태그를 추가해 강조했다. 같은 날, 출판사 김영사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오는 20일 출간한다고 발표했다. 이 책은 최종건 전 외교부 차관의 질문에 문 전 대통령이 답변하는 대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고록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와 안보 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의 물밑 협상과 이들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회고록에서는 ▷김정은 위원장과의 도보다리 회동,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남·북·미 판문점 회동,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일본 수출규제 대응, ▷COVID-19 방역 등 문재인 정부 당시의 주요 외교적 및 국내외 안보 이슈들이 상세히 다루어진다. 이번 가지산 등정과 새 책 발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여전히 활발한 건강과 지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보로 평가된다. 공개된 사진과 책을 통해 문 전 대통령은 문무 겸비의 모습을 국민에게 다시 한번 인식시켰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가지산 등정과 신간 발간은 그의 건강과 지속적인 사회적, 지적 기여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벤트로, 한국의 정치적 리더십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활동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문 전 대통령의 지속적인 공적 기여에 대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문화
    • 문학
    2024-05-09

과학 검색결과

  • 일본 정부의 '라인 공공재화' 시도에 대한 호리에 다카후미의 비판 재조명
    3년 전, 일본 유명 IT 기업인 호리에 다카후미 전 라이브도어 CEO가 일본 정부의 '라인' 메신저 공공재화 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한 발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호리에는 일본 정부가 온라인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며, 데이터 보안 조치 강화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2021년 3월, 라인 이용자의 개인정보가 한국과 중국에 반출된다는 논란이 일본에서 일어났다. 이와 관련해 호리에 다카후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의 라인 비난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라인은 NHN재팬(현 네이버재팬)과 일본 회사가 합병해 설립된 회사로, 한국 자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며 "한국 데이터센터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호리에는 이러한 사실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어리석고 불쌍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2021년 3월 일본에서는 라인이 중국 계열사에 AI 기반 시스템 개발을 위탁하면서 현지 기술자들에게 일본 내 이용자의 일부 개인정보 접근 권한을 준 사실이 문제가 됐다. 일본 개인정보보호법은 외국에 일본인의 개인정보를 이전할 경우 이용자 동의를 얻도록 하고, 외국에서의 접근도 제한한다. 이에 대해 호리에는 "인터넷 사업은 원래 글로벌하며, 데이터는 여러 지역에 분산해 보존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라인 같은 메신저 앱이 데이터 저장 위치를 한 국가로만 제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호리에는 일본 정부가 인터넷의 작동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라인이 한국 회사임을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데이터를 해외에 저장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의 무지를 꼬집었다. 또한, 일본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국가 기밀을 라인으로 주고받은 것 자체가 잘못이며, 기밀 데이터를 주고받을 때는 암호화된 메신저를 사용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라인을 비난하는 대신 자체 데이터 보안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리에 다카후미는 '호리에몽'이라는 별칭을 가진 일본의 유명 벤처 창업가다. 도쿄대 재학 중 웹사이트 제작회사 온더엣지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2002년 경영난에 빠진 라이브도어를 인수해 '라이브도어' 포털과 블로그로 사세를 확장하며 일본 IT업계의 큰손이 됐다. 그러나 정계 입문 후 "일본의 천황제를 규정한 헌법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등의 발언으로 자민당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이후 일본 검찰에 의해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2011년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호리에가 부침을 겪는 동안 라이브도어는 2010년 NHN재팬에 인수되었다. 당시 라이브도어의 핵심 멤버들은 그대로 남아 이후 라인에 합류했다. 호리에는 일본 정부의 라인 비난이 과잉 반응이라고 지적하며, 정부가 라인을 비난하는 대신 자체 데이터 보안 조치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라인은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호리에 다카후미의 지적은 일본 정부의 인터넷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과 데이터 보안 조치의 미흡함을 꼬집으며, 보다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글로벌 인터넷 서비스의 특성을 이해하고, 보다 강력한 데이터 보안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번 논란을 통해 일본 정부가 향후 인터넷 서비스와 데이터 보안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5-17

칼럼 검색결과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 실증사학의 대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와 일본식 실증사학의 비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증사학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가 주장하는 것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을 면밀히 보면 Wie es eigentlich gewesen, 즉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보고 판별하자는 것이다. 비판적인 방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사료 속에 담겨진 순수한 사실을 발견해 내는 것이 바로 실증사학의 기본 원리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사관을 다른 열강 국가들은 진정한 객관성이 아닌 제국주의적 지배 사관에 입각하여 객관적 타당성(Objective validity)을 내세우며 지배 논리를 정당화했다. 랑케가 개체적 사실들의 연관을 발전으로 파악했으며, 그 발전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지배적 이념을 통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이것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일본식의 실증사관(實證史觀)으로 불려 주관적으로 해석해 그로 인한 비도덕적 행위, 연구 윤리를 벗어난 행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관은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의 역사학자들이 랑케가 누군지, Empirical history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했었겠는가? 랑케가 주장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그 사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실증사학 연구 방법론은 크게 '사실해명중시' 또는 '사료비판중시'로 나뉘는데 사실해명중시론은 정확한 사료를 통해서 연역적 추론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방법을 말하고 사료비판중시론은 사료 외의 고고학적 근거, 기타 비(非) 사료적 요소로 발견적 또는 귀납적 추론으로 분석하는 방법인데 나는 둘 다 중시한다. 그래서 랑케가 주장했던 실증사학론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후대에 이용하고 주관적인 추론에 맞추는 자들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은 군국주의적 사관에 맞추어 이용되어 왔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점이 있다.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에 대하여 비교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그런 논의도 없었고 재야에서는 실증사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혼동하고 있으며 모두 제국주의적 학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직 연구방법론에 대해 학문적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은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라도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분리하여 비교하고 연구에 있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없어져야 할 것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실증이란, 확실한 고증과 토론과 논란을 통해 최대한 접근한 근거,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3요소 모두 맞물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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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 사건의 테러범들이 가게 될 흑돌고래 교도소
    흑돌고래 교도소는 러시아의 최고등급 교도소로 카자흐스탄 국경과 가까운 지역인 오렌부르크 주에 위치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연방 정부 기관 - 오렌부르크 주 러시아 연방교정청 관할 제 6 교도소'(Исправительная колония № 6)이며, 흑돌고래 교도소라는 이름은 교도소에 있는 검은 돌고래 조형물에서 따온 별칭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악명 높은 교도소는 많고, 미국의 ADX 플로렌스 교도소 같은 슈퍼맥스급 교도소가 유명하지만, 흑돌고래 교도소는 그것과 비교가 불가능한 악명 높은 시설이다. 그 특성을 보면 사실상 이름만 교도소고 실제론 합법적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가석방 금지 무기수'들이 수용되는 곳이고 교화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사형제가 있는 나라였으면 진작 죽었을 인간 쓰레기 말종들과 국외 살인범들만 고르고 골라서 평생동안 종신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최초로 이 교도소가 세워진 것은 1745년으로 이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강제 노역소였으나 코사크의 푸가초프 농민 반란이 진압된 이후인 1773년부터 교도소로 변경되었으며, 2000년 11월부터 지금의 악명 높은 교도소가 되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흑돌고래 교도소는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이며 다른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들과 차별되는 이 교도소만의 특징이 있다. 이는 가석방 불허 무기징역을 받은 흉악한 범죄자만 수감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교도소가 전반적으로 인권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교화 자체를 포기하는 정도는 아닌데, 여기만큼은 애초부터 교도소 운영 기조에 교화라는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을 때까지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갱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로 보내지지 않는다. 실제 재심으로 감형되어 더 나은 교도소로 이감된 재소자가 5명 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물론 재심 조건이 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전부 뒤집어쓴 정말 억울한 사안이거나 실제로는 종범인데 주범의 죄까지 뒤집어 쓴 수준의 공범 정도가 아니라면 재심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재소자들의 악행은 극악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다. 단순 강간, 살인 따위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평균 5명 이상의 살인 전과, 그것도 유괴살인 혹은 아동 성폭행 정도 되어야 러시아에서도 보내는 곳이다. 즉, 김근식이나 조두순 같은 자들이 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은 식인을 하거나, 테러 조직이나 마피아 등의 두목인 경우도 체포 당하면 이곳으로 끌려오기도 한다. 실제로 일가족 5명을 몰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흉악범 니콜라이 아스탄코프와 같은 극악 살인마가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 러시아 체스판 연쇄살인사건의 살인마 알렉산드르 피추시킨 역시 이곳에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밝히기로는 여기가 아니라 그나마 흑돌고래 교도소보다 처우가 더 나은 흰올빼미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한다. 현재도 사형을 실시하는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러시아가 한국과 더불어 사형 유예국으로 분류되는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이 교도소에서는 교도관이 당당하게 "수감자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고 말한다. 즉, 이 감옥은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증오하며,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도관들도 사람인지라 재소자들을 상대로 모질게 행동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그런 거 없다. 물론 이런 반응에는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그냥 살인 정도로 잡혀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돌고래 교도소와 같은 높은 보안등급에 속하는 연방 교정청 교도소에서는 수감자를 호송하는 방식은 뒤로 수갑을 채운 후 이동시 허리를 90도로 굽혀 고개가 바닥을 보게 해서 이동하는데, 이는 교도소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수감자가 쉽게 반항하지 못하게 작은 것부터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좀 심하다 싶은 수감자는 눈가리개까지 씌우게 하고, 수감자를 이동시킬 때에는 항상 수감자 1인당 6명의 교도관들이 교도견과 같이 와서 데리고 다닌다. 이렇게까지 삼엄하게 호송하는 이유는 감방이 기본적으로 2인 1실이기 때문이다. 즉, 초극악 범죄자가 둘이나 있으므로 언제든지 감방에서 사건이 터질 수 있으며 수감자 한 명을 이동시킬 때는 나머지 한 명도 잘 감시해야 한다. 또한 감시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 놓는데, 죄수는 자살 방지 명목으로 이불을 머리까지 덮을 수도 없게 되어있다. 또한, 취침 시간 외의 시간에 침대에 누우면 바로 교도관들에게 구타 당한다. 추운 겨울철 한파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난방 기구는 없고 담요도 한 사람 당 한 장씩만 제공된다고 한다. 더운 여름철에도 선풍기 하나 없는 곳에서 폭염 무더위를 버텨야 한다. 다른 교도소들과 달리 이곳의 교도관들은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무장한다. 흑돌고래 교도소에서는 2선이긴 해도 군용 화기인 AKM 자동소총과 마카로프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극악무도한 수감자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매일 하루에 15분 간 죄수들을 간이 감방에 옮기고, 그 사이에 교도관들은 그 방을 샅샅이 수색하는 작업을 한다. 만약 죄수들이 밀반입품을 감방 내에 가지고 왔을 경우 그냥 놔두면 탈옥, 자해, 폭행, 살인 등을 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CCTV로 감시하고 있으며 목을 매거나 손목을 그으면 어떻게든 와서 살려둔다. 다만 흑돌고래 교도소 소장이 "자살하고 싶다면 교도관에게 심하게 대들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총으로 바로 쏴서 죽이는 게 아닌, 본보기로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분을 구타하거나 총으로 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최악의 경우 죽지도 못하고 고통만 받는 상태로 살게 된다. 그리고 이 수색을 매일 한다. 식사 역시 물과 빵과 수프밖에 없다. 독방에 갇힌 수용자들에겐 수프밖에 안 주며, 이것마저도 식당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용이나 똥을 퍼담을 때 쓸 것 같이 생긴 통에 담아 가져온 뒤, 개 밥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퍼담아서는 쓰레받기가 달린 장대로 감방 안에 밀어 넣어서 식사를 준다. 맛도 지독하게 없어서 굶어 죽지 않고자 억지로 먹어야 할 수준이라고 한다. 죄수들의 생명 유지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맛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교도소에 공동 묘지가 딸려 있고 수감자가 사망하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시신은 교도소 내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교도소 공동 묘지에 묻힌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이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는 영원한 무기징역을 받는 곳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초강력범들은 여기만큼은 안 들어가려고 있는 없는 돈을 죄다 퍼부어가며 특급 변호사들을 고용하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김근식, 조두순 같은 아동 성범죄자들은 러시아 같음 흑돌고래 교도소에서 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을 살텐데 한국은 참 좋은 나라다. 그런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감옥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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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를 프랑스어로 재해석한 이름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세에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얼마 후 남편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던 실로 당시 드물게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길로틴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창의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온갖 혐의를 쓰고 갖은 중상 모략을 당했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시민들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이었지만 놀랍게도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죄목 하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근친상간의 혐의였다. 이는 본인의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장남인 루이 조지프는 8세에 죽었고 차남인 루이 17 또한 당시 재판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8세였다. 즉, 어머니가 8살의 아이를 겁탈했다는 얘긴데 지금 들어도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 위한 억지 죄목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7세의 변론과 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죄목 및 당시 재판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포스팅하고자 한다. 이미 그녀의 어떤 변론과 증언도 이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사형이라는 처결을 결론 지어 놓고 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상당한 양의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파리 군중들에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처형하기 위한 정당성, 국민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후대에 창작한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왕비로써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로부터 국제적인 이득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자신의 친모 및 친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22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 앙트아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 루머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 군중들은 왕비를 왜 마녀로 만들었을 정도로 증오했을까? 첫 번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를 연결시키려는 정략결혼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승계한 국가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력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인데 이는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보다 상류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정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에 대한 사실적인 부분보다는 각종 정치 선전성 루머에 의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었다. 이는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는데 이는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의 타락, 그로 인해 테레지아와 앙투아네트가 그를 멀리하자 그에 대한 앙심으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여 이 사건을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작된 루머는 진범이 앙투아네트이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재판에서 이 사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고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당시에 시대상을 지배했던 상류층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일본의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이와 같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의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生涯)』를 집필하면서 이 혁명재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자였고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하면서 그녀를 풍자했다. 대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제목만 보아도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인 장교를 비롯하여 자신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역사적 근거와 별개로 그녀를 성적으로 음탕하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로 몰고 갔다. 여기에 발기 불능인 국왕 루이 16세를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존재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수위의 성희롱을 3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고증과 전혀 상관없는 가십용 거리로 전락한 앙투아네트의 모습과, 네티즌들이 온갖 악플 및 악의적이고 근거없는 가십거리로 루머를 만들어 퍼트려 몇몇 여성 연예인들을 자살로 이끌게 만드는 요즘과 별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워 이를 기정 사실로 덮어 씌우고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 때문애 그녀를 희생시켰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그녀는 단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요즘과 같이 MZ 세대가 대두되고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별 대립 및 성 차별 등등의 각종 양극화적 논란으로 볼 때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 재판은 지금의 관점과 비교하여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였고 상류층, 부르주아 혐오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으며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 된 사회와 매우 유사한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시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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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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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소련과 중공의 분열 및 결렬은 6.25 전쟁부터 시작, 이후 더 이상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택동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6.25 전쟁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 뿐이었고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전투를 벌이는 중국군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6.25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조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기에 동북항일전선은 사실상 일본군에게 패배해 궤멸 상태에 놓였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941년 1월, 한 인물이 소련 볼셰비키에 입당원서를 쓰고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며 볼셰비키 주요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약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볼셰비키 부대에 입대가 받아들여진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되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에 등장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 인물이 바로 김일성(金日星)이다. 이 회의에서 만주를 통일 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고 가결했으며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적 최고 군사 영도 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소련 스탈린에게도 통보했다. 소련은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영내에 남쪽과 북쪽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로프스크 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에서 11월초 사이로 만주에서 패배하고 있는 항일부대들을 소련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항일부대들은 만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대조국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일본이 연해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88국제여단으로 불리는 군대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관계, 혁명 운동에 대한 성실성,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그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소련 군 당국이 김일성을 질책하자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궤변을 하여 살아 남았다고 전한다. 당시 제88 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하여 소련 장교의 지도에 따라 행해졌으며, 총검술과 실탄 사격, 전술 진공, 방수 훈련, 행군 연습, 동계 야외 노영 훈련,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멸망하고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이 제88 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련 지도부와 스탈린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소련군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게 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박헌영은 여기에서 밀려나게 된다. 김일성은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 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된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대륙에서의 내전은 종결되었다. 소련도 대조국 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지게 되었고 스탈린은 탱크와 야포, 전투기 등을 지원하여 북한 군대를 무장시켰다. 군 병력도 강력해지니 자신감이 생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71차례나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으며 모스크바 핵이 투하될 것을 염려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은 꺼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1949년 핵실험을 했고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핵무장까지 완료하게 된다. 스탈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김일성은 이번엔 모택동에게 스탈린을 설득해 달라며 부탁하게 되었고 모택동의 설득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것을 판단하게 되자 미군이 합류하기 전, 적화통일 시키면 된다 인식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6.25 전쟁이다. 중국 지도부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 무기나 장비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에게 우대 가격이라고 속이며 제3 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 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도 6.25 당시 적극적이지 못한 것에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소련 측은 대조국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였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라 재원이 부족했으며 사실 그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공 정부 창립 초기에 중국에 해준 원조(2억달러 유무상 원조)도 적지 않았고 한다. 소련도 안정되었기는 하나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더욱이 자국의 최신형 무기들의 자격증까지도 허가해주는 등, 사회주의 혈맹국인 중공에 대해서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소련은 무기만큼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특히 중국 측이 볼 때 소련이 배신했다고 본 제3 세계에 대한 무기거래는 미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제3 세계(특히 인도)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가성비 대비 파격적인 할인을 해줘야 했지만, 무기와 기술 도입원이 소련 밖에 없는 중국에는 정치 논리 대신 경제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6.25에서의 지원 문제를 두고 대립한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에 비해 중공군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게 되었지만 그나마 코민테른을 지휘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이 공산주의 시작이자 리더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생존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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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솔로몬 제도 총선, 친중파인 마네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 현 총리의 승리와 여당의 절대적인 유리한 형세
    우선 인도-태평양 지역 내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주요 대응 전략은 첫째, 아태 재균형전략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과 둘째, 가장 갈등이 심한 지역인 동남아 지역 내 미국의 영향력 유지 확대, 셋째, 중국의 시진핑 체제 하에 진행된 ‘일대일로’ 구상에 대한 적극적인 맞대응 및 팽창 저지 넷째,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를 완화하기 위한 미중 무역 전쟁의 개시 등으로 이루어진다. 중국 역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자국의 경제, 안보의 위기라는 우려 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중국의 기본 인식은 첫째, 2010년대 초반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재균형 전략과 이후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큰 차이가 없으며, 둘째, 대중국 봉쇄가 그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G2 국가로 부상하면서 독자적으로 특히 시진핑 집권기 때 ‘중국의 꿈’으로 불리우는 공세적인 대국화 전략을 추진해왔다. 중국의 이와 같은 국화 전략을 중국식 인도-태평양 전략이라 지칭하고 있다. 미국에 맞서기 위한 중국의 이와 같은 일련의 대응전략은 여러 가지로 추진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경제 활로를 열어 무역전선의 확장을 노리는 일대일로, 이어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러시아의 안보협력, 그리고 상하이 협력기구(SCO)의 확대 및 강화, 미국 · 일본 · 인도 · 호주 4개국이 중심이 된 QUAD 파열구 전략,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가장 갈등적인 지역인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반도를 포용하는 전략 등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다. 우선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을 추구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경제력을 통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인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미, 중 전략 경쟁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주변국들 중 미국과 군사협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동맹 및 안보 우호국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의 팽창적인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은 직접적인 갈등에 더해 주변국들의 우호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것에 있어서도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인 경쟁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미국과는 동맹국으로서의 관계를 고려한 군사 협력을 잘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경우, 오히려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을 끌어들여 국가 경제와 인프라의 개선을 노리고 중국의 영향력 하에 존속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호주 등이 진행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깨뜨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의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호주와 미국의 활동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게다가 파투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 매우 낙후되어 있는 자국에 투자와 더불어 어느 정도 안보에 도움을 주겠다고 미국과 호주가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소가바레 총리는 중국으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 국가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경제발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다. 이전에는 미국과의 연대를 통해 해양 영유권 확보 등 안보를 위한 군사 협력 관계를 지속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거액을 쏟아 붓고 지원하고 있으며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지원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편 호주는 오세아니아 일대에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미 갖춘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명확하게 최우선시하고 중국과의 마찰을 되도록 줄이는 방향으로 경제, 외교, 군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가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에는 무리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친중 정권이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 속에 17일에 치러진 솔로몬 제도 총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마네시 소가바레 총리가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소가바레 총리는 동브 슈아죌 선거구에서 49%를 득표해 42%를 얻은 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친중파로 구성된 여당의 승리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솔로몬 제도 민주당의 전 대표 매슈 웨일 등 주요 야당 후보들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여당에 저항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이 당선이 확정되면서 친서방, 미국, 호주를 배경으로 한 야당 의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특히 재스퍼 하이우드 선거 관리 국장에 의하면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경찰의 삼엄한 보안 하에 개표 작업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내주 초 정확한 총선 결과가 나올 예정이지만 워낙 무소속 후보가 많아 어느 당이 연정을 구성해 정권을 잡을 것인지 확정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50명의 국회의원을 뽑으며 새로 뽑힌 의원들이 현역 의원들 가운데 총리를 선출하게 되는데 현재 80% 정도의 개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현 집권 여당이 60%의 이상 득표율을 보여 승리가 거의 확정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다. 소가바레 총리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매우 우호적인 정치인 가운데 1명으로 지난 포스팅에서 솔로몬과 중국의 관계 및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일대일로의 충돌지가 솔로몬과 파푸아뉴기니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소가바레 총리는 권좌에 복귀하면 중국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더 밀착되어 미국이나 호주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 재검토 및 수정을 하거나 각종 버티기 전략을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토목공정집단(CCECC)이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 있는 호니아라 항구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면서 해군기지 건설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이전과 같이 안일하게 인도-태평양 지역을 대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중동의 위기가 계속되고 어제 20일에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호주는 자국의 북쪽 해안과 변경 지역 안보에 언제든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놓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호주는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는 중과부족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과 연계를 해야 하지만 미국이 현재 신경쓰고 있는 지역이 매우 포괄적이라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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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태국의 대나무 외교와 서구화 개혁
    최근 영화 애나 앤드 킹(Anna And The King)을 보며 느낀 점, 그리고 태국의 대나무 외교와 서구화 개혁을 연구하면서 가진 의문점이 있다. 몽꿋 왕과 다음 대인 쭐랄롱꼰 왕은 분명 태국 차크리 왕조의 명군이다. 태국의 서구화 개혁 중심에는 두 왕이 있었고 두 왕으로 인해 태국은 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 빠르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선진화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능한 중립 외교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특히 쭐랄롱꼰 왕의 시대에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섭정 기간 동안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서구의 문물과 교육 제도 등에 견문을 넓히고,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우의를 다졌다. 그는 시암으로 돌아온 후 정치와 경제, 사회적 개혁에 주력하였다. 20개의 작은 왕국들로 분산되었던 왕국을 중앙집권 체제로 변화시키고, 서구와 같은 근대화된 내각 제도를 도입하는 등 행정조직을 개편하였으며 군대는 서양식 무기와 제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태국 화폐인 바트(Baht)화를 발행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조세를 국가가 직접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지방 귀족들의 탈세를 방지하였다. 또한 국민의 교육을 장려하고, 시암 최초의 병원과 의료 교육 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노력과 전통적 노예 제도와 부복(Prostration)을 철폐했다. 이어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치외 법권의 철폐 등 불평등 조약에 대한 개정에 노력하여 국권 회복과 보존에 주력했다. 이어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시암의 근대화에 성공하였지만, 식민화를 노리는 제국주의는 철저히 배격하였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시암 내 철도 부설을 약속했지만, 철도 사업으로 인한 시암의 주권 약화를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대신 영국 단독 사업이 아닌 유럽의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철도 부설 계획 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주권을 잃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취하는 균형외교를 펼쳤다. 186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지배하에 있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노로돔(Sianuk Nordom) 국왕이 축출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의 프랑스로 양도가 공식화되었다. 당시에 캄보디아를 구성하고 있는 바탐방, 씨엠립, 스리소폰은 시암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강압에 의하여 이 지역들이 최초의 영토 양도가 되었다.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복속시켰다. 쭐랄롱꼰 왕은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태국 근대사의 기점을 이룩한 국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 근대화는 사실 일본보다 앞섰다. 지정학적으로 일본은 태국의 뒤에 있었기에 서구열강의 영향력이 태국보다 늦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몽꿋 왕이나 쭐랄롱꼰 왕의 시대에 빠른 근대화가 이루어진 태국은 현재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가 되어있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보다도 더 떨어지는 경제력에 엄청난 빈부격차는 태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되었다. 태국과 일본은 근대화가 된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10년은 태국이 앞서 있었지만 일본에게 추월당했고 우리 한국에게도 뒤쳐지는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이 되었다. 우리와 일본보다도 앞서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우리와 일본보다도 태국은 왜 뒤쳐진 국가가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태국의 현대사를 좀 더 연구하면 알 수 있을듯 싶은데 쉽사리 이 미스테리가 해소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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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 대만 고산족의 역사
    B.C 10,000년경 동아시아의 인류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던 기후대인 한랭한 빙하기가 끝난 것이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도처에서 홍수가 범람하고 삼림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대량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가 급상승하여 대만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이러한 섬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현대 대만인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역사 사료로 볼 때 중앙산맥 기준으로 동쪽에는 이와 같은 원시적 신석기 시대가 진행되고 있고 서쪽에는 3세기부터 이전부터 사료적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동쪽은 3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나는데 중국은 당시 삼국 시대였는데 이 때 오나라의 황제인 손권은 위온(衛溫), 제갈직(諸葛直)에게 1만 명의 병력을 내려준 뒤 그들에게 대만 섬 등을 돌며 백성으로 삼을 사람들을 잡아오라고 시켰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위온과 제갈직은 1만 병력 중 과반 수 이상을 잃는 등 상당히 고전 한 끝에 대만 원주민 1천 명을 잡아다 손권에게 보냈으나 손권은 이 원주민들에 대해 병력을 많이 희생한 것 치고는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위온과 제갈직을 교수형에 처했다. 당시에 백월족들이 상당수 대만에 건너왔는데 17세기~19세기 사이에 대만 섬으로 한족들이 이주하면서 원주민들의 한족화가 진행되었다. 한족들은 평지에 살던 원주민을 평포번(平埔蕃), 한족 화 되지 않은 고산지역의 원주민을 생번(生蕃) 또는 고산번(高山蕃)이라 부르며 구별했다. 이후 일본의 식민 통치 당시 일본인들은 평포번을 헤이호 족(平埔族), 고산번을 타카사고 족(高砂族)이라고 부르며, 언어, 문화, 풍속에 따라 부족을 분류했다. 현재의 대만 원주민 분류는 이 시기의 연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을 산지족(山地族) 또는 산포(山胞)로 부르다가 1994년에 원주민들의 민족명 개정 요구에 따라 중화민국은 이들의 정식 명칭을 산지 족에서 원주민 족으로 개칭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고산족이라 부른다. 이들의 언어는 모두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 속하지만, 각 언어가 많이 다르고 사회조직이나 문화도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고산족은 전통적으로 농경이나 수렵에 종사하면서 독자적인 문화와 제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있었던 일본의 식민 통치와 중화민국의 통치 아래 근대화 과정에서 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했다. 당국의 성급한 근대화 정책은 고산족의 권리를 다수 침해하였으며, 대만 사회 안에서 원주민에 대한 차별도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산족 청년들을 중심으로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이 시작되었고, 중화민국 당국도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산족의 권리 향상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을 대만 원주민족(臺灣原住民族)으로 승인하고, 평지인과는 달리 원주민으로 적(籍)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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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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