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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의 독도 방문, 일본 기자 질문에 대처법
    2024년 5월 13일,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양국 간의 긴장이 다시금 고조되었다. 이날 일본 후지TV의 기자가 조국 대표에게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라고 질문하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조 대표는 이에 대해 "누구시죠? 누구신지.. 일단 처음 뵙는 분이라서"라며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자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 장면은 일본 FNN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FNN은 조 대표를 '양파 남자(玉ねぎ男)'에 비유하며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 한국 제3당 조국 대표 다케시마 향해 출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양파 남자'라는 별명은 조 대표가 딸 조민 씨와 배우자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가 입시 비리에 연루되고, 본인도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등 여러 의혹이 계속 드러나는 것을 빗대어 일본 언론에서 사용해온 것이다. 독도 방문의 의의와 조국 대표의 발언 조국 대표는 독도에 도착한 후 성명을 통해 "우리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독도는 바로 그 부속 도서 중 하나"라며 독도의 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불과 2년 만에 다시 일본 식민지가 된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국익과 국토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하라"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또한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1년 팔도총도, 1737년 조선왕국전도 등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사료들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그리워하는 것이냐. 대한민국의 해방을 부인하고,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이냐"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일본에 경고한다. 이제 그만 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일본 정부의 반응 일본 정부는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외무성은 "사전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강행됐다"며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으로 독도는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 간의 영토 분쟁과 역사 인식 차이를 다시금 부각시키며 양국 관계에 긴장감을 더했다. 일본 언론은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며 한국 정치인들의 행동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한편, 한국 내에서는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국토 수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조국 혁신당 대표의 독도 방문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양국 간의 역사와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양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해결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뉴스
    • 정치
    2024-05-15
  • 북한, 영국 외무부 장관 발언에 "우크라이나가 영국 무기로 러시아 공격할 수도" 발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영국 지원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한 영국 외무부 장관의 발언에 발끈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국제문제전문가 심민의 글을 통해 "영국은 유럽 대륙을 전쟁의 화난 속에 깊숙이 몰아넣고 있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부 장관을 비난했다. 심민은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캐머런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심민은 캐머런 장관의 발언을 "호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발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캐머런 장관이 키이우 방문에 앞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음을 언급하며, "미국 상전의 입김이 톡톡히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러시아 영토로 확산되고 다시 유럽지역으로 타번져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캐머런 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캐머런 장관의 언급을 두고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며, "우크라이나 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직접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캐머런 장관은 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군사 지원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의 이 같은 입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체적인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과 러시아의 반응은 영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 뉴스
    • 지구촌
    2024-05-07
  • 이재명 대표의 당대표 연임, 긍정적인 반응 속 다양한 전망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당 내 여러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당대표 연임과 관련된 의견을 물으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당 일각에서는 이 대표의 연임을 지지하는 '이재명 추대론'까지 나오고 있으며, 친명계 의원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재명 대표, 연임 질문에 긍정적 반응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지난 3일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이재명 대표가 최근 대표직 연임과 관련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며 "'연임이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홍 의원은 "후임 당 대표로 누가 오든 무엇인가 잘못되면 '당의 최대 주주인 이재명 탓'이라고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 대표도 '그럴듯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친명계 인사들의 연임 지지 이재명 대표의 연임에 대해 민주당 내 친명계 인사들의 반응도 관심을 끈다. 추미애 경기 하남갑 당선인은 "당의 구심점은 늘 유력 대권후보였다"고 말했다. 조정식 의원은 "대표 연임에 대한 공감대가 넓혀지고 있다"고 했다. 정성호 의원은 "당내 통합을 확실히 강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들 모두 이 대표의 연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연임, 전례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 민주당에서 당대표 연임은 1995~2000년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직을 지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다만 이 대표가 연임할 경우 2027년 대선에 나서려면 1년 전인 2026년 3월까지 사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임에 대한 전문가들의 엇갈린 분석 이 대표의 연임을 두고 정치권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공진성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2일 KBC 뉴스와이드 플러스에 출연해 이 대표의 연임설에 대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공 교수는 "이 대표의 당대표 출마는 아직 (가능성이) 반반인 것 같은데, (연임에) 나서는 것이 본인에게 특별히 더 유리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당대표 연임을 하지 않아도 대선 후보가 되는 데에 전혀 장애는 없을 것 같다"면서 "다른 사람이 대표가 된다고 해서 이재명 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선 후보로 민다거나 이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당원들이 내버려 둘 것 같은 상황도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득보다 별로 실이 더 크면 컸지 연임을 꼭 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공 교수는 "눈치를 보기 위해서 계속 연임해야 된다고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하면서 자꾸 연임론에 불을 붙이는 주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거기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 정말 나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나 이렇게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고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반면 해당 방송에 출연한 설주완 변호사는 이 대표가 연임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설 변호사는 "이 대표는 대선을 위해서, 또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사법리스크 때문에 구속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 대표를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들에 대해 공감한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는 "지난해 9월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사유 중 하나가 '당대표'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설 변호사는 "대권으로 가는 길만 남은 이 대표로서 지금 남아 있는 가장 큰 위협은 사법리스크 뿐"이라면서 "철저한 대비를 한다는 차원에서라면 당 대표를 이어서 가겠다. 그리고 민주당 대선 경선 룰에 따라 1년 전에 대표직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에 대표직을 1년 정도 더 하다가 그만 둘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당대표 연임에 대한 질문은 당 내 여러 정치인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을 낳고 있다. 친명계 인사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득실을 두고 엇갈린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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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5-06
  •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첫 영수회담 후 소통과 협력 강조
    2023년 4월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첫 공식 영수회담을 개최했다. 이날 회담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것으로, 약 2시간 15분 동안 지속되었다. 회담 후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이같은 만남을 자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차후에는 국회나 사랑재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고 홍철호 정무수석이 TV조선 '뉴스 9'를 통해 전했다. 회담의 배경과 진행 이번 회담은 더불어민주당과의 긴장된 관계를 완화하고 국정 운영에 있어 협치의 필요성을 인식한 윤석열 정부의 구상 아래 이루어졌다. 대통령실에서는 정진석 비서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참석했으며, 민주당에서는 진성준 정책위원회 의장, 천준호 대표비서실장, 박성준 수석대변인이 배석했다. 정진석 비서실장은 KBS '뉴스9'에 출연하여 회담의 분위기를 "매우 진지하고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다음 회담에서는 더 자유로운 형식을 모색할 수 있음을 시사했으며, 두 정치 지도자만의 개별적인 만남도 고려 중임을 밝혔다. 주요 논의 사항 및 의견 교환 회담에서는 주로 국가적 중대사안과 민생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특히 이태원 참사 특별법과 관련해 윤 대통령은 일부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독소 조항만 해결된다면 합의 처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고 정 실장은 전했다. 또한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에게 가족 및 주변 인사의 의혹 해소를 강조했으나, 이 내용은 비공개 회담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의료 개혁과 같은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의 인식이 일치했으며, 이재명 대표는 적극적 협력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정 실장은 "민생 문제 해결에 대한 두 지도자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언급했다. 민정수석실 부활 논의 윤 대통령은 회담에서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민정수석실의 부활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도운 홍보수석은 "김대중 정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정수석실의 필요성을 재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계획 및 기대 대통령실은 다음 달 윤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이하여 기자회견을 개최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수석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정책 방향과 성과를 국민에게 직접 전달할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이번 회담은 윤석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간의 긴장된 관계를 완화하고, 앞으로의 국정 운영에 있어서 양당 간의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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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4-30

문화 검색결과

  • 세종대왕 탄신 627주년 기념, 다채로운 공연 및 한글문화 체험행사 개최
    오는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 627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공연과 한글문화 체험행사, 특별행사가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일환)은 세종대왕의 탄신을 축하하고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다. ‘세종대왕 나신 날’은 스승의 날이기도 하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겨레의 큰 스승으로 여겨 이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한글의 창제와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한글박물관에서 열리는 공연은 용산구립소년소녀합창단의 축하노래로 시작된다. 이어 '무형유산 도감'팀의 길놀이, 줄타기, 사자춤, 버나놀음 등으로 구성된 <조선서커스 솟대쟁이패: 백희(百戲)> 공연과 마술사 지혜준의 <한글 마술공연>이 진행된다. 사전 예약한 관람객이 도포를 입고 과거시험을 치르는 참여형 역사체험극 <세종, 인재를 뽑다>도 공연된다. 이날 행사에서는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박물관을 걷는 <세종대왕 행차재현>도 준비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세종대왕과 함께 걸으며,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최만리를 설득하는 세종대왕의 일화를 볼 수 있다. 또한, <한글 OX 문제풀이>, <세종대왕 생신상 사진찍기>, <한글 네컷 사진 상자>, <세종대왕 대형블록 맞추기> 등의 행사가 열린다. <한글 OX 문제풀이> 생존자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한글 관련 기념품이 제공될 예정이다. 한글박물관 야외마당에서는 한글을 주제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체험부스에서는 한글 달고나 뽑기, 한글 탁본체험, 모래상자 한글체험(샌드박스), 한글 도장찍기, 한글 책갈피 만들기 등 다채로운 한글문화 체험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성공하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다. 한글박물관의 안승섭 기획운영과장은 “가족들과 함께 즐기면서 세종대왕의 나신 날을 기리고, 한글의 소중함과 우수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참가비가 없으며, 자세한 내용은 국립한글박물관 누리집 또는 기획운영과(02-2124-6291)로 문의하면 된다.
    • 문화
    2024-05-07

칼럼 검색결과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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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27
  • 소련과 중공의 분열 및 결렬은 6.25 전쟁부터 시작, 이후 더 이상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택동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6.25 전쟁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 뿐이었고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전투를 벌이는 중국군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6.25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조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기에 동북항일전선은 사실상 일본군에게 패배해 궤멸 상태에 놓였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941년 1월, 한 인물이 소련 볼셰비키에 입당원서를 쓰고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며 볼셰비키 주요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약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볼셰비키 부대에 입대가 받아들여진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되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에 등장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 인물이 바로 김일성(金日星)이다. 이 회의에서 만주를 통일 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고 가결했으며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적 최고 군사 영도 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소련 스탈린에게도 통보했다. 소련은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영내에 남쪽과 북쪽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로프스크 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에서 11월초 사이로 만주에서 패배하고 있는 항일부대들을 소련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항일부대들은 만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대조국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일본이 연해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88국제여단으로 불리는 군대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관계, 혁명 운동에 대한 성실성,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그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소련 군 당국이 김일성을 질책하자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궤변을 하여 살아 남았다고 전한다. 당시 제88 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하여 소련 장교의 지도에 따라 행해졌으며, 총검술과 실탄 사격, 전술 진공, 방수 훈련, 행군 연습, 동계 야외 노영 훈련,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멸망하고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이 제88 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련 지도부와 스탈린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소련군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게 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박헌영은 여기에서 밀려나게 된다. 김일성은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 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된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대륙에서의 내전은 종결되었다. 소련도 대조국 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지게 되었고 스탈린은 탱크와 야포, 전투기 등을 지원하여 북한 군대를 무장시켰다. 군 병력도 강력해지니 자신감이 생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71차례나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으며 모스크바 핵이 투하될 것을 염려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은 꺼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1949년 핵실험을 했고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핵무장까지 완료하게 된다. 스탈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김일성은 이번엔 모택동에게 스탈린을 설득해 달라며 부탁하게 되었고 모택동의 설득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것을 판단하게 되자 미군이 합류하기 전, 적화통일 시키면 된다 인식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6.25 전쟁이다. 중국 지도부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 무기나 장비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에게 우대 가격이라고 속이며 제3 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 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도 6.25 당시 적극적이지 못한 것에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소련 측은 대조국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였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라 재원이 부족했으며 사실 그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공 정부 창립 초기에 중국에 해준 원조(2억달러 유무상 원조)도 적지 않았고 한다. 소련도 안정되었기는 하나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더욱이 자국의 최신형 무기들의 자격증까지도 허가해주는 등, 사회주의 혈맹국인 중공에 대해서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소련은 무기만큼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특히 중국 측이 볼 때 소련이 배신했다고 본 제3 세계에 대한 무기거래는 미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제3 세계(특히 인도)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가성비 대비 파격적인 할인을 해줘야 했지만, 무기와 기술 도입원이 소련 밖에 없는 중국에는 정치 논리 대신 경제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6.25에서의 지원 문제를 두고 대립한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에 비해 중공군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게 되었지만 그나마 코민테른을 지휘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이 공산주의 시작이자 리더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생존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7
  •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와 미하일 1세의 통치 시대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Pozarski) 공작은 이듬해인 1613년에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했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All free classes)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이 때는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조선 왕조에 해당하고 광해군 시기로 생각된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Ⅳ세의 첫 번째 황후의 오빠의 손자이다. 그는 최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친 필라레트 로마노프(Filaret Romanov)가 돌아와 1613~1633년의 기간에 공동차르(Cotsar)로 선언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국민군과 그리고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 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국민과의 협조를 통한 통치보다는 모스크바 대공국 때 굳어진 전제 정치에 의존했다.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왕조 탄생의 토대로 자리 잡았던 국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지만, 모스크바 귀족 가문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로마노프 가문의 선조는 ‘코빌라(암말)’ 라는 별칭을 가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Andrei Ivanovic)이다. 그는 1347년 벨리키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공후였던 시메온 이바노비치 고르디(Simeon Ivanovic Gordi)를 위해 봉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손인 표트르 니키티치 자하린(Piotr Nikitic Jaharin),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Milkail Piodrvic)의 부친인 총주교 필라레트(Pillaret)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부칭에서 ‘로마노프(Romanov)’라는 성(姓)을 정한 것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노프 가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면서부터이다. 1547년 로만 유리예비치의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Romanov Jaharina)가 이반 4세의 왕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류리크 왕조가 절멸하고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로마노프 가문은 왕권 경쟁의 후보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613년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표트르비치 로마노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전제군주제의 기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섭정이나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시기도 있었고, 재능 있는 인물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 사안은 군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국가 발전의 행로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제정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이 ‘아버지 차르’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의지하는 가부장적 국가형태가 조성되었다. 전제정치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정치 체제를 지탱한 것은 관료제였다.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위해 복무할 관료들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전제정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다. 이들 귀족 관료들의 부패와 피지배 계층과의 갈등은 원활한 국가 통치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시기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정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왕조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관료제 확립은 국가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유럽러시아 지역과 예니세이 강 서안의 서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대외 정책은 이른바 ‘동란 시대’로 알려진 폴란드-스웨덴과의 전쟁과 침략으로 함락된 북서부 지역의 영토 회복과 남부 국경 지대의 국방력 강화에 집중되었다. 초기 통치자들은 군사력 강화 정책을 통해 스웨덴, 폴란드에 대항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척은 성공적으로 이끌어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한편 이러한 로마노프 왕조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 확보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북서부의 스웨덴, 서부의 폴란드, 남부의 오스만투르크와의 관계는 러시아 대외 정책에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였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러한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러시아를 유럽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 1세는 오스만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아조프 해 연안 지역과 잉구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란디야(Esttandia), 리플란디야(Liplandia) 지역 등 러시아 북부 및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 2차 투르크 전쟁의 승리로 흑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세 차례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함으로써 벨로루시 및 발트 해 지역의 영토들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東) 그루지야(1801년), 핀란드(1809년), 베사라비야(Besarabia, 1812년), 아제르바이잔(1813년), 폴란드 왕국(1815년)을, 알렉산드르 2세는 중앙아시아, 북카프카스, 극동, 바투미 등을 병합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존속했던 300여 년 동안 러시아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으로 발트 해와 흑해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볼 때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이래로 정교회는 모든 러시아 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상의 관습에서부터 교육, 문학, 예술들, 특히 회화, 건축, 음악, 정치에 이르기까지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전제 체제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정교회를 특별히 중요시하며 통치의 기제로 활용했다. 특히 차르였던 알렉세이(Alexei) 시대에는 니콘의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권에 대한 세속 권력의 우월성을 확인했고, 표트르 1세는 신성종무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이었던 교회 행정 체계를 정부산하 기구로 편입시켰다. 교회와 그 수장인 총주교의 권위를 세속 권력에 복속시킴으로써 군주의 위상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실질적인 정교 왕국이자 간접적인 제정일치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전개 과정에서 러시아는 평화적 교류나 물리적인 충돌을 통해 다양한 이민족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유입된 타 문화의 요소들이 고유의 슬라브적 문화를 기반으로 융합됨으로써 러시아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의식주의 물질적 요소에서부터 언어나 관습의 제도적 요소, 종교적 관념과 가치관의 정신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융합의 흔적들은 현대 러시아의 삶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수입된 서구의 문화는 러시아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 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이러한 성과는 문화 예술의 강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였으며 역으로 모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어 다른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 스타니슬라브스키와 체호프의 사실주의 연극 미학, 디야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말레비치와 칸딘스키, 샤갈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은 로마노프 왕조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가 서유럽 가문과의 혼인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는 차르 미하일 1세의 통치 시기였다. 차르의 부친 필라레트는 국제정치 속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왕가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실제로 서유럽, 북유럽 왕실과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 러시아와 스웨덴 간의 북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외교를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한 후 쿠를리안디야(Kurliandia)로 알려진 지금의 라트비아 서부 지역, 게르만 계 공국들을 점령하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표트르 1세와의 회동을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 했다. 그리하여 표트트 1세와의 회동을 요청했고, 1709년 10월 마리엔베르데르(Marienberder)에서 만난 두 군주는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약정하고, 그 증표로서 왕실 간의 혼인을 합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1710년 10월 프로이센 왕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표트르 1세의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둘째 딸 안나(Anna)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안나의 언니 예카테리나도 국익의 차원에서 독일 메클렌부르크(Meclinburg) 시베린(Siberin) 공국의 카를 레오폴드(Karl Leopold)와 1716년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브라운시베이크(Brawnsibeik) 공후 안톤 울리히(Antonio Julichi)와 결혼하여 이후의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 이반 6세를 낳았다.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와 딸 안나도 서유럽의 유력 가문과 혼인시켰다. 첫째 부인 예프도키야(Yevdokiya)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세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처제인 브라운시베이크 공녀 소피아(Sopia)와 1711년 결혼했다. 이들의 아들은 1727년 표트르 2세로 러시아 황제에 즉위했다.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스웨덴 왕 카를 12세의 조카인 독일 고르시테인(Gorsitein) 고토르프(Gotorv) 공후 카를 프리드리히(Karl Pridrichi)와 1725년 결혼했다. 이처럼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유력 가문과의 혼인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성립되었다. 이것은 로마노프 왕조가 유럽의 유력 혈통 속에 용해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직계는 1730년 표트르 2세 사후 단절되었다. 후계와 연관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 이반 5세의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했다.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1730~1740)와 증손자 이반 6세(Ivan VI, 1740~1741)의 재위 기에는 브라운시베이크 가문의 대리인들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통치했다. 1741년 러시아 내부의 정변으로 인하여 제위는 표트르 1세의 후손들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직계 후손들을 가지지 못한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beta Petrovna)는 제위를 자신의 조카인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공국의 표트르 3세에게 물려주었다.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가문은 덴마크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의 직계로 표트르 3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로마노프의 러시아 제위를 계승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명문 가문과의 혼인 전통은 계속되었다. 파벨(Pavel I) 1세는 뷔르템베르크(Biltemberg) 공국, 알렉산드르 1세는 바덴(Baden) 공국,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 왕국, 알렉산드르 2세는 게센(Gesen) 공국, 알렉산드르 3세는 덴마크 왕국, 니콜라이 2세는 게센 공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들 가문과 인연을 가지게 됨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는 유럽 여러 가문들과 혼혈된 가문으로 점점 그 순수혈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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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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