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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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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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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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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4
  •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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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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