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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7
  • 솔로몬 제도 총선, 친중파인 마네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 현 총리의 승리와 여당의 절대적인 유리한 형세
    우선 인도-태평양 지역 내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주요 대응 전략은 첫째, 아태 재균형전략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과 둘째, 가장 갈등이 심한 지역인 동남아 지역 내 미국의 영향력 유지 확대, 셋째, 중국의 시진핑 체제 하에 진행된 ‘일대일로’ 구상에 대한 적극적인 맞대응 및 팽창 저지 넷째, 미국의 대중 무역 적자를 완화하기 위한 미중 무역 전쟁의 개시 등으로 이루어진다. 중국 역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자국의 경제, 안보의 위기라는 우려 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중국의 기본 인식은 첫째, 2010년대 초반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재균형 전략과 이후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큰 차이가 없으며, 둘째, 대중국 봉쇄가 그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G2 국가로 부상하면서 독자적으로 특히 시진핑 집권기 때 ‘중국의 꿈’으로 불리우는 공세적인 대국화 전략을 추진해왔다. 중국의 이와 같은 국화 전략을 중국식 인도-태평양 전략이라 지칭하고 있다. 미국에 맞서기 위한 중국의 이와 같은 일련의 대응전략은 여러 가지로 추진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경제 활로를 열어 무역전선의 확장을 노리는 일대일로, 이어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러시아의 안보협력, 그리고 상하이 협력기구(SCO)의 확대 및 강화, 미국 · 일본 · 인도 · 호주 4개국이 중심이 된 QUAD 파열구 전략,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가장 갈등적인 지역인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반도를 포용하는 전략 등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다. 우선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을 추구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경제력을 통한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인 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미, 중 전략 경쟁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주변국들 중 미국과 군사협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동맹 및 안보 우호국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의 팽창적인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은 직접적인 갈등에 더해 주변국들의 우호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것에 있어서도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인 경쟁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미국과는 동맹국으로서의 관계를 고려한 군사 협력을 잘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경우, 오히려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을 끌어들여 국가 경제와 인프라의 개선을 노리고 중국의 영향력 하에 존속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호주 등이 진행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깨뜨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의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호주와 미국의 활동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게다가 파투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 매우 낙후되어 있는 자국에 투자와 더불어 어느 정도 안보에 도움을 주겠다고 미국과 호주가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소가바레 총리는 중국으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 국가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경제발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다. 이전에는 미국과의 연대를 통해 해양 영유권 확보 등 안보를 위한 군사 협력 관계를 지속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거액을 쏟아 붓고 지원하고 있으며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지원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편 호주는 오세아니아 일대에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미 갖춘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명확하게 최우선시하고 중국과의 마찰을 되도록 줄이는 방향으로 경제, 외교, 군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가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에는 무리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친중 정권이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 속에 17일에 치러진 솔로몬 제도 총선에서 연임을 노리는 마네시 소가바레 총리가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소가바레 총리는 동브 슈아죌 선거구에서 49%를 득표해 42%를 얻은 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친중파로 구성된 여당의 승리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솔로몬 제도 민주당의 전 대표 매슈 웨일 등 주요 야당 후보들도 의원에 당선되면서 여당에 저항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이 당선이 확정되면서 친서방, 미국, 호주를 배경으로 한 야당 의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특히 재스퍼 하이우드 선거 관리 국장에 의하면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경찰의 삼엄한 보안 하에 개표 작업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내주 초 정확한 총선 결과가 나올 예정이지만 워낙 무소속 후보가 많아 어느 당이 연정을 구성해 정권을 잡을 것인지 확정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50명의 국회의원을 뽑으며 새로 뽑힌 의원들이 현역 의원들 가운데 총리를 선출하게 되는데 현재 80% 정도의 개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현 집권 여당이 60%의 이상 득표율을 보여 승리가 거의 확정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다. 소가바레 총리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매우 우호적인 정치인 가운데 1명으로 지난 포스팅에서 솔로몬과 중국의 관계 및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일대일로의 충돌지가 솔로몬과 파푸아뉴기니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소가바레 총리는 권좌에 복귀하면 중국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더 밀착되어 미국이나 호주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 재검토 및 수정을 하거나 각종 버티기 전략을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토목공정집단(CCECC)이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 있는 호니아라 항구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면서 해군기지 건설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이전과 같이 안일하게 인도-태평양 지역을 대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중동의 위기가 계속되고 어제 20일에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호주는 자국의 북쪽 해안과 변경 지역 안보에 언제든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놓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호주는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기는 중과부족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과 연계를 해야 하지만 미국이 현재 신경쓰고 있는 지역이 매우 포괄적이라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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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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