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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 위의 자유, 그의 몰락
    윤석열 전임 대통령은 지난 3월 8일 법원과 검찰의 기묘한 법 해석으로 구속 취소된 후 124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다. 우리의 언론은 그 사건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 싶어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만 훝어 봤다. 조선일보는 ‘머그샷 찍고 에어컨 없는 3평 독방 수감’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도 대동소이하였다. 아침은 미니치즈빵, 찐감자라고 한다. 중앙일보는 ‘외환죄, 국힘 내란공모 의혹 정조준’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한겨레 신문은 ‘외환 혐의 정조준’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법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한 인간의 몰락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론마다 차이가 났다. 하지만 어느 신문에서도 법 위에 군림하면서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던 전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실은 기사는 보지 못했다. 그는 재임 중에 무엇보다도 ‘자유’를 많이 외쳤다. 비상계엄 선포 이유 중에도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그는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다’라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에는 반공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외부의 어떤 강제가 없는 상태를 포함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유방임이다. 그것이 바로 소수 기득권이 강조하는 강자의 자유이다. 그것이 자유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자유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버틀런드 러셀은 자유주의 철학을 처음 포괄적으로 종합한 사람으로 로크를 꼽았다. 그의 <통치론>이란 책이 18세기 미국 정치가들의 필독서로 소개되었다고 하니 러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로크의 <통치론>은 그 당시 왕권신수설을 믿고 따랐던 필머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다. 로크가 비판한 필머의 자유 개념은 ‘권력자의 자의적 자유’였다는 점에서 윤석열은 필머와 닮았다. 어쩌면 윤석열은 21세기에 왕권신수설을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랜 검찰 생활을 통하여 자신이 타인을 죄인이라고 명하면 그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에 자신이 신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검찰 생활에 익숙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로크는 <통치론> 4장에 이렇게 말한다. “자유란 로버트 필머 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며, 어떠한 법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 정부 아래에서 인간의 자유란 일정한 규칙, 곧 그 사회에서 설립된 입법권에 따라 제정되고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자유는 일정한 법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그러한 법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보장해주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 위에 군림했던 윤석열과 김건희에게 법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고, 또한 나아가서 정당화시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도구로서의 법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정적들을 괴롭혔나? 조국 가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권력에 빌붙는 속성을 버리지 못한 언론과 일부 지식인들은 또 얼마나 권력에 충성을 했는가? 자유는 결코 나만의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강조할 때, 그리고 그런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휘두르는 자유는 타인에게는 흉기로 다가올 뿐이다. 늑대의 자유는 양떼의 죽음이다. 로크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로크는 이성의 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즉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의 이익이 충돌을 일으키지만, 이성의 법을 통해 그 충돌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로크는 몽테스키외에 앞서 법과 재판관, 법을 행하는 권력이란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권력 분립을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로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물론 로크는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경쟁을 옹호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로크의 생각이 영국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놓게 되었다는 점과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한 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시 음미해 볼 만하다고 본다. 윤석열의 몰락은 한 시대의 불행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우리는 이를 계기로 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나친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지나친 경쟁은 많은 인간을 불행에 빠트린다. 자유는 자유로운 경쟁이 아니라 협동 속에서 꽃이 핀다. 자유는 자기 실현이다. 어떻게 자기 실현을 하는가? 데카르트 식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이제는 버려야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관계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제 자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더 이상 윤석열과 같은 불행한 인간이 사회 지도층에 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0
  • 공동체 속의 자유
    200년 전 미국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토크빌의 글에서 그 당시의 삶을 그려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운영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미국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그들이 아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물론 토크빌의 글이 그 당시 프랑스의 귀족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을 과도하게 미화했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토크빌이 본 미국은 평등한 사회였고, 자유와 자치가 함께 어우러진 사회로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토크빌에게 자유란 개인을 위한 사적 자유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을 자치를 염두에 두는 공적 자유였다. 최소한 이웃과 함께하는 자기 실현을 꿈꾸는 자유였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보여 주는 행동은 200년 전의 미국보다 한참을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의 50년 전 모습도 어쩌면 200년 전의 미국의 모습과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가 살았던 김천이라는 지방 소도시는 개인보다는 마을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어머님은 이웃집의 밥그릇 숫자까지 모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가메실’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컸다. 집에 감나무가 12그루 있었으니 그 규모는 짐작이 될 것이다. 감을 수확하는 시절에는 이웃들과 함께 수확하고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물론 나도 이웃의 잔칫날에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네 뒷동산에 올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면서 놀았던 기억, 동네 큰 나무에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힘차게 그네를 타는 모습들,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모여 빨래하던 장면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마을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여, 요즘은 공동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는 개인 중심의 자유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자연과학의 발달이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새로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홉스와 로크, 에담 스미스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가 자기 생존권을 강조했다면, 로크는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고전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점차 짙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자유 실현이 대다수의 부자유라는 자유주의 역설이 그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부는 점차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가난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자유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자유주의가 그 무렵 등장했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영국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개혁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이론이었다. 홉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가 외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사회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며 사회적 책임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지나친 이기주의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사회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홉하우스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았다.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사회 정의는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과는 개인의 몫이지만, 사회가 만들어 낸 부는 사회구성원 공동의 것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개인의 성과에는 개인의 노력 외에 사회적 몫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디.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 공동체의 기여도 있으니 그 기여분은 세금으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론은 사회복지의 확대를 통한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자는 이론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론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사회적 자유주의로 일컫는다. 이런 자유주의의 변천사 중 아주 작은 한 부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는 사회 속에서의 자기 실현이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은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 즉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 속에 고립된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다. “개인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관계 속의 개인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달라진다. 나는 불교의 연기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러한 관계 맺음의 조건은 수시로 변화하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미물의 생명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는 세계관에 대한 페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서구 중심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관계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이다. 그 속에서 고전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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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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