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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한 요란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는 ‘우연적 요란’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모노는 우주 속에서 우연에 의해서 생명이 탄생했으며, 진화의 원동력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란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았다. 우리는 일상 삶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여러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다양한 이야기가 곧 바로 우연한 요란들이었다. 다양한 우연들의 집합으로써의 우연한 요란에는 수많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삶이 곧 책이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듣게 된 90세가 넘은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 이상의 것이었다. 친구는 주말마다 시골 별장에 사시는 아버님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의 나이를 물었다. “너 나이가 몇이냐?” “아버지! 제 나이도 이제 60 후반입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하셨다고 한다. 나는 친구 아버지의 웃음이 어른으로서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다음 친구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심어놓은 토마토 모종을 보고 친구는 깜짝 놀랐다. 너무 촘촘히 심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아버님에게 “아버지! 토마토 모종을 훌륭히 심어놓으셨군요!”라는 말만 했다. 아버님은 흐뭇하셨을 것이다. 내 나이에도 딸들에게 듣는 칭찬은 내 마음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90이 넘은 나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듣는 칭찬은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을 것이다. 친구는 다음 날 혼자서 토마토 모종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다시 정리했다.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공감과 참된 상호인정이라는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 이 돈이 무슨 돈인가요?”라고 물었다. 친구의 아버님은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셨다. “학교 발전기금으로 내려고 준비해 둔 돈이지.” 아버지의 통장을 보니 아버지는 여러 차례 학교 발전기금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90세가 넘으신 어르신의 모교에 대한 사랑은 놀라웠다. 친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학교에 발전기금을 내고 있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아버님은 또 허허 웃으시며서 “그럼 그 돈 너 가져라!”라고 하셨다. 그때 친구는 아내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여보! 아버지가 우리에게 큰돈을 주셨으니 우리 집 한 채 또 마련합시다.” 300만 원에 불과한 돈이지만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하겠다는 아들의 말은 분명히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다. 훌륭한 아버지의 훌륭한 아들이었다. 옆에서 함께 친구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저 친구의 이야기를 네가 똑똑히 기억해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이야기,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편이다. 학부 때 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나의 졸업논문 제목이 ‘이성개념을 중심으로 한 마르쿠제 비판이론의 전개’였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강조한 논문이었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이라는 유령은 아직도 내 주변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친구는 “따지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나는 웃음으로만 화답했다. 때에 따라서는 왜라는 질문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시골에 사는 친구들 고집은 대단해요! 생각이 서로 다르면 아예 서로를 배제시켜 버려요!” 우리 나이에 생각이 다른 친구와 굳이 함께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그들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철학을 전공한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있겠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 나도 갑작스럽게 대답했다. “서울에 사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생각의 차이를 경험하기에 마음의 유연성이 잘 훈련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적은 시골의 친구들은 우리보다는 마음의 유연성을 갖기가 힘들지 않겠냐?”라고 답을 했다. 필터의 버블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모든 시비를 떠나 아무런 경계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비를 떠난다”는 말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무사안일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끝없는 변화와 자연의 조화에 대한 깨우침이다. 다름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면서 다르지만 함께 가는 길이 곧 자연의 길이고, 그러한 조화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장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장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상호존중, 상호인정, 차이에 대한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이 시대에 필요한 모든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져 오직 자신의 생각에만 도취되어 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타인과의, 더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관계중심적인 세계관이 미래사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지 않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4-05-12
  • 도시 속의 새로운 생명
    문래동에는 방림방적으로부터 기부 채납받은 4,000여평의 빈 땅이 있다. 지난해까지는 그곳의 절반은 도시 텃밭으로 사용하고, 절반은 구청 창고로 사용하였다. 그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수년 동안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직 중에 서남권 균형개발의 목적으로 제2세종문화회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2021년 11월에 중앙심사투자까지 완료하였다. 그런데 서울시장이 오세훈으로 바뀌자 서울시 의회를 통과했던 그 계획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여의도에 대형 선착장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계획과 연계하여 제2세종문화회관을 여의도에 건설하겠다고 지난해 초에 발표했다. 그것도 여의도 공원의 절반쯤을 허물고 그곳에 제2세종문화회관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시장이 바뀌면 예전 시장 시절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계획도 손바닥 뒤집듯이 그렇게 바꿔버려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제2세종문화회관을 여의도에 건설하겠다고 한 후에 영등포 구청장은 구청 창고로 사용하던 곳을 도시 정원으로 만들겠다고 발표를 하고, 곧 공사를 진행했다. 이제 내일모레면 공식 Open식을 개최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그곳 바로 옆에 있다. 아파트에서 나와 2차선에 불과한 도로만 건너면 정원이다. 나는 매일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정원 만드는 과정을 모두 다 알고 있다. 공사비는 20억 이상 소요되었을 것이다. 공사비는 서울시의 지원받았다. 같은 당 소속의 구청장이 제2세종문화회관을 여의도로 이전할 것을 허락해 준 대가로 그 공사비를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문래동 중심에 인공 자연이 형성되었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은 작지만 아름다웠다. 2,000평의 규모는 정원으로 꾸미기에는 작지만, 그래도 구청 창고로만 활용했던 공간을 주민들에게 개방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2,000평의 둘레에는 황톳길이 만들어졌고, 그 안쪽으로는 우레탄으로 만든 길도 조성되었다. 일부 공간에는 각종 운동기구도 설치되어 있고, 어린이 놀이터와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과 함께 꽃밭도 조성되었다. 황톳길 둘레에는 수많은 나무가 심어졌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제외하면 모두 잔디가 심어졌다. 황톳길 둘레에는 가로등도 설치되었다. 또한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흰색 지붕을 가진 조그마한 건물도 지었고, 그 옆에는 공중화장실도 만들어 놓았다. 곳곳에 설치된 등받이 의자와 지붕을 가진 쉼터도 만들어졌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푸른빛이 나는 인공 자연이었다. 나는 매일 그곳을 내려다보면서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손자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간단한 운동과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그림을 그려보곤 했다. 이틀 전에는 햇빛이 매우 따가웠다. 아내와 함께 우연히 그곳을 지나쳤는데, 나무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뭇잎에 축 처져 있었다. 나무를 심는 과정도 모두 지켜봤기 때문에, 나무 둘레에 그름도 주고 물도 많이 뿌렸던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뜨거운 햇빛에 나무는 힘겨워 보였다. 아내가 이야기했다. “나무도 제집이 아니면 처음에는 몸살을 앓는데요.” 그럴 것이다. 그곳의 나무들도 자기가 살던 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비라도 내려서 나무가 뿌리를 잘 내리고, 나뭇잎도 생기를 찾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정원에 조성된 꽃들과 나무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아내가 부른다. “여보! 어쩌나? 저것 봐요. 나무가 쓰러졌어요!” 나는 창가로 가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그렇게 심하게 불지는 않았지만. 나무 두 그루가 꽁꽁 묶인 뿌리를 드러내 놓고 쓰러져 있었다. 다른 나무들을 삼각형 모양으로 나무막대로 지지해놓은 상태였기에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진 나무는 지지대가 없었다. 왜 저 나무들만 지지대가 없었을까? 나무의 고통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한 피터 싱어나 톰 레건의 책을 아직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동물에게만 고통을 느끼고 그 나름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고통을 느끼며 그 나름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식물들의 생태계도 전쟁과 공생을 함께 한다고 한다. 자연의 모든 생태계가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자연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인간만이 이 지구의 주인이다. 기독교는 잘 모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불교적 세계관은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 불교의 근본이 연기설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라는 관계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노자와 장자도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무위자연과 제물론의 논리가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기에 여기서는 그만두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픔을 느낀다는 생명 중심적인 세계관만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새롭게 조성된 인공 자연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뿌리를 내리기를 소망해 본다. 생명 그 자체는 쉬움 없이 흐르는 물과 같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불꽃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4-05-06
  • 함석헌의 씨알과 비폭력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생명이다.” 당연하지만 아름다운 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씨ᄋᆞᆯ학당에서 주최하는 ‘함석헌과 생명평화’라는 타이틀의 정기 강연회를 개최한다. 첫 강연자로 나선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생명으로서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우희종 선생은 폴 틸리히의 ‘ground of being-itself’를 언급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함석헌은 왜 생명이라 말하지 않고 씨ᄋᆞᆯ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어제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순간에도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조금 무식한 질문을 하였다.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는 우리들의 희망 종단(우희종)에서 참석한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만큼 우희종 선생과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다. “장자는 氣가 천지 사이에 충만하고, 氣가 모이고 흩어져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고, 천지의 만물은 모두 하나의 氣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장자의 氣와 유사한 것입니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던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주체적인 것이며, 생각하는 씨ᄋᆞᆯ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氣에는 유물론적인 부분이 있지만, 함석헌의 씨ᄋᆞᆯ에는 유물론적인 요소가 없어 보였다. 강의가 끝난 후에 나는 씨ᄋᆞᆯ학당 김영덕 연구원장으로부터 <함석헌 연구>라는 책을 한 권 받을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씨ᄋᆞᆯ은 생명 그 자체이며 역사를 살려내는 역사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ᄋᆞᆯ은 땅과 하늘과 바람과 물 즉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생명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씨ᄋᆞᆯ의 출발은 “함께 살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조금은 부족하여 서재에 있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이라는 책을 펼쳐봤다. “유영모는 생명을 물질과 정신의 결합으로 보고, 생명이 물질에서 정신으로 고양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유영모의 이러한 생각이 함석헌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유영모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연결시켜보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단순한 생명은 아니라 온 우주와 함께 하나가 되는 과정 속에 있는 진화하는 씨ᄋᆞᆯ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ᄋᆞᆯ이어야 산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우희종 선생은 비폭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폭력이라고 하였다. 깨어있지 않음과 연결된다. 어리석음, 정상적인 관계의 단절, 왜곡된 믿음 등이 폭력이란 것이다. 폭력의 정의가 그렇다면, 비폭력은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이고, 그러한 관계에 깨어 있음을 위한 실천과 행동에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약자의 체념이나 무관심도 폭력의 행사라고 보았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비폭력은 너와 나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차별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말을 우희종 선생은 파사현정, 즉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불교의 용어를 언급하면서 angry Buddha를 이야기했다. angry Buddha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이끄는 분노의 행동이야말로 비폭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비폭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희종 선생은 슬라보에 지젝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잠시 언급만하고 가볍게 지나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오늘날 사회에서 객관적 폭력인 상징적이면서 구조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주관적 폭력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음의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에로스에서 티모스로의 전환이다.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전환에는 가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면서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직적 폭력이고, 공손한 미소가 야수적인 감정 폭발보다 더욱 폭력적이란 말이다. 그 책의 마지막 대목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는 angry Buddha와유사하게 읽힐 수도 있다.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사상이 생명 감수성을 높이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씨ᄋᆞᆯ들은 서로 주고받고, 같이 울고, 같이 느낄 때 부분의 합보다 위대해지고 부분은 전체 안에, 전체는 부분 안에 존재하게 되어 개인의 소리는 전체의 외침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우희종 선생의 강의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다. 뒤풀이로 우희종 선생과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환경철학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네스는 생태운동을 표층과 심층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동식물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심층생태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우희종 선생과 헤어졌다. 우희종 선생을 통한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강의는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4-27
  • 다양성의 간극!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
    동네 주민을 위해 오백만 원을 가지고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오백만 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돈일 수도 있고 적은 돈일 수도 있다. 나는 동네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초청하려는 예술인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개인 독주회를 개최하는 수준 높은 연주자들이었다. 연주자 세 명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그들을 초청하는데 오백만 원은 매우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런 연주자들을 잘 아는 분의 도움으로 오백만 원의 경비로 동네 공원에서 주민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동네 축제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예상하지 못한 반발이 있었다. “왜 오백만 원을 예술인들에게 주는가?” “오백만 원을 가지고 주민들이 만드는 축제를 기획하면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할 수 있다.” “왜 내가 외국 여행가는 날 개최하느냐?” 심지어 동네에서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견을 제시했다. “그 돈이면 우리도 멋있게 행사를 꾸려나갈 수 있다.” 여러 가지의 반대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반대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었다. 축제를 개최하고자 하는 날짜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내가 계획했던 그 날이 우리 단체의 한 명이 외국 여행을 가고 없는 날이었다. 그는 날짜를 변경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도 그의 이야기를 존중해서 예술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스케줄 때문에 일정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날짜로 강행하고자 하였다.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의 내심은 이번 행사에 행정관료나 정치인들도 초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중심이 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이 행사의 취지가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바람잡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가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었던 마음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도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듯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의 기획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예술인과 함께라는 나의 기획의 핵심인 예술인들도 사실은 동네 주민이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반대 논리에 온종일 답글로 대응했다. 그것도 어느 시간이 지나니 지치게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중이 절을 바꾸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결단했다. 내가 떠나기로 했다. “알아서들 잘하세요!” 자신들이 행사의 중심에 서고 싶다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주민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나 역시 주민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다만 주민을 위한다는 말에 있어서 그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또한 나는 행사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을 원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행정관료나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자기 얼굴을 내보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떤 단체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단체는 그런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모두 읽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짐작할 뿐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 나오는 전경과 후경의 그림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이리 보면 사람 얼굴이고 저리 보면 컵인 것과 유사했다. 그 관점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하루를 시달리고 나니 그 일들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기로 결단했던 것이었다. 나의 결단을 뒤늦게 알게 된 한 의원이 전화가 왔다. “위원장님! 너무 아쉬워요. 위원장님이 계셔서 그나마 동네의 예술인들과 주민들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왔는데...”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지요! 이제는 말 많은 것이 싫어졌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봤다. “말 많은 것이 싫다.” 그렇다. 이제는 정말로 말 많은 것이 싫어졌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졌다. 내가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하나?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도피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를 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했다. 나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처럼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나를 버릴 수 있는 나를 찾는 것이 참된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천여 년 전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영원한 것은 없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조금 전의 나와는 다르다. 그렇게 매 순간 변화하는 무상의 나가 나에 집착한다는 것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여기 이 순간의 깨달음이 소중하다. 그것이 게슈탈트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최근의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의 입에서 그리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잘 해결하시지 그랬어요!” 아내의 말에 수긍이 갔다. 잘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과 인내라는 노력이 필요했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이 머릿속에서는 쉬운데, 현실에서 서로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아내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부처는 아마도 아상을 가지라고 말했을 껄요?” 서로 웃고 말았다. 현실 정치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가 현실 정치에서 실행된다면 우리는 극락에서 살게 될 텐데, 그것이 안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창밖으로 비 온 뒤의 회색빛 구름 사이로 푸른색 하늘이 웃는 모습을 하고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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