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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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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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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Generation Z: Navigating a New World
    Previous generations reveled in tales of their student years, reliving love stories that didn't go as planned, laughing about regrettable tattoos, and reminiscing about late-night adventures that defined their youth. But what will Generation Z, born into a world of unprecedented challenges and rapid technological change, remember from these formal years. Stephen Bartlett, a 31-year-old British entrepreneur and podcaster, shares a poignant reflection on his Gen Z experience. His student years were overshadowed by the coronavirus pandemic, which confined him to his room, turned university meals into solitary events, and transformed short walks into the highlight of his social life. For many in Generation Z, crucial milestones such as their student years and the brief window of carefree living before entering the workforce were marked by isolation and disruption. One might assume that these hardships forged a generation of hyper-resilient individuals ready to tackle the world's challenges. However, Bartlett argues that this isn't necessarily the case. In a recent article in The Economist, Generation Z is described as the “least resilient” generation. Bartlett echoes this sentiment, noting that he and his peers are often viewed as sensitive, socially awkward, and prone to hiding behind screens. Critics suggest that frequent job changes, absenteeism, and mental health issues are now common among Gen Z, attributing these trends to a deeper malaise. The Struggles and Criticisms of Gen Z Bartlett paints a somber picture of his generation, describing how many struggle to integrate into the adult world. The intense focus on academic success often leaves them ill-prepared for real-world problem-solving and critical thinking. The emphasis on university education saddles many with debt for degrees that may not align with their career paths, discouraging risk-taking and unconventional career choices.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Moreover, Bartlett points out that Gen Z is often uncomfortable with discomfort. Raised in a culture that tends to invalidate differing viewpoints, many lack exposure to healthy dialogue, which is essential for developing resilience and the ability to respectfully disagree. The heightened focus on mental health, while important, can sometimes create a sense of fragility. Bartlett acknowledges that mental health awareness is crucial, but he warns that the constant analysis of emotions can lead to an overwhelming sense of vulnerability. The perpetual engagement with social media exacerbates this issue, fostering a desire for instant gratification and eroding attention spans. This constant digital presence has real-world implications. For instance, job applications have become gamified, which can diminish the seriousness with which they are approached. This shift affects work culture, reducing the ability to persist through challenging tasks or endure less satisfying roles. Adapting to Modern Challenges The result, Bartlett argues, is a generation unaccustomed to discomfort, lacking perseverance, and unprepared for life's inevitable challenges. Adding to this is an ongoing anti-establishment sentiment that portrays society as fundamentally flawed and oppressive. Social media and around-the-clock influencers distort perceptions of reality, exacerbating these feelings. Fifty years ago, generational divides were defined by differences in culture, music, and fashion. Today, technology and a paradoxical overload of information have deepened these divides, altering how we live, think, and interact. In this landscape, truth has become subjective, and independent thought seems restricted. Society appears more divided and uncivilized, with individuals increasingly distant from one another, avoiding meaningful interactions. Yet, there is hope. If Generation Z can cultivate the resilience and determination necessary for modern life, they may navigate these challenges successfully. Embracing discomfort, fostering critical thinking, and learning to engage constructively with differing viewpoints will be crucial. By doing so, perhaps we can ensure that the next generation will have a brighter, more connected future to look forward to, with stories of resilience and triumph to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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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Mystery of the Pyramids Unveiled: The Hidden River of the Sahara
    The Enigma of the Pyramids' Location Discovery of the Lost River The Role of the Ahramat River Unearthing the Past The River's Disappearance A New Chapter in Egyp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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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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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실시간 칼럼 기사

  • Echoes of Sorrow: A Portrait of Grief in the Gaza Strip
    In a haunting snapshot frozen in time, the agony of a war-torn land finds its voice. The World Press Photo's prestigious first prize emerges as a testament to the raw power of visual storytelling, casting a searing light on the grim reality of conflict. Within the frame captured by the lens of Reuters photojournalist Mohamed Salem, a Palestinian woman stands as a solitary figure amidst the debris of devastation. In her trembling arms, she cradles the lifeless form of her precious niece, a tender soul extinguished in the brutal chaos of an Israeli raid on the Gaza Strip. The photograph, an indelible imprint of grief etched upon the face of humanity, unveils the heart-wrenching narrative of Inas Maamar and her beloved five-year-old niece, Sally. Together, they embody the tragic collateral of war, victims of an unforgiving barrage that shattered their home and their lives in one merciless stroke. Mohamed Salem's lens becomes a window into the soul of anguish, capturing the anguish of a grieving aunt in a moment of profound despair. It is a tableau of sorrow that transcends the boundaries of language, speaking volumes of the unfathomable loss endured by countless families amid the relentless tide of conflict. Amidst the chaos and clamor of a war-torn landscape, Salem's gaze fixes upon Inas Maamar, a beacon of sorrow amidst the tumult. Her anguished embrace of the lifeless child speaks of a love that knows no bounds, a testament to the unyielding bonds of family amidst the ravages of war. For Mohamed Salem, a Palestinian native steeped in the harsh realities of his homeland, this photograph embodies more than mere documentation—it is a chronicle of resilience in the face of adversity, a stark reminder of the human cost of conflict. In his lens, he captures not just a moment but the essence of a people's struggle for survival. As the echoes of gunfire fade and the dust settles, the image remains—an indomitable testament to the power of visual storytelling. In its stark simplicity lies a profound truth: that amid the chaos of war, it is the human spirit that endures, unbroken and unbowed.
    • 칼럼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19
  •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 멕시코 혁명(Revolución mexicana)
    20세기 초까지 절대적으로 멕시코를 지배했던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íaz, 1830~1915)는 1860년대 프랑스 제2 제국인 나폴레옹 3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당시 프랑스는 멕시코 제2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앉혔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즈는 멕시코 제국을 제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의 절대 권력 독재 통치 시기라고 한다. 물론 중간에 후안 네포무세노 멘데스(Juan Nepomuceno Méndez, 1820~1894)가 두 달 동안 대통령 직위에 있었으나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고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Manuel González Flores, 1833~1893) 가 1880~1884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마누엘은 디아즈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행했다. 디아즈 정권은 산업을 진흥시키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으며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외자 도입으로 인해 철도 부설이 진행되는 등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면 빈부격차는 극도로 확대되었다. 디아즈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 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원래부터 토지 소유라는 개념이 없었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즈는 '토지제도의 근대화(Modernización del sistema territorial)'라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이후 외국 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상당수의 멕시코 농민의 대다수가 토지를 잃고 '페옹(Feong)'이라 불린 농업 노동자들로 전락했다. 이처럼 돈을 버는 자들은 대장원을 소유한 '아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 뿐이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즈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거나 잇달아 선거로 인한 투표들을 조작하는 등 멕시코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치를 펼쳐나갔다. 토지를 되찾기 위한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디아즈에 저항했으나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시프리아노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Cipriano Ricardo Flores Magón), 엔리케 플로레스 마곤(Enrique Flores Magón), 가스파르 헤수스 멜초르 플로레스 마곤(Gaspar Jesús Melchor Flores Magón) 등 이른바 '마곤 형제'는 아나코-코뮤니즘(Anarco-Communism)을 내세워 멕시코 농민들을 선동했고 이 형제들의 사상을 마곤주의(Magonismo)라 불렀다. 1900년 반(反) 디아즈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출간했지만 디아즈 정권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1905년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즈가 권력을 쥐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멕시코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1906년 미국 자본의 소유였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다. 디아즈의 후원을 받은 광산 회사 측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는 군인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발포해 죽이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령에도 권력 욕심을 놓지 못한 디아즈는 191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시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1857~1930)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즈와 대선에서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신흥 대농장주이자 청년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1873~1913)가 등장했다. 마데로의 지지세는 34년째 지속된 디아즈 독재 정권에 질린 멕시코 여론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에 디아즈 정권은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야당 대표를 탄압한 디아즈는 자신이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 대선은 누가 봐도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자 석방된 마데로는 미국 텍사스로 망명하여 10월 25일에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했고 이에 따라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멕시코 북부 도시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은 무력에 의한 디아즈 정권의 타도를 천명한 무력 투쟁 선언이었다. 미국에 있던 마데로의 주위에는 같은 목표를 가진 멕시코인 동지들이 집결했는데 그 사이 멕시코 국내에서는 마데로에게 동조하는 운동이 차례로 발생하게 된다. 11월 18일에 마데로의 동지였던 아길레스 세르당(Aguiles Cerdán)이 푸에블라 시에 있던 저택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가 발각되면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멕시코 시티의 남쪽 모렐로스 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북부 일대에서는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Francisco Pancho Villa, 1878~1923), 파스쿠알 오로스코 바스케스(Pascual Orozco Vazquez, 1882~1915), 베누스티아노 카란자(Venustiano Carranza, 1859~1920),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 1880~1928) 등이 차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디아즈 대통령의 나이는 80세를 넘겼기 때문에 정치적인 수완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디아즈 대통령의 측근이 그의 정치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멕시코 각지의 수많은 세력들은 '디아즈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마데로를 중심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부유 계층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이는 디아즈를 축출한 후에도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미국의 국제적인 파워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구스타보 아돌포 마데로 곤살레스(Gustavo Adolfo Madero González, 1875~1913)를 미국에 보내 상, 하원에서 로비 활동을 펼치게 했다. 이를 통해 '트러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사업가 찰스 란네트 플린트(Charles Ranlett Flint, 1850~1934) 등의 재벌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의 혁명가들에게 불리하지 못하게 법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북부 지역에서 메히칼리, 시우다드 후아레스, 치와와 등이 혁명군에게 함락되었으며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쿠아우틀라를 점령했다. 이처럼 혁명군의 세력이 넓어질수록 그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혁명군들은 디아즈 축출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하나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마곤주의자들은 메히칼리와 티후아나를 포함하는 코뮌 자치정부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반 디아즈 정권을 창립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가장 하층민이 세운 이 자치정부는 디아즈가 물러난 이후 마데로에 의해 진압된다. 혁명을 진압할 수 없었던 디아즈는 자신이 권좌에서 축출로 인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고 결국 마데로와 협상을 벌였다. 그동안 디아즈의 평화(Pax Porfiriato)라는 영광에 안주해 왔던 디아즈 정권에게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하는 혁명군을 진압할 수 있는 군사적인 준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부군인 연방군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이긴 무적의 군대라는 명성의 이면에 군대 조직에서 장교들의 무능과 부패, 군 지휘부의 노쇠화 등 여러 병폐들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허점들은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주요 전투에서 정부군이 잇달아 혁명군에게 패배하고 혁명군이 농촌 지방의 대부분과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자 지방 군벌, 소농민, 상인, 관료층, 전문 지식인, 자본가 계층이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이 점차 혁명군에 우호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1년 5월 21일 체결된 시우다드 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으로 인해 5월 25일 디아즈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하게 된다. 이처럼 디아즈가 퇴진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 1863~1939)가 5개월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선거에서 마데로가 압도적인 표차를 당선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디아즈의 축출은 멕시코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으로 중남미 최초의 대규모 혁명으로 남미 국가들의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의 저항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티브로 남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18
  • 2024년 4월 17일 크로아티아 총선에 대한 분석
    2024년 크로아티아에서는 4년마다 치러지는 국회 선거가 4월 17일, 오늘 개최된다. 이번 크로아티아의 선거는 EU 의회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함께 열리는 중요한 정치 일정으로 나타난다. 크로아티아의 국회는 크로아티아 의회(Hrvatski sabor, 흐르바츠키 사보르)라고 하며, 짧게 줄여서 사보르(Sabor)라고도 한다. 크로아티아 국회는 총 151석으로 구성되며 총 12개 선거구로 분류 되어진다. 이 중에서 140석은 10개 선거구에서 선출되며 3석은 해외 거주 유권자를 위해서 남겨두고 있고 8석은 소수민족을 위한 특별 선거구에서 선출된다. 이번 2024년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6,884개의 투표소가 설치되며 각 투표소에는 10명의 선거 관리관이 배치된다. 선거운동은 공식적으로 4월 6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까지 이어지며 현재는 모두 종료된 상태이다. 그러나 151개 의석을 가진 의회로 볼 때 정당들의 난립이 심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의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이 무려 20개이며 정원 709석의 독일 연방의회인 하원과 비교해 볼 때 무려 원내정당이 6개이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이후 정치적 혼란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 보여 진다. 크로아티아의 국가원수는 크로아티아 대통령이고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이 총리보다 우위에 있지만 의원내각제 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의전서열이 가장 앞서 있을 뿐, 독자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실질적으로는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가 국가 원수로써 여당을 이끌고 국정을 정리해 나갈 뿐이다.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 소속이다.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은 현 크로아티아 집권 정당으로 자유 보수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 이념을 갖고 있다. 2018년까지는 민족보수주의나 국가주의같은 우익적인 사상도 추구했었지만 현재는 여러 정당들과 연립 상태로 크로아티아 인민당(Hrvatska narodna stranka)과 연립여당을 이루고 있으며 인민당의 이념은 진보 리버럴에 가깝다. 거기에 현 자그레브 시장인 반디치 밀란(Vandac Milan)이 창당한 반디치 밀란 365과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인 크로아티아 기독교민주당과도 연합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민주연합당은 중도우파 정당이지만 중도좌파 정당들과 더 잘 연합하고 있는데, 이는 좌파가 분열된 크로아티아의 정치 환경 때문으로 분석된다. 반대로 여당인 민주연합을 상대할 거대 야당은 크로아티아 사민당(Socijaldemokratska partija Hrvatske)이다. 크로아티아의 중도좌파 성향으로 현재 대통령인 조란 밀라노비치(Zoran Milanović)가 속해 있는 정당이며, 당 대표는 페자 그르빈(Peza Grvin)으로 2020년부터 현재까지 역임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사민당은 흔히 냉전 시절 공산당의 후계 정당으로 설립되었고 공산당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2000년 총선과 2011년 총선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총선에서는 모두 패배했을 정도로 당세가 약했다. 여당인 민주연합당이 경제적 인플레와 부패척결에 실패함으로써 점차 세력을 잃어 2010년대 들어서는 여당 지위를 놓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과 다툴 정도로 당세가 커졌다. 당시 사민당의 대표였던 조란 밀라노비치(Zoran Milanović)가 2020년 대선에 출마하여 52.7%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 사민당은 크로아티아 농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과 연립하면서 민주연합에 정면 도전할 정도로 당세가 강화되었다. 우선 총선을 앞두고 발표된 주요 여론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집권당인 보수 성향의 민주연합당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연합당은 최소 59~62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측되며, 이는 2020년 선거 예측에 실패한 이후 다소 회복된 수치로 예측된다. 반면, 주요 야당인 좌파 성향의 사민당은 46석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주요 정당들의 예상 의석 수는 인민당 11석, 농민당 9석, 암스테르담 동맹 8석, 기독교민주당 2석, 반디치 밀란 365당 1석 등으로 예상되었다. Nova TV-Ipsos의 조사에 따르면, 주요 정당의 선호도는 민주연합당이 29.8%, 사민당은 19.4%로 나타났다. 총리 후보로는 현 총리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가 31.7%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현 대통령 조란 밀라노비치는 23.5%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이 상태대로라면 큰 이변이 없는 한, 민주연합당이 승리할 것으로 보이는데 2020년 조란 밀라노비치의 대통령 당선 때와 같이 언제든 뒤집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마냥 안도하기는 어렵다. 우선 크로아티아는 진보적 혁신보다 안정을 원하며 조란 밀라노비치 또한 뚜렷한 성과를 낸적이 없기 때문에 지난 2020년 때 대선 라이벌이었던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Kolinda Grabar-Kitarović)를 재등판 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Kolinda Grabar-Kitarović)는 누구보다 미국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친미파 정치인으로 2008~2011년 사이에 주미 대사로 근무하며 미국 정, 재계 인사들과 많은 인연을 쌓아왔다. 더불어 여당인 민주연합당 자체가 친서방, 친미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세르비아와 적대관계로 지내왔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에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평행 노선으로 지내왔다. 오히려 성향으로 볼 때 조란 밀라노비치가 중국, 러시아에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조란 밀라노비치가 갑자기 친러적인 발언을 하며 우크라이나에 무기 수출을 거부하고 러시아를 지지했다. 다만 크로아티아는 대통령은 국방, 외교에 상징적인 권력만 있고 실권은 총리인 안드레이 플렌코비치가 쥐고 있는 상황이다. 반대로 플렌코비치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다. 작년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서방의 무기 지원은 전쟁을 장기화할 뿐"이라며 "재래전에서 러시아가 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러시아를 해체한다거나, 정부를 바꾼다거나, 러시아를 여러 개로 찢어놓는다고 말들을 하지만, 무엇을 목표로 하든 모두 미친 짓"이라 발언했으며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는 두 번 다시 우크라이나 영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핀란드와 스웨덴의 NATO 가입이나, 자국에서 우크라이나군을 훈련하려는 EU의 방침에 대놓고 반대했다.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모어인 크로아티아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며 특히 러시아어를 아주 나이스하게 구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여당인 민주연합당에서 보기에 밀라노비치는 언제든 친러파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았던 인물인 것이다. 나토는 최근 우크라이나군에 대한 훈련을 크로아티아에서 실시하고 있다. 이것을 밀라노비치는 오래 전부터 매우 못마땅해왔다. 2024년 크로아티아 총선의 최우선 과제로는 제도적 부패 척결, 시스템 개선, 공공 보호, 폐기물 문제 해결, 공정성 확보 등이다. 가장 큰 문제는 대외정책보다 국내의 부패와 전쟁에 있으며 물론 크로아티아의 국회의원들 대부분 부패와 연관되어 있기에 이를 척결하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투표는 4월 17일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진행되며, 선거일은 공휴일로 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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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8
  • 카잔의 타타르인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유산
    볼가 강과 우랄 산맥은 유라시아를 동서로 나누는 천연 경계이다. 이 자연의 가로막을 넘어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이들이 몽골인이고,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팽창해간 이들이 러시아인이다. 볼가가 러시아의 '어머니의 강'이 된 것도, 우랄이 '러시아의 척추'가 된 것도 몽골의 유산인 셈이다. 서쪽에 뿌리를 내린 몽골계 타타르는 남쪽에서 전도된 이슬람을 수용했다. 타타르는 곧 투르크인, 북방 초원을 가로지르던 몽골의 혼혈 종족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는 터키부터 동쪽으로는 신장 위구르까지 널리 포진했다. 이들 영토 사이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르기지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자리한다. 대부분이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캐밥과 샤슬릭을 먹으며 이슬람을 믿고 살아간다. 그 투르크-유라시아 세계의 한복판에 자리한 도시가 바로 카잔이다. 유럽과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한다. 카잔은 일찍이 볼가 강을 통한 중계 무역이 발달했다. 카잔은 북방의 러시아 상인과 남방의 아랍 상인들이 교류하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이스탄불과 모스크바를 매개했던 모피 무역이 이 지역에 유명했다. 카잔은 경제적 번영은 문화적 활기로 이어진다. 이곳은 러시아에서 이슬람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곳곳에 도서관과 마드라사가 들어서 있다. 카잔은 16세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르네상스를 이끄는 거점 도시였다. 이곳에서부터 이슬람이 유라시아 초원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간 것이다. 알타이와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까지 이슬람 교인과 무슬림 상인이 퍼져나갔다. 투르크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아랍의 지역 문명에서 세계 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카잔은 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를 선도하는 전위 도시였다. 러시아는 카잔을 복속시킴으로써 세계 제국으로 굴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다문명 세계를 조화롭게 경영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타타르족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19세기 후반 무슬림을 관리하는 기구를 바쉬코르스탄 우파에 세운다. 그리고 정교로 개종할 것인가, 토지를 헌납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요구하며 탄압했으며 징역과 과세 또한 과도했다. 무슬림들은 차르를 원망했으며 이들우 오히려 오스만투르크의 칼리프에 의지했다. 마침 오스만투르크 또한 크림 반도와 발칸반 도의 영향력 상실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통하여 만회하려 했다. 우즈베크 부하라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칼리프의 가계에서 군주를 영입했다. 칭기스탄 혈통의 군주만 인정하던 전통적 왕권 관념을 떨쳐내고 이슬람 권위에 기초한 통치 이념으로 바뀐 것이다. 몽골의 혈연적 정통성에서 이슬람의 문명적 정통성으로의 이행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근대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웃하고 있던 동투르키스탄에도 변혁이 일어난다. 청 제국의 카슈가르에도 무슬림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에서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받은 야쿱 벡은 금요 예배마다 이스탄불에 존재하는 오스만 칼리프의 이름을 외웠다. 서워ㆍ을 짓고 한족식 교육을 강제하는 '청 제국의 근대화'와 성당을 세우고 정교도 개종을 강요하는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에 맞서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근대화'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만큼 청 제국의 천자와 러시아 차르보다 칼리프가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스탄불로 순례를 가는 행렬이 늘어난다. 1908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카슈가르와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초원에서 메카로 순례를 가는 철도를 개통시켰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번영하던 오스만투르크의 군함들이 벵골 만까지 진출한 것도 20세기 초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양 무슬림들에게도 칼리프의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이는 19세기를 서세 동점으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일면적이고 일방적이다. 오스만투르크도 서구열강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서부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칼리프의 영향력을 동부 유라시아의 초원길과 바닷길로 확산시키고자 분투한 시기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남부 러시아와 북부 오스만투르크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차르와 칼리프 사이 선택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신민으로서 오스만투르크의 병사들과 전투를 벌인 무슬림이 적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고, 혈통적으로는 투르크계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지하드로 선전하면서 전 세계 움마 공동체들의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술탄의 호소에 힘입어 무려 100만의 무슬림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파란이 그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그 공산주의와 세속주의 혁명의 파장 속에 오스만투르크는 패망 하게 되면서 칼리프는 폐지되었다. 신(新) 오스만주의도 범이슬람주의도 폐기처분된 상태에서 세속주의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무슬림들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상황을 해쳐 나가려는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크림 반도 출신의 타타르 귀족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파리에서 유학한 이슬람 사상가이자 혁명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강역과 중앙아시아까지 두루 견문한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 고전을 깊이 공부한데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도 밝은 인물이기도 했다. 1881년 러시아어로 출간한 <러시아의 이슬람(Ислам в россии)>은 가스프린스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 내 무슬림의 공통어인 투르크어를 보통교육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스프린스키는 1883년 신문 <번역자(Переводчик)>를 창간한다. 일상적인 투르크어에 기초한 새로운 문체를 선보여, 오늘날 타타르인이 사용하는 투르크식 타타르어의 근간이 되었다. 가스프린스키는 1884년에는 <신방식 학교>를 창설하여 초등교육 개혁에 매진했다. 그는 매체와 학당을 겸장하여 이슬람 문명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타타르인 이슬람 개혁가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카잔이다. 그는 세속의 중심에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영혼의 중심 메카를 잇는 성/속의 가교로서 카잔을 자리매김했다. 그는 카잔이야말로 현대 문명과 고전 문명,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혼합되는 이슬람 계몽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꾸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러시아어 학습도 강조했다. 러시아어를 통한 과학적 수용이 이슬람 문명과 별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쿠와 카잔과 타슈켄트를 순회하며 무슬림 대회를 개최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슬람 세계를 동시에 조망하는 독특한 관점으로 투르크-무슬림 공론장을 창출해 낸 것이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이라는 소설도 발표한다. 그의 소설은 1906년에 발간되었으니, 러일전쟁 패배 직후에 출간된 셈이다. 더불어 1907년에는 이집트 카이로까지 방문하여 아랍 지식인들과도 접촉한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세계 무슬림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창했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은 아랍의 이슬람 개혁을 이끌었던 잡지 <등대>에도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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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2024년 4월 17일 솔로몬 제도의 총선에 대한 전망
    태평양 도서 지역은 2022년 4월 중국 솔로몬 제도 양자 안보 협정(Bilateral security framework agreement, 중·솔 안보협정)의 체결 여파로 인해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으로 인한 새로운 대결의 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영향력 및 군사력 투사가 남중국해를 넘어 태평양 도서 지역까지 확장되면서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은 ‘전략적 놀라움(Strategic surprise)’으로 인식하게 된다. 중국은 2000년대 후반부터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사업을 진행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범인도권 국가들을 이용해 인도양으로 확장해갔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태평양 지역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갔다. 중국의 빠른 확장세에 놀란 미국은 2022년 9월 태도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미국-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US-Pacific Island Country Summit)를 개최하면서 중국의 확대를 방어하기 위해 전략을 세우기에 부심했다. 2023년 2월 미 국무부는 30년 만에 솔로몬 제도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파푸아뉴기니와 국방협력협정(Defense Cooperation Agreement)을 체결하여 인도적 지원과 재난 구호 활동 수행을 위한 파푸아뉴기니 군 역량 강화를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는 미국의 실질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국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부랴부랴 결정한 일이기도 했다. 그 동안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많은 전비와 재건 비용을 투자했고 이는 석유가 연결된 중동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미국은 중동 지역에 엄청난 공을 들여 왔었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매우 소홀했던 탓에 그 빈 자리를 중국이 치고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이제 중동이 문제가 아니라 자국의 실질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밀려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솔로몬 제도나 파푸아뉴기니 등에 막대한 영향력 행사했던 것은 호주였다. 2017년 8월 호주는 솔로몬 제도 각종 태풍, 홍수, 화산에 대한 자연재해와 각종 보안 위협이 발생하면 호주 경찰과 군인을 솔로몬 제도에 배치할 수 있도록 안보 조약을 체결했었다. 실제로 솔로몬 제도의 환경을 보면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과 화산, 해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태풍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는 지역이다. 게다가 2000년 6월 8일부터 솔로몬 제도는 내전을 겪었고 공식적으로는 2002년 호주군이 결국 솔로몬 제도에 개입해서 2003년 내전을 끝냈지만 아직도 반군이 남아 있어 치안도 위험한 상태다. 특히 과달카날 섬에 위치한 수도 호니아라(Honiara)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치안 부재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몬 제도는 미국과 호주의 주선으로 대만과 먼저 수교했지만 2010년대 이후부터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2019년 9월 16일 저녁에 대만과 단교하고 21일에 중국과 수교했다. 한편 중국은 꾸준히 군사 현대화와 더불어 제1 도련선(The First Island Chain)에 위치한 남중국해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군사화를 추진했다. 이어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에 대한 전략 공간 확보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중국이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게 되면, 중국이 제2 도련선 확보를 통해 태평양과 서반구의 해상 교통로에 대한 접근에 용이하게 된다. 중국이 전략적 거점으로 점찍은 곳이 바로 파푸아뉴기기와 솔로몬 제도이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호주는 솔로몬 제도의 야당 세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보다 사실 호주가 더 급한 상황이다. 만약 솔로몬 제도가 중국의 영향권에 들면 호주의 국경 앞에 중국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으로 인해 인도양과 태평양 지역으로의 진출이 방해를 받을 수 있으며 사실상 고립될 수 있기에 호주 입장에서는 굉장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미국과 호주의 지원은 2021년 11월 24일, 대만과의 단교 문제 및 정부의 친중국화에 반대하여 대규모 시위가 발생케 했다. 당시 총리인 마네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는 이를 미국과 호주가 반정부 시위를 사주했음을 주장하여 두 국가에 맹비난을 하기도 했다. 마네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 솔로몬 총리는 대표적인 친중파다. 이번에 개최되는 총선은 친호주-미국 정당과 친중국 정당의 대결이라 볼 수 있고 현 여당은 친중 정당이다. 소가바레 총리는 2019년 네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한 뒤, 올해 다섯번째 연임을 노리고 있다. 소가바레 총리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환영하여 솔로몬에도 일대일로 사업 유치를 희망했다. 그 정도로 중국 쪽에 치우친 외교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다. 소가바레가 친중행보를 보인 이유는 과도한 호주와 미국의 영향력에 탈출하고 영연방에서 탈퇴해 자립형 정부를 세우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중국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고 내전으로 얼룩져 낙후된 솔로몬 제도의 환경을 개선하려 했다. 솔로몬 제도는 키리바시를 제외하면 오세아니아 최빈국으로 1인당 GDP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 2,285달러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낮고 케냐, 현재 내전 중인 아이티와 비견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과 호주는 솔로몬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공표했지만 이는 말 뿐이었고 솔로몬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주지 못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경찰 병력과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솔로몬 제도의 열악안 인프라 개선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미국은 앞서 말한 것처럼 중동이나 우크라이나에 관심있었기에 솔로몬 제도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호주가 솔로몬 제도에 별 관심없이 병력만 지원한 이유는 다분히 중국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다. 중국의 인도-태평양 지역에 영향력 투사에 대한 경계심으로 이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그래서 소가바레 총리가 급격히 중국에 관심을 기울게 된 것이다. 그에 맞춰 중국은 솔로몬 제도에게 엄청난 차관과 더불어 인프라 개선을 약속했다. 더불어 중국은 솔로몬 제도에 병력 파견과 해군 기지 건설을 골자로 하는 군사 협정을 추진했고 2022년 4월 19일 안보 협정까지 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솔로몬 제도는 중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약속 받고 국가 내 반정부 시위까지 제압할 명분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중국과 호주의 마찰이 벌어지거나 중국의 해군 기지 건설이 진행될수록 호주와 솔로몬 제도 간 안보 및 경제 협력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추인 미국은 더욱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중이다. 솔로몬 제도에 중국 해군 기지가 설치되면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미 태평양 함대에 대한 정보 수집 및 타격까지도 사정거리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3년 7월 소가바레 총리는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며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미국과 호주, 모두 경악할만한 사건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중동에 쓸데없이 관심을 쏟고 있는 그 시간에 남태평양 일대로 파고 들어온 중국에 대응할 시간적 여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8월 19일 솔로몬 제도는 화웨이의 이동통신 기지국 161개를 설치하기 위해 중국 수출입 은행으로부터 1% 금리로 6,600만 달러(약 875억 원)의 차관을 받아왔다. 그리고 미국 해안경비함의 자국 기항 요청을 처음으로 거절했다. 뒤이어 미국을 포함한 모든 외국 해군 함정의 자국 입항을 잠정 중단하는 등의 확대 조치까지 내놓았다. 그리고 작년 3월 중국의 국영 기업인 중국 토목공정집단(CCECC)이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 있는 호니아라 항구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면서 열악한 인프라가 고쳐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런 상황에서 올해 4월 17일 솔로몬 제도에서 총선이 치뤄진다. 소가바레 총리가 속한 여당은 중국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받으며 미국과 호주를 밀어내겠다는 것이고 야당은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과 호주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받아쳤다. 특히 야당은 2022년 소가바레 총리가 중국 정부와 체결한 안보협정의 ‘투명성’을 두고 이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참고로 솔로몬 제도는 의원내각제 정부이며 이번 선거는 정원 50명인 국회의원들을 선출한다. 이후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을 중심으로 의원들이 총리를 선출하게 되어 있다. 선거를 앞두고 소가바레와 여당의 친중 기조에 대한 야당 대표들의 우려와 반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 급해진 호주는 페니 웡 호주 외교장관을 앞세워 총선비용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소가바레 총리는 호주를 비난하면서 경비 지원 의사를 공개한 시점이 매우 부적절했다 주장했다. 더불어 야당 측에서 소가바레 총리가 중국 정부와 체결한 안보협정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고 여기에 호주가 막대한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이는 주권 국가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 일갈했다. 그러나 현재 솔로몬 제도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소가바레의 5연임이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야당인 피터 케닐로레아 주니어 연합당 당 대표의 지지율은 겨우 국회 입성하면 다행일 수준으로 가고 있으며 고든 달시 리로 농촌진흥당(시프라) 대표 또한 지지율이 그렇게 높지 않다. 그럼에도 변수가 남아 있는 것은 미국과 호주가 간접적으로 선거에 개입할 가능성 있기 때문이다. 이 선거는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가를 분수령이 될 것이며 태평양 도서지역 진출과 영향력 강화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호주에게 실질적인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행하는 미국에게 있어 막대한 타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력에 미국의 남태평양 전략은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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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민심이 천심인 것은 흐름 때문이다!
    민심은 천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에 포함된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실 공허한 언명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의미를 왜곡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민심이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단숨에 민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만일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탁월한 혜안을 지닌 소유자일 것이다. 『맹자』의 이른바 이루장구(離婁章句) 상편의 구절들을 보자.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 백성을 얻으면 이에 천하를 얻게 된다. 또 그 백성을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이에 백성을 얻게 된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길이 있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모아주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그들에게 행하지 않으면 된다.”(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得天下有道, 得其民, 斯得天下矣,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得其心有道, 所欲與之聚之, 所惡勿施爾也). 걸왕은 중국 하(夏)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포악하고 사치스러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술잔치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도 원성(怨聲)이 높았다. 더욱이 걸왕은 충신들의 간언(諫言)이나 진언(眞言)을 전혀 듣지 않았으며, 결국 은(殷)나라의 태조인 탕(湯)왕에 의해 추방되었고, 하나라는 멸망했다.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주왕도 걸왕과 마찬가지로 폭군이었는데, 특히 주왕은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인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주왕은 현재 중국의 허난성 신샹시의 행정구역인 목야(牧野)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서주(西周)의 무왕에게 패배했으며, 은나라는 멸망했다. 걸왕은 도주 중에 살해당했으며, 주왕은 목야전투의 패배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민심으로부터 멀어진 왕은 물러날 수밖에 없으며, 이와 반대로 민심을 등에 업은 사람은 기존의 왕을 몰아내고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맹자의 진술에서 천심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이 진술은 천하를 얻는 방법이 민심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 민심이 천심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바로 도(道)와 연관된다. 맹자에 의하면, 도는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구별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순수한 마음의 진실이라는 뜻을 갖는 성(誠)에 근거한다. 맹자에 의하면,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도다. 지극히 정성스러운데도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없고, 정성스럽지 않은 데도 남을 감동시키는 경우는 없다.”(是故,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 未有能動者也). 종합해 보자면, 민심이 천심으로 된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진실을 정성스럽게 추구하는 인간이 이를 도리(道理)로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왕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이렇게 한다면, 왕이 백성을 감동시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와 반대로 폭군의 경우에는 마치 자신이 천심을 아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통치행위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왕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천심을 이용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민심과 동떨어진 천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천심은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아무도 천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심이 천심이지, 천심이 민심은 아니다. 필자는 민심에 흐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이 수시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로 민심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특히, 그 흐름이 좋지 않을 경우에, 이를 바꾸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흐름 자체를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지도자가 그 흐름 자체를 바꾸려고 하다 보면, 무리수를 두기 마련이다. 이때는 지도자가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지도자는 그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바뀔 타이밍을 간파해야 한다. 바로 그 타이밍을 놓치면 그 누구도 흐름을 바꿀 수 없다. 민심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어떤 원인이 명확하게 있었기 때문이지, 아무런 원인 없이 민심은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민심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사익을 취득하려는 사람들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지도자가 민심에 눈을 감으면, 그 주변에 누구든 이제부터 서서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민심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모여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기존 지도자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기 마련이고, 민심을 돌릴 만한 카드도 별로 없게 되고 만다. 더욱이 그렇게 되면 한편으로 기존 가신그룹도 서로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분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권에서 한동안 밀려났던 사람들도 움직인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감을 암중모색(暗中摸索)한다. 이때 그 지도자는 기존 지도자와 차별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민심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결과를 갖고 민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지 유추할 뿐이다. 그런데 현명한 사람은 그 흐름을 타고 적어도 민심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민심을 주시하면서 그 흐름이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도 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둔한 사람은 민심의 흐름보단 세상에 떠도는 잡담 혹은 여담에 관심사를 갖는데, 이는 민심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심의 흐름이란 반드시 결정적인 원인에 근거해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종종 가장 별것도 아닌 것이 일정한 흐름을 타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주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런 상황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흐름이 중요한 것은 민심이 설령 일정하게 형성되더라도 흐름을 타지 못하면, 금방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의미는 민심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지도자가 뭔가를 하려는데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가 아니라 민심 그 자체가 스스로 전혀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지도자의 결단만 있으면 별문제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지도자가 민심을 적극적으로 완전히 수용하기보다 그저 형식적 수준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수용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이것은 민심이 확실한 입장을 요구하는데, 지도자는 오히려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하면 신뢰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즉 민심이 움직여야 하는데 좀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이미 민심이 흐름을 타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전자는 아직 반전의 기회가 남아 있긴 하다. 이와 반대로, 후자는 아무런 기회조차 사라지고 정해진 방향에 맞추어 갈 뿐이다. 백약이 무효인 것이다. 이때는 상황이 끝나기만을 우리가 기다릴 수 있을 뿐, 아무것도 사실상 할 수 없다. 민심에서 흐름이 중요하다. 지도자는 당연히 민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민심을 한순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고, 민심이 과연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심이 천심인 것은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민심을 모르거나 왜곡하는 사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진정으로 민심이 천심임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민심에 관해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심이 흐름이 어떤 것인지가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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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원래부터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테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실행되었던 국가가 아니었다. 아테네의 중심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이다. 아레오파고스에서는 329명의 위원들을 중심으로 공동통치의 사회를 이룩해냈다. 여기에서 9명의 아르콘(Archon)을 뽑는데 이들이 사실상 아테네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이었다. 이들 9명의 아르콘들은 국가의 위기가 생겼을 때 서로 의견을 통합하곤 했는데 임기가 1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의미없는 직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곤은 그리스어로 "지배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르크(ἀρχ)에서 파생된 분사다. 여기에는 1명만 지칭되는 단수형으로 흔히 여기지는데 ἄρχοντες (아르콘테스)는 여러 명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지배자로 음역될 수 있는데 고대 마케도니아어로는 "의미없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 1년 밖에 없는 임기에 329명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이 되는 시스템에 대한 비꼬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폐해의 결정적인 부분은 아테네에서 발생한 총체적 난국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와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은 농경지는 일부 지주에게 집중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심각한 경제양극화를 겪는다. 평민들은 소출의 1/6을 지주에게 바쳤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토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은 많은 인구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아티카 일대는 외부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면서 아테네의 빈민층은 크게 증가했다. 빈민들은 토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채무를 갚을 경제력은 애초부터 없었고, 귀족과의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두 계층이 서로 반목하는 상태로 나타난다. 게다가 귀족들끼리도 대단한 내부분열이 존재했다. 당시 9명의 아르콘 중 하나인 메가클레스는 고리 대금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못갚은 시민들을 노예를 부리거나 경지들에 투자하여 자신의 땅으로 만들고 그 영지를 살라미스 해안가까지 늘려갔던 것이다. 이는 즉, 당시 그리스에서 부동산 개념과 투기의 개념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부분이다. B.C 632년 올림푸스 제전에서 우승하고 월계관을 수여받은 킬론은 메가클레스가 이에 시셈하여 그의 땅을 막대한 돈을 주고 사들였으며 졸지에 집을 잃은 킬론의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파고스를 장악하려 했다. 그는 두 지역을 장악하고 참주에 등극하여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던 메가클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메가클레스는 킬론을 제거하기 하기 위해 킬론과 킬론의 친구들을 아크로폴리스 신전으로 끌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 일파들은 중대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는데, 그들은 아테나 신전에 들어와 있었던 킬론 일파에게 복수의 여신들 신전 앞에서 재판받으라고 설득해놓고는 킬론 일당이 아테나 신전에서 복수의 여신 신전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척살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신전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었다. 그 결과로 인해 킬론의 남은 세력들은 메가클레스와 그의 일파를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메가클레스에게 땅과 재산을 잃은 시민들이 킬론의 편을 들어 메가클레스를 비난하는 시위를 일으키는 등 아테네는 중대한 사회적 갈등으로 내흥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솔론이라는 거물이 나타나서 오늘날 아테네의 민주정이라 말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키는데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의 원조가 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에 솔론과 같은 영웅은 과연 탄생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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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독일 언론의 과도한 김민재 흔들기를 보며 이 또한 독일 내에서 만연해진 인종차별의 일환일까?
    독일 언론에서 계속 김민재를 흔들고 있다. 독일 대표팀 출신의 안토니오 뤼디거와 스왑딜이나 인터 밀란 이적설 등 루머가 계속 나오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부진에 대한 과도한 비난 몰이에 이어 이제는 토마스 투헬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이나 스페인도 이처럼 과도하게 선수를 흔들지 않는다. 시즌 내내 김민재의 기량에 의구심을 제기해온 독일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혹평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 빌트, TZ ,키커 등은 하이덴하임 전 이후 일제히 김민재에게 출전 선수 중 최저 평점인 6점을 부여했다. 특히 키커는 지난 7일 아예 김민재에 대한 특집 기사까지 내면서 작심하여 비판했다. 김민재가 유럽 진출 이후 터키와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했던 지난 2년 동안의 활약에 비하여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김민재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한 독일 언론의 편파적인 태도라는 것에 있다. 김민재는 뮌헨 입단 이후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백업 수비수가 부족한 팀 내 사정에 따라 '혹사' 논란이 나올 만큼 전반기 내내 거의 모든 경기에서 휴식없이 풀타임을 소화했다. 김민재는 비시즌 기초군사훈련 일정을 소화하느라 쉴 틈이 없었고, 소속팀 일정 중에 국가대표팀 소집을 위하여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뮌헨은 올시즌 무관 위기에 몰리며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칼컵에서는 이미 조기에 탈락했고, 리그에서는 레버쿠젠의 우승이 거의 확정적이라 2위 수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유일한 희망은 8강까지 진출한 유럽 챔피언스리그만이 남았는데 여기서도 경기력이 좋지 못해 우승후보들과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이는 김민재만의 부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약화된 선수단 스쿼드와 구단의 부실한 선수 영입, 투헬 감독의 전술 운용 문제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분데스리가에 처음 입성한 김민재의 헌신이나 공헌도는 철저히 무시하고, 몇몇 부진했던 장면만 부각시켜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이유는 유색 인종에 대한 독일의 혹독한 평가와 인종차별성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을 구성하고 있는 총 인구의 4분의 1은 이민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로 되어 있다. 내부 집단을 구성하는 토착 독일인들과 외부 집단을 구성하는 외국인을 포함한 이민자들 사이에는 민족, 문화, 종교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내부집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차별화 생성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이는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의 다른 점,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인식 속에 어느 새 고정관념이 자리하게 되는 일명 고착화(Adhesion)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차별은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나치 시기와 비교할 때 많이 완화되었지만 현재에도 독일에서는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났던 상황, 이 모든 잘못된 형태를 자국의 문제에서 찾지 않고 외부로 돌려 그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다. 특히 독일처럼 냉철하고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국민성과 시스템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특성 가진 국가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원리원칙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은 외부인을 매우 경멸한다. 뭔가 자기만의 선을 그어 놓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우 미개하다 여기며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그저 무늬만 존재한다. 필자는 학술적인 부분에서 학술회의, 혹은 연구차 독일을 많이 왕래했다. 유럽에서 주로 행해지는 국제 학술회의, EU권 내 학술회의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독일에 많은 친구와 학자들과 사귀고 소통했다. 지금도 소통하는 독일 친구들도 많다. 그러면서 이 친구들의 행동, 민족성 등을 하나하나 겪어보니 사람으로써 혹은 친구로써 배울 점이 많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인간답다 여겨진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명정대, 원리원칙 등등 온갖 좋은 수식어는 다 갖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건 인정하지만 이들에게서 인간적인 정(情)은 느껴진적이 없었다. 속칭 말해서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그어 놓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의 측면에서 그 범주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지능이 낮은 인종으로 취급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인종차별이 안 날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문화와의 소통은 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상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자신들이 추구하는 원칙에 벗어난다면 이 또한 용납을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필자에게 물어본다. 일본은 여태까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과 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데 독일은 사과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독일이 훨씬 개념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을 보면 개개인적으로 이중적인 면이 많다. 고집스러울 정도 억지스러운 면도 있으며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 경제력 등으로 볼 때 이들에게 사과를 하더라도 매우 표면적이다. 필자가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정치인들이 꽃다발 놓고 추모하고 있는 장면을 본적이 있는데 진심으로 추모하는 사람은 몇 없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숙인 고개 사이에서 살짝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한 바 있어 소름이 끼친적이 있었다. 그저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표면적으로 사과는 하지만 과연 그 사과가 진심인지는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6~70년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와서 일했을 때, 이들도 대놓고 언론에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종차별을 상당히 경험했다. 독일인 동료들은 키 작고 힘 약한 동양인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파독 광부들은 몇 차례 불법파업을 하면서 독일인과 동등한 임금, 체구에 맞는 노동분야, 외국인 혐오 금지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착취적이고 불공평한 노동 관행과 제도에 맞서 많은 광부들은 정기적으로 유급병가제도를 역으로 이용했다. 결국 1979·1980년 파독 광부들은 집단적 인권운동에서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의 해체를 요구해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켰고, 마지막까지 광부로서 일하던 800여명은 자유로운 직장 선택과 체류 허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2022년 6월부터 11월까지 독일 통합 및 이주 연구 센터 DeZIM는 독일 내 21,000명 이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독일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을 조사했다고 한다.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인종차별을 가장 많이 경험한 인종은 흑인으로 흑인의 54%가 인종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 비율로는 흑인 여성의 19%가 반복적인 위협이나 괴롭힘과 같은 인종차별을 경험한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남성은 18%로 조사되었다. 또한 지속해서 미묘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한 흑인 남성은 37%, 여성은 20%였으며 백인에 비해 남성은 4배, 여성은 5배 더 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 차별을 당하는 이유에는 연령, 장애 및 만성질환 여부, 언어 능력 미숙, 독일식 이름이 아닌 경우, 종교, 피부색, 성별, 성적 취향, 계층, 소득 등 다양하다. 2021년 6월 9일 35세 대한민국 남성이 베를린 지하철 역에서 4명의 신원 미상의 남성으로부터 외국인 혐오 및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또는 혐오성 범죄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공지까지 내려왔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김민재에 대한 독일 언론의 혹독한 평가는 어쩌고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자국 선수들보다 잘 하는 한국 선수는 차범근 하나로 족하며 독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동양인 선수가 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투헬 감독이 뮌헨을 떠날 때, 김민재 선수 또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함께 김민재 선수가 뛴다면 필자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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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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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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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말고 명품인간이 되자"는 물질적인 풍요나 외적인 가치에 집착하기보다는 내적인 가치와 인성을 중요시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의 품성과 인격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물질적 소유물을 과시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명품인간이 되는 것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 정직, 책임감 등의 덕목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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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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