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9(일)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당시 호주 식민지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개척되어 경제적 발달 정도가 서로 달랐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주요 도시들은 수천 km씩 떨어져 있었으며 웨스턴 오스트랄리아는 대부분의 동부 사람들에게 “중국이나 티베트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또한 작은 식민지들은 뉴 사우스 웨일즈나 빅토리아처럼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은 식민지들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405032386_7081981111860895_3204928357111842367_n.jpg
사진 : 호주 시드니 다운타운,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hoto?fbid=7081981121860894&set=pcb.7081981365194203

 

 

그리고 도덕적으로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우스 오스트랄리아 사람들은 죄수 유형지로 시작한 다른 식민지 출신 주민들을 깔보거나 그들의 혈통을 의심하였다. 게다가 뉴 사우스 웨일즈와 빅토리아는 상호 경쟁하며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나갔으며 경제 체제에 있어서도 뉴 사우스 웨일즈는 자유무역주의를 그리고 빅토리아는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식민지들이 각자 나름대로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이 계획에 따라 제 갈 길을 가려 하였다. 


이러한 지방주의 관념은 무역과 통신, 인적 교류를 촉진시켜 줄 철도에서 독립 식민지들 사이에 다른 철도 궤간을 채택하는 정책 등으로 표출되었는데 실제 철도 궤간을 정하는데 있어 퀸스랜드는 3피트 6인치, 빅토리아는 5피트 3인치, 뉴 사우스 웨일즈는 4피트 8.5인치, 사우스 오스트랄리아는 처음에는 5피트 3인치였다가 나중에는 퀸스랜드와 같이 3피트 6인치의 궤간을 채택하였다. 호주 식민지인들은 식민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860년대와 1870년대를 거치며 자신들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공통의 언어, 공통의 선조, 그리고 같은 호주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영국 본토에 거주하는 영국인들과 구별되는 “호주에 거주하는 영국인”으로서의 일종의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골란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물론 아직까지는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고 영국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지만, 호주가 더 이상 영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그리고 본토 영국인과 다른 역사를 가진 자신들의 공동체임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퀸스랜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레인(William Lane)은 당시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호주 민족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 모두는 호주를 위해(For this Australia), 그리고 지금 막 나타나기 시작한 호주의 민족 정체성(Nationality)을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덮고 있던 커튼을 막 열어 제친 진보적 호주 국민들(people)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뒤에는 부서져가는 제국의 추락하는 왕실과 노망난 사람들(Dotard races)로 뒤덮인 과거가 있고 우리의 앞에는 젊음의 열정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호주가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윌리엄 레인(William Lane)의 호주 민족 정체성 논의와 호주 독립의 시발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