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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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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7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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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7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6
  • 러시아의 경제 제재에 대한 이야기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전 세계에서 한 국가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한 인류 역사를 봐도 매우 드문 사건으로 보인다. 심지어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할 정도로 러시아를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립화 시키려는 상태에 있다. 특히 코로나가 아직 종식이 되지 않은 상황에 어느 정도 엔데믹을 준비하고 경제 회복의 길로 가려는 상황을 이번 전쟁으로 인해 다시 극악인 상황으로 가고 있으니 러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이고 있는 상황이다. 대러제재의 한 가운데 있는 러시아의 국가 두마 부의장 예프게니 페도로프(Евгений Федоров)는 러시아에서 철수한 외국기업들에게 5월 1일까지 업무에 복귀하라면서 그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할 수 없는 역제재를 가하겠다는 방침을 제안했다. 예프게니 페도로브(Евгений Федоров)의 이와 같은 방침은 막심 레세트니코프(Максим Решетников) 경제발전부 장관에게 전달되면서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외자기업이 철수해 그 종업원들의 복지와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선택을 안겨 피해를 주었다면서 이와 같은 결정을 하라며 최후통첩을 날린 셈이다. 예프게니 페도로브(Евгений Федоров)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극우적이고 강경파 노선의 경제인이자 국회의원으로 2014년 크림 병합 이후, 러시아에 제재가 가해졌을 때 서방의 제재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 내 외국인 자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에도 외국이 취한 제재로부터 러시아인과 러시아 법인, 국가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법안을 두마 하원에 제출하면서 일시적으로 이 법안이 일시적으로 승인된 바 있다. 이와 같는 제재 법안은 외국의 제재에 따른 자산 압류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인이나 법인이 해당 국가 국민이나 법인의 러시아 내 자산 몰수를 요구하는 소송을 자국 내 법원에 제출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승소 판결이 날 경우 외국인 자산은 러시아 정부 자산으로 귀속되며 제재로 피해를 본 러시아인은 이 자산 처리를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럼으로 인해 자국 기업의 손해를 최소화하고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결국은 오바마 정권 이후,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에 대한 대부분의 제재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그 법안이 발의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러시아 경제 제재에 대한 맞대응책을 강구하다 2014년에는 일시적으로 행해졌던 것이 이번에는 사상 유래없는 대규모의 제재로 인해 확대될 것으로도 생각된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 달러가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세계 경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금 구매를 늘리고 있었던데다 달러, 유로, 파운드 등 기축통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많은 금을 가진 나라만이 자율성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사태들로 인해 러시아에 투자한 국제 기업들은 아주 성가시게 생긴 셈이다. 대러제재를 감행하려는 각국 정부의 방침과 기업 비즈니스 사이에서 조만간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이들과 제재에 동참한 정부와의 마찰이 예상된다. 그런데 복귀기한이 5월 1일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게보면 4월 말까지 간다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분석가들의 여론을 고려해서 발표한 날짜라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한 분석이다. 더불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보유 혹은 투자한 아파트 등 부동산이나 기업 자산을 팔고 귀국하는 일이 한층 어려워질 전망이다. 러시아가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에 맞서 외국인 투자자의 자산을 매각하고 철수하는 것을 제한하는 대통령령 발호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대한민국을 포함한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가로 지정된 48개국이 그 대상 목록에 들어가 있다.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러시아의 지적-부동산 등록청, 대한민국의 한국국토정보공사와 법원 등기소를 합친 개념인 로스레스트르(Росреестр)는 3월 17일 외국인 투자자의 대량 철수를 막기 위해 발령된 대통령령 제81조에 의거하여 부동산 거래에 대한 세부 시행 규칙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시행 칙령에 따라 비우호국가 48개국 출신 외국인들은 현지에서 아파트나 부동산을 매각하려면 재무부 산하 정부 위원회의 엄격한 허가를 받아야 된다. 48개국 출신으로 거래를 희망하는 외국인들은 러시아어로 된 신청서와 관련 서류를 러시아 재무부에 제출해 하여 해외투자통제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부동산 거래의 목적과 주제, 내용, 시기, 조건 등 기본 정보 뿐만 아니라 수익자나 수익의 소유자에 대한 모든 정보까지 첨부해야 하기에 귀찮아 질 수밖에 없다. 현지 부동산 전문가와 법률가들은 아직 담당 위원회의 규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기존의 관행 또한 존재하기 않았기에 이 모든게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다행히 무조건 규제는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계속 추가 제재가 이어진다면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제정된 새로운 규칙이 부동산을 개발하는 개발 법인에게도 적용되면서 핀란드 부동산 개발 회사인 유이트(ЮИТ)와 스웨덴의 보나바(Bonava) 같은 경우, 당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러시아 등록청이 정부 위원회의 허가를 받을 때까지 거래 등록을 일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나타난 우려는 신청서 접수시 러시아만이 갖고 있는 절차상 복잡함과 요구하는 서류의 양이 늘어나면서 노골적으로 장기화시키는 특유의 번거로움에 있다. 이에 유력 경제지인 코메르산트(Коммерсантъ)에 따르면 현지 법무법인 펜 & 페이퍼(Pen & Paper)의 한 변호사가 말하기를 거래 신청시 이중 국적의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경우, 관련 자료를 접수하는 등록청과 중앙은행에는 없기 때문에, 이민청에만 존재하고 있어 매우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아직은 이 모든 것이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가 있고 앞으로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러시아 내 경제-부동산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자칫하면 비용과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이 조치가 "한시적(Временный)"이라고 명시한 것에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의 군사작전 종결되고 서방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면 다시 평상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제재의 해제가 언제 가능할지, 이 제한적인 조치가 언제까지 계속 될지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등 비우호적 국가들에 대해 보복적인 성격을 갖추고 대해진 이같은 조치는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외국인 투자자의 러시아 내 자산 회수를 제한하는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대통령령으로 발령되었기에 대러제재를 댓가로 볼 수 있다. 당시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투자 자산의 회수에 대해 일시적으로 제한을 가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하면서 결정된 사항이다. 대통령령에 1만 달러 이상의 외화 국외 반출 금지가 포함된 것도 이와 같은 부분과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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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6
  • 2020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발생한 반 정부 시위와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투옥 사건
    2020년 7월 11일, 극동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에는 9주 동안 시위와 피케팅이 진행되었다. 정치적 개혁과 개선도 목표로 두고 시위를 했으며 이들의 시위는 결국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퇴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러시아 현 정권이 불만을 가져 시위를 벌이게 된 이유는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였던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이 갑자기 투옥되었기에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9주 연속으로 시위가 발생했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3주가 지나자 시위에 대한 보도와 석방 시위를 전면 차단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시위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벨라루스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관계로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이는 직선거리 9,000km나 떨어진 벨라루스 민스크의 시위를 하바로프스크에서 거주하는 벨라루스 국민들을 통해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시위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국기 및 하바로프스크 지방 깃발을 흔들며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를 지지함과 동시에 옛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국기도 함께 들며 시위하여 서쪽으로 9,000km나 떨어져 있는 벨라루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다. 2021년에는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모스크바에 열렸을 때, 푸르갈의 석방을 함께 요구하며 수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의 러시아(Россия Будущего) 당과 공산당, 공정 러시아당까지 여기에 합류하여 푸틴 퇴진을 외쳤고 하바로프스크의 텃밭 자유민주당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에서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하바로프스크에서 왜 이와 같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일까? 본래 하바로프스크 주와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를 비롯한 아무르 강 지역은 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이 아니라 원내 제4 야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Либер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и)의 대표적인 텃밭이었다. 자유민주당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우정당으로 당의 목적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 복원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갖고 있다.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이고 동성애자, 여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측 모두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 개념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만, 국가가 시장을 강력히 통제하는 협동조합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즉, 명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반반 섞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 노선은 미국 정부나 유럽 등 서방 국가들, 고르바초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언론 매체,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러시아 내 리버럴 세력, 독신주의자, 이민자들을 강력히 배척하고 있다. 나도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를 다니면서 주민과 대화로 느낀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데다가 인종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들도 많았다. 술 취해 동양인을 보면 시비걸어 폭행을 일삼는 인간도 꽤 있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는 밤늦게 현지인 주취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신상에 별로 이롭지 못하다.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의 지방 의원들 중 상당수가 자유민주당의 두마 의원으로 들어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인보다는 소련 시절, 외지인과 혼혈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다당제를 허용한 이후, 최초의 야당으로 분리된 바 있다. 그들이 야당이 된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출신이 아닌 타 지역 소비에트 연방 인민공화국 룰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유태인 혼혈들이 많았는데 당 대표였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알마아타 출신에 유태인 혼혈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친(親) 정부 정권으로 돌아서 옐친과 푸틴을 적극 지지했다. 그리고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받쳐주는 야당으로 활동했는데 201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기까지 통합 러시아당의 2중대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2018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과의 공조가 완전히 깨지는 사건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발생한다. 당시 선거에서 기존의 통합 러시아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이변이 발생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한 곳의 대다수가 당시 제2 야당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유민주당이 차지한게 문제였다. 이같은 상황이 발생된데에는 제1야당으로 올라선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통합 러시아당을 떨어뜨리고 다음 선거에서 충분히 해볼만한 자유민주당에 몰표해 버린 것이었다. 공산당의 영수였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기존의 여당과 여당 2중대인 자유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고 통합 러시아당을 낙선시켜야 지방에서 거대 여당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차기 지자체 선거에서 공산당의 후보로써 해볼만한 후보들을 내세워 대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통합 러시아당의 공약 실천 능력이 약하고 영향력 또한 부족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대해 자유민주당에 집중적인 투표를 유도했던 것이다. 사실 통합 러시아당은 우랄 산맥 서쪽 유럽러시아 지역에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낙후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 강 일대의 선거구에 대해서는 표 밭 관리에 안일했을 뿐더러 거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극동에서 통합 러시아당의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르 강 유역과 하바로프스크 지방에서 주지사 뿐만 아니라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36석 중 28석을 자유민주당이 차지하고 통합 러시아당은 28석을 잃고 단 2석만 유지한 대참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패에 깜짝 놀란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은 당시 대단한 충격에 빠져 푸틴은 수개월간 자유민주당 당선자들을 비롯해 야당 당선자들을 크레믈린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자유민주당 소속이자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인 세르게이 푸르갈이 2020년에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이에 당대표 지리노프스키는 이 사건이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하며 사건이 발생한 2004년 당시와 2011년 마피아 집단들을 체포했을 당시에 벌어진 살인 사건 때는 러시아 실로비키 행정부들이 뭘 했냐며 정부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통합 러시아당과 자유민주당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면서 노련한 공산당의 영수 겐나디 주가노프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이어 시베리아의 소도시 시장 선거에서는 선관위가 기존의 야권 후보들 출마를 무산시켰지만 여기에 대타로 출마한 주의 자유민주당 부당원들이 집권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통합 러시아당은 시베리아 소도시 선거에서도 대패하는 이변이 연이어 발생했다. 시베리아 동부와 아무르, 연해주의 전권을 장악한 자유민주당은 결국 2021년 총선에서 약 7.5%를 득표하여 기존 의석보다 18석 감소한 21석을 차지했고 27석을 얻은 공정 러시아에 밀려 제4당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원내 극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같은 해, 알렉세이 나발니와 세르게이 푸르갈 주지사에 대한 석방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자유민주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당수인 지리노프스키도 크림 반도와 돈바스를 영유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주장을 했지만 우선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더라도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집권을 막는것이 먼저이자 목표로 삼고 반전 시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결론은 만약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축출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고 집권 여당이 됐든 크림 반도와 돈바스 문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전쟁은 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든 두 지역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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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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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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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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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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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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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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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냐민 네타냐후의 정체 : 폴란드 아쉬케나지와 본토 유태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네타냐후 가문
    네타냐후는 친영국, 친미국 인사로 당시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의 정적이었다. 이츠하크 라빈이 꾸준히 살아있었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러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역사는 종식되고 양쪽이 모두 평화롭게 존속했을 것이다. 네타냐후의 이력을 보자면 그는 출생은 텔아비브에서 했지만 부친이 폴란드계 아슈케나지였다. 그의 부친인 벤치욘 네타냐후(Benzion Netanyahu)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이다. 본래 성씨는 폴란드어식인 밀레이코프스키(Milejkowski)였지만 베냐민 네타냐후의 어머니인 칠라 세갈(Tzila Segal)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바꾼 성씨가 네타냐후이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신이 주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참고로 어머니인 세갈은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팔레스타인 출신의 토착 유태인이다. 아마 유태인들이 모계사회이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풍속으로 미루어 볼 때, 팔레스타인 전역의 영유화를 꿈꾸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베냐민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6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군복무하면서 중동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1980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MIT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등, 신종 미국의 딥스테이트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다. 그가 악랄해질 수 있었던 것의 배경은 이러합 딥스와 네오콘의 엘리트 과정을 모두 습득했기 때문이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내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 지역에 유태인들을 정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오슬로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비밀 회담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이 야합"으로 치부했다. 1993년 라빈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가자 지구와 요단강 서안 지역을 위한 자치적 정부 계획의 시작과 그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물러남을 포함한 동의서를 서명하여 양국은 또한 자신들의 분쟁들을 풀리는 데 노력하는 데 동의하게 되자 네타냐후는 라빈을 매우 비난했고,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의 평화를 이룬 공으로 1994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이를 "팔레스타인에게 나라를 판 댓가"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킹스 오브 이스라엘 광장에서 집회에 참석한 이후, 극우파 유대인 과격론자인 이갈 아미르(Yigal Amir)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는데 이 암살의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라빈을 암살한 것은 네타냐후임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인물이, 가자와 평화를 지키고 중동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는 ICC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벌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하마스의 공격과 침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및 침공은 비난하지 않고 이란 따위가 핵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명예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2등 시민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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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7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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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7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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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러시아의 경제 제재에 대한 이야기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전 세계에서 한 국가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한 인류 역사를 봐도 매우 드문 사건으로 보인다. 심지어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할 정도로 러시아를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립화 시키려는 상태에 있다. 특히 코로나가 아직 종식이 되지 않은 상황에 어느 정도 엔데믹을 준비하고 경제 회복의 길로 가려는 상황을 이번 전쟁으로 인해 다시 극악인 상황으로 가고 있으니 러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이고 있는 상황이다. 대러제재의 한 가운데 있는 러시아의 국가 두마 부의장 예프게니 페도로프(Евгений Федоров)는 러시아에서 철수한 외국기업들에게 5월 1일까지 업무에 복귀하라면서 그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할 수 없는 역제재를 가하겠다는 방침을 제안했다. 예프게니 페도로브(Евгений Федоров)의 이와 같은 방침은 막심 레세트니코프(Максим Решетников) 경제발전부 장관에게 전달되면서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외자기업이 철수해 그 종업원들의 복지와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선택을 안겨 피해를 주었다면서 이와 같은 결정을 하라며 최후통첩을 날린 셈이다. 예프게니 페도로브(Евгений Федоров)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극우적이고 강경파 노선의 경제인이자 국회의원으로 2014년 크림 병합 이후, 러시아에 제재가 가해졌을 때 서방의 제재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 내 외국인 자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에도 외국이 취한 제재로부터 러시아인과 러시아 법인, 국가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법안을 두마 하원에 제출하면서 일시적으로 이 법안이 일시적으로 승인된 바 있다. 이와 같는 제재 법안은 외국의 제재에 따른 자산 압류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인이나 법인이 해당 국가 국민이나 법인의 러시아 내 자산 몰수를 요구하는 소송을 자국 내 법원에 제출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승소 판결이 날 경우 외국인 자산은 러시아 정부 자산으로 귀속되며 제재로 피해를 본 러시아인은 이 자산 처리를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럼으로 인해 자국 기업의 손해를 최소화하고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결국은 오바마 정권 이후,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에 대한 대부분의 제재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그 법안이 발의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러시아 경제 제재에 대한 맞대응책을 강구하다 2014년에는 일시적으로 행해졌던 것이 이번에는 사상 유래없는 대규모의 제재로 인해 확대될 것으로도 생각된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 달러가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세계 경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금 구매를 늘리고 있었던데다 달러, 유로, 파운드 등 기축통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많은 금을 가진 나라만이 자율성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사태들로 인해 러시아에 투자한 국제 기업들은 아주 성가시게 생긴 셈이다. 대러제재를 감행하려는 각국 정부의 방침과 기업 비즈니스 사이에서 조만간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이들과 제재에 동참한 정부와의 마찰이 예상된다. 그런데 복귀기한이 5월 1일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게보면 4월 말까지 간다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분석가들의 여론을 고려해서 발표한 날짜라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한 분석이다. 더불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보유 혹은 투자한 아파트 등 부동산이나 기업 자산을 팔고 귀국하는 일이 한층 어려워질 전망이다. 러시아가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에 맞서 외국인 투자자의 자산을 매각하고 철수하는 것을 제한하는 대통령령 발호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대한민국을 포함한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가로 지정된 48개국이 그 대상 목록에 들어가 있다.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러시아의 지적-부동산 등록청, 대한민국의 한국국토정보공사와 법원 등기소를 합친 개념인 로스레스트르(Росреестр)는 3월 17일 외국인 투자자의 대량 철수를 막기 위해 발령된 대통령령 제81조에 의거하여 부동산 거래에 대한 세부 시행 규칙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시행 칙령에 따라 비우호국가 48개국 출신 외국인들은 현지에서 아파트나 부동산을 매각하려면 재무부 산하 정부 위원회의 엄격한 허가를 받아야 된다. 48개국 출신으로 거래를 희망하는 외국인들은 러시아어로 된 신청서와 관련 서류를 러시아 재무부에 제출해 하여 해외투자통제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부동산 거래의 목적과 주제, 내용, 시기, 조건 등 기본 정보 뿐만 아니라 수익자나 수익의 소유자에 대한 모든 정보까지 첨부해야 하기에 귀찮아 질 수밖에 없다. 현지 부동산 전문가와 법률가들은 아직 담당 위원회의 규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기존의 관행 또한 존재하기 않았기에 이 모든게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다행히 무조건 규제는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계속 추가 제재가 이어진다면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제정된 새로운 규칙이 부동산을 개발하는 개발 법인에게도 적용되면서 핀란드 부동산 개발 회사인 유이트(ЮИТ)와 스웨덴의 보나바(Bonava) 같은 경우, 당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러시아 등록청이 정부 위원회의 허가를 받을 때까지 거래 등록을 일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나타난 우려는 신청서 접수시 러시아만이 갖고 있는 절차상 복잡함과 요구하는 서류의 양이 늘어나면서 노골적으로 장기화시키는 특유의 번거로움에 있다. 이에 유력 경제지인 코메르산트(Коммерсантъ)에 따르면 현지 법무법인 펜 & 페이퍼(Pen & Paper)의 한 변호사가 말하기를 거래 신청시 이중 국적의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경우, 관련 자료를 접수하는 등록청과 중앙은행에는 없기 때문에, 이민청에만 존재하고 있어 매우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아직은 이 모든 것이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가 있고 앞으로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러시아 내 경제-부동산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자칫하면 비용과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이 조치가 "한시적(Временный)"이라고 명시한 것에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의 군사작전 종결되고 서방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면 다시 평상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제재의 해제가 언제 가능할지, 이 제한적인 조치가 언제까지 계속 될지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등 비우호적 국가들에 대해 보복적인 성격을 갖추고 대해진 이같은 조치는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외국인 투자자의 러시아 내 자산 회수를 제한하는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대통령령으로 발령되었기에 대러제재를 댓가로 볼 수 있다. 당시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투자 자산의 회수에 대해 일시적으로 제한을 가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하면서 결정된 사항이다. 대통령령에 1만 달러 이상의 외화 국외 반출 금지가 포함된 것도 이와 같은 부분과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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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2020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발생한 반 정부 시위와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투옥 사건
    2020년 7월 11일, 극동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에는 9주 동안 시위와 피케팅이 진행되었다. 정치적 개혁과 개선도 목표로 두고 시위를 했으며 이들의 시위는 결국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퇴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러시아 현 정권이 불만을 가져 시위를 벌이게 된 이유는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였던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이 갑자기 투옥되었기에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9주 연속으로 시위가 발생했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3주가 지나자 시위에 대한 보도와 석방 시위를 전면 차단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시위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벨라루스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관계로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이는 직선거리 9,000km나 떨어진 벨라루스 민스크의 시위를 하바로프스크에서 거주하는 벨라루스 국민들을 통해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시위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국기 및 하바로프스크 지방 깃발을 흔들며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를 지지함과 동시에 옛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국기도 함께 들며 시위하여 서쪽으로 9,000km나 떨어져 있는 벨라루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다. 2021년에는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모스크바에 열렸을 때, 푸르갈의 석방을 함께 요구하며 수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의 러시아(Россия Будущего) 당과 공산당, 공정 러시아당까지 여기에 합류하여 푸틴 퇴진을 외쳤고 하바로프스크의 텃밭 자유민주당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에서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하바로프스크에서 왜 이와 같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일까? 본래 하바로프스크 주와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를 비롯한 아무르 강 지역은 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이 아니라 원내 제4 야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Либер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и)의 대표적인 텃밭이었다. 자유민주당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우정당으로 당의 목적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 복원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갖고 있다.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이고 동성애자, 여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측 모두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 개념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만, 국가가 시장을 강력히 통제하는 협동조합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즉, 명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반반 섞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 노선은 미국 정부나 유럽 등 서방 국가들, 고르바초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언론 매체,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러시아 내 리버럴 세력, 독신주의자, 이민자들을 강력히 배척하고 있다. 나도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를 다니면서 주민과 대화로 느낀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데다가 인종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들도 많았다. 술 취해 동양인을 보면 시비걸어 폭행을 일삼는 인간도 꽤 있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는 밤늦게 현지인 주취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신상에 별로 이롭지 못하다.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의 지방 의원들 중 상당수가 자유민주당의 두마 의원으로 들어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인보다는 소련 시절, 외지인과 혼혈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다당제를 허용한 이후, 최초의 야당으로 분리된 바 있다. 그들이 야당이 된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출신이 아닌 타 지역 소비에트 연방 인민공화국 룰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유태인 혼혈들이 많았는데 당 대표였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알마아타 출신에 유태인 혼혈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친(親) 정부 정권으로 돌아서 옐친과 푸틴을 적극 지지했다. 그리고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받쳐주는 야당으로 활동했는데 201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기까지 통합 러시아당의 2중대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2018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과의 공조가 완전히 깨지는 사건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발생한다. 당시 선거에서 기존의 통합 러시아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이변이 발생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한 곳의 대다수가 당시 제2 야당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유민주당이 차지한게 문제였다. 이같은 상황이 발생된데에는 제1야당으로 올라선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통합 러시아당을 떨어뜨리고 다음 선거에서 충분히 해볼만한 자유민주당에 몰표해 버린 것이었다. 공산당의 영수였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기존의 여당과 여당 2중대인 자유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고 통합 러시아당을 낙선시켜야 지방에서 거대 여당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차기 지자체 선거에서 공산당의 후보로써 해볼만한 후보들을 내세워 대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통합 러시아당의 공약 실천 능력이 약하고 영향력 또한 부족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대해 자유민주당에 집중적인 투표를 유도했던 것이다. 사실 통합 러시아당은 우랄 산맥 서쪽 유럽러시아 지역에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낙후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 강 일대의 선거구에 대해서는 표 밭 관리에 안일했을 뿐더러 거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극동에서 통합 러시아당의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르 강 유역과 하바로프스크 지방에서 주지사 뿐만 아니라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36석 중 28석을 자유민주당이 차지하고 통합 러시아당은 28석을 잃고 단 2석만 유지한 대참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패에 깜짝 놀란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은 당시 대단한 충격에 빠져 푸틴은 수개월간 자유민주당 당선자들을 비롯해 야당 당선자들을 크레믈린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자유민주당 소속이자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인 세르게이 푸르갈이 2020년에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이에 당대표 지리노프스키는 이 사건이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하며 사건이 발생한 2004년 당시와 2011년 마피아 집단들을 체포했을 당시에 벌어진 살인 사건 때는 러시아 실로비키 행정부들이 뭘 했냐며 정부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통합 러시아당과 자유민주당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면서 노련한 공산당의 영수 겐나디 주가노프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이어 시베리아의 소도시 시장 선거에서는 선관위가 기존의 야권 후보들 출마를 무산시켰지만 여기에 대타로 출마한 주의 자유민주당 부당원들이 집권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통합 러시아당은 시베리아 소도시 선거에서도 대패하는 이변이 연이어 발생했다. 시베리아 동부와 아무르, 연해주의 전권을 장악한 자유민주당은 결국 2021년 총선에서 약 7.5%를 득표하여 기존 의석보다 18석 감소한 21석을 차지했고 27석을 얻은 공정 러시아에 밀려 제4당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원내 극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같은 해, 알렉세이 나발니와 세르게이 푸르갈 주지사에 대한 석방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자유민주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당수인 지리노프스키도 크림 반도와 돈바스를 영유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주장을 했지만 우선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더라도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집권을 막는것이 먼저이자 목표로 삼고 반전 시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결론은 만약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축출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고 집권 여당이 됐든 크림 반도와 돈바스 문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전쟁은 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든 두 지역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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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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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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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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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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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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