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칼럼 검색결과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과 캄보디아, 트럼프가 주선해서 화해시킨다고 양국의 앙금이 풀어질까?
    캄보디아의 주 민족인 크메르족은 본래 남방 인들이 아니라 북방 티베트인들이 어떠한 현상으로 인하여 남하하였고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과 혼혈함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를 보고 파악한 결과인데 남방의 완전한 검정 피부보다는 북방 인종의 하얀 피부와 혼혈된 피부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크메르 인의 이동은 북쪽에서 동남아시아의 주요 지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물론 이들의 이동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선사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인류학자들은 원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 살고 있었던 많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타이족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3000년 전, B.C 2000년경에 내왕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티베트계 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테국학계의 학자들은 중국 티베트 지역이 북쪽의 중앙아시아, 사카계 민족들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밀려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 영토 내부에서 오스트로아시아어에 발견되는 어휘나 주요한 강을 따라 이주한 경로를 보면 농경 목적 등으로 침입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크메르인은 운남이나 티베트 서부 지역의 묘족과 관련이 깊은 민족으로 추정된다. 태국의 주 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보통 타이족은 운남성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운남성 지역은 사천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와 상고시대에는 이 지역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촉문명(古蜀文明)이다. 이러한 고촉문명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문화가 삼성퇴 문화이다. 삼성퇴 문화는 5000년~3000년 전의 고촉문화 유적으로 그 원주민이 어느 민족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점차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문명으로 합의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타이족도 아마 강족과 저족의 사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운남성 지역에는 지금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타이족은 베트남 서북 지역의 홍 강에서 다(Đà) 강, 마(Mã) 강을 지나서 람(Lam) 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선조들은 아주 일찍부터 베트남, 특히 북서부 지역에 정착해서 거주해왔다. 백(白) 타이족이 가장 먼저 이주해 왔고, 그 다음에 흑(黑) 타이족이 현재의 거주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이들이 타이족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현재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중국 남부에도 거주하고 있다. 타이족은 고대 중국 남방의 백월(百越) 집단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전월(滇越)은 타이족 선조의 초기 명칭이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탄(撣), 당송(唐宋) 시대의 금치(金齒), 은치(銀齒), 수면(綉面), 망만(茫蠻), 그리고 원, 명, 청 및 민국 시기의 백의(白衣), 북이(僰夷), 파이(擺彛) 및 파이(擺夷) 등은 타이족 형성과 관계가 깊다. 이들 타이족이 내려와 말레이계 민족들이 자리한 오늘날의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이족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고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하(南下)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여러 추정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밝혀나가고 있다. 태국에는 반 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캄보디아와 태국은 서로 민족 자체가 다르다. 두 민족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치고 나간 민족은 캄보디아인들의 직접적인 선조인 크메르 제국이었다. 790년을 전후해서 세력을 규합한 자야바르만은 주변 영토들을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했으며 수진랍과 육진랍을 통합했다. 이후 분열되어 있던 진랍의 각 세력들을 통합하였으며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게 되는데, 현재의 프놈펜 롤루오스(Loluos) 지역인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로 천도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쌓게 된다. 자이바르만은 바탐방 일대에서 발생한 진랍 후예들을 제압하고 802년 바탐방을 함락시킴으로써 진랍 왕조의 통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고 말았다.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 참파 북쪽 지역인 임읍국(林邑國)의 통일을 완수한 자야바르만 이비스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지역인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pata)로 이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황제로 선언한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 다른 말로 앙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15세기까지 존속했고, 그 세력이 강성할 때는 현재의 태국 동북부, 라오스 및 베트남의 일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다. 흔히 캄보디아에 알려진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바로 이 크메르 제국 시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크메르 제국이 한창 강성했을 때는 태국은 당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태국에는 서서히 쇠락하는 크메르 제국의 틈새에서 몬 왕국의 지배 하의 타이계 유통(Uthong) 왕국의 왕자인 라마 티보디(Rama Thibodi)가 전염병을 피해 차오프라야 강 하류 롭부리 지역에 정착해 1350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것이 아유타야 왕국이다. 라마티보디는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골 지역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 하류에 출발한 국가로 수도인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섬인 하중도(河中島)에 만들어졌다. 이 일대는 농업 생산력이 높고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기도 쉬웠으며, 당대의 강국 크메르 제국과 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400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면서 태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동안 산재 하고 있던 타이족의 소왕국들을 하나의 권력 아래 집중시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한 왕조가 되었다. 이 때부터 동남아시아에 타이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자존심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양국은 숙명과 같은 대립을 꾸준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는 다시 동남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 양쪽으로부터 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 지역의 명칭 유래가 "'시암(태국)이 평정했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근현대 시기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태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캄보디아는 사실상 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태국과 맺을 조약을 필두로 무책임하고 캄보디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영토 분할을 했으며 1907년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영토의 측정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태국 왕실이 이러한 프랑스의 결정적인 오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었고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당시 태국 차크리 왕실은 서쪽 미얀마와 남쪽 말레이 연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동쪽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프랑스 사이에서 자국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태국 또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태국 왕실은 1908년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국 측이 땅에 대한 측량 인식에 대한 부재, 그리고 측량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태국 왕실의 근대적 지식과 사고의 무지, 영토 측정에 대한 관심의 전무가 불러온 재앙덩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프랑스 측의 측량을 승인한 지 무려 26년 만인 1934년에 대해서야 이와 같은 프랑스 측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국 왕실은 발견은 했지만 여전히 측량에 대해 무지했기에 프랑스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왕실은 프랑스가 영원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프랑스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면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크메르족과 타이족이라는 민족성 문제까지 부각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다. 그러한 와중에 지난 27일 트럼프는 태국과 캄보디아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 본 협정에는 협정에는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국은 초기 휴전이 성립된 이후 포로로 잡은 캄보디아인 18명을 석방할 예정이며 두 국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수개월 전부터 추진해온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분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국경 분쟁의 중심이었던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영유권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본래 분쟁의 해결은 분쟁의 쟁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쟁점은 논의되지 않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와 같은 본질을 비껴간 내용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우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볼 때, 태국이면 모를까, 과거 호치민 루트 시절에 깔아 놓은 지뢰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캄보디아가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를 보자면 우선 국경 지역에서는 뺄 수 있겠지만 차후 다시 벌어질 분쟁에서 재등장할 확률이 높다. 앞서 언급한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소유권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 또한 범죄단지와 결탁하고 있는 훈 센 가문이 과연 적극적으로 협력할 지도 의문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문제는 상호간의 역사적 앙금과,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 그리고 영유권 다툼으로 인한 국경 분쟁 등,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태 트럼프는 세계 곳곳의 분쟁을 종식시키겠다며 여기 저기 발을 걸치고 있는데 제대로 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다, 이를 해결할 방안도, 묘책도 없고, 무엇보다 분쟁 자체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쟁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중재에 나선다면 당장은 중재국의 힘이 두려워 화의를 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한계는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작 분쟁의 근원과 원인은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의 힘과 트럼프의 관세가 두려워 표면적으로 악수를 할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관심이 끊기는 순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휴전을 어기고 폭격을 재개한 것처럼 이들 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겉장식으로 덮으려다 생긴 최악의 인명 손실은 전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8
  • 고대 카르타고의 영웅이자 포에니 전쟁의 상징, 한니발의 연승과 로마의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
    지중해의 여왕, 지중해 최대의 부자 도시로 불렸던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던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지중해 일대를 탐험한 끝에 이베리아 반도를 발견하여 차지하게 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엄청난 부, 특히 스페인 은광으로부터의 상당한 양의 부를 얻어 서유럽 팽창 정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한니발이 탄생하고 유년 시기의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가 살아 있을 당시 어린 아들인 한니발을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절대로 로마인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였으며 한니발은 때가 되면 불과 쇠로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정지하게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한니발의 삼촌인 하스드루발은 이후 로마와 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스페인의 북쪽에 있는 에브로 강을 경계로 하고 서로 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도시인 사군툼을 보호령으로 삼자 장성한 한니발은 협정 위반을 구실로 삼아 사군툼을 공격하였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로마는 이에 즉각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단지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B.C 218년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카르타고의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하였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와 더불어 좁은 도로 옆의 낙석지대, 그리고 외부 인들을 경계하는 갈리아 인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보병 중 1만 2천 명을 잃었고, 기병 역시 4천 명이나 죽은 상태였다. 코끼리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여 거의 다 죽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의 군대라 볼 수 없는 거지와 같은 형태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이 때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는 히스파니아 원주민인 이베리아 인들을 포함하여 갈리아 남부에서 전리품을 약속하고 융합한 갈리아 전사들, 누미디아 출신 기병, 지중해의 바레아레스(Islas Baleares) 군도 출신의 투석병과 카르타고 본토 출신의 소위 아프리카 보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병진을 닮은 군대로 이루어졌고 이들을 각종혼합 형태의 군대, 혹은 여러 군대가 섞인 잡군(雜軍)이었다. 그러한 군대는 수효만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처럼 여러 족속들이 혼합된 혼성군은 서로 간의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군 자체가 와해 될 수 있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본래 군대에 간 군인들이 같은 병영 안에서 같은 부대 명을 사용하고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같은 목적과 그에 대한 동기부여 및 명분이라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혼성군의 경우는 이러한 연대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군 통솔자가 군 집단에 투여하는 연대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강한 규율로써의 통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동료들과 자신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있다는 의식과 명분은 병사들이 동료를 서로 도와 전투를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당시의 로마군이 그러한 형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땅을 가지면서 로마라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위기에는 로마를 위하여 참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군이었다. 이는 같은 집단, 공동체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과 동질 의식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수호의 이유도 이와 같았던 것이었고 그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열세를 극복하여 승리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러한 부대원 간의 화합만을 놓고 보자면 한니발 군은 로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나라와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조된 잡군들은 대개 전리품을 약속받고 전쟁에 동원되는데, 한니발은 단순히 전리품으로 용병들을 유혹하거나 카르타고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보다는 한니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였다. 보장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군대의 결속과 자발성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 통솔력은 이후 강력한 로마 육군을 연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한니발을 상대로 육전에서 맞서는 로마 군의 지휘관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로 그는 앞서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으며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한니발이 나타나지 않자 다급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가 알프스를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예상을 벗어나 알프스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자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고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 포로들을 통해 스키피오가 이탈리아로 회군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B.C 218년 11월 로마군의 척후병이 우연히 티키누스(Tikinus) 강 근처에서 한니발을 발견했고 마침내 양군은 진지를 편성했다. 다음 날 양군은 전투를 벌였고 이에 먼저 양군의 기병대가 전선의 중앙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자신의 누미디아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전투 후반기에 가담시켜 로마의 경보병을 공략하게 했다. 양 측면에서 누미디아 기병의 가담으로 로마군보병의 전열이 붕괴되었고 자신의 진지로 후퇴했다. 지휘관인 스키피오도 중상을 입고 도주했다. 비록 양쪽 군대 모두 정예 주 전력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이 전투의 승리로 갈리아의 많은 부족을 카르타고의 편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키피오는 동료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Sempronius)에게 합류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 때 로마군은 한니발의 기병이 막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탈리아 본토에서 처음 벌어진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음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경험했다. 스키피오는 퇴각하여 트레비아 강까지 밀리게 되었고 공동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는 군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의 캠프에 합류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추격하다가 군대의 보급을 위해 후방에 남았고 이제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인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보다는 상대하기 편하다 생각하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스키피오는 아직 티키누스 전투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회복하여 다시 지휘권을 가지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기 위해 성급히 군대를 움직였다. 특히 다음 해의 집정관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싶었던 셈프로니우스는 평범한 전투로 생각하고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듣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한니발은 지형을 정찰하고 동생 마고 바르카에게 기병 1,000명과 경 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의 숲속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모든 카르타고 군에게 충분한 식량과 휴식을 주었다. 다음 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을 급습했고 셈프로니우스는 휘하 기병에게 격퇴를 명령했는데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보자마자 성급하게도 모든 보병에게도 추격을 명하였다. 트레비아 강을 건너 카르타고 군을 추격하던 로마군은 중앙에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적진을 돌파하기 위한 진형을 설치했다. 카르타고 군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갈리아 경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 측면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거의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는 것 같았으나 강을 건너 몸이 젖은데다 추위와 허기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고 기병은 강력한 카르타고 기병에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숲속에 매복해있던 마고의 기병과 보병이 나타나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의 선전으로 한니발 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었지만 거의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 속에서 살육 당했다. 살아서 포위를 풀고 도주한 로마 병사는 1만 5천명 정도였다. 한니발의 탁월한 전술의 승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승리로 인하여 그때까지 한니발과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던 많은 갈리아 부족이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계속 한니발 군에 밀리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가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하고 난 후 B.C 217년의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Plaminius)와 세르빌리우스(Serbilius)가 선출되었고 이들은 각각 셈프로니우스와 스키피오의 군단을 승계 받았다. 평민 출신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원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각각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한니발의 예상 공격 경로를 찾아 저지하려고 했다. 한니발 역시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한 행군로를 빠르게 행군하여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들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한니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를 유린하는 것을 보면서 한니발을 추격하였고 세르빌리우스에게 남하하여 합류하자고 요청하였다. 양쪽 집정관은 페루시아에서 한니발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두 군대가 만나게 되면 전력상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Trasimene) 호수에 도착하자 이곳이 매복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매복시키면서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하고 군사를 배치했다. 호반을 남쪽으로 하고 북쪽의 숲속에서 로마군이 진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군은 호수 인근에 도착하여 야영을 한 이후 다음날 아침 안개 속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물론 카르타고 군이 숲속에 매복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안개와 좁은 호수 길을 따라 진군하였다. 이어 한니발 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양쪽의 로마군 행군로를 봉쇄하고 무차별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종의 살육에 가까웠던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호수로 밀렸고 카르타고 군의 칼에 죽거나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6천 명의 전위 부대는 포위를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기병대에게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약 2만 5천 명의 로마 병력 중 살아서 로마로 돌아간 것은 2천 명에 불과했다. 집정관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로마의 완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을 내주었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 집정관에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할 때까지 지연 전술인 파비우스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히스페니아에 군을 보내 사군툼을 공격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큰 전투인 사군툼 전투에서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나마 사군툼의 중앙부를 맡았던 중군(中軍)만이 근처의 발렌시아 요새로 대피하여 증원 군을 기다렸다. 패전의 소식에 히스페니아 시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아직 15개 이상 군단 10만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스 왕국의 의회와 군부는 침착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Favius Maximus)는 이탈리아에서는 전투를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히스파니아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후일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지연 전술을 그의 이름을 차용해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로마 의회는 새 집정관인 파비우스에게 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주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 파비우스는 사군툼에서 승전한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4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히스파니아 북쪽 일대인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방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파비우스의 명을 받아 히스파니아 원정군을 지휘하는 클라우디우스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병력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과 정면 대결보다는 매복전을 통한 기습을 준비하였다. 아라곤 지방에 있는 사라고사를 지나던 클라우디우스의 군은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사라고사의 숲에서 카르타고 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하스드루발은 급한 마음에 군을 이끌고 아침 안개가 자욱한 숲의 길을 따라 클라우디우스를 추격했다. 마침 소규모의 로마 1개 군단이 하스드루발에 나타났고 카르타고 군의 선봉이 후퇴하는 소규모 로마 군단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하스드루발의 군은 선봉과 중군, 그리고 후미가 나뉘게 되었다. 이 때 클라우디우스는 호수 위의 언덕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병력들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전투 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행군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카르타고 군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4만의 병력 중 반 이상이 로마군에 의해 몰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바르카스 왕국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북부 지역은 로마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로마군은 지금의 이베리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로마 해군이 다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해군을 카르타헤나에서 격퇴하고 지중해로 전달되는 한니발의 보급로를 차단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는 여전히 한니발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 때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방으로 진군하여 최근에 로마에 복속된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간간히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파비우스의 방침에 따라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적과 전투를 벌여 이기는 것이 전통인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렵게 전투를 벌여 복속시킨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넘어가는 것은 더욱 인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로마에서 인기가 하락한 파비우스는 집정관 연임에 실패하였고 B.C 216년에 로마 상원은 파비우스 대신 타렌티우스 바로(Tarentius Varro)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한다. 당시 한니발 군의 수는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승을 만들어냈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집정관 바로는 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에 부근에서 당일 최고 지휘관이 된 바로와 한니발이 격돌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8

포토뉴스 검색결과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과 캄보디아, 트럼프가 주선해서 화해시킨다고 양국의 앙금이 풀어질까?
    캄보디아의 주 민족인 크메르족은 본래 남방 인들이 아니라 북방 티베트인들이 어떠한 현상으로 인하여 남하하였고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과 혼혈함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를 보고 파악한 결과인데 남방의 완전한 검정 피부보다는 북방 인종의 하얀 피부와 혼혈된 피부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크메르 인의 이동은 북쪽에서 동남아시아의 주요 지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물론 이들의 이동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선사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인류학자들은 원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 살고 있었던 많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타이족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3000년 전, B.C 2000년경에 내왕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티베트계 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테국학계의 학자들은 중국 티베트 지역이 북쪽의 중앙아시아, 사카계 민족들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밀려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 영토 내부에서 오스트로아시아어에 발견되는 어휘나 주요한 강을 따라 이주한 경로를 보면 농경 목적 등으로 침입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크메르인은 운남이나 티베트 서부 지역의 묘족과 관련이 깊은 민족으로 추정된다. 태국의 주 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보통 타이족은 운남성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운남성 지역은 사천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와 상고시대에는 이 지역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촉문명(古蜀文明)이다. 이러한 고촉문명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문화가 삼성퇴 문화이다. 삼성퇴 문화는 5000년~3000년 전의 고촉문화 유적으로 그 원주민이 어느 민족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점차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문명으로 합의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타이족도 아마 강족과 저족의 사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운남성 지역에는 지금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타이족은 베트남 서북 지역의 홍 강에서 다(Đà) 강, 마(Mã) 강을 지나서 람(Lam) 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선조들은 아주 일찍부터 베트남, 특히 북서부 지역에 정착해서 거주해왔다. 백(白) 타이족이 가장 먼저 이주해 왔고, 그 다음에 흑(黑) 타이족이 현재의 거주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이들이 타이족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현재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중국 남부에도 거주하고 있다. 타이족은 고대 중국 남방의 백월(百越) 집단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전월(滇越)은 타이족 선조의 초기 명칭이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탄(撣), 당송(唐宋) 시대의 금치(金齒), 은치(銀齒), 수면(綉面), 망만(茫蠻), 그리고 원, 명, 청 및 민국 시기의 백의(白衣), 북이(僰夷), 파이(擺彛) 및 파이(擺夷) 등은 타이족 형성과 관계가 깊다. 이들 타이족이 내려와 말레이계 민족들이 자리한 오늘날의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이족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고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하(南下)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여러 추정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밝혀나가고 있다. 태국에는 반 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캄보디아와 태국은 서로 민족 자체가 다르다. 두 민족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치고 나간 민족은 캄보디아인들의 직접적인 선조인 크메르 제국이었다. 790년을 전후해서 세력을 규합한 자야바르만은 주변 영토들을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했으며 수진랍과 육진랍을 통합했다. 이후 분열되어 있던 진랍의 각 세력들을 통합하였으며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게 되는데, 현재의 프놈펜 롤루오스(Loluos) 지역인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로 천도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쌓게 된다. 자이바르만은 바탐방 일대에서 발생한 진랍 후예들을 제압하고 802년 바탐방을 함락시킴으로써 진랍 왕조의 통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고 말았다.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 참파 북쪽 지역인 임읍국(林邑國)의 통일을 완수한 자야바르만 이비스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지역인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pata)로 이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황제로 선언한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 다른 말로 앙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15세기까지 존속했고, 그 세력이 강성할 때는 현재의 태국 동북부, 라오스 및 베트남의 일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다. 흔히 캄보디아에 알려진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바로 이 크메르 제국 시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크메르 제국이 한창 강성했을 때는 태국은 당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태국에는 서서히 쇠락하는 크메르 제국의 틈새에서 몬 왕국의 지배 하의 타이계 유통(Uthong) 왕국의 왕자인 라마 티보디(Rama Thibodi)가 전염병을 피해 차오프라야 강 하류 롭부리 지역에 정착해 1350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것이 아유타야 왕국이다. 라마티보디는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골 지역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 하류에 출발한 국가로 수도인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섬인 하중도(河中島)에 만들어졌다. 이 일대는 농업 생산력이 높고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기도 쉬웠으며, 당대의 강국 크메르 제국과 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400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면서 태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동안 산재 하고 있던 타이족의 소왕국들을 하나의 권력 아래 집중시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한 왕조가 되었다. 이 때부터 동남아시아에 타이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자존심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양국은 숙명과 같은 대립을 꾸준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는 다시 동남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 양쪽으로부터 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 지역의 명칭 유래가 "'시암(태국)이 평정했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근현대 시기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태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캄보디아는 사실상 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태국과 맺을 조약을 필두로 무책임하고 캄보디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영토 분할을 했으며 1907년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영토의 측정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태국 왕실이 이러한 프랑스의 결정적인 오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었고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당시 태국 차크리 왕실은 서쪽 미얀마와 남쪽 말레이 연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동쪽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프랑스 사이에서 자국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태국 또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태국 왕실은 1908년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국 측이 땅에 대한 측량 인식에 대한 부재, 그리고 측량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태국 왕실의 근대적 지식과 사고의 무지, 영토 측정에 대한 관심의 전무가 불러온 재앙덩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프랑스 측의 측량을 승인한 지 무려 26년 만인 1934년에 대해서야 이와 같은 프랑스 측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국 왕실은 발견은 했지만 여전히 측량에 대해 무지했기에 프랑스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왕실은 프랑스가 영원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프랑스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면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크메르족과 타이족이라는 민족성 문제까지 부각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다. 그러한 와중에 지난 27일 트럼프는 태국과 캄보디아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 본 협정에는 협정에는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국은 초기 휴전이 성립된 이후 포로로 잡은 캄보디아인 18명을 석방할 예정이며 두 국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수개월 전부터 추진해온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분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국경 분쟁의 중심이었던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영유권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본래 분쟁의 해결은 분쟁의 쟁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쟁점은 논의되지 않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와 같은 본질을 비껴간 내용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우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볼 때, 태국이면 모를까, 과거 호치민 루트 시절에 깔아 놓은 지뢰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캄보디아가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를 보자면 우선 국경 지역에서는 뺄 수 있겠지만 차후 다시 벌어질 분쟁에서 재등장할 확률이 높다. 앞서 언급한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소유권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 또한 범죄단지와 결탁하고 있는 훈 센 가문이 과연 적극적으로 협력할 지도 의문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문제는 상호간의 역사적 앙금과,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 그리고 영유권 다툼으로 인한 국경 분쟁 등,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태 트럼프는 세계 곳곳의 분쟁을 종식시키겠다며 여기 저기 발을 걸치고 있는데 제대로 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다, 이를 해결할 방안도, 묘책도 없고, 무엇보다 분쟁 자체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쟁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중재에 나선다면 당장은 중재국의 힘이 두려워 화의를 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한계는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작 분쟁의 근원과 원인은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의 힘과 트럼프의 관세가 두려워 표면적으로 악수를 할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관심이 끊기는 순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휴전을 어기고 폭격을 재개한 것처럼 이들 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겉장식으로 덮으려다 생긴 최악의 인명 손실은 전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8
  • 고대 카르타고의 영웅이자 포에니 전쟁의 상징, 한니발의 연승과 로마의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
    지중해의 여왕, 지중해 최대의 부자 도시로 불렸던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던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지중해 일대를 탐험한 끝에 이베리아 반도를 발견하여 차지하게 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엄청난 부, 특히 스페인 은광으로부터의 상당한 양의 부를 얻어 서유럽 팽창 정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한니발이 탄생하고 유년 시기의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가 살아 있을 당시 어린 아들인 한니발을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절대로 로마인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였으며 한니발은 때가 되면 불과 쇠로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정지하게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한니발의 삼촌인 하스드루발은 이후 로마와 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스페인의 북쪽에 있는 에브로 강을 경계로 하고 서로 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도시인 사군툼을 보호령으로 삼자 장성한 한니발은 협정 위반을 구실로 삼아 사군툼을 공격하였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로마는 이에 즉각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단지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B.C 218년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카르타고의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하였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와 더불어 좁은 도로 옆의 낙석지대, 그리고 외부 인들을 경계하는 갈리아 인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보병 중 1만 2천 명을 잃었고, 기병 역시 4천 명이나 죽은 상태였다. 코끼리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여 거의 다 죽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의 군대라 볼 수 없는 거지와 같은 형태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이 때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는 히스파니아 원주민인 이베리아 인들을 포함하여 갈리아 남부에서 전리품을 약속하고 융합한 갈리아 전사들, 누미디아 출신 기병, 지중해의 바레아레스(Islas Baleares) 군도 출신의 투석병과 카르타고 본토 출신의 소위 아프리카 보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병진을 닮은 군대로 이루어졌고 이들을 각종혼합 형태의 군대, 혹은 여러 군대가 섞인 잡군(雜軍)이었다. 그러한 군대는 수효만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처럼 여러 족속들이 혼합된 혼성군은 서로 간의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군 자체가 와해 될 수 있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본래 군대에 간 군인들이 같은 병영 안에서 같은 부대 명을 사용하고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같은 목적과 그에 대한 동기부여 및 명분이라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혼성군의 경우는 이러한 연대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군 통솔자가 군 집단에 투여하는 연대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강한 규율로써의 통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동료들과 자신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있다는 의식과 명분은 병사들이 동료를 서로 도와 전투를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당시의 로마군이 그러한 형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땅을 가지면서 로마라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위기에는 로마를 위하여 참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군이었다. 이는 같은 집단, 공동체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과 동질 의식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수호의 이유도 이와 같았던 것이었고 그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열세를 극복하여 승리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러한 부대원 간의 화합만을 놓고 보자면 한니발 군은 로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나라와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조된 잡군들은 대개 전리품을 약속받고 전쟁에 동원되는데, 한니발은 단순히 전리품으로 용병들을 유혹하거나 카르타고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보다는 한니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였다. 보장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군대의 결속과 자발성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 통솔력은 이후 강력한 로마 육군을 연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한니발을 상대로 육전에서 맞서는 로마 군의 지휘관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로 그는 앞서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으며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한니발이 나타나지 않자 다급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가 알프스를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예상을 벗어나 알프스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자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고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 포로들을 통해 스키피오가 이탈리아로 회군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B.C 218년 11월 로마군의 척후병이 우연히 티키누스(Tikinus) 강 근처에서 한니발을 발견했고 마침내 양군은 진지를 편성했다. 다음 날 양군은 전투를 벌였고 이에 먼저 양군의 기병대가 전선의 중앙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자신의 누미디아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전투 후반기에 가담시켜 로마의 경보병을 공략하게 했다. 양 측면에서 누미디아 기병의 가담으로 로마군보병의 전열이 붕괴되었고 자신의 진지로 후퇴했다. 지휘관인 스키피오도 중상을 입고 도주했다. 비록 양쪽 군대 모두 정예 주 전력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이 전투의 승리로 갈리아의 많은 부족을 카르타고의 편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키피오는 동료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Sempronius)에게 합류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 때 로마군은 한니발의 기병이 막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탈리아 본토에서 처음 벌어진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음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경험했다. 스키피오는 퇴각하여 트레비아 강까지 밀리게 되었고 공동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는 군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의 캠프에 합류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추격하다가 군대의 보급을 위해 후방에 남았고 이제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인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보다는 상대하기 편하다 생각하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스키피오는 아직 티키누스 전투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회복하여 다시 지휘권을 가지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기 위해 성급히 군대를 움직였다. 특히 다음 해의 집정관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싶었던 셈프로니우스는 평범한 전투로 생각하고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듣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한니발은 지형을 정찰하고 동생 마고 바르카에게 기병 1,000명과 경 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의 숲속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모든 카르타고 군에게 충분한 식량과 휴식을 주었다. 다음 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을 급습했고 셈프로니우스는 휘하 기병에게 격퇴를 명령했는데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보자마자 성급하게도 모든 보병에게도 추격을 명하였다. 트레비아 강을 건너 카르타고 군을 추격하던 로마군은 중앙에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적진을 돌파하기 위한 진형을 설치했다. 카르타고 군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갈리아 경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 측면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거의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는 것 같았으나 강을 건너 몸이 젖은데다 추위와 허기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고 기병은 강력한 카르타고 기병에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숲속에 매복해있던 마고의 기병과 보병이 나타나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의 선전으로 한니발 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었지만 거의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 속에서 살육 당했다. 살아서 포위를 풀고 도주한 로마 병사는 1만 5천명 정도였다. 한니발의 탁월한 전술의 승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승리로 인하여 그때까지 한니발과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던 많은 갈리아 부족이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계속 한니발 군에 밀리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가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하고 난 후 B.C 217년의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Plaminius)와 세르빌리우스(Serbilius)가 선출되었고 이들은 각각 셈프로니우스와 스키피오의 군단을 승계 받았다. 평민 출신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원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각각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한니발의 예상 공격 경로를 찾아 저지하려고 했다. 한니발 역시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한 행군로를 빠르게 행군하여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들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한니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를 유린하는 것을 보면서 한니발을 추격하였고 세르빌리우스에게 남하하여 합류하자고 요청하였다. 양쪽 집정관은 페루시아에서 한니발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두 군대가 만나게 되면 전력상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Trasimene) 호수에 도착하자 이곳이 매복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매복시키면서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하고 군사를 배치했다. 호반을 남쪽으로 하고 북쪽의 숲속에서 로마군이 진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군은 호수 인근에 도착하여 야영을 한 이후 다음날 아침 안개 속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물론 카르타고 군이 숲속에 매복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안개와 좁은 호수 길을 따라 진군하였다. 이어 한니발 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양쪽의 로마군 행군로를 봉쇄하고 무차별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종의 살육에 가까웠던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호수로 밀렸고 카르타고 군의 칼에 죽거나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6천 명의 전위 부대는 포위를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기병대에게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약 2만 5천 명의 로마 병력 중 살아서 로마로 돌아간 것은 2천 명에 불과했다. 집정관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로마의 완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을 내주었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 집정관에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할 때까지 지연 전술인 파비우스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히스페니아에 군을 보내 사군툼을 공격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큰 전투인 사군툼 전투에서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나마 사군툼의 중앙부를 맡았던 중군(中軍)만이 근처의 발렌시아 요새로 대피하여 증원 군을 기다렸다. 패전의 소식에 히스페니아 시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아직 15개 이상 군단 10만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스 왕국의 의회와 군부는 침착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Favius Maximus)는 이탈리아에서는 전투를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히스파니아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후일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지연 전술을 그의 이름을 차용해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로마 의회는 새 집정관인 파비우스에게 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주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 파비우스는 사군툼에서 승전한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4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히스파니아 북쪽 일대인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방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파비우스의 명을 받아 히스파니아 원정군을 지휘하는 클라우디우스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병력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과 정면 대결보다는 매복전을 통한 기습을 준비하였다. 아라곤 지방에 있는 사라고사를 지나던 클라우디우스의 군은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사라고사의 숲에서 카르타고 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하스드루발은 급한 마음에 군을 이끌고 아침 안개가 자욱한 숲의 길을 따라 클라우디우스를 추격했다. 마침 소규모의 로마 1개 군단이 하스드루발에 나타났고 카르타고 군의 선봉이 후퇴하는 소규모 로마 군단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하스드루발의 군은 선봉과 중군, 그리고 후미가 나뉘게 되었다. 이 때 클라우디우스는 호수 위의 언덕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병력들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전투 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행군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카르타고 군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4만의 병력 중 반 이상이 로마군에 의해 몰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바르카스 왕국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북부 지역은 로마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로마군은 지금의 이베리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로마 해군이 다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해군을 카르타헤나에서 격퇴하고 지중해로 전달되는 한니발의 보급로를 차단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는 여전히 한니발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 때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방으로 진군하여 최근에 로마에 복속된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간간히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파비우스의 방침에 따라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적과 전투를 벌여 이기는 것이 전통인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렵게 전투를 벌여 복속시킨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넘어가는 것은 더욱 인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로마에서 인기가 하락한 파비우스는 집정관 연임에 실패하였고 B.C 216년에 로마 상원은 파비우스 대신 타렌티우스 바로(Tarentius Varro)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한다. 당시 한니발 군의 수는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승을 만들어냈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집정관 바로는 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에 부근에서 당일 최고 지휘관이 된 바로와 한니발이 격돌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