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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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아메리카의 고추를 아시아에 전했다면 반대로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전해진 작물이 있다. 

 

이는 사탕수수라고 하는 작물로 설탕의 주 원료였다. 사탕수수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를 원산으로 하는 다년생 나무로서, 높이는 2~6m로 대나무와 같이 생긴 줄기에 의하면 이당류인 자당(Sucrose)이 함유되어 있는 즙이 매우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즙을 짜내고 증류한 것으로 설탕을 만든다. 

 

사탕수수는 곡류에 들어가지만 설탕은 곡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자당(蔗糖)은 정제해서 설탕과 같은 조미료나 당밀의 형태로 식재료로 쓰거나, 발효시켜 에탄올이나 술을 만들며 럼(RUM)이 사탕수수로 만든 술로 설탕을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인 당밀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 사탕수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농작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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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탕수수, 사진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2%AC%ED%83%95%EC%88%98%EC%88%98

사탕수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인데다, 쌀과 같이 생산지에서 주로 소비되는 작물도 아니다 보니 수출입이 활발해서 세계에서 가장 상품화된 농산물로 꼽힌다. 사탕수수는 덥고 습한 열대기후에서 자라며 서식범위는 적도에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매우 넓게 분포한다. 

 

본래 여러 종의 사탕수수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에서 자생했으며, 사탕수수가 재배된 시기에는 기원전부터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결정화하는 기술은 4세기경 인도 굽타 왕조 때 확립되었으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채식을 권장하던 자이나교, 마니교 신도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원정하면서 사령관으로부터 보고받기를 '인도에서는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갈대에서 꿀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8세기 무렵 이슬람의 무역상들이 인도에서 상업행위를 하면서 사탕수수를 들여왔고 그 뒤 10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지었으며 여기에서 증류한 설탕 등을 독점하게 되었다. 

 

유럽에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11세기경 전파되었으며 사탕수수의 북방 재배의 한계선은 유럽의 경우 지중해 일부, 특히 주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장악한 키프로스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또 경작에 많은 물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비싼 작물이었기에 재배 또한 많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특히 수확할 때 먼저 사탕수수 밭을 불에 태운다. 이는 잔여 잎들을 없앨 수 있고, 달콤한 성분으로 인해 숨어 있는 독사나 해충 등도 모두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의 줄기나 뿌리는 수분을 머금고 있기에 상하지 않지만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콜럼부스가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아이티에 전파시켰다. 이후 서양 열강들은 카리브해 지역을 설탕 재배용 식민지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아직도 카리브 지역 섬은 사탕수수가 중요 작물이다. 대항해시대의 주요 교역품으로서 항해 기술의 발전과 늘어난 식민지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스페인을 필두로 아메리카에 진출한 유럽 열강들은 카리브해 근방의 여러 섬들을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만들었다. 그중 일부는 섬의 90%가 사탕수수 농장이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특히 카리브해 지역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고, 이는 서인도 제도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카리브해 지역이나 태평양의 하와이, 피지와 같은 열대 지방의 섬들은 사탕수수가 경제, 사회와 민족 구성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지역들의 기후와 토질이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알맞아 미국과 유럽에서 이들 섬에 플랜테이션 방식의 사탕수수 농업을 크게 벌였고 사탕수수는 서방 국가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이어져서 이들 지역에서 흑인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아이티는 인구의 90%가 흑인이고 자메이카도 비슷하며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도 흑인종이 대단히 많다. 노예제도가 금지된 이후 아시아에서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데려와 남태평양의 섬 피지에서 인도계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많은 것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을 떠나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도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전에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동안 일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에는 오키나와에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사람인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 1557~1644)가 설탕을 제조하는 방법 등을 동남아시아에서 류큐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중국에서는 고구마, 일본에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류큐인으로 새로운 작물을 들여온 류큐의 신(新) 문물을 전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도 사츠마가 지배했던 아마미 군도로 사탕수수가 전해지게 되었고 이 지역들의 흑설탕이 일본 전역에 퍼져나가게 된다. 특히 일본에서의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국의 자금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츠마가 후일 탈번하여 메이지 유신을 달성할 수 있게 한 자금줄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재에도 가고시마 아마미 군도와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흑설탕은 지금도 그 지방의 유명한 특산품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후 유럽에는 사탕무가 가공됨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사탕수수의 수출이 힘들어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커피를 사탕수수 대신 재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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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원주민 잔혹사, 사탕수수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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