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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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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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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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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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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또 죽음을 반복하다…기업 문화에 생명이 없다"
[칼럼] 죽음은 일상이 아니다 — SPC가 경시한 ‘한 사람의 생명’ 사실관계 확인 키워드: SPC 제빵공장 사망 사고, 반복된 중대재해, 노조 탄압 정황, 안전관리 미비, 불매운동 ● 사건개요 2025년 5월 19일 새벽 3시. 경기도 시흥의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업 중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 도중 상반신이 기계에 끼이는 참극이었다. 이미 지난 2022년과 2023년에도 SPC의 계열 공장에서 유사한 '끼임 사고'로 각각 20대와 50대 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사고 유형도, 희생자의 성별도, 심지어 현장 작업 방식조차도 거의 바뀐 것이 없다. 문제는 이 죽음이 ‘예외’가 아닌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계 작동 중 유지보수, 2인 1조 원칙 미준수, 노후 설비, 감지장치 부재는 지난 사고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SPC는 사고가 날 때마다 사과했고 “안전에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 사망은 그 모든 약속이 공허했음을 다시 증명했다. ● 발생 원인 ‘사람’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존재다. 그런데 SPC는 이 기본을 잊은 듯하다. 이번 사망 사고는 작업자가 몸을 기계 안으로 넣어 윤활 작업을 하던 중 발생했다. 공장을 '풀가동'하던 중 컨베이어 벨트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위험한 상태에서 작업을 지속해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공정이 잠시라도 멈추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기계를 끄지 않은 채 작업하도록 했다는 점은 조직의 생명 경시 문화를 보여준다. 사람보다 시스템이, 생명보다 공정 효율이 우선시되는 구조다. ‘죽음을 유발하는 시스템’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단순한 관리 소홀이 아니라 구조적 범죄다. ● 피해 규모 단순한 사망자 수만을 본다면, SPC의 책임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피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다. 피해자는 일터에서 안전을 기대하며 생계를 꾸리던 평범한 노동자들이며, 그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고 이후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는 동료들, 불안에 휩싸인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제빵기사들까지 — 이들은 모두 SPC의 생명 경시 태도의 피해자다. ● 현재 상황 시민사회는 행동에 나섰다. SPC 불매운동이 전 계열사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SPC 계열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며 제품 소비를 중단하자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맹점주들은 매출 하락에 한숨을 쉬지만, 책임은 가맹점이 아니라 본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민단체는 이번 사고를 예견된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허영인 회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은 공장 관계자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고, 고용노동부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 ● 향후 대응 및 과제 SPC는 이번에도 공장 가동 중단, 사과문 발표, 사후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비자와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형식적 사과’에 기대지 않는다. 이 문제의 본질은 ‘시스템의 반복된 실패’이자, 나아가 ‘생명에 대한 철학 부재’다. 회사의 안전경영위원회가 단순한 형식에 그친다면, 그것은 윤리적 실패이자 범죄 방조다. SPC는 이제야말로 근본적인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 단순한 안전 장비 도입이나 매뉴얼 개선을 넘어, 전사적 안전문화 전환 없이는 이 죽음의 반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칼럼은 단지 SPC 하나의 기업 윤리를 문제 삼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노동 현장에서 생명이 경시되는 구조, 죽음이 익숙해지는 무관심, 반복된 사고에도 바뀌지 않는 기업 문화 —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비극은 숙명이 된다. 하지만 숙명은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책임’을 묻고, ‘변화’를 강요하는 사회적 연대로부터 시작된다. SPC의 이익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기업은 신뢰를 잃고, 사회는 존엄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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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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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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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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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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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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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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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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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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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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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또 죽음을 반복하다…기업 문화에 생명이 없다"
- [칼럼] 죽음은 일상이 아니다 — SPC가 경시한 ‘한 사람의 생명’ 사실관계 확인 키워드: SPC 제빵공장 사망 사고, 반복된 중대재해, 노조 탄압 정황, 안전관리 미비, 불매운동 ● 사건개요 2025년 5월 19일 새벽 3시. 경기도 시흥의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업 중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 도중 상반신이 기계에 끼이는 참극이었다. 이미 지난 2022년과 2023년에도 SPC의 계열 공장에서 유사한 '끼임 사고'로 각각 20대와 50대 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사고 유형도, 희생자의 성별도, 심지어 현장 작업 방식조차도 거의 바뀐 것이 없다. 문제는 이 죽음이 ‘예외’가 아닌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계 작동 중 유지보수, 2인 1조 원칙 미준수, 노후 설비, 감지장치 부재는 지난 사고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SPC는 사고가 날 때마다 사과했고 “안전에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 사망은 그 모든 약속이 공허했음을 다시 증명했다. ● 발생 원인 ‘사람’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존재다. 그런데 SPC는 이 기본을 잊은 듯하다. 이번 사망 사고는 작업자가 몸을 기계 안으로 넣어 윤활 작업을 하던 중 발생했다. 공장을 '풀가동'하던 중 컨베이어 벨트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위험한 상태에서 작업을 지속해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공정이 잠시라도 멈추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기계를 끄지 않은 채 작업하도록 했다는 점은 조직의 생명 경시 문화를 보여준다. 사람보다 시스템이, 생명보다 공정 효율이 우선시되는 구조다. ‘죽음을 유발하는 시스템’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단순한 관리 소홀이 아니라 구조적 범죄다. ● 피해 규모 단순한 사망자 수만을 본다면, SPC의 책임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피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다. 피해자는 일터에서 안전을 기대하며 생계를 꾸리던 평범한 노동자들이며, 그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고 이후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는 동료들, 불안에 휩싸인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제빵기사들까지 — 이들은 모두 SPC의 생명 경시 태도의 피해자다. ● 현재 상황 시민사회는 행동에 나섰다. SPC 불매운동이 전 계열사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SPC 계열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며 제품 소비를 중단하자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맹점주들은 매출 하락에 한숨을 쉬지만, 책임은 가맹점이 아니라 본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민단체는 이번 사고를 예견된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허영인 회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은 공장 관계자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고, 고용노동부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 ● 향후 대응 및 과제 SPC는 이번에도 공장 가동 중단, 사과문 발표, 사후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비자와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형식적 사과’에 기대지 않는다. 이 문제의 본질은 ‘시스템의 반복된 실패’이자, 나아가 ‘생명에 대한 철학 부재’다. 회사의 안전경영위원회가 단순한 형식에 그친다면, 그것은 윤리적 실패이자 범죄 방조다. SPC는 이제야말로 근본적인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 단순한 안전 장비 도입이나 매뉴얼 개선을 넘어, 전사적 안전문화 전환 없이는 이 죽음의 반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칼럼은 단지 SPC 하나의 기업 윤리를 문제 삼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노동 현장에서 생명이 경시되는 구조, 죽음이 익숙해지는 무관심, 반복된 사고에도 바뀌지 않는 기업 문화 —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비극은 숙명이 된다. 하지만 숙명은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책임’을 묻고, ‘변화’를 강요하는 사회적 연대로부터 시작된다. SPC의 이익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기업은 신뢰를 잃고, 사회는 존엄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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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또 죽음을 반복하다…기업 문화에 생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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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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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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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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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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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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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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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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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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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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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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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또 죽음을 반복하다…기업 문화에 생명이 없다"
- [칼럼] 죽음은 일상이 아니다 — SPC가 경시한 ‘한 사람의 생명’ 사실관계 확인 키워드: SPC 제빵공장 사망 사고, 반복된 중대재해, 노조 탄압 정황, 안전관리 미비, 불매운동 ● 사건개요 2025년 5월 19일 새벽 3시. 경기도 시흥의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업 중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 도중 상반신이 기계에 끼이는 참극이었다. 이미 지난 2022년과 2023년에도 SPC의 계열 공장에서 유사한 '끼임 사고'로 각각 20대와 50대 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사고 유형도, 희생자의 성별도, 심지어 현장 작업 방식조차도 거의 바뀐 것이 없다. 문제는 이 죽음이 ‘예외’가 아닌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계 작동 중 유지보수, 2인 1조 원칙 미준수, 노후 설비, 감지장치 부재는 지난 사고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SPC는 사고가 날 때마다 사과했고 “안전에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 사망은 그 모든 약속이 공허했음을 다시 증명했다. ● 발생 원인 ‘사람’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존재다. 그런데 SPC는 이 기본을 잊은 듯하다. 이번 사망 사고는 작업자가 몸을 기계 안으로 넣어 윤활 작업을 하던 중 발생했다. 공장을 '풀가동'하던 중 컨베이어 벨트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위험한 상태에서 작업을 지속해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공정이 잠시라도 멈추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기계를 끄지 않은 채 작업하도록 했다는 점은 조직의 생명 경시 문화를 보여준다. 사람보다 시스템이, 생명보다 공정 효율이 우선시되는 구조다. ‘죽음을 유발하는 시스템’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단순한 관리 소홀이 아니라 구조적 범죄다. ● 피해 규모 단순한 사망자 수만을 본다면, SPC의 책임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피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다. 피해자는 일터에서 안전을 기대하며 생계를 꾸리던 평범한 노동자들이며, 그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고 이후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는 동료들, 불안에 휩싸인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제빵기사들까지 — 이들은 모두 SPC의 생명 경시 태도의 피해자다. ● 현재 상황 시민사회는 행동에 나섰다. SPC 불매운동이 전 계열사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SPC 계열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며 제품 소비를 중단하자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맹점주들은 매출 하락에 한숨을 쉬지만, 책임은 가맹점이 아니라 본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민단체는 이번 사고를 예견된 중대재해로 규정하고 허영인 회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은 공장 관계자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고, 고용노동부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 ● 향후 대응 및 과제 SPC는 이번에도 공장 가동 중단, 사과문 발표, 사후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비자와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형식적 사과’에 기대지 않는다. 이 문제의 본질은 ‘시스템의 반복된 실패’이자, 나아가 ‘생명에 대한 철학 부재’다. 회사의 안전경영위원회가 단순한 형식에 그친다면, 그것은 윤리적 실패이자 범죄 방조다. SPC는 이제야말로 근본적인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 단순한 안전 장비 도입이나 매뉴얼 개선을 넘어, 전사적 안전문화 전환 없이는 이 죽음의 반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칼럼은 단지 SPC 하나의 기업 윤리를 문제 삼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노동 현장에서 생명이 경시되는 구조, 죽음이 익숙해지는 무관심, 반복된 사고에도 바뀌지 않는 기업 문화 —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비극은 숙명이 된다. 하지만 숙명은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책임’을 묻고, ‘변화’를 강요하는 사회적 연대로부터 시작된다. SPC의 이익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기업은 신뢰를 잃고, 사회는 존엄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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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또 죽음을 반복하다…기업 문화에 생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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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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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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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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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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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이프투게더 송운서 회장
- “세계적이며 획기적인 제품 개발” ㈜라이프투게더 송운서 회장 송운서 회장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회사인데 간단한 소개 부탁합니다.㈜라이프투게더는 자연의 생명력과 첨단 바이오 기술을 결합해 프리미엄 뷰티·헬스 솔루션을 연구·개발하는 기업입니다.발효균은 장독대의 메주처럼 유효 성분을 극대화하고 줄기세포 유래 성장인자는GPS처럼 피부 속 필요한 곳으로 정확히 안내합니다.농장→연구실→소비자까지 이어지는 6차 산업 수직 통합 모델로 갓 수확한 토마토가 식탁에 오르듯 신선함과 효능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개발자가 되셨는지?어린 시절 텃밭에서 민들레 잎 하나에도 호기심을 품고 “이 속에 어떤 비밀이 있을까?” 고민하며 시작했습니다.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후 연구실과 현장을 오가며 ‘세포의 자가 회복 메커니즘’을 깊이 탐구했고, 25년간 레시피를 지속 업그레이드해 왔습니다.스마트폰 앱이 사용자 피드백으로 버전업하듯, 현장의 작은 목소리 하나까지 연구에 반영한 것이 오늘의 라이프투게더를 만들었습니다. -올해 안에 나올 획기적인 제품이 있다는데 소개 부탁합니다.9월 출시 예정인 ‘HyperStem RGS앰플’은 줄기세포 발효물과 다중 펩타이드를 나노 캡슐에 담아 초 고농축으로 구현한 포뮬러입니다.현미경으로 확인하듯 나노 캡슐이 피부 장벽을 통과해 콜라겐 생성 세포에 직접 작용합니다.스마트워치가 심박수와 수면 패턴을 측정하듯, AI진단이 피부 상태를 분석해 “오늘은 이만큼, 내일은 저만큼” 맞춤 사용량을 제안합니다. -미용실에서 점판할 의향은 없으신지?이미 국내 유수 뷰티 살롱과 협업 중이며, 올 하반기 살롱 전용 라인을 정식 론칭합니다.프로용 포뮬러는 마치 고해상도 캠코더처럼 피부를 선명하고 탄탄하게 표현하며 현장에서 즉각적인 리프팅·진정 효과를 제공합니다.미용인 파트너와 시술 후 피부 변화를 실시간 공유하며 데이터 기반의 제품 개선을 지속해 나갈 계획입니다. -전국의 독자들께 한 말씀“여러분의 섬세한 터치 한 번이 과학 실험의 완성입니다.”끊임없는 질문과 관찰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의 무기이며, 작은 호기심이 큰 혁신을 만듭니다.라이프투게더는 여러분의 현장 노하우를 ‘오픈 랩’처럼 수집·반영해 늘 든든한 공동 연구자가 되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AI피부진단 알고리즘을 더욱 정교화해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10초 이내에 수분·유분·주름 지도를 제공하는 옴니채널 경험을 완성하겠습니다.유럽·미주 현지 파트너사와 공동 연구를 통해 각 지역 피부 특성에 최적화된 포뮬러를 순차 출시할 예정이며, 이는 마치 다국어 언어팩 설치처럼 완벽한 현지화 전략입니다.또한 재활용 유리 및 바이오플라스틱 패키징을 도입해 ‘제로 웨이스트’ 목표를 실현하겠습니다. -기타 한 말씀㈜라이프투게더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성분과 친환경 실천을 양립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궁금한 점이나 협업 제안이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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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이프투게더 송운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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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커피 120원 논란부터 득표율 60% 전망까지…위기인가 전략인가
- 2025년 6·3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TV토론과 유세에서 강한 발언력과 선명한 정책 메시지를 앞세워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일부 발언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며, 대선 막판 변수가 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커피 원가 120원’ 발언은 업계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론조사에서는 6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절대권력’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재명 후보의 커피 관련 발언은 2019년 경기도지사 시절 계곡 상인들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닭죽 팔지 말고 커피 팔아라, 원가 120원”이라며 소득 개선을 유도했던 일화를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는 커피 한 잔의 실제 원가는 임대료, 인건비 등을 고려할 때 최소 3000원을 넘는다고 즉각 반박했다. 이 후보는 원두 가격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놨지만,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엔 부족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수치 오류를 넘어,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의 경제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유권자에게는 민감한 이슈다. 피해는 직접적 경제 피해보다 여론의 반전 가능성에서 발생한다. 커피 원가 논란은 이재명 후보의 이미지에 흠집을 남기며, 그를 지지하던 중도층의 의구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다른 후보 측에서는 이 발언을 공격 소재로 삼아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정치적 언어 하나가 선거판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시점에서, 신중한 메시지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후보는 여전히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60대 유권자층에서도 김문수 후보와의 격차는 불과 1%포인트 안팎의 박빙이며, 70대 이상을 제외한 대부분 연령층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 조사에서는 '득표율 60%'라는 역대급 수치도 전망되고 있다. 그는 TV토론에서 각 후보의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가며 정책 주도권을 장악했고, 민주당은 190석의 범야권 의석을 배경으로 ‘쟁점 법안 일사천리 처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정책 안정성’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견제 없는 권력’에 대한 우려도 불러온다. 이재명 캠프는 발언 논란에 대해 해명과 설명을 강화하는 한편, 중도 및 보수층 흡수를 위한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보수 진영 인사들의 지지 선언도 이어지고 있어, ‘정치적 확장성’은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커피 원가와 같은 발언 실수는 대중의 신뢰 회복에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선거 후에는 국정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야당은 ‘절대권력 견제론’을 전면에 내세워 대선 이후 구도를 준비하고 있다. 정치인의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책적 철학과 인식 수준의 지표다. 이재명 후보의 발언은 지지율과는 별개로 그의 국정 운영 철학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동시에 현 시점에서 유권자가 가져야 할 비판적 사고와 감시 기능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지지율 60%의 정치인은 득표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무결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선택’뿐 아니라 ‘소수의 견제’로 완성된다. 이번 대선은 그 균형을 시험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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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커피 120원 논란부터 득표율 60% 전망까지…위기인가 전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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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유심 해킹 사태, 3년간 유출된 2695만 건의 경고
- [칼럼] SKT 유심 해킹 사태, 3년간의 침묵이 드러낸 보안의 민낯 2025년 5월 1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이 참여한 민관합동조사단이 SK텔레콤 유심 정보 해킹 사건의 2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SK텔레콤 서버에는 이미 2022년 6월 15일 악성코드가 침투했고, 이를 통해 2,695만 건에 달하는 유심 정보가 유출되었다. 이는 SK텔레콤 전체 가입자와 그 망을 사용하는 알뜰폰 사용자까지 포괄하는 수준이다. 조사단은 총 23대의 서버가 악성코드에 감염되었고, 그 중에는 가입자 인증 시스템과 연동된 서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감염된 서버에서는 BPF도어 계열 24종과 웹셸 1종을 포함한 총 25종의 악성코드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장기간 은닉 후 활성화되는 고도화된 해킹 기법이다. 특히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 29만 건이 로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기간 동안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며, 유심 복제 및 ‘심 스와핑’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냈다. 이번 사건으로 유출된 데이터는 가입자 식별키(IMSI),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 전반에 걸쳐 있다. IMEI와 IMSI를 조합하면 휴대폰 복제가 가능해지고, 이는 금융사기, 신분 도용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출된 로그 기록이 제한적이라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심지어 SKT는 지난달까지도 "IMEI 유출은 없다"고 밝혔으나, 2차 조사 결과 이 또한 사실과 달랐다. 사건이 알려진 이후, SKT는 유심 교체 및 유심 보호 서비스 확대에 나섰다. 252만 명의 고객이 유심을 교체했고, 6월까지 총 1077만 개의 유심을 확보해 순차 교체 중이다. 비정상 인증 차단 시스템(FDS)도 2.0으로 고도화되어 복제폰의 통신망 접속 차단 기능을 강화했다. 그러나 가입자들의 신뢰는 이미 금이 간 상태다. “이제는 못 믿겠다”며 통신사를 옮기겠다는 고객들도 적지 않다. SKT는 ‘찾아가는 유심 서비스’를 도입하고, 보안 고도화 및 고객 지원 확대에 나섰다. 하지만 기술적 조치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투명한 정보 공개다. 정부 역시 이번 사건을 ‘경제적 목적을 넘어선 해킹’으로 판단하고 국가 차원의 보안체계 점검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경찰은 내부 직원의 연루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수사 중이다. SKT 유심 해킹 사태는 단순한 기업 보안 실패가 아니다. 정보통신망이라는 국가 기반 인프라가 장기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3년간 감염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은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번 사건은 기업과 정부 모두에게 ‘사고 발생 후 수습’이 아닌 ‘예방 중심 보안 체계’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강력한 경고다. 더불어, 우리는 개인정보 보호를 소비자 권리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보다 강력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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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유심 해킹 사태, 3년간 유출된 2695만 건의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