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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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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9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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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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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세르비아인들이 알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와 빌 클린턴
    이제트베고비치는 전형적인 보슈냐크인이다. 이제트베고비치를 이해하려면 보슈냐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슈냐크인은 보산스키 무슬림(Bosanski Muslimani)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보스니아인으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보스니아인이라는 표현은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이는 민족이 아닌 종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구성 민족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인도 많으며 보스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던 시기에는 가톨릭을 믿는 보스니아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보스니아인과 보슈냐크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즉,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든 시민들이 보스니아인이고 보슈냐크는 보스니아인 중 무슬림인 보스니아인을 통칭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보스니아와 보슈냐크의 개념과 그 차이를 이해해야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이해가 빠르다.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는 보슈냐크인은 178만 명 정도다. 보슈냐크가 생성된 시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스니아 땅은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던 지역이었는데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다수의 투르크인들이 보스니아 땅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는 비무슬림들인 세르비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투르크 지배자들은 정교회를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가산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 중산층까지는 세금 내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세금낼 돈이 없는 세르비아의 하층민들에게 있어 이는 매우 고역인 제도였다. 따라서 세금낼 돈이 없는 세르비아의 하층민들은 정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해 세금을 면제했다. 그리고 이들 개종한 세르비아인 무슬림들 중 딸들은 투르크 지배층들과 통혼하여 이들의 혼혈 자손들이 보스니아에 이슬람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민족 개념이 탄생한다. 이들이 바로 보슈냐크인 1세대라 할 수 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자신의 고조부가 무슬림으로 개종해 투르크인 여성과 결혼한 혈통 사이에서 4세대가 지나 탄생한 모계 투르크 혈통의 보슈냐크였다. 지금도 80%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4세대 투르크 모계 혈통의 보슈냐크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투르크 모계 혈통의 보슈냐크인들은 투르크 부계 혈통의 보슈냐크들보다 훨씬 더 원리주의 이슬람의 성격을 띄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이와 같이 엄격한 무슬림 가정에 자랐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라는 집단에 들어갔다.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는 세르비아어로 "청년 무슬림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굉장히 과격한 원리주의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고 1941년 4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독립 및 창설에 기여했다. 이 나치 괴뢰국가는 인구 630만 명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인이 330만 명,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인이 200만 명, 무슬림 보슈냐크인이 70만 명으로 복잡한 국가 형태를 가졌고 보슈냐크인들이 주도한 믈라디 무슬리마니는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크로아티아 내무성 직할부대 우스타샤와 세르비아 왕정복고주의 의용군 체트니크(Четник)의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나치인 하인리히 힘러는 믈라디 무슬리마니의 불만을 전쟁에 이용할 계획을 세웠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시조이자 아랍민족주의 투쟁운동가인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Huseini, 1897~1974)의 영도 아래 나치가 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 이제트베고비치 또한 17세의 어린 나이에 대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이 때 나치 활동을 하면서 전투 능력과 학살 등의 잔혹함 등을 습득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은 보슈냐크 나치는 후일 제13무장산악사단(13.Waffen-Gebirgs-Division der SS)이라 알려진 한트샤르(Handschar)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나치"로 여기고 있다. 물론 보스니아, 보슈냐크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해당 나치 논란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파르티잔을 활동했다는 근거는 매우 미약한 편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세워지면서 이제트베고비치는 1950년, 25세의 나이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보슈냐크 대표로 입당한다. 그러나 그는 반유고적이고 유고슬라비아가 반동으로 여기던 이슬람 원리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종교를 반대하던 공산주의적인 색체가 아니라 어느 정도 종교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과격한 색체가 들어가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혐오했다. 게다가 요시프 티토는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를 굉장히 혐오했는데 이제트베고비치는 왕성한 이슬람 관련 저술 활동을 하여 티토의 눈밖에 났고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저술이 1970년에 발표한 <이슬람 선언(Islamska deklaracija)>이었다. 이 책은 보슈냐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진나(Muhammad Jinnah, 1876~1948)를 모델로 삼고 있었다. 이 책의 파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티토는 이에 격분하여 <이슬람 선언(Islamska deklaracija)>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제트베고비치를 "국가전복혐의(Државна субверзијска накнада)"로 체포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첫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보슈냐크인들의 반발과 이로 인한 폭동을 우려한 티토와 공산당 정부는 이제트베고비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1980년 티토가 사망하면서 이제트베고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내 종교적 화합을 명분으로 석방되었고 1990년까지 약 10년 동안 보슈냐크인들의 공산당 대표를 지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작업에 들어가면서 그는 보스니아 민주행동당(Stranka demokratske akcije)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미국과 나토에 협력해 유고슬라비아를 쪼개는데 앞장섰다. 그는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1990년 자유선거에서 세르비아 민주당의 라도반 카라치치(Радован Караџић)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보스니아의 독립 추진에 나섰다. 그리고 크로아티아계 정당들과 합의해서 1992년 보스니아 독립 투표를 실시, 세르비아계의 보이콧으로 인해 독립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의 독립을 유고슬라비아를 쪼개려던 미국의 도움으로 인해 독립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트베고비치를 미국과 나토에 협력해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을 학살자로 여기고 있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이끌고 전장에 있었다.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세르비아를 상대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끄는 보스니아 무슬림들, 보슈냐크와 피를 맺어진 형제들과 함께 싸우길 원했다. 그는 클린턴에게 세르비아와 전투를 벌이기에 자신의 병력과 무기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세르비아인들은 당시 이제트베고비치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클린턴이 투입한게 원리주의 집단 무슬림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혹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펀자브 일대에서 활동하던 "오사마 빈 라덴"의 무리들이냐 물어보니 그들은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굉장히 호전적인 무슬림들" 이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리처드 펄(Richard Perle), 빌 클린턴이 어떤 사람들인지 물었다. 그들은 "세르비아,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친구, 친척들을 파괴한 전쟁범죄자"라고 답했다. 적어도 이 전쟁을 겪었던 세르비아인들은 클린턴과 이제트베고비치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세르비아의 극우주의자가 되었다. 이분들과 대화 이후, 나는 나름대로의 자료를 찾아보며 내가 공부했던 것들과 비교 분석하여 이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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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5년 전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한 중국 대사관 터를 다녀오다.
    나는 오늘 1999년 5월 7일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했던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현지를 다녀왔다. 폭격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잔상은 사라지고 대사관 터에는 비석 두 개만이 다수의 꽃다발들과 함께 남아 있다. 주변의 있는 건물둘은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Novi Beograd) 부지들을 재단장할 때 갈아 엎어져 새 건물들로 도색되어 있다. 신도심지라 불리는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는 사바 강 건너 구 베오그라드 시가지를 마주 보고 있는 신도시형 계획 부지다. 노비 베오그라드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구 베오그라드에 대한 개발보다 새로운 형태의 신도시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요시프 티토는 1945년 11월 11일 총선거를 통해 왕정 폐지를 선언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이루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에 대한 개발을 강화했으며 이곳에서 공산당 대회당을 짓고 티토 자신도 이곳 공관에서 근무했다. 티토가 미, 소 양대 강국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지키며 나름 독자적인 제3 세계 국가의 초석을 이루려 했던 곳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였으며 유고의 모든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할당된 주거지, 공산진영이든, 자유진영이든 할 것 없이 각 국 대사관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지어졌다. 즉, 세르비아어로 Novi는 "새로운"을 뜻한다. 말 그대로 신(新) 베오그라드였다. 중국은 1949년 공산화 된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수교하면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노비 베오그라드에 개설된 중국 대사관은 두 번째로 지어졌으며 첫 대사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 수교 및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도 수교한 뒤에는 교류, 협력을 자주 했다. 티토의 사후, 1980년대부터 유고슬라비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내 공화국들이 독립국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유고슬라비아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 사상 유래 없는 의리를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세르비아만큼은 중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려면서 코소보 전쟁 와중, 나토군이 군사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는데 그만 중국 대사관마저 폭격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 대사관 직원 3명이 죽고 세르비아 현지인도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떤 기사나 기록에서는 이날 죽은 중국인이 대사관 직원인지, 언론인인지 상이하게 나타나 정확한 신분은 햇갈린다. 다만 중국 측에서는 이들을 언론인, 기자라고 했다. 이날 폭격으로 인해 대사관 건물 또한 파괴되었다. 그리고 주변 건물들도 상당수 초토화 되었다. 중국 내에서 극렬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를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고,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의 조달 이사회를 목표로 진행한 폭격 임무였다고 했다. CIA 국장 조지 테넷은 폭격 위치 입력을 잘못했다고 청문회에서 시인했다. 이후, 1999년 8월, 미국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하기로 합의를 했고 대사관 복구에 대한 보상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2000년 미중관계법 제정으로 인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미중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은 중국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비춰지면서 많은 동정표를 받았다. 홍콩 시사잡지 '첸사오(前哨)' 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미발간 회고록을 입수하여 폭로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과 관련한 비화가 소개되어 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나토 공습으로 인해 국방, 정보, 경찰본부 등이 모두 파괴되자 중국에 세르비아 정보요원들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도 매우 혼란한 상황에 옐친 대통령에서 푸틴 대통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코소보 전쟁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장쩌민 주석은 당시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사관 지하에 당시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는 중국이 대사관으로 넘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국의 주권을 걸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난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전에 이미 밀로세비치와 협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세르비아 측과 공조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대사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요격했다면 중국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사관이라고 하는 곳은 이미 그 나라의 영역이다. 미국이 이를 대사관을 공격했다면 상대가 누구든 대사관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그 나라의 주권에 해당되기 때문에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당시 중국은 티베트-신장위구르의 분리 문제로 인해 미국과 갈등이 첨예했던 상황이었고 이런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일환으로 미국과 나토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정보 요원들을 숨겨 주었던 것이다. 당초 나토군의 공습이 확대되자 중국 외교부는 장 쩌민에게 베오그라드에서 직원들을 철수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미 러시아 대사관도 철수한 상태였고 중국이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 개인적으로 밀로셰비치와의 걱별한 우정과 의리 등을 생각했었던듯 싶다. 장쩌민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남아 있으라 지시했다. 나토가 설마 국제법을 어기고 대사관을 폭격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상 외로 중국 대사관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폭격 직후 당시 주 세르비아 중국 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당했다"며 이는 국제법상 위법이라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중국 언론의 전파를 탔다. 북경대학에서는 세르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의 폭격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시민과 대학생 1만여 명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이며 미국은 살인자라고 외치며 반미 시위를 계속했다. 중국 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크게 분노하자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 이미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이 중국 대사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와 같은 정보를 캐치하고 오폭을 가장한 조준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인터넷이라던지, 개인 영상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일단 질러 놓고 오폭이라 주장하면서 조사 위원들을 나토 위원들로 구성해 꾸리고 현장을 조작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이는 명백한 조준이다. 당시 조달 이사회는 모든 인원들이 철수한 상황이었고 나토 공습 당시에 이사회 건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후일, 기밀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당시 조달 이사회 건물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느 누가 조달 이사회 건물을 표적으로 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증거를 내놓은 것을 보면 이는 이미 조준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이 중국 대사관에 대한 폭격은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절차상 미국은 중국에게 이같은 유고슬라비아 요원들의 스파이 행위의 증거를 들이밀고 이들을 내놓으라 협상을 할 수도 있었고 중국 정부에게 강한 경고를 하며 이들은 전범이니 넘겨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다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국답게 중국 대사관을 표적으로 삼고 대놓고 폭격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날 포격한 이들에 대한 국제 사법 처리는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아무도 이같은 전쟁 범죄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무마되었다. 국제적인 부분, 국제법적인 것으로 따져 보자면 이는 엄연한 국제법 위반에 국제형사재판소에 마땅히 재소되어야 하는 전쟁범죄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으로 지하실에 있던 세르비아 정보요원 10여명이 죽었는데도 중국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보도로는 세르비아인 14명이 부상이라 했지만 그 중 10명이 정보요원이고 나머지 4명은 대사관 직원인 세르비아 인일 것이다. 아마 중국도 이를 암묵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제 관계, 국제 사회는 이처럼 냉혹한 것이다. 국익을 위해,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 인간적 양심과 선악, 그리고 도덕성은 깔끔히 무시되고 때에 따라서 묻어둬야 할 진실이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냉혹한 현실을 잘 모른다. 물론 이 사건은 미국이 오폭을 사과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중국은 반미 시위가 번지는 것을 막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미국 또한 이 사건이 더욱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한 수 접은 이유는 뻔하다. 코소보 전쟁에 이어 중동 상황도 슬슬 좋지 않아지고 그러면서 중국과의 마찰은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도 당시만 해도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던 때였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막후에서 외교적으로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내가 내일 세르비아에서 나간 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세르비아를 방문한다. 아마 5월 7~8일 미국과 나토가 중국 대사관을 폭격했던 그 날짜에 맞출 것이다. 내가 왔던 이곳을 일주일 뒤, 시진핑이 와서 참배하고 부치치 대통령과 대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 주제는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핫한 주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난 시진핑보다 일주일 앞서 이곳을 먼저 방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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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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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16년 만에 승인하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 약칭 '두카지니(Dukagjini)'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ë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얼마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š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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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엄청난 변화, 열악한 인프라의 개선과 갑자기 밝아진 미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는 소피아 대학 소속일 때, 베오그라드 대학까지 출강을 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얘기다. 일주일에 두 번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밤 9시 50분에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침대칸에 눈을 붙이면 새벽 5시 40분에서 아침 6시 10분 사이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나는 주로 당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대학은 일주일에 두 번,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스 테살로니키 대학과는 2주에 한 번, 이스탄불 대학과는 2주에 세 번의 시간 강사로 출강하는, 일종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었다. 베오그라드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EU가 아니면서 발전이 전혀 없이 퇴보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죽은 도시였다. 베오그라드라는 뜻은 "하얀 도시"라는 뜻인데 그게 그냥 말뿐이고 솔직히 회색 시멘트, 콘크리트로 덕지덕치 쳐발라 놓은 그런 도시다. 간혹 베오그라드로 여행 오는 미국인들이 우스겟소리로 붙인 별명이 "Godamgrad"였다. 베트맨이 온다해도 발칸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이 도시는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에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 정도로 베오그라드는 죽은 도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썩는 꿉꿉한 냄세, 밝지 않고 어딘가에 지친듯한 무표정의 시민들, 거리마다 넘쳐나는 쓰레기들, 여행자만 보면 돈 달라고 달려드는 까무잡잡한 집시들이 넘쳐 나는 도시로 세르비아 최고 명문 베오그라드 대학의 학생들은 이 대학에 오는 목표가 독일이나 프랑스로 탈출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려는 것이다. 내가 한창 시간 강사로 강의할 때 학생들 중 세르비아에 남겠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말 그대로 저마다 세르비아를 탈출하려고만 하지 고국에서 뭘 해보려는 젊은이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인재 유출로 이어진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부패의 사슬, EU와 미국의 제재와 더불어 세르비아를 말려 죽이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몄고 형제 국가인 러시아도 당시에는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EU 국가들, 코소보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적대국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 혜성 같이 등장한 영웅이 바로 알렉산데르 부치치(Александар Вучић)이다. 부치치는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이나 EU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그들은 끊임 없이 세르비아 국내에서 협잡질을 일삼는 것을 파악하고는 본래 형제국가였던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이어 중국과 더 밀착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과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와 중국은 양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된 이후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양국 모두 공산 독재 체제였지만 시스템은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1945~1992)에 속했던 세르비아는 진보적 공산주의 체제로 독재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일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면서 개인사업과 소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었다. 반면 중국은 농촌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 형태의 공산주의로 발전했다. 물론 현재 두 나라 정치 체제는 모두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국은 공산당, 세르비아는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세르비아는 의회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향한 경제적 변화를 위해 다당제를 확립했다. 그럼에도 중국과는 정치적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중국은 외교정책에서 항상 세르비아를 지지해왔다. 1990년대 집단서방과 미국은 세르비아를 발칸반도 민족분쟁의 주범으로 여기고 세르비아를 공격했지만, 중국은 세르비아를 유럽 내 정치적 동맹국으로 여기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 정권을 지지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규탄했고, 현재 코소보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있으며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더욱 견고해진 양국의 정치적인 관계는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격상하여 발전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시작한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과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협력으로 이어졌지만 주변 EU 국가들의 방해로 이 또한 지지부진했었다. 따라서 중국의 투자가 늦춰지는 몇 년 동안 세르비아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2017년에 당선된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은 코로나 시기에도 EU 국가들이 백신을 나누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시리아 난민을 세르비아 밀어넣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국경을 통제하고 중국으로 시노백, 시노팜 백신을 받아들이면서 정보기술과 고부가가치 제품, 인프라 프로젝트 등도 중국의 투자를 요청했다. 2020년 하반기부터 물밀듯이 중국의 투자 업체들이 세르비아 밀려 들이왔다. 이는 대 세르비아만을 좋게 하려는 자선사업의 성격이 아니다. 이는 중국이 협력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있어서 일대일로 추진의 최우선 목적은 지정학적 존재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중국 기업들은 EU 기업들과 경쟁할 때 수많은 공식, 혹은 비공식적인 통제의 측면에 직면했기 때문에 EU 시장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게는 소규모 국가나 프로젝트가 EU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고 세르비아가 그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지난 3년여 동안 40억 달러(약 4조 8,000억 원)가 넘는 중국의 대(對) 세르비아 대출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투자금들 중 약 40%가 세르비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작업으로 투자되었다. 이후 부치치 대통령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의하면 향후 4년 안에 40억 달러 이상이 추가로 투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양국의 협력은 2011년 중국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의 제문-보르카 대교(Zemun-Borca Bridge) 건설부터 시작되었고 그 주변에 각종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늘 찍은 사진이 바로 그러한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이다.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의 경제 파트너들을 대규모 프로젝트에 추가로 참여시켜도 되는 믿을 만한 파트너로 간주했다. 현재 추진 중인 가장 중요한 인프라 프로젝트는 2018년에 시작된 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철도와 2014년 시작된 세르비아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E-763 고속도로 건설에 있는데 이게 이제 속도를 좀 내고 있다. 인프라 개발과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길 바라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국의 투자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실제로 세르비아의 모든 인프라들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EU 가입이 각종 이유들과 트집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황애서 EU 구조 기금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없게 된 세르비아의 입장으로 볼 때 중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는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세르비아 정부는 정치 및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세르비아는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코소보의 지위와 관련하여 유엔에서 세르비아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큰 영향력 가진 국가다. 이는 중국과의 향후 프로젝트 협상에서 세르비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 여기에 세르비아의 입장이 반영된 최종 합의가 도달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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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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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북마케도니아 내 또 다른 분쟁의 불씨, 알바니아계와 갈등 문제
    2013년 초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Skopje)에서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 두 민족 간의 충돌이 다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13명을 포함해 최소한 22명이 부상을 당했었다. 당시 이러한충돌의 배경은 2주 전, 마케도니아 정부가 알바니아계를 평화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마케도니아 내전에서 알바니아계 반군을 이끌었던 탈라트 자페리(Talat Xhaferi)를 마케도니아 국방장관에 내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케도니아의 대다수 슬라브계 주민들은 2001년에 발생한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 및 코소보 연합과의 내전과 이러한 내전 상황을 종결 시킨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 2001년 7월 5일) 이후 오랫동안 마케도니아 국내에서 알바니아계 민족들의 권리가 무분별하게 증진되면서 슬라브계와 권익을 동등하게 해달라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목소리들로 인해 절대 다수 슬라브계들의 반발을 샀고 그러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한데 집약된 것이 2013년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반(反) 정부 및 반(反) 알바니아 시위라 할 수 있다. 이웃 국가인 코소보 등 옛 발칸 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충돌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빈번하게 발생해왔고 주민족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시위 확대는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계의 반발과 그에 대한 맞불로 이어진 시위로 확대되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시위자들이 2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집단 구타하며 인종 혐오를 했다고 주장했고 더불어 알바니아 국기 및 상징물들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는 이어 폭력 시위로 발전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폭력 시위로 인해 마케도니아 정부 경찰차들을 비롯해 상당수의 차량들이 파괴되었고, 버스 정류장 등 공공시설들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기도 했다. 결국 시위는 마케도니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키면서 일단락 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알바니아계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인종혐오와 폭동은 이어졌다. 이어 최근 들어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마케도니아 역사교과서 마케도니아인이자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표기했고 테레사 수녀의 동상을 만들면서 ‘마케도니아 출신’라고 명문(銘文)을 새겨 넣자 이번에는 알바니아 정부가 공식항의에 나서고 알바니아계가 다시 시위를 벌이면서 최악의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마더 테레사가 1910년 8월 스코페(현재의 북마케도니아)에서 출생했을 때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라는 나라도 알바니아라는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더불어 2001년 코소보 전쟁 중 피신 온 알바니아계가 지속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주요 국민들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와 감정적으로 대립이 발생했던 탓에 현재도 북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방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바니아계는 신생 북마케도니아의 또 다른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북마케도니아 지역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자 발칸 무슬림의 시작점이라 주장하며 아예 영유권 주장까지도 하고 있다. 이어 2010년대 들어 점차 강력해지고 있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발칸 곳곳에서 소요 현상을 일으켰다. 더불어 IS까지 알바니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알바니아계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이들의 목표는 국경 밖의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을 모두 알바니아로 통합하여 ‘대 알바니아’를 만드는 것이다. 2023년 기준으로 북마케도니아 인구는 약 205만 명이며 그 중 알바니아 인은 그 인구의 1/4인 25%에 육박하고 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독립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을 크게 자극했던 부분은 마케도니아의 선거가 공평하게 치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은 대개 25%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였는데, 독립한 이후, 의회선거에서 알바니아인 의원은 15%정도에 불과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을 부정선거를 주장하여 선거 불복을 선언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게리멘더링을 통해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에 유리한 선거구를 확정했기 때문에 알바니아 인들을 무척 분노하게 했다. 더불아 1992년 7월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측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 민족 정당 당수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고, 수도 스코페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이 알바니아인 불법 담배 노점상들을 가혹하게 폭행하면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갈등은 1995년 알바니아 인들이 서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려던 것을 마케도니아의 중앙 정부가 강제로 철거했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마케도니아 대통령인 키로 글리고로프(Киро Глигоров)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을 발생함으로써 폭발하였다. 이어 1998년에는 알바니아와 코소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무장 단체들이 마케도니아의 법원, 경찰서 등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케도니아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가 행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공격을 피해 알바니아 인들이 마케도니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자, 마케도니아 중앙 정부는 이들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고조되면서 당시 평화롭게 지내던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코소보에서 36만여 명의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피난을 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심각한 치안 위기와 전쟁을 휩쓸릴 불안한 사태를 맞이했다. 물론 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이들은 다행히 북마케도니아를 떠났다. 그러나 코소보 알바니아 인들이 계속 들어오자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비율은 더욱 증가했다. 코소보 알바니아 반군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반군의 연대로 인해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마케도니아 경찰과 행정조직에 대한 공격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의 영향력을 급속히 잃게 되면서 통제권을 상실했다. 더불어 나토와 집단서방, 미군이 마케도니아에 개입하면서 마케도니아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군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 고문단 파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서구 뿐 아니라 발칸 슬라브 국가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러시아도 마케도니아를 지원하면서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결국 2001년 7월 5일 마케도니아 정부와 알바니아 반군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알바니아인들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알바니아와의 통합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 이후에도 중앙정부-자치정부의 갈등,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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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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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마케도니아 내 또 다른 분쟁의 불씨, 알바니아계와 갈등 문제
    2013년 초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Skopje)에서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 두 민족 간의 충돌이 다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13명을 포함해 최소한 22명이 부상을 당했었다. 당시 이러한충돌의 배경은 2주 전, 마케도니아 정부가 알바니아계를 평화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마케도니아 내전에서 알바니아계 반군을 이끌었던 탈라트 자페리(Talat Xhaferi)를 마케도니아 국방장관에 내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케도니아의 대다수 슬라브계 주민들은 2001년에 발생한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 및 코소보 연합과의 내전과 이러한 내전 상황을 종결 시킨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 2001년 7월 5일) 이후 오랫동안 마케도니아 국내에서 알바니아계 민족들의 권리가 무분별하게 증진되면서 슬라브계와 권익을 동등하게 해달라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목소리들로 인해 절대 다수 슬라브계들의 반발을 샀고 그러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한데 집약된 것이 2013년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반(反) 정부 및 반(反) 알바니아 시위라 할 수 있다. 이웃 국가인 코소보 등 옛 발칸 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충돌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빈번하게 발생해왔고 주민족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시위 확대는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계의 반발과 그에 대한 맞불로 이어진 시위로 확대되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시위자들이 2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집단 구타하며 인종 혐오를 했다고 주장했고 더불어 알바니아 국기 및 상징물들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는 이어 폭력 시위로 발전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폭력 시위로 인해 마케도니아 정부 경찰차들을 비롯해 상당수의 차량들이 파괴되었고, 버스 정류장 등 공공시설들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기도 했다. 결국 시위는 마케도니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키면서 일단락 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알바니아계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인종혐오와 폭동은 이어졌다. 이어 최근 들어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마케도니아 역사교과서 마케도니아인이자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표기했고 테레사 수녀의 동상을 만들면서 ‘마케도니아 출신’라고 명문(銘文)을 새겨 넣자 이번에는 알바니아 정부가 공식항의에 나서고 알바니아계가 다시 시위를 벌이면서 최악의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마더 테레사가 1910년 8월 스코페(현재의 북마케도니아)에서 출생했을 때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라는 나라도 알바니아라는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더불어 2001년 코소보 전쟁 중 피신 온 알바니아계가 지속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주요 국민들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와 감정적으로 대립이 발생했던 탓에 현재도 북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방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바니아계는 신생 북마케도니아의 또 다른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북마케도니아 지역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자 발칸 무슬림의 시작점이라 주장하며 아예 영유권 주장까지도 하고 있다. 이어 2010년대 들어 점차 강력해지고 있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발칸 곳곳에서 소요 현상을 일으켰다. 더불어 IS까지 알바니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알바니아계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이들의 목표는 국경 밖의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을 모두 알바니아로 통합하여 ‘대 알바니아’를 만드는 것이다. 2023년 기준으로 북마케도니아 인구는 약 205만 명이며 그 중 알바니아 인은 그 인구의 1/4인 25%에 육박하고 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독립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을 크게 자극했던 부분은 마케도니아의 선거가 공평하게 치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은 대개 25%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였는데, 독립한 이후, 의회선거에서 알바니아인 의원은 15%정도에 불과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을 부정선거를 주장하여 선거 불복을 선언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게리멘더링을 통해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에 유리한 선거구를 확정했기 때문에 알바니아 인들을 무척 분노하게 했다. 더불아 1992년 7월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측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 민족 정당 당수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고, 수도 스코페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이 알바니아인 불법 담배 노점상들을 가혹하게 폭행하면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갈등은 1995년 알바니아 인들이 서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려던 것을 마케도니아의 중앙 정부가 강제로 철거했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마케도니아 대통령인 키로 글리고로프(Киро Глигоров)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을 발생함으로써 폭발하였다. 이어 1998년에는 알바니아와 코소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무장 단체들이 마케도니아의 법원, 경찰서 등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케도니아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가 행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공격을 피해 알바니아 인들이 마케도니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자, 마케도니아 중앙 정부는 이들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고조되면서 당시 평화롭게 지내던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코소보에서 36만여 명의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피난을 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심각한 치안 위기와 전쟁을 휩쓸릴 불안한 사태를 맞이했다. 물론 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이들은 다행히 북마케도니아를 떠났다. 그러나 코소보 알바니아 인들이 계속 들어오자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비율은 더욱 증가했다. 코소보 알바니아 반군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반군의 연대로 인해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마케도니아 경찰과 행정조직에 대한 공격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의 영향력을 급속히 잃게 되면서 통제권을 상실했다. 더불어 나토와 집단서방, 미군이 마케도니아에 개입하면서 마케도니아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군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 고문단 파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서구 뿐 아니라 발칸 슬라브 국가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러시아도 마케도니아를 지원하면서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결국 2001년 7월 5일 마케도니아 정부와 알바니아 반군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알바니아인들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알바니아와의 통합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 이후에도 중앙정부-자치정부의 갈등,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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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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