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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영국 외무부 장관 발언에 "우크라이나가 영국 무기로 러시아 공격할 수도" 발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영국 지원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한 영국 외무부 장관의 발언에 발끈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국제문제전문가 심민의 글을 통해 "영국은 유럽 대륙을 전쟁의 화난 속에 깊숙이 몰아넣고 있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부 장관을 비난했다. 심민은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캐머런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심민은 캐머런 장관의 발언을 "호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발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캐머런 장관이 키이우 방문에 앞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음을 언급하며, "미국 상전의 입김이 톡톡히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러시아 영토로 확산되고 다시 유럽지역으로 타번져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캐머런 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캐머런 장관의 언급을 두고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며, "우크라이나 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직접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캐머런 장관은 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군사 지원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의 이 같은 입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체적인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과 러시아의 반응은 영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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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2024-05-07
  • 일본 외교청서 발표: 독도 영유권 주장 및 강제동원 배상 판결 거부 재확인
    일본 정부는 16일 발표된 '2024 외교청서'를 통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거듭하고,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했다. 이번 청서는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이 국무회의에서 보고하며, 일본 외무성이 매년 4월 발표하는 외교활동 및 국제정세 관련 백서이다. 외교청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자국의 주장을 역사적 및 국제법적 근거로 강조하며, 이를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알렸다. 또한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강제동원 피해 배상을 명령한 판결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일본은 이와 관련하여 한국 정부가 제안한 '제3자 변제' 해법을 통한 해결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환경이 엄중해지는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 간의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미일 3국 간의 다양한 수준에서의 협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최근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회담에서 재확인된 '전략적 호혜관계'를 강조했다. 일본은 중국과의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으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의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중국이 일본산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한 조치와 일본인의 구속 문제에 대해 중국 당국에 철폐 및 석방을 촉구했다. 북한과 관련해서는 납북자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한 고위급 협의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며,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일본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입장과 전략을 반영한다.
    • 뉴스
    • 정치
    2024-04-17

칼럼 검색결과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현재 민족 갈등 우려에도 EU 가입 지속 추진 중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 독일과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복 장관은 2024년 3월 5일에 갑자기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지정학적 필요성(Geopolitical Necessities)’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에 대한 통합과 가입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2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국무총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지위 부여를 축하하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들며 보스니아의 조속한 가입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 유럽 5개국은 지난 2022년 7월 EU 이사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조속한 가입 후보국 지위의 부여와 가입 절차 개시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와 달리 보스니아의 가입에 대한 협상 개시를 망설이는 EU 집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4년 1월 26일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무장관은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코나코비치 장관을 만난 이후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같은 해, 7월부터 시작되는 자국의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과 에너지 및 야망을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통합과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지난 해, 2023년 11월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 인터뷰에서 EU 집행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 가입 요청에 대해 홀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샬렌베르크 장관은 이미 2016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던 보스니아에 앞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가입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EU의 서부 발칸 지역 확장이 지정학적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은 1995년 이후에도 보스니아로부터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편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은 2016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신청서 제출과 2022년 11월 분리주의 성향 도딕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딕 대통령은 1998~2010년 사이 두 차례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2018~2022년 동안 세르비아계의 몫으로 돌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0년과 2015년에 이어 2022년 7월 스르브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3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재임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꾀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도딕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스르브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국방, 사법, 조세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도딕 대통령은 1995년의 데이턴 협정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보스니아라는 단일 국가로 편성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묶어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내 UN 평화유지 활동과 데이턴 협정 이행을 감독하는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 대표는 2023년 10월 도딕 대통령이 데이턴 협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보스니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딕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압력이 거세지자 2024년 1월 8일 로이터(Reuters)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쟁이나 혁명을 통한 분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외세를 배제한 보스니아 내 다른 정파들과는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치권 존중을 주장했을 뿐이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9일 그는 스르브스카 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공화국의 날을 맞이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다시금 보스니아 중앙 정부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 중앙정부는 스르브스카에서 기념하고 있는 공화국의 날을 자국 내 민족 갈등을 조장하는 불법 행사로 규정 및 규제하고 있지만 도딕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날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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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벨라루스의 2020년 시위 당시,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의 변화!(Перемен!)
    벨라루스 2020년 시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1991년부터 동구권에서 울려퍼졌던 민주화의 상징인 노래 Виктор Цой (빅토르 최)의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도 함께 불렸다.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인 가수가 빅토르 최였는지도 모른다. 이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 2020년 유럽에서 마지막 장기집권국가인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시민들, 서유럽식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다시 불려졌다. 이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소련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로마노프 왕조 이후, 가장 최악의 서민 경제 상황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원하는 그 마음을 대신한 노래였다.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Перестройка (뻬레스뜨로이까)와 Гласность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한 직후에 이 음반이 나왔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진 대작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이 노래는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으로 "변화를 원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동유럽의 열망인 개방의 상징인 노래가 된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 "아사"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노래가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노래가 바로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이다. 그리고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0년 후, 이번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벨라루스 경찰당국은 2020년 8월 12일 민스크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뻬레멘!'이 울려퍼지자,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 디제이(DJ)들을 즉각 연행해 갔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반주없이 '뻬레멘!'을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끌려간 DJ들은 풀려난 뒤 내무부 차관급 인사에게 밀실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의 MZ 세대들은 구시대적인 루카센코의 체제에서 벗어나 서방이 추구하는 민주국가로써의 Перемен! (변화)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벨라루스만의 Перемен!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원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특히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뻬레멘(Перемен)을 모든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은 지금 현재, 현 세대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뻬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쎄르짜)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뼤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글라자)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브 나쉠 쓰메헤 이 브 나쉬흐 슬라자흐)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이 브 뿔싸씨이 볜)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믜 쥐둄 뻬레멘)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에릭뜨리췌스끼이 스볫 쁘라달좌엣 나쉬 뎬)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이 까로브까 앗 스삐췍 뿌스따) 성냥갑은 비어버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노나 쿠흐녜 씨님 츠볘뜨꼼 가릿 가즈)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 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에따 스헤마 쁘로스따) 간단한 일이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이 볼쉐 녯 니췌고, 브쎄 나하딧쌰 브 나쓰)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믜 녜 모쥇 빠흐바스땃쌰 무드라스뜌 글라즈)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이 우멜릐미 줴스따미 루끄)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남 녜 누쥐노 브쎄 에따, 취또븨 드루그 드루가 빠냐뜨)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딱 자미까엣쌰 끄루그)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이 브드룩 남 스따노빗쌰 스뜨라쉬나 췌또-따 메냣)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벨라루스 MZ 세대들의 시위가 이웃인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 일부 도시에서도 경제 문제와 더불어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들이 폭발해 반(反) 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세이 나발니 등 몇몇 반(反) 정부, 반(反) 체제인사들은 벨라루스 시위대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했다. 한편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가 성공한다 해도 루카셴코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 분배 정책을 허사로 돌려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국가주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구좌파적인 루카센코의 성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카센코는 현재 무소속이지만 과거에는 급진 좌파정당 소속이였고 현재도 구소련 시기와 비슷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그 문제인데 그러한 정책들이 극우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조지아, 우크라이나는 목적이 반러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도 같은 목표점을 두었던 반면 벨라루스 반(反) 체제 인사, 시위자들도 반러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반러 운동이 목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루카센코의 실각이며 루카센코를 밀어주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가족이자 친척이라 생각하고 동족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이 조지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러 시위와는 다른 부분이다. 물론 벨라루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부를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루카센코를 몰아내더라도 친러 정권을 유지하자는 시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경우 반러감정에다 지역주의가 결합된 경우이지만, 벨라루스는 크게 특정 지역에서 이민족들이 벨라루스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이탈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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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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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루마니아와 몰도바, "베사라비아(Besarabia)" 이야기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으로 가는 통일대로 주변의 건물 벽면들을 보면 가끔 스프레이로 뿌려진 그레피티에 Besarabia e Romania!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뜻은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다!"라는 내용인데 이 글귀를 눈여겨보면 루마니아의 곳곳에서 같은 표어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그레피티 표어는 루마니아 뿐이 아니다.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표어 글귀의 다른 점은 루마니아에서와 다르게 훼손당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단어 중간에 “nu”를 삽입하면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가 아니다!(Besarabia nu e Romania!)”라는 뜻이 되는데 대개는 그런 식으로 훼손되어 있다. 그와 같이 훼손하는 자들의 정체는 아마 친러 세력이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가가우지아 자치 공화국 지역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친러계 사람들이고 국가로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베사라비아(Besarabia)는 몰도바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네스트르 강 서안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루마니아는 이 베사라비아 지역을 수복해야 할 옛 고토로 생각하고 있다. 인종적으로 같은데다가 같은 루마니아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거나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독립해야 했던 것도 아닌게 유럽의 실상이다. 복잡한 국가 간의 관계와 영토를 둘러싼 유럽의 오랜 분쟁사 중 한 무대이기도 한 베사라비아는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봉신국으로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할양되었다. 이후 100년 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도중에 등장한 몰도바 민주 공화국이 1918년 대(大) 루마니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지만 적백내전으로 분주한 상황임에도 러시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탄생한 소련은 드네스트르 강 서안에 몰도바 소비에트 자치공화국(ASR)이 세워질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베사라비아에 대한 영유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에 대한 최후 통첩으로 소련군의 평화적 베사라비아 진주를 가능하게 했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이 탄생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루마니아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전쟁 중 루마니아가 나치 편에 서서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각 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와 반비례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몰도바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세를 띤 국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소수 민족의 축출을 주장하는 몰도바 인민전선(PFM)과 같은 민족주의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1989년 몰도바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몰도바어와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90년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몰도바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소수 민족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고 가장 먼저 이에 반발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 슬라브계 인구가 다수인 드네스트르 강 동안의 트란스니스트리아였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9월 2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뒤이어 터키계 주민들이 다수인 남부의 가가우지아 지역이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했다. 두 지역의 독립 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루마니아와의 통일과 소수 민족의 축출과 같은 과격한 인종주의적 태도를 취했었던 인민 전선의 등장 때문이었다. 인민 전선이 주도하는 가운데 몰도바는 가가우지아보다 일주일 늦게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미 무력 분쟁이 촉발된 직후였다. 1990년 11월에는 키시네프 인근 두바사리의 드네스트르 강을 가로지른 다리에서 몰도바 측이 무력 진입을 시도하면서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드네스트르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드네스트르 강 지역은 다뉴브 지역의 최대 화약고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는데 1992년 3월 2일 몰도바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선제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경계인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소련 시절부터 주둔하고 있던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로 구성된 14군이 음성적인 지원에 나섰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수물자 지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역시 몰도바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나서게 된다. 1991년 7월 21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사한 1,000여 명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민간인이었다. 양쪽 모두 정규군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경찰과 민병대, 자원병을 동원한 결과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분쟁이 일어날 역사적 연원이야 여러 원인들이 존재하지만, 독립을 전후해 인종 갈등을 부추기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은 전쟁 이후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권을 장악한 후 서둘러 도입한 시장 경제는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고 몰도바는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1994년 독립 이후 치른 첫 총선에서는 민주농민당이 승리해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의 변화가 이어졌다.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고 헌법 개정과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마침내 가가우지아 지역은 자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된 상태였고 부정부패의 만연과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붕괴 등으로 소련 해체와 독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불만 또한 깊어졌다. 2001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몰도바 공산당은 유럽에서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당으로 기록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긴장도 완화되면서 몰도바의 정치 체계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2005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고 2009년 선거에서도 1당이었지만 지도부에 속했던 마리안 루푸의 탈당과 민주당 입당, 3개 소수당의 연합과 연립 정부의 구성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었다. 몰도바에서 이루어진 2011년의 여론조사는 29%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말 루마니아에서의 여론조사 결과는 좀 다르게 나타났으며 44%가 찬성했고 28%가 반대했다. 소련 시기 50년 동안 여러 민족이 한 국가 안에 살았기에 민족 분쟁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몰도바의 독립 전후 혼란기에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것은 신흥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긴 결과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 민족주의가 정치화 된 세력은 몰락했고 CIS 국가 중 가장 먼저 공산당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전쟁의 쓰라림은 여전히 남아 드네스트르 강 양편을 가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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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2023년 5월 러시아 크레믈린 전승절에서 한 푸틴 대통령의 연설
    "조국을 수호함으로써 그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불멸화시킨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등을 기리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용기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나치즘으로부터 인류를 구했다. 현재 문명은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상태다.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라는 초반 내용을 연설했다. 러시아어는 발언한 내용과 번역이 맞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는 소지들이 분명한 단어들이 있다. 게다가 해당 발언의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일부분만 잘라 정말 그런 양 왜곡해서 발표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런 행태는 한국 뉴스에서 곧잘 확인되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를 이해 못해서 방송에 내보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자극적인 단어 한 두개를 통해 정말 그런 양 헤드라인을 내보내면 조회수가 높아지고 영상 시청률 또한 높아지기에 얼마든지 낚시성 보도들을 할 수 있다. 이같은 보도를 하는 자들을 우리는 "기레기"라고 부르고 천박한 저널리즘이라는 뜻의 "처널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뉴스에서는 "러시아에서 특수군사작전(Специальная военн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용어를 쓰고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과 동시에 금기시되었다." 면서 푸틴이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언급했다해서 이것을 전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군사작전이지만 그것도 엄연히 전시활동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고 러시아의 주요 언론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심심치 않게 언급하고 있다. Русско-украинская война 라고 구글에 검색해도 이를 언급한 언론들이 수없이 잡힌다. 그런데도 푸틴의 연설 내용 전문을 보면 "전쟁"을 선언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단 위에 내용에서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쟁을 언급했다고 전쟁 선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전쟁을 선포한적은 어느 글 맥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래 내용은 푸틴 대통령의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당시 러시아어 연설 원문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분들은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보시면 된다. 여기에서 어디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가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다. 끝으로 한국의 언론은 정직성도 잃어버렸고 기자 정신도 잃어버렸다. 그저 조회수 늘리고 영상 시청률을 늘리는데만 관심있고 거기에만 몰두하는 천박한 프레스와 리포터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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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통일론과 몰도바 내 복잡한 내부 문제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본래 동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나 마찬가지인 두 민족은 루마니아 왕국이 생겨나기 이전에 베사라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등 여러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지면서 서로 간의 분쟁을 지속했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베사라비아, 왈라키아가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던 반면에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베사라비아 일대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침략을 받아 3등분 되면서 루마니아 인들은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루마니아 왕국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과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에 따라 한 때 한 국민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1940년 소련에 다시 병합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포함해서 베사라비아 일대를 점령하게 되면서 루마니아와 몰도바로 분리되어 졌다. 두 나라가 소련 시대에 분리된 이후, 국경이 그대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소련 붕괴 직후 몰도바가 소련에게서 분리 독립하면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나라가 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현재 몰도바와 통일하자는 통일 찬성론자가 많지만, 몰도바 내에서는 루마니아와 통일하자는 연합주의자(Unioniști)와 몰도바주의자(Moldoveniști)들의 대립이 심각한 양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필자도 2017년 몰도바 키시네프에 있을 때, 루마니아계가 루마니아와의 연맹국을 이룰 것을 요구하여 루마니아 국기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도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사실 몰도바는 독립 직후에 루마니아와 통일하려고 여러 협상을 벌인 바 있었지만 당시 몰도바의 집권당인 루마니아 인민 전선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었던 데다 친러 성향의 소수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가가우지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은 루마니아 민족들끼리 자신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서로 통일하려 한다고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발생했었다. 이를 두고 루마니아 내전이라 불리는데 이 루마니아 내전에 대해서는 루마니아를 포스팅할 때 밝히도록 하겠다. 몰도바 중앙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여당인 인민 전선의 지지율이 폭락하게 되자 몰도바와의 통일할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게 된다. 우선 가가우지아 지역은 일단 조건부로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현재도 루마니아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몰도바가 루마니아와 통일하면 독립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 볼 때 소련 붕괴 이후로 물가가 폭등하고 산업 기반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400달러대로 추락하였던데다 당시 루마니아도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몰도바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단행하기 어려웠던 상태에 있었다. 당시 루마니아는 체제 전환 이후 물가가 급상승하였기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데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차우셰스쿠 후반 시기부터 진행된 복지 축소 정책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유 기업의 민영화와 매각으로 인해 실업률이 급상승하여 사회 안전망이 거의 붕괴될 지경에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 지배 계층이 소위 공산당 출신이었던지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각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삶이 좋아지지 못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94년 총선과 대선에서 인민 전선 계열 정당이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루마니아에는 중도파 민주농민당이 집권하면서 몰도바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아진 2000년대에 들어서 몰도바와의 통일론은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2001년 몰도바 대선에서는 루마니아와의 통일에 반대하는 몰도바 공산당이 집권하는 등 몰도바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통일론이 다시 대두되는 루마니아와는 달리 몰도바의 통일론은 수그러지게 되는 엇박자의 형태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몰도바와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상당한 입장이다. 2006년 7월에는 루마니아 측이 EU의 틀 안에서 몰도바를 흡수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2009년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몰도바인 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공언한 일도 있었다. 100만까지는 아니지만, 루마니아의 정부 기관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붕괴 후 2012년까지 몰도바인 40만 명이 루마니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011년에 몰도바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29%가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한 반면, 루마니아는 2010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44%가 통일에 찬성하고 28%가 반대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에 여론조사를 보면 2010년대 후반기부터는 몰도바에서도 통일 찬성 의견이 올라가는 추세에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몰도바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 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애매한 입지 조건과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으로 인해 많이 낙후되면서 몰도바 중공업 경제의 의존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우크라이나와 병합을 추진하는게 낫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게다가 인구 감소나 취업의 유리함으로 인하여 시너지 효과로 보자는 여론도 나오고 있으며 더군다나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적이라는 분석도 존재하고 있어 루마니아와의 통일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봉착하고 있다. 몰도바의 정치인인 니콜라에 다비자(Nicolae Dabija)는 2016년부터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비정연합운동을 맡고 있으면서 통일을 추진하고 2017년에 필자가 목격했던 시위도 주도했다. 니콜라에 다비자는 친(親) 루마니아 성향의 정치인으로 몰도바 내 보수우익적인 입장을 띄고 있다. 몰도바에서의 이데올로기에서 보수 우익은 대개 친(親) 루마니아 계열이고 좌익은 친(親)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로 구분되어 있다. 여론적 추이를 보면 몰도바 젊은 층은 통일 찬성 여론이 강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통일을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미 두 나라가 갈려 나간지 수십 년이 되어 가는데다 몰도바 자체도 친(親) 통일과 반(反) 통일이 엇갈리니 가까운 미래에 루마니아와의 통일 및 통합이 현실로 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전망이다. 굳이 합병하려 한다면 러시아의 반발을 고려해 EU에 가입한 뒤 EU의 지원을 받으며 서서히 통합을 추진할 공산이 크다. 더불어 드네스트르 강 동쪽의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루마니아 영사관들이 여권 발급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시민들에게 여권을 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트란스 드네스트르 지역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분리 독립에 이어 러시아와의 합병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은 러시아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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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슬라브계 인종끼리의 이른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
    183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포고딘(М. П. Погодин, 1800~1875)에 의해 작성된 논문 <서구의 중요성>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슬라브족의 우월성과 모든 슬라브족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 범슬라브 민족주의 시작이다.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모든 슬라브족들을 하나로 합쳐 외세를 방어하고 슬라브 민족만의 전통과 사상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국내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팽창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로 평가해 왔다. 19세기 들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들이 독립하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땅과 인구가 줄어들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새로 생겨나는 슬라브 민족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밀착하여 새로운 친러 세력을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큰 이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독립하는데 있어 같은 계열의 민족이자 강대국인 러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유리한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이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면서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같은 슬라브이기 때문에 도운 것도 있었지만 발칸 반도의 자원이나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항 확보의 정당성, 서구로 나아가기 위한 러시아의 패권 진출 등 다양한 플렌도 존재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계획과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이 원하는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짐에 따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서남부에 유고슬라비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최초로 주창했던 미하일 포고딘은 러시아의 지도하에서의 슬라브 민족들의 통일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정당성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Николай Данилевский, 1822~1885)는 슬라브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설파하여 범슬라브주의의 교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1867년에 모스크바에서 범슬라브계 민족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러시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 민족들이 반발했고 이와 같은 급진적 운동은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한 러시아인들은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영토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라브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욕설하고 폭행 등의 물리적인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 등은 옛 슬라브인들의 영토이고 이들을 학살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영토라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국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 슬라브족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정체성이 슬라브와 다르고, 스스로 슬라브가 아니라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더불어 스스로를 슬라브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범슬라브 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범게르만주의에 필적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인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오스트로 슬라브주의(Австрославиз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얀 콜라르(Ján Kollár, 1793~1852)나 파벨 샤파리크(Pavel Šafárik, 1795~1861) 등이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언어적의 유사성과 문화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체코의 프란치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가 제국 내 슬라브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여 1848년에는 모스크바 범슬라브계 회의보다 앞서 프라하에서 최초의 슬라브계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1814~1876)이 참가하기도 했다. 뒤이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1860년대의 러시아에 범슬라브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에서 촉발된 이유는 크림 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이민족인 영국,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에게 그 자존심이 꺾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패권을 함께 다투고 있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영국, 프랑스에게의 패배는 소련의 해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때부터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설은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슬라브인을 결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주의와 애국심이 범슬라브주의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 극우적인 발상의 범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 하나의 이념으로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대함과 그에 따른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게 되었고 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범게르만주의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것은 범슬라브주의 주창하는 자들의 특성이 자국민 슬라브족이 우선이라는 국가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개념의 민족주의는 국가 외적으로까지 분포한 민족개념에서 국가론으로 축소한 것인데 같은 계통의 민족이어도 국가를 벗어나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이는 서방의 민족주의와 다르게 슬라브권 국가들은 전제 군주가 통치해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민족이나 같은 슬라브계여도 무조건 학살하고 보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범슬라브주의이지만 동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론이고 무조건 국가가 먼저이다. 국외는 어찌됐건 동맹국이 아니면 동류의 민족이어도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을 없애는 “제노사이드”를 통해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싹인 자신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아 이식하여 번성케 해야 한다는 급진적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인종들 중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당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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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임기 시작과 그와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운명
    이틀 전 7일부터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오늘 79년째 전승기념일이다.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 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은 러시아 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왜 오전 10시냐면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간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이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또 얼마나 격렬했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틀 전, 푸틴 대통령은 5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행사를 치뤘다. 2018년에도, 2024년에도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은 2,000여 명이나 되는 초청 인사들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한 뒤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고 취임을 선서했다. 이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는 이유는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 시절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중세 노보고르드 공국은 베체(Вече)라는 의회에서 대공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대공은 오른 손으로 공국의 법전 위에 손을 올리고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맹세를 큰 소리로 포고하여 취임식을 치르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을 수호하고 이를 계승하는 나라다. 푸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서하며 포고하게 되어 있다. "나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러시아 헌법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국가의 주권과 독립, 안보, 정체성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Я обязуюсь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права и свободы народа,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Конституцию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осуществлять полномочия Президента для защиты суверенитет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безопасности и самобытности страны и служить народу.)" 이 포고가 끝나면 헌법재판소장이 연단 위로 올라와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하게 된다.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의 베체 의장이 올라와 대공 취임을 공식 선포한 것처럼 러시아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날은 발레리 조르킨(Валерий Зорькин) 소장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는 "안보와 전략적 안정에 대해 서방 측과 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오직 서로의 이익을 존중하는 대등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그와 같은 대등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라고 했다. 또 특수 군사작전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러시아는 하나로 단결한 위대한 국민이고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극복하며 함께 승리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야외 광장으로 나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속에 대통령 근위대의 사열을 받은 이후, 성모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으로 가서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감사 기도에 참석했다. 이 날 대통령 취임식과 동시에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이끄는 기존 정부는 자동 해산되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들은 대행 자격을 받으며 업무를 이어간다. 총리 후보는 전승절이 끝나고 난 10일, 장관 후보들은 13일 의회 인준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크게 변수가 없는 한, 현 각료 대부분이 그대로 인준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처럼 분위기가 좋은 러시아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초상집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내무부는 이달 4일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1978년 1월 25일 크리프이 리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젤렌스키는 러시아 연방 형법 조항에 따라 수배 중(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еленский, родившийся 25 января 1978 года в селе Крыпили, разыскивается по статьям Уголовного кодекс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이라고 올렸다. 이는 우선 형사 사건으로 입건하고 수배 영장을 때리면 우크라이나 헌법 상 임기가 마무리 되는 5월 20일 이후,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뒤이어 포로셴코 전 대통령도 수배자 명단에 올렸지만 아직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무부 측은 우크라이나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입건 혐의나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 이유야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을 꺾고 당선된 젤렌스키의 대통령 공식 임기는 오는 20일에 종료된다. 이는 현 우크라이나의 계엄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계염령은 대통령 선거를 연기한다는 것이지 대통령 임기를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겨냥해 '젤렌스키 흔들기'의 일환으로 그를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러시아가 그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압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그를 추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터폴에서 젤렌스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 러시아 정보부는 그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체포할 수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대통령 두 사람 외에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우크라이나 국방안보회의 서기(사무총장, 장관급)와 알렉산드르 쉴라파크 전 재무장관, 스테판 쿠비바 전 중앙은행 총재를 3일 수배자 명단에 올리면서 젤렌스키 임기 종료와 더불어 공식 체포 영장을 발부할 계획이다. 이제 젤렌스키는 서방을 방문할 때도 본인이 언제, 어디서든 체포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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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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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마케도니아 내 또 다른 분쟁의 불씨, 알바니아계와 갈등 문제
    2013년 초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Skopje)에서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 두 민족 간의 충돌이 다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13명을 포함해 최소한 22명이 부상을 당했었다. 당시 이러한충돌의 배경은 2주 전, 마케도니아 정부가 알바니아계를 평화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마케도니아 내전에서 알바니아계 반군을 이끌었던 탈라트 자페리(Talat Xhaferi)를 마케도니아 국방장관에 내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케도니아의 대다수 슬라브계 주민들은 2001년에 발생한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 및 코소보 연합과의 내전과 이러한 내전 상황을 종결 시킨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 2001년 7월 5일) 이후 오랫동안 마케도니아 국내에서 알바니아계 민족들의 권리가 무분별하게 증진되면서 슬라브계와 권익을 동등하게 해달라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목소리들로 인해 절대 다수 슬라브계들의 반발을 샀고 그러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한데 집약된 것이 2013년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반(反) 정부 및 반(反) 알바니아 시위라 할 수 있다. 이웃 국가인 코소보 등 옛 발칸 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충돌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빈번하게 발생해왔고 주민족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시위 확대는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계의 반발과 그에 대한 맞불로 이어진 시위로 확대되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시위자들이 2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집단 구타하며 인종 혐오를 했다고 주장했고 더불어 알바니아 국기 및 상징물들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는 이어 폭력 시위로 발전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폭력 시위로 인해 마케도니아 정부 경찰차들을 비롯해 상당수의 차량들이 파괴되었고, 버스 정류장 등 공공시설들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기도 했다. 결국 시위는 마케도니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키면서 일단락 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알바니아계와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의 인종혐오와 폭동은 이어졌다. 이어 최근 들어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마케도니아 역사교과서 마케도니아인이자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표기했고 테레사 수녀의 동상을 만들면서 ‘마케도니아 출신’라고 명문(銘文)을 새겨 넣자 이번에는 알바니아 정부가 공식항의에 나서고 알바니아계가 다시 시위를 벌이면서 최악의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마더 테레사가 1910년 8월 스코페(현재의 북마케도니아)에서 출생했을 때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라는 나라도 알바니아라는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더불어 2001년 코소보 전쟁 중 피신 온 알바니아계가 지속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주요 국민들인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와 감정적으로 대립이 발생했던 탓에 현재도 북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방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바니아계는 신생 북마케도니아의 또 다른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북마케도니아 지역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자 발칸 무슬림의 시작점이라 주장하며 아예 영유권 주장까지도 하고 있다. 이어 2010년대 들어 점차 강력해지고 있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발칸 곳곳에서 소요 현상을 일으켰다. 더불어 IS까지 알바니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알바니아계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이들의 목표는 국경 밖의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을 모두 알바니아로 통합하여 ‘대 알바니아’를 만드는 것이다. 2023년 기준으로 북마케도니아 인구는 약 205만 명이며 그 중 알바니아 인은 그 인구의 1/4인 25%에 육박하고 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독립한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을 크게 자극했던 부분은 마케도니아의 선거가 공평하게 치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은 대개 25%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였는데, 독립한 이후, 의회선거에서 알바니아인 의원은 15%정도에 불과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을 부정선거를 주장하여 선거 불복을 선언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게리멘더링을 통해 마케도니아 슬라브계에 유리한 선거구를 확정했기 때문에 알바니아 인들을 무척 분노하게 했다. 더불아 1992년 7월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측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 민족 정당 당수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고, 수도 스코페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이 알바니아인 불법 담배 노점상들을 가혹하게 폭행하면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갈등은 1995년 알바니아 인들이 서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려던 것을 마케도니아의 중앙 정부가 강제로 철거했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마케도니아 대통령인 키로 글리고로프(Киро Глигоров)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을 발생함으로써 폭발하였다. 이어 1998년에는 알바니아와 코소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무장 단체들이 마케도니아의 법원, 경찰서 등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케도니아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가 행하고 있는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공격을 피해 알바니아 인들이 마케도니아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자, 마케도니아 중앙 정부는 이들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고조되면서 당시 평화롭게 지내던 마케도니아 슬라브계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코소보에서 36만여 명의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피난을 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심각한 치안 위기와 전쟁을 휩쓸릴 불안한 사태를 맞이했다. 물론 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이들은 다행히 북마케도니아를 떠났다. 그러나 코소보 알바니아 인들이 계속 들어오자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인들에 대한 비율은 더욱 증가했다. 코소보 알바니아 반군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반군의 연대로 인해 서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마케도니아 경찰과 행정조직에 대한 공격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의 영향력을 급속히 잃게 되면서 통제권을 상실했다. 더불어 나토와 집단서방, 미군이 마케도니아에 개입하면서 마케도니아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군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 고문단 파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서구 뿐 아니라 발칸 슬라브 국가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러시아도 마케도니아를 지원하면서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결국 2001년 7월 5일 마케도니아 정부와 알바니아 반군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알바니아인들은 서부 마케도니아에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알바니아와의 통합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 이후에도 중앙정부-자치정부의 갈등,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6
  • 현재 터키 경제의 최대 악재, 제재를 걸고 있는 미국과 집단서방
    이와 같은 현재 터키 경제의 최대 악재는 집단 서방과 미국으로 이들이 물러나기 전에는 경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대로 위기 사태가 지속된다면 터키에 대규모로 원조하는 중국과 러시아에도 위기가 될 확률이 높다. 현재 급격한 리라화 폭락의 영향으로인해 그 동안 안정적이었던 식료품이나 공업 제품 등 모든 영역의 물가가 흔들리고 있다. 터키가 북한과 같이 자력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이와 같이 갑자기 환율이 흔들리게 되면 외국 소비재와 관련이 없는 물건이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지하자원, 에너지와 부품소재, 기계류는 수입에 의존하고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를 가공해 완제품을 생산하는 수출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터키의 최저 임금 노동자 비율이 전체 임금 근로자의 40%가 된다. 한국처럼 연차가 쌓이면서 경력이 쌓인다고 돈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30~40대가 되어도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많다. 2010년대 중반부터 경제력이 추락하기 시작한 이후로 기업들이 임금 인상에 대해 굉장히 인색해졌기 때문에 정부에서 최저 임금 인상을 통해 강제적으로 임금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그만큼 최저 임금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와 같이 임금 인상에 인색한 것은 터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공무원들 최저임금이 월 2,825리라 (한화 약 250,500원)였던 임금이 동결되었고 2021년에는 월 4,300리라 (한화 약 381,000원) 였던 초중등학교 교사 초봉이 2022년 1월에 국회에서 이미 동결되었다. 최저임금보다 높다는 이유로 인해 결국 보수적인 다자녀를 두고 있는 대가족 제도의 터키 가정에서는 집세와 각종 공과금을 제외하고 남는 돈이 1,000리라 (한화 약 88,700원)에 불과하다. 결국 한 달동안 1,000리라 (한화 약 88,700원)를 가지고 가족들을 모두 이끌어가야 하는데, 미국의 빈민층과 같이 대형마트에서 하루 종일 페스트푸드를 먹으며 연명해도 생활비가 부족하여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이 이곳 터키의 실정이다. 샌드위치 하나 사 먹는 것에 하루 일당의 대부분을 써야 하고, 1년 전에 구입했던 아이폰을 구매할 때와 똑같은 가격으로 중고로 내다팔 수 있을 정도로 물가가 완전히 폭등했다. 이제 터키인들은 최저 임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220달러나 하는 토플 시험조차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가계 소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더 명백한데, 터키 가계의 소비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2%에 달한다. 이것은 한국의 저소득층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10% 내외에 불과한 정도이다. 식품의 경우 소득이 얼마든 소비하는 양은 대충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 소비에서 식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소득이 낮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다른 재화나 서비스 부분, 특히 문화적인 즐길거리 등의 요소와 자동차 같은 교통수단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그만큼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 터키 정부는 2020년 최저 임금을 15% 인상한다고 밝혔다. 당시 제흐라 줌뤼트 셀축 가족노동사회부 장관이 말하길 일반 노동자들 최저임금을 월 2,324리라 (약 20만원)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이는 2019년까지의 최저월급인 2,021리라 (약 17만 9천원)보다 15% 오른 금액인 것이다. 셀축 장관은 연말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약 12%로 예상된다며 물가상승률보다 임금을 3% 더 인상함으로써 근로자들이 물가 상승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본래 터키의 최저임금은 경영자와 노동자, 정부를 대표하는 1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터키노동조합연맹은 지난달 최저임금위원회에서 2021년 최저임금으로 월 2,578리라(약 22만 8천원)를 요구했다. 볼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터키의 근로자 3,300만명 가운데 약 3분의 1인 1,000만 명 가량이 최저임금을 받거나 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터키 노동 당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현재 터키 노동자 중 460만 명이 실업 상태이며, 청년 실업률은 26.1%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22년 현재 터키의 최저임금은 2021년 기준으로 50% 인상된 4,250리라 (한화 약 377,000원)이다. 여기에 터키 정부에서 2022년부터 최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세와 인지세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임금 상승률은 80~90%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터키에서도 급격한 임금의 상승으로 인해 대량 해고가 이루어지고,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노동자의 경우 임금 인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동결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결국 OECD 최하위권으로 쳐져 있는 고용률은 더욱 낮아지고 최저임금 노동자 비율만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만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터키는 억만 장자라 불리는 10억 달러 이상 재산 소유자가 43명이나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 7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부의 불평등이 심하며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2019년 이후로는 꾸준히 물가가 상승하여 임금 상승률보다 물가 상승률이 더 높고 현재는 사상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다. 시장 경제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고 실물 경기는 파탄나기 일보직전이며 터키 정부가 이를 강제로 어렵게 고비를 넘기며 버티고 있는 형태이다. 터키에서 가장 많이 먹는 오이, 토마토, 양파, 감자 등 야채들은 정부가 가격을 관리하고 있으나 이 또한 가파르게 가격이 상승하고 있고 유제품과 육류, 생필품은 가격 상승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2021년 중반까지만 해도 터키 정부가 사람들이 모이는 식당과 카페들에게 무기한 영업정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영업이 가능한 식당들은 손님은 받지 못하고 오직 배달만 가능한 시스템으로 돌렸다. 그러나 배달로는 경제적인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아예 문을 닫거나 영업을 중지했고 가게를 내놓는 사태도 발생했었다. 다만 이에 따른 정부의 보상은 요원한 상태에 있으며 현재 영업을 다시 평소와 같이 재기하여 위드 코로나로 가고 있음에도 그 충격의 잔상은 지금도 터키의 서민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수입이 감소했으며 수출은 무려 80%가 감소했다. 수입과 수출의 감소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터키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2024년 외채만기가 1,720억 달러이지만 코로나 사태와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경제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었고 외환보유고도 OECD국가들 중 가장 적기 때문에 사실상 터키의 선택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거나 디폴트를 선언하는 것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다만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이 IMF에 갈일이 없을 것이라 발언하면서 사실상 디폴트를 선언할 것으로 보여지는데 만약 디폴트를 선언하게 되면 베네수엘라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터키 경제는 2024년 상반기인 현재가 최대 고비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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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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