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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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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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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 유보 이후 기약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가 핵 추진 순항 미사일인 ‘부레베스트니크’를 시험 발사했다. 러시아 측 발표에 따르면 이 핵 추진 순항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사실상 무제한이고, 핵탄두를 탑재하고, 세계 어디든 타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시험 발사에서 보면 이 순항 미사일은 약 15시간을 장기간 비행하면서 최소 14,000킬로미터를 비행했다. 이것은 순항 미사일이 핵 추진체를 동력으로 삼고 있으므로 공중에서 장시간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현존하는 서방의 방어 시스템을 대부분 회피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순항 미사일은 우선 미사일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비행기처럼 비행항로를 바꿀 수 있고 요격기로 공격할 경우 회피 기동도 할 수 있다. 둘째, 순항 미사일은 저고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지상 레이더로 탐지하기가 어렵고, 대공 미사일로 요격하기가 어렵다. 셋째, 순항 미사일은 정밀도가 높아서, 적의 전력 시설, 탄도 미사일 발대, 공군 비행장 등을 타격할 수 있다. 그런데 순항 미사일이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도 있다. 순항 미사일의 단점은 첫째, 순항 미사일이 표적까지 비행하기 위해서는 GPS 위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순항 미사일은 속도가 빠르지 않아 무용지물로 될 수 있다. 둘째, 순항 미사일은 초음속 순항 미사일을 제외하고 마하 1 정도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비행기처럼 날다가 자폭하는 방식으로 타격하는 미사일이기 때문에 화력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순항 미사일인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200킬로미터∼2,700킬로미터이며 재래식으로도 사용하고,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으며, 전천후 장거리 타격용 아음속 순항 미사일이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은 걸프전, 코소보 전쟁, 아프가니스탄 등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바가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지원받으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젤렌스키의 생각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라 하겠다. 키예프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직선거리로 약 770킬로미터인데, 토마호크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된다면, 러시아로서는 토마호크 미사일의 사정거리에 모스크바가 들어오게 되므로 실로 위협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토마호크 미사일이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인 S-300, 혹은 S-400(이후 S-500로 강화될 것임)로 요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방공망이 가동되더라도 피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문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토마호크 미사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실전 배치하고 당장 사용이 가능할까? 없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구축함에서 발사하는 함대지 미사일,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크루즈 미사일이 있으며, 지상 공격 미사일이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수직발사시스템형(수상함용), 어뢰관형(일반 잠수함), 캡슐 발사 시스템형(핵 잠수함용)의 종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는 이에 합당한 해군 함정이 없다. 그렇다면 지상 공격 발사일은 가능할까? 이것도 미군이 지상 발사대와 이른바 타이폰 시스템으로 일부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실제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도 불투명하다. 러시아가 우려하는 부분은 토마호크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도 문제이지만, 예를 들어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었을 때 핵탄두 탑재 여부가 탐지되지 못할 경우 – 실제로 탑재되었다면 – 방사능 낙진에 따른 피해도 우려할 수밖에 없다. 토마호크의 우크라이나 배치는 푸틴으로서는 그러면 서방과 러시아가 핵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반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정상 회담이 연기되고,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회담에서 이미 충분히 피 흘렸다는 말로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에 신중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토마호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하는 문제는 일단 유보되었다. 푸틴은 이번 트럼프와의 정상 회담이 불발되자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형 핵 추진 미사일 실전 배치를 시사함으로써 다시 한번 유럽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유럽 국가들은 토마호크의 유럽 배치를 기대하고 있지만, 문제는 현재 토마호크 미사일의 재고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토마호크 미사일에 관해 일본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10척의 구축함에 40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도입해 실전 배치하려고 한다. 이것은 실로 중국과 북한에 위협이 되기도 하는데 향후 동북아에도 이를 둘러싸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될 수 있겠다. 필자는 오래전에 이미 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중국을 겨냥해서 실전 배치하는 것에 관해 상당히 우려해 왔다. 당시에 필자는 서서히 중국이 부상하면서 향후 국제 정세가 미국과 중국으로 바뀌게 되면 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인해 동북아에서 때아닌 군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제 바로 그것이 현실이 되고 보니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 문제가 나오자마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보도가 되긴 했지만, 결국 트럼프의 배치 유보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토마호크 없이 전쟁이 끝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면 속내는 알 수 없지만, 해프닝인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가 워낙 변통이 심해 언제 태도를 바꿀지는 알 수 없다. 젤렌스키가 장거리 미사일을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았어도 결정적으로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어서 이를 배치하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서방에 기대면서 그 비싼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운하다니, 도대체 젤렌스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할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현재 수준에서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도 종전도 합의가 실질적으로 되지 못함으로써 소모전만 지속되고 있다. 푸틴은 승기를 잡았는데, 굳이 여기에서 물러날 명분이 없다. 반대로 젤렌스키는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를 되찾으려는 생각밖에 없다. 트럼프는 전후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서로 각자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을 뿐이어서 협상이 쉽지 않아 상당한 난관이 예상된다. 관건은 젤렌스키가 이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고, 이 전쟁을 끝낼 수도 없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더 이상 젤렌스키에게 희망을 주지 않고 그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안타깝지만 상황이 그렇다! 젤렌스키에게는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가 근본적인 물음이 따라다닌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젤레스키가 러시아를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하고 있는지는 정치적인 것 이외에 달리 없다. 굳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도 이를 거절하고 협상보다 전쟁을 선택한 까닭도 달리 설명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전쟁 중에도 여러 차례 러시아 쪽에서 전쟁을 이 정도에서 멈추자고 했지만 이를 거절한 것도 젤렌스키였다. 서방의 자원으로 잠시 승리에 도취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다. 정치 지도자라면 때론 과감하게 냉정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기꺼이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젤렌스키는 지도자로서 부적합하다. 기껏해야 토마호크 미사일이라도 배치해서 뭔가 ‘게임 체인저’를 노린다는 것도 앞에서 기술된 것처럼 매우 부적절하다. 이것은 오히려 지금까지 그래도 일부나마 논의된 모든 협상의 성과들을 모조리 폐기해 버리는 것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계속 돕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뭘 실질적으로 돕겠다는 것도 매우 불투명하다. 과거같이 유럽의 목소리가 그래도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니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유럽은 오랫동안 평화를 그래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핵심은 러시아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룰 유럽의 지도자는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첩경을 벗어나 멀고 험난한 길로만 가고 있고, 유럽의 안보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으니 언제 종전이 될지 불투명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9
  • 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본다면 주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3국을 예로 들고 있고, 광의적으로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로 6국이 포함된다. 예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지리적으로 공유한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핀란드 공국이었고, 언어와 종족도 인도유럽어족인 노르웨이, 스웨덴과 달리 우랄어족으로 나타난다. 11세기 초 스웨덴의 정복 군주인 크누트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잉글랜드까지 ‘북해제국’으로 묶어 통치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3국 귀족들이 연대하여 칼마르 동맹이라는 연합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동맹은 약 150년 동안 존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국 화폐(Krona)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삼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은 항상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사들은 늘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다. 약체 노르웨이의 시련이 컸다.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덴마크 국왕의 통치를 받았었으며,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였기에 1814년 킬(Kiel) 조약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두 독립 왕국이 한 국왕의 통치를 받는 형태를 제국주의 및 식민지와 구분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독자적 헌법과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교 및 군사권은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했던 사실상 준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발생했고 19세기 내내 이는 양국의 앙금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02년 노르웨이 의회는 해외 영사 업무를 양도받기 위해 스웨덴 측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독자적인 법률도 제정했지만 번번히 스웨덴 국왕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연합’ 해산을 결의했고, 덴마크 국왕은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따라서 1905년 8월 13일 투표에서 남성 유권자 중 압도적 다수(368,208표)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의 해체를 원했고, 투표권이 없던 여성들도 서명으로 동조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 양국은 9월 협상을 타결짓게 되었으며 스웨덴 국왕은 10월 26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10월 26일은 노르웨이 입장에서 볼 때, 독립 120주년이다. 독립 120주년을 맞이한 현재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떨까? 노르웨이는 현재 죽을 맛이다. 한 때 최고의 복지국가였고, 많은 국가들의 복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저출산, 1980년에 1,000명에 불과했던 노르웨이 무슬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해 지금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져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분류된다. 서쪽은 잘 살고 안전한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오슬로의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다. 이는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들과 발칸에서 이민 온 자들이 살고 았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라는 자가 오슬로 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 테러로 정부청사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석유부 건물에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범인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당시 노르웨이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난사를 자행했다. 범인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극우 단체 인사였다. 그와 같은 충격에도 노르웨이 어찌 저찌 갈등을 봉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 역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 현지인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자리잡고 있다. 학교의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다. 현재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로 구성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출산 수준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관대한 복지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15년이 넘도록 전반적인 출산 수준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명확한 경제 전망의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높은 실업률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는 노르웨이의 저출산을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는 1990년대 위기 이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출산 관련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주민들과 혼혈을 권장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은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여 취직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 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실업률과 취업률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로 나타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과 이라크, 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는 시장 개혁을 통해 석유와 가스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익화하기 시작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터진 이후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천연자원 의존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석유 수출 세계 9위, 천연가스 수출은 세계 3위로 나타나며 이는 1인당 GDP는 90,000불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쓸어담은 자금으로 창안한 국부펀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립시킨 모델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적극 의존하고 있던 북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는 가장 고갈 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보고 되고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이 이미 채굴되었고 액체 석유와 천연 가스로 구성된 탄화수소의 혼합물인 브랜드유(Brent oil)는 고갈 직전의 위기에 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60만 배럴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내로 40만 배럴로 생산률이 내려갈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북해 유전의 고갈로 인한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약간의 생산률이 줄어들었을지 몰라고 앞으로 미래가 문제다. 노르웨이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9월에 3.6%로 상승했으며, 예상치 및 8월의 3.5%와 비교하여 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주된 상승 압력은 식품 및 비알코올 음료의 빠른 가격 상승(6.3% 대 5.4%) 및 교통(2.9% 대 2.7%)에서 나왔다. 한편 주택 및 공공요금(6.2% 대 6.3%),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2.5% 대 2.9%), 그리고 음식점 및 호텔(3.2% 대 3.8%)의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었는데 이는 다소 일시적이다. 문제는 앞으로에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복지로 가는 비용은 절감된다. 2015년 이후 노르웨이의 R&D 투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벤처 창업과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가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득 40% 정도의 높은 세율로 인한 금액이 복지에 투입되는데 이 또한 줄어들면서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마찰로 인해 북극항로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과연 노르웨이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복지모델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을 맞아, 현 노르웨이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해 보았다. 노르웨이의 문제점을 보며 우리의 복지 상태도 어느 정도 점검이 필요하고, 노르웨이와 비슷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것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7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5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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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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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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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포토뉴스 검색결과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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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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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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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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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본다면 주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3국을 예로 들고 있고, 광의적으로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로 6국이 포함된다. 예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지리적으로 공유한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핀란드 공국이었고, 언어와 종족도 인도유럽어족인 노르웨이, 스웨덴과 달리 우랄어족으로 나타난다. 11세기 초 스웨덴의 정복 군주인 크누트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잉글랜드까지 ‘북해제국’으로 묶어 통치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3국 귀족들이 연대하여 칼마르 동맹이라는 연합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동맹은 약 150년 동안 존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국 화폐(Krona)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삼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은 항상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사들은 늘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다. 약체 노르웨이의 시련이 컸다.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덴마크 국왕의 통치를 받았었으며,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였기에 1814년 킬(Kiel) 조약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두 독립 왕국이 한 국왕의 통치를 받는 형태를 제국주의 및 식민지와 구분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독자적 헌법과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교 및 군사권은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했던 사실상 준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발생했고 19세기 내내 이는 양국의 앙금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02년 노르웨이 의회는 해외 영사 업무를 양도받기 위해 스웨덴 측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독자적인 법률도 제정했지만 번번히 스웨덴 국왕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연합’ 해산을 결의했고, 덴마크 국왕은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따라서 1905년 8월 13일 투표에서 남성 유권자 중 압도적 다수(368,208표)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의 해체를 원했고, 투표권이 없던 여성들도 서명으로 동조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 양국은 9월 협상을 타결짓게 되었으며 스웨덴 국왕은 10월 26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10월 26일은 노르웨이 입장에서 볼 때, 독립 120주년이다. 독립 120주년을 맞이한 현재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떨까? 노르웨이는 현재 죽을 맛이다. 한 때 최고의 복지국가였고, 많은 국가들의 복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저출산, 1980년에 1,000명에 불과했던 노르웨이 무슬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해 지금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져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분류된다. 서쪽은 잘 살고 안전한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오슬로의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다. 이는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들과 발칸에서 이민 온 자들이 살고 았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라는 자가 오슬로 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 테러로 정부청사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석유부 건물에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범인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당시 노르웨이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난사를 자행했다. 범인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극우 단체 인사였다. 그와 같은 충격에도 노르웨이 어찌 저찌 갈등을 봉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 역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 현지인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자리잡고 있다. 학교의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다. 현재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로 구성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출산 수준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관대한 복지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15년이 넘도록 전반적인 출산 수준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명확한 경제 전망의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높은 실업률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는 노르웨이의 저출산을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는 1990년대 위기 이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출산 관련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주민들과 혼혈을 권장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은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여 취직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 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실업률과 취업률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로 나타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과 이라크, 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는 시장 개혁을 통해 석유와 가스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익화하기 시작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터진 이후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천연자원 의존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석유 수출 세계 9위, 천연가스 수출은 세계 3위로 나타나며 이는 1인당 GDP는 90,000불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쓸어담은 자금으로 창안한 국부펀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립시킨 모델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적극 의존하고 있던 북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는 가장 고갈 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보고 되고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이 이미 채굴되었고 액체 석유와 천연 가스로 구성된 탄화수소의 혼합물인 브랜드유(Brent oil)는 고갈 직전의 위기에 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60만 배럴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내로 40만 배럴로 생산률이 내려갈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북해 유전의 고갈로 인한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약간의 생산률이 줄어들었을지 몰라고 앞으로 미래가 문제다. 노르웨이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9월에 3.6%로 상승했으며, 예상치 및 8월의 3.5%와 비교하여 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주된 상승 압력은 식품 및 비알코올 음료의 빠른 가격 상승(6.3% 대 5.4%) 및 교통(2.9% 대 2.7%)에서 나왔다. 한편 주택 및 공공요금(6.2% 대 6.3%),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2.5% 대 2.9%), 그리고 음식점 및 호텔(3.2% 대 3.8%)의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었는데 이는 다소 일시적이다. 문제는 앞으로에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복지로 가는 비용은 절감된다. 2015년 이후 노르웨이의 R&D 투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벤처 창업과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가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득 40% 정도의 높은 세율로 인한 금액이 복지에 투입되는데 이 또한 줄어들면서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마찰로 인해 북극항로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과연 노르웨이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복지모델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을 맞아, 현 노르웨이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해 보았다. 노르웨이의 문제점을 보며 우리의 복지 상태도 어느 정도 점검이 필요하고, 노르웨이와 비슷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것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7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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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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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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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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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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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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