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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 실현 가능성과 기술적 과제
    북한이 원자력 추진 동력을 갖춘 핵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요 조선소들의 함선 건조 사업"을 직접 지도했다고 밝히며, "당 제8차 대회 결정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실태를 현지에서 파악했다"고 전했다. 이는 북한이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제시한 핵잠수함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이란 원자력 추진 동력을 사용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한 전략 잠수함을 의미한다. 북한이 '전략유도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을 고려하면 향후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을 운영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이미 2023년 9월 '김군옥영웅함'이라는 잠수함을 공개하며 이를 "첫 전술핵공격잠수함"이라고 칭했지만, 해당 함정은 원자력 추진 방식이 아니라 기존 디젤-전기 추진 시스템을 개조한 수준에 불과했다. 김정은 역시 당시 "핵무기를 장비하면 그것이 곧 핵잠수함"이라고 언급해 김군옥영웅함이 엄밀한 의미에서 핵잠수함이 아님을 인정한 바 있다. 그는 별도로 "핵 추진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사진 속 핵잠수함은 김군옥영웅함보다 더 크며 외형적으로 새로운 설계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군옥영웅함이 기존 1,800톤급 로미오급 잠수함을 개조해 3,000톤급 수준으로 확장한 형태라면 이번 핵잠수함은 더욱 대형화된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원자력 추진 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려면 원자로 설계, 핵연료 생산, 방사능 안전 관리, 냉각 시스템 구축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이는 상당한 기술적 장벽을 의미한다. 현재 북한이 자체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군 관계자들은 "북한이 원자로 기술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함정에 적용해 정상적으로 운용하려면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원자로 안전 운용 및 실전 배치까지는 추가적으로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북한에 핵잠수함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러시아의 지원이 현실화된다면 개발 기간이 단축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핵잠수함 건조뿐만 아니라 4,000~5,000톤급으로 추정되는 구축함 또는 호위함 건조 장면도 함께 공개했다. 이는 북한이 해군 전력 강화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북한 해군은 지상군에 비해 전력이 취약하며, 기존 최대 함정이 1,500톤급 압록급에 불과했다. 따라서 신형 호위함이 수직 발사대를 갖추고 다양한 미사일을 운용할 경우, 북한 해군의 해상 작전 능력과 위협 수준이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김정은이 신형 함정 건조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호위함 건조 장면이 포착되었으며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서는 함교의 레이더 장착 부분이 추가되는 등 건조 작업이 진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잠수함 개발에 대한 국내외 언론 보도는 종종 과장되거나 편향된 시각을 담고 있다. 북한이 핵잠수함 건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기술적·경제적·군사적 현실을 고려할 때 실제 운용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은 북한의 기술적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과장된 위협론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는 국민 불안을 조성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대한 분석이 단순한 공포 조성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실전 배치가 가능한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잠수함 개발은 현실적으로 진행 중이지만 기술적·전략적 완성도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간 기술 협력 여부가 핵잠수함 개발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 뉴스
    • 정치
    2025-03-08
  • 우크라이나에서 생포된 북한군, 한국 귀순 의사 밝혀…정부, 송환 협의 가능성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가 한국으로 귀순 의사를 밝히면서 그의 송환 절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 병사는 최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우선 난민을 신청해서 대한민국에 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군 포로가 직접 한국행 의사를 표명한 첫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 병사는 자신을 북한 정찰총국 소속이라고 밝히며 파병 동안 "우크라이나군 무인기 조종사가 다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북한 보위부의 말에 속아 한국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초 북한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훈련받았고 12월 중순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또한, 러시아로 오기 전 3개월 동안 가족과 연락이 두절 되어 부모도 그의 파병 사실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북한군이 한국으로 귀순 의사를 밝히면 우크라이나 측과 협의에 나설 계획이다. 이재웅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군은 헌법상 우리 국민인 만큼 귀순 요청 시 우크라이나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가정보원도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북한군도 헌법 가치에 의해 우리 국민이기 때문에 포로가 된 북한군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며 귀순 의사를 밝히면 우크라이나 측과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김정은이 러시아에 억류된 우크라이나 전쟁 포로와 북한 군인의 교환을 조직할 수 있을 경우에만 북한 시민을 김정은에게 넘겨줄 준비가 돼 있다"며 포로 교환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북한이 러시아에 자국 군대를 파병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러한 교환이 현실이 될지는 미지수다. 북한군 포로가 한국 송환이 이루어지면 정부는 그의 신변 안전을 고려해 특별한 보호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북한이 포로를 변절자로 간주하고 그의 가족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해당 병사의 신변 보호와 정착 지원에 만전을 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안은 국제법, 인도주의, 남북 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복잡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어 향후 정부의 대응과 국제 사회의 반응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뉴스
    • 사회
    2025-02-19

칼럼 검색결과

  •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의 체결 이후, 조약문 내용의 분석과 당시 호의적이지 않은 우크라이나 구민들의 나토 가입 여부
    1994년에 우크라이나 핵 폐기를 조건으로 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의 내용 1.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성, 현재 국경선을 존중한다. 2.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자제한다. 3.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 4.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는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다. 5.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자제한다. 6. 상기 조항에 변경이 있으면 따로 협의한다. 실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의 내용을 보면 2항목에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자제한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양 당위적으로 선언하고 있을뿐 누가 공격하고 누가 지켜주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없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는 어떤 나라든지의 구체적인 방안이나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았을 때 이를 보복하기 위해 어떠한 반사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지, 혹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등에 대한 조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를 두고 국제 법학자들의 해석도 이런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각서가 당사국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기에 후일 민스크 협정을 맺기 전,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고 말았고 미국과 서구에서 또한 러시아의 침공이 있을 시, 우크라이나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지에 대해 전혀 명분이 없는 부분이 되고만 것이다. 이와 같은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의 주 목적으로 나타난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에 대해 '안전이 위협받을 때,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정도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다'리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2009년 당시 NATO에 주재하던 우크라이나 대표 블라디미르 바실렌코(Владимир Василенко)는 우크라이나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를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자체에 큰 권위를 부여하여 이상화하는 우크라이나 국내의 분위기를 비판하였고 각서상에는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이나 안전 보증(Security Guarantees)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외교적 보장(Assurances)이 현재 상태의 완전함을 선언하는 것뿐이라면 보증(Guarantees)이라는 부분은 미래에도 그 완전함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약속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각서에서 말하는 보장(Assurances)이라는 용어는 각서 체결 당시인 1994년에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이 완전함을 확인(Assurances)한 것일 뿐이고 미래에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이 침탈 받는 경우에도 미국과 영국 등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의 완전함을 적극적으로 회복시켜준다는 의미의 보증(Guarantee)은 아니라는 것을 일러둔다. 사실 블라디미르 바실렌코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 NATO측이 NATO 가입을 서두른 이유 역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우크라이나의 미래 안전에 대단히 실효성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위기 의식 때문에도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가 체결되던 시점에서 요구했던 것은 독립 당시 확보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을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인정(Assurances)하는 것이었기에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러시아, 혹은 미국과 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안전 장치인 군사적 보증(Guarantee)이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에서 언급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Assurance)'은 당시 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림반도,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러시아가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안전과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인정(Assurance)하는 맥락에서 삽입한 것일 뿐, 애초에 본 각서의 목적 자체는 장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과 영국에게 지켜달라고 요청하여 체결한 각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둔다.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주민이 비중이 높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국가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에 대해서 그렇게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 올해 2022년 전쟁과 같은 위협을 당시에 느꼈다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른 국가들인 폴란드나 체코처럼 서둘러 나토에 가입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당시 러시아는 옐친 시대 당시 경제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해야 할 명분과 여유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나토 가입 여론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03-15
  • ‘하나의 중국’이 가진 의미
    ‘하나의 중국’이란, ‘중화인민공화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모두 하나의 국가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중국의 정치 및 외교적 근본 이념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대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지만,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분리 및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의 영토관 및 사상관을 뜻하기도 한다.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은 18세기 청나라 건륭제에게 복속되기 이전까지 수 천 년 동안 인종과 언어, 그리고 문화, 역사 등에서 한족(漢族)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마지막 전근대 국가인 청나라의 강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중국’ 또는 ‘중화민족 대가정’이라는 범주에 편입됐다. ‘하나의 중국’은 이들을 놓지 않으려는 현대 중국의 명운을 건 몸부림이면서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정치적 토대이기도 하다. 고대부터 중국인들은 통일 국가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누 한족의 거주 영역에 한정된 개념이었다. 왕조 시대 중국인들은 작게는 중국 대륙, 크게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천하(天下)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천하를 다스리는 인물은 오로지 하나의 군주인 황제(皇帝)로 여기며 그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지배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중국의 포괄적 지배 관념과 ‘하나의 중국’은 논의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에 연결하기 어렵다. 전근대적 관념의 통일은 천자의 통치 범위 내에 있는 한족의 통일 만을 지칭한다. 한족들은 천자 범위 밖의 이민족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 라 부르며 오랑캐로 간주했고 이들에게 천자를 숭상하는 예우와 조공 및 책봉을 내렸을 뿐 통일을 원하진 않았다. 그러나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하나의 중국' 관념은 근대로의 세기 전환이 이뤄진 19세기 말~20세기 초 경 등장했다. 신해혁명 당시,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건 혁명파는 청나라에 대한 타도를 성공하자 새로운 민족 국가 건설 이전, 민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오랜 논쟁 끝에 ‘민족’의 정의가 ‘한족’에서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민족’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쑨원(孫文) 역시 한족의 민족 국가 대신 만주족과 장족(티베트), 몽골족, 회족, 한족 등을 아우르는 5개 민족이 화합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 나가자는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이념을 창안했다. 이는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의 2배에 달하며 오늘날 중국 영토의 약 63%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영토를 상실하고 싶지 않았던 혁명파의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혁명파는 청나라의 영토와 지배력 그리고 만주족 휘하의 통합된 소수민족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한족의 민족 국가 대신 ‘중화민족’의 국가로 새롭게 정의한 것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만이 서구 열강이나 일본, 러시아 같은 강대국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맞서려면 '하나의 중국' 이라는 중국의 방침을 해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막연히 반중을 외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3-14
  • 탈기독교화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 러시아와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이 정식 종교로 인정한 스파게티 괴물교
    2017년 4월 27일, 러시아 정부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종교라 할 수 있는 스파게티 괴물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 이 종교가 사이비 종교, 혹은 무슨 장난하는 그런 느낌이 있지만 현재 내가 있는 라트비아의 리에파야(Liepāja)에 스파게티 괴물교 신자가 약 100여 명 정도 존재한다는 자료를 보게 되면서 급속히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종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에사도 정식 종교로 인정을 했기 때문에 러시아 같이 정교회, 그 보수적인 국가에도 이런 괴종교가 국가에 의해 인정될 수 있나 싶어 심히 궁금했던 차에 알아본 내용을 페북에 적시하게 되었다. 그만큼 러시아는 자유롭고 열려있는 국가다. 그런데 이 장난스러운 것 같은 종교를 알아보니 풀 네임은 Church of the Flying Spaghetti Monster로 이를 줄여 FSM이라 부른다. FSM의 교리를 파스타파리아니즘(Pastafarianism)이라고 하며 이 종교를 믿는 신자들을 파스타파리안(Pastafarian)이라 칭한다. 본래는 예상대로 패러디 종교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이를 넘어 진짜 종교로 인정받았다. 물론 보수적인 기독교를 비꼬기 위한 종교다. 이 우스꽝스러운 종교는 미국의 캔자스 주에서 창조설을 신봉하는 신자들이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을 학교의 필수과목에 포함하자며 강하게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캔자스 교육 위원회가 공립학교의 생물학 수업에서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을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자 2005년 오리건 주립대학 물리학 석사인 바비 헨더슨(Bobby Henderson)이 정체성이 모호한 지적설계자 대신에 어떤 존재를 제시해도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지적설계론을 가르치려면 지적설계에 더해서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님도 같은 시간을 들여 가르쳐야 한다"라며 항의하는 편지를 캔자스 교육 위원회에 보내게 되었고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서 바비 헨더슨과 그의 스파게티 괴물 이론은 매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Flying Spaghetti Monster(FSM)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보통 이와 같은 FSM을 주장하는 신도들은 창조설 신봉자 및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비논리적이며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활동했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인형을 쓴 사제에게 세례를 받거나 보편적인 종교상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해도 창립자인 바비 헨더슨을 찬양하는 등, 종교단체에서 싫어할 만한 행위를 이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벤트로 간접적인 비판을 하거나 풍자하는 행위 및 시위를 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도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와 같은 시위대부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처럼 매우 과격하고 위험한 시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위대들에 맞서 그들을 은근히 조롱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풍자로 시작했지만, 유명세가 널리 퍼지고 기존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던 신도들이 늘어나면서 현재 미국과 대만 및 네덜란드 정부, 러시아 법무부에까지 정식 종교로 인정받게 된다. 2017년에는 호주도 FSM을 정식종교로 인정했다. FSM의 교리에 의하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은 스파게티 면발들과 위로 촉수처럼 나온 눈, 2개의 미트볼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파게티 괴물은 산과 나무, 난젱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동안 수백 년 동안 음지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그 존재가 양지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이 종교의 창시자 바비 핸더슨이 캔자스 학교 위원회에 보내는 서한이 노출되면서 그 정체가 세계 곳곳에 드러나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이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의 아름다운 면 가락과 그 인자한 자태로 인해 세계인들은 여기에 매료되어 폭발적으로 신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는 유신론의 허구성을 풍자하기 위해 무신론자들이 모여 집단 예배를 본다. 다만 FSM의 공식적인 입장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자가 다수이지만, 진지하게 믿는 신자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법적, 제도적으로 신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여러 국가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FSM도 10계명을 가지고 있다. 1. 누구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FSM님께서 산, 나무, 난쟁이(Midgit)를 시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2. 진화의 근거로 제시되는 모든 것은 사실 이 존재에 의해 비(非)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 3. 지구온난화, 지진, 태풍, 기타 천재지변은 1800년대부터 해적의 숫자가 감소한 데에 따른 결과다. 4. 해적들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들이며, '그 분(스파게티 괴물)’께서 선택하신 복장인 해적 의상을 입지 않고 괴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물론 그러한 무례를 저지른다고 해도 FSM님이 워낙 자비로운 분이시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그러지 말자. 5. FSM은 ‘신성한 면가락’을 움직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면으로 식사하는 것은 생활화가 필수다. 6. FSM에 대한 기도는, “아멘” 대신에, “라멘(r'Amen)”으로 끝내도록 한다. R'Amen! 7. 천국에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트립 댄서 공장과 맥주 화산이 있다. 8. FSM교의 3대 위격은 1) 미트볼 - 힘을 상징하며, 2) 소스 - 자연과 정신의 풍부함을 상징한다. 3) 국수 - 에너지와 유동성을 상징하기에 반드시 숭상받아야 마땅하다. 9. 바비 헨더슨은 이 종교의 예언자이며 구원자다. 10. 금요일은 종교적 안식일이다. 그리고 10계명을 외운 뒤, 기도할 때는 4번째 사진의 스파게티 덩어리 모양의 손 모양을 해야 한다. FSM이 주장하는 천국에는 개인이 원하는 많은 종류의 맥주가 뿜어져 나오는 화산이 있고, 파스타의 육수와 소스로 이루어진 강이 있으며 스트리퍼 공장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본래 FSM의 성별은 주로 남자로 보기 때문에 스트리퍼 공장에서 나오는 이들은 주로 여자로 보아 왔다. 그러나 현대적인 재해석에 따르면 남성 스트리퍼들의 공장도 존재한다고도 한다. 아울러 지상에 서태어나 자라는 인간들과 천국의 공장에서 나오는 스트리퍼들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천국의 스트리퍼들이 사실 로봇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반면 지옥은 김빠진 맥주와 병든 스트리퍼들이 있는 곳이고 주로 불신자들이 떨어지는 곳이다. 게다가 해동이 안 되는 레토르트 냉동 스파게티가 가득 찬 냉동고이면서 먹을 것은 엄청 맛없는 영국 음식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은 변절한 해적들로 묘사된 소말리아 같은 곳으로 영원히 추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FSM은 자비롭기 때문에 불신자라 해서 왠만하면 지옥으로 보내진 않는다 한다. FSM의 복음 8계명도 존재하고 있다. 최초 예언자인 해적 '모지' 선장이 FSM에게서 석판 10개에 적힌 십계명을 받았지만, 술에 취해 2개를 바다에 빠뜨렸기 때문에 현재는 8개만 전해진다고 한다. FSM의 복음 8계명은 다음과 같다. 1. 웬만하면 나를 믿는다고 남들보다 성스러운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마음 상하지 않으며 어차피 안 믿는 자들에게 하려는 말들이 아니므로 말 돌리지 마라. 2. 웬만하면 내 존재를 남들을 괴롭히는 핑계로 사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3.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 같은 것들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4. 웬만하면 스스로와 파트너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5. 악의에 찬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공격하려면 웬만하면 일단 밥은 챙겨 먹고 했으면 좋겠다. 6. 웬만하면 내 신전을 짓는데 수억 금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더 좋은 데 쓸 데가 많다. 7. 웬만하면 내가 임해 영지를 내린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웃을 사랑하랬다. 좀 알아먹어라. 8.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웬만하면 남들이 너에게 해주기 바라는 대로도 남들에게 하지 마라. 상대방도 좋아한다면 상관없다. 이 FSM은 한반도에도 다가오고 있다. 지난 2010년에 포스텍에서 FSM 동아리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종교 동아리들의 강렬한 반발로 인해 동아리 창설은 무산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미 페이스북에는 FSM 한국지부 페이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한국에서의 그 위세가 출중하거나 활동이 활발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차피 FSM을 종교로 공인한 나라도 초반에는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차피 각종 사이비 종교들도 판치고 있는데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도 FSM을 보고 싶은게 나만의 바램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03-13
  • 히잡에 관한 이야기 - 이란 히잡 사망사건 및 시위와 관련하여
    히잡은 무슬림들이 착용하는 의복 중 하나로 전신 의복이 아니고, 얼굴 일부와 머리만을 둘러싸는 형태로 두르는 천이라 볼 수 있다. 히잡의 형태는 이슬람권에서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는데 가령 앞머리를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리는 게 정석인 나라도 있다. 히잡을 착용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중동의 경우, 사막의 자외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지만 모스크와 마울슬랭 같은 종교 시설에서는 머리카락을 가려 남성들의 시선이 예배 이 외에 다른 쪽으로 가지 못하게 묶어 두려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히잡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지 환경적인 부분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이슬람권 여성이 히잡을 착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나라, 출신,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다만 해당 국가의 이슬람 사회가 얼마나 온건적이고 외향적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일례로 모로코, 튀니지, 터키처럼 무슬림 여성이라도 히잡을 반드시 착용할 필요가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곳은 매우 온건적이며 외형적인 이슬람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히잡 착용에 대해 <꾸란>을 통한 종교적인 근거로 볼 때 제24장 <빛의 장> 제31절에서 나타난다.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가슴을 가리는 머릿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들과 남편의 아들과 그녀의 형제와 그녀 형제의 아들과 그녀 자매의 아들과 여성 무슬림과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하녀와 성욕을 갖지 못한 하인과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또한 여성은 발걸음소리를 내어 유혹함을 보여서는 아니 되나니 믿는 사람들이여 모두 알라께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번성하리라." 문제는 이슬람을 창시했던 무함마드 당시에는 여성들이 히잡 착용에 대해 강권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이슬람이 나타나기 이전이라도 여성 차별은 존재했고, 당시 중동에서는 노출하는 여성을 매춘부로 간주하고 있었다. 중동이나 유럽 모두 7세기에는 여성이 사람 대접을 못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라 했으며 정숙하게 차려 입으라고만 했을 뿐이다. 이는 '육체적 욕망'을 죄악으로 규정하며 금욕의 실천을 중시하던 중세 시대 카톨릭과도 연관성이 있다. 이에 <하디스>에 의하면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들을 유혹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가리는 것이 무슬림에게 권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7세기 이후, 중세적 관점으로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현하던 카톨릭도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을 유혹한다고 인식했던 것이기에 여성들은 베일을 쓰고 그들의 머리와 목부분을 가리게 했다. 당시 카톨릭은 이슬람보다 더 엄격한 수도 방식을 선택했으며 매우 보수적이었다. 무함마드는 <꾸란>의 내용을 말하기만 했을 뿐 직접 집필하지는 않은 데다가, 유목민족 특성상 기록물이나 인쇄물도 대량생산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쿠란은 주로 구전으로 전파되었고 꾸란을 암송하던 이맘인 하피즈(Hapij)들이 정통 칼리프 시대 당시 내전으로 거의 처형되면서 무함마드의 말씀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무함마드 사후 서로 지역마다 통용되는 <꾸란>의 판본이 다르고 심지어 내용마저 다른 <꾸란>들이 출몰하기 시작하자 혼란을 우려한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무함마드를 보필하는 서기들이 가지고 있는 <꾸란> 원본들을 교차검증해 나온 결과물을 확증하였다. 이 결과물만이 <꾸란>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게 된다. 우마르가 이렇게 <꾸란>을 표준화한 이후, 기독교의 복음서처럼 책에 쓰여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위작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모든 내용이 기억에 의존한 채 보존되다가 쓰여진다는 것이 사실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꾸란>은 무함마드의 계시만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더불어 <꾸란>을 책으로 만들어 표준화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수니파의 견해일 뿐이고 시아파에서는 표준 <꾸란>을 만들라 지시한 사람이 4대 정통 칼리파 알리라고 주장하고 서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히잡을 쓰라고 강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아니라 이후의 통치자들인 것이다. <꾸란> 제24장 <빛의 장> 제31절의 내용도 무함마드가 직접적으로 저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온건적인 부분과 급진적인 부분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꾸란>을 온건적으로 해석하는 이맘들은 "OO 할 수도 있다." 라며 다른 해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그러나 급진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꾸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무서운 점이 <꾸란>과 <하디스>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경전을 만든 것이 사람이 썼을 뿐, 실제로 신(神)의 이야기이니 그대로 적은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으면 신(神)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랍 여성들의 히잡과 아바야, 니캅 등의 복장은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건조한 사막기후에서 몸의 수분과 온기를 유지하는 데에 유용하지만 아랍이나 중동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굳이 권할 필요가 없는 복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하고 상관없이 종교적인 입장에서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간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 용도를 바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꾸란>의 24장 30절에서는 남성에게도 정조를 요구하고 있디. "믿는 남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그들의 시선을 낮추고 정숙하라 할지니 그것이 그들을 위한 순결이라. 실로 알라께서는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아시니라." 이는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무슬림 남성들에게도 예배시에는 최소한 배꼽부터 무릎까지는 완전히 가릴 것이 요구된다. 알라는 남녀 모두에게 평등하기 때문이다. 무슬림 남성들이 모자를 쓰고, 걸프 지역의 아랍인들이 쿠피야(Kuffiyah)라는 두건을 쓰거나 터번을 쓰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여성차별이니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히잡은 이슬람 뿐만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같은 주요 종교에서도 의무적으로 착용되어 왔으며 카톨릭도 미사를 볼 때 여성들은 미사보를 쓴다. 러시아 정교회도 머릿 수건을 쓰며 다른 예시로 유대교의 키파와 시크교의 터번도 있다. 그걸두고 성별 차별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무슬림들의 시각이다. 최근 이란에서 22살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됐다가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이란은 시아파 위주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한 신정국가다. 앞서 내가 언급한 것처럼 무함마드는 히잡을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정숙한 복장을 지시했다. 몸을 정갈히 하고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는 것이 무함마드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이란이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원리주의 국가들은 히잡이나 니캅, 차도르, 부르카 같은 복장들이 정숙한 복장이라며 강요하고 있다. 이슬람의 원리주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뜻을 받들고 그것이 알라의 뜻이라 여기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세속적 권력욕을 위해 알라와 무함마드의 뜻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통치자까지 겸임하면서 반 세속적인 종교로 출발했다. 그런 무함마드의 뜻을 받들어 반 세속적 종교로 신정국가를 탄생시켰다면 적어도 무함마드와 <꾸란>의 뜻은 지켜줘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란이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신정국가들은 종교적 원칙을 저버리고 있다. 스스로 정화하지 않으면 앞으로 21세기에서 가장 뒤떨어진 사상과 철학을 갖춘 국가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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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3
  • 한국에서 아이폰의 위상, 삼성 스마트폰 차별에 대한 비판
    한국은 초등학교조차도 아이폰 안 쓰면 왕따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데 충격적이다. 혼자만 갤럭시 쓰면 애들 사이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뭔가 소외당하는 느낌이라 하고 아이폰 쓰는 애들끼리 '에어드롭(AirDrop)' 할 수 있고 사진도 잘 나온다며 아이폰에 대한 극찬을 늘어 놓는다. 게다가 디자인도 좋으니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이폰11이나 12처럼 구버전이라도 좋다고 한다. 꼭 프로가 아니더라도 기본모델, 최저 용량 64GB만 사줘도 다들 만족한다고 한다. MZ세대를 포함한 젊은층부터 2000년 중반 이후 태어난 어린 10대 '알파세대'까지 아이폰 선호가 두드러진다. 최근 2년새 국내 20대의 아이폰 사용율은 크게 높아졌는데 기능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서로 간의 제품에 대한 호불호와 그에 따른 상호 간의 선호도는 존중해줘야 마땅한 부분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젊은 세대들이 아이폰을 선호하는 배경에는 '또래 문화'와 '브랜드 가치'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애플 기기끼리 파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에어드롭'이 인기인데다 '로켓(LOCKET)' 앱도 비슷하다. 이 앱은 스마트폰 홈 화면에서 친구의 사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5명 인원으로 한정된 폐쇄형 SNS로 애플 앱스토어에서 먼저 출시되어 그들만의 공간을 만든다. 아이폰의 경우 아이들끼리 공유하는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부분이 작용하는데 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폰을 사용하면 아이패드, 애플워치, 아이팟, 맥 등 애플 기기를 연달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애플은 특유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애플 브랜드 기기 간 강력한 연동이 주는 편리함이 있는 것도 한 몫 한다. 외양이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아이폰의 외관과 사진효과, 인스타그램 같은 외산 유명 앱과의 호환성 등도 아이폰 선호 요인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 뿐일까? 러시아에서는 삼성의 스마트폰이 독보적인 지위로 1위를 독주한 적 있다. 특히 2009~2016년은 7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의 스마트폰, 겔럭시가 러시아에서 "국민 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각종 후원과 마케팅 덕분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3년부터 ‘톨스토이 문학상’을 지정, 전쟁 전 2021년까지 18년을 후원했다. 2003년 세계적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탄생 175주년을 맞아 톨스토이의 인본주의와 문학성을 기리고 러시아 문학의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삼성전자 후원으로 톨스토이재단과 삼성전자가 공동으로 제정한 순수 문학상까지 제정했다. 게다가 모바일 기기로 러시아의 고전 문학을 읽을 수 있는 ‘라이브 페이지(Live Pages)’ 앱을 설치했다. 사용자는 △등장인물 관계도 △시대 배경 △역사적 사건 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며 입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걸 통해서 러시아 사람들은 한층 더 가깝게 고전 문학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역시 책 읽는 문화가 세계 수준 탑급인 러시아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1991년부터 볼쇼이 극장을 후원하며 최장수 파트너로 활동했었다. 2014년에는 모스크바 국제 빛 축제(Moscow International Festival ‘Circle of Light’)에 주요 후원사로 참여했는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볼쇼이 극장에 갤럭시 S6 엣지+와 어우러져 이색적인 장관을 연출했기에 러시아인들의 환심을 샀다. 이어 삼성전자는 삼성 스마트 스쿨을 통해 러시아 공학, 특히 IT 분야 인재 양성에 투자했다. 삼성 스마트 스쿨은 삼성전자의 대표적 ‘사업연계 사회공헌사업’으로 IT 기술을 활용해 학생별 맞춤 학습을 지원하는 미래형 교육 방법을 말한다. 삼성 스마트 스쿨 프로그램은 고등학생을 위한 IT 기술과 프로그래밍 기초 과정으로 구성됐는데 2021년까지 러시아 내 21개 도시에서 총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삼성전자는 IT 기술 교육을 넘어 차세대 엔지니어들이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중고생이 IT 관련 전문 직종에 대한 관심을 갖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미래 러시아 IT 인재들을 선도적으로 키워내고 있었던 셈이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러시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꾸준히 해왔으면 더 좋으련만, 결국 삼성은 러시아를 떠났다.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아이폰을 선호하며 겔럭시를 멀리하는 이유는 단순한 기능적인 문제와 '또래 문화', '브랜드 가치'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는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사대주의" 도 한 몫하고 있다. 국내 제품보다 미국 제품을 높이 쳐주고 미국에 대한 오만가지의 환상은 10대나 20대 젊은 세대들을 자극시키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이며 세계 최강국이고 아예 대한민국의 존재론을 의심하며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젊은애들도 봤다. 이들은 미국이 모든 것을 선도한다 여기고 있고 미국의 말이 곧 법이고 진리라고 생각한다. 자동차도 미제, 폰도 미제가 아닌 한국산이면 가난한 자라며 같이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가와 국산 브랜드 자체를 허접 쓰레기로 생각하는데 삼성이 애플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는 삼성 폰을 썼고 2015년에 폰은 몬테네그로에서 분실했을 때 잠깐 아이폰을 썼을 뿐,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삼성 폰으로 바꿨다. 아이폰이 적응이 안돼 불편했을 뿐 아니라 나는 안드로이드 기능이 더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해외에 나가서도 현지인들에게 제품의 인기가 많았고 같은 삼성 폰을 쓰고 있으면 서로 반가워 BAR에서 맥주 한 잔 하곤 했다. 이건 내가 "국뽕"이라서의 문제가 아니다. 내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내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성공해야 이에 대한 자랑, 자부심을 갖고 정착해 살 수 있다. 해외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온갖 좋은 일도, 험한 일도 겪어봤던 나는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 브랜드가 잘 되고 성공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삼성, LG, 현대, 대우, 팔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개인 사업자들,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과 같은 축구 선수들이나 이정후, 고우석 같은 메이저리거들도 한국을 대표하는 개인 브랜드들이다. 이들이 잘 되야 해외에서 사는 우리들의 사회적 지위도 그만큼 급이 높아진다. 미국의 번영이 천년, 만년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제품에 대한 "허접 쓰레기"라는 관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해외에서 성공하고 있던 우리 브랜드조차도 그 가치가 하락할 것이다. 국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데 해외에서 그 가치가 오래갈 수 있을까? 결국 언젠간 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국가 경제가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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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2
  • 라트비아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인 'Dāvāja Māriņa meitiņai mūžiņu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인 'Dāvāja Māriņa meitiņai mūžiņu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은 1981년 당시 소련 치하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방송국이 주최한 가요 콘테스트인 Mikrofona aptauja (미코로포나 아파타우야)에 출전한 아이야 쿠쿨레(Aija Kukule), 리가 크레이츠베르가(Līga Kreicberga)가 불러 우승하면서 알려졌다. Mikrofona aptauja (미코로포나 아파타우야)는 1968년에 처음으로 LTV 라트비아 국영방송 프로그렘으로 제작되었고 이 방송에서 방영된 Mikrofona aptauja (미코로포나 아파타우야)는 라트비아 국내에서 시청률이 84%에 이를정도로 소련 치하 당시 라트비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음악 콘테스트 프로그렘이었다. 이 프로그렘은 라트비아가 독립한 직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가 1994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라트비아의 대중 가요곡들과 OST의 절반 이상을 작곡했던 라이몬츠 파울스(Raimonds Pauls)가 작곡했고 레온스 브리에디스(Leons Briedis)가 작사했다. 원래 라트비아어 가사 내용은 알라 푸가쵸바(Алла Пугачёва)가 1981년 러시아어 형태의 노래로 리메이크하게 되었던 '백만송이 장미'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라트비아가 처한 지정학적 운명과 비극적 역사를 모녀관계에 빗댄 내용이다. 발트 신화의 지모신이자 운명의 여신 마라(Māra)가 라트비아라는 딸을 낳고 정성껏 보살폈지만 가장 중요한 행복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그냥 떠나버렸기 때문에 성장한 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저 저주받은 운명일 뿐이었다는 이야기로 여기에서 나타난 그 저주받은 운명은 소련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화하는 내용이라 한다. 다만 이와 같은 해석이 나올 수 있게 된것은 발트 3국 전역에 독립 열풍이 불면서 노래혁명이 시작된 1980년대 후반에 와서였고, 이 곡이 나온 1980년대 초에는 라트비아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로 취급되었다. 소련의 지독한 사전 검열에 걸리지 않고 제대로 방송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단순히 라트비아 신화적 해석 요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에서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불렀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나 보일러실 락커들은 방송에 출연하거나 공식 앨범을 내기란 몹시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은 부업이었고 전업을 할 수 없었다. 독립 이후, 2002년에는 라트비아의 힙합 가수 오졸스(Ozols)가 자신의 앨범 'Augstāk, tālāk, stiprāk'에 랩을 가미하여 곡을 만들어 불렀고 이 역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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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2
  • 루마니아의 90년대 체제 전환과 2000년대 루마니아에 대한 이해
    오늘은 루마니아 현 정권과 조르제스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에 독자의 이해를 위해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의 몰락과 민주화 이후, 2000년대까지 포스팅하고, 2000년대에 현 정권에까지의 내용은 이틀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루마니아의 현 대통령은 공석이다. 이전 대통령은 클라우스 요하니스(Klaus Iohannis)로 11년을 루마니아의 권좌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같은 루마니아 체제를 이해하려면 루마니아의 정치 권력 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89년 12월 25일 차우셰스쿠가 실각하고 1990년 개방과 시장경제를 표방한 공화국 체제로 변화했다. 루마니아는 정치 체제를 프랑스식을 참조하여 공산정권에서 민주정권의 공화국 체제로 변화했기 때문에 거의 프랑스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국가 원수으로서의 대통령 권한과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이고 의회는 상원인 루마니아 원로원과 하원인 루마니아 대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마니아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1989년 민주화 시위 이전까지는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지만 시위가 성공한 이후부터는 직접선거와 결선투표로 선출한다. 직무가 정지될 때이거나 공석인 경우 루마니아 원로원이나 루마니아 대의원의 의장이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현재 2025년 2월 12일에 요하니스의 임기가 종료되고 조르제스쿠와의 연관하여 선거가 무효된 이후, 현재 루마니아 원로원이나 루마니아 대의원의 의장인 일리 볼로얀(Iliiy Boloyan)이 권한 대행을 맡고 있다. 루마니아의 원로원에는 소수민족 정당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루마니아의 선거법에 따라 소수민족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제정된 것이다. 루마니아 원로원은 하원 선거에 한해 봉쇄 조항이 적용되지 않게 일종의 특례를 주었다.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고 헝가리인, 세케이인, 독일인, 슬라브인들이 산재하는 루마니아의 특성상 당연히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마니아에 별로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민족들의 정당들도 의회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루마니아에 잔존하게 된 헝가리인과 집시들은 물론이고, 독일인, 알바니아인, 튀르크인 및 도브루자 타타르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많은 민족들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물론 헝가리계 정당인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연합을 제외하면 1석 정도 차지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다양한 민족을 포용했던 과거 "로마제국"의 선례에 따라 다민족 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루마니아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특이하게도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왕가가 그대로 유지되며 예우를 받고 있다. 이 점은 프랑스와 다른, 영국과 비슷한 점이긴 한데 이는 왕가가 소련에 의해 강제로 축출되었고 루마니아 왕국의 왕이었던 미하이 1세 등의 노력으로 인해 왕가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왕가는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의 구심점이자 상징이다. 소련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왕가는 소련에 저항해 루마니아의 민족적 자존감을 수호하려 했던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루마니아 정부는 왕가를 소련에 저항한 독립운동, 즉 루마니아 민족주의 상징으로 부상시켰고 이는 장기적으로 왕정 복고를 추진하기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옛 왕실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왕가에 대한 존경을 바치고 있다. 그럼에도 왕정 복고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들이 왕실에는 호의적이지만 그래도 정치는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6년에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3가 1989년 혁명 때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제를 선택했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라가 발전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당장 국민투표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62%가 공화정 유지, 21%가 왕정복고를 선택했다. 따라서 왕가는 그저 존경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전통과 현 시대를 합작하는 것이라 본 것이다. 루마니아는 이처럼 대통령의 행정부, 국회, 그리고 왕가까지 모두 정치권에 들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1989년 민주화 시위 성공 이후,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이룩했던 지도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따라서 국가의 미래에 관한 세 가지 비전을 공유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공산주의 이전의 역사와 정치 상황으로의 복원에 있다. 따라서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역사를 지우고 이전의 왕정과 의회가 존재했던 형태로 돌리려 했지만 이는 사회주의 공화국 당시의 혜택을 자들, 그리고 왕정과 의회는 중근세 시기로 회귀한다며 반대하는 자들이 늘어나 결국 무산되었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자유주의 천명의 해법은 자유선거를 정착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유럽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EU 가입, 군사적으로는 나토에 가입해 다가오는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 것이다.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에 의한 우크라이나의 핵 폐기는 루마니아에게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기에 나토 가입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를 위한 사회 공학적 프로젝트의 실현이다. 하지만 구국전선(Frontul Salvării Naţionale)이라 불리는 민주화 세력이 변질하기 시작했고 대학광장에서는 저마다 목소리를 부르짖는 등,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혼란스러운 소요 상황은 지속되었다. 1990년대 정치 상황은 매우 암울한 상태였고 옛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 처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부조차도 통합을 보이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민주화는 매우 더디게 다가오고 있었던 상황이 당시였고, 이는 2000년 초중반까지 이어져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았다. 체제 전환의 루마니아는 한편으로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을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경제 체제를 수립해야 하는 이중 목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만 대통령인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는 막연한 뜬구름만 잡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변환은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사이의 정책, 이어 신자유주의 이념의 도입과 정착, 민주화와 시장 경제로의 전환에 관한 사회적 합의 등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 전환은 1990~1996년의 중요한 고비를 이끌어가야 했던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였으나, 역사적인 현실로 볼 때 훨씬 더 복잡했고, 예측할 수 없는 비공식적 규칙이 난무하면서 더 큰 혼란을 불러왔다.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첫 대통령인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6년 권력에 대한 최초의 민주적 이양이 이루어졌던 에밀 콘스탄티네스쿠(Emil Constantinescu) 대통령을 시작으로 2002년 아드리안 너스타세(Adrian Năstase) 수상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과도기의 종료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정치적인 선언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시행착오가 반복되면서 민생은 지옥이 되고 정치권 혼란은 계속된다. 물론 체제 전환기 사회에 있어 과거 공산주의 이념과 독재가 남겨 놓은 온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완전히 파쇄해야 했다. 이에 대해 가장 중요한 변화로 이어진 것은 독재와 같은 단원 체제에서 다원 체제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국가 원수으로서의 대통령 권한과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로 굳어졌고 의회는 상원인 루마니아 원로원과 하원인 루마니아 대의원으로 분리되어 확고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어 대중매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언론의 자유화가 진행되었고 이동권을 개방하면서 루마니아 시민들이 각지로 이주하는 것도 자유화 되었다. 그리고 유럽으로의 복원하는 일에 착수해 사회 변화의 급진적인 가속화를 가져오면서 2000년대 들어 조금씩 혼란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2007년에 타결된 루마니아의 EU 가입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완전한 민주 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으로 간주되었다. 루마니아는 사회주의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시 유럽과 공식적으로 연결되면서 서유럽화를 계획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은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루마니아 시민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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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1
  • 라트비아 빅토르 최 메모리얼 - 모든 구소련인들의 히어로 빅토르 최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곳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음악들이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 인근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오전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건질 수 있었던 온전한 물건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지게 된 앨범인 Кукушка (뻐꾸기)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은 KGB가 의도적으로 빅토르 최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빅토르 최가 당시 소련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버스가 고의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뻐꾸기야 말해봐, 노래해봐 (Песен ещё не написанных сколько? Скажи кукушка, пропой)로 시작되는 가사인 빅토르 최의 유작 Кукушка (뻐꾸기)의 가사는 이후 2015년에 빨리나 가가리나(Полина Гагарина)가 리메이크해서 다시 불렀는데 빅토르 최의 감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평가다. 그녀의 리메이크 곡은 영화 세바스또뽈 전투(Битва за Севастополь)의 Ost로 삽입되었다. 원래 슬라브족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에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면 뻐꾸기는 남은 햇수만큼 울어서 알려준다고 한다. 이 뻐꾸기를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녹음했을 때 초이의 남은 생애의 날짜를 몇 번이나 예측하고 울었을까?.. 나도 엠게우 학위 과정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묵념과 헌화를 하고 빅토르 최의 음악을 크게 틀어보았다. 나도 모스크바 학위 과정 시절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에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시대 초기에 러시아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그러한 출생 배경도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준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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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8
  •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 러시아가 극초음속 기술을 북한에 전수했을 가능성 높아 보여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쟁, 휴전 기간이라는 기네스북 기록을 쓰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과 북한이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과 전쟁 중에 있다. 다만 휴전 기간이 한 세대가 다 갈 정도로 길어서 전쟁에 대한 체감이 옅어진 부분이 있을 뿐이지,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북한과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화약고인 셈이다. 그런데 이 숨어있는 화약고가 현실로 드러나게 생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가 우크라이나로 살상 무기를 우회 제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속속 흘러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 주한 러시아 대사 안드레이 쿨릭이 "지난 30년간 양국의 이익을 위해 건설적으로 발전해온 러-한 관계를 분명히 망칠 것"이라 발언했고 작년 4월 20일에는 드미트리 페스코프 장관도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에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국민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들 말대로 '퀴드 프로쿼(quid pro quo· 주고받는 대가)'가 그것이다." 라고 발언했다. 실제 러시아는 북한에 무기 지원과 기술 이전을 소련 해체 이후 30년 동안 하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는 북한에 30년 만의 금기를 깨고 지원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러시아에게 비우호국가고 양국 간의 최대 긴장의 끈인 90일 무비자 방문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우리에 대한 보복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작년 12월 말, 우리 정부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일부 품목의 러시아 수출을 금지한다고 밝히면서 상당 수준의 물목을 제재 대상으로 올렸다. 그러자 마리아 자하로바 대변인은 "한국이 미국 요청에 따른 비우호적 조치를 했다”면서 “한국의 경제와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 대응할 권리를 갖고 있다”며 “반드시 대칭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한국은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 때 러시아가 취할 경제적 보복이 무엇일지 그것을 고민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의 보도에 따르면 정확하게 "한국의 경제와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다"는 보도는 과장된 것이었고 실제로 어떻게 보복할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전부터 나는 누누히 러시아를 적대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을 우회로 하게 되면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할 것이라 언급했었다.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북한은 러시아제 무기를 잇달아 실험하며 남침 의욕을 더욱 돋굴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다. 그 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의 존재다. 여태까지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인 킨잘과 이스칸데르, 아방가르드, 지르콘 등은 요격을 당한적이 없고 우크라이나의 킨잘 요격 주장은 다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극초음속 미사일의 존재가 전투에 참여했을 경우, 다량으로 발사되는 것은 아니기에 전투에 있어 향방을 바꾸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극초음속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정은의 장난질에 최악의 안보 위기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태껏 김정은이 취한 정책들과 행보들을 보면 충분히 그와 같은 행위들을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우리 안보에 비상이 걸리며 충격적인 일이 오늘 밝혀졌다. 몇 년전 북한이 고체연료를 사용한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IRBM)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지난 14일 오후 극초음속 기동형 조종 전투부를 장착한 중장거리 고체연료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했다면서 시험발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북한 측은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 발사는 주변국의 안전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으며 지역의 정세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강력한 무기 체계들을 개발하기 위한 정기적인 활동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극초음속 기술은 아마 러시아에 전수 받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중국의 극초음속은 아직 검증된 바 없지만 러시아는 그 기술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검증된 바 있기에 북한에 이 기술을 전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3년 전, 제재 당시 마리아 자하로바 대변인이 러시아의 보복에 한국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역시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 극초음속 기술이 북한에 전해졌다면 자하로바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아마 이것을 염두해 두고 놀라지 말라 경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쏟아 부은 무기들의 재고가 바닥났고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어 우리를 도와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목숨 걸고 참전할리도 만무하다. 한미상호조약을 가지고 그것을 맹신하고 있다지만 미군이 참전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다. 우선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줬기에 재고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지만 중동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또한 진행 중이고 홍해에서 예멘 후티군도 위협적인 상황이기에 참전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의 안보는 우리 스스로 지키고 해결해야 한다. 그럴려면 왠만함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것, 그리고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잘 지내야 하고 중국과도 그럭저럭 잘 지내야 하며 미국과도 잘 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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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8
  • 라트비아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
    라트비아는 독립 이후에 탈러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2005년에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소련에 의해 러시아 SFSR에 합병되어 러시아 땅이 된 압레네 지역을 두고도 오랫동안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벌였다. 그리고 2012년 8월 28일 당시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자 현 부총리 직위에 있는 아르티스 파브릭스(Artis Pabriks)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 있는 소련 해방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브릭스 장관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련 해방군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하지만 이는 너무 많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브릭스 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5월 9일 기념비 주변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는 것과 관련하여 행사 참가자들 대부분의 목적은 전몰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미 20년 전에 사라진 지정학적 세력권인 옛 소련권에 라트비아를 묶어 두려는 것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즉, 나치 독일과 싸워 그들을 몰아내는데 희생을 당한 라트비아 군인들을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파브릭스는 이어 5월 9일 러시아 청년들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부착한 자동차를 몰고 리가 시내를 활주할 때 독일의 젊은 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독일이 러시아를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반독 시위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라트비아의 소련 해방군 기념비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희생된 소련군을 추모하기 위해 1985년 건립된 높이 약 80m의 기념비이다. 라트비아 전체 인구인 220만 명의 40%를 차지하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은 매년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일인 5월 9일에 기념비 주변에 모여 승전을 기념하고 나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숨진 소련군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게다가 라트비아 군이 소련군에 참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이 때 전몰한 라트비아 장병들을 위해서 꽃다발을 바치며 추모하는 행사도 같이 거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트비아 측의 역사 인식은 러시아와 다르다. 라트비아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라트비아에 진주한 1940년부터 라트비아가 독립한 1991년까지를 소련의 강점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른 발트 3국 국가인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는 다르게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을 공식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한 직후, 1922년 야니스 착스테(Jānis Čakste)가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4대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대통령이 된 군티스 울마니스(Guntis Ulmanis) 시대부터는 1대가 아닌 소련에 합병되기 이전의 대통령까지 모두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군티스 울마니스는 라트비아의 공식 5대 대통령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현재 에길스 레빗에 이르기까지 10대 대통령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상당수 라트비아 인들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는 라트비아에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 점령의 연장을 허용했을 뿐이라 인식하고 있다. 만약에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면 소련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인식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2010년 3월 16일에는 라트비아 나치군단 퇴역군인들의 시가행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대개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전쟁에 참가하긴 했지만, 볼셰비키에 맞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치의 군복을 입고 소련군과 싸웠던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1943~1944년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14만 6천 명의 라트비아인을 징집해 ‘바펜 슈츠슈타펠 라트비아 군단’을 편성하여 소련군과 맞서기도 했다. 1940~1941년 소련 점령기를 ‘공포의 시기’로 기억하는 라트비아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돼지새끼들이지만, 스탈린이 더 나빴다”고 말한다. 발트 3국 가운데 반러 감정이 가장 강한 라트비아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13년에 독일 나치의 상징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EU 국가로써 가장 늦게 한 조치였으며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라트비아 나치군단 퇴역군인들의 행사에 반발한 유럽이나 이스라엘 측의 항의로 인해 마지못해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라트비아 정부에서도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에 복무한 군인들을 소련에 맞서서 싸웠다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등, 네오나치들이 활동하기도 한다. 최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아조프 대대에 지원한 라트비아 네오나치들도 존재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의 차이는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계 정치인들의 반발에서도 드러났다.당시 라트비아 세임(Sejm) 최고 의회의 부의장 안드레이 클레멘티예프(Андрей Клементьев)는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을 두고 사회 문제에서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의도적 도발이라 비난했다. 클레멘티예프는 정부의 관리들이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노력하는 대신 민족 문제를 둘러싼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며 이는 라트비아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명백한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당시 리가 시장 닐 우샤코프(Нил Ушаков)도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을 두고 아주 어리석은 발언이라 규탄하는 등, 러시아계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이고 있다. 한편 라트비아는 2004년 나토와 EU에 가입하여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실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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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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