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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값 사상 최고…“비트코인 대신 은이 안전자산?” 기요사키 발언 주목
- 2025년 11월, 국제 은값이 온스당 56.446달러로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올해 들어 94% 상승한 수치로, 금의 상승률을 넘어선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은이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며 비트코인을 일부 매도하고 은을 지지했다. 미국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감이 시장 전반에 퍼지며, 금·은값 모두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은이 대체 자산으로 떠오르는 동시에 과열 우려도 함께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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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값 사상 최고…“비트코인 대신 은이 안전자산?” 기요사키 발언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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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스’ 현실화…민간이 쏘아 올린 누리호, 13기 위성 궤도 안착
- 2025년 11월 27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4차 비행에 성공하며 민간 기업 주도의 첫 우주발사를 이뤄냈다. 총 13기의 위성을 실은 누리호는 고도 600km 궤도에 안착했고, 발사 전 과정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민간이 총괄 운영했다. 이는 국내 우주개발이 정부 중심에서 민간 중심의 뉴스페이스 시대로 전환되는 역사적 계기로 평가된다. 정부는 2027년까지 추가 발사 및 차세대 발사체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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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스’ 현실화…민간이 쏘아 올린 누리호, 13기 위성 궤도 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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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구금 사태 후 복귀”…50여 한국인 근로자, 다시 미국 입국
- 2025년 9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 배터리 공장에서 불법 체류 단속으로 체포됐던 한국인 근로자 317명 중 약 50명이 최근 미국에 재입국해 현장에 복귀했다. 당시 ICE는 강제 단속을 벌였고,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구금 후 전세기로 귀국했다. 이후 비자 복원 및 외교 협상을 통해 일부 인력이 다시 입국했으며, 현재 200여 명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본 사태는 대미 투자와 외교 신뢰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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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구금 사태 후 복귀”…50여 한국인 근로자, 다시 미국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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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SID 판정 취소로 4000억 면했다… 론스타와의 싸움에서 이긴 한국 정부
-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사실상 완승을 거두었다. ICSID 취소위원회는 기존 배상 판정을 절차 위반으로 전면 취소했고, 정부는 약 4000억 원의 배상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는 2022년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주도한 취소소송의 결과로, 잘못된 증거 채택이 핵심 쟁점이었다. 진중권 교수는 한 전 장관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으나, 여권 내에서는 공적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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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SID 판정 취소로 4000억 면했다… 론스타와의 싸움에서 이긴 한국 정부
칼럼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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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미끼, 클릭의 유혹인가 사회적 중독인가?"
- 최근 ‘rage bait(분노 미끼)’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유행어로 부상하고 있다. ‘분노 미끼(Rage bait)’는 의도적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로, 클릭과 조회수, 댓글 유도를 목표로 하는 디지털 상의 상업 전략이다. SNS, 정치 유튜브, 커뮤니티 등에서 분노 콘텐츠는 긍정 콘텐츠보다 더 널리 퍼지고 더 오래 소비된다. 특히 정치적 이슈에선 ‘분노 미끼’가 갈등과 혐오를 증폭시켜 사회적 극단화를 조장하고 있다. 언론들은 이러한 현상이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해치며, 이용자들은 알고리즘에 휘둘리는 정보 소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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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미끼, 클릭의 유혹인가 사회적 중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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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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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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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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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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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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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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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중일 정상회담 이후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 중국의 ‘레드라인’을 건드리면서 양국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중국은 한일령, 일본산 수산물 수입 중단, 상임이사국 저지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일본은 강경 기조를 유지하지만 내각 내 친중 인사 부재와 보수층 결집 전략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관계 회복은 당분간 어려우며 한국은 중립적·실용적 균형 외교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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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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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의 속성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한민국
- 국제 정치의 속성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한민국 한국인들 상당수를 보면 전쟁에 대해 많은 감성과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총에 맞아 머리 터져 죽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날 밤에 그 죽은 사람이 얼굴이 떠오르고 계속 그것이 파노라마처럼 되뇌어서 돌아다닌다. 그것을 벗어나면 평소와 같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마다 꿈속에서 나오고 결국 불면증 때문에 폐인이 된다. 이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가 오랜 세월이 지나며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천둥만 치면 총이나 포를 쏘는 소리인 줄 알고 깜짝 깜짝 놀란다. 천둥이 바로 트리거가 되어 아직 심리적으로 잔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한다. 전쟁이 터지면 많은 인명이 죽는 것은 당연한거고 인권유린, 전쟁범죄,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것, 끝도 없이 악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인거다. 거기에서 국제법 등을 다 지켜가며 인간적 다 따져가며 하는 전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가 했든, 그런거 하나 하나 다 지켜가며 하는 전쟁이 있던가? 전쟁 자체가 비도덕적이고 인권 유린인데 젊은 군인의 목숨과 약자 및 민간인들의 목숨,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의 목숨은 공평하게 1개 밖에 없고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다. 그 안에 고결한 도덕을 따지는 이상론들은 그저 상대방을 더 나쁘게 비난하는 선전도구이자 국제 정치적, 외교적으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장치일 뿐, 아무 의미없다. 전쟁이란, 터지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다하기 때문에 성역도 없고 도덕도 없고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만 있다. 그래서 전쟁은 늘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인권 유린이니 전쟁 범죄니, 도덕성, 불쌍하다는 감성 따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어제 내가 러시아에서 일본에 제기한 사할린 학살, 중국이 오키나와에 원주민 언급한 것 등은 각 국가들끼리의 정치적 기싸움이다. 그러더가 선도 넘는 것이고, 관계도 악화되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전쟁에 돌입하지 않는다. 하는 척, 긴장감만 올려 놓고, 각자 자국의 국내, 외적인 정치적 수사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거나 상대를 견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내가 됐든, 국제가 됐든,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발언들을 자주 하여 국제적으로 상대를 자극한다는 것은 국내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외부로 환기시키며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의 정치적 권력 기반은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다. 게다가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핸디캡이 있다. 일본 사회는 다들 잘 알다시피, 여성에게 그리 좋은 사회는 아니다. 무엇보다 정치권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총리가 되었으며 총리로써 권력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단합된 질서가 필요하다. 일본 국내의 권력 구도와 질서 확립은 그녀가 뭔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튼튼한 기반이 된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약점은 그런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려면 그녀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단합된 질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확고한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안보 문제"다. 물론 미국이 원한 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계속 자극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서 어제 강경발언을 했어도 이전 총리들에 비해 그 강도는 약했다. 그 이유는 사할린에 가스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는 적당히 그 발언을 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러시아 또한 지금까지 하는 것으로 봐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그러면 만만한 나라가 어디일까? 바로 중국이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역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다카이치 총리가 모를리 없다. 그러나 그녀의 국내에서의 취약한 입지 등을 생각한다면 그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가장 큰 한 방이라 볼 수 있다. 그 역린을 건드리면서 중국이 발끈하면 그녀는 일본 내 국민들과 정치권, 군권 등의 단결을 요구하게 되고, 이렇게 단결된 힘은 그녀의 정치권력 구축에 큰 원동력이 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중국에 대놓고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도전하는 미친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도 중국에 희토류에 약점이 잡혀 있다. 적당히 수위조절하면서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고, 그로 인해 일본 내 그녀의 정치 권력의 입지가 단단해지면 그 때부터 관계 개선하는 측면으로 손을 내밀 가능성이 크다. 중국도 당장에 발끈하겠지만 이같은 다카이치 총리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상대의 발끈을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안정적으로 만들면 그때부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손을 잡는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준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적당한 기만(Deceiver)과 위선(Hypocrisy)이 서로 윈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정치는 절대로 순수하게 보거나 접근하면 안 된다. 한국에게 부족한 것은 어줍잖은 순수함으로 접근한다는 것인데 국제 정치에서 그렇게 접근했다가는 조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세계 역사와 국제 정치, 외교를 평생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나쁜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는 것이다. 세계 각 국의 지도자들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사진 :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국제정치, 일본, 대한민국, 중국,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정치, 국제정치의 속성, 하나의 중국, 러시아,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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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의 속성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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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중국 간의 외교 신경전을 두고, 필요한 것은 한국의 중립성
-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외교적 중립성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다고 발언하자, 중국 오사카 총영사 쉬첸이 "다카이치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이는 일본이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는 역린을 범한 것이고, 최악의 외교적 결례를 일본이 먼저했다. 이는 내가 러시아를 편들고 있기 때문에 중국 편을 드는게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을 판단한 것이다. 일본이 무엇이건데 대만의 유사시에 자위대를 활용할 것이라는지, 국제적인 인식 및 대만에 관한 국제법으로도 대만은 엄연히 중국과 한 몸이다. 대만과 중화민국으로 수교한 국가도 몇 없으니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 나라도 몇 없다.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는 올라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고, 대만 국가인 중화민국국가(中華民國國歌) 또한 공식적으로 부를 수 없다. 또한 대만은 해외에 대사관, 영사관을 둘 수 없고, 대신 대표부를 두는 것 정도만 허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게 한 내정간섭이고 권리침해다. 미국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무엇이건데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스르고,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발언을 하는 것인가? 외교관이 타국 총리를 참수하겠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은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은 맞지만 이는 일본이 넘어서 안 되는 레드라인을 넘어 먼저 도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를 편들어 애써 중국의 발언을 같이 비판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미국도 넘지 않는 선을 일본이 넘었다. 다카이치는 중국의 대만 해상봉쇄 시, 일본이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명확히 밝혔는데 이는 대만을 잃으면 오키나와가 사정권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일본은 이중적인 입장을 버려야 한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했다며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정말 중국과 겨루고 싶다면 다카이치는 "하나의 중국"은 위법이니 이를 깨고, 대만을 지키겠다고 정식으로 나서며 해상 자위대를 펑후 일대까지 파견하여 포를 진먼으로 돌려야 한다. 그런데 다카이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이는 일종의 블러핑 수준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청나라를 깨부순 청일전쟁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과거의 청나라가 아니다. 청나라 수준의 무력을 지닌 국가였다면 서구 세력이 이미 20세기 초처럼 중국을 잠식했어야 맞다. 그런데 지금 서구 세력이 중국 어딘가를 잠식하고 있는가? 중국에 남아 있는 서구의 식민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한국 보수 진영들의 수준은 1894년, 즉 130년 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총영사의 참수 발언은 그가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침해한 역린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이 일본에 배치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극동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며 "가혹한 보복"을 천명했다.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은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미국-일본 합동 군사 훈련의 틀 내에서 미국 이와쿠니 군사 기지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포함한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지상 이동식 발사 시스템이다. 토마호크는 러시아와 미국 모두 2019년에 철수한 역사적인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에 따라 금지되었던 무기다. 이를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인 타이푼 시스템이 이와쿠니에 설치되었다면 사할린 지역에 러시아의 핵무기를 배치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전쟁의 긴장을 불어넣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이다. 그리고 중국은 희토류를 쥐고 있다는 것을 다들 엄청나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미국과의 관세전쟁에서 중국이 쥐고 있는 희토류 목줄을 풀어준 것은 미국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대두 한 번 사주고, 희토류 수출은 유예했을 뿐이고, 미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펜타닐 관세만 낮춰줬을 뿐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중국이 기술패권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중국제가 수출되고 있고, 공장이 풀 가동되어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무슨 기술 패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하는가? AI 기술 또한 중국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미 AI 기술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선지 꽤 됐다. 그런데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도 최악인 시기를 겪었던 90년대에는 미국처럼 셧다운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셧다운에 대해 보수 진영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는 자신들이 우상처럼 여겨왔던 미국의 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고, 그것을 언급하면 자신들이 불리하기에 감추는 것이다. 셧다운이 종료되면 그때서야 언급할 것이다. 미국은 셧다운을 극복한 역시 초강대국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정한 초강대국은 셧다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셧다운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극복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 아니다. 정부 시스템이 올 스톱 된 것을 극복한게 무슨 자랑으로 여기는 것인가? 이는 그만큼 미국 내정이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그리고 일본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서니 중국이 공포에 질렀다고 주장들 하던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관을 시켜 협박 발언을 내뱉게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보수 진영은 남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쓰는 자들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중국은 홍콩의 주권을 빼앗았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홍콩은 단 한 번도 주권 국가인적이 없는데 무슨 주권을 뺏나? 1997년 반환 이전에는 영국령 홍콩이었고,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다소 기형적 조건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조건부 공존하는 체제다. 즉, 중공령인데 그 안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국양제(一國兩制)는 홍콩과 마카오, 현재 두 곳을 갖고 있다. 이어 중국은 대만을 속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만 정부를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중국"으로 여기고 있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하는지, 대만이 주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럼 전 세계에 대만을 인정하는 국가가 왜 없는지, 그리고 왜 중화민국 대사관이라는 이름이 없고 타이베이 대표부라 이름이 붙여져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UN에 정식국가로 왜 등록이 안 되어 있는지 설명해 볼 것이며 왜 미국이 "하나의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마 한 명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 유사시에 한국은 중립이 최선이다. 지금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다르며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물량공세는 이기지 못한다. 원자재로 재가공하여 물건 팔아먹는 국가들이 무슨 수로 무한정 원자재를 캐내는나라를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란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폭격할 때,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에로우시스템, 페트리어트 모두 방어에 실패했다. 예를 들어 10개 중에서 7개가 명중했지만 3개는 놓쳤다. 그런데 그 3개가 텔아비브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텔아비브 공습 영상과 도시의 초토화 된 사진을 보면 그 피해의 참상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어떻게 그 물량을 다 막을 수 있느냐, 70% 요격률도 대단하다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는데 이스라엘에 설치해 놓은 시스템이면 다 막아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이언돔도 안심하지 못해 에로우시스템과 페트리어트까지 구비해놨다는 것은 100%의 요격을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30%가 뚫렸다는 것은 나중에 1,000개 이상의 드론 포함 미사일 보내면 적어도 300개는 낙하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폭발성이 준핵폭탄 급으로 고농축 우라늄이 탑재된 포탄을 탑재할 수 있다면 다 막지 못해서 요격에 실패한 1~2개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양산해낼 수 있다. 왜 이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시기적으로 현재 구한말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때의 청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 북한과 최전선에 있다. 대만과의 분쟁에 참여할 경우, 북한군이 휴전선에 공격 대형을 펼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군대가 대만으로 간 틈에 북한군이 공격해 내려오면 감당할 수 있나? 그러니 외교적으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게 좋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 유사시 중립이 최선이다. 사진 : 중국-대만-일본의 외교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출처 : Yahoo! JAPAN 중국, 대만, 타이완, 일본, 중국-일본 외교전, 다카이치 사나에, 하나의 중국,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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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중국 간의 외교 신경전을 두고, 필요한 것은 한국의 중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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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 몇 년전 터키 이스탄불 뒷골목의 이라크 난민 여성을 본적 있다. 젖먹이를 안고 바람 안 들어오며 그나마 따뜻한 뒷골목의 한 켠에서 먹고 잔다. 당시 또한 겨울 때인데 비록 이스탄불의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진 않지만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다. 이는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차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 석유를 훔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IS를 발생시켜 나라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이 난민들은 이라크나 시리아 측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다. 이스탄불 뒷골목에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터키 내 난민들 안 받아들이면 집단 서방과 미국이 제재하겠다고 협박하자 경제력이 바닥 상태인데다 미국의 경제 제재까지 받고 있는 터키는 울며겨자 먹기로 난민들을 받아들인 꼬라지가 이것이다. 난민은 서구 놈들이 발생시켜 놓고 터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니 터키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다. 이 난민 여성에게 터키어로 물어보니 터키어는 전혀 모르고 영어도 못한다. 할 줄 아는 영어는 Give me Money, Thank you, I from Iraq 가 전부다. 일단 아랍어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나도 아랍어는 대학시절 때 공부했고 지금에야 쓸 일이 많이 없어 Speaking은 많이 잊어 먹었지만 Listening 은 가능하다. 이 여성의 남편은 모술에서 미군이 설치한 부비트렙에 걸려 폭사했고 부모님도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지뢰를 밟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여성은 젖먹이 된 딸, 그리고 이제 4살 된 쌍둥이 딸과 함께 터키 가지안테프에 왔다. 터키 정부가 난민들에게 집을 나눠줬지만 당시 터키 동부 가지안테프 대지진 때 그 집마저 붕괴되고 쌍둥이 딸 하나는 무너진 집 벽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딸과 함께 이스탄불로 와서 젖먹이 딸은 얼마 나오지 않은 모유를 짜서 준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 42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다. 이들 중 약 10%만이 난민수용소에, 나머지 90%는 자신이 머물 집을 구해 살고 있다. 그런데 터키는 비유럽 국가 출신 난민에게 적용되는 1951년 제네바 난민 협약의 당사국이 아니다. 따라서 터키는 난민들에게 일시적 보호책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월부터 터키는 노동 시장을 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난민들의 노동시장 진입엔 엄격한 제한이 따른다. 특히 기업이 고용할 수 있는 난민의 수를 종업원 수의 10%로 제한했다. 한편 기업은 난민을 고용해도 고용 당국에 고용 사실을 신고할 유인이 없다. 당국에 이를 신고하면 난민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당국에는 그에 따른 각종 사회 보장 부담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한국에서는 전쟁을 우습게 여기고 호전성을 가진 자들이 천지다. 전쟁은 이렇게 서러운 것이다. 전쟁을 서든어택 같은 온라인 게임으로만 접한 한국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모른다. 전쟁은, 누군가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자연재해도 함께 동반되어 온다. 그것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어쨌든 온다. 보수우파 노인들 중에서 우리가 중국과 가까운만큼 선제 타격이 가능하다는 꿈에서 나올 헛소리를 하는 자도 있다. 중국과 면해 있는 서해안, 대부분 수도권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중국에서 쏘아대는 엄청난 물량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직접 받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들이 저와 같은 꼴이 안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이 6~70대나 먹고 호기롭게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선동하면 그만이지만 도망갈 형편이 안 되는 국민들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이럴 것이다. "빨갱이들을 잡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빨갱이 OUT!" 그러면서 큰일을 위해 나와 상관없는 이웃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 선동은 나팔수처럼 하고 실제로 실행할 어떠한 액션도 몸만 사리며 입으로는 금방 죽이고 척결할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는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들만큼 파시즘스럽고. 전체주의화 되어 있는 집단은 없다.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히틀러보다 더한 독재를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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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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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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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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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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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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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 몇 년전 터키 이스탄불 뒷골목의 이라크 난민 여성을 본적 있다. 젖먹이를 안고 바람 안 들어오며 그나마 따뜻한 뒷골목의 한 켠에서 먹고 잔다. 당시 또한 겨울 때인데 비록 이스탄불의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진 않지만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다. 이는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차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 석유를 훔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IS를 발생시켜 나라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이 난민들은 이라크나 시리아 측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다. 이스탄불 뒷골목에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터키 내 난민들 안 받아들이면 집단 서방과 미국이 제재하겠다고 협박하자 경제력이 바닥 상태인데다 미국의 경제 제재까지 받고 있는 터키는 울며겨자 먹기로 난민들을 받아들인 꼬라지가 이것이다. 난민은 서구 놈들이 발생시켜 놓고 터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니 터키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다. 이 난민 여성에게 터키어로 물어보니 터키어는 전혀 모르고 영어도 못한다. 할 줄 아는 영어는 Give me Money, Thank you, I from Iraq 가 전부다. 일단 아랍어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나도 아랍어는 대학시절 때 공부했고 지금에야 쓸 일이 많이 없어 Speaking은 많이 잊어 먹었지만 Listening 은 가능하다. 이 여성의 남편은 모술에서 미군이 설치한 부비트렙에 걸려 폭사했고 부모님도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지뢰를 밟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여성은 젖먹이 된 딸, 그리고 이제 4살 된 쌍둥이 딸과 함께 터키 가지안테프에 왔다. 터키 정부가 난민들에게 집을 나눠줬지만 당시 터키 동부 가지안테프 대지진 때 그 집마저 붕괴되고 쌍둥이 딸 하나는 무너진 집 벽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딸과 함께 이스탄불로 와서 젖먹이 딸은 얼마 나오지 않은 모유를 짜서 준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 42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다. 이들 중 약 10%만이 난민수용소에, 나머지 90%는 자신이 머물 집을 구해 살고 있다. 그런데 터키는 비유럽 국가 출신 난민에게 적용되는 1951년 제네바 난민 협약의 당사국이 아니다. 따라서 터키는 난민들에게 일시적 보호책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월부터 터키는 노동 시장을 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난민들의 노동시장 진입엔 엄격한 제한이 따른다. 특히 기업이 고용할 수 있는 난민의 수를 종업원 수의 10%로 제한했다. 한편 기업은 난민을 고용해도 고용 당국에 고용 사실을 신고할 유인이 없다. 당국에 이를 신고하면 난민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당국에는 그에 따른 각종 사회 보장 부담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한국에서는 전쟁을 우습게 여기고 호전성을 가진 자들이 천지다. 전쟁은 이렇게 서러운 것이다. 전쟁을 서든어택 같은 온라인 게임으로만 접한 한국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모른다. 전쟁은, 누군가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자연재해도 함께 동반되어 온다. 그것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어쨌든 온다. 보수우파 노인들 중에서 우리가 중국과 가까운만큼 선제 타격이 가능하다는 꿈에서 나올 헛소리를 하는 자도 있다. 중국과 면해 있는 서해안, 대부분 수도권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중국에서 쏘아대는 엄청난 물량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직접 받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들이 저와 같은 꼴이 안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이 6~70대나 먹고 호기롭게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선동하면 그만이지만 도망갈 형편이 안 되는 국민들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이럴 것이다. "빨갱이들을 잡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빨갱이 OUT!" 그러면서 큰일을 위해 나와 상관없는 이웃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 선동은 나팔수처럼 하고 실제로 실행할 어떠한 액션도 몸만 사리며 입으로는 금방 죽이고 척결할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는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들만큼 파시즘스럽고. 전체주의화 되어 있는 집단은 없다.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히틀러보다 더한 독재를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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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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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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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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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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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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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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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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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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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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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