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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9
  •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와 미하일 1세의 통치 시대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Pozarski) 공작은 이듬해인 1613년에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했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All free classes)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이 때는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조선 왕조에 해당하고 광해군 시기로 생각된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Ⅳ세의 첫 번째 황후의 오빠의 손자이다. 그는 최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친 필라레트 로마노프(Filaret Romanov)가 돌아와 1613~1633년의 기간에 공동차르(Cotsar)로 선언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국민군과 그리고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 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국민과의 협조를 통한 통치보다는 모스크바 대공국 때 굳어진 전제 정치에 의존했다.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왕조 탄생의 토대로 자리 잡았던 국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지만, 모스크바 귀족 가문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로마노프 가문의 선조는 ‘코빌라(암말)’ 라는 별칭을 가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Andrei Ivanovic)이다. 그는 1347년 벨리키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공후였던 시메온 이바노비치 고르디(Simeon Ivanovic Gordi)를 위해 봉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손인 표트르 니키티치 자하린(Piotr Nikitic Jaharin),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Milkail Piodrvic)의 부친인 총주교 필라레트(Pillaret)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부칭에서 ‘로마노프(Romanov)’라는 성(姓)을 정한 것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노프 가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면서부터이다. 1547년 로만 유리예비치의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Romanov Jaharina)가 이반 4세의 왕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류리크 왕조가 절멸하고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로마노프 가문은 왕권 경쟁의 후보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613년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표트르비치 로마노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전제군주제의 기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섭정이나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시기도 있었고, 재능 있는 인물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 사안은 군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국가 발전의 행로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제정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이 ‘아버지 차르’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의지하는 가부장적 국가형태가 조성되었다. 전제정치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정치 체제를 지탱한 것은 관료제였다.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위해 복무할 관료들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전제정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다. 이들 귀족 관료들의 부패와 피지배 계층과의 갈등은 원활한 국가 통치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시기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정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왕조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관료제 확립은 국가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유럽러시아 지역과 예니세이 강 서안의 서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대외 정책은 이른바 ‘동란 시대’로 알려진 폴란드-스웨덴과의 전쟁과 침략으로 함락된 북서부 지역의 영토 회복과 남부 국경 지대의 국방력 강화에 집중되었다. 초기 통치자들은 군사력 강화 정책을 통해 스웨덴, 폴란드에 대항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척은 성공적으로 이끌어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한편 이러한 로마노프 왕조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 확보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북서부의 스웨덴, 서부의 폴란드, 남부의 오스만투르크와의 관계는 러시아 대외 정책에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였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러한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러시아를 유럽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 1세는 오스만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아조프 해 연안 지역과 잉구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란디야(Esttandia), 리플란디야(Liplandia) 지역 등 러시아 북부 및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 2차 투르크 전쟁의 승리로 흑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세 차례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함으로써 벨로루시 및 발트 해 지역의 영토들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東) 그루지야(1801년), 핀란드(1809년), 베사라비야(Besarabia, 1812년), 아제르바이잔(1813년), 폴란드 왕국(1815년)을, 알렉산드르 2세는 중앙아시아, 북카프카스, 극동, 바투미 등을 병합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존속했던 300여 년 동안 러시아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으로 발트 해와 흑해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볼 때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이래로 정교회는 모든 러시아 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상의 관습에서부터 교육, 문학, 예술들, 특히 회화, 건축, 음악, 정치에 이르기까지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전제 체제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정교회를 특별히 중요시하며 통치의 기제로 활용했다. 특히 차르였던 알렉세이(Alexei) 시대에는 니콘의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권에 대한 세속 권력의 우월성을 확인했고, 표트르 1세는 신성종무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이었던 교회 행정 체계를 정부산하 기구로 편입시켰다. 교회와 그 수장인 총주교의 권위를 세속 권력에 복속시킴으로써 군주의 위상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실질적인 정교 왕국이자 간접적인 제정일치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전개 과정에서 러시아는 평화적 교류나 물리적인 충돌을 통해 다양한 이민족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유입된 타 문화의 요소들이 고유의 슬라브적 문화를 기반으로 융합됨으로써 러시아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의식주의 물질적 요소에서부터 언어나 관습의 제도적 요소, 종교적 관념과 가치관의 정신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융합의 흔적들은 현대 러시아의 삶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수입된 서구의 문화는 러시아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 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이러한 성과는 문화 예술의 강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였으며 역으로 모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어 다른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 스타니슬라브스키와 체호프의 사실주의 연극 미학, 디야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말레비치와 칸딘스키, 샤갈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은 로마노프 왕조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가 서유럽 가문과의 혼인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는 차르 미하일 1세의 통치 시기였다. 차르의 부친 필라레트는 국제정치 속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왕가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실제로 서유럽, 북유럽 왕실과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 러시아와 스웨덴 간의 북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외교를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한 후 쿠를리안디야(Kurliandia)로 알려진 지금의 라트비아 서부 지역, 게르만 계 공국들을 점령하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표트르 1세와의 회동을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 했다. 그리하여 표트트 1세와의 회동을 요청했고, 1709년 10월 마리엔베르데르(Marienberder)에서 만난 두 군주는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약정하고, 그 증표로서 왕실 간의 혼인을 합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1710년 10월 프로이센 왕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표트르 1세의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둘째 딸 안나(Anna)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안나의 언니 예카테리나도 국익의 차원에서 독일 메클렌부르크(Meclinburg) 시베린(Siberin) 공국의 카를 레오폴드(Karl Leopold)와 1716년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브라운시베이크(Brawnsibeik) 공후 안톤 울리히(Antonio Julichi)와 결혼하여 이후의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 이반 6세를 낳았다.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와 딸 안나도 서유럽의 유력 가문과 혼인시켰다. 첫째 부인 예프도키야(Yevdokiya)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세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처제인 브라운시베이크 공녀 소피아(Sopia)와 1711년 결혼했다. 이들의 아들은 1727년 표트르 2세로 러시아 황제에 즉위했다.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스웨덴 왕 카를 12세의 조카인 독일 고르시테인(Gorsitein) 고토르프(Gotorv) 공후 카를 프리드리히(Karl Pridrichi)와 1725년 결혼했다. 이처럼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유력 가문과의 혼인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성립되었다. 이것은 로마노프 왕조가 유럽의 유력 혈통 속에 용해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직계는 1730년 표트르 2세 사후 단절되었다. 후계와 연관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 이반 5세의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했다.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1730~1740)와 증손자 이반 6세(Ivan VI, 1740~1741)의 재위 기에는 브라운시베이크 가문의 대리인들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통치했다. 1741년 러시아 내부의 정변으로 인하여 제위는 표트르 1세의 후손들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직계 후손들을 가지지 못한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beta Petrovna)는 제위를 자신의 조카인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공국의 표트르 3세에게 물려주었다.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가문은 덴마크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의 직계로 표트르 3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로마노프의 러시아 제위를 계승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명문 가문과의 혼인 전통은 계속되었다. 파벨(Pavel I) 1세는 뷔르템베르크(Biltemberg) 공국, 알렉산드르 1세는 바덴(Baden) 공국,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 왕국, 알렉산드르 2세는 게센(Gesen) 공국, 알렉산드르 3세는 덴마크 왕국, 니콜라이 2세는 게센 공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들 가문과 인연을 가지게 됨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는 유럽 여러 가문들과 혼혈된 가문으로 점점 그 순수혈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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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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