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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0년대를 위한 군 전략, 한국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대폭 증강 필요성 강조
    최근 대전에서 개최된 '에어로스페이스 콘퍼런스 2024'에서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2040년대 한국 공군의 전략적 방향성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KIDA에 따르면,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하이급' 전투기의 비율을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이 제안은 한국이 이미 F-35A 전투기 40대를 도입했으며, 최근 20여 대를 추가 구입하기로 한 배경에 더해, 더 많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KIDA는 국방정책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전략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향후 군의 전략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찬우 KIDA 군사발전연구센터장은 세미나에서 "현재 우리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비율은 주변국에 비해 낮은 편"이라며, 이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미래 전장에서의 공중우세 확보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사이버 및 우주공간 확장, 인공지능(AI) 및 유무인 복합체계의 활용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전투기 430대 운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중 하이급 전투기는 100대(23.3%)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KIDA는 이 비율이 향후 전략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특히 5세대 이상의 스텔스 기능을 갖춘 전투기의 비율 증가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 센터장은 미래 전투기 개발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KF-21 '블록3' 같은 다음 세대 스텔스 전투기의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 6세대 전투기 개발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영국, 이탈리아와 함께 차세대 전투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며, 한국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센터장은 기술력 향상을 통해 전투기 무장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라며, 2040년대에는 유무인 복합전투기가 도입될 경우 유인 전투기 한 대에 두 대의 무인기를 붙이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전통적인 공군 작전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전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KIDA의 이번 분석과 제안은 미래 한국 공군의 전략 방향성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는 국방 전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뉴스
    • 정치
    2024-05-13
  • 테슬라, 슈퍼차저 네트워크 확장 계획에 5억 달러 이상 투자 발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슈퍼차저 충전망 확장에 5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테슬라가 충전 네트워크 관련 부서 직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충전망 확대 속도를 늦추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지 일주일 만의 발표로, 전기차 시장에서의 경쟁 심화와 인력 감축 이슈에도 불구하고 충전 인프라 확장에 대한 회사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머스크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 X에 올린 게시물에서 "테슬라는 올해 수천 개의 새로운 충전기를 설치하기 위해 5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투자는 신규 부지 확보 및 충전망 확장 비용에 집중되며, 운영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주 테슬라는 전 세계적으로 인력을 10% 이상 감축하고, 충전 인프라 담당자들을 대거 해고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중에서도 충전 인프라 담당 책임자 레베카 티누치를 포함한 약 500명의 슈퍼차저 인프라 직원이 해고되었다. 해고 조치 이후 머스크는 신규 충전소 설치를 늦추고 기존 충전소 확장에 집중할 계획을 밝혔다. 이는 테슬라의 충전 규격인 북미충전표준(NACS)을 채택한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국의 대형 정유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미국의 충전 인프라 기업 블링크는 테슬라의 충전망 확장 속도 조절 발표를 계기로 시장에서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BP는 테슬라가 해고한 직원들을 재고용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며, 블링크의 CEO 브렌든 존스는 "테슬라의 속도 조절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머스크는 과거에도 사업 방향을 갑작스럽게 바꾸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2019년에는 대부분의 매장을 폐쇄하고 온라인 판매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건물주들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하고 대신 전기차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테슬라는 전기차 시장에서 충전소 사업을 선도해왔으며, 북미 지역 초고속 충전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EV어덥션에 따르면, 테슬라는 올해 3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한 1526개의 충전포트를 설치했다. 이런 가운데, 테슬라의 독일 베를린 기가팩토리 인근에서는 공장 확장 계획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주가가 약 2% 하락했다. 시위대는 기가팩토리의 확장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 뉴스
    • 경제
    2024-05-11
  • 북한, 영국 외무부 장관 발언에 "우크라이나가 영국 무기로 러시아 공격할 수도" 발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영국 지원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한 영국 외무부 장관의 발언에 발끈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국제문제전문가 심민의 글을 통해 "영국은 유럽 대륙을 전쟁의 화난 속에 깊숙이 몰아넣고 있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부 장관을 비난했다. 심민은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캐머런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심민은 캐머런 장관의 발언을 "호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발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캐머런 장관이 키이우 방문에 앞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음을 언급하며, "미국 상전의 입김이 톡톡히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러시아 영토로 확산되고 다시 유럽지역으로 타번져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캐머런 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캐머런 장관의 언급을 두고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며, "우크라이나 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직접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캐머런 장관은 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군사 지원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의 이 같은 입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체적인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과 러시아의 반응은 영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 뉴스
    • 지구촌
    2024-05-07
  • 이탈리아 G7 정상회의 불참, 대통령실 '이탈리아 결정 존중' 밝혀
    2023년 6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될 예정인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에 대해 대통령실은 이탈리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탈리아는 올해 G7 의장국으로, 아프리카 및 지중해 지역 이슈에 초점을 맞춰 초청국을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은 이탈리아가 자국의 이민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들을 중점적으로 초청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존중한다고 전했다. G7 정상회의에는 의장국이 그해의 주요 의제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국가들이 초청ehls다. 한국은 2020년 이후 세 차례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았으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의 초청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각각 의장국이던 2020년과 2021년에 초청받은 바 있다. 하지만 올해 한국은 이탈리아와 꾸준히 협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청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과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의장국이었던 해에는 모든 초청국을 아프리카 국가로만 구성한 사례를 들며, 올해 초청 결정에 대한 이해를 당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G7 플러스 외교 전략이 실패했다며 외교 정책 기조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당 대변인 강선우는 "윤석열 정부는 국제 정세를 논의할 중요한 자리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과 다름없다"며 정부의 실패한 외교·안보 정책을 성찰하고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로 정책 기조를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대통령실은 G7과의 협력이 정상회의 참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중 상시적으로 국제 현안에 대한 공조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은 올해 다수의 G7 장관급 회의에 이미 참여하였거나 참여할 예정dl다. 또한,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에서도 한국의 G7 참여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한국의 G7 참여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대통령실은 덧붙였다.
    • 뉴스
    • 정치
    2024-04-21

과학 검색결과

  • 21년 만의 강력한 태양 폭풍, 한국에서도 오로라 포착
    최근 21년 만에 발생한 가장 강력한 태양 폭풍으로 인해 한국의 밤하늘에서도 오로라가 포착됐다. 14일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에 따르면, 지난 12일 새벽 강원도 화천군에서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잇따라 오로라 촬영에 성공했다. 오로라는 태양 표면에서 폭발이 발생하면서 쏟아지는 고에너지 입자들이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극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지구 대기와 반응해 내는 빛이다. 초록색과 붉은색 오로라는 산소 원자가 내뿜는 빛이며, 간혹 보라색 오로라는 질소 분자와의 반응으로 생긴다. 보통 오로라는 지구 자기장의 남북극을 중심으로 고리 모양으로 나타난다. 태양 활동이 활발해져 지자기 폭풍이 강해지면, 오로라의 고리도 남북 방향으로 넓어진다. 이번 태양 폭풍이 매우 강력해, 지자기 북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도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었다. 천문연 관계자는 “강력한 태양 폭발이 지구를 덮쳤던 2003년 10월 30일, 보현산 천문대에서도 붉은색 오로라가 포착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번 태양 폭풍의 진원지는 지구 16배 크기의 흑점 3664로, 현재 태양 서쪽 끝으로 이동하면서 활동성이 다소 완화된 상태다. 그러나 흑점이 태양 뒷면으로 완전히 이동하기 전까지는 간헐적으로 폭발 경보가 발령될 가능성이 있다고 천문연은 밝혔다. 흑점이 태양 뒷면으로 이동하는 시기는 현재 15일로 예상된다. 천문연은 또 지난 주말에 발생한 코로나 물질 방출(CME)이 14일 지구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됨에 따라 추가적인 지자기 교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태양 폭풍은 G5 등급으로, 이는 2003년 10월 이후 처음 발생한 가장 강력한 등급이다. 강력한 태양 폭풍은 영국, 폴란드, 시베리아, 몽골 등 고위도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플로리다, 하와이, 멕시코 등 저위도 지역의 밤하늘에도 오로라를 수놓았다. 태양 폭풍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내비게이션 기술을 사용하는 트랙터가 작동을 멈추는 등 작은 사고들이 발생했으나, 우려했던 대규모 통신 및 전력망 장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강력한 태양 폭풍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천문연은 앞으로도 태양 활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태양 폭풍으로 인한 지구 환경의 변화를 예의주시할 계획이다. 이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태양 폭풍에 대비하고,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이어질 전망이다. 이번 태양 폭풍의 발생과 오로라 관측은 천문학적 사건으로,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오로라를 촬영한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사진이 화제가 되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천문연은 “이번 오로라 관측은 태양 활동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도 태양 활동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관련 연구를 통해 지구 환경의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천문연은 태양 폭풍으로 인한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하며, 관련 기관과 협력해 대비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태양 활동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태양 폭풍과 오로라 관측은 천문학적 연구와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끌어모으며, 태양 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자연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연구하는 노력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5-14
  • 영국 남성, 수술 후 발생한 탈장으로 '임신 7개월'만큼 부풀어 오른 배 호소
    폴 밀햄(45)이 대장 게실 치료 수술 이후 발생한 탈장으로 인해 배가 임신 7개월 만큼 부풀어 오르는 심각한 신체 변화를 겪고 있다고 데일리메일 등 영국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수술 후 두 달이 지나면서 발생한 이 변화로 밀햄은 큰 신체적 불편과 사회적 두려움을 겪고 있으며, 의료진은 현재 그의 상태가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수술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밀햄은 작년 4월 대장에 생긴 게실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그 후 탈장이 발생하여 복벽이 약해지고 지방 조직이나 복막이 덮인 장기가 돌출되었다. 그는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피부가 계속 늘어나 매일 통증을 겪고 있다”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렵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탈장은 복부 내압이 높아지는 임신, 전립선 비대, 비만, 만성 변비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통증이 없을 수 있으나, 진행될 경우 정상 위치로 돌아가지 않고 혈액 순환을 방해하여 괴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는 것이 중요하다. 밀햄의 경우,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현재로서는 긴급한 의학적 개입을 요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밀햄 본인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빠른 수술을 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의료 전문가들은 탈장이 심각한 증상을 보일 경우 즉시 수술을 권장하고 있으며, 수술 후에는 감염이나 신경 손상과 같은 합병증에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탈장 예방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과 적절한 체중 유지,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며, 무거운 물건을 자주 들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밀햄의 사례는 탈장의 복잡성과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4-26

칼럼 검색결과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上편)
    유고슬라비아가 1992년에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2개의 공화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마침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이 때도 국민투표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 때의 국민투표는 예상과 다르게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기초하게 된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면서 신(新) 유고슬라비아로 불리게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 불리며 국제 무대에 정식 승인되었다. 몬테네그로 지역은 1992년부터 벌어지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내전 등을 피해갈 수 있었으며 이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달리 실제 전쟁을 통한 이해 당사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신 유고슬라비아 구성 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지지했던 국가였다. 이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2년 국민투표에서도 96%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잔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은 독립파는 국민투표를 보이콧 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열할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의 전쟁과 보스니아 내전, 이후에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서 신유고슬라비아가 매우 실망스런 행적을 보이게 되면서,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피폐해지자, 몬테네그로의 독립파들은 이를 근거로 세르비아와의 연합파를 공격하는 테러를 저지른다. 이 사건은 티토그라드 (현 포드고리차)의 국영 우체국과 인근 경찰서에 총격을 벌이는 테러를 저지른 것인데 이로 인해 보스니아 지역에 비해 치안이 그나마 안전한 몬테네그로으 민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지지했던 모미르 불라토비치(Momir Bulatović) 몬테네그로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를 받아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국민들 다수가 독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독립파의 중심 인물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는 세르비아를 버리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밀로셰비치 정권과 협력했으나으로 밀로셰비치 정권의 지지가 약화되고 블라토비치도 지지력이 떨어지자 독자행동으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다. 사실 몬테네그로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세르비아인과는 같은 민족이었으며 같은 문화도 향유했다. 그러나 여기에 민족적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크로아티아와 같이 이탈리아와 가까이 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왕국의 직할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즉 정체성이 세르비아와 이탈리아, 양 국가 및 민족에서 혼선이 빚어진 셈이다. 특히 몬테네그로 남부, 쉬코데르 호수 일대 거주민들은 알바니아계가 많았기에 사실상 몬테네그로의 정체성은 어디에다 특정지어야 할지 명확한 결론조차도 없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때는 세르비아인이어도 몬테네그로에 살면 몬테네그로인이라는 식으로 인구 조사에 응답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딱히 세르비아인이라는 판단보다는 지역적, 속지주의적(Territorial principle)인 입장을 상당수가 고수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본인 정체성을 세르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몬테네그로 인구의 30% 가까이 되지만 나머지는 속지주의적 정체성을 고수해 몬테네그로 토착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집단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자주 교역하던 이탈리아의 관계도 끊기게 되었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보다 상황이 더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한 집단 서방의 제재는 몬테네그로 내 지독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디에도 지원 받지 못한 채,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 때 주카노비치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내세운 것은 그동안 사용해 온 화폐인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신유고슬라비아는 1994년부터 화폐 개혁을 통해 노비 디나르(Novi Dinar)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예 고정환을 독일 마르크로 정하고 통화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방지했다. 그로 인해 통화가 부족하여 한동안 이로 인해 은행 앞 집단 시위로 혼란을 가져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 인플레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한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무려 500,000,000,000디나르 지폐까지 나오고 두 달 뒤에 정상적으로 화폐의 단위를 내렸지만 이 또한 20일 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디나르 화폐를 다시 도입하는 등, 혼란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지라 주카노비치 총리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1996년 주카노비치는 독일로 가서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주카노비치는 몬테네그로의 화폐 단위로 독일 마르크를 전격으로 도입하기로 합의를 보고 독일을 위시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이에 지지의사를 밝혀오면서 결국 독일 마르크가 몬테네그로의 고정 화폐가 된다. 블라토비치 대통령과 세르비아계는 이에 집단반발했다. 세르비아계는 주카노비치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배경으로 신유고슬라비아 자채를 해체시키며 근간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주카노비치의 조부인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의 전쟁 범죄 이력까지 공개하며 "아직도 나치를 끊지 못하고 있다(Још увек не може да престане да буде нациста)."며 적극 비난했다. 이 얘기가 나온 이유는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트니치에 속한 상태에서 수많은 유태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체트니치 소속의 중장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몬테네그로를 점령했던 당시 고위 협력자였다. 그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오그라드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체트니치에서 활동 이력은 연좌제처럼 대를 이어 손자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유고로부터 독립에 찬성하는 독립파들은 독일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항변한 불라토비치 대통령은 1998년에 총리 주카노비치에 의해 밀려나 대통령을 사임했다. 주카노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최악인 상태에서 이를 해결해 보기 위해 산업 민영화 정책을 시행했다. 1998년 당시 가치가 45억 달러로 추정되었던 몬테네그로의 산업은 결국 총 7억 3500만 달러에 매각되었고 이 매각한 개인 자본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다시 사들였다. 결국 몬테네그로의 산업 민영화로 인한 국고 충당은 영국과 미국, 독일에게 대부분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1998년에서 2014년 사이에 민영화된 198개 기업 중 176개가 파산했다. 국가 노동력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고 빈곤이 극에 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는 동안, 주카노비치의 재산은 눈덩이 불듯 불어났다. 2010년 5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주카노비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도자 20인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그와 같은 부의 축적이 시작된 것 또한 1998년 몬테네그로 산업 민영화 사태 때부터였다. 인디펜던트에 의하면 주카노비치의 약 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부의 출처를 "신비적"인 일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니 얼마나 급격히 재산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주카노비치의 민영화 과정에서 그의 친인척들과 그와 유착된 몬테네그로 마피아들에게 많은 국가 자산이 넘어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몬테네그로의 검은 돈은 돌고 돌아 판도라 페이퍼스(Pandora papers)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같은 상황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다를게 없다. 다만 지금은 몬테네그로에서 그러한 악습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8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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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여러분들이 모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진다. 이에 국가 내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사이에 민족주의 감정이 대두되면서 혼란이 찾아오는 위기가 계속 있었지만 요시프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국가 해체로까지 이어진다. 티토는 그동안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오며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코소보에서 폭력 사태가 분화하기 시작하면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티토가 후계자를 직접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의 1당 독재 체재를 유지하면서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된다. 그러나 이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생전의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인한 수정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미소 냉전으로 구분되던 양 진영에서 벗어나 제 3세계를 주도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 진영이든, 공산 진영이든 어디든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티토의 이러한 제3 세계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자유 세력들과 공산 세력이 공존했던 곳이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방과의 경제 교류와 문화 교류 등등으로 인해 이미 자유 진영과 상호 신뢰를 구축해 놓았다. 반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나 중공, 북한과의 연계성을 통해 그들과 가까웠고 보스니아의 경우,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알바니아, 터키와 관계가 깊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까지 교역이 가능했던 국가였다. 이러한 체제들을 모두 수용해서 하나로 묶었던 것이 티토였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은 유능한 지도자가 있을 때, 뜻을 함께하여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그 유능한 지도자 죽고 없어진 상황에 사후 대책도 수립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이라면 서서히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즉, 연방을 걷어 치우고 각자도생의 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발호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개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는 기존의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슬라브권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그 민족주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구심점은 제각기 달랐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구심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이탈리아계 슬라브인의 비중이 80%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군이 달마티아 해안가와 슬로베니아 본토를 장악하면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군이 철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어도 이들 이탈리아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며 남슬라브계와 혼혈한 2~3세대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되어갔다. 이렇게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이탈리아계가 되어가다보니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와는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형태를 띄워갔다. 게다가 종교도 카톨릭이고 슬라브계가 주축인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는 정교회였다. 단 보스니아의 경우, 알바니아계와 터키계, 무슬림으로 개종한 슬라브계가 뒤섞인 이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다보니 이 이질적인 형태의 민족주의에 구심점은 종교가 자리잡으니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세르비아계를 늘 도와줬던 소련의 경제가 휘청였다. 소련이 어려워지니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자 여기에 슬슬 자유진영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라자르 콜리셰프스키(Лазар Колишевски)가 티토를 승계하게 되자 여기에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의 정권 중앙집중화를 노리고 콜리셰프스키의 하야를 요구하자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자는 국가의 지방분권화를 원하며 자그레브와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서서히 분할의 조짐이 보이자 집단 서방과 미국은 냉전 시기 막판에 승기를 잡으며 공산 진영에 대한 우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내정에 서서히 개입하게 된다. 우선 당시 집단 서방은 프랑스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슬로베니아 대표를 맞고 있는 밀란 쿠찬(Milan Kučan)을 만났다. 류블라냐에서 벌어진 미테랑과 쿠찬의 회동은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슬로베니아가 이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다음으로 접촉한 인물이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인의 처우에 대해 비판하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가 티토의 눈 밖에 나서 투옥된 인물이다. 투지만은 이때부터 독립 크로아티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투지만은 우선 캐나다로 가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만났다. 이 때 미국, 캐나다, 영국의 정치인들과 접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게 되면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고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들을 차례대로 독립시켜 소련을 붕괴시키는 작업에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동유럽 내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들을 들 수 있다. 특히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 강력한 태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약화되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해 자신들이 발칸에 진주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독립국가연합을 서서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이다. 티토가 만든 제3 세계의 정책은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이후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온 투지만은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도 민주화를 결정하고 각 공화국 별로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흐름에 맞춰 1989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창당하여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때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들의 지원을 받았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또한 미테랑의 지지를 받아 1986년 5월에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표가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하며 독립전쟁을 벌인다.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국토방위군 등으로 게릴라 전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유고 연방정부는 고작 개전 10일 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10일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유고 연방군은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도 없었던 것도 있지만 크로아티아 내에서 투지만을 중심으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후방에 문제가 생겨 연방군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분리 독립을 꾀했고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 결과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 찬성이 결정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같은 날인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이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다. 1991년 7월 10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17일까지 독립 선언을 연기한다는 조건 하에 일단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중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보스니아에서 터졌다. 앞선 1년 전 보스니아는 최초로 다당제 총선이 열었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의회에서 공산당이 축출되고 3개 민족을 기반으로 한 민족 정당이 의회를 장악한다. 이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선언을 하는 가운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계속 유고 연방에 존속해 있으면서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계속 존속할 것인지, 그리고 보슈냐크 무슬림들과 보스니아에 남아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독립을 요구했기에 독립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10월 24일, 세르비아계를 기반으로 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국민의회 위원이 사라예보의 국민의회를 포기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의회로 합류하면서 1990년부터 시작된 3개 민족 연합 통치는 완전히 붕괴했다. 1992년 1월 9일에 세르비아계 의회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로부터 독립했고 1992년 8월에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스니아는 이후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지에 대한 결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열었다. 이 국민투표는 대다수의 세르비아인이 보이콧하면서 일방적인 형태로 변했고 99.7%로의 득표율로 독립이 확정되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2일에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인들로 인해 보스니아 전국에서 긴장이 조성되었고 1992년 3월 7일 세르비아 민병대가 카프리냐 주위의 보스니아인-크로아티아인 마을을 공격하야 살인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3월 15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Bosanski Brod)와 보스니아인 마을 고라즈데(Goražde)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소규모 공격이 자행된 이후 3월 19일에는 아드리아해 항구인 네움에 세르비아계 포병들 포를 사격하여 공격이 이어졌고, 24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 30일에는 비옐리나에서 전투가 시작되면서 4년에 걸쳐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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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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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슬라브계 인종끼리의 이른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
    183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포고딘(М. П. Погодин, 1800~1875)에 의해 작성된 논문 <서구의 중요성>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슬라브족의 우월성과 모든 슬라브족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 범슬라브 민족주의 시작이다.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모든 슬라브족들을 하나로 합쳐 외세를 방어하고 슬라브 민족만의 전통과 사상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국내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팽창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로 평가해 왔다. 19세기 들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들이 독립하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땅과 인구가 줄어들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새로 생겨나는 슬라브 민족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밀착하여 새로운 친러 세력을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큰 이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독립하는데 있어 같은 계열의 민족이자 강대국인 러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유리한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이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면서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같은 슬라브이기 때문에 도운 것도 있었지만 발칸 반도의 자원이나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항 확보의 정당성, 서구로 나아가기 위한 러시아의 패권 진출 등 다양한 플렌도 존재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계획과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이 원하는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짐에 따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서남부에 유고슬라비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최초로 주창했던 미하일 포고딘은 러시아의 지도하에서의 슬라브 민족들의 통일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정당성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Николай Данилевский, 1822~1885)는 슬라브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설파하여 범슬라브주의의 교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1867년에 모스크바에서 범슬라브계 민족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러시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 민족들이 반발했고 이와 같은 급진적 운동은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한 러시아인들은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영토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라브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욕설하고 폭행 등의 물리적인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 등은 옛 슬라브인들의 영토이고 이들을 학살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영토라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국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 슬라브족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정체성이 슬라브와 다르고, 스스로 슬라브가 아니라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더불어 스스로를 슬라브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범슬라브 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범게르만주의에 필적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인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오스트로 슬라브주의(Австрославиз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얀 콜라르(Ján Kollár, 1793~1852)나 파벨 샤파리크(Pavel Šafárik, 1795~1861) 등이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언어적의 유사성과 문화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체코의 프란치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가 제국 내 슬라브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여 1848년에는 모스크바 범슬라브계 회의보다 앞서 프라하에서 최초의 슬라브계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1814~1876)이 참가하기도 했다. 뒤이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1860년대의 러시아에 범슬라브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에서 촉발된 이유는 크림 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이민족인 영국,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에게 그 자존심이 꺾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패권을 함께 다투고 있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영국, 프랑스에게의 패배는 소련의 해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때부터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설은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슬라브인을 결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주의와 애국심이 범슬라브주의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 극우적인 발상의 범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 하나의 이념으로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대함과 그에 따른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게 되었고 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범게르만주의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것은 범슬라브주의 주창하는 자들의 특성이 자국민 슬라브족이 우선이라는 국가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개념의 민족주의는 국가 외적으로까지 분포한 민족개념에서 국가론으로 축소한 것인데 같은 계통의 민족이어도 국가를 벗어나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이는 서방의 민족주의와 다르게 슬라브권 국가들은 전제 군주가 통치해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민족이나 같은 슬라브계여도 무조건 학살하고 보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범슬라브주의이지만 동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론이고 무조건 국가가 먼저이다. 국외는 어찌됐건 동맹국이 아니면 동류의 민족이어도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을 없애는 “제노사이드”를 통해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싹인 자신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아 이식하여 번성케 해야 한다는 급진적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인종들 중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당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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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아프가니스탄 전통의 악습인 남색 바차바지(Bacha bāzī)
    2002년도 더 타임스와 2010년에 제작된 영국 타큐멘터리 영화 The Dancing Boys of Afghanistan에서 바차바지(Bacha bāzī)의 악명을 고발하면서 이 기가 막힌 풍습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악습인 이 바차바지는 현재, 평범한 동성애가 아니라 명백한 소년 성착취라 볼 수 있다. 이 악습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 무희들이 여성과 같이 화장을 하고 춤추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런 아름다운 남성을 선택해 동성애를 즐기는 환락의 풍속도 존재했다. 특히 테베에서는 동성애자들의 군대인 "신성군단"이 존재했다. 시민 계급인 성인 남성과 곧 시민이 될 청소년이 동성애를 하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있었고 이들은 현대적인 동성애자와 달리 연인 관계인 동시에 성인 남성이 스승의 역할을 맡아 곧 시민이 될 소년에게 시민으로서 사회적 교양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제자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의해 그리스가 정복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하게 되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도 석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각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지배자로 하여 거주케하였다. 그로 인해 건국된 국가가 바로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으로 인해 그리스 문화가 중앙아시아 대부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 박트리아와 서역 월지의 후예들이 혼혈한 종족들이 흉노의 침공으로 월지가 멸망하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 전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는데 이 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도 함께 전파되었던 것이다. 남성 무희가 여성처럼 화장을 하고 여성복장을 하고 춤을 추게 된 문화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차바지는 페르시아어로 '소년(bachen)' '놀이(bazi)'라는 어휘의 합성으로, 노는 소년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소년 무용수들을 뜻하고 있다. 주로 9~15살 사이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집해서 댄서로 키워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장을 하여 공연을 시킨다. 이슬람의 종교법으로 인해 여자가수들을 데려다 공연시키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 대용품으로 투입시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들 청소년 무용수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해 성매매나 성착취, 납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폭행이나 강간 사건을 당해도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더불어 이슬람 원리주의로 인해 동성애가 멸시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들을 상대로 성관게를 가지거나 연애를 하는 것은 서로 모른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남색, 전통적으로 이를 향유하는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지역의 토호나 유력 군벌들이었고 이슬람 모스크의 이맘들도 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게이들은 명예살인을 당하거나 테러, 징역형과 같은 법적인 처벌을 당하기 십상인데다 설사 처벌에서 면죄된다 해도 주변 시민들에게 살인위협을 받거나 폭력에 노출되고, 더불어 집단 따돌림도 함께 동반할 수 있기에 서로 모른척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력자나 부유한 자들은 뇌물로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동성애자들은 권력자와 부자들이 동성을 취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데 자신들은 돈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기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착취 관습에 대해 근절하려고 오랜 기간 동안 노력해온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칸국, 시르 알리 칸 시절인 1872년부터 1873년까지 일시적으로 금지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보호국이었던 영국인들이 바차바지 풍습에 대해 기록을 남겨 화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에 바차바지들을 성매매하는 풍습이 다시 재확산되자 미국 측에서도 이를 근절하려 했지만 현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인해 없애는데 실패했다. 이와 같은 바차바지로 일하는 청소년들은 나이가 들면 인기를 잃기도 하였고 그에 따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차바지 중개업자를 일하면서 다른 바차바지들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대를 물려 악습을 이어주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리고 남자와의 성매매로 생활을 연명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트랜스젠더와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더라도 바차바자로 일하는것 자체가 남자에게 몸을 판다며 멸시당하는 일이고,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워 이중적인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탈레반의 주요 개혁 과제 중 하나가 바차바지의 타파였다. 탈레반의 정당성은 샤리아 율법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바차바지는 샤리아가 금지하는 동성애와 사치, 향락 모두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탈레반이 상대한 무자헤딘들 가운데도 바차바치를 사들여 향락을 즐기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도 사실인지라 악습을 타파하는 것이 지지층 확보를 위한 정책으로 비교적 잘 이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레반의 집권 시기 바차바지는 양귀비와 같은 마약의 재배와 함께 엄격하게 금지되는 범죄였으며, 이와 같은 행위들이 발각되면 당사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들이 혐오한 것은 아동 성범죄자가 아니라 동성 간 성행위였고, 그 때문에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성착취 피해자인 아이만 처형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서 바차바지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탈레반이 축출되고 나서 나타난 보상심리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역 사회 곳곳에서 재유행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말단 군경들 사이에서도 권위와 남성의 상징이으로 자리 잡아 즐기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이러한 악습이 아프가니스탄의 대중들 사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누구 하나 이 풍속을 즐긴 것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2017년에 법률이 개정되어, 바차바지는 엄연한 성폭력 범죄로 규정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영상들을 보면 바차바지들이 여전히 밤 무대 일에 종사하며 돈벌이를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다. 그렇지만 2021년에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그 이후 이러한 악습이 근절될 일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공화국 시기에 구축해 놓은 인프라들을 탈레반들이 모두 원상태로 돌린데다가, 식량 난으로 인해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장기 매매와 신생아 거래 등의 비극도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고작 매춘이 사라질리가 만무하고 바차바지도 근절될리도 없을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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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최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후예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크로아티아의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는 지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승리했고 여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Socijaldemokratska partija Hrvatske)의 세가 강하다. 게다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정치적인 실권은 없지만 친러시아 성격을 갖고 있어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중국 기업을 끌어들여 일대일로 아드리아 해 사업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화해 구도를 열어가기 위해 접촉 중인데 곧 세르비아를 방문할 시진핑 주석이 오는 시기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중인듯 싶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바는 없다. 이에 크로아티아 극우세력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자그레브 내에서 연일 시위를 열고 있다. 이에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우스타샤의 후예라고 비난 했고 플렌코비치 총리를 "파벨리치의 아들(Потомци Павелића)"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에 자그레브에서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우스타샤의 표어를 앞세워 반러, 반중, 반세르비아 정서를 강화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반 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면서 철저히 극우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카톨릭이 섞인, 종교 전체주의(Religious Totalitarianism)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이 강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도 "고대 로마제국의 영향을 살리겠다(Faremo rivivere la gloria dell'antico Impero Romano)"는 극우주의적 표어로 선전, 선동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표어 제작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실상 우스타샤는 무솔리니의 자금지원까지 받아서 활동했었다. 특히 우스타샤의 창설자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889~1959)는 무솔리니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 및 달마티아의 병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 프랑코프치(Frankopci)에 입당했는데 당은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가 지도하고 있었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는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이해(Comprendere il ruolo degli italiani nell'impero coloniale italiano)"라는 제목에서 “Illuminano il mondo con la loro arte, insegnano con la loro conoscenza e forniscono una forte organizzazione nazionale nel nuovo territorio attraverso le loro capacità e abilità di governo (그들의 예술로 세상을 밝히고,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며, 그들의 통치 기술과 능력을 통해 새 영토에 튼튼한 국가 조직을 마련할 것)”이라 주장했었다. 이것을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라고 한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여기에 박수치고 있었던 인물이고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이를 크로아티아의 실정에 맞게 시도하고자 했던 인물인 것이다. 프랑크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파벨리치는 프랑크 밑에서 개인 비서 역할을 했고 1927년 자그레브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무장단테 조직인 우스타샤(Ustaša)를 탄생시킨다. 우스타샤(Ustaša)라는 이름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인 'Ustati', Bставать (일어서다)의 슬라브어인 Usta, 중세 이탈리아어인 Scalatia (오르다의 중세어)를 합성해 만든 단어다.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반란(Pobuna)"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이들은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우스타샤의 표어였다. 이같은 구호는 나치 독일의 'Sieg Heil'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면서 독립한 세력에 가깝다. 본래 남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원하고 있던 세르비아와 협력해 크로아티아인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가 위협당할까봐 두려워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남슬라브의 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란을 주도했으며 결국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조직을 옮겼다. 역시 이들은 이탈리아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이후의 얘기다. 한편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알렉산데르 1세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내의 경제마저 파탄에 이르자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시위가 빗발치게 되고 파벨리치는 이를 이용해 알렉산데르 1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1세는 프랑스와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를 방문한다. 프랑스 외무장관이자 총리를 역임했던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과 회담을 진행했다. 한편 파벨리치는 불가리아의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손을 잡고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을 의뢰하게 된다. 이 때 의뢰를 받은 인물이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 1897~1934)이다. 체르노젬스키는 회담장에 뛰어들어 알렉산데르 1세에게 한 발, 장 루이 바르투에게도 한 발의 권총을 발사했고 알렉산데르 1세는 그 자리에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했다. 한편 장 루이 바르투는 국왕을 지키려다 팔에 총알이 관통했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바르투의 경우, 빨리 지혈했으면 살 수 있었지만 동맥에 총을 맞은데다 그걸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병원에 옮겨진 지 1시간 뒤에 사망했던 것이다.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체르노젬스키가 의뢰를 받은 것은 알렉산데르 1세 한 명이었다고 한다. 즉, 바르투가 죽은 것은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 파장은 엄청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우스타샤의 소행임으로 밝혀내고 파벨리치의 소환을 이탈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마무리했으며 그 마저도 3개월만에 풀려났다. 사실상 무솔리니가 풀어준거나 다름없는데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독일로 넘어가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히틀러에게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숙청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파벨리치는 자신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을 세우게 된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나치와 파시즘이 교합된 괴뢰국이었고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 왕조 방계인 사보이아오스타(Duca d'Aosta) 가문의 아이모네를 국왕 토미슬라브 2세(Tomislav II, 1900~1948)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토미슬라브 2세는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왕이었지만 정작 크로아티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왕위 자체는 일단 수락하였으나, 본인이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병합의 현실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문과 안전 보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이름 뿐인 왕인데 굳이 파벨리치가 자행한 숙청의 피바람을 지켜봐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벨리치는 우스타샤들과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적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살해하고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1/3은 추방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이들은 같은 슬라브계인 세르비아를 학살하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나치 추종 세력 중 가장 악질적인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 집단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집단으로 꼽히고 있는 이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대다수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크로아티아인이나 가톨릭교도인 척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을 총살은 물론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 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의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사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혹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만행은 당시 발칸반도에 주둔하던 나치 독일군들조차도 그 잔혹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자그레브에 위치한 독일 점령군 사령부는 그들의 잔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히려 히틀러에게 우스타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에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이 우스타샤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학살의 만행이 끝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들은 인종청소를 당하다가 나치 독일이나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인종 절멸에서 구해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파벨리치는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을 개정하여 아예 비 크로아티아 시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면서 철저하게 세르비아인들을 솎아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 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자발적 아리아인이 된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1941년 6월 15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에 파벨리치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9월에 파벨리치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Slavko Kvatelnik)를 공식 해임한 이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더불어 1943년에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그는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아인자츠그루펜이나 SS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총 한 번 쏘지 않고 편리하고 쉽게 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업을 열었고 나치 친위대원들이 이를 배워가기까지 했으며 여기에서 배운 아인자츠그루펜은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인 일명 OUN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우스타샤는 민병대들을 이용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22만~5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심지어 당시 카톨릭계는 이들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이들을 고트족의 후예라 하며 선동했기 때문에 학살을 면할 수 있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남슬라브인들 중, 세르비아인이면 모를까 크로아티아인은 고트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편 홀로코스트 수용소 중에도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필두로 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져 있던 것이 30곳이나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민병대 체트니치가 조직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게릴라 전을 벌이며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민병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민병대들은 1945년 1월,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에 흡수되었지만 이미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군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철군했다. 결국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궤멸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피하여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고 해방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망명 중이던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네오나치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우스타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부터의 민족적 독립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일 우스타샤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에 의해 복원된다. 학살 대상은 세르비아 인뿐만 아니라 보슈냐크 무슬림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투지만이 서구권으로부터의 비난 여론을 감수한 끝에 우스타샤를 해산했지만 그 뿌리는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인한 세르비아인 학살은 반 크로아티아 감정을 세르비아 인들에게 남기기 충분했고 현재도 세르비아의 체트니치와 더불어 서로를 증오하는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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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후편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한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에도 그리스에서 반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나 모두 진압에 성공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그리스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리스 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리는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크레타와 모레아를 얻으며 자신의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으며 그리스 독립군에 의해 한시가 급했던 술탄은 알리의 요구를 수용했다. 곧바로 알리는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그리스로 파견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군 내부에서는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끼리의 내전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스만-이집트 연합군과 맞서 전투를 치뤄야 했고 결국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당하고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리스에서 이집트 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 파괴를 일삼았으며 포로가 된 그리스 인들은 모두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아 버렸다.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그리스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그리스 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이집트 인들을 차출해 그리스에 정착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대 열강들이 그리스 독립군의 지지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들 3대 열강들은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그리스의 반란 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 산하의 자치국으로 남기는 내용의 타협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기 직전,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는 열강의 제안을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열강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기에 나바리노(Navarino)에서 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후 열강들의 군사력으로 인해 그리스 일대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을 무장해제시키며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집단 서방 열강들과 러시아는 그리스 민족에게 자결권이 있음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직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추가로 전쟁을 선포하여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술탄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고 결국 얻지 못한 메흐메트 알리는 대신 시리아라도 주고 자신이 맡고 있는 이집트 태수직위를 자손들한테 세습할 수 있게 제도를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단 서방이나 러시아에 몰려 있는 술탄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메흐메트 알리는 1831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알리는 프랑스 장교들을 훈련 교관으로 영입하고 이집트 군의 지휘를 맡긴 상태였다. 이로써 이집트 군은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탄지마트 개혁이 완료되지 않았고 신식군대로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숙청된 예니체리들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이집트 군에게 쉽게 패배한 심각한 졸전이었다. 이집트 군은 여세를 몰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고 오스만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까지 진출했다. 알리를 막아낼 수단이 없어진 메흐메트 술탄은 다급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를 승락하여 아나톨리아로 내려와 이집트 군을 상대했다. 여기에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넣어 완전히 지중해로 내려올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개입하여 메흐메트 알리와 메흐메트 2세 술탄에게 휴전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1833년 오스만 제국은 나라를 보전하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았으나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을 모두 메흐메트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크게 굴욕을 당한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한테 복수하고 상실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지도하는 탄지마트 개혁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와 같은 오스만 재국의 대대적인 근대화에 오스만 제국은 조금씩 근대적인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는 오스만과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다시 불화가 시작되었고 휴전을 맺은지 6년 후인 1839년 근대화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한 메흐메트 2세는 8만 대군으로 시리아 침공을 지시한다. 그러나 오스만 군이 완전히 근대화 되어 서구 열강처럼 강군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오스만 군은 헤지브 전투에서 4만여 명의 이집트 군에게 대패했고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함대 전체가 알리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는 홧병으로 쓰러져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었고 결국 사망했다. 급사한 메흐메트 2세를 승계하여 어린 나이의 압둘메지트 1세가 갑자기 술탄 자리에 올랐고 권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메흐메트 알리는 옛 이집트-시리아 왕국을 재건하여 독립하는 것을 넘어 코스탄티니예까지 정복해 오스만 제국을 승계할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가 지중해로 내려오는 것을 막는 완충국가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와 같은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세력의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개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이던 러시아, 그리고 또 다른 열강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제국까지 이 사태에 개입하였기에 메흐메트 알리에게 시리아 영유를 조건으로 여기까지 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배경을 두고 있던 메흐메트 알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와 시리아 해안을 포격해 붕괴시키고 열강 연합군에 의해 이집트 군이 크게 패하자 결국 메흐메트 알리는 열강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게 된다. 결국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를 반환하고 군대 규모를 축소한다. 그러나 처음 전쟁의 목표였던 이집트 태수 직위의 세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는데 성공했을 뿐, 그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다. 이후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 독립하게 된다. 메흐메트 알리와 그의 후손들은 195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태수(Khediv)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상 한 나라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집트는 이후로도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게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 중 가장 세입이 높은 지역이 남동 유럽 다음으로 이집트였을 정도였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188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게 세금 납부를 중단하였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알리는 1848년 장남 이브라힘 파샤에게 태수 자리를 양위했으나 이브라힘 파샤가 결핵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차남 투순 파샤의 아들인 손자 압바스 파샤에게 태수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메흐메트 알리는 1849년 8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여 시신은 카이로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메흐메트 알리의 생애에 대해 이집트의 경제학자 아민은 강력한 독립국가와 근대화를 달성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의 생애와 공통된 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메흐메트 알리가 이끄는 군사적인 연전연승은 맘루크 왕조의 명군 바이바르스에 필적된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레바논의 역사가 필립. K. 히티(Philip Kindred Hyti)가 주장하기를 19세기 이집트의 역사는 메흐메트 알리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 그 위대함을 평가하기도 했다. 알리는 프랑스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군제, 세제, 행정, 통상, 농업,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많은 개혁을 실시해 이집트를 근대화시켰다. 메흐메트 알리 그 자신도 청결을 중시하고 검소하며,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후일 이집트 왕국을 전복시키고 공화국으로 만든 압델 나세르조차도 알리는 높게 평가했으며, 메흐메트 알리는 현재도 이집트에서 근대화 되기 전, 마지막 불꽃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역사를 떠나 객관적인 평가로 볼 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경쟁과 중동 특유의 가문 및 혈족 중심 지배 체제의 기원, 그리고 중동 근대화 과정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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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전편
    제국주의 영국에게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집트에서 전 아랍을 대신하여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이다. 메흐메트 알리는 현 그리스 영토인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카발라에서 알바니아인 상인 집단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타고난 상업 실력으로 숙부에게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카발라의 징세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뒤이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자 숙부에 의해 이집트를 재점령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된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제국군 용병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집트에 온 알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집트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완벽히 평정한 공으로 1805년 오스만 술탄인 셀림 3세로부터 이집트 태수 자리를 임명받게 된다. 이후 알리는 이집트 군벌로 군림해 온 맘루크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만의 절대적 권력을 강화해 사실상 국왕으로 군림했다. 알리는 총독직을 세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반기들어 오스만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로 인헤 이집트의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이집트 역사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이라 여기며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긴 했었으나 오스만과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세력을 겨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맘루크 왕조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맘루크들이 반 자치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직접 파견되어 온 태수한테 반항적으로 굴면서 그들의 세를 과시했고 이에 굴복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켜 태수를 궁지에 모는 등,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아주 큰 근심거리였다. 특히 1760년대 들어서 알리 베이 엘 케비르(Ali Bey El-Kebir)와 그의 부관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가 연이어 국가의 원로 직위인 '셰이크 알 빌라드' (Sheik Al Bilad) 직위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였고, 오스만 조정이 보낸 총독의 권력은 유명무실 할 수밖에 없었다. 1768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알리 베이와 팔레스타인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Zahir Al Umar)는 러시아 제독 알렉세이 오를로프(Алексей Орлов)와 동맹을 맺어 본격적인 반란에 나서기도 하였다. 1772년 알리 베이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축출하고 집권한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는 오스만 정부와 타협했으나 교섭이 이어지는 도중인 1775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부하들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알리 베이의 심복이던 이스마일 베이와의 내전을 벌인 끝에 1778년 연립 정권을 세우며 대놓고 오스만 정부와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맘루크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집트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일은 당시 쇠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786년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반란을 진압한 유능한 제독인 하산 파샤 휘하의 부대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함대를 보내 이집트를 장악했고 이스마일 베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듬해 재차 러시아와의 전쟁이 터지며 오스만 제국 군이 러시아와의 전장으로 철수하자 1791년 무라드 & 이브라힘 베이의 연립 정권이 부활하게 된다. 그런데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와 맘루크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차지했지만 이어 영국군에게 밀려 나폴래옹의 군대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고 영국군 역시 얼마 안 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무주공산이 된 이집트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맘루크가 쇠퇴한 틈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정부와 이집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맘루크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마침 이집트에 와 있던 메흐메트 알리에게 있어 이집트의 권력 공백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알바니아인 용병들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이와 같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이용하여 알리는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토착 지배층이었던 맘루크의 숙청 과정은 먼저 자신이 약탈을 연출했고 이를 통해 울라마, 상인, 민중을 선동해 맘루크를 그들 스스로 추방하게 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 행정부가 임명한 이집트 태수의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이 이끄는 알바니아인 부대를 이용하여 이집트 전역에 조세 행정부를 설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알바니아인 부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동시에 알바니아인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에 자신이 몰아냈던 맘루크들에게 환영식을 열어준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숙청한 후,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몽골군의 침공 이후 이집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맘루크 계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집트 태수가 된 알리는 맘루크와 친 오스만 계파들을 동시에 숙청한 이후 알바니아 인 혈족과 이집트 현지인을 고용해 가신으로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정권을 강화했고, 동시에 자신의 영지가 된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이집트의 주요 수자원인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농민들을 동원해 면화와 곡물 재배에 투입하며, 무역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 차익을 서구식 인프라와 교육, 산업, 보건, 국방 등에 전면적으로 투자하여 이집트를 근대화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서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장교까지 초빙해 이집트 군의 훈련을 실시하면서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코스탄티니예의 오스만 중앙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에게 세금을 바쳤다. 비록 한 때 콥트어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면서 오스만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알리의 군사력과 이집트에서 코스탄티니예로 들어오는 안정된 세입이 있었기에 알리를 용인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이집트의 성과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오스만 행정부도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지만 이집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메흐메트 알리의 강압적인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일 강 정비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관세로 이집트의 산업을 보호하며 성장시켰으나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강제 동원된 자들이라 이들의 원성은 실로 대단했다. 의무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리는 반인권적인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으며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력의 뒤에는 인구의 약 2.6%를 열악한 처우의 군대로 강제로 동원하는 등, 비인간적인 징병까지 존재했다. 징병 명령에 대해 저항하기라도 하면 메흐메드 알리는 이들을 유혈 진압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심지어 병역을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모아 장애인 부대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게 되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4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와하브파의 등장은 칼리프 칭호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가까운 이집트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는 메흐메트 알리에게도 충분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또한 오스만 정부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오스만 정부의 호의를 얻어 정치적인 입지를 견고히 구축할 수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미 쇠퇴를 시작한 오스만 제국이 일개 오지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자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오스만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공백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불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의 명령을 받들어 와하브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알리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이브라힘 파샤는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곧바로 이집트 진압군은 사우드 가문의 근거지인 네지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메흐메트는 후일 반란의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 여에 걸친 추격전 끝에 사우그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완전히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조용히 혈통을 이으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우드 가문은 이집트에 대한 원한이 강한데 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헸다. 당시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음 공격 목표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했으며 손쉽게 제압이 가능한 곳이었다. 1820년 알리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 군은 센나르 술탄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되었고 이집트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수단도 함께 영국의 식민지로 합병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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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 인도 구자라트계의 출현과 성장의 역사, 문화인류학적 분석
    대략 350,000,000명의 구자라트 족이 인도 중앙의 서부 지역 전역과 구자라트 지방에서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구자라트 지방은 인도에서 가장 산업화 된 지방의 하나로써 이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무역과 관광 산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하였다. 비폭력적인 힌두교의 문화는 힌두교도들이 다른 나라에 지배를 받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도는 이슬람교도, 모굴인, 마라타, 그리고 영국에 의해 지배를 당하였다. 구자라트 족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를 지켜온 민족이다. 그들의 재능과 사업수완은 세계 여러 곳에서 부를 축척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자라트 족의 언어는 구자라트어로써 인도계-아리안 계통의 방언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계-아리안 어는 지역과 카스트 제도, 그 공동체에 따라 서로 다른 아주 다양한 계통을 가진 언어이다. 구자라트 지방 70% 이상의 농가들이 면화를 주요 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사탕수수, 담배, 땅콩버터 등을 재배했다. 밀도 구자라트 지방의 주요 작물 중 하나로써 쌀과 함께 습한 지역에서 재배된다. 구자라트 족의 농경 기술이 향상되면서 트랙터를 이용해 농작물의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나이 어린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족한 생산량을 보충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 뿐 아니라 구자라트 지역에서 생산되는 섬유, 플라스틱, 화학, 중공업의 현장에서 어린이 인력이 사용되고 있다. 구자라트 족의 사회 계층은 다수의 힌두교도들과 소수의 자티스(Jatis)로 분류되어진다. 카스트의 제도는 사회적 진출 뿐 아니라 관습, 예절, 습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브라만 계급인 성직자와 학자들은 최상위 계급으로써 세습되며, 빈민 계층의 사람들은 결코 진출할 수 없는 직업이다. 소수의 자티스가 다수의 하층민을 지배하고 있다. 각 계층마다 판차야트(Panchayat)라 불리우는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있어서 사회적 관습을 수호한다. 구자라트 족 힌두교도들의 사회에서 전사와 상인은 브라만에 이어 두 번째의 상류층에 속한다. 바니아(상인, Bania)은 인도에 섬유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최고의 부를 축척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직물을 짜는 직공이었으나 현재는 실크 산업을 예술적으로 발전시켰다. 구자라트 족의 목공 기술과 금속 기술, 황금 세공 기술과 도자기는 유명하다. 목축을 사육하거나 우유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존경을 받고 있다. 노동자와 어부, 기름과 쌀의 생산인, 재단사, 이발사, 가죽 기술자들은 그 다음 계층이다. 그리고 죽은 동물이나 쓰레기를 처리하는 인부들은 최하위 그룹이다. 구자라트 족 가운데 이슬람교도들은 상인과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같은 계층 내부에서만 결혼하며 결혼할 때 신부를 베일로 가려 다른 곳에 분리시켜두는 푸르다(Purdah)의 관습을 지켜오고 있다. 구자라트 족의 88%가 힌두교도이다. 윤회설 또는 죽음과 출생의 반복설은 힌두교리의 중요한 핵심 교리이다. 구자라트 족은 그들의 신에게 헌신하고 사람들만큼 동물을 사랑하고 감사하면 다음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의 위치가 훨씬 더 좋아진다고 믿는다. 구자라트 족 가운데 이슬람교도는 약 6.6%로써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도들의 다신 숭배를 경멸하며 오로지 알라 신만을 섬긴다. 나머지 4%는 힌두교에서 파생된 자인교(Jains) 의 교도들이다. 많은 상인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자라트 족에게 있어 브라만 계급은 최상의 계층으로써 삶의 윤회를 통해서 닿을 수 있는 절대적인 평화의 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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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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