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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 실현 가능성과 기술적 과제
- 북한이 원자력 추진 동력을 갖춘 핵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요 조선소들의 함선 건조 사업"을 직접 지도했다고 밝히며, "당 제8차 대회 결정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실태를 현지에서 파악했다"고 전했다. 이는 북한이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제시한 핵잠수함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이란 원자력 추진 동력을 사용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한 전략 잠수함을 의미한다. 북한이 '전략유도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을 고려하면 향후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을 운영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이미 2023년 9월 '김군옥영웅함'이라는 잠수함을 공개하며 이를 "첫 전술핵공격잠수함"이라고 칭했지만, 해당 함정은 원자력 추진 방식이 아니라 기존 디젤-전기 추진 시스템을 개조한 수준에 불과했다. 김정은 역시 당시 "핵무기를 장비하면 그것이 곧 핵잠수함"이라고 언급해 김군옥영웅함이 엄밀한 의미에서 핵잠수함이 아님을 인정한 바 있다. 그는 별도로 "핵 추진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사진 속 핵잠수함은 김군옥영웅함보다 더 크며 외형적으로 새로운 설계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군옥영웅함이 기존 1,800톤급 로미오급 잠수함을 개조해 3,000톤급 수준으로 확장한 형태라면 이번 핵잠수함은 더욱 대형화된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원자력 추진 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려면 원자로 설계, 핵연료 생산, 방사능 안전 관리, 냉각 시스템 구축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이는 상당한 기술적 장벽을 의미한다. 현재 북한이 자체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군 관계자들은 "북한이 원자로 기술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함정에 적용해 정상적으로 운용하려면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원자로 안전 운용 및 실전 배치까지는 추가적으로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북한에 핵잠수함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러시아의 지원이 현실화된다면 개발 기간이 단축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핵잠수함 건조뿐만 아니라 4,000~5,000톤급으로 추정되는 구축함 또는 호위함 건조 장면도 함께 공개했다. 이는 북한이 해군 전력 강화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북한 해군은 지상군에 비해 전력이 취약하며, 기존 최대 함정이 1,500톤급 압록급에 불과했다. 따라서 신형 호위함이 수직 발사대를 갖추고 다양한 미사일을 운용할 경우, 북한 해군의 해상 작전 능력과 위협 수준이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김정은이 신형 함정 건조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호위함 건조 장면이 포착되었으며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서는 함교의 레이더 장착 부분이 추가되는 등 건조 작업이 진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잠수함 개발에 대한 국내외 언론 보도는 종종 과장되거나 편향된 시각을 담고 있다. 북한이 핵잠수함 건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기술적·경제적·군사적 현실을 고려할 때 실제 운용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은 북한의 기술적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과장된 위협론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는 국민 불안을 조성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대한 분석이 단순한 공포 조성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실전 배치가 가능한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잠수함 개발은 현실적으로 진행 중이지만 기술적·전략적 완성도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간 기술 협력 여부가 핵잠수함 개발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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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 실현 가능성과 기술적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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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생포된 북한군, 한국 귀순 의사 밝혀…정부, 송환 협의 가능성
-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가 한국으로 귀순 의사를 밝히면서 그의 송환 절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 병사는 최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우선 난민을 신청해서 대한민국에 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군 포로가 직접 한국행 의사를 표명한 첫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 병사는 자신을 북한 정찰총국 소속이라고 밝히며 파병 동안 "우크라이나군 무인기 조종사가 다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북한 보위부의 말에 속아 한국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초 북한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훈련받았고 12월 중순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또한, 러시아로 오기 전 3개월 동안 가족과 연락이 두절 되어 부모도 그의 파병 사실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북한군이 한국으로 귀순 의사를 밝히면 우크라이나 측과 협의에 나설 계획이다. 이재웅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군은 헌법상 우리 국민인 만큼 귀순 요청 시 우크라이나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가정보원도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북한군도 헌법 가치에 의해 우리 국민이기 때문에 포로가 된 북한군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며 귀순 의사를 밝히면 우크라이나 측과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김정은이 러시아에 억류된 우크라이나 전쟁 포로와 북한 군인의 교환을 조직할 수 있을 경우에만 북한 시민을 김정은에게 넘겨줄 준비가 돼 있다"며 포로 교환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북한이 러시아에 자국 군대를 파병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러한 교환이 현실이 될지는 미지수다. 북한군 포로가 한국 송환이 이루어지면 정부는 그의 신변 안전을 고려해 특별한 보호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북한이 포로를 변절자로 간주하고 그의 가족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해당 병사의 신변 보호와 정착 지원에 만전을 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안은 국제법, 인도주의, 남북 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복잡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어 향후 정부의 대응과 국제 사회의 반응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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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생포된 북한군, 한국 귀순 의사 밝혀…정부, 송환 협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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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의 체결 이후, 조약문 내용의 분석과 당시 호의적이지 않은 우크라이나 구민들의 나토 가입 여부
- 1994년에 우크라이나 핵 폐기를 조건으로 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의 내용 1.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성, 현재 국경선을 존중한다. 2.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자제한다. 3.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 4.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는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다. 5.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자제한다. 6. 상기 조항에 변경이 있으면 따로 협의한다. 실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의 내용을 보면 2항목에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자제한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양 당위적으로 선언하고 있을뿐 누가 공격하고 누가 지켜주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없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는 어떤 나라든지의 구체적인 방안이나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았을 때 이를 보복하기 위해 어떠한 반사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지, 혹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등에 대한 조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를 두고 국제 법학자들의 해석도 이런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각서가 당사국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기에 후일 민스크 협정을 맺기 전,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고 말았고 미국과 서구에서 또한 러시아의 침공이 있을 시, 우크라이나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지에 대해 전혀 명분이 없는 부분이 되고만 것이다. 이와 같은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의 주 목적으로 나타난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에 대해 '안전이 위협받을 때,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정도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다'리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2009년 당시 NATO에 주재하던 우크라이나 대표 블라디미르 바실렌코(Владимир Василенко)는 우크라이나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를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자체에 큰 권위를 부여하여 이상화하는 우크라이나 국내의 분위기를 비판하였고 각서상에는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이나 안전 보증(Security Guarantees)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외교적 보장(Assurances)이 현재 상태의 완전함을 선언하는 것뿐이라면 보증(Guarantees)이라는 부분은 미래에도 그 완전함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약속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각서에서 말하는 보장(Assurances)이라는 용어는 각서 체결 당시인 1994년에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이 완전함을 확인(Assurances)한 것일 뿐이고 미래에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이 침탈 받는 경우에도 미국과 영국 등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의 완전함을 적극적으로 회복시켜준다는 의미의 보증(Guarantee)은 아니라는 것을 일러둔다. 사실 블라디미르 바실렌코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 NATO측이 NATO 가입을 서두른 이유 역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우크라이나의 미래 안전에 대단히 실효성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위기 의식 때문에도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가 체결되던 시점에서 요구했던 것은 독립 당시 확보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을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인정(Assurances)하는 것이었기에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러시아, 혹은 미국과 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안전 장치인 군사적 보증(Guarantee)이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에서 언급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Assurance)'은 당시 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림반도,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러시아가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안전과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인정(Assurance)하는 맥락에서 삽입한 것일 뿐, 애초에 본 각서의 목적 자체는 장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과 영국에게 지켜달라고 요청하여 체결한 각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둔다.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주민이 비중이 높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국가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에 대해서 그렇게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 올해 2022년 전쟁과 같은 위협을 당시에 느꼈다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른 국가들인 폴란드나 체코처럼 서둘러 나토에 가입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당시 러시아는 옐친 시대 당시 경제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해야 할 명분과 여유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나토 가입 여론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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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의 체결 이후, 조약문 내용의 분석과 당시 호의적이지 않은 우크라이나 구민들의 나토 가입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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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C의 필리핀 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에 대한 체포,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치 보복 가능성
- ICC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 임기 동안 마약과의 전쟁으로 벌어진 대규모 살상 행위를 단죄하기 위해 인터폴을 통해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으며, 필리핀 당국은 이를 전달받아 집행했다. 필리핀 경찰은 홍콩 방문 뒤 지난 11일에 귀국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체포했다. 참고로 ICC에서는 두테르테가 집권 기간 동안 12,000~30,000명을 학살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마약과의 전쟁"에 따른 마약 중독자 및 중개업자를 처벌한 결과이다. 그러나 필리핀 내 공식집계로는 6.200명 정도의 사망자로 나와 있는데 12,000~30,000명이라는 숫자는 대놓고 대량학살을 자행하지 않는 이상, 나오지 않는 엄청난 수치로써 수치상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는 마치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당시 무려 70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근거 미약의 수치와 비슷한 수준으로 ICC가 작정하고 두테르테에 대해 단죄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ICC 같은 집단이나 기타 서방이 설립한 집단들은 리버럴 NGO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대부분은 "인권(Human rights)"을 내세워 어떠한 상황에도 폭력은 안 된다고 나서는 자들이다. 그러나 필리핀의 현실을 본다면 "인권(Human rights)"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호한 경우가 매우 많다. 인권(Human rights)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의미하는 개념"이라는 사전적인 정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에는 마약 사용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며, 현지에서는 ‘샤부’라고 부르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중독자들이 많은데 이들로 인한 범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필리핀의 범죄는 민간 치안과 직결되어 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그 중에서 마약상이나 각종 범죄는 필리핀 내 마피아들을 중심으로 집단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수준이 거의 중남미에서 한 때 살인률 세계 1위였던 엘살바도르와 맞먹는데 이러한 치안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필리핀의 역대 정권들은 각종 정책을 내놓고 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두테르테 이전의 정권들은 계속되는 치안 정책의 실패로 인해 범죄 및 치안에 완전히 손 놓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마약과의 전쟁"에 나서면서 범죄에 대해 엄벌을 단행하니 이를 인권 단체 NGO들이 "최악의 인권 유린(The worst human rights abuse)"이라 규정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 NGO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필리핀 내 범죄자들에게 당했던 2배 이상 인원의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NGO들은 ICC에 두테르테 대통령을 고발했다. 그들이 ICC에 고발한 죄목은 "학살 혐의(Massacre Charge)"였다. 이에 두테르테 대통령은 반발하여 NGO 기구들의 필리핀 입국을 제한하고 국제법에 따른 "내정 불간섭의 원칙(Non-Intervention)"을 ICC가 위반했다며 2019년 3월 18일 ICC를 완전히 탈퇴했다. 필리핀의 인권 운동가라 자칭하는 로멜 바가레스(Romel Bagares)는 이를 필리핀 사법 체계의 끔찍한 후퇴라고 비난했다. 로멜 바가레스는 마약 관련 범죄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키자며 EU 인권위원회에 기고까지 냈었던 전형적인 리버럴리티이다. 그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인권 수호에 나선다고 하지만 정작 마약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자다. 즉, 인권에 대한 "선택적 정의(Selective justice)"를 실현하는 자인데 이런 자들의 활동을 EU와 미국의 NGO 단체들이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EU와 미국의 NGO 단체들의 상위 호환으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딥스테이트, 네오콘들을 비롯한 서방의 리버럴 지도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두테르테의 체포를 지시한 자들은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한다. 이들 NGO들의 고발은 2023년에 받아들여져 ICC는 마약 단속 과정에서 자행된 두테르테 정부의 행위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더불어 두테르테의 외교 방식에 있어서도 이들이 문제를 삼을만 했다. 전통적으로 필리핀은 친미 국가였지만 두테르테는 극렬한 반미-반서구 성향을 갖고 있었다. 두테르테의 고향인 민다나오 섬의 경우, 1906년 독립을 주장한 필리핀계 무슬림들로 알려진 모로족들이 미군에게 대량 학살 당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다. 따라서 민다나오 자체에서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두테르테도 이러한 민다나오와 모로족의 비극적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의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무차별적인 마약범죄자 처단에 대해 두테르테를 비난한 바 있다. 이에 두테르테는 인권보다 마약 범죄 소탕이 더 중요하다며 마약범 처단을 계속할 것임 천명했고 오바마에게 그 이상은 내정간섭이라며 경고했다. 이는 근본적인 반미 성향과 더불어 자신의 정책에 대해 끈질기게 간섭을 자행하는 미국에 대한 적개감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이나 서방의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두테르테를 "친중"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지만 필자가 두테르테를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친중"과 매우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있어서 중국에 대해 매우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에서 들 수 있다. 두테르테는 영해 사수를 주장하며, 중국이 만약 남중국해의 필리핀 영토를 침공한다면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남중국해 분쟁이 국민감정과 직결된 영토 문제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는 단순히 그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두테르테에게 있어 영토 문제 뿐 아니라 중국의 어떠한 형태로든 간섭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어떠한 외세에도 필리핀을 수호하겠다는 그의 확고한 외교 철학이었다. 다만 그가 중국과 가까워지려 한 것은 국내 문제의 최대 방점인 "마약과의 전쟁"에서 미국 및 서방 세계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 방편에 불과하다. 당시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을 두고 세력 다툼을 펼치는 최전선의 입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어 중국에 대해서 마약 전쟁 지원 도와주는 것에 감사하게 여겼고 미국에 대해서는 법의 원칙만 내세울 뿐,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사실, 미국은 이런 두테르테를 대체하기 위한 또 다른 인물에게 손을 넣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필리핀을 파멸로 이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일명 "봉봉" 마르코스이다. 그는 전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계에서 활동했고 영미권에서 유학하여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PPE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대표적인 "친미", "친서구파" 인물이다. 미국의 명문 대학 출신이자 타국 정치인이라면 미국 정부 및 네오콘과의 연관성을 한 번 정도는 의심을 해봐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를 근거하는 부분 중 하나가 그는 미국에서도 각종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고 1996년 미 연방대법원이 마르코스 주니어에게 벌금 3억 달러를 판결했는데 납부하지 않았고 왠일인지 미 사법부에서 납부를 독촉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가 거의 30년 전인데 이 중대 범죄에 대한 벌금 납부를 집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1990년 초중반 부터 미국 정부가 봉봉 마르코스를 대놓고 필리핀 차기 지도자로 밀어주고 있지 않았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그는 미국 정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2016년 필리핀 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는 레오노르 로브레도(Leonor Robredo)와 경쟁을 벌였지만 간발의 차로 패한다. 이렇게 패배했음에도 서방이나 미국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흔히 주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정선거 음모론" 이다. 봉봉 마르코스는 선거 결과를 납득하지 못해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무려 2021년까지 선거 불복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재검표 결과도 별 차이가 없었고 2021년 2월 16일, 필리핀 대법원에서 마르코스의 제소를 만장일치로 기각하면서 이 부정선거 논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때부터 이를 두테르테가 로브레도를 이용해 자신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하고 두테르테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 두테르테와 로브레도의 사이도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봉봉 마르코스의 적개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불어 두테르테는 봉봉 마르코스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복권을 추진했었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임을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세웠을 정도로 호의를 보였었다. 그로 인해 두테르테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영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물밑 지원을 받는다는 의혹이 존재해왔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지원을 부인해왔다. 다만 두테르테의 성격으로 볼 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복권을 추진했었던 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마르코스의 지지율이 월등히 높았던 루손 섬 북부 지역의 마르코스 지지자들을 흡수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테르테는 루손 섬 북부 지역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성공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신의 국립묘지 매장과 그의 복권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는 마르코스 집안의 엄청난 분노를 몰고 왔고 아마 봉봉 마르코스도 두테르테에 대한 악감정을 이 때부터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2021년 부통령 선거도 그렇고, 두테르테에 반감을 갖고 있는 미국 정부의 부추김도 봉봉 마르코스의 적개감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봉봉 마르코스는 이전 두테르테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것은 두테르테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Sara Duterte)에게 접근한 것이다. 봉봉 마르코스는 대선에 나서면서 사라 두테르테에게 "러닝 메이트" 역할을 제안한다. 필리핀에서의 "러닝 메이트" 제안은 뻔하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하고, 사라가 부통령이 되면 마르코스가 다음 대선에서 사라를 밀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임기 말인데도 레임덕에 걸리지 않고 여전히 85%~90%의 높은 국민적 지지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대통령은 단임제이기 때문에 두테르테의 재선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두테르테는 사라 두테르테에게 대통령 직위에 출마하고 본인은 부통령으로 출마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는 향후 있을지 모를 정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상대가 봉봉 마르코스라면 친미파에 친서구파인 그가, 미국과 서방의 지시로 정치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봉봉 마르코스는 사라 두테르테에게 "러닝 메이트"를 제안하면서 정치 보복은 하지 않겠다 맹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사라가 봉봉과 "러닝 메이트"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라가 부통령에 출마할 때 현직 대통령인 아버지 후광까지 합쳐서 인기가 매우 많았고 봉봉은 사라를 러닝메이트로 데려오자 인기가 올라가 상대대통령 후보인 레오노르 로브레도(Leonor Robredo) 부통령을 엄청난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퇴임한 두테르테는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그 대신 자신의 최측근인 크리스토퍼 봉 고 상원의원을 내세워 혹시라도 모를 정치 보복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봉봉 마르코스는 당선된 이후, 2025년 초까지 두테르테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하지 않고 사라와 했던 약속을 지키는듯 보였다. 그리고 그는 2025년 2월 5일, 필리핀 하원을 움직여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을 탄핵소추했다. 한화 153억원 정도의 부통령실 정보기금을 횡령한 혐의에 경호원에게 자신이 암살당하면 대통령과 하원의장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혐의가 겹친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스 부자가 여태까지 필리핀 내에서 행한 부정부패 혐의에 비하면 이 정도 횡령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고 친서방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봉봉이기에 사라는 늘 생명의 위협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필리핀은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국가다. 언제, 어느 때, 봉봉이 정치 보복을 자행한다면 암살당한다 해도 무리 없는 의심이었다. 하원 306명 중 215명 찬성하여 탄핵소추안이 의결되었고, 아직 상원에서 부통령 해임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사라 두테르테를 부통령직에서 해임하려면 상원에서 3분의 2의 찬성표가 필요한데 상원에서도 탄핵안이 의결되면 사라 두테르테는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탄핵된 부통령이 되면서 상원에서도 탄핵안이 의결되면 공직 선출이 영구히 금지된다. 그리고 이에 때를 맞춰 3월 11일 봉봉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체포해 ICC에 넘겨버렸다. 이제 사라 두테르테의 실각만이 남았는데 그녀가 실각하면 마르코스 일가의 정치 보복은 비로소 완성되어 끝나게 된다. 필자는 ICC, 미국, 집단서방, NGO, 딥스테이트, 네오콘과 봉봉 마르코스의 합작품일 정치 보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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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C의 필리핀 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에 대한 체포,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치 보복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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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90년대 체제 전환과 2000년대 루마니아에 대한 이해
- 오늘은 루마니아 현 정권과 조르제스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에 독자의 이해를 위해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의 몰락과 민주화 이후, 2000년대까지 포스팅하고, 2000년대에 현 정권에까지의 내용은 이틀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루마니아의 현 대통령은 공석이다. 이전 대통령은 클라우스 요하니스(Klaus Iohannis)로 11년을 루마니아의 권좌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같은 루마니아 체제를 이해하려면 루마니아의 정치 권력 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89년 12월 25일 차우셰스쿠가 실각하고 1990년 개방과 시장경제를 표방한 공화국 체제로 변화했다. 루마니아는 정치 체제를 프랑스식을 참조하여 공산정권에서 민주정권의 공화국 체제로 변화했기 때문에 거의 프랑스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국가 원수으로서의 대통령 권한과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이고 의회는 상원인 루마니아 원로원과 하원인 루마니아 대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마니아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1989년 민주화 시위 이전까지는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지만 시위가 성공한 이후부터는 직접선거와 결선투표로 선출한다. 직무가 정지될 때이거나 공석인 경우 루마니아 원로원이나 루마니아 대의원의 의장이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현재 2025년 2월 12일에 요하니스의 임기가 종료되고 조르제스쿠와의 연관하여 선거가 무효된 이후, 현재 루마니아 원로원이나 루마니아 대의원의 의장인 일리 볼로얀(Iliiy Boloyan)이 권한 대행을 맡고 있다. 루마니아의 원로원에는 소수민족 정당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루마니아의 선거법에 따라 소수민족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제정된 것이다. 루마니아 원로원은 하원 선거에 한해 봉쇄 조항이 적용되지 않게 일종의 특례를 주었다.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고 헝가리인, 세케이인, 독일인, 슬라브인들이 산재하는 루마니아의 특성상 당연히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마니아에 별로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민족들의 정당들도 의회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루마니아에 잔존하게 된 헝가리인과 집시들은 물론이고, 독일인, 알바니아인, 튀르크인 및 도브루자 타타르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많은 민족들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물론 헝가리계 정당인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연합을 제외하면 1석 정도 차지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다양한 민족을 포용했던 과거 "로마제국"의 선례에 따라 다민족 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루마니아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특이하게도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왕가가 그대로 유지되며 예우를 받고 있다. 이 점은 프랑스와 다른, 영국과 비슷한 점이긴 한데 이는 왕가가 소련에 의해 강제로 축출되었고 루마니아 왕국의 왕이었던 미하이 1세 등의 노력으로 인해 왕가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왕가는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의 구심점이자 상징이다. 소련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왕가는 소련에 저항해 루마니아의 민족적 자존감을 수호하려 했던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루마니아 정부는 왕가를 소련에 저항한 독립운동, 즉 루마니아 민족주의 상징으로 부상시켰고 이는 장기적으로 왕정 복고를 추진하기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옛 왕실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왕가에 대한 존경을 바치고 있다. 그럼에도 왕정 복고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들이 왕실에는 호의적이지만 그래도 정치는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6년에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3가 1989년 혁명 때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제를 선택했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라가 발전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당장 국민투표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62%가 공화정 유지, 21%가 왕정복고를 선택했다. 따라서 왕가는 그저 존경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전통과 현 시대를 합작하는 것이라 본 것이다. 루마니아는 이처럼 대통령의 행정부, 국회, 그리고 왕가까지 모두 정치권에 들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1989년 민주화 시위 성공 이후,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이룩했던 지도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따라서 국가의 미래에 관한 세 가지 비전을 공유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공산주의 이전의 역사와 정치 상황으로의 복원에 있다. 따라서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역사를 지우고 이전의 왕정과 의회가 존재했던 형태로 돌리려 했지만 이는 사회주의 공화국 당시의 혜택을 자들, 그리고 왕정과 의회는 중근세 시기로 회귀한다며 반대하는 자들이 늘어나 결국 무산되었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자유주의 천명의 해법은 자유선거를 정착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유럽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EU 가입, 군사적으로는 나토에 가입해 다가오는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 것이다.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에 의한 우크라이나의 핵 폐기는 루마니아에게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기에 나토 가입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를 위한 사회 공학적 프로젝트의 실현이다. 하지만 구국전선(Frontul Salvării Naţionale)이라 불리는 민주화 세력이 변질하기 시작했고 대학광장에서는 저마다 목소리를 부르짖는 등,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혼란스러운 소요 상황은 지속되었다. 1990년대 정치 상황은 매우 암울한 상태였고 옛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 처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부조차도 통합을 보이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민주화는 매우 더디게 다가오고 있었던 상황이 당시였고, 이는 2000년 초중반까지 이어져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았다. 체제 전환의 루마니아는 한편으로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을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경제 체제를 수립해야 하는 이중 목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만 대통령인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는 막연한 뜬구름만 잡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변환은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사이의 정책, 이어 신자유주의 이념의 도입과 정착, 민주화와 시장 경제로의 전환에 관한 사회적 합의 등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 전환은 1990~1996년의 중요한 고비를 이끌어가야 했던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였으나, 역사적인 현실로 볼 때 훨씬 더 복잡했고, 예측할 수 없는 비공식적 규칙이 난무하면서 더 큰 혼란을 불러왔다.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첫 대통령인 이온 일리에스쿠(Ion Iliescu)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6년 권력에 대한 최초의 민주적 이양이 이루어졌던 에밀 콘스탄티네스쿠(Emil Constantinescu) 대통령을 시작으로 2002년 아드리안 너스타세(Adrian Năstase) 수상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과도기의 종료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정치적인 선언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시행착오가 반복되면서 민생은 지옥이 되고 정치권 혼란은 계속된다. 물론 체제 전환기 사회에 있어 과거 공산주의 이념과 독재가 남겨 놓은 온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완전히 파쇄해야 했다. 이에 대해 가장 중요한 변화로 이어진 것은 독재와 같은 단원 체제에서 다원 체제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국가 원수으로서의 대통령 권한과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로 굳어졌고 의회는 상원인 루마니아 원로원과 하원인 루마니아 대의원으로 분리되어 확고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어 대중매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언론의 자유화가 진행되었고 이동권을 개방하면서 루마니아 시민들이 각지로 이주하는 것도 자유화 되었다. 그리고 유럽으로의 복원하는 일에 착수해 사회 변화의 급진적인 가속화를 가져오면서 2000년대 들어 조금씩 혼란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2007년에 타결된 루마니아의 EU 가입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완전한 민주 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으로 간주되었다. 루마니아는 사회주의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시 유럽과 공식적으로 연결되면서 서유럽화를 계획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은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루마니아 시민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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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90년대 체제 전환과 2000년대 루마니아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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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빅토르 최 메모리얼 - 모든 구소련인들의 히어로 빅토르 최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곳
-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음악들이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 인근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오전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건질 수 있었던 온전한 물건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지게 된 앨범인 Кукушка (뻐꾸기)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은 KGB가 의도적으로 빅토르 최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빅토르 최가 당시 소련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버스가 고의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뻐꾸기야 말해봐, 노래해봐 (Песен ещё не написанных сколько? Скажи кукушка, пропой)로 시작되는 가사인 빅토르 최의 유작 Кукушка (뻐꾸기)의 가사는 이후 2015년에 빨리나 가가리나(Полина Гагарина)가 리메이크해서 다시 불렀는데 빅토르 최의 감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평가다. 그녀의 리메이크 곡은 영화 세바스또뽈 전투(Битва за Севастополь)의 Ost로 삽입되었다. 원래 슬라브족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에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면 뻐꾸기는 남은 햇수만큼 울어서 알려준다고 한다. 이 뻐꾸기를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녹음했을 때 초이의 남은 생애의 날짜를 몇 번이나 예측하고 울었을까?.. 나도 엠게우 학위 과정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묵념과 헌화를 하고 빅토르 최의 음악을 크게 틀어보았다. 나도 모스크바 학위 과정 시절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에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시대 초기에 러시아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그러한 출생 배경도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준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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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빅토르 최 메모리얼 - 모든 구소련인들의 히어로 빅토르 최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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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최악의 상황, 러시아가 극초음속 기술을 북한에 전수했을 가능성 높아 보여
-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쟁, 휴전 기간이라는 기네스북 기록을 쓰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과 북한이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과 전쟁 중에 있다. 다만 휴전 기간이 한 세대가 다 갈 정도로 길어서 전쟁에 대한 체감이 옅어진 부분이 있을 뿐이지,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북한과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화약고인 셈이다. 그런데 이 숨어있는 화약고가 현실로 드러나게 생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가 우크라이나로 살상 무기를 우회 제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속속 흘러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 주한 러시아 대사 안드레이 쿨릭이 "지난 30년간 양국의 이익을 위해 건설적으로 발전해온 러-한 관계를 분명히 망칠 것"이라 발언했고 작년 4월 20일에는 드미트리 페스코프 장관도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에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국민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들 말대로 '퀴드 프로쿼(quid pro quo· 주고받는 대가)'가 그것이다." 라고 발언했다. 실제 러시아는 북한에 무기 지원과 기술 이전을 소련 해체 이후 30년 동안 하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는 북한에 30년 만의 금기를 깨고 지원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러시아에게 비우호국가고 양국 간의 최대 긴장의 끈인 90일 무비자 방문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우리에 대한 보복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작년 12월 말, 우리 정부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일부 품목의 러시아 수출을 금지한다고 밝히면서 상당 수준의 물목을 제재 대상으로 올렸다. 그러자 마리아 자하로바 대변인은 "한국이 미국 요청에 따른 비우호적 조치를 했다”면서 “한국의 경제와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 대응할 권리를 갖고 있다”며 “반드시 대칭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한국은 여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 때 러시아가 취할 경제적 보복이 무엇일지 그것을 고민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의 보도에 따르면 정확하게 "한국의 경제와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다"는 보도는 과장된 것이었고 실제로 어떻게 보복할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전부터 나는 누누히 러시아를 적대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을 우회로 하게 되면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할 것이라 언급했었다.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북한은 러시아제 무기를 잇달아 실험하며 남침 의욕을 더욱 돋굴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다. 그 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의 존재다. 여태까지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인 킨잘과 이스칸데르, 아방가르드, 지르콘 등은 요격을 당한적이 없고 우크라이나의 킨잘 요격 주장은 다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극초음속 미사일의 존재가 전투에 참여했을 경우, 다량으로 발사되는 것은 아니기에 전투에 있어 향방을 바꾸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극초음속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정은의 장난질에 최악의 안보 위기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태껏 김정은이 취한 정책들과 행보들을 보면 충분히 그와 같은 행위들을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우리 안보에 비상이 걸리며 충격적인 일이 오늘 밝혀졌다. 몇 년전 북한이 고체연료를 사용한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IRBM)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지난 14일 오후 극초음속 기동형 조종 전투부를 장착한 중장거리 고체연료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했다면서 시험발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북한 측은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 발사는 주변국의 안전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으며 지역의 정세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강력한 무기 체계들을 개발하기 위한 정기적인 활동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극초음속 기술은 아마 러시아에 전수 받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중국의 극초음속은 아직 검증된 바 없지만 러시아는 그 기술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검증된 바 있기에 북한에 이 기술을 전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3년 전, 제재 당시 마리아 자하로바 대변인이 러시아의 보복에 한국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역시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 극초음속 기술이 북한에 전해졌다면 자하로바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아마 이것을 염두해 두고 놀라지 말라 경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쏟아 부은 무기들의 재고가 바닥났고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어 우리를 도와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목숨 걸고 참전할리도 만무하다. 한미상호조약을 가지고 그것을 맹신하고 있다지만 미군이 참전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다. 우선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줬기에 재고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지만 중동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또한 진행 중이고 홍해에서 예멘 후티군도 위협적인 상황이기에 참전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의 안보는 우리 스스로 지키고 해결해야 한다. 그럴려면 왠만함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것, 그리고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잘 지내야 하고 중국과도 그럭저럭 잘 지내야 하며 미국과도 잘 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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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최악의 상황, 러시아가 극초음속 기술을 북한에 전수했을 가능성 높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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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
- 라트비아는 독립 이후에 탈러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2005년에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소련에 의해 러시아 SFSR에 합병되어 러시아 땅이 된 압레네 지역을 두고도 오랫동안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벌였다. 그리고 2012년 8월 28일 당시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자 현 부총리 직위에 있는 아르티스 파브릭스(Artis Pabriks)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 있는 소련 해방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브릭스 장관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련 해방군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하지만 이는 너무 많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브릭스 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5월 9일 기념비 주변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는 것과 관련하여 행사 참가자들 대부분의 목적은 전몰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미 20년 전에 사라진 지정학적 세력권인 옛 소련권에 라트비아를 묶어 두려는 것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즉, 나치 독일과 싸워 그들을 몰아내는데 희생을 당한 라트비아 군인들을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파브릭스는 이어 5월 9일 러시아 청년들이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부착한 자동차를 몰고 리가 시내를 활주할 때 독일의 젊은 세대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독일이 러시아를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반독 시위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라트비아의 소련 해방군 기념비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희생된 소련군을 추모하기 위해 1985년 건립된 높이 약 80m의 기념비이다. 라트비아 전체 인구인 220만 명의 40%를 차지하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은 매년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일인 5월 9일에 기념비 주변에 모여 승전을 기념하고 나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숨진 소련군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게다가 라트비아 군이 소련군에 참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이 때 전몰한 라트비아 장병들을 위해서 꽃다발을 바치며 추모하는 행사도 같이 거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트비아 측의 역사 인식은 러시아와 다르다. 라트비아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라트비아에 진주한 1940년부터 라트비아가 독립한 1991년까지를 소련의 강점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른 발트 3국 국가인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는 다르게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을 공식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한 직후, 1922년 야니스 착스테(Jānis Čakste)가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4대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대통령이 된 군티스 울마니스(Guntis Ulmanis) 시대부터는 1대가 아닌 소련에 합병되기 이전의 대통령까지 모두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군티스 울마니스는 라트비아의 공식 5대 대통령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현재 에길스 레빗에 이르기까지 10대 대통령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상당수 라트비아 인들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는 라트비아에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 점령의 연장을 허용했을 뿐이라 인식하고 있다. 만약에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면 소련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인식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2010년 3월 16일에는 라트비아 나치군단 퇴역군인들의 시가행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대개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전쟁에 참가하긴 했지만, 볼셰비키에 맞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치의 군복을 입고 소련군과 싸웠던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1943~1944년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14만 6천 명의 라트비아인을 징집해 ‘바펜 슈츠슈타펠 라트비아 군단’을 편성하여 소련군과 맞서기도 했다. 1940~1941년 소련 점령기를 ‘공포의 시기’로 기억하는 라트비아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돼지새끼들이지만, 스탈린이 더 나빴다”고 말한다. 발트 3국 가운데 반러 감정이 가장 강한 라트비아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13년에 독일 나치의 상징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EU 국가로써 가장 늦게 한 조치였으며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라트비아 나치군단 퇴역군인들의 행사에 반발한 유럽이나 이스라엘 측의 항의로 인해 마지못해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라트비아 정부에서도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에 복무한 군인들을 소련에 맞서서 싸웠다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등, 네오나치들이 활동하기도 한다. 최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아조프 대대에 지원한 라트비아 네오나치들도 존재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의 차이는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계 정치인들의 반발에서도 드러났다.당시 라트비아 세임(Sejm) 최고 의회의 부의장 안드레이 클레멘티예프(Андрей Клементьев)는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을 두고 사회 문제에서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의도적 도발이라 비난했다. 클레멘티예프는 정부의 관리들이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노력하는 대신 민족 문제를 둘러싼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며 이는 라트비아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명백한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당시 리가 시장 닐 우샤코프(Нил Ушаков)도 파브릭스 국방장관의 발언을 두고 아주 어리석은 발언이라 규탄하는 등, 러시아계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이고 있다. 한편 라트비아는 2004년 나토와 EU에 가입하여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실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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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뿌띠쨔(Pаспутица) 시즌의 개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현지의 분기점
- 21세기 2020년 이후의 첫 전쟁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분석해 보면 이전과 분명 다른 면이 있다. 다른 전쟁에 비해 심리전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각종 선전(Propaganda)을 통한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전략, 교묘한 가짜 뉴스(Fake news)를 통한 군과 각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 및 적진 교란, 각종 기만술(Deceptive tactics)로 인한 기습 공격 등이 이 전쟁에 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현장에 없으면 진실을 알기 힘들다. 게다가 러시아의 공격 수준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공격 수준이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러시아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협상에 우위를 점하려 한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드네프르 강에서 키예프로 올라가는 길의 수준이 처참해지며 일명 "봄의 지옥"이라 불리는 라스뿌띠쨔(Pаспутица) 시즌이 서서히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라스뿌띠쨔는 비나 눈의 융해로 인해 자연적인 진흙뻘이 형성되면서 일종의 늪지대를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보통 러시아권 국가들이 이런 경우를 많이 겪는데 겨울이 되기 전과 봄을 맞이하는 도중 비포장도로에서 해빙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시베리아 바이칼 북부 지역의 위도를 중심으로 많이 발생하는데 나도 세베로바이칼스크(Северобайкальск)에서 그 지독한 지옥을 친구와 함께 맛본 바 있다. 라스뿌띠쨔 현상에는 일반 차는 물론이고 4륜구동 이상 차도 다니기 힘들다. 탱크와 전차, 장갑차, 군용트럭 등도 뻘어 묻히며 갇히는 경우가 많고 이럴 때는 군용과 관련된 차량들은 거의 폐차로 직결한다. 시베리아 지역은 거의 4월 초, 중순에 라스뿌띠쟈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바이칼보다 위도가 낮은 지역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기상 이변으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져 3월 초, 중순인 10일경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있기에 러시아 지상군의 이동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과거 대조국 전쟁, 혹은 독소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 시절에 나치 독일군이 이러한 정보를 모르고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라스뿌띠쨔의 지옥을 맞이해 오가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사이 러시아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는 연구결과도 나타남에 따라 라스뿌띠쨔 문제는 침공하는 러시아군과 더불어 육로에서 러시아군과 맞서는 우크라이나군에게도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3월 10일 이후에는 특히 고공폭격과 이를 방어하는 위주로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다량의 러시아 공수부대들이 시가전에 투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공수부대들과 지상군의 연계를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 지상군 또한 둘로 나뉠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인도주의 통로가 개설되고 민간인들이 빠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진짜 전투가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군이 민간시설까지 공격하는 것을 보면 마치 베트남 전쟁의 일면을 보게 만든다. 당시 베트남 공산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식별하지 못하게 민간인 복장을 하며, 민간인 마을에 숨어서 미군을 기습하거나 공격을 감행했고 미군은 민간인과 군인을 판별하지 못해 민간인들 마을들을 폭격으로 소개해버리거나 지상군이 진주하여 모두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군의 만행에 베트남 민간인들도 총을 들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해 미군을 괴롭혔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로 민간인들도 무장하면서 지상, 지하, 고층 건물 등, 지형지물에 서방국가들이 지급해준 무기들을 요긴하게 활용해 러시아군을 괴롭게 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이러한 민간인들도 군인으로 판단하여 공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무장하여 러시아군을 괴롭히는 민간인은 민간인이 아닌 "인간병기 및 민병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희망하는 민간인들을 인도주의 통로를 통해 내보내고 있고 남은 있는 자들은 군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군의 거센 공격이 예상되고 우크라이나 군의 사력을 다한 방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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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뿌띠쨔(Pаспутица) 시즌의 개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현지의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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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정치, 경제, 지하 경제 범죄 집단이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하는 집단, 그 자체가 거대한 카르텔
- 구소련권에서의 "마피아"라는 개념은 상당히 그 범위가 넓어서 폭력적인 이권 집단만을 지칭하는 아니라 특정한 권력과 자원 등의 이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유지되는 조직도 포함하고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우크라이나 마피아들의 주요 수입원은 각 시내의 상권을 잡고 보호비를 갈취한다던지, 도박 및 카지노, 마약과 무기의 밀수, 밀매 등을 관장한다. 무기 밀매의 경우, 초기에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혼란 속에서 불법적으로 유출된 무기들을 팔아 먹으면서 올리가르히들을 통해 상당한 자금줄을 확보하였고, 올리가르히들의 비호와 정부의 부정부패로 인한 뒤 봐주기는 물론이고 이들의 자금으로 무기 밀매를 자행한 끝에 무기 밀매 시장의 큰 손이 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마피아들은 자금의 유동성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미 사업장을 미국이나 캐나다로 옮겨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에는 우크라이나계가 상당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로 사업장을 옮겨 철저히 암약하면서 캐나다의 반러 정치인들과의 관계도 돈독히 연결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듯 하다. 사실 이들의 목적도, 미국이나 캐나다의 정치인들의 목적도, 그리고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들의 목적도 공통적인 것은 결국 "돈"이다. 그와 같은 짭짤한 수입과 돈 때문에 미국이나 캐나다 정부도 이들 마피아들을 난민으로 신분 세탁까지 해주며 봐주고 있는데 이러한 얘기는 서방 뉴스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마피아의 존재 및 우크라이나의 지하세계는 활성화 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본토에 남아 있는 올리가르히들의 자금줄이 마르게 된다. 키예프 마피아들은 프라비섹토르 같은 네오나치들과 젤렌스키의 자산 관리도 해주고, 거기서 500만 달러 짜리 꽁지돈 받으면서 지하 경제가 활발해진다. 즉, 우크라이나 정치인과 올리가르히들과 마피아가 이끄는 지하경제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우크라이나 마피아 없어지면 젤렌스키 같은 올리가르히들 자금줄 마른다고 난리날 것이기 때문에 서방 세력 또한 함부로 우크라이나 내 지하 세력들을 소탕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이들 범죄 집단들과는 서로 간에 톱니바퀴처럼 물고 물리는 공생 관계이기 때문에 이들 소탕할려는 의지는 전혀 없다. 우크라이나가 부패하고 썩은 이유는 정경합치만 해서 썩은게 아니라 지하 경제도 톱니바퀴처럼 함께 돌리니까 썩은 것이다. 설사 우크라이나가 망한다 해도 지하 경제를 숙청할 의지가 없거나 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체제를 제어하지 못하면 부정부패는 여전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장소만 옮겨서 자금줄 안 마르게 계속 돌리면 되니까 말이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서방 정치인들도 우크라이나 마피아 돈 받아먹은 정치꾼들 넘쳐날 것은 불 보듯 뻔할 것이고 헌터 바이든 같은 경우, 아마 모종의 우크라이나 지하경제와 커넥션이 있을 것은 분명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 키예프 시장인 비탈리 클리치코가 올바르게 운동한 복싱 챔피언 같을지 모르지만 그 유명세 타서 마피아들 자금줄 스폰서 대고 그 돈으로 복싱이나 싸움 잘하니까 지하 조직 몇 개 만드는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지하조직에서 하는 일은 뻔하다. 폭행, 갈취, 청부살해, 매춘알선, 인신매매 등의 범죄가 그들의 일이다. 그 돈은 키예프 시장을 타고 그 윗대가리를 돌고 돌아 결국 끊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만든다. 결국 이렇게 서로 맞물리면서 서방의 반러 정치인들, 그리고 좀 더 확대해 보면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들까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젤렌스키가 패색이 짙음에도 발악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금줄 마를까봐 걱정되서인 것이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이런 쓰레기들 처리하면 젤렌스키에게 대주는 보장된 자금줄이 끊기는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벙커에 숨어 러시아와 싸우면서 끈질기게 개겨줘야 젤렌스키가 지하세계와 연결된 자금줄이 끊기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우크라이나는 정치, 경제, 범죄 집단이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하는 집단이라 그 자체가 거대한 카르텔이다. 그래서 이런걸 두고 "뿌리까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가? 멕시코나 콜롬비아도 우크라이나와 유사한 구조의 거대한 범죄집단 지배계층 국가인데 멕시코나 콜롬비아는 우크라이나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하다. 이들은 자정할려고 노력이라도 하는데 우크라이나는 한 번도 그런 노력한 적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방법은 올리가르히들 재산을 몰수하고 그걸로 우크라이나 재건하며 발전시키여 한다. 그렇게 하면 재건 가능성은 약 10% 정도 올라가고 지하에서 활동하는 마피아나 네오나치까지 말끔히 제거하고 자금줄 틀어쥐면 재건 가능성이 30%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경제 선진국이 될 가능성 또한 같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정능력이 없는 한, 우크라이나와 같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자원의 저주"를 가진 국가는 경제 선진국이 되는 것이 매우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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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정치, 경제, 지하 경제 범죄 집단이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하는 집단, 그 자체가 거대한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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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정교회와 유럽 카톨릭의 관계
- 루마니아로 보면 그 대표 종교가 정교일 뿐이지 정교가 국교는 아니다.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문화도 다른만큼 같은 기독교라 할지라도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민족과 종교는 그 복잡한 역사와도 땔레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루마니아는 고대 시대부터 아시아와 유럽, 발칸과 유럽, 우랄-아시아와 발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비잔틴 정교회의 경계 역할을 했었던 곳이고,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라틴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비잔틴과 슬라브 민족의 영향을 막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현 루마니아 땅이 처음부터 기독교도들의 땅이 된 것이 아니다. 보래 루마니아는 그 정체성이 모호한 국가였다. 고대에는 로마 제국과 슬라브족, 게르만 계통의 민족 및 고트족과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이었고 슬라브족, 게르만 계통의 민족 및 고트족들이 들어오면서 그들만의 문화와 종교적 영향을 받아 샤머니즘이 성행했다. 고대 다키아 왕국은 루마니아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에게 정복되어 다키아 속주가 설립이 되어 로마인들이 다키아 속주에 집단거주, 다키아 원주민 및 슬라브-게르만-고트족 이주 집단과의 집단 혼혈을 통해 오늘날 루마니아인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아시아계의 스키타이-켈트-사르마트인들도 들어오면서 정체성이 모호한 혼혈집단이 되었고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었지만 정통 로마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당시 로마어 (고대 라틴어)를 쓰고 읽으며 말하는 로마인이었지만 워낙 다양하고 다채로운 집단과 혼혈을 통해 이방인들의 언어군들이 로마어와 섞여 고중세 루마니아어의 기초가 형성된다. 이후, 계속 변형을 겪어 오늘날의 현대 루마니아어가 된다. 이 정체성 모호한 오늘날 루마니아 땅에 자리 잡은 집단들은 375년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최대 희생양이 된다. 게르만족과 고트족이 루마니아에 들어오고 훈족이 따라 들어오면서 이들 사이에 루마니아는 치열한 격전장이 된다. 이후 아시아계 유목민족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땅으로 인식된 루마니아는 북부 트란실바니아가 아바르족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마자르족이 침공해 헝가리 역사의 기초가 되는 마자르 왕국의 영토가 된다. 이 때 마자르족, 헝가리 제국을 건국하는 이슈트반 1세가 교황에게 헝가리 왕의 왕관을 받고 정식으로 로마 카톨릭 국가가 된다. 이 때 트란실바니아는 카톨릭 국가가 되었지만 도나우 강 일대의 도브루자와 왈라키아, 도나우 강 남부 지역의 루마니아 땅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비잔틴 정교회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된다. 게다가 해당 지역은 불가리아 제국의 영향까지 받았기에 당시 정교가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불가리아는 루마니아 남부 지역 일대에도 정교회가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의 정교회는 이런 기초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루마니아는 중세 시대부터 카톨릭과 정교가 격돌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로마 카톨릭이 아닌 동방 카톨릭이 들어오고 독일인 들이 유입되어 이들이 믿고 있는 루터교 프로테스탄트까지 들어오면서 루마니아는 기독교 종교전쟁의 대표적인 피해국가가 되었다. 도브루자 지역과 루마니아 남부 도나우 일대의 정교인들은 조직적으로 강대국인 헝가리와 로마 카톨릭에 저항했다. 이는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왕국을 정복하고 북진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결국 루마니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가뜩이나 골치 아픈 기독교 간의 분쟁에 이슬람까지 들어와 합류하게 되었다. 더불어 오스만과 헝가리의 최전선이기도 했고,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의 최전선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혼란은 격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루마니아인들의 정교 예배나 관습을 존중했다. 이들을 굳이 무슬림으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일정 부분 세금을 내면 정교든,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뭐든 인정해주었기에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오스만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같은 기독교이지만,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더 싫어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민족적 감정으로 볼 때 서로 간에 적대하는 적대국이다. 대표적인 예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붙어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고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은 트란실바니아에서 서로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당수의 민간인들을 포함 약 4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1848년 혁명 와중의 인종 청소로 인해 살해되었다. 헝가리에서 발생한 혁명을 제압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를 각 지역별로 분할하여 탄압했고 루마니아인들은 오스트리아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67년, 대타협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설립되면서 주권을 되찾은 헝가리인들이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들은 카톨릭으로 정교인 루마니아인들을 극단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에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루마니아 전역은 이들의 내전으로 황폐화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 왕국은 카를 1세의 독단으로 인해 비밀리에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지만 헝가리도 이들에게 가담했었기 때문에 둘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 루마니아인들은 친프랑스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헝가리는 이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16년 루마니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배신하고 연합국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편으로 갈아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함에 따라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가 온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헝가리 입장에서 트란실바니아는 수백여년 간 수많은 헝가리인, 세케이인이 거주해오던 전통적인 영토였기에 포기하기 어려웠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나치 독일 편이 된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를 탈환했지만 독일이 패전하면서 트란실바니아는 다시 루마니아로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루마니아계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루마니아인들 모두 루마니아에서 약간씩의 차별은 있지만 두 국가 모두 현재 EU 국가이자 나토에 속해 있기에 그 차별성은 많이 완화된 편이다. 특히 종교적으로 볼 때, 루마니아는 인구의 84% 이상이 기독교 신자라 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루마니아 정교회가 73.6%을 차지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동방 카톨릭은 종교의 자유화 이후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공산정권 시절에 루마니아 정교회에 침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루마니아 정교회가 이를 거부했다. 이로써 양측간에 대립이 심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은 헝가리계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동방 카톨릭과 달리 루마니아 정교와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양국간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대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가하고 있다. 2022년 5월 4일에는 루마니아 대법원이 빅토르 오르반과의 불법 커넥션이 있다는 이유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계 가톨릭 학교를 폐교하라는 루마니아 정부의 명령을 승인했다. 그러자 헝가리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반발했다. 그리고 최근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와 카르파티아 북부 지역의 고토(古土)를 회복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일례가 트란실바니아를 방문한 노바크 커털린 대통령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등정하여 헝가리 삼색국기가 칠해진 바위와 함께 인증사진을 찍은 사건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헝가리인들이 되찾고 싶어하는 숙원의 땅이다. 루마니아는 이를 헝가리에 강력히 항의했다. 2025년 1월 1일, 루마니아가 쉥겐 협정에 가입하면서 헝가리인의 트란실바니아 월경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루마니아는 헝가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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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정교회와 유럽 카톨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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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나토의 역할
- ① 루마니아의 지리적인 부분과 EU의 지정학적인 부분 루마니아에 대해 여태까지 많은 포스팅을 했고, 필자도 많이 가본 나라지만 지정학적인 부분에 대해 포스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듯 싶다. 그럼 루마니아의 기본적인 지리적 개관을 살펴보자면 일반적으로 동유럽으로 분류된다. 다만 냉전 이후의 분류에 의하면 중부 유럽과 남유럽이 교차하는 위치에 있다고도 보고 있다. 특히 트란실바니아 지방은 중앙 유럽으로도 분류되고, 남부의 왈라키아, 남동부 흑해에 접한 도브루자 북부 지방 등은 남유럽으로도 분류된다. 트란실바니아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 오랜 헝가리 지배의 영향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는 헝가리 문화와 독일 문화,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았고 나머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등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오래받았기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특유의 종교적 관대함의 영향이 있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정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지배국인 터키 문화와 주변의 남슬라브 문화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같은 나라이고,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 살고 있지만 험준한 카르파티아 산맥을 기점으로 동부와 서부 지역, 남부와 북부 지역은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색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전체적인 면으로 본다면 루마니아만큼의 요충지는 없다고 여겨진다. 민족으로 본다면 슬라브 민족과 라틴 민족, 투르크 민족이 충돌하는 지역이고 주변의 슬라브족과 투르크족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언어적으로 본다면 라틴계 로망스어 중심의 루마니아어는 주변의 슬라브어계에 갇혀 있는 셈이다. 따라서 루마니아 같은 경우, 투르크와 슬라브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라틴계이게 때문에 서방의 물질적 지원과 군사적 지원을 받아왔고 흑해의 루마니아 항구에는 나토의 군사들이 주둔했다. 따라서 루마니아는 공격을 받을 경우 나토 5조에 따른 집단방위 체제가 적용된다. 루마니아는 일단 영공 감시를 위해 F-16 전투기를 배치했으며 나토에도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한 이후,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의 정착은 EU와 나토 가입을 위한 최우선 국가 과제로 여겨졌다.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EU는 루마니아의 최대 수출국이었다. 따라서 막대한 노동력 수요처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에게 있어 나토와 EU, 쉥겐 조약의 가입은 매우 중요했다. ② 나토의 동진과 확장 1990년대 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동독이 소멸되고 독일이 통일될 때, 미국과 소련은 나토의 영역을 당시1990년 수준에서 확장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것이 구두였기에 결국은 30여 년 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나토의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가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니토의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크리스토퍼는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 간의 완충지대로 설정이 되는데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입장을 바꾸고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할 것을 결정했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소련에게 압박을 당한 중부 유럽의 국가들과 발트 3국 그리고 발칸반도에 위치해 있는 남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나토 가입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고 세워진 러시아 연방 내의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동유럽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체첸 전쟁이 발생하고 러시아는 해당 전쟁에서 패배했는데 이는 그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주변국과의 갈등 또한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게다가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최대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동유럽 일대로 러시아군이 진격할 수 있다고 위협을 느꼈다. 더불어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장악함으로 인해 나토 확장 정책은 미국에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은 원래 나토의 동진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도 보리스 옐친이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이것이 위험한 수준이 될 수도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콜은 러시아가 분쟁 중인 체첸에 폭격을 계속하자 콜은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옐친은 이에 응하여 폭격을 당장 멈추었지만 24시간이 지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을 보고 콜은 옐친은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었지만 러시아의 군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보았다. 러시아 군부가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 보였기에 심각성을 깨달은 콜은 나토의 동진에 찬성하게 된다. 1999년 옛 동구권 대표국가였던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까지 나토에 가입을 신청하여 2007년에 가입이 허가된다. 특히 루마니아의 경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문제와 가가우지아의 문제가 있어 몰도바와 연계되고 있기에 러시아와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③ 루마니아는 러시아와 마주한 현 나토의 최전선? 나토가 동진하면서 32개의 국가가 나토에 가입했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를 제외했기에 이들을 포위한 형세가 되고 말았다. 아직 몰도바는 나토의 가입국이 되지 못했는데 이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문제 때문이다. 친러시아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 또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평화유지군으로서 옛 소련 시대의 제14군을 계속하여 주둔시키는 등,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양면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1990년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다만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독립은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의 반대로 인해 어느 나라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지속적으로 러시아로의 합병을 원했는데 2016년 9월 8일에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에 통합되려는 법령을 선포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시민들은 2006년 97%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러시아와 합병하기를 원한다고 투표했지만 병합이 성사되지 못했었다. 이는 루마니아에 주둔 중인 나토군도 출격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크림 합병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합병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크림 반도와 같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간다고 해도 러시아 본토와 떨어져 있어 1991년 소련 해체로 분리 독립한 구소련권 국가들의 역외 영토들처럼 관리하기 어려운 월경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마치 칼리닌그라드와 같은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나마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격리된 월경지이기는 하지만 바다 해안선과 맞닿아 있기라도 한다. 다만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바다와 이어지지 않는 내륙 지역이다. 따라서 러시아로의 합병은 매우 불리한테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 지역을 포함해 남부의 크림반도, 북부의 벨라루스에 배치되어 훈련을 진행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평화유지군을 포함해 러시아군 1,000명 이상이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배치돼 훈련을 진행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훈련 중이었던 러시아군은 450명의 평화유지군과 탄약고를 지키는 500~750명의 러시아 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몰도바 뿐 아니라 루마니아에게도 큰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현재 친러 성향 지도자인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 알렉산다르 부치치의 세르비아 등에게 잠재적으로 포위된 상태에 있다. 위치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에서 루마니아의 선택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같은 나토인 터키는 중립인 상황이고 불가리아가 그나마 의지할만한 상황인데 불가리아는 현재 친러의 형세가 더 강하다. 게다가 불가리아는 전통적으로 해군이 약해 우크라이나와 터키의 수준보다 훨씬 떨어진다. 러시아가 향후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해 오데사를 함락시킨다면 같은 민족이면서 현재 친 EU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마이아 산두의 몰도바가 위협을 받게 된다. 루마니아의 최전방 육지도시인 이아시에서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까지는 불과 3시간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고, 오데사의 끝 지점인 이즈마일을 통해 최전방 항구도시인 툴체아로 접근할 경우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오데사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안보 위협으로도 이어진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가 무너지면 러시아 군이 서쪽으로는 자카르파탸-체르니우치로 통하는 국경에 주둔하고, 동쪽으로는 오데사-키시네프로 연결되는 도나우 습지에 주둔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헝가리가 루마니아를 돕지 않고 벙과하면 루마니아는 러시아군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흑해 연안 항구도시인 콘스탄차 외, 외부로 통하는 모든 길이 봉쇄가 된다. 그리고 콘스탄차에서 주둔하고 있는 루마니아 해군 함대는 호위함과 초계함을 다 합쳐도 10척 정도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해군보다 더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흑해에서 터키,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가장 강한 해군을 갖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해군은 거의 궤멸된 상태이고 현재 러시아와 터키가 가장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마니아가 러시아와의 해전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입장에서는 나토를 최대한 잡아둬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북방의 폴란드와 비교해 봤을 때, 폴란드보다 군사력이 더 약한 나라다. 이는 루마니아가 나토에 가입하면서 징병제를 폐지하여 규모가 대대적으로 감축되었고, 약 7만 명 남짓한 중소 규모 군대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나토 입장에서도 루마니아는 불가리아, 폴란드 및 발트 3국과 더불어 러시아와 최전선에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세르비아가 현재 급부상하고 있으며 터키와 그리스가 지금은 조용하지만 에게 해 문제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나토 입장에서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러시아-미국이 협상하여 우크라이나와 종전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동유럽의 지정학은 새로운 체재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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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나토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