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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고향 베들레헴, 3년 만에 성탄 트리 점등…‘희망의 불빛’ 되살아나다
    2025년 12월 6일, 베들레헴 구유광장에서 3년 만에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이 개최됐다. 가자지구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행사는 이스라엘·하마스 간 휴전 분위기 속에서 재개됐으며, 시민들과 관광객이 함께 평화와 희망을 기원했다. 일부 언론은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침통한 분위기를 보도했으며, 교황은 성탄 메시지를 통해 분쟁 지역의 평화를 호소했다. 이번 행사는 종교 간 화합과 공동체 회복의 상징으로 의미를 더했다.
    • 뉴스
    • 지구촌
    2025-12-07

칼럼 검색결과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9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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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7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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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 3년 전, 필자의 러시아 군 헤르손 철수에 대한 견해 - 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서 재현된 러시아 군의 기만술
    3년 전, 러시아 군의 헤르손 철수, 어쩌고 보면 잘한 것이다. 어차피 우크라이나 군은 헤르손에 입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우크라이나 측이 행동한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헤르손에 있어봐서 아는데 헤르손은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에 위치해 있고 흑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지만 본래 그곳은 하류에 형성된 모래톱과 흑해 물살에 의해 형성된 뻘로 형성되어 있는 자연적인 늪지와 갈대숲으로 덮여진 저지대에 속한 지역이었다. 전체적인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가장 저지대에 있는 곳이라 카호프카 댐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헤르손은 매번 홍수를 겪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6일,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우크라이나군의 하이마스(HIMARS) 로켓 공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군이 발사한 하이마스 로켓 6발 중 5발은 러시아군의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으나 나머지 1발이 댐 갑문에 명중했고 갑문이 크게 손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댐의 갑문의 붕괴되면 헤르손은 순식간에 수몰될 것이다. 게다가 안토노프스키 대교까지 공격을 받으니 우크라이나 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보다 가장 큰 것은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수리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이 댐에 집중되고 있고 주 타겟 또한 헤르손의 고립화이기 때문에 러시아 군 입장에서는 오히려 철수하는 측이 이득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미 거의 대피했고 시 자체를 청야할 것은 뻔하다. 게다가 이미 헤르손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헤르손 부지사 키릴 스트레모우소프가 언급하길 러시아 군대는 드네프로 강 동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고, 헤르손 주청사에 게양됐던 러시아 국기도 어느 순간 거두어 갔다. 헤르손 지역에서는 지난 한달 동안 심각한 전투도 없었고, 전선도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런데도 카호프카 댐 갑문의 손상이 심하고 안토노프스키 대교가 완전 폭파되기 전에 떠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미 철수했지만 철수할 것이면 조용히 하는게 아니라 떠들썩하게 정보를 흘리며 기만술을 펼친 부분이 오히려 안전한 철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나도 <삼국지연의>에서 본적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전투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위나라 군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제갈량이 위나라의 사마의에게 철수한다는 정보를 퍼뜨렸다. 사마의는 이 정보를 듣고도 제갈량이 자신들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계책이라 생각해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제갈량이 피해 한 번 입지 않고 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군 지휘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러시아측이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한 우크라이나군 국방정보국 부다노프 국장과 젤렌스키는 러시아 군 철수설을 믿지 않았다. 그 덕택에 헤르손에 남아 있는 4만의 러시아군이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이 매복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 군이 안전하게 철수했음에도 헤르손 시내 진군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인들이 공격하고 있었던 카호프카 댐의 수문을 러시아 군이 오히려 공격해 파괴한다면 헤르손은 수몰되고 우크라이나 군의 사상자가 극심할 것이기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다. 헤르손의 러시아 군을 수몰시키기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던 우크라이나 군 수뇌부의 작전이 오히려 헤르손을 탈환하고도 입성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족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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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7
  •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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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16
  • 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8년 동안 대공의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발생한다. 원래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Yaropolk I)가 즉위하기는 했지만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가 반발하여 키예프를 침략한다. 여기에 막내인 노브고로드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합류함으로써 키예프를 두고 세 형제가 공방전을 벌인다. 실제 키예프 공국의 목적은 지난 1세기 동안의 전쟁 후에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란의 발생과 더불어 비잔틴 제국이 이를 이용하여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를 지원함으로 인해 키예프 공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콘스탄티노플 정교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을 서서히 흡수했고 위성 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이어 새로운 키예프 교회의 수장을 파견했고 그들은 그리스어로 설교하는 비잔틴 사제들이었다. 이에 대해 야로포르크 1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975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신을 보내 키예프 공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한편 키예프 교회에 자주성을 부여하는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키예프를 전복시킬 목적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1세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야로포르크 1세는 기독교를 단절해버렸다. 비잔틴 제국은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조종하여 야로포르크 1세를 비난했고 이어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군을 진주시키자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는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의 군대를 교전 끝에 패주시켰다. 형을 추격한 블라디미르 1세는 결국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살해했고 형의 남은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를 포위하여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를 고립시켰다. 이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과 함께 115개의 질문을 보내어 서방 교회의 예식으로 기독교를 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블라디미르 1세의 목적은 비잔틴 제국과 로마 카톨릭의 간섭을 막기 위해 키예프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 속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자세한 질문이 두 주교에 의해 전해졌고 그 주교들은 슬라브 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심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역시 독립적인 키예프 교회를 거부하였고 이는 양측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1세의 로마를 향한 움직임은 비잔틴 제국을 좀 더 유화적으로 만들어 978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결정 하에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로 인정받았다.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분열된 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회였다. 이러한 가운데 979년 마침내 키예프가 함락되었고 야로포르크 1세는 폐위되었다. 이후 야로포르크 1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고 이러한 야로포르크 1세의 이야기는 후일 기독교 문학에 사용되었다. 980년 키예프에 입성하여 대공의 직위를 승계한 블라디미르 1세는 부친인 스비아토슬라프의 업적을 계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 1세는 8년 동안 정쟁으로 인하여 생긴 슬라브 부족들과 제휴하고 각 부족들의 통치권을 총독에게 이양시켰다. 블라디미르 1세는 스비아토슬라프와는 달리 내치의 안정을 먼저 시도했고 이를 통해 동부 슬라브 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대공에 승계하자마자 외부와의 전쟁을 시작했던 군주라면 블라디미르 1세는 내부의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군주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시대를 거치며 키예프 공국은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도 비견할 만한 위세를 갖추면서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는 러시아 민요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현재 화폐 1 그리브나의 모델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동슬라브 권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1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아내를 7명, 첩을 800명이나 두었으며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 통합하는 일에는 광적일 정도의 군인이며 행정가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먼저 8년간의 내란 동안 심각하게 추락한 키예프 대공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986년 군사 원정에 나서 서쪽으로 폴란드를 공격했다. 8년간의 혼란으로 인하여 폴란드에게 함락되었던 갈리치(Galichi)를 탈환했고 987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여 리투아니아 왕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는 스웨덴 왕국의 구원군 함께 키예프 군을 방어했으나 키예프의 강력한 기마 전사들로 인하여 두 동맹군은 거의 전멸되었고 블라디미르 1세는 발트 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키예프는 발트 해와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대초원 깊이 들어와 있던 페체네그 인을 공격하여 벨라루스 초원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 인하여 페체네그는 발칸으로 남하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988년에는 폴란드 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리보프(Liviw) 외곽으로 몰아낸 다음 그 경계에 방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했다. 이어 발칸으로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제국의 황녀와 결혼을 제의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를 받아들여 비잔틴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고 지속적인 교역 및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불가리아 · 로마 교황 등과의 교류도 넓혀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이로 인하여 언어와 문자의 보급에도 힘쓰고 그리스 문헌도 도입하여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슬라브는 이념적 통일성을 갖게 되고 대공과 공후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봉건제가 촉진되며 비잔틴 제국 및 유럽 세계와 가까워져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슬라브 인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전통 샤머니즘 신앙에 젖어 있던 키예프 공국은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키예프 공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 1세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교를 숭상하고 있는 하자르 인이 블라디미르를 찾아와서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가?” 그러자 하자르인 사절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야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죄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찾을 수 없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 인이 왔다. 불가르 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 라고 말하며 평소 호색적인 블라디미르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슬라브 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제국의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할머니인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했다. 독일에 찾아간 사절들은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왔다. 사신은 블라디미르에게 한 보고에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 라고 말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관할하는 정교를 선택했다 한다. <러시아연대기>에 담긴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전래에 대한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 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존치했던 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공국은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키예프 공국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와 많은 부분에서 떨어져 있는 관계로 동양과의 여러 교류를 모색하기보다는 유럽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 세계는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면서 키예프 공국이 사실상 동방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 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정교회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기존의 호색 적이고 절대자로써 생활을 벗어나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블라디미르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으며 동방 샤머니즘의 토템들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들을 세웠다. 후일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슬라브 부족들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동방 샤머니즘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긴 했으나 정교회가 민간신앙 요소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한편 슬라브 부족들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다소 투박한 동양 샤머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는 또 슬라브 부족장들에게 정착민의 세계로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정교회 성당인 동정녀 마리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키예프 공국이 지배하던 영토 곳곳에 많은 성당이 들어섰다. 키예프 공국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이른바 동방 샤머니즘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법률의 역할도 이루어졌다. 또한 키릴 문자의 보급과 더불어 근대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동방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제국,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키예프 공국에는 비잔틴 제국의 문화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 입각하여 성상 숭배에 관한 여러 성물들이 들어왔다. 발칸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마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키예프 공국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유입되어 급속도로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보고로드, 두 곳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Pecherski)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Uspenski) 성당과 드미트리(Dmitri)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Neli) 강변의 포크로프(Pokrov) 성당도 이 때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제국 양식의 프레스코 화와 모자이크 화 부조로 만들어진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비잔틴 제국이 쇠퇴한 뒤 동방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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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5
  • 프랑스의 사르코지, 친러였기에 미운 털이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파리 형사법원이 9월 25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민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중대한 범죄’라고 적시하며 집행정지 없는 즉시 집행(Exécution provisoire)을 명했다. 그리고 10월 31일에 그는 수감됐다. 혐의는 2007년 대선에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불법 자금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18년 전의 사건을 이제 와서 유죄 판결 내린다는 것은 마린 르펜에 이은 정치 탄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올해 3월 프랑스 법원은 공금 횡령 혐의로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5년간 피선거권 박탈도 명령했다. 현재 프랑스의 야당은 정부의 긴축 예산안과 재정 적자 및 빈곤율 급증 등 사회경제적 위기를 이유로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프랑스 하원에 제출했다. 프랑스 국가 부채는 5,000조 원에 달한다. 나라 경제가 파탄 위기이기 때문에 마크롱의 입장에서 최대 정치적 위기에 몰린 셈이다. 마크롱은 이같은 정치적 위기를 유력한 야당 후보들과 전직 대통령에게 돌리며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내부적인 그와 같은 마크롱의 상황과 사르코지의 친러적인 성향이 맞물린 것으로 본다. 18년이나 지난 캐캐묵은 사건을 가지고 이제 와서 기소한 것은 마린 르펜에 이어 다른 유력한 인물 하나를 희생시켜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다. 사르코지는 집권 시절, 여러 말이 많이 나올 정도로 정치가로써 실격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우선 2013년 프랑스 검찰은 사르코지를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대통령 선거 전에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의 릴리안 베탕쿠르로부터 정치자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이어 2014년 질베르 아지베르 당시 대법관에게 자신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 수사와 관련한 내부 기밀을 제공하는 대가로 모나코에서 퇴임 후 일자리를 약속한 혐의를 받아 집행유예 2년을 포함해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어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법 선거 자금을 조성한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에게도 500만 유로를 받은 혐의로 조사 중이었지만 이제야 해당 혐의가 적용돼 구속됐다. 게다가 여자관계가 매우 문란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던 2008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거부했다. 그러며서 미스트랄급 강습 상륙함을 러시아에 수출하려고 했으며 탈레스 회사 등의 프랑스의 방산 기업이 러시아 전차 부대를 현대화 시키는 것을 승인했다. 이어 프랑스제 열상 등의 핵심 기술을 이전하는 것도 승인했으며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 중재 역할을 자처하는 등의 선명한 친러 행보를 보여왔다. 2015년 10월 29일에는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고립을 중단하고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와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20년 사르코지는 러시아에서 정책고문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푸틴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맹우로 지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사르코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실제로 젤렌스키도 메르켈과 함께 사르코지의 이름을 언급하며 부차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우선 사르코지 자신이 주장했던 것이 현재 이 순간에도 옳다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부차 현장에 가지 않겠다고 발언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메르켈과 다르게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는 중이다. 당시 대선 정치 자금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추가 조사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도 보지만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어떻게 했는지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로 인해 러시아와 친하게 지낸 것 이후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메르켈과 다르게 사르코지에 대한 비난은 크게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EU 가입에 다시금 반대하면서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있으며 국제 사회의 감시 아래 국민투표를 실시해 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르코지는 여전히 친러 성향을 숨기지 않으며 러시아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크라이나와 프랑스 내에서 비판이 쏟아졌지만 사르코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후 사르코지는 우크라이나에 지속적으로 지원하려는 마크롱을 비난했으며 최근 마크롱이 위기에 몰리자 이와 같은 비난의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마크롱은 18년이나 묵혀 놨던 카다피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사건을 터트리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르코지는 부패한 인물인 것, 카다피를 배신하고 리비아를 폭격해 카다피를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인물은 맞다. 그가 잘한 것은 친러 관계를 유지하여 유럽에 전운을 드리우지 않게 했다는 것이고, 프랑스의 경제 상황이 워낙 엉망이었기에 긴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가 카다피에게 받은 자금으로 인해 감옥에 있지만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한 비리를 캔다면서 이를 활용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보여 진다. 결국 마린 르펜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출소할 때 되면 러시아 게이트를 터뜨려 그와 관련 비리를 캔다면서 추가 조사를 하여 어떻게든 혐의 입증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결국 마크롱은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야당 인사들을 계속 희생 제물로 삼을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독재 아니던가? 마크롱은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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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4
  • 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스비아토슬라프는 942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이고르 대공과 올가 대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올가 대공은 52세에 스비아토슬라브를 낳았다. 스비아토슬라프가 3세 때인 945년에 아버지 이고르 대공은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스비아토슬라브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살해한 드레블리예 부족들과 전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주변 신하들이 스비아토슬라프를 말 위에 앉히면 그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영토 방향으로 창을 던지곤 했다. 창은 당연히 말 아래로 떨어졌지만 부친을 살해했던 원수를 향한 복수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고작 4세였다. 소년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스비아토슬라프는 슬라브에서 가장 출중한 장수로 성장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된 사실은 연대기 작가가 묘사한 그의 행적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막을 치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야전에서 말안장을 머리에 베고 얇은 천 조각 하나 걸치고 잘 뿐이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거의 대부분 날고기만 먹었고, 물은 냇가에서 마셨다. 그는 진정한 장수였다. 상대방과 전투를 치를 때도 절대 기습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사신을 보내 ‘한판 붙자’는 전갈을 보내고 전투를 시작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마치 표범처럼 빠르게 달렸다. 덥거나 춥거나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친인 올가 대공이 세례를 받으러 콘스탄티노플로 갔을 때 스비아토슬라프가 이를 동행했는데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설명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표현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키는 그리 크지 않은 중간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의 인상은 강했다. 가슴은 딱 벌어져 넓었고 목은 굵었으며, 눈은 하늘색이었다. 눈썹은 진했고, 코는 평편하고 낮았다. 콧수염은 무척 길었으나 구레나룻은 거의 없었다. 머리 스타일은 변발을 하고 있었다. 변발은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진주와 루비가 달린 금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을 다녀온 직후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서부 우크라이나 슬라브 계통의 민족들과 일부 마자르 족은 스비아토슬라프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직접 서부 슬라브 인들과 마자르 족에게 가서는 거짓 평화조약을 제시하고 그들을 자신의 진중에 초대했다. 그리고 연회를 베풀어 슬라브와 마자르의 귀족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이어 서부 우크라이나 백성들과 마자르족에 대해서도 화해의 표시를 보내 안심시켜 놓고 공격하여 약 7,000명을 살해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전형적인 무사형 군주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는 흔히 코사크의 대장이나 바이킹 선장에 비유되고 있는데 확실히 그의 풍모와 복장 · 습관에는 초원지대의 코사크족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러시아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정을 다닐 때 그는 마차도 솥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어떤 고기도 삶아먹지 않았다. 오로지 말이나 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길쭉하게 베어내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또한 천막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다만 안장깔개를 펼쳐 깔고 안장을 머리 밑에 괴면 그만이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962년 즉위하자마자 키예프 공국을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정복하며 키예프의 국가안보를 지켜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군사 원정은 964년에 본격화 되었다. 대규모 동방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키예프의 동쪽으로 진격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동슬라브 계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핀족과 투르크 계통 민족들을 자신의 왕국으로 복속시켰다. 당시 이슬람교를 숭배하고 있던 볼가 강 유역의 볼고 불가르를 정복하고 키예프 공국보다 먼저 지난 세기에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교를 숭상하는 국가인 하자르 제국을 공격했다. ‘하자르인의 국가’라는 뜻의 하자르의 수도 이틸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스비아토슬라프는 3년 만에 키예프로 돌아와 연로한 모친인 올가와 그의 세 아들을 만나면서 잠시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965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하자르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온 동슬라브의 비아티치(Biatichy) 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오카(Oka) 강변의 마자르 계 부족들을 정복한 후, 볼가 강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 페체네그를 공략하고 우랄 강 인근까지 약탈했다. 페체네그를 제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다시 하자르 제국을 향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스비아토슬라브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어 벌어진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의 군사는 하자르의 군대를 격퇴했다. 하자르 제국의 수도 이틸을 다시 한 번 유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카스피 해 서쪽으로 내려가 사만다르(Samandar) 요새를 파괴하고 그곳에서 다시 서진하여 알란 인과 카프카스의 몇몇 부족을 정복한 다음 다시 돈 강 어귀에 있던 하자르 제국의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하자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만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공격으로 하자르 제국이 쇠퇴했다는 것은 키예프 공국이 지역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시아계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주던 하자르 제국의 완충 역할이 종결됨으로써 키예프 공국이 직접 그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는 부정적 의미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의 동방원정으로 인하여 동슬라브 족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던 돈 강과 볼가 강 유역 전체가 키예프 공국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동방 원정을 끝낸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방 원정에 착수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서방 원정을 시작한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Pokas)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968년 제1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이웃 나라인 키예프 공국의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면 제국의 금을 보상금으로 주겠음을 제안했다. 황제의 제안을 수락한 스비아토슬라프는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해 군사적 성과를 올렸다. 제1 불가리아 제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 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다뉴브 강 유역에 진출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의 다뉴브 평원을 정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지역을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불가리아는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는 황금과 비단, 포도주와 각종 과일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는 은과 말이, 러시아로부터는 모피와 밀랍과 꿀과 노예들이 들어오는 집결지였다. 그러한 경제적인 부분에서 풍요를 직감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다뉴브 강 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려고 하였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평소에도 “키예프에 남아 있기보다는 다뉴브 강에 있는 페레야슬라베츠(Pereyaslabech)에 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가 자신의 왕국인 키예프 공국의 중심이라는 말도 함께했다. 하지만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를 장기간 비워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가 키예프를 비운 사이에 아시아계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 인들이 키예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키예프로 퇴각했다. 그곳에는 연로한 어머니 올가와 어린 세 아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적인 페체네그의 침공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불가리아보다 더 위협적인 스비아토슬라프가 발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은 비잔틴 제국의 전략적인 외교의 힘이기도 했다.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전략은 2,000여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비결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페체네그를 격퇴한 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주변에 또 다른 강대국이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의 키예프 공국이 다뉴브 강 유역으로 대규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제는 키예프 군대를 기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산맥을 넘어 침공한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격퇴했고 이를 추격하여 발칸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몰아붙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병참선이 끊길 뿐 아니라 후방 역습의 위험에 처한 스비아토슬라프는 급히 다뉴브 강으로 후퇴했고 이어 플로이에슈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협상을 제의했고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과 크림 반도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비잔틴 제국에 굴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과의 교역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으로써 키예프로 퇴각해야 했다. 6만 대군 중 비잔틴 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여 군사만을 데리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스비아토슬라프는 페체네그 인의 기습을 받았다. 이 때 전투에서 키예프 군대는 거의 전멸되고 스비아토슬라프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승리의 환호감에 젖은 페체네그 인들이 스비아토슬라프의 머리를 베어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에 금을 씌워 술잔을 만든 후에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비아토슬라프의 용맹함과 지혜가 자신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사망한 972년부터 980년까지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공석에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대공 지위에 올랐고 이 때부터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000년, 새 천년들어 폴란드에서 슬라브족 전체에 있어 가장 위대한 위인 100인을 선정하였는데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극도로 증오한 폴란드였지만 슬라브족 전체로 봤을 때,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남긴 슬라브족 통합과 단합의 위대함은 인정했던 것이다. 스비아토슬라프 1세는 모든 슬라브족의 영웅이자 정복군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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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3
  •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우크라이나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은 대체로 지난 6월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동원 병력들이 대기소로 사용되는 극동 철도 공장 물류 센터에서 동원 대상자들이 사실상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영상에는 일부 강제 동원 대기자들이 군사위원회 징병관들에게 고함치며 화를 내고 대들다가 문을 바리케이드로 막은 다음, 몽동이로 무장하고 탈출하자며 선동했다. 하지만 나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크라이나의 군 특수부대와 경찰의 강력한 곤봉 진압으로 인해 이들의 탈출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강제로 최전선인 포크롭스크로 이동되었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러시아군의 총알받이 되게 했다. 요즘 강제 동원에 반기를 든 군인은 무조건 러시아군과 마주하는 최전선에 배치된다고 한다. 이는 징병 거부로 인한 불만을 잠재우고, 우크라이나 군 내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보기로 보여 진다. 더불어 지난 8월에는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서부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는 동원 대상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로코모티브 경기장을 길거리 강제 동원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문을 부수고 난입한 사건이 그것이다. 필자도 이 사건을 포스팅한 바 있다. 이는 시민들이 분노해 동원 대상자들을 탈출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당황한 징집 사무소 측은 급히 경찰을 불러 주민들의 난입을 봉쇄하고, 동원 대상자들을 서둘러 뒷문으로 빼돌려 바로 전선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사건은 숫자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진희 기자의 <바이러시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동원 관련 민원 건수는 1월~10월 사이에 약 5,0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전년 대비 50%가 증가한 셈이고 이는 1~5월에 1,600건 정도였지만, 이후 3,400건이 늘어났다. 6월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고 <바이러시아>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 군 당국은 최악의 병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동원했다. 그러다보니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43세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군의 평균연령 약 38세보다 5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 초반 자진 입대했던 젊은 예비군들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전투 병력들은 고령화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의 연령은 앞으로 더 올라갈 예정으로 이미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즉,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우크라이나 중년 남성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동원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라면 더 이상 현역과 비슷한 예비군이 아닌 민방위도 끝나는 나이대다. 이에 젤렌스키는 물러서면 국가 자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군에 대한 자진 입대와 결사항전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려 3년 8개월을 달려온 전쟁에 우크라이나인들은 거의 지쳐가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동원 인식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어떻게든 해외로 도피하는 것, 혹은 잠적하여 아예 동원을 피하겠다는 분위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더불어 동원을 거부하며 길거리에서 징집관을 폭행하거나 총을 쏘며 도주하는 사태가 잇달으고 있으며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합세해 동원 대상자를 도피시키는 사건까지 온갖 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동원을 거부하는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 주 크레멘추크에서는 한 남성이 징집 사무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던 도중에 권총을 꺼내 직원들에 발사하여 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남성은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는 징집관들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하던 중 시민들과 시비가 붙으며 충돌해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징집용 차량까지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했는데 그녀의 경호원이 우크라이나 동원 징병관에 의해 군사위원회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졸리는 이날 니콜라예프에서 헤르손으로 가는 길에 검문검색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동원 사무소로 끌려갔다. 졸리의 일행을 태운 SUV 차량 2대가 전날 밤 니콜라예프 주(州) 피브덴누크라인스크(Південноукраїнськ)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병역 서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요 인물'인 졸리를 호송 중이라 설명했지만 검문소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그를 징병사무소로 보냈다. 이에 황당한 졸리는 징병 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석방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러시아(https://www.buyrussia21.com)에 의하면 결과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징병 사무소 측은 졸리가 화장실이 급해 찾아왔다는 거짓말로 해명했고, 그녀의 경호원도 석방됐다고 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크라이나 네티즌들로 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같은 할리우드 스타인 브레드 피트가 길거리에서 징병관들에게 끌려가는 밈까지 만들어져 등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 강제동원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졸리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강제동원이 더 이상 가짜뉴스가 아니다라는 것을 오히려 입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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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캄보디아가 2025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는 수혜 국가 1위로 올라섰다 한다. 한국은 2025년 총 92개의 협력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캄보디아가 지원 규모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고 KOICA에서 밝혔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 UN 및 각 국가들로부터 원조 받아 연명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경제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원조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ODA를 통해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국제 사회에 헌신하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ODA도 윤석열이 당시 이러한 일환으로 한 것이라 믿는다. KOICA는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2025년 캄보디아에 총 3억 1,500만 달러(약 4,000억 원)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며 주로 교육과 수자원 관리, 보건위생, 교통 및 농촌 개발 등 캄보디아의 주요 개발 분야에 집중 지원될 계획이라 밝혔다. 당시 개발 원조는 27개의 유상 차관 프로젝트와 62개의 무상 원조 프로젝트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차관을 받아 이루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중 가장 핵심 사업은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추진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Korea-Cambodia Friendship Bridge)’ 건설에 있다. 이 우정의 다리는 2023년에 훈 센과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프놈펜 내 다운펜 지역 야시장 인근부터 쯔로이짱와 반도 끝을 거쳐 껀달 주 아레이 끄삿 지역까지 총 길이 2,375m, 폭 27.5m의 사장교로 건설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 공사는 이미 2024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한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받게 되며, 공사 소요 기간은 5년으로 공사 완료 예상 시점은 2030년이다. 우정의 다리의 설계 및 감리는 유신컨소시엄이 1,885만 달러에 수주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 외 무상 원조 사업으로는 캄보디아 국립 어린이 병원 의료진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23년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1,600만 불(약 208억원)을 투입하여 프놈펜 소재 국립 어린이병원 내과계에 대한 역량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안으로는 국립 어린이 병원 내 내과계 병동을 새로 짓고, 최신 의료기 자재들을 지원하며, 병원 운영 및 의료 인력의 역량을 강화에 나선다. 병원 동은 2026년 3분기까지 지상 5층, 전체 면적 8,715㎡, 총 196병상 규모로 준공될 예정이며, 병원 준공에 맞춰 150여 종 1,900여 점의 의료 기자재가 지원되고, 세부 분과별 전문 인력 초청 연수 및 현지 연수도 이루어졌다. 2024년 5월 훈 마넷 총리의 한국 방문 이후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무상원조(ODA) 지원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정부 때 이루어진 것이다. 캄보디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다는 것은 캄보디아와 준동맹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북한-러시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와 유사한 관계다. 이처럼 준동맹국 캄보디아와 ODA는 2022년 1,789억원, 2023년 1,805억원, 2024년 2,178억원, 2025년 4,353억원 등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ODA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 스리랑카, 네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이 대를 이어 장기 독재를 하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해 있다. 독재에 심화되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들에게 ODA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의존성만 커지게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국가가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 또한 젤렌스키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한 상태로 EU 국가들이 자국을 희생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우크라이나를 마찬가지로 지원했었고 이는 젤렌스키와 각종 정부요원들의 비리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이제 막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고 북한과의 대치로 방위비를 많이 써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부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초저출산과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외국인들의 본국 송금으로 인한 외화 유출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제 미국에 2,000억 불을 투자해야 한다. 이래저래 돈 나갈 곳만 많고, 이러한 상황에 ODA는 우리 형편에도 맞지 않다. 윤석열은 캄보디아에 가서 감당 못할 계약을 하고 왔고, 김건희는 빈곤포르노나 찍고 왔다. ODA는 우리 국민의 혈세로 지원된다.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해 ODA 약속을 남발한 것도 윤석열 정부고,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전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도 캄보디아 전문가도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부산엑스포 유치지원단장 출신이었다. 환장할 일이다. 우크라이나에 또 과도하게 퍼준 것도 윤석열 정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총 2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으며, 2024년 3억 달러는 무상 지원, 2025년 이후 20억 달러는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제공된다 했다. 또한, 1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 사회 부문 지원을 위해 이미 지원한 상태다. 이것들도 다 국민들의 혈세다. 과도하게 우크라이나에 퍼준 것도 이해 못할 뿐더러, 캄보디아에 퍼준 ODA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준 ODA에 대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ODA 명목상으로 뒷돈 챙겨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도 마찬가지이며 폴란드와의 방산 무역 또한 의심할 부분들이 많다. 대우크라이나 지원, 김건희, 삼부토건 및 각 재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벌써 PD 수첩 등 많은 매체들이 폭로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와 함께 비자금 조성하고 캄보디아에까지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여 검은 돈을 세탁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일찍부터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및 조세회피 예방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했지만 부패한 훈 센 집안의 행태로 본다면 이와 같은 협정은 무의미하다.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어 있는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조세포탈지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물쓰듯 쓰기만 한 윤석열 정부가 흑자를 본 부분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캄보디아 ODA와 대우크라이나 지원, 대폴란드 방산 협정 사이에 숨겨진 부패와 비리는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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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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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전, 필자의 러시아 군 헤르손 철수에 대한 견해 - 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서 재현된 러시아 군의 기만술
    3년 전, 러시아 군의 헤르손 철수, 어쩌고 보면 잘한 것이다. 어차피 우크라이나 군은 헤르손에 입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우크라이나 측이 행동한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헤르손에 있어봐서 아는데 헤르손은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에 위치해 있고 흑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지만 본래 그곳은 하류에 형성된 모래톱과 흑해 물살에 의해 형성된 뻘로 형성되어 있는 자연적인 늪지와 갈대숲으로 덮여진 저지대에 속한 지역이었다. 전체적인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가장 저지대에 있는 곳이라 카호프카 댐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헤르손은 매번 홍수를 겪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6일,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우크라이나군의 하이마스(HIMARS) 로켓 공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군이 발사한 하이마스 로켓 6발 중 5발은 러시아군의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으나 나머지 1발이 댐 갑문에 명중했고 갑문이 크게 손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댐의 갑문의 붕괴되면 헤르손은 순식간에 수몰될 것이다. 게다가 안토노프스키 대교까지 공격을 받으니 우크라이나 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보다 가장 큰 것은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수리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이 댐에 집중되고 있고 주 타겟 또한 헤르손의 고립화이기 때문에 러시아 군 입장에서는 오히려 철수하는 측이 이득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미 거의 대피했고 시 자체를 청야할 것은 뻔하다. 게다가 이미 헤르손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헤르손 부지사 키릴 스트레모우소프가 언급하길 러시아 군대는 드네프로 강 동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고, 헤르손 주청사에 게양됐던 러시아 국기도 어느 순간 거두어 갔다. 헤르손 지역에서는 지난 한달 동안 심각한 전투도 없었고, 전선도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런데도 카호프카 댐 갑문의 손상이 심하고 안토노프스키 대교가 완전 폭파되기 전에 떠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미 철수했지만 철수할 것이면 조용히 하는게 아니라 떠들썩하게 정보를 흘리며 기만술을 펼친 부분이 오히려 안전한 철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나도 <삼국지연의>에서 본적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전투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위나라 군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제갈량이 위나라의 사마의에게 철수한다는 정보를 퍼뜨렸다. 사마의는 이 정보를 듣고도 제갈량이 자신들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계책이라 생각해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제갈량이 피해 한 번 입지 않고 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군 지휘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러시아측이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한 우크라이나군 국방정보국 부다노프 국장과 젤렌스키는 러시아 군 철수설을 믿지 않았다. 그 덕택에 헤르손에 남아 있는 4만의 러시아군이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이 매복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 군이 안전하게 철수했음에도 헤르손 시내 진군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인들이 공격하고 있었던 카호프카 댐의 수문을 러시아 군이 오히려 공격해 파괴한다면 헤르손은 수몰되고 우크라이나 군의 사상자가 극심할 것이기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다. 헤르손의 러시아 군을 수몰시키기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던 우크라이나 군 수뇌부의 작전이 오히려 헤르손을 탈환하고도 입성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족쇄가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17
  •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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