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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영국 외무부 장관 발언에 "우크라이나가 영국 무기로 러시아 공격할 수도" 발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영국 지원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한 영국 외무부 장관의 발언에 발끈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국제문제전문가 심민의 글을 통해 "영국은 유럽 대륙을 전쟁의 화난 속에 깊숙이 몰아넣고 있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부 장관을 비난했다. 심민은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캐머런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심민은 캐머런 장관의 발언을 "호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발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캐머런 장관이 키이우 방문에 앞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음을 언급하며, "미국 상전의 입김이 톡톡히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러시아 영토로 확산되고 다시 유럽지역으로 타번져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캐머런 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캐머런 장관의 언급을 두고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며, "우크라이나 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직접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캐머런 장관은 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군사 지원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의 이 같은 입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체적인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과 러시아의 반응은 영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 뉴스
    • 지구촌
    2024-05-07

스포츠 검색결과

  • 인도네시아, 기니에 패해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23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아프리카의 기니에 0-1로 패하며 2024 파리 올림픽 남자축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경기는 9일(현지시간) 프랑스 클레르퐁텐에서 열린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치러졌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달 초 열린 AFC U-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4위를 기록하며 아시아에 배정된 3장의 올림픽 직행 티켓 중 하나를 확보하지 못했다. 대회 8강에서 황선홍 감독이 지휘하는 한국을 승부차기로 꺾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이라크에 연이어 패하며 결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기니와의 경기에서 인도네시아는 전반 29분 페널티킥으로 인해 기니에 선제골을 허용했으며, 후반에도 또 다른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위기를 맞았다. 신태용 감독은 판정에 격하게 항의하다가 연이어 경고를 받고 퇴장당했다. 퇴장 후에도 신 감독은 벤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항의를 이어갔고, 이에 인도네시아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페널티킥 실축으로 인해 추가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는 결국 패배를 막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다. 이로써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올림픽 본선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기록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기니는 U-2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4위에 오른 후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인도네시아를 꺾으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기니의 마지막 파리행 티켓 확보로 이번 올림픽 남자축구에 참가할 16개국이 모두 확정되었다. 이번 올림픽에는 개최국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 도미니카공화국, 스페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모로코, 이집트, 말리, 뉴질랜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일본,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기니 등이 출전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9대회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은 36년 만에 올림픽 본선 무대를 관전만 하게 됐다.
    • 스포츠
    • 스포츠종합
    2024-05-10

과학 검색결과

  • AI 킬러 로봇 시대 도래: 자율 무기의 진화와 그 파급력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율 무기, 일명 '킬러 로봇'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무인 드론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는 가운데, 최근 미국 공군은 AI가 조종하는 전투기와 인간 조종사가 조종하는 전투기 간의 공중전 실험을 진행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군사 전략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인간이 직접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는 현재 상황에서 조만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AI 킬러 로봇이 실현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로봇들은 독자적인 판단은 아니더라도 목표물을 스스로 식별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율 무기로, 현재의 AI 기술로도 비교적 손쉽게 제작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개발 경쟁에 뛰어들고 있으며, 이는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AI 킬러 로봇의 도입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어 군사적 이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부정적인 측면도 상당하다. 가장 큰 문제는 AI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AI의 판단 오류가 발생할 경우 무고한 인명 피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국제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AI 킬러 로봇의 사용이 전쟁 비용을 낮추면서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를 오히려 증가시킬 수 있으며, 전쟁의 인간적 비용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일각에서는 킬러 로봇의 파급력이 핵무기와 맞먹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킬러 로봇이 단순히 한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수단을 넘어, 국제 안보 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AI 킬러 로봇의 개발과 사용에 대한 규제 필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윤리적, 법적, 국제적 차원에서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이는 국제 규범과 정책에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AI와 결합된 킬러 로봇 기술의 발전은 미래 전쟁의 양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사용에 따른 심각한 윤리적,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5-11

칼럼 검색결과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20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9
  •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바라보는 몰도바의 입장
    몰도바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두 나라 간의 드니스트르 강을 중심으로 상호교류는 매우 활발하다. 2017년 1월 4일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 제2의 도시 벤데르에서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과 바딤 크라스노셀스키 트란스니스트리아 대통령이 양측 역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8년에 벌어진 유엔 총회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파견된 모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친 서방 성향의 몰도바 정부가 주도하여 조지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캐나다 등이 함께 마련한 결의 안에 대해 찬반 표결을 벌였고 투표에 참여한 162개국 가운데 64개국이 찬성표, 15개국이 반대표를 던졌으며 83개국은 기권함으로써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옛 소련 국가인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 등이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쿠바 등이었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트란스니스트리아로부터 러시아 평화유지군을 철수하도록 규정한 유엔 총회 결의는 이 지역 분쟁 해결에 대해 훼손할 우려가 있다면서 몰도바가 제안한 결의 안은 아주 증오스럽고 위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몰도바 지도부에서도 유엔 총회 결의에 대해 통일된 견해가 없다면서 러시아는 이 결의를 반러 정서에 기대하여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얻으려는 몰도바 내 특정 정치 세력의 명백한 선동주의적 행보로 간주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배경에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있다며 미국과 서구권도 한데 몰아 비난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몰도바 총리 측이 유엔 표결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다른 반러 행보를 취했다면서 집권 연정은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 흔들린 국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무대를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6년 11월 결선 투표 끝에 대통령에 선출된 친러시아주의자 도돈은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는 파벨 필립 총리 내각과 줄곧 갈등을 빚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파벨 필립 총리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총리가 이와 같은 독단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은 내각책임제를 통치 체제의 근간으로 채택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총리가 운영하고 대통령은 제한적 권한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과 함께 지난 2014년 6월, 파벨 필립 총리 정권이 EU와 FTA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유럽화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2008년 조지아로부터 분리 및 독립을 선포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두 나라밖에 없으며 이 두 나라의 독립도 러시아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는 1992년 몰도바와 맺은 협정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 고작 수 천명의 군대가 몰도바와 유럽에서는 위협이 된다고 철수를 촉구하는 것이다. 한편 트란스니스트리아 독립 정부도 러시아군 철수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서구와 몰도바 총리 정부의 결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백히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서방 몰도바 총리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의 결의를 근거로 러시아군 철수 조치를 강행시키려 할 경우 트란스니스트리아 내 러시아인들이 반발하면서 2014년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된 것과 유사한 '제2의 크림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은 이와 같은 결정이 취소되었지만 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 사태는 우크라이나-돈바스 사태 못지 않은 또 다른 동유럽의 새로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1일 중립 지역에 대한 차량 번호판이 도입이 러시아의 주도로 유엔에서 주최되어 가결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은 몰도바를 포함한 다른 국가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5년 몰도바의 차량 번호판 체계를 따르면서 글꼴이 다르고 몰도바 국가 표식이 없는 대신 "MD" 스티커로 몰도바 차량임을 표시하는 새로운 번호판이 도입되었다. 해당 번호판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외부에서는 몰도바의 차량으로 취급받으며, 2021년 9월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차량의 입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란스니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몰도바의 MD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정부를 달래면서 러시아와 연결될 수 있는 조치였음을 상기시켜 준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친서방 성향의 마이아 산두가 당선되면서 갈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두 대통령은 당선 직후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와 다른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몰도바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일부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몰도바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자국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막지 않고 있다. 다만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은 친서방 몰도바 인사가 아닌 친러 몰도바를 인사를 찍으며 자신들의 현 상황을 우선 유지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친러 성향의 몰도바 후보자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방문해 유세하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미승인국이면서 내륙국이기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몰도바의 1인당 GDP가 유럽 최하로 나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인 것도 있다. 소련시절에는 발전된 공업 지대였지만 분리독립 선언 이후로 내륙국인데다가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까지 겹쳐서 낙후되어 버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경제적인 지원을 보내주고는 있지만 미승인국이라 대규모 지원을 보내주기에도 외교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공장을 건설한다 해도 수출을 하거나 러시아로 물자를 공급하려면 반드시 우크라이나를 거쳐야 되다 보니 그 효과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의 사실상 주 소득원은 러시아 등으로 가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러시아 루블을 자국에 송금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외화벌이가 국가의 주 수입원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몰도바가 EU 가입을 선언하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은 이미 소련과 분리된 이후에 했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수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러시아의 위협이 가속화 된다 생각한 몰도바에서 EU 가입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에 적극 협력하겠다 밝혔고 자국에 러시아군 1,500명이 주둔한 상태라 이들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변수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몰도바의 군대는 예비군까지 합쳐 8만 명도 되지 않아 러시아군 1,500명의 숫자가 매우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우크라이나 측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가는 물류를 끊어 버리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고립되었다. 그래서 몰도바에게 인도적인 물자 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까지 왔다. 러시아도 오데사와 미콜라이프도 아직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라, 몰도바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완전히 멸망 혹은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다. 러시아 군이 수송기로 물자를 실어날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몰도바에 대한 경제 원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수송기가 자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왕래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공망 체계가 붕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5월 9일, 러시아 전승기념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수도 티라스폴에서는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어 나치 독일의 축출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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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上편)
    유고슬라비아가 1992년에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2개의 공화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마침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이 때도 국민투표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 때의 국민투표는 예상과 다르게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기초하게 된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면서 신(新) 유고슬라비아로 불리게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 불리며 국제 무대에 정식 승인되었다. 몬테네그로 지역은 1992년부터 벌어지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내전 등을 피해갈 수 있었으며 이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달리 실제 전쟁을 통한 이해 당사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신 유고슬라비아 구성 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지지했던 국가였다. 이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2년 국민투표에서도 96%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잔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은 독립파는 국민투표를 보이콧 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열할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의 전쟁과 보스니아 내전, 이후에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서 신유고슬라비아가 매우 실망스런 행적을 보이게 되면서,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피폐해지자, 몬테네그로의 독립파들은 이를 근거로 세르비아와의 연합파를 공격하는 테러를 저지른다. 이 사건은 티토그라드 (현 포드고리차)의 국영 우체국과 인근 경찰서에 총격을 벌이는 테러를 저지른 것인데 이로 인해 보스니아 지역에 비해 치안이 그나마 안전한 몬테네그로으 민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지지했던 모미르 불라토비치(Momir Bulatović) 몬테네그로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를 받아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국민들 다수가 독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독립파의 중심 인물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는 세르비아를 버리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밀로셰비치 정권과 협력했으나으로 밀로셰비치 정권의 지지가 약화되고 블라토비치도 지지력이 떨어지자 독자행동으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다. 사실 몬테네그로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세르비아인과는 같은 민족이었으며 같은 문화도 향유했다. 그러나 여기에 민족적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크로아티아와 같이 이탈리아와 가까이 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왕국의 직할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즉 정체성이 세르비아와 이탈리아, 양 국가 및 민족에서 혼선이 빚어진 셈이다. 특히 몬테네그로 남부, 쉬코데르 호수 일대 거주민들은 알바니아계가 많았기에 사실상 몬테네그로의 정체성은 어디에다 특정지어야 할지 명확한 결론조차도 없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때는 세르비아인이어도 몬테네그로에 살면 몬테네그로인이라는 식으로 인구 조사에 응답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딱히 세르비아인이라는 판단보다는 지역적, 속지주의적(Territorial principle)인 입장을 상당수가 고수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본인 정체성을 세르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몬테네그로 인구의 30% 가까이 되지만 나머지는 속지주의적 정체성을 고수해 몬테네그로 토착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집단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자주 교역하던 이탈리아의 관계도 끊기게 되었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보다 상황이 더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한 집단 서방의 제재는 몬테네그로 내 지독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디에도 지원 받지 못한 채,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 때 주카노비치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내세운 것은 그동안 사용해 온 화폐인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신유고슬라비아는 1994년부터 화폐 개혁을 통해 노비 디나르(Novi Dinar)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예 고정환을 독일 마르크로 정하고 통화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방지했다. 그로 인해 통화가 부족하여 한동안 이로 인해 은행 앞 집단 시위로 혼란을 가져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 인플레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한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무려 500,000,000,000디나르 지폐까지 나오고 두 달 뒤에 정상적으로 화폐의 단위를 내렸지만 이 또한 20일 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디나르 화폐를 다시 도입하는 등, 혼란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지라 주카노비치 총리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1996년 주카노비치는 독일로 가서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주카노비치는 몬테네그로의 화폐 단위로 독일 마르크를 전격으로 도입하기로 합의를 보고 독일을 위시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이에 지지의사를 밝혀오면서 결국 독일 마르크가 몬테네그로의 고정 화폐가 된다. 블라토비치 대통령과 세르비아계는 이에 집단반발했다. 세르비아계는 주카노비치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배경으로 신유고슬라비아 자채를 해체시키며 근간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주카노비치의 조부인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의 전쟁 범죄 이력까지 공개하며 "아직도 나치를 끊지 못하고 있다(Још увек не може да престане да буде нациста)."며 적극 비난했다. 이 얘기가 나온 이유는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트니치에 속한 상태에서 수많은 유태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체트니치 소속의 중장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몬테네그로를 점령했던 당시 고위 협력자였다. 그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오그라드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체트니치에서 활동 이력은 연좌제처럼 대를 이어 손자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유고로부터 독립에 찬성하는 독립파들은 독일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항변한 불라토비치 대통령은 1998년에 총리 주카노비치에 의해 밀려나 대통령을 사임했다. 주카노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최악인 상태에서 이를 해결해 보기 위해 산업 민영화 정책을 시행했다. 1998년 당시 가치가 45억 달러로 추정되었던 몬테네그로의 산업은 결국 총 7억 3500만 달러에 매각되었고 이 매각한 개인 자본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다시 사들였다. 결국 몬테네그로의 산업 민영화로 인한 국고 충당은 영국과 미국, 독일에게 대부분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1998년에서 2014년 사이에 민영화된 198개 기업 중 176개가 파산했다. 국가 노동력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고 빈곤이 극에 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는 동안, 주카노비치의 재산은 눈덩이 불듯 불어났다. 2010년 5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주카노비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도자 20인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그와 같은 부의 축적이 시작된 것 또한 1998년 몬테네그로 산업 민영화 사태 때부터였다. 인디펜던트에 의하면 주카노비치의 약 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부의 출처를 "신비적"인 일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니 얼마나 급격히 재산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주카노비치의 민영화 과정에서 그의 친인척들과 그와 유착된 몬테네그로 마피아들에게 많은 국가 자산이 넘어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몬테네그로의 검은 돈은 돌고 돌아 판도라 페이퍼스(Pandora papers)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같은 상황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다를게 없다. 다만 지금은 몬테네그로에서 그러한 악습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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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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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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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현재 민족 갈등 우려에도 EU 가입 지속 추진 중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 독일과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복 장관은 2024년 3월 5일에 갑자기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지정학적 필요성(Geopolitical Necessities)’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에 대한 통합과 가입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2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국무총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지위 부여를 축하하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들며 보스니아의 조속한 가입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 유럽 5개국은 지난 2022년 7월 EU 이사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조속한 가입 후보국 지위의 부여와 가입 절차 개시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와 달리 보스니아의 가입에 대한 협상 개시를 망설이는 EU 집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4년 1월 26일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무장관은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코나코비치 장관을 만난 이후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같은 해, 7월부터 시작되는 자국의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과 에너지 및 야망을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통합과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지난 해, 2023년 11월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 인터뷰에서 EU 집행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 가입 요청에 대해 홀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샬렌베르크 장관은 이미 2016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던 보스니아에 앞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가입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EU의 서부 발칸 지역 확장이 지정학적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은 1995년 이후에도 보스니아로부터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편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은 2016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신청서 제출과 2022년 11월 분리주의 성향 도딕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딕 대통령은 1998~2010년 사이 두 차례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2018~2022년 동안 세르비아계의 몫으로 돌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0년과 2015년에 이어 2022년 7월 스르브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3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재임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꾀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도딕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스르브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국방, 사법, 조세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도딕 대통령은 1995년의 데이턴 협정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보스니아라는 단일 국가로 편성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묶어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내 UN 평화유지 활동과 데이턴 협정 이행을 감독하는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 대표는 2023년 10월 도딕 대통령이 데이턴 협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보스니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딕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압력이 거세지자 2024년 1월 8일 로이터(Reuters)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쟁이나 혁명을 통한 분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외세를 배제한 보스니아 내 다른 정파들과는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치권 존중을 주장했을 뿐이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9일 그는 스르브스카 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공화국의 날을 맞이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다시금 보스니아 중앙 정부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 중앙정부는 스르브스카에서 기념하고 있는 공화국의 날을 자국 내 민족 갈등을 조장하는 불법 행사로 규정 및 규제하고 있지만 도딕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날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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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벨라루스의 2020년 시위 당시,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의 변화!(Перемен!)
    벨라루스 2020년 시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1991년부터 동구권에서 울려퍼졌던 민주화의 상징인 노래 Виктор Цой (빅토르 최)의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도 함께 불렸다.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인 가수가 빅토르 최였는지도 모른다. 이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 2020년 유럽에서 마지막 장기집권국가인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시민들, 서유럽식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다시 불려졌다. 이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소련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로마노프 왕조 이후, 가장 최악의 서민 경제 상황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원하는 그 마음을 대신한 노래였다.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Перестройка (뻬레스뜨로이까)와 Гласность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한 직후에 이 음반이 나왔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진 대작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이 노래는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으로 "변화를 원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동유럽의 열망인 개방의 상징인 노래가 된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 "아사"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노래가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노래가 바로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이다. 그리고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0년 후, 이번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벨라루스 경찰당국은 2020년 8월 12일 민스크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뻬레멘!'이 울려퍼지자,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 디제이(DJ)들을 즉각 연행해 갔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반주없이 '뻬레멘!'을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끌려간 DJ들은 풀려난 뒤 내무부 차관급 인사에게 밀실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의 MZ 세대들은 구시대적인 루카센코의 체제에서 벗어나 서방이 추구하는 민주국가로써의 Перемен! (변화)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벨라루스만의 Перемен!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원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특히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뻬레멘(Перемен)을 모든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은 지금 현재, 현 세대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뻬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쎄르짜)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뼤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글라자)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브 나쉠 쓰메헤 이 브 나쉬흐 슬라자흐)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이 브 뿔싸씨이 볜)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믜 쥐둄 뻬레멘)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에릭뜨리췌스끼이 스볫 쁘라달좌엣 나쉬 뎬)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이 까로브까 앗 스삐췍 뿌스따) 성냥갑은 비어버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노나 쿠흐녜 씨님 츠볘뜨꼼 가릿 가즈)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 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에따 스헤마 쁘로스따) 간단한 일이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이 볼쉐 녯 니췌고, 브쎄 나하딧쌰 브 나쓰)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믜 녜 모쥇 빠흐바스땃쌰 무드라스뜌 글라즈)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이 우멜릐미 줴스따미 루끄)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남 녜 누쥐노 브쎄 에따, 취또븨 드루그 드루가 빠냐뜨)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딱 자미까엣쌰 끄루그)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이 브드룩 남 스따노빗쌰 스뜨라쉬나 췌또-따 메냣)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벨라루스 MZ 세대들의 시위가 이웃인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 일부 도시에서도 경제 문제와 더불어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들이 폭발해 반(反) 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세이 나발니 등 몇몇 반(反) 정부, 반(反) 체제인사들은 벨라루스 시위대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했다. 한편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가 성공한다 해도 루카셴코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 분배 정책을 허사로 돌려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국가주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구좌파적인 루카센코의 성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카센코는 현재 무소속이지만 과거에는 급진 좌파정당 소속이였고 현재도 구소련 시기와 비슷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그 문제인데 그러한 정책들이 극우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조지아, 우크라이나는 목적이 반러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도 같은 목표점을 두었던 반면 벨라루스 반(反) 체제 인사, 시위자들도 반러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반러 운동이 목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루카센코의 실각이며 루카센코를 밀어주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가족이자 친척이라 생각하고 동족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이 조지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러 시위와는 다른 부분이다. 물론 벨라루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부를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루카센코를 몰아내더라도 친러 정권을 유지하자는 시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경우 반러감정에다 지역주의가 결합된 경우이지만, 벨라루스는 크게 특정 지역에서 이민족들이 벨라루스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이탈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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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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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루마니아와 몰도바, "베사라비아(Besarabia)" 이야기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으로 가는 통일대로 주변의 건물 벽면들을 보면 가끔 스프레이로 뿌려진 그레피티에 Besarabia e Romania!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뜻은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다!"라는 내용인데 이 글귀를 눈여겨보면 루마니아의 곳곳에서 같은 표어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그레피티 표어는 루마니아 뿐이 아니다.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표어 글귀의 다른 점은 루마니아에서와 다르게 훼손당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단어 중간에 “nu”를 삽입하면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가 아니다!(Besarabia nu e Romania!)”라는 뜻이 되는데 대개는 그런 식으로 훼손되어 있다. 그와 같이 훼손하는 자들의 정체는 아마 친러 세력이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가가우지아 자치 공화국 지역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친러계 사람들이고 국가로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베사라비아(Besarabia)는 몰도바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네스트르 강 서안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루마니아는 이 베사라비아 지역을 수복해야 할 옛 고토로 생각하고 있다. 인종적으로 같은데다가 같은 루마니아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거나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독립해야 했던 것도 아닌게 유럽의 실상이다. 복잡한 국가 간의 관계와 영토를 둘러싼 유럽의 오랜 분쟁사 중 한 무대이기도 한 베사라비아는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봉신국으로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할양되었다. 이후 100년 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도중에 등장한 몰도바 민주 공화국이 1918년 대(大) 루마니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지만 적백내전으로 분주한 상황임에도 러시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탄생한 소련은 드네스트르 강 서안에 몰도바 소비에트 자치공화국(ASR)이 세워질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베사라비아에 대한 영유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에 대한 최후 통첩으로 소련군의 평화적 베사라비아 진주를 가능하게 했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이 탄생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루마니아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전쟁 중 루마니아가 나치 편에 서서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각 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와 반비례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몰도바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세를 띤 국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소수 민족의 축출을 주장하는 몰도바 인민전선(PFM)과 같은 민족주의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1989년 몰도바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몰도바어와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90년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몰도바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소수 민족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고 가장 먼저 이에 반발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 슬라브계 인구가 다수인 드네스트르 강 동안의 트란스니스트리아였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9월 2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뒤이어 터키계 주민들이 다수인 남부의 가가우지아 지역이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했다. 두 지역의 독립 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루마니아와의 통일과 소수 민족의 축출과 같은 과격한 인종주의적 태도를 취했었던 인민 전선의 등장 때문이었다. 인민 전선이 주도하는 가운데 몰도바는 가가우지아보다 일주일 늦게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미 무력 분쟁이 촉발된 직후였다. 1990년 11월에는 키시네프 인근 두바사리의 드네스트르 강을 가로지른 다리에서 몰도바 측이 무력 진입을 시도하면서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드네스트르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드네스트르 강 지역은 다뉴브 지역의 최대 화약고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는데 1992년 3월 2일 몰도바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선제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경계인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소련 시절부터 주둔하고 있던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로 구성된 14군이 음성적인 지원에 나섰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수물자 지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역시 몰도바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나서게 된다. 1991년 7월 21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사한 1,000여 명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민간인이었다. 양쪽 모두 정규군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경찰과 민병대, 자원병을 동원한 결과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분쟁이 일어날 역사적 연원이야 여러 원인들이 존재하지만, 독립을 전후해 인종 갈등을 부추기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은 전쟁 이후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권을 장악한 후 서둘러 도입한 시장 경제는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고 몰도바는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1994년 독립 이후 치른 첫 총선에서는 민주농민당이 승리해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의 변화가 이어졌다.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고 헌법 개정과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마침내 가가우지아 지역은 자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된 상태였고 부정부패의 만연과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붕괴 등으로 소련 해체와 독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불만 또한 깊어졌다. 2001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몰도바 공산당은 유럽에서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당으로 기록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긴장도 완화되면서 몰도바의 정치 체계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2005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고 2009년 선거에서도 1당이었지만 지도부에 속했던 마리안 루푸의 탈당과 민주당 입당, 3개 소수당의 연합과 연립 정부의 구성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었다. 몰도바에서 이루어진 2011년의 여론조사는 29%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말 루마니아에서의 여론조사 결과는 좀 다르게 나타났으며 44%가 찬성했고 28%가 반대했다. 소련 시기 50년 동안 여러 민족이 한 국가 안에 살았기에 민족 분쟁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몰도바의 독립 전후 혼란기에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것은 신흥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긴 결과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 민족주의가 정치화 된 세력은 몰락했고 CIS 국가 중 가장 먼저 공산당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전쟁의 쓰라림은 여전히 남아 드네스트르 강 양편을 가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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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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