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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티라이프 5월호 표지 촬영
    <2024년 5월호 표지 촬영> 모델:전자현악 ‘미켈’팀(지아/제니/하니/유라) 헤어 및 연출:허정애(대한증모가모협회 회장) 메이크업:이정연(천안 INU 대표) 사진:박제승(오리지날스튜디오 대표) 5월호 표지 모델은 전자현악 ‘미켈’ 팀의 4인방 지아, 제니, 하니, 유리다. 이들 4인방은 실력은 물론이려니와 뛰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남다른 팀웍을 자랑한다. 뷰티라이프 최초로 4명을 한꺼번에 표지로 연출했다. 신나는 경험이다. 헤어와 연출은 대한증모가모협회 회장과 미용교수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허정애 회장이 맡아 다양한 가발로 변신을 시도했다. 허정애 회장은 시인 등단을 했으며 시낭송가로도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 미용계의 재원이다. 메이크업은 허정애 회장의 후배인 이정연 대표가 맡아 두 분의 우정을 과시했다. 뒤풀이는 항상 즐겁고 신난다. 특히 이번 달은 뒤풀이 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웃음꽃 만발. 좋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성공과 장수의 비결이란 생각이 퍼뜩 든다. 오늘의 행복이 생(生) 내내 이어지기를^*^
    • 뉴스
    2024-05-01

칼럼 검색결과

  • 우연한 요란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는 ‘우연적 요란’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모노는 우주 속에서 우연에 의해서 생명이 탄생했으며, 진화의 원동력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란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았다. 우리는 일상 삶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여러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다양한 이야기가 곧 바로 우연한 요란들이었다. 다양한 우연들의 집합으로써의 우연한 요란에는 수많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삶이 곧 책이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듣게 된 90세가 넘은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 이상의 것이었다. 친구는 주말마다 시골 별장에 사시는 아버님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의 나이를 물었다. “너 나이가 몇이냐?” “아버지! 제 나이도 이제 60 후반입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하셨다고 한다. 나는 친구 아버지의 웃음이 어른으로서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다음 친구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심어놓은 토마토 모종을 보고 친구는 깜짝 놀랐다. 너무 촘촘히 심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아버님에게 “아버지! 토마토 모종을 훌륭히 심어놓으셨군요!”라는 말만 했다. 아버님은 흐뭇하셨을 것이다. 내 나이에도 딸들에게 듣는 칭찬은 내 마음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90이 넘은 나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듣는 칭찬은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을 것이다. 친구는 다음 날 혼자서 토마토 모종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다시 정리했다.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공감과 참된 상호인정이라는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 이 돈이 무슨 돈인가요?”라고 물었다. 친구의 아버님은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셨다. “학교 발전기금으로 내려고 준비해 둔 돈이지.” 아버지의 통장을 보니 아버지는 여러 차례 학교 발전기금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90세가 넘으신 어르신의 모교에 대한 사랑은 놀라웠다. 친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학교에 발전기금을 내고 있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아버님은 또 허허 웃으시며서 “그럼 그 돈 너 가져라!”라고 하셨다. 그때 친구는 아내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여보! 아버지가 우리에게 큰돈을 주셨으니 우리 집 한 채 또 마련합시다.” 300만 원에 불과한 돈이지만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하겠다는 아들의 말은 분명히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다. 훌륭한 아버지의 훌륭한 아들이었다. 옆에서 함께 친구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저 친구의 이야기를 네가 똑똑히 기억해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이야기,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편이다. 학부 때 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나의 졸업논문 제목이 ‘이성개념을 중심으로 한 마르쿠제 비판이론의 전개’였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강조한 논문이었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이라는 유령은 아직도 내 주변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친구는 “따지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나는 웃음으로만 화답했다. 때에 따라서는 왜라는 질문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시골에 사는 친구들 고집은 대단해요! 생각이 서로 다르면 아예 서로를 배제시켜 버려요!” 우리 나이에 생각이 다른 친구와 굳이 함께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그들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철학을 전공한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있겠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 나도 갑작스럽게 대답했다. “서울에 사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생각의 차이를 경험하기에 마음의 유연성이 잘 훈련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적은 시골의 친구들은 우리보다는 마음의 유연성을 갖기가 힘들지 않겠냐?”라고 답을 했다. 필터의 버블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모든 시비를 떠나 아무런 경계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비를 떠난다”는 말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무사안일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끝없는 변화와 자연의 조화에 대한 깨우침이다. 다름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면서 다르지만 함께 가는 길이 곧 자연의 길이고, 그러한 조화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장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장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상호존중, 상호인정, 차이에 대한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이 시대에 필요한 모든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져 오직 자신의 생각에만 도취되어 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타인과의, 더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관계중심적인 세계관이 미래사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지 않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4-05-12
  • 함석헌의 씨알과 비폭력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생명이다.” 당연하지만 아름다운 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씨ᄋᆞᆯ학당에서 주최하는 ‘함석헌과 생명평화’라는 타이틀의 정기 강연회를 개최한다. 첫 강연자로 나선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생명으로서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우희종 선생은 폴 틸리히의 ‘ground of being-itself’를 언급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함석헌은 왜 생명이라 말하지 않고 씨ᄋᆞᆯ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어제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순간에도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조금 무식한 질문을 하였다.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는 우리들의 희망 종단(우희종)에서 참석한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만큼 우희종 선생과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다. “장자는 氣가 천지 사이에 충만하고, 氣가 모이고 흩어져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고, 천지의 만물은 모두 하나의 氣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장자의 氣와 유사한 것입니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던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주체적인 것이며, 생각하는 씨ᄋᆞᆯ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氣에는 유물론적인 부분이 있지만, 함석헌의 씨ᄋᆞᆯ에는 유물론적인 요소가 없어 보였다. 강의가 끝난 후에 나는 씨ᄋᆞᆯ학당 김영덕 연구원장으로부터 <함석헌 연구>라는 책을 한 권 받을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씨ᄋᆞᆯ은 생명 그 자체이며 역사를 살려내는 역사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ᄋᆞᆯ은 땅과 하늘과 바람과 물 즉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생명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씨ᄋᆞᆯ의 출발은 “함께 살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조금은 부족하여 서재에 있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이라는 책을 펼쳐봤다. “유영모는 생명을 물질과 정신의 결합으로 보고, 생명이 물질에서 정신으로 고양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유영모의 이러한 생각이 함석헌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유영모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연결시켜보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단순한 생명은 아니라 온 우주와 함께 하나가 되는 과정 속에 있는 진화하는 씨ᄋᆞᆯ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ᄋᆞᆯ이어야 산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우희종 선생은 비폭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폭력이라고 하였다. 깨어있지 않음과 연결된다. 어리석음, 정상적인 관계의 단절, 왜곡된 믿음 등이 폭력이란 것이다. 폭력의 정의가 그렇다면, 비폭력은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이고, 그러한 관계에 깨어 있음을 위한 실천과 행동에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약자의 체념이나 무관심도 폭력의 행사라고 보았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비폭력은 너와 나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차별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말을 우희종 선생은 파사현정, 즉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불교의 용어를 언급하면서 angry Buddha를 이야기했다. angry Buddha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이끄는 분노의 행동이야말로 비폭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비폭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희종 선생은 슬라보에 지젝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잠시 언급만하고 가볍게 지나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오늘날 사회에서 객관적 폭력인 상징적이면서 구조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주관적 폭력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음의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에로스에서 티모스로의 전환이다.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전환에는 가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면서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직적 폭력이고, 공손한 미소가 야수적인 감정 폭발보다 더욱 폭력적이란 말이다. 그 책의 마지막 대목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는 angry Buddha와유사하게 읽힐 수도 있다.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사상이 생명 감수성을 높이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씨ᄋᆞᆯ들은 서로 주고받고, 같이 울고, 같이 느낄 때 부분의 합보다 위대해지고 부분은 전체 안에, 전체는 부분 안에 존재하게 되어 개인의 소리는 전체의 외침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우희종 선생의 강의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다. 뒤풀이로 우희종 선생과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환경철학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네스는 생태운동을 표층과 심층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동식물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심층생태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우희종 선생과 헤어졌다. 우희종 선생을 통한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강의는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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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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