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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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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0
  • 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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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5-22
  • 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살라딘의 이름을 전부 서술하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로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Al Malik An Nasir), 승리의 아버지(Abu Al Muzafar), 신앙을 품은 정의(Slakh Ad Din),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Marwan)의 아들인 샤디(Shadi)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يوسف)가 본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꾸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Yusuf, 요셉)와 아이유브(Ayyub,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Ad)은 원래 정관사 알(Al)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Ram)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 받침과 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살라흣 딘이라 읽히게 된다.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Gasan Masud)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다. 살라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Tikrit)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Nazim Ad Din Ayyub)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 셀주크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Byhruz)와 인연이 이어져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 Din Zangi)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에 분노하여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Balbek)을 함락시킨 이후 아이유브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살라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이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Buri) 왕조의 아타베그(Atabeg)인 무장 앗 딘 우누르(Ad Din Unur)가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얼마 동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Nur Ad Din)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 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Unur)가 사망한 이후, 왕권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이용하여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하여 그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명성을 누렸던 아버지 장기도 장악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살라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후일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Wajir, 재상)였던 샤와르(Shawar)가 경쟁자인 디르감(Dirgam)에게 축출당한 이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Amori I)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부터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 시르쿠와 살라딘은 같은 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스스로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Harim)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같은 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딘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 해 3월 18일, 알 바베인(Al-baboim)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 기병들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직행으로 카이로에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딘은 얼마 전만 해도 전투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으로 인해 살라딘은 숙부를 범칭국으로 삼았고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가를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지 싶었으나 그 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딘이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권력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딘은 겉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히여 오히려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하여 비잔틴 제국과 연합해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계속 실패한 끝에 폭풍우로 인해 모두 침몰당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이를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주했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면 그들과 대적할 정도로 더욱 큰 힘을 얻은 상황에 놓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3일 동안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1182년 11월 10일에 더욱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수도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살라딘은 킨다(Khinda)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Taz Al Mulk,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Imadya)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Hisin Kayfa)의 누르 앗 딘의 “다리들의 문”을 맡게 된다. 하지만 한 달 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Shinzar)를 포위하였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고 이를 주장했지마,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atillon, 1125~1187)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취소되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제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인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결합하여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해 리처드 1세 또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것이니 그 때 결판을 내자고 약속하였으며 살라딘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살라딘은 약속 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 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 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사용하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 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딘은 대신 타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Al Kamil)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카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전쟁을 벌이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이에 어떻게 결사반대한 참모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로 인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매우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 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적은 없었으며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함락당할 것이라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카톨릭 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측에서는 살라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큰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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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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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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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0
  • 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살라딘의 이름을 전부 서술하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로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Al Malik An Nasir), 승리의 아버지(Abu Al Muzafar), 신앙을 품은 정의(Slakh Ad Din),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Marwan)의 아들인 샤디(Shadi)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يوسف)가 본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꾸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Yusuf, 요셉)와 아이유브(Ayyub,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Ad)은 원래 정관사 알(Al)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Ram)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 받침과 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살라흣 딘이라 읽히게 된다.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Gasan Masud)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다. 살라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Tikrit)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Nazim Ad Din Ayyub)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 셀주크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Byhruz)와 인연이 이어져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 Din Zangi)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에 분노하여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Balbek)을 함락시킨 이후 아이유브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살라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이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Buri) 왕조의 아타베그(Atabeg)인 무장 앗 딘 우누르(Ad Din Unur)가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얼마 동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Nur Ad Din)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 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Unur)가 사망한 이후, 왕권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이용하여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하여 그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명성을 누렸던 아버지 장기도 장악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살라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후일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Wajir, 재상)였던 샤와르(Shawar)가 경쟁자인 디르감(Dirgam)에게 축출당한 이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Amori I)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부터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 시르쿠와 살라딘은 같은 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스스로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Harim)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같은 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딘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 해 3월 18일, 알 바베인(Al-baboim)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 기병들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직행으로 카이로에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딘은 얼마 전만 해도 전투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으로 인해 살라딘은 숙부를 범칭국으로 삼았고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가를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지 싶었으나 그 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딘이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권력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딘은 겉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히여 오히려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하여 비잔틴 제국과 연합해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계속 실패한 끝에 폭풍우로 인해 모두 침몰당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이를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주했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면 그들과 대적할 정도로 더욱 큰 힘을 얻은 상황에 놓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3일 동안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1182년 11월 10일에 더욱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수도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살라딘은 킨다(Khinda)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Taz Al Mulk,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Imadya)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Hisin Kayfa)의 누르 앗 딘의 “다리들의 문”을 맡게 된다. 하지만 한 달 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Shinzar)를 포위하였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고 이를 주장했지마,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atillon, 1125~1187)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취소되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제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인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결합하여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해 리처드 1세 또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것이니 그 때 결판을 내자고 약속하였으며 살라딘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살라딘은 약속 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 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 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사용하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 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딘은 대신 타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Al Kamil)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카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전쟁을 벌이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이에 어떻게 결사반대한 참모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로 인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매우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 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적은 없었으며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함락당할 것이라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카톨릭 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측에서는 살라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큰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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