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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6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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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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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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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0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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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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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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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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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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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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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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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6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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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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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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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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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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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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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오늘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 대표단도 있었지만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채, 궁전 내에서 타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터키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이 협상의 장소가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 독립과 평화의 상징인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공화국을 건설하고는 이곳에 입주하면서 터키 영토 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했다. 따라서 터키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화를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을 중재국인 터키 측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선정했던 것은 양국의 전쟁 종식과 아타튀르크의 평화주의를 강조하여 양국의 평화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된 이후, 그러한 중재국인 터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 먼저 가 있던 젤렌스키는 "우크라아나의 최우선 과제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진정성 있고 투명한 휴전(Головним пріоритетом України є повне, безумовне, справжнє та прозор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이는 휴전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의 휴전은 그에 상응하는 조건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0여년 전, 민스크 협정 이전부터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와 집단서방에 속아온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휴전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명확하지 않은 조건과,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행동했다. 오직 그들 우크라이나에게는 그저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 하자는 내용만 반복될 뿐이었다. 휴전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한 플랜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러시아의 휴전에 대한 조건과 요구는 명확했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동의했지만 휴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조건은 ① 우크라이나 내 최악의 살상무기에 대한 비무장화,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우크라이나 내 비나치화, ④ 돈바스 4개 주와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 인정 등이다. 이는 개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주 획일적이고 명확한 요구 조건이다. 이 조건들만 받아들여지면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즉시 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은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러시아가 바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다. 고작 3일이나 30일 휴전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키겠다고 한적이 없고, 젤렌스키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서 반러 세력을 일소화하겠다고 직접 언급한 적도 없다. 만약에 젤렌스키를 직접 제거하려 했다면 키예프 대통령궁에 오레슈닉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인내심을 갖고 젤렌스키의 개심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부활절 휴전에 관한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승절 문제다. 러시아는 이 때도 잠시 휴전을 제안했었다. 부활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갖고자 하는 의미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의미를 저버리고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전승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소련으로 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과 전쟁 당시 서로의 등을 맡기던 든든한 전우였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했던 우정을 생각하며 평화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 때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태까지 평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보여왔다. 그러던 우크라이나가 이제와서 휴전을 언급하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대통령이 이스탄불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다. 필자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및 휴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크라이나가 앞서 제안했던 그 30일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EU나 영국,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보충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바흐무트나 마리우폴 아조프스틸과 같은 요새지들을 몇 군데 더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항전하여 전쟁을 장기화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애초부터 평화에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휴전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여주기식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게 지우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협상은 예상했던데로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양국이 1,000명씩 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에 합의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젤렌스키가 만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진정성 없는 회담에 푸틴 대통령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규탄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가 러시아에게 유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상호 간에 수립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EU 또한 이스탄불 회담에 그 지도부들 중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진정성 또한 떨어진다는 입증했다. 전쟁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장기적으로 갈수록 유럽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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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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