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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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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포르투갈의 고인돌 문화,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하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로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만이 유럽 문명의 뿌리는 아니다. 그리스 인들이 '갈라타이' '켈트이', 로마인들이 '갈리아'라고 불렀던 켈트인은 유럽 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갈리아 원정은 켈트 문화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후 게르만 민족의 유럽 지배는 이 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북부에 있는 갈라시아와 포르투 지역은 로마인의 지배 이전에 켈트 문화의 독자적인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경부터는 로마 교회의 적극적인 포교로 이 지역들의 켈트 사회는 기독교화되었고, 그 결과 독자적인 켈트식 카톨릭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켈트 문화는 후에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 건너가 명맥을 유지했고 11세기부터 유럽 각지에 전파된 로마네스크 미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켈트인은 유럽의 역사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켈트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면, 도대체 켈트인의 유적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고전 문화는 견고한 '돌의 문화'로, 자신들의 문화를 돌로 남겨놓았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켈트의 문화는 이러한 정형화된 문화와는 달랐다. 자연을 숭배했던 켈트인들은 '나무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축 유산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었는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19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 지역, 현재의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의 스페인 지역 및 아스투리아스 서부 및 레온 북부 지역에서 동기 시대 B.C 9 세기경의 끝에서 로마 문화가 창궐한 B.C 1 세기 경에 포함될 때까지 존재했던 켈트 문화인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가 그것이다. 특히 산타 테클라산에 있는 갈리시아 요새에서 발굴(發掘)된 켈트 상징물인 트리스켈(Triskel)이 다수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는 다수의 고인돌과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포르투 시내 곳곳의 서점에는 이러한 포르투갈 고대 유적에 대한 서책이 판매되고 있고 포르투 역사박물관에도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1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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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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