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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美 필리 조선소서 시작된다
- 2025년 10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날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요청한 데 대한 즉각적 화답이다. 건조는 한화그룹이 인수한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미국 조선업 부활과 한미 군사협력 강화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양국은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 관세 인하 대가, 대규모 에너지 구매 등 경제적 합의도 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합의는 양국 군사·경제 동맹의 새로운 전기를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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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美 필리 조선소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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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전국기능경기대회 헤어디자인 부문 은메달 수상한 윤재희 학생
- 제60회 전국기능경기대회 헤어디자인 부문 은메달 수상 3대째 미용인 윤재희 양 윤재희 학생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저는 정화예술대학교 헤어디자인과 1학년에 재학 중인 윤재희입니다. 이번 2025년 제60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헤어디자인 부문 은메달(2위)을 수상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미용을 통해 사람들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매력을 느꼈고, 현재는 그 열정을 바탕으로 기술과 예술이 공존하는 미용의 길을 걷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상 소감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를 처음 출전하기에 두려움도 컸고, 작은 대회가 아니기 때문에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계속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제 부족한 점을 돌아보고, 더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항상 응원해 주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번 경험은 앞으로 더 큰 성장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3대의 미용인 집안 자랑 저희 외가는 3대째 미용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1986년부터 국제미용예술직업전문학교(구 잠실미용학원)의 학교장으로 재직하시며 한국 미용분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시고 계십니다. 미용장으로서 후배양성에 힘을 쓰고 계시며 여러 협회의 일과 미용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26년 간 미용교육 분야에 종사하시며 현재는 미용장 과정을, 아버지는 이용장 과정을 교육하고 계십니다. 이모님 또한 미용장이고 20년 전에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하고 전국기능경기대회에도 출전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족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다 보니, 미용은 저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자 사명감을 느끼는 예술적 분야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미용학원에서 마네킹을 친구삼아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가족 모두 미용 분야에 종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용에 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친가 쪽 또한 예술가 가문입니다. 친할머니께서는 옹기 집안에서 성장하셨고,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도예가로 한국 도자공예와 예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덕분에 저는 어릴 때부터 예술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혔고, 그 감성이 헤어디자인에도 깊이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용을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과 감성의 조화라고 믿습니다. 이런 가족적 배경이 저만의 디자인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미용기술은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저는 매일 아침 남성 클래식으로 손을 풀며 연습을 시작합니다. 도면을 보며 구도를 맞추는 연습을 반복하고, 거울을 보며 균형과 구도를 점검하는 습관을 유지합니다. 또한 ‘타임 노트(Time Note)’를 작성해 연습 계획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분 단위로 작업 단계를 적어 가며 반복 연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업 속도와 완성도가 함께 향상됩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면서 제한된 시간 안에 완성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시간 관리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그 문제를 극복했고, 이를 통해 꾸준함과 계획의 힘이 기술 향상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저는 무엇보다 끈기와 집중력의 가치를 배웠으며, 한정된 시간 안에 완성도 높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정신력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며 작은 디테일 하나가 전체 완성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경험했고, 기술뿐 아니라 미용을 대하는 제 태도가 한층 성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 앞으로도 다양한 많은 대회에 출전하여 경험을 쌓고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한국 미용의 기술력과 예술성을 알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국제대회 출전을 준비하며 저만의 꿈을 꾸고자 합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한국 미용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디자인과 브랜드 작업에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저는 미용을 사람의 마음을 빛나게 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며, 한국 미용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헤어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작품은 아름다운 기술로 표현되지만, 결국 마음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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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전국기능경기대회 헤어디자인 부문 은메달 수상한 윤재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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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관봉권 폐기·쿠팡 수사외압 의혹 ‘상설특검’ 수사 전격 결정
- 2025년 10월 24일, 법무부는 서울남부지검의 '관봉권 띠지 분실' 사건과 인천지검 부천지청의 '쿠팡 퇴직금 불기소 외압' 의혹에 대해 상설특검 수사를 결정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검사들이 연루된 두 사건에 대해 대검 감찰만으로는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판단, 제3의 독립기관 수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상설특검법에 따른 두 번째 사례로, 국민 신뢰 회복과 검찰 조직의 책임성을 가리는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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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관봉권 폐기·쿠팡 수사외압 의혹 ‘상설특검’ 수사 전격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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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웬치' 64명 전세기 송환: 역대 최대 규모 해외 사이버 범죄단지 해부
- 2025년 10월 18일, 캄보디아 범죄단지 '웬치'에서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등에 가담한 한국인 64명이 대한항공 전세기로 국내 송환됐다. 이는 단일 국가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이며, 200여 명의 경찰 호송단이 투입된 '사상 최대 호송 작전'으로 진행되었다. 송환자들은 국적기 내에서 체포된 후 수갑을 찬 채 전국 6개 경찰관서로 압송되어 수사가 시작됐다. 이번 송환은 캄보디아 내 한국인 납치 신고가 3년 만에 330건으로 폭증하는 등 해외 범죄의 심각성을 반영하며, 정부는 프놈펜에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하고 총력 대응에 나섰다. 향후 경찰은 송환자들이 겪은 감금·폭행 등 피해 사실과 범죄 가담 정도를 면밀히 조사하여 이들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복합적 신분을 규명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정부는 국제 공조 강화와 함께 취약한 청년 세대를 노리는 해외 취업 사기를 근절하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시스템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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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웬치' 64명 전세기 송환: 역대 최대 규모 해외 사이버 범죄단지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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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위, 조희대 90분 침묵…사법부 독립성과 정치권 충돌
- 2025년 10월 13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이 여야 의원들의 질의에 90분간 침묵했다. 추미애 위원장이 이석을 불허하고 참고인으로 질의를 강행하면서 사법부와 국회의 충돌이 벌어졌다. 조 대법원장은 “사적 만남은 없었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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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위, 조희대 90분 침묵…사법부 독립성과 정치권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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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웬치’의 함정…한국인 납치·감금 실태 드러나
- 2025년 들어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납치·감금 사례가 급증해 최소 34건 이상의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SNS 고수익 알바에 속아 출국한 청년들이 범죄조직에 감금되어 고문, 몸값 요구 등 피해를 입고 있다. 정부는 수사 TF를 구성하고 송환 조치를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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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웬치’의 함정…한국인 납치·감금 실태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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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20형’ 등장한 北 열병식…극초음속·다탄두 무기체계 공개로 핵전력 진화
- 북한의 화성-20형 공개는 새로운 도발이라기보다 예고된 수순의 공식화다. 김정은 정권은 국제사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계산에 넣고 움직이고 있다. 이제 공은 다시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한국의 전략적 결단으로 넘어왔다. 군사적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외교적 해결은 현실적으로 더 어렵다. 이 모순 속에서 한반도는 다시 한 번 불안정한 평화의 경계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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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20형’ 등장한 北 열병식…극초음속·다탄두 무기체계 공개로 핵전력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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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MLS 신인상 탈락 위기…폭풍 활약에도 “후보 제외” 논란
- 손흥민은 미국 MLS LAFC에서 10경기 9골 3도움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플레이오프 진출로 이끌었다. MLS 신인상 후보에 올랐지만, 누적 성과 부족으로 유력 후보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LAFC는 K컬처 이벤트로 손흥민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유럽 단기 임대설도 돌고 있다. 그러나 일정과 구단 조율 문제로 현실화 가능성은 낮다. 반면, 손흥민의 이탈로 토트넘은 계속된 부진에 시달리고 있으며, 팬들은 그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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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MLS 신인상 탈락 위기…폭풍 활약에도 “후보 제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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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만 명 섬나라의 기적, 카보베르데 월드컵 본선 진출!
- 2025년 10월 14일, 인구 52만 명의 아프리카 섬나라 카보베르데가 에스와티니를 3-0으로 꺾고 2026 북중미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FIFA 랭킹 70위인 이 나라는 사상 첫 본선 무대에 오르게 되었으며, 아프리카 예선 D조에서 전통 강호 카메룬을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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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만 명 섬나라의 기적, 카보베르데 월드컵 본선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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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하루 3패 참사…브라질·모로코·사우디에 연속 완패
- 2025년 10월 10~11일, 한국 축구는 A대표팀이 브라질에 0-5, U-20 대표팀이 모로코에 1-2, U-23 대표팀이 사우디에 0-4로 연이어 패하며 하루 3패의 참사를 겪었다. 전술 부족, 조직력 문제, 실수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며 축구팬과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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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하루 3패 참사…브라질·모로코·사우디에 연속 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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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배우 틸리 노우드, 예술인가 위협인가?”… 인공지능이 연기하는 시대
- 2025년 9월, 스위스 취리히 영화제에서 AI로 제작된 가상 배우 ‘틸리 노우드’가 공개되며 세계 영화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 배우들의 연기 데이터를 학습해 제작된 틸리는 높은 기술성과 비용 절감 효과로 주목받았지만, 배우노조와 업계는 초상권 침해와 창작 윤리 문제를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일부 소비자들도 AI 인플루언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 논란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인간 예술과 윤리의 경계를 시험하는 사회적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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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배우 틸리 노우드, 예술인가 위협인가?”… 인공지능이 연기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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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 남종현 발명문화대상' 수상한 정수옥 대표'
- Interview(정수옥) “두피 건강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용의 길을 열고자 합니다” ‘대평 남종현 발명문화대상’ 수상한 정수옥 대표 정수옥 대표 -자기 소개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예얼뷰티코리아, 정수옥헤어&예얼두피, 예얼뷰티아카데미의 대표 정수옥입니다. 1983년부터 미용을 시작했고, 1994년부터 두피 전문 관리를 연구해온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건강한 두피에서 시작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라는 신념으로, 현장 시술·교육·제품 개발을 통합한 ‘예얼 테라피’를 개발했습니다. 이번 ‘대평 남종현 발명문화대상’ 수상은 그 연구와 노력이 인정받은 결과라 생각합니다. -이번 수상 소감 그동안 미용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움”이라는 신념으로, 두피 건강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용의 길을 열고자 했습니다. 이번 ‘대평 남종현 발명문화대상’ 수상은, ‘예얼 마그네틱 브러쉬’와 ‘예얼 브러싱 가이드 시스템’ 등 예얼의 특허 기술뿐 아니라, ‘두피에센스·두피팩·목크림’ 등 예얼 제품군과 이를 기반으로 한 ‘예얼 테라피’ 시스템 전체가 인정받은 결과라 생각해 더욱 뜻깊습니다. 오랜 시간 고객과 미용인들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며, 앞으로도 ‘건강한 두피에서 시작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라는 철학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성공적인 미용실 운영법 예얼은 ‘예쁜 얼굴’의 줄임말이자, 밝은 얼굴을 되찾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두피의 건강을 관리하고 얼굴의 균형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통합 케어 프로그램입니다. 미용과 건강의 균형을 함께 다루는 융합형 브랜드로, 두피 열을 내리고 순환을 회복하는 예얼 테라피를 중심으로 전문 관리와 홈케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수옥헤어(미용실), 예얼두피(두피 전문 센터), 예얼뷰티코리아(제품 브랜드), 예얼뷰티아카데미(교육기관)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두피와 얼굴 피부를 진단기기로 분석하고, 그에 맞는 시술·홈케어·운동법을 제안합니다. 그 결과,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고객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미용적 변화뿐 아니라 머리가 가벼워지고 얼굴이 맑아지며, 두통이나 탈모로 인한 불편이 완화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체감합니다. 또한 예얼은 미용인들이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커리큘럼을 체계화하고, 예얼 제품을 활용한 살롱 메뉴화·운영법 교육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무 중심의 교육 시스템은 예얼 브랜드의 확장성과 지속성을 높이는 핵심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제품 개발 동기 및 장점 1994년 두피 관리를 미용에 접목하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선보였고, 그 결과 미용실의 규모가 빠르게 커졌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미용실을 확장하면서 과로와 스트레스로 우측 어깨 마비와 두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꾸준히 해오던 두피 관리를 하면 통증이 완화되고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두피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얼굴에 좋다는 고가의 화장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비용적인 부담이 커졌고, 직접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트리콜로지스트, 건강관리사, 식품치료, 대체의학 과정을 공부하며 두피와 인체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얼의 제품과 예얼 테라피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예얼 마그네틱 브러시’와 ‘브러싱 가이드 시스템’은 특허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예얼 제품은 단순한 미용 제품이 아니라 예얼 테라피의 원리와 기술이 녹아 있는 건강 관리 도구입니다. 예얼 마그네틱 브러시, 두피에센스, 두피팩, 목크림 등은 미용실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각각의 제품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예얼 운동법과 함께하면 두피열 완화, 스트레스 감소, 두통 완화, 얼굴 리프팅 등 건강한 변화를 확실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얼은 기술, 제품, 철학이 하나로 연결된 두피 전문 뷰티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평소 미용에 대한 생각이나 미용철학 저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건강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머리 스타일의 변화로 외적인 아름다움을 완성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피가 손상된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얼은 미용의 본질을 ‘균형’과 ‘건강 관리’에 두며, 두피의 열을 완화하고 순환을 도와 피부와 얼굴, 그리고 몸이 편안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즉, 미용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건강한 삶으로 이어지는 인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용인들에게 항상 “고객의 머리만 보지 말고, 고객의 얼굴까지 살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고객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미용인들이 직업병으로 인해 본인의 건강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얼을 통해 고객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돌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배우길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전문가의 길이 아닐까요? -미용을 하면서 즐거웠거나 흐뭇했던 일 예얼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고객이 “요즘 머리가 시원하고 얼굴이 맑아졌어요”라고 말할 때입니다. 두피나 피부는 눈으로 바로 확인되는 부분이라, 고객이 변화된 모습을 체감하며 자신감을 되찾는 순간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예얼 교육을 통해 배운 미용인들이 현장에서 고객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술 방향이 달라졌어요.” “고객이 다시 찾아왔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노하우가 누군가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끼며, 그동안의 시간이 보상받는 듯한 뿌듯함을 느낍니다. 결국 미용은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활력을 되찾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제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앞으로의 계획 앞으로는 예얼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두피 건강의 중요성을 알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얼 테라피와 제품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와 준비를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뷰티문화관광협회와 협력하여 거점 미용실을 중심으로 K-뷰티 웰니스 문화를 확산하는 활동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미용인들이 고객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건강도 돌볼 수 있도록 교육과 강사 양성 과정을 확대할 예정입니다. 저는 미용이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그 신념을 지켜가며, 예얼을 통해 진정한 건강미(健康美)의 가치를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 -기타 한 말씀 오랜 시간 미용 현장에서 느낀 건,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얼은 고객의 두피 건강뿐 아니라 미용인들의 행복과 성장을 함께 지향합니다. 예얼은 과학입니다. 예얼은 두피 열을 완화하고 자율 균형을 돕는 과학적 루틴을 지향합니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K-뷰티의 웰니스 브랜드로서, 머릿속 순환이 맑아지면 얼굴의 나이가 내려간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K-뷰티 웰니스 시장을 선도하고,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한 번 경험하는 예얼 루틴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예얼과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얼, 한국에서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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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 남종현 발명문화대상' 수상한 정수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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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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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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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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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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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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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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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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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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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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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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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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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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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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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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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 미국과 서방은 중동과 아랍을 달래며 끌어 안으려 하는게 아니라 압력을 넣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은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통해 달래어 끌어 안으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제는 중동과 아랍이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의 압력에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미국과 서방이 중동을 폭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스라엘의 과도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의 행태가 오히려 반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트럼프는 가자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기에 이 또한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트럼프 체제에서만 세 번째 휴전이기 때문이다. 중동과 서방의 분쟁은 20세기 이전엔 치열한 종교적 대립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종교적 대립에 이념적 대립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민족적 대립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아랍 종파와 이란계 종파간의 종파대립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편승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하나로 뭉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면 분명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참혹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석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동맹을 맺었어도 서로를 견제했고 신뢰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반미, 반서방, 반이스라엘을 표방했지만 표면적인 것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정반대였다. 에르도안은 표면적으로만 서방과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떠들었지 서방과 중동 사이에서 자국의 실익만을 추구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마찬가지다. 아랍연맹, 동맹이라는 거창하게 선전했지만 그들 또한 가자지구에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그 사이에서 얻을 실익이 무엇인지만 계산했다. 결국 가자를 도운 국가는 이집트 뿐이었다. 하마스는 시리아의 지원이 끊기자 몰래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3년 전에 걸친 전쟁에서 잘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표면적으로 가자 지구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을 거부하고 하마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땅굴을 이용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하마스는 이집트에서 발원한 무슬림형제단의 형제나 마찬가지다.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압제에 반항하는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아흐메드 야신(Ahmed Yassin)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당 및 조직으로 창당한 것이 하마스(Hamas)이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무슬림형제단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이집트는 가자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서로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이 접해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항공은 이집트 아리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에 대비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쌓인 난민 수용 시설을 지었고, 이집트 공군이 가자 지구 상공에서 구호물품을 투하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가자 지구의 환자 수십명이 이집트로 이송되었으며 이집트 공군은 가자지구 북부에 구호품 공중투하 작전을 지속했다. 이집트가 봉쇄 조치를 했음에도 가자 지구를 떠나 이집트에 정착한 팔레스타인 난민이 11만 5,000명을 넘었다. 결국 가자를 도와준 것은 이집트 하나 뿐이었던 셈이다. 앞으로도 가자 지구를 복구하거나 난민들을 보살필 국가는 이집트 하나 뿐 일 것으로 본다. 지난 1948년 영국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기나긴 숙명적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여태까지 테러 전쟁을 분석해본적이 있는데 대개 전력이 열세인 국가나 민족이 할 수 있는 최선, 최후의 저항이다. 물론 테러는 반인륜적 범죄로 용서받을 행위는 아니지만 왜 테러가 발생하는지 원인에 대해 물어보고 질문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3자의 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3자는 그냥 매체에서 보여주는 행위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선악(善惡)을 판단한다.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테러국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어서다. 그러면서 모든 중동 국가들과 아랍인들, 무슬림들은 테러 국가,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왜곡하여 해석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멀리 바다 건너 캄보디아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똑같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제관은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무지하다. 트럼프가 성사시킨 세 번째 휴전 조약.. 이게 얼마나 갈까? 영원히 종식되는 전쟁이 아니기에 언제든 다시 터질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여기에서 멈출 마음이 없다. 이전처럼 가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자를 도우려하는 국가들의 함선 또한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 그 고립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하마스 또한 어떠한 일을 벌이긴 할 것이다. 너무 강한 조치는 그 압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저항을 부르게 되어 있다.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어떠한 사물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 또한 살기 위해 과도한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본능과 심리를 갖고 있으며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나타나는 수많은 저항 운동과 반란, 민란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휴전 조약은 이스라엘이 가자에 진입하려 한다는 뉴스가 나온지 1~2개월만에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 시티 점령에도 실패했고 결국 가자 전체를 이스라엘 지상군이 장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휴전은 미국이 가자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체면을 세워주고, 가자에는 복구와 휴식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내세운 평화 안 중에 이제 한 쳅터가 겨우 정리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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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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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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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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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 세계의 광물 경제는 중동의 석유,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국의 희토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자원들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은 석유 파동 당시, 자원 무기화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중동의 오일쇼크는 당시 등소평이 이를 지켜보면서 자원 무기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개혁 개방을 한 이래 희토류 개발을 적극 장려하게 된다. 이는 풍부한 매장량에 따른 채굴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제 기술과 인프라까지 갖추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이는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데 포함한 정제 설비 및 전력, 수송 인프라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자 정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희토류가 주목받는 이유는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자성적, 발광적 특징과 함께 탁월한 방사선 차폐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계 희토류 생산은 중국이 거의 90% 이상 독점하고 있는데 중국 광산에서 채굴 뿐만 아니라 이를 제품으로 만드는 정제 과정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중국은 1970년대 이후 희토류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거대 경제를 이루고 정제 기술도 이미 미국을 추월해버렸다. 희토류 생산하고 정제하는데 있어 기술 인력과 자본력에서도 다른 나라를 크게 앞서가고 있어서 앞으로도 중국의 희토류 시장 독점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진다. 미국 등이 중국산 희토류 자원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미국 본토의 희토류 광산에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광산에서 채굴된 희토류도 미국 본토의 정제 시설은이 매우 낡고 규모도 적은데다 기술 인력도 부족해 경제성이 떨어져 제품으로 정제는 거의 중국에 위탁해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한동안 생산을 하지 않다 보니 인력이나 기술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뒤쳐진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타국의 희토류 광산 개발도 중국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독점이 단지 중국 광산 만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 채굴, 정제, 유통 등 희토류 산업의 전반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채굴이 중단된 폐광산까지 국가가 직접 재개발에 나서며 자국 내 희토류 공급망을 만들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내 인프라에 있다. 희토류 관련 연구 인력들을 하찮게 여기고 지원금액도 다른 자원에 비해 적게 책정했다. 그 결과, 미국 내 희토류 생산 및 가공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희토류의 수출량을 자유자제로 조이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 때문에 희토류 가격이 다시 폭등하거나 폭락하여 세계 국가들의 애를 먹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희토류 매장량과 정제술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지금 같은 추세로 희토류를 소비해도 적어도 고갈될 때까지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기업들은 대체 소재 연구에 들어갔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고 있지만 이 또한 완전히 성공할지도 의문이다. 전기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1.5 kg의 희토류가 소요되는데, 토요타는 베트남 등 희토류 대체 생산지 확보에 나서는 한편 희토류를 쓰지 않는 신형 배터리를 개발했다. 그러나 베터리의 성능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 full 충전이 오래 걸리고, 베터리는 빨리 닳아 없어지는 사태가 계속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내구성 또한 문제가 되었다. 열이 빨리 받고, 그로 인해 화재 사건 또한 잦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신형 베터리를 전량 회수해 희토류 없이 재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원래 미국은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었지만 환경 오염 문제 때문에 다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희토류 자원 무기화에 맞서 다시 자국의 희토류를 채굴하며 대항하려 하고 있지만 희토류 채굴은 쉽지 않다. 희토류는 채굴 및 가공 과정에서 극악한 환경 오염과 심각한 산업 재해를 야기하고 있다. 정화 비용이나 노동자에 대한 복지 및 보상 등 기업이 사회적, 윤리적인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전기 및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 곳,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공산당 1당 독재의 통제력으로 인해 장기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일관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서 최상이고, 환경 규제 또한 느슨하다. 희토류를 정제하려면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또한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들과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고 있다. 그 이유로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도 발생하는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며 이를 처리하는 인원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하고, 독성 화학물에 대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인명이나 환경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중공이라는 나라의 특성, 이로 인한 희토류 정제는 중진국급 국가 중 가장 땅이 넓고, 환경 존중,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는 중공 만이 오로지 돈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희토류 채굴 및 정제를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환경 단체와 인권 단체들의 압박이 강해 감히 희토류를 정제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더라도 억제하기 매우 쉬운 체제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밀어 붙일 수 있었다. 여기에 아주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인프라, 무엇보다 희토류를 소비하는 산업인 전자와 방산, 배터리 등이 꾸준히 개발되고 있는 한, 희토류는 채굴과 정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희토류 채굴은 인건비가 저렴해야 하고 극심한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을 동반하게 되어 있기에 미국은 무언가 획기적인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희토류 관련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고, 채굴은 미국에서 한다할지라도 정제는 중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미 지질 조사국(USGS)에 따르면 희토류 글로벌 생산량(17만 t)의 70.6%(12만 톤)가 중국산이라고 집계했다. 심지어 미국이 수입한 희토류의 80%가 중국산일 정도로 미국은 희토류에 관해서는 전량 중국에 의지하고 있다. 러시아, 베트남,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도하면서 희토류 시장에 새로 진입했다. 특히 EU는 희토류의 98%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인데, 2023년 3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에 꼭 필요한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의 65% 이상을 한 나라에서 수입 못 하게 하는 핵심 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중국으로부터의 희토류 수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쉽지 않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희토류를 중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하고 있다. 한국 또한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 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 간다. 중국이 싫어 중국과 단절해야 한다면 당장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 자동차 등을 쓸 수 없게 된다. 혐중론자들이 좋아하는 유튜브나 SNS, 릴스 또한 중국산 희토류가 없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데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국내 자동차 업계는 희토류인 ‘디스프로슘’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디스프로슘은 온, 습도에 약해 장기 보관이 어려운 품목으로 재고가 많지 않은데, 재고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 한다. 디스프로슘은 올해 4월, 중국이 자원무기화로 인해 수출을 통제한 7종의 희토류 가운데 하나로, 반영구적으로 자력을 보유한 ‘영구자석’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중국이 거의 전량 생산하는 원료로, 의료 장비부터 전기차 모터, 풍력발전기 터빈 등 자석이 필요한 곳에 모두 쓰인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전기차 모두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 중이다. 중국은 한국 정부가 지난 2023년 지정한 ‘핵심 광물 33종’ 가운데 30종을 핵심 광물이나, 수출 통제 품목으로 지정한 상태라 중국의 움직임이 한국 산업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은 수출액의 24.2%, 이차전지는 10.8%가 감소하는 등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중 혐중해봤자 우리한테만 손해다. 전자 부품, 자동차 부품, 컴퓨터(노트북, 스마트폰 포함) 부품의 기본 원료는 희토류고, 중국이 이걸 무기 삼는다면 대한민국은 방법이 없다. 미국도 중국 희토류 때문에 달리 대안이 없어 난리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어디서 희토류를 구입해 정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처럼 인권 유린, 환경 파괴 등등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매우 유별난 국가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도 꼼짝 못하는데 한국이라고 뭐 다르나? 필자 또한 혐중론자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가야 한다. 전 세계 주력 산업이 점차 친환경으로 갈수록 핵심 광물의 수요 역시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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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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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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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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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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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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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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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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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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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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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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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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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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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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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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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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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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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 미국과 서방은 중동과 아랍을 달래며 끌어 안으려 하는게 아니라 압력을 넣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은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통해 달래어 끌어 안으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제는 중동과 아랍이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의 압력에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미국과 서방이 중동을 폭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스라엘의 과도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의 행태가 오히려 반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트럼프는 가자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기에 이 또한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트럼프 체제에서만 세 번째 휴전이기 때문이다. 중동과 서방의 분쟁은 20세기 이전엔 치열한 종교적 대립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종교적 대립에 이념적 대립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민족적 대립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아랍 종파와 이란계 종파간의 종파대립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편승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하나로 뭉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면 분명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참혹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석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동맹을 맺었어도 서로를 견제했고 신뢰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반미, 반서방, 반이스라엘을 표방했지만 표면적인 것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정반대였다. 에르도안은 표면적으로만 서방과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떠들었지 서방과 중동 사이에서 자국의 실익만을 추구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마찬가지다. 아랍연맹, 동맹이라는 거창하게 선전했지만 그들 또한 가자지구에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그 사이에서 얻을 실익이 무엇인지만 계산했다. 결국 가자를 도운 국가는 이집트 뿐이었다. 하마스는 시리아의 지원이 끊기자 몰래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3년 전에 걸친 전쟁에서 잘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표면적으로 가자 지구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을 거부하고 하마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땅굴을 이용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하마스는 이집트에서 발원한 무슬림형제단의 형제나 마찬가지다.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압제에 반항하는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아흐메드 야신(Ahmed Yassin)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당 및 조직으로 창당한 것이 하마스(Hamas)이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무슬림형제단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이집트는 가자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서로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이 접해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항공은 이집트 아리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에 대비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쌓인 난민 수용 시설을 지었고, 이집트 공군이 가자 지구 상공에서 구호물품을 투하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가자 지구의 환자 수십명이 이집트로 이송되었으며 이집트 공군은 가자지구 북부에 구호품 공중투하 작전을 지속했다. 이집트가 봉쇄 조치를 했음에도 가자 지구를 떠나 이집트에 정착한 팔레스타인 난민이 11만 5,000명을 넘었다. 결국 가자를 도와준 것은 이집트 하나 뿐이었던 셈이다. 앞으로도 가자 지구를 복구하거나 난민들을 보살필 국가는 이집트 하나 뿐 일 것으로 본다. 지난 1948년 영국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기나긴 숙명적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여태까지 테러 전쟁을 분석해본적이 있는데 대개 전력이 열세인 국가나 민족이 할 수 있는 최선, 최후의 저항이다. 물론 테러는 반인륜적 범죄로 용서받을 행위는 아니지만 왜 테러가 발생하는지 원인에 대해 물어보고 질문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3자의 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3자는 그냥 매체에서 보여주는 행위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선악(善惡)을 판단한다.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테러국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어서다. 그러면서 모든 중동 국가들과 아랍인들, 무슬림들은 테러 국가,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왜곡하여 해석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멀리 바다 건너 캄보디아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똑같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제관은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무지하다. 트럼프가 성사시킨 세 번째 휴전 조약.. 이게 얼마나 갈까? 영원히 종식되는 전쟁이 아니기에 언제든 다시 터질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여기에서 멈출 마음이 없다. 이전처럼 가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자를 도우려하는 국가들의 함선 또한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 그 고립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하마스 또한 어떠한 일을 벌이긴 할 것이다. 너무 강한 조치는 그 압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저항을 부르게 되어 있다.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어떠한 사물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 또한 살기 위해 과도한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본능과 심리를 갖고 있으며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나타나는 수많은 저항 운동과 반란, 민란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휴전 조약은 이스라엘이 가자에 진입하려 한다는 뉴스가 나온지 1~2개월만에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 시티 점령에도 실패했고 결국 가자 전체를 이스라엘 지상군이 장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휴전은 미국이 가자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체면을 세워주고, 가자에는 복구와 휴식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내세운 평화 안 중에 이제 한 쳅터가 겨우 정리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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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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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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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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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 세계의 광물 경제는 중동의 석유,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국의 희토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자원들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은 석유 파동 당시, 자원 무기화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중동의 오일쇼크는 당시 등소평이 이를 지켜보면서 자원 무기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개혁 개방을 한 이래 희토류 개발을 적극 장려하게 된다. 이는 풍부한 매장량에 따른 채굴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제 기술과 인프라까지 갖추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이는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데 포함한 정제 설비 및 전력, 수송 인프라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자 정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희토류가 주목받는 이유는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자성적, 발광적 특징과 함께 탁월한 방사선 차폐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계 희토류 생산은 중국이 거의 90% 이상 독점하고 있는데 중국 광산에서 채굴 뿐만 아니라 이를 제품으로 만드는 정제 과정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중국은 1970년대 이후 희토류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거대 경제를 이루고 정제 기술도 이미 미국을 추월해버렸다. 희토류 생산하고 정제하는데 있어 기술 인력과 자본력에서도 다른 나라를 크게 앞서가고 있어서 앞으로도 중국의 희토류 시장 독점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진다. 미국 등이 중국산 희토류 자원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미국 본토의 희토류 광산에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광산에서 채굴된 희토류도 미국 본토의 정제 시설은이 매우 낡고 규모도 적은데다 기술 인력도 부족해 경제성이 떨어져 제품으로 정제는 거의 중국에 위탁해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한동안 생산을 하지 않다 보니 인력이나 기술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뒤쳐진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타국의 희토류 광산 개발도 중국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독점이 단지 중국 광산 만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 채굴, 정제, 유통 등 희토류 산업의 전반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채굴이 중단된 폐광산까지 국가가 직접 재개발에 나서며 자국 내 희토류 공급망을 만들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내 인프라에 있다. 희토류 관련 연구 인력들을 하찮게 여기고 지원금액도 다른 자원에 비해 적게 책정했다. 그 결과, 미국 내 희토류 생산 및 가공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희토류의 수출량을 자유자제로 조이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 때문에 희토류 가격이 다시 폭등하거나 폭락하여 세계 국가들의 애를 먹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희토류 매장량과 정제술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지금 같은 추세로 희토류를 소비해도 적어도 고갈될 때까지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기업들은 대체 소재 연구에 들어갔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고 있지만 이 또한 완전히 성공할지도 의문이다. 전기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1.5 kg의 희토류가 소요되는데, 토요타는 베트남 등 희토류 대체 생산지 확보에 나서는 한편 희토류를 쓰지 않는 신형 배터리를 개발했다. 그러나 베터리의 성능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 full 충전이 오래 걸리고, 베터리는 빨리 닳아 없어지는 사태가 계속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내구성 또한 문제가 되었다. 열이 빨리 받고, 그로 인해 화재 사건 또한 잦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신형 베터리를 전량 회수해 희토류 없이 재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원래 미국은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었지만 환경 오염 문제 때문에 다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희토류 자원 무기화에 맞서 다시 자국의 희토류를 채굴하며 대항하려 하고 있지만 희토류 채굴은 쉽지 않다. 희토류는 채굴 및 가공 과정에서 극악한 환경 오염과 심각한 산업 재해를 야기하고 있다. 정화 비용이나 노동자에 대한 복지 및 보상 등 기업이 사회적, 윤리적인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전기 및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 곳,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공산당 1당 독재의 통제력으로 인해 장기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일관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서 최상이고, 환경 규제 또한 느슨하다. 희토류를 정제하려면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또한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들과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고 있다. 그 이유로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도 발생하는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며 이를 처리하는 인원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하고, 독성 화학물에 대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인명이나 환경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중공이라는 나라의 특성, 이로 인한 희토류 정제는 중진국급 국가 중 가장 땅이 넓고, 환경 존중,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는 중공 만이 오로지 돈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희토류 채굴 및 정제를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환경 단체와 인권 단체들의 압박이 강해 감히 희토류를 정제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더라도 억제하기 매우 쉬운 체제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밀어 붙일 수 있었다. 여기에 아주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인프라, 무엇보다 희토류를 소비하는 산업인 전자와 방산, 배터리 등이 꾸준히 개발되고 있는 한, 희토류는 채굴과 정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희토류 채굴은 인건비가 저렴해야 하고 극심한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을 동반하게 되어 있기에 미국은 무언가 획기적인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희토류 관련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고, 채굴은 미국에서 한다할지라도 정제는 중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미 지질 조사국(USGS)에 따르면 희토류 글로벌 생산량(17만 t)의 70.6%(12만 톤)가 중국산이라고 집계했다. 심지어 미국이 수입한 희토류의 80%가 중국산일 정도로 미국은 희토류에 관해서는 전량 중국에 의지하고 있다. 러시아, 베트남,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도하면서 희토류 시장에 새로 진입했다. 특히 EU는 희토류의 98%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인데, 2023년 3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에 꼭 필요한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의 65% 이상을 한 나라에서 수입 못 하게 하는 핵심 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중국으로부터의 희토류 수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쉽지 않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희토류를 중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하고 있다. 한국 또한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 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 간다. 중국이 싫어 중국과 단절해야 한다면 당장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 자동차 등을 쓸 수 없게 된다. 혐중론자들이 좋아하는 유튜브나 SNS, 릴스 또한 중국산 희토류가 없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데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국내 자동차 업계는 희토류인 ‘디스프로슘’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디스프로슘은 온, 습도에 약해 장기 보관이 어려운 품목으로 재고가 많지 않은데, 재고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 한다. 디스프로슘은 올해 4월, 중국이 자원무기화로 인해 수출을 통제한 7종의 희토류 가운데 하나로, 반영구적으로 자력을 보유한 ‘영구자석’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중국이 거의 전량 생산하는 원료로, 의료 장비부터 전기차 모터, 풍력발전기 터빈 등 자석이 필요한 곳에 모두 쓰인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전기차 모두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 중이다. 중국은 한국 정부가 지난 2023년 지정한 ‘핵심 광물 33종’ 가운데 30종을 핵심 광물이나, 수출 통제 품목으로 지정한 상태라 중국의 움직임이 한국 산업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은 수출액의 24.2%, 이차전지는 10.8%가 감소하는 등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중 혐중해봤자 우리한테만 손해다. 전자 부품, 자동차 부품, 컴퓨터(노트북, 스마트폰 포함) 부품의 기본 원료는 희토류고, 중국이 이걸 무기 삼는다면 대한민국은 방법이 없다. 미국도 중국 희토류 때문에 달리 대안이 없어 난리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어디서 희토류를 구입해 정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처럼 인권 유린, 환경 파괴 등등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매우 유별난 국가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도 꼼짝 못하는데 한국이라고 뭐 다르나? 필자 또한 혐중론자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가야 한다. 전 세계 주력 산업이 점차 친환경으로 갈수록 핵심 광물의 수요 역시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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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