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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영국 외무부 장관 발언에 "우크라이나가 영국 무기로 러시아 공격할 수도" 발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영국 지원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한 영국 외무부 장관의 발언에 발끈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국제문제전문가 심민의 글을 통해 "영국은 유럽 대륙을 전쟁의 화난 속에 깊숙이 몰아넣고 있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부 장관을 비난했다. 심민은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한 캐머런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발언을 문제 삼았다. 심민은 캐머런 장관의 발언을 "호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수습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발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캐머런 장관이 키이우 방문에 앞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음을 언급하며, "미국 상전의 입김이 톡톡히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러시아 영토로 확산되고 다시 유럽지역으로 타번져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캐머런 장관의 발언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캐머런 장관의 언급을 두고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며, "우크라이나 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직접적으로 고조시키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캐머런 장관은 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영국에서 지원한 무기를 러시아 내부 목표물 타격에 쓸 권리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군사 지원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영국의 이 같은 입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체적인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과 러시아의 반응은 영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국제적인 긴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 뉴스
    • 지구촌
    2024-05-07

칼럼 검색결과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2
  • 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16년 만에 승인하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 약칭 '두카지니(Dukagjini)'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ë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얼마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š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30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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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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