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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검색결과

  • 서울아산병원 교수들, 의대 증원 정책 철회 요구하며 피켓 시위 벌여
    2024년 5월 3일,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에서 의대 증원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교수들의 피켓 시위가 열렸다. 이날 시위는 과로로 인한 피로 누적을 이유로 일부 교수들이 진료와 수술을 중단하고 참여했다. 서울아산병원을 포함한 서울 주요 상급종합병원 '빅5' 중에서도 서울성모병원의 일부 교수들이 이에 동참했다. 서울아산병원 교수들은 현재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이 의료계 내 피로 누적과 과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교수들은 이 정책이 의료 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의료진의 근무 환경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피켓 시위에 참여한 교수들은 "의료대란을 막아라"와 "의대 증원 정책 철회" 등의 구호를 들고 병원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집회를 통해 의료 현장의 실제 문제점을 알리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현실적인 대안 마련을 요구했다. 피켓 시위 이후에는 '2024년 의료대란과 울산의대 교육 병원의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비공개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서는 의대 증원이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과 향후 의료 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참여한 교수들은 의료 교육의 질적 향상과 의료 서비스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
    • 과학
    • 의학
    2024-05-03

칼럼 검색결과

  • 발칸의 나치, 우스타샤에 협조한 카톨릭의 어두운 과거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멸망했고 나치독일과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고 이 괴뢰국에 루이 바르투(Louis Barthou)라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르비아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 보슈냐크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세르비아인 250,000명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330,000명에서 390,000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과 37,000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이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약 200,000명이 고문과 협박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이를 주도한 비밀 경찰청장이라는든지 세르비아인 학살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카톨릭 사제 출신 인사들이 차지했다.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건립하고 이를 담당한 수용소 소장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 출신이었다. 야세노바치 강제 수용소에서는 60,000명에서 70,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오늘날 야세노바치 수용소에는 이곳에서 살해당한 수감자 75,15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내일 나는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답사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하도록 하자. 당시 크로아티아의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는 1941년 4월 14일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벌였다. 이와 같은 엄청난 얘기는 현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선한 종교 천주교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경악스러운 얘기였다. 그리고 스테피나츠가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방국의 지도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와 우리의 지도자이신 안테 파벨리치로 하여금 무력으로 우리의 압제자를 쫓아내도록 인도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를! 안테 파벨리치에게 무한한 충성을!(Bog je vodio Adolfa Hitlera, vođu naših saveznika, i Antu Pavelića, našeg vođu, da silom istjeraju naše tlačitelje. Slava Bogu! Hvala ti Adolf Hitler! Bezgranična odanost Anti Paveliću!)"이라고 외치면서 선동했던 것은 당시 나치와 파시즘의 행패에 침묵하고 비호했던 로마 교황청과 연관이 있다. 당시 교황은 비오 12세(Pius XII)였다. 비오 12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뮌헨에서 머물고 있을 때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의 좌익 폭동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주교 관저로 쳐들어와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을 겪었어도 주교관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비오 12세가 뮌헨에서 머물 때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고 이처럼 그는 반공을 위해서라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당시 바티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태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나온 것은 괜히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비오 12세는 독일 공산당의 뮌헨 지부를 가리켜 무질서하고 추잡하며, 유태인 천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Hitler's Pope)>이라는 전기에 의하면 유태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심지어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축복했는데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가 비오 12세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고 썼다. 존 콘웰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은폐된 나치 학살의 배후(The person behind the Nazi massacre covered up by the power of Almighty God)"라고 비난했다. 교황의 비호에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의 전범 파벨리치를 축복했다. 우스타샤는 종교적인 학살을 묵인 받은 셈이 되었다. 파벨리치는 순수한 카톨릭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제도들을 도입한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준수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정부와 학교에서 비(非) 카톨릭교도는 모두 추방했다. 더불어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성경 및 책을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탄압했다. 더불어 카톨릭 신자가 유태인 등 이교도와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다. 모든 공공시설 입구에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워 놓고 인종 청소 작업도 병행했다. 파벨리치 정부는 이것을 '위험 인물(Undesirables) 제거 작업'이라 했다. 당시 파벨리치에 의해 규정된 위험 인물은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 비(非) 카톨릭교도들이었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들 완전히 절멸되어야 한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험 인물들을 청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이와 대량 학살의 전모에 대해 <바티칸 대학살(The Vatican's Holocaust Archived>이라는 책에 서술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조직적으로 자행했다 밝히고 있다. 가히 파벨리치의 목적은 크로아티아를 카톨릭 신정국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르비아인 학살에 있어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우스타샤들의 무기는 같은 카톨릭 국가들인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통해서 지원되었고 이 또한 바티칸이 계획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과 친카톨릭 독립 국가 또한 바티칸이 설계하고 기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바티칸에게 상당한 지원을 받았고 금전적인 지원으로 인해 불가리아인을 고용하여 유고슬라비아 국왕을 암살했다. 그리고 우스타샤를 이끌고 세르비아인과 유태인들을 학살함과 동시에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진두 지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패배하자 파벨리치는 남미로 도주했는데 이 또한 바티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우스타샤의 대부분이 카톨릭 사제들과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야세노바치 강제수용소 등 대부분의 절멸 수용소의 간부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었다. 아브로 맨하탄은 이를 두고 바티탄이 기획한 학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정권을 잡은 파벨라치는 모든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강제 개종법을 통과시키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다. 우스타샤는 이 법에 따라 세르비아인들을 개종시키며 상당한 양의 돈도 뜯어냈다. 1인당 180 디나르(Dinar)를 내고 고해성사를 하면 '개종 증명서'를 발행해줬다. 이와 같은 학살에 두려움을 느낀 세르비아인들 가운데 30%가 학살을 피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와 같은 강제 개종 소식은 교구 게시판, 즉 대주교 스테피나크가 담당하는 자그레브 주교 관할 기관인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스테피나크는 이를 바티칸에 보고했다. 1941년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 38호지에 의하면 "부딘치 마을의 모든 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2,300명 영혼의 새로운 교구가 만들어졌다(Svi mještani sela Budinci prešli su na katoličanstvo, čime je nastala nova župa s 2300 duša)."고 보도하였다. 만약 이러힌 개종에 대해 단체적으로 저항할 경우 무자비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어졌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바라즈딘(Varaždin)에 있는 카프치네 수도원 사제 암브로지아 노바크(Ambrozija Novak)는 우스타샤와 함께 모스타니(Mostanika) 마을을 포위한 이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사형에 선고되었다. 사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카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Srbi su osuđeni na smrt. Jedini način da se izbjegne smrtna kazna je da se prihvati katoličanstvo)."라고 포고문을 돌리기도 했다. 20세기에 중세 시대에서나 볼법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였다. 참고로 바라즈딘은 우스타샤에 의해 크로아티아 최초의 유덴프라이(Judenfrei)가 선언된 곳이었다. 유덴프라이는 "유태인이 없는 땅"이라는 독일어이다. 한편 리브노(Livno)에서 가까운 고리카(Gorika) 수도원 신부 스레치코 피리크(Srečiko Pirik)는 대학살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든 세르비아인을 죽여라. 학살을 마친 후에 이 교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의 행위를 고백하고 네 죄를 사해 줄 것이다(Pobijte sve Srbe. Nakon što završiš svoj posao, dođi ovamo u crkvu i ja ću ispovjediti tvoja djela i osloboditi te tvojih grijeha)." 이와 같은 말들로 인하여 1941년 8월 10일에 리브노 지방에서 대학살이 존재했으며, 5,600명 이상의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은 잔악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이는 중세 시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무슬림들을 학살했는데 이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체포한 정교회 신도들을 산 채로 생매장시켰고 도끼로 목을 잘라 살해했으며 눈알을 빼서 눈알을 화환처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한편 붙잡힌 정교회 사제들은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들은 맨발에 말 편자를 못 박아 불길을 걷게 하면서 태워 죽였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Jasenovac)에서는 정교회 신자들과 사제들을 소각로에 던져져 산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굶어 죽거나 갓난 아이들은 벽에 던져져 머리가 깨진 채 죽었다. 우스타샤는 정교회 신자들을 편리하게 죽이기 위해 일명 세르비안 칼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조직적인 학살을 진두 지휘한 많은 전범들이 카톨릭 성직자들이라는 것에서 대단한 충격을 받고 있다. 상당수 카톨릭 사제와 수도원의 수사들은 정교회 사제들과 신도들의 사형 집행을 주도했다. 1941년 대학살을 주도한 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투고미르 솔도(Tugomir Soldo) 수사였다. 한편 보지다르 브랄로프(Božidar Bralov) 신부는 180명의 세르비아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후 시신을 쌓아놓고 그 앞에서 춤을 췄다는 보고도 존재한다. 나치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Dragutin Camber)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을 명령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Gregori Rozman)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전격 수배되었다. 한편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Ivan Sarik) 주교는 세르브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한 사제였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여 독일 나치들조차 놀라게 한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앞서 첫 단락에서 언급한 프란시스카 수도회의 사제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 그리고 레온 드라가노비츠(Leon Draganowicz) 신부는 전시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탈출시킨, 이른바 쥐구멍 라인(Rat Line)으로 불리는 탈출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크로아티아에서의 나치를 두둔하여 학살을 주도한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는 나치 전범에 학살자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 받아도 모자랄 인물이다. 티토는 전범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기소했다. 티토는 세르비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6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는 이에 반발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스테피나츠 대주교의 사면과 석방을 국제사회를 통해 압박한다. 그리고 스테피나치 대주교를 오히려 추기경으로 승진시켜버렸다. 이어 그의 사후, 충격적이게도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면서 시복되었다. 이러한 나치와 협력 행위에 대해 로마 카톨릭과 바티칸 교황청의 지금 입장은 어떨까? 학살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사과와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현재 스테피나츠는 자그레브 대성당에서 편안하게 영면하고 있다. 이런걸로 볼 때 크로아티아는 사과와 반성 없는 나치 국가가 맞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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