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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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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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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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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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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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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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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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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Gnassingbé Eyadéma, 1967~2005)의 독재화, 토고의 민주화 실패 (中편)
    에티엔에서 냐싱베로 개명한 이후, 그는 국민들에게 아프리카식으로 이름을 개명할 것을 권유했으며 냐싱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고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식당에서 냐싱베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을 정도로 냐싱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냐싱베는 1974년 1월 24일에 발생한 비행기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고 2주 전, 중요한 인산염 광산 회사를 국유화 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광석을 착취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프랑스 정부가 꾸민 음모이자 그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고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추락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측근들이 사고를 조사하여 사고의 원인이 기체 결함이라 발표하자 냐싱베는 기체 결함이 분명히 프랑스 정보부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사보타주일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반발했다. 물론 정황이야 그렇다쳐도 프랑스 정보부가 기체 결함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사고 이후 토고 대통령의 전용기는 걸프스트림 II로 교체되었으나, 이 기체도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2월 26일에 충돌 사고가 발생해 승무원 3명이 사망했다. 참고로 사고 기종에 탑승한 승객 3명은 전원 생존했으며, 이들 중 냐싱베는 이 전용기에 타고 있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에 프랑스 언론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1월 24일 사고로 생존한 사람은 냐싱베 1명만이 아니었는데, 냐싱베의 친구이자 사고기의 동승자였던 프랑수아 루(François Roux) 목사는 2013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냐싱베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사고기 탑승자 수까지 6명에서 5명으로 축소해가며 사고 정보를 일부러 잘못 전달한 측면이 강하다. 한편 사고 이전 국유화 한 인산염 광산 회사는 수익성이 좋아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국가 개발을 위한 세입을 증가시켰고, 주변국과 비교하면 정치 상황도 그나마 안정적이었기때문에 1970년대에 토고는 1960년에 73달러였던 GDP가 1970년에 116달러로 급속히 상승하면서 언젠가는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냐싱베 정부의 잘못된 관리와 막대한 부정부패로 인해 토고의 경제 사정은 더욱 피폐해지게 된다. 이는 1980년에 1인당 GDP 400달러로 정점을 맞이했지만 1984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4년 만에 222달러로 급속히 추락했고, 이후에도 토고의 경제는 성장과 폭락을 거듭하며 그가 사망한 2005년 시점에는 1인당 GDP가 399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화폐 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실질 경제 수준은 오히려 독립했을 당시에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 셈이다. 그리거 1980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개를 죽이려는 사람은 먼저 개가 분노했다고 비난한다며 토고는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으며 토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고 정부를 부러워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피오의 자식들이라며 비난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미 토고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냐싱베는 토고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던 소작농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즉, 대다수의 국민들의 당시 토고의 문맹률이 87%에 달하는 상황이었기에 정부가 하는 일에 대다수가 관심이 없었던데다 그나마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나머지 엘리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냐싱베 정권에 저항할 토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냐싱베의 주장에 의하면 외부에서 보는 것 같이 억압적인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면 왜 냐싱베의 지지를 반대하는 자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지 않고 용병들에게러 가는지 되물으며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아니라고 전면 부인한 바가 있었다. 실제로 냐싱베는 1977년에 토고의 망명자들이 용병을 동원하여 자신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영국 MI6로부터 정보를 접수한 미국 대사로부터 전해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말미에 저와 같은 인터뷰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와 같은 정부 전복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독재는 그에 대한 전격적인 우상화로 이어졌다. 냐싱베는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우상화 했는데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는 북한의 김일성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의 우상화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신(神)으로 만들었다. 냐싱베도 이러한 모부투 세코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대부분의 상점에 자신의 초상화를 장식하게 하고는 15초마다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는 손목시계를 만들어 판매한 부분이다. 또한 토고의 라디오 방송국은 냐싱베가 토고를 통치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식의 노래를 방송 시작과 후마다 송출해야 했고, 그가 순행할 때에는 무려 1,000여 명의 무희들이 그를 수행하며 노래와 춤을 제공하고 수도 로메에는 냐싱배의 거대 동상까지 세워졌다. 여기에 매일 수도 로메의 시민들은 하루에 냐싱베가 대통령궁과 관저를 4차례 왕래하는 동안, 길 위에서 박수를 쳐서 그를 환영해야 했고, 박수를 치지 않거나 박수를 빨리 멈추게 되면 경찰에 체포되거나 심할 경우, 고문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냐싱베는 여러 차례 자신을 향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아 '불멸의 인간' 이미지를 만들어 선동하는데 적극 활용했으며 자신의 경호원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자신을 수술한 외과의사가 제거한 총알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니기까지 했다. 냐싱베가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은 날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향연'이라 묘사되어 그 날은 토고의 국경일이 되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전횡에 참을 수 없었던 프랑스 유학생과 엘리트 지식인들, 깨어 있는 로메 시민들을 중심으로 1990년 10월부터 시민혁명이 시작된다. 1990년 10월 10일,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토고 역사상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열리게 된다. 이 때 냐싱베는 시위의 조건을 받아들여 정치적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한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만드는 것에 승인했고, 그에 따라 1990년 12월 13일에는 토고 내 최초의 야당인 토고민주동맹(ADT)이 창립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토고에는 야당이 존재하긴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토고 운동(MTD)과 아프리카 민족 민주 협약(CDPA)이 있었지만 사실 있으나 마나한 야당이나 다름 없었다. 냐싱베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통합 야당에 대한 승인에 사인하지 않았으며 1991년 1월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사면하는 꼼수까지 부리면서 야당 승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3월 1일~4월 30일 동안 시민들은 냐싱베의 꼼수를 파악하고 로메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파업과 폭력 시위가 지속적 발생하게 된다. 이에 냐싱베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 투척, 실탄 발포 등을 통해 여러 명을 살해하면서 혁명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프랑스와 집단 서방은 냐싱베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4월 10일에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냐싱베는 다당제를 승인하게 된다. 같은 해, 5월에 시민들은 냐싱베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냐싱베는 1967년부터 역임한 국방부 장관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냐싱베는 같은 해, 6월 12일에 국민회의 개최를 인정했으며 7월 8일에 시작된 국민회의는 1991년 8월 27일에 조셉 코쿠 코피고(Joseph Kokou Koffigoh, 1948~ ?)를 총리로 추대하고 냐싱베는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격하되었다. 당시 냐싱베는 코피고를 총리로 추대할 때 국민회의를 군대로 포위하여 즉각 반발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코피고의 총리 추대를 인정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얼마 안 가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코피고가 야권의 단결 대신 공기업 사장직에 자신의 지지자 외의 친구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계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같은 해, 11월 26일에 코피고가 이끄는 과도 정부인 공화국 고등평의회(HCR)가 토고인민연합당(RPT)의 존속을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이틀 뒤에 코피고의 퇴진과 냐싱베가 임명하는 새 총리 임명, HCR 해산과 모든 결정 무효화, RPT 합법화를 요구했다. 냐싱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군부는 코피고에게 도시를 초토화 시키겠다고 위협했고, 군부 쿠데타를 우려하여 이에 굴복한 코피고는 나싱베의 지지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냐싱베는 자신의 군대 및 군부보다 많은 로메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프랑스는 하루 뒤인 11월 29일에 토고에 거주하던 3,000명의 프랑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300명의 프랑스 군을 이웃 국가인 베냉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2월 3일, 군 부에서 먼저 움직여 의회 관저를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로 포위한 후 최소 17명, 최대 200명을 살해했다. 이러한 살육과정에서 대통령 경호 사령관이자 냐싱베의 이복 형이 절명했다. 이 군부 쿠데타의 배후는 냐싱베가 있었고, 냐싱베는 이를 통해 코피고의 이전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12월 31일에 개각을 발표하며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토고의 민주화는 짧게 막을 내렸다. - 내일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14
  • 터키-이라크의 화해 및 합작으로 이라크 영내의 PKK 집단을 일소할 것인가?
    올해 1월, 야사르 귈레르 국방장관이 직접 지휘한 터키군이 드론을 띄워 아무다, 카미실리, 카하타니야 등 3곳의 대형 변전소들을 공습했고 45명의 손실을 입게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이라크의 푸아드 후세인 외무장관은 하칸 피단 터키 외무장관과 면담한 뒤 공동 성명을 통해 "PKK는 양국에 안보 위협이며 PKK의 존재는 이라크 헌법 위반"이라는 입장을 내면서 적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한편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024년 여름 내로 PKK의 이라크 내 주둔 상황을 끝내겠다고 발표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이겠다고 했다. 현재 터키와 이라크가 화해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터키는 이라크와 PKK를 격멸하기 위해 공동 작전 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에 도달했다. 어제 터키 국방부와 기자회견에서 PKK 조직과 싸우기 위해 바그다드와 '공동작전센터' 설립을 제안했고, 이라크는 회의에서 이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밝혔다. 이 협정은 하칸 피단(Hakan Fidan) 외무부 장관, 야샤르 귈레르(Yaşar Güler)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기구(MİT)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ın) 국장 등 터키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서명했다. 이들은 대테러 · 안보 · 군사분야 투쟁을 주제로 바그다드를 방문한 뒤 화합을 논의하기 위해 서명했다. 회의에서는 라마단 이후로 예정된 에르도안 대통령의 바그다드 방문 준비 방안도 논의됐다. 물론 아직 공동작전센터 설치와 운영 방식 등 세부적인 사항은 정해지지 않았고 이를 위해 양측 간 치열한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터키는 PKK 조직에 맞서 이라크 영토 내에서 더 크고 포괄적인 군사 작전을 조직할 계획에 있다. 이와 같은 이라크 영내 작전을 합법화하기 위해 그들은 공동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체결된 이라크와 이란이 체결한 협정과 유사한 보안 협정 초안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이라크와 이란은 국경의 보안 조치를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해 1년 전인 2023년 3월 19일에 보안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의 목표는 국경에서 이란에 대해 반란을 기도하는 쿠르드 극단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절대적인 안정을 보장하며 이라크 쿠르드족 자치정부(KRG) 주민들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을 방지하는 협정이다.아마도 이라크와 터키 간의 공통적인 경제 관계와 양국의 이익, 특히 바그다드가 터키 영토를 통해 유럽에 설립할 계획인 바스라 항구를 연결하는 개발 통로로 인해 양측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협력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이라크의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한데 물에 대한 분배 보장 요구까지 더해 안보와 경제 문제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협정도 체결될 수 있다. 이에 터키 전략 연구 센터의 무타즈 무히 압둘하미드(Mutaz Muhyi Abdulhamid) 전무이사가 논평하기를 바그다드가 경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이라크 영토 내에서 의 존재를 중단하길 원했다. 이는 안보, 경제 문제 및 PKK에게 물이 공유되는 것을 규제하는 협정이 곧 서명될 것임을 의미한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특히 PKK를 '테러 조직'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이라크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이는 이라크 영토 내에서 PKK의 존재를 종식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PKK를 추적하는 과정에 있어 술라이마니 지역으로 확산된 PKK를 추적하기 위해 조직화된 정보 연구의 형태로 수행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이라크가 터키와 화해한 이유는 이라크와 PKK는 자유 시리아 군(SDF)과 함께 시리아에 있는데, PKK와 협력하는 것이 메우 위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 한다. 압둘 하미드 이사는 PKK가 산과 계곡, 동굴이 아닌 도시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다에쉬와 같은 테러 세력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이 제기되고 있다고 하였다. 터키와 이라크가 안보, 정보, 경제, 물 공유 등의 사안에 대해 협정을 체결할 것으로 보고 있는 압둘 하미드 이사는 터키와 이라크의 관계가 이라크에 있어 경제 분야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압둘 하미드는 도로 개발 프로젝트에 있어서도 이라크는 터키의 지원이 필요하며 터키는 이 프로젝트 참여에 관심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도로 개발이 진행될 북부 지역의 안보 문제로 인해 프로젝트 시행에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고 했다. 압둘 하미드는 거대 기업들이 도로 건설에 참여할 것이며 터키와 이라크는 이들 기업과 터키의 노동자들이 피케이케이로부터 보호받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언론인 샤라크 알 아와사트(Sharq al-Awsat)가 보도한 뉴스에 의하면 압둘 하미드는 고위 관리들을 포함한 터키 대표단의 방문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피케이케이에 대한 제거 의지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라크 측 일부 관계자들은 PKK 제거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으로 인해 터키가 이라크와 체결한 안보 협정을 이유로 향후 이라크 영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법적인 정당화로 이 센터를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알 무스탄시리야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이삼 알 페일리(Isam al-Feyli)는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으로 인해 터키군이 이라크 영토에서 더 많은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 보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페일리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합동작전센터의 설립은 터키가 약 32년 동안 이라크 영토에 주둔한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터키는 이라크 영토에 1992년부터 공식적으로 군사 기지를 설립했으며 현재에도 이라크 영토 기지에 83명의 군 병력이 있는 것이 문제" 라고 했다. 페일리 교수는 터키가 이라크 주둔의 합법성을 확립하기를 원했다면서 무함마드 시아 알 수다니(Mohammed Shia' Al Sudani) 정부가 터키의 이라크 영토 주둔과 수행하는 군사 작전에 대해 시간 제한을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페일리 교수는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바그다드에 작전 사실을 통보한다는 조항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고 말했다. 페일리 교수는 터키가 겪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이라크 영토 내 군대 주둔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합동작전센터로 인해 터키는 이라크가 유엔에서 자국의 주권을 침해했다며 비난하는 것을 막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회담 의제는 터키 및 이라크 문제에 관련된 전문팀이 구성되어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터키 측이 협상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터키 협상 팀에는 하칸 피단 외무장관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터키의 정보국인 MİT 회장인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ın)이 참석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라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일리 교수는 1984년 터키와 이라크 사이에 국경 안보 및 협력 협정이 체결되어 두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협정의 틀 내에서 터키가 조직한 작전 기간이 일주일을 초과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작전을 벌이는 지역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라크의 영토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라크 정부에게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 몫을 보장하고 발언권을 갖는 공동 협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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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14
  • 악플 없는 세상을 향하여: 사이버 악플러에 맞서는 우리의 노력
    Stop making excuses for toxic individuals. Their cruelty is calculated and intentional. The proof is the contrast between their public selves and who they are when no one is around to bear witness to the suffering they cause those closest to them. 악플러에 대한 변명은 그만하세요. 그들의 잔인함은 계산적이고 의도적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들의 공개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의 대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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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터키와 쿠르드 극단주의와 관계, 쿠르드 민족주의의 역사
    PKK에 대해 먼저 간단한 역사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PKK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1978년에 쿠르드족 민족주의자인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에 의해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PKK의 정체는 극단 좌파, 사회주의 이념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그 근본은 에슈키야(Eşkiya)라 불리는 도적떼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디고 외잘란 또한, 처음부터 도적은 아니다. 외잘란은 터키 명문대학인 앙카라 대학 정치학 전공자로 당시 쿠르드계에서도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물론 쿠르드족에서도 엘리트 없었던 것은 아니다. 터키의 2대 대통령이었던 이스메트 이뇌니(İsmet İnönü)가 대표적인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외잘란이 아무리 명문대학을 다니고 있어도 그에게 항상 따라 다녔던 컴플렉스는 출신 성분이었다. 외잘란의 부친은 쿠르드족이었지만 모친은 투르크멘족으로 정통 터키인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터키에는 아아(Ağa)라고 불리는 대지주들이 마을 단위의 토지를 보유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소작을 부치면서 사실상 농노처럼 부리는 체제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외잘란의 부친도 사실상 농노로 일하고 있었기에 외잘란에게 있어 그러한 신분적인 굴레는 그가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그는 터키 내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을 비밀리에 결성했으며 이것이 PKK의 원조가 된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남동부 지역은 다른 터키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여러 마을을 한꺼번에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Ağa)와 아쉬렛(Aşiret)이라 불리는 부족단위의 지도층에게 시달림을 받았기에 그 일대에는 지주들을 털어먹는 도적들이 많았고 이같은 상황에 견딜 수 없었던 외잘란은 대학을 자퇴하고 도적이 되었다. 그래서 초창기 PKK는 모스크와 지주들의 저택을 습격하고 약탈하면서 세력을 키웠으며 이후 그의 밑에 상당수 세력을 확보한 뒤, 비밀리에 소련과 접선해 독립을 꿈꾸며 쿠르디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승인을 약속받게 된다. 이후 외잘란은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브레즈네프와 연결된 시리아 바트당의 지원을 받으며 지하 반정부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을 주축으로 한 터키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케난 에브렌은 쿠르드 무장단체에 대한 강경 대응을 선포한다. 이에 터키군의 추적을 피해 시리아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바트당의 지원을 받으며 무장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우선 시리아가 점령한 레바논의 베카 계곡에 무장 투쟁 본부와 훈련 기지를 건설한 외잘란은 1984년부터 본격적인 터키 공격에 나섰다. 우선 경찰서를 기습하고 보안군들을 매복하여 공격하는 등의 게릴라 전술로 외잘란의 PKK 무장 군대는 14년 동안 군경과 공무원 등 5,000여 명을 살해했다. 이들 가운데는 터키의 범투르크 이념을 교육시키는 교사와 쿠르드족이면서 터키 정부와 내통하는 민간인 동족들도 처단 대상으로 삼았다. 1992년에는 병력이 5,000명으로까지 성장했으며 PKK의 무장 세력은 소탕전이 절정에 이른 1995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터키 정부의 집중적인 토벌이 있어서 그러한 것도 있지만 소련이 붕괴된 뒤, 공산권 국가 어디에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더욱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외잘란은 무장 독립 투쟁에서 쿠르드족 자치 획득과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보장받은 측면으로 노선 전환을 시도하며 터키 정부와 타협에 나섰다. 1996년 9월에는 터키 정부와 협상 하기 위해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PKK와는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외잘란은 1999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터키 국가정보국(MİT)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2002년을 기준으로 터키의 사형제가 폐지되어 그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현재까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PKK는 시리아와 이후, 이라크까지 들어가 터키에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마침 2010년대 다에쉬가 등장하면서 쿠르드족의 생존권이 위협받게 되자 터키의 참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자신들도 이라크와 시리아에 의용군을 파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이 터키 당국과 휴전을 맺었지만, 터키에서는 PKK와 다에쉬를 모두 적으로 인식하면서 계속 공격을 가했다. 이후 시리아에 자리 잡은 PKK들은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Autonomous Administration of North and East Syria)라 하는 로자바(Rojava) 연방을 건국하면서 미국이나 집단 서방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이라크로 들어간 또 다른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은 페쉬메르가(Peshmerga)라는 조직에 합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페쉬메르가(Peshmerga)들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민병대로 출발한 이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항해 여러 차례 독립전쟁을 벌였고 이라크에게 정복된 후에도 여러 차례의 독립전쟁을 시도했다. 특히 1919~1930년대까지 이라크 북부에서 쿠르드 독립을 외치며 영국에게 맞서 저항을 벌인 페쉬메르가들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칠은 독가스 학살까지 지시할 정도였다. 비록 독가스 학살 명령은 겨자가스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행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영국군은 바르자니 독립군 소탕을 빌미로 쿠르드인들을 대상으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이 쿠르드 학살은 현재도 처칠이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는 일종의 본인 생애의 흑역사나 마찬가지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때 영국은 한 종족 자체를 절멸시키려고 했었다. 이후 이라크 공화국이 되었어도 쿠르드족은 독립을 달성하지 못했고 페쉬메르가들은 사담 후세인에 저항하면서 몇 번의 독립전쟁을 벌였지만 압도적인 화력의 이라크 정부군을 이기지 못했지만 사담 후세인 몇 차례 화학무기까지 쓰면서 진압해 과잉진압, 혹은 인권을 유린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로 인해 걸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 미군을 도와 후세인을 상대했다. 미군은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일대의 공인된 군사 조직인 쿠르드 보안군으로 페쉬메르가를 재구성했고 쿠르드 자치주를 만들면서 이라크 북부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미국에게 엄청난 지원을 받고 터키 국경을 넘어 여러 차례 터키 내, 피케이케이와 연합해 테러 작전을 수행했으며 오랫동안 터키 정부의 공적이 되었지만 미국이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속만 태우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실제로 현재 페쉬메르가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 당시 법에 의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장단체가 되었지만 결국 미국에조차도 독립을 인정 받지 못했다. 2013년 제2차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페쉬메르가는 정부군이 버리고 간 자치주 내의 군사시설과 도시들을 신속하게 접수했다. 이들의 장비는 이라크 보안군만은 못해도 미군과 함께하면서 조직된 체계와 급등한 사기를 기반으로 초기 이라크 전쟁에서 많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페쉬메르가들은 다에쉬들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북부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수많은 피난민과 보안군 낙오병을 받아들였기에 물자 부족으로 인해 다에쉬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2014년 다에쉬들이 쿠르드 자치주를 공격하자 이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서방 국가들은 쿠르드군에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독일 또한 페쉬메르가에 독일의 퇴역 장비인 H&K G36, MG3, H&K G3, 발터 P1, 판처파우스트 3, 밀란 대전차미사일, 칼 구스타프 M2, DM41 등을 지원했다. 그리고 페쉬메르가는 이라크 정부와 손을 잡고 2016년 모술 탈환작전을 이라크 정부군과 함께 시작했다. 페쉬메르가는 모술 외곽 지역까지 이라크 군과 연합하여 진격하였지만 도시 공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터키군이 진입한다. 터키군은 이라크 북부에 다에쉬와 PKK, 페쉬메르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023년 11월에는 이라크 북부에서 PKK가 겨울철에 대비해 무기를 은닉하고 공격을 준비하는 동굴과 대피소, 은신처 등 63개소를 파괴했으며 저격총, 수류탄, 폭발물, 지뢰, 탄약 등을 확보했다. 터키군은 12월에도 군사 작전 도중 각각 6명이 숨지는 병력 손실을 입자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서 공습을 벌여 석유시설과 창고 등 29개 목표물을 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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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13
  • 터키의 독립전쟁 당시의 그리스, 메갈리 이데아(Megali Idea)
    본래 투르크 족들은 시베리아, 몽골, 만주 일대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까지 유라시아 초원에 널리 분포하던 유목민이었으나, 범투르크 민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인 오스만, 베일리크, 셀주크 등이 유럽의 중세 시대부터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투르크 족들은 샤머니즘인 텡그리 신앙이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으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부는 기독교화 되었고 대부분은 이슬람화 되었다. 투르크계 민족 중 이슬람을 신봉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 남동유럽인 발칸 반도, 흑해 연안, 카프카스까지 걸치는 대제국을 세웠었다. 전 세계에서 육지에 걸쳐 3개 대륙을 지배했던 국가는 로마 제국과 오스만투르크가 유이했다. 특히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카톨릭과 정교회를 숭상하고 있던 여러 민족들에게 개종을 그다지 강요하지 않았던 데다가 기본적으로 민족 단위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의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은 종교, 언어, 풍습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이었지만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지즈야라는 세금 제도를 통해서 이교도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한도에서 세금만큼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즈야를 내지 않는 무슬림은 대신 병역의 의무를 지었다. 그러나 대신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제국의 각 행정 기관에서 출세하기도 쉬웠기 때문에 자발적 개종도 존재했다. 물론 이와 같은 관용으로 인하여 권력은 슐레이만 1세 이후로 기독교도 출신인 데브시르메(Devdirme) 집단이 잡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는 상당히 많은 정교회 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갖고 있는 여러 칭호 중의 하나가 "기독교의 수호자"였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영역 내부에 여러 민족의 공동체들이 섞여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제국 각 영역으로 이주하다 보니, 그리스인 무슬림과 터키인 기독교도 및 터키어만 할 줄 아는 그리스인과 그리스어만 할 수 있는 터키인과 같은 존재들도 나타났다. 물론 쿠르드족 또한 이와 같은 역사의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터키령인 동트라키아 제외한 발칸반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쿠르드족에 대한 투르크의 탄압을 피해 중동 국가들에서 망명해 왔던 경우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부터 대대로 동트라키아를 제외한 발칸반도에서 살아온 경우도 있다. 1832년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그리스는 발칸반도 및 아나톨리아 전역의 모든 그리스 민족의 통일과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 영토의 회복을 주창하는 이념인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국시로 삼게 된다. 메갈리 이데아(Megali Idea)는 "거대한 이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후 80여 년에 걸쳐서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 해 제도 등을 조금씩 장악했으며 이와 더불어 그리스에게 메갈리 이데아를 현실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이는 숙적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하여 패전국이 되었고 그리스는 협상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된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유럽 터키 전역과 스미르나 일대를 할양받아 아나톨리아에 진출하게 되었다. 조약 결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거의 오늘 내일 하는 상태가 되었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슬라브족 다수 지역을 차지했으니 관심이 없을 것이고 알바니아는 아나톨리아를 수복한 뒤 곧 정복해 나갈 약소국일 뿐이며 불가리아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라 여기에 관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막을 나라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그리스는 최종 목표인 옛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아나톨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된다. 현재 국력으로는 그리스가 터키에게 상대가 되지 않지만 당시 세브르 조약으로 아나톨리아만 남게 된 1919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인구는 고작 1,463만 명이었고 당시 그리스 인구는 480만 명으로 오스만투르크 영토 일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인구가 200만 명에서 250만 명 사이에 놓여 있었다. 처음에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를 분할해 정복하려는 협상국과 함께 약체인 터키군을 격파하고 터키 대국민회의 소재지인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하는 등 승기를 잡았으나 터키의 위기를 감지하고 규합한 터키군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그리스는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거점과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동부 트라키아를 모두 상실하고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섬을 보전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발칸 전쟁부터 시작해서 제1차 세계 대전, 그리스-터키 전쟁에 이르기까지 근 10년 간 이어진 두 나라의 적대 관계는 서로 간에 증오로 밖에 남지 않게 만들었다.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내주게 된 터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 영토 내 그리스인들을 박해했고 제1차 세계 대전부터는 그리스인을 아나톨리아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 그리스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 된 그리스 역시 이를 보복하려는 차원에서 자국군 점령 지역에서 투르크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고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다시 투르크인들이 그리스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유명한 이즈미르 대화재는 그 정점에 있었다. 수십만 명의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의 보복을 피해 그리스 본토로 도주했고 남은 그리스 인들 역시 언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메갈리 이데아가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투르크 인들의 보복으로부터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인이라도 최대한 구해내기 위해 국제연맹을 중재인으로 하여 서로 상대방 국가에 거주하는 그리스 인과 터키 인을 서로 교환하자는 인구 교환을 제안했다. 그리고 자국에서 그리스 인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터키 정부는 여기에 동의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대규모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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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상, 중, 하로 나누어 연재)
    오늘 시작되어야 할 서아프리카의 국가 토고의 총선이 29일로 연기되었다. 토고 정부는 11일 각료 회의 후 성명에서 총선 및 지방선거일은 4월 29일 월요일이라 밝혔다. 토고 총선은 애초에 내일 13일부터 시작해 20일 시작되는 지방선거와 함께 치를 예정이었으나 지난 달 25일 의회에서 통과된 헌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자 정부가 개헌 안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며 연기를 선언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 안은 대통령을 직접 선거가 아닌 의회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고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1년 늘리는 대신 단임제로 바꾸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물론 야권은 이 개헌 안이 현 포르 냐싱베(Faure Gnassingbé)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꼼수라 주장하며 냐싱베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안 서명 보류를 요구했지만 개헌안을 추가로 재논의하라며 다시 의회로 돌려보냈다. 야권은 이와 같은 개헌 안이 2025년 대선을 앞둔 냐싱베 대통령이 여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돼 2031년까지 통치할 수 있는 길을 열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물론 현 포르 냐싱베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조기 대선을 치르고 대선에 당선되면 2030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사실 냐싱베 가문은 프랑스에서 꽂아 놓은 일종의 서아프리카에서 "트로이 목마" 나 다름 없는데 냐싱베 가문의 집권에 따라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내려온 프랑스가 베넹, 가나,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기니, 기니비사우 등의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 소국들을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처럼 친러로 돌아선 국가들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삼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이 무려 50년 넘게 통치하고 있는 냐싱베 가문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토고는 한국의 절반 정도 면적에 인구 926만여 명의 소국으로 서아프리카 가나와 베냉 사이에 있는 국가다.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에야데마 냐싱베(Gnassingbé Eyadéma) 전 대통령이 2005년 2월 사망할 때까지 통치한 데 이어 같은 해 아들 냐싱베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후 부자간 57년째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냐싱베(Gnassingbé) 가문은 본래 프랑스계 개신교 신자인 카바이족 하층민 출신이다. 카바이족은 프랑스에 의해 수탈을 당하며 고초를 겪고 있었을 때, 냐싱베의 부친인 에야데마(Eyadéma)가 프랑스에 저항했다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프랑스군에게 맞아죽었다. 냐싱베 에야데마는 본래 이름이 에티엔 에야데마(Étienne Eyadéma)였다. 그는 고향의 복음주의 학교를 다닌게 학력의 전부였고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에티엔은 고향 서쪽의 바사르 지역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군인이 되는 것만이 비참한 생활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프랑스로 건너가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고, 1960년에 토고가 독립한 후에는 니제르와 베냉에 주둔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육군 중사에 오르고 나서 외인부대가 해체되자 토고로 돌아와 자국 군대의 장교로 군부 인생을 시작한다. 마침 토고에는 프랑스군에 입대해 활약했던 장성 포함 군인들이 626명이나 존재했다. 다른 프랑스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동원 해제된 프랑스 군인 출신 인사들을 새로운 고국 군대에 포함시키는게 일반적이었지만 토고는 이전 식민지 권력에 봉사한 용병이라 판단하여 자국 군대 편입을 거부했다. 당시 이를 거부한 요인으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 이는 토고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실바누스 올림피오(Sylvanus Olympio, 1902~1963)가 국가 발전과 현대화에 있어 군대가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올림피오는 프랑스군 출신 장성들과 장교들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실제로 올림피오는 군인이 250명 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토고 군의 인원 수를 250명으로 정했다. 심지어 올림피오는 독립 후의 토고는 군대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군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 프랑스의 은연중인 내정 간섭까지 불편하게 여기던 올림피오의 실책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지만 이웃 국가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 1972)가 군을 강화하여 토고의 국경을 침공하는 사례가 이어지자 그의 위협이 우려되며 그나마 최소한의 군대를 두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있다가 소집 해제 된 이후, 토고의 전직 군인이 된 자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더불어 올림피오가 소외시켰던 북부 사헬 지역의 토고 영토의 주민들의 불만이 강화되면서 에티엔은 프랑스군 출신 인사들과 함께 쿠데타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1963년 1월 13일에 에티엔은 상사 계급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올림피오 대통령을 축출시켰다. 이 쿠데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 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였다. 에티엔은 수도 로메의 미국 대사관 정문 앞에서 자신의 상관이자 전직 대통령인 올림피오를 직접 총살했다. 처음 에티엔은 1967년에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이 올림피오를 살해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리고 이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르몽드 신문을 토고 내에서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말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림피오 총살에 대해 언급하여 자신이 직접 살해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면서 같은 친프랑스 인사인 니콜라스 그루니츠키(Nicolas Grunitzky, 1913~1969) 전 총리를 대통령에 추대했다. 그루니츠키는 부친이 독일인인 흑백혼혈 출신이다. 1946년에 창당된 토고진보당(PTP)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반프랑스 성향과는 매우 적대했으며, 1951~1958년까지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그는 올림피오 초대 대통령의 처남이기도 했다. 이후 1965년에 에티엔은 중령 계급으로 진급하여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1966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토고군의 군인 수는 쿠데타 직후인 1963년 5월에는 550명에 불과했지만 에티엔의 노력으로 1966년 1월에는 1,200명까지 크게 늘었다. 더불어 같은 해에 토고 남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토고통일당 지지자들에 의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자 이 때부터 에티엔과 그루니츠키와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그루니츠키가 자신을 올림피오 대통령 살해 혐의로 소추할 것을 두려워한 에티엔은 이 시위에 대해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니츠키의 통치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서 시민들은 군부가 권력 장악하는게 낫다며 쿠데타를 종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67년 4월 14일에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추대한 그루니츠키를 몰아낸 후 프랑스로 추방시켰다. 이후 그루니츠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 교통사고로 인해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9년 9월 27일에 사망했다. 이어 같은 해, 4월 15일 대통령, 정부 수반, 국방부 장관에 등극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토고 북부 카바이족 하층민 소작농 출신이 토고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가 된 셈이다. 이후 토고의 대통령 에티엔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의회 정당을 해산했다. 집권 초, 에티엔의 학력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을 감안, 행정 경험 또한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아프리카 수석 고문 자크 포카트(Jacques Foccart, 1913~1997)에 연락해 그의 지시를 받아 토고를 통치했고, 이 때문에 포카트는 '전화로 토고를 통치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어쩌고 보면 프랑스가 절대적으로 에티엔을 밀어줬기 때문에 두 번의 쿠데타를 자행하고도 비판 하나 제대로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프랑스가 서아프리카 소국들에게 만들어 놓은 "트로이 목마" 같은 자였던 것이다. 더불어 1969년에는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인 토고 인민 집회(RPT)를 만들었으며 1972년 1월 9일에 99.9%라는 북한의 김정은도 울고 갈 정도의 찬성표로 얻은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79년과 1986년에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재선했으며 물론 이 선거들은 반대표가 거의 없는 부정선거인 것은 확실하다. 1979년 12월 30일 선거는 투표율이 99.45%에 달한 것은 물론 1,296,851명의 투표자 중 무효 / 공백표를 낸 단 267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찬성표를 던져 찬성율이 무려 99.98%였다. 이후 1986년 12월 21일 선거 역시 투표율은 98.93%에 달한 데다가 1,738,611명의 투표자 중 840명이 무효 / 공백표를 냈어도 찬성율이 99.95%다. 이것도 토고 현대 역사상 근소하게 떨어졌다고 평가할 정도니 그냥 선거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일당제 하의 국회의원 선거 역시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에티엔은 친척과 그의 부족인 카바이족 지지자들이 장악한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대, 프랑스 등 집단 서방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다. 에티엔 에야데마 시기의 토고는 샤를 드골로부터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의 대 아프리카 정책의 선봉이자 하위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며 절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에티엔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렇게 자신의 일족을 요직에 앉혀 놓고 비민주적인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서아프리카의 민주화는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가의 빈약한 경제 자원에 대한 접근을 영리하게 차단하면서 대규모적인 억압은 하지 않고 매우 교묘하게 이를 이용해 정적을 숙청하는 식으로 토고를 강한 경찰 국가로 만드는 등의 수법을 이용해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나이지리아의 야쿠부 고원(Yakubu Gowon) 대통령과 회담하여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의 설립을 추진했다.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는 나이지리아 야쿠부 고원 대통령과 당시 에티엔 에야데마, 현 냐싱베 에야데마가 공동으로 창립한 단체다. 이 또한 프랑스를 비롯한 집단 서방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프랑스와 집단 서방은 비교적 합법적으로 현재까지 서아프리카를 착취할 수 있었다. 당시 에티엔은 야쿠부 고원이 일으킨 나이지리아 내전 기간 동안 발생한 비아프라 미승인 공화국을 정복하고 합병하는 것을 인정했으며 나이지리아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서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1975~1978년에 초대 의장이 되었고, 이후에도 1980~1981, 1999년에 2차례 더 의장직을 역임했다. 1974년 1월 24일에 에야데마와 그의 정치적, 군사적 측근 3명, 조종사 1명을 태운 C-47 기체가 토고 북부 사라카와 마을 근처 숲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 사고로 다른 탑승객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에티엔 1명만 홀로 생존했다. 그것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남았기 때문에 에티엔은 이 생존을 '신비로운 힘'의 덕택으로 돌리고 사고가 난 1월 24일을 '경제 해방의 날'로 선언한 이후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도 '에티엔'에서 자기 일족의 언어인 카비아어로 '용기'를 의미하는 '냐싱베'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냐싱베 가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 내일 中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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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미얀마 군부, 현 미얀마 전 종족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나?
    2021년 미얀마에서 민 아잉 훌라잉 사령관의 지휘 하에 군사 쿠데타 발생했고 3일 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도시와 마을에서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군부에 투표를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을 공개적이고 평화적으로 요청했다. 많은 시위대가 민주주의 민족동맹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였지만 시위의 목적과 쟁점은 정당 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군사 독재주의를 규탄하는 것에 있었다. 많은 공무원들 또한 시민 불복종 운동의 형태로 파업을 벌였고, 처음에는 보건 및 교육 부문에서 주도하던 파업이 전체 공무원은 물론 민간 부문까지 확산되면서 경제가 일시 마비 상태까지 치닫게 된다. 전국에서 시위가 이어지면서 미얀마 군부는 무자비한 체포 작전을 벌여 시민들을 학살하고 야간에 주거지를 급습했다. 무차별적인 살인과 체포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억울함과 분노가 일어났다. 당시 미얀마 유엔 특별 인권 조사관 톰 앤드류스(Tom Andrews)는 군부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고도 깊으며 이런 것은 처음 본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그는 미얀마가 여태까지 이처럼 단결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서 모든 연령, 민족, 사회 경제 집단의 국민들이 군부를 반대하기 위해 뭉쳤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도시의 시위대는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관리하는 국경 지역으로 상당수가 도주했다. 그들 중 다수는 군부의 잔혹성에 대응하기 위해 소수 민족 무장 단체로부터 훈련과 무기를 요청하면서 조직적으로 정부에 저항하게 된다. 이에 미얀마 국회의원과 내각 각료 10여 명이 군부의 체포를 피해 소수민족 무장단체로 도주했으며 이들은 소수민족 사이에서 연방 의회 대표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연방 의회 대표 회원들이 소수민족 무장단체의 보호를 받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톰 앤드류스는 위기로 인해 미얀마 다수 민족인 버마족과 소수민족들 사이에 큰 협력과 단결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미얀마 저항 국민 다수는 카렌 민족 해방군, 카렌 민족 연합 산하의 반군, 카친 독립기구 산하 반군 같은 대형 무장 단체를 분리주의 반군 단체에서 합법적인 자위군으로 보며 이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다. 이들 소수민족 무장단체의 총 병력은 8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연방 의회 대표 위원회는 포괄적인 정부인 국민 통합 정부를 만들고 전례 없이 많은 소수민족 대표들을 지도부에 끌어들여 요직에 임명했다. 국민 통합 정부의 주요 목적과 그 노선은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이른바 135개의 소수민족의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연방민주연합”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 인민 방위군 사이에 절대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미얀마 국민들 중 저항세력들은 확실한 정치적 지원까지 결합하여 군부에 저항하는 강력한 동맹이 형성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군부는 토벌군 내에서도 탈영자가 속출했고 전사자가 상당수 생기면서 잠시 흔들렸으나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정부군과 반군 모두 사망자들이 다수 발생했고 이에 양측 모두의 역량이 약화되었다. 결국 코로나라고 하는 역대급 전염병이 민주화 운동을 잠재웠고, 더불어 반군들의 행동 반경도 축소시키는 결과까지 가져왔으며 정부군 또한 소수민족 반군에 대한 토벌 의지를 꺾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그러나 코로나 시즌이 지나고 그 동안 밀림에서 세력을 보충하고 있던 소수민족 반군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이는 사실상 정부군인 미얀마 군부를 다시 위협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러면서 교전은 2022년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소수민족 부대 중 가장 세력이 큰 조직은 카렌 민족해방군과 카렌 민족연합으로 구성된 몬-카렌족의 조직들이다. 미얀마 북부 골든 트라이앵글의 밀림 지대와 동부, 그리고 말레이 반도에 걸쳐있는 미야와디 강 주변의 몬 주에까지 폭넓게 운신하면서 정부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쳤다. 미얀마 군부는 이들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미얀마 군부가 소수민족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미얀마 전국은 다시 내전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몬족과 카렌족의 전사들에, 한동안 잠잠했던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샨족복원협의회(RCSS)과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면서 내전을 더욱 키우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이 연합전선이라도 형성하게 되면 이들 강경한 소수민족의 군대는 거의 15만에 육박할 정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미얀마 군부는 감당하기 더 버거워진다. 그리고 샨 족의 경우, 미얀마와 적국인 태국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샨 족과 태국의 주 종족인 타이족은 형제 종족이기 때문이다. 태국 입장에서 알게 모르게 샨 족에 대해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에 미얀마 군부가 적극적으로 샨 족을 토벌하지 못했던 이유는 태국이 공식적으로 분쟁 개입을 선언하고 군대 투입 가능성을 시사하게 된다면 미얀마 군부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샨 족 뿐이 아니다. 몬 족과 카렌 족도 알게 모르게 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미얀마 군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무기를 소수민족 반군이 갖고 있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다. 미국이나 집단 서방이 태국을 통해 이들 반군들에게 무기 지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런 직접적인 증거가 포착되지 않고 있지만 중국과 매우 친한 미얀마 군부가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얀마 군부에 간접적인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충분히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일 전, 미얀마 정부군이 태국과 접경 지역인 메솟, 미야와디 일대에서 카렌 반군에게 크게 패했다. 미얀마 군부는 물자와 인력을 태국으로 대피시켰으며 은행에 보관된 현금성 자산과 문서, 군부 공무원 등이 태국으로 도피했다. 미얀마 군부 또한 인력과 자산을 태국으로 탈출시키려는 시도가 포착됐다. 물자가 실린 항공편이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출발해 매솟으로 향했고 태국 외무부는 양곤-매솟 노선이 3편 추가 승인됐다고 확인했다. 이는 카렌 주, 미야와디 지역의 상당수가 카렌 반군에게 점령당했고 모에이 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 딱 주와 접경한 미얀마 동부 지역 자체의 통제권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카렌 군은 미야와디에서 군인과 그 가족 617명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초기에는 자신들이 미야와디 마을의 약 60~70%를 통제하고 있다고 했으나, 추후 80~90%를 점령했다고 상향했다. 이는 미얀마 군부의 최근 패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군부는 지난 3년 동안 반군부 무장 투쟁에 밀리며 라카인 주와 샨 주에서도 거점을 상실했었다. 이는 미얀마 군부 입장에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카렌 주 미야와디 지역이나 몬 주 일대는 태국과의 무역로로 연결되어 있고 미얀마 대외 경제의 60% 이상을 통제하는 곳이다. 이 통제권이 카렌 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미얀마 군부가 주도하는 현 정권의 경제력이 큰 타격을 입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반군들이 미얀마 군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고 무기 성능 또한 정부군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미국이나 집단 서방의 지원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군이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다. 통제력이 약화되어 궁지에 몰린 미얀마 군부의 마지막 비장의 카드는 중국군의 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중국군을 끌어들여 소수민족 반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기반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개입을 원하는 것이다. 중국이 혹시라도 미얀마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집단 서방과 미국은 이에 반발할 것이고 이들의 군대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가능성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아마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가 몰릴수록 중국의 개입 가능성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는 중국의 야심작 중 하나인 미얀마 최대 항구 차슈푸 항 때문이다. 중국은 10여 년 동안 공들여온 미트소네 댐을 포기하면서까지 차슈푸 항에 집착하는 이유가 미얀마와 중국을 잇는 송유관의 시작점이자 일대일로 해상 진출의 핵심 거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항구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아프리카 지부티의 오보크 항구를 연결하는 중국의 거대한 ‘진주 목걸이’ 전략의 핵심 거점이다. 차슈푸 항 주변은 석유, 천연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도양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잇는 핵심 지역이기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은 2017년 차슈푸 항에서 운남성 국경도시 루이리 현을 거쳐 쿤밍까지 이어지는 771㎞ 송유관을 개통했다. 이 송유관을 통해 중국은 벵골만에 위치한 시트웨 가스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연간 120억㎥)와 인도양을 건너온 중동산 석유(연간 2,200만 톤)를 해양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공급 받는 에너지 자원의 창구다. 게다가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데다 미국이 통제하고 있는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중국이 인도양으로 진출할 거대한 야심작 중 하나다. 더불어 쿤밍과 차슈푸 항을 잇는 고속도로까지 건설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얀마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중국 입장에서는 굉장히 예민하다. 이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양안 문제만큼이나 미얀마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 가져야 할 분야 중에 하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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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벨라루스 난민 문제의 본질
    참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이다. 보편적 인류가치로 따진다면 더불어 사는 인류 사회에서 그 처지를 헤아려 받아줄 수 있지만 세상의 이치는 늘 보편적인 인류가치로 따지지는 않는다. 국가가 있고 국민들이 있는 이상, 국가와 국민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인류애적으로 조금씩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는 한계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치적, 정략적, 외교적인 부분에 이용되기도 한다. 우선적으로 말해서 난민이 발생하게 만든 도의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국가에서 이를 선행하여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이 든다. 이러한 중동 난민들의 원죄는 서유럽과 미국에 있다. 1916년 사이크스 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으로 알려진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분할시키는데 일조한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분할 밀약은 오스만투르크 뿐 아니라 다수의 중동 무슬림들의 비난을 받아왔다. 더불어 이 문제는 1948년 영국이 다수의 유태인들을 현 이스라엘 땅에 정착시키고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중동 국가들의 반발을 사, 제1차 중동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 쿠르드족 문제 등 각종 문제에 미국과 서유럽이 끼어 있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집단 테러로 인한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공격에 나섰지만 장기전 끝에 쫓겨간 것은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생성된 난민이 최대 80%에 달한다. EU는 책임을 통감하고 인도주의적으로 국경을 열어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이 또한 쉽사리 감당이 안 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나는 서구의 과욕에서 비롯된 자업자득(自業自得), 출이반이(出爾反爾),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것이다. 중동에서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음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냅둬야 하는데 여기저기 끼어들어 결국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만들었다. 게다가 EU에서는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할당제를 도입해 수용시키고 이를 따르지 않는 국가들에 제재도 가하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와 친러 국가들은 난민 수용에 부정적이었는데 이와 난민 사태를 통해 EU와 친러 국가들 사이에서는 다시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 생성되었다. 푸틴의 집권 후, 점차 세력을 회복했던 러시아를 견제했고 제2차 체첸 전쟁, 조지아 전쟁에서 연이어 승전하자 EU의 경계는 더욱 커지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목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2014년 우크라이나 마이단 사태에 이은 돈바스 지역의 독립,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이었다. 80% 이상의 친러 성향을 갖고 있는 드네프르 강 동쪽의 돈바스 지역과 크림 반도 지역이 러시아로의 귀속을 요구했고 결국 크림 반도를 장악한 러시아는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아 루블화가 휴지조각이 되는 등, 대단위의 경제 위기를 맞이한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EU에 굴하지 않고 버틴 것은 유럽에 공급되고 있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의 간섭은 같은 유럽권인 벨라루스에게도 미쳤다. 1994년부터 벨라루스를 철권 통치하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대선에서 80% 이상의 득표율로 압승해 6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벨라루스 야당과 시위대는 부정 투표와 개표 조작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며 수개월 동안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대선 무효와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루카센코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야당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야당 주요 인사들의 아내들이 시위대를 주도했지만 이 또한 실패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러시아로 도피했다. 그러자 EU는 루카셴코 대통령을 포함해 벨라루스 인사 88명에 대해 EU 내 자산동결과 비자발급 금지 등의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나는 정의를 선도한다고 생각하는 EU의 결정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벨라루스 문제는 벨라루스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고 그들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하는게 옳다. 미얀마와는 다르게 말그대로 바로 옆에 EU 국가들과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보다는 조건이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EU가 참견을 하니 루카센코의 입장에서는 내정간섭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6월에 벨라루스 정부가 반체제 언론인을 체포하려고 전투기까지 동원해 라이언에어 4978편을 강제 착륙시켰다. 실제 벨라루스 정부가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의 폭탄테러 협박이 있었다는게 주 이유였지만 해당 항공편에는 벨라루스 반체제 유튜버 로만 프로타세비치(Роман Протасевич)가 탑승해 있었기에 KGB 요원들이 기내에 난입하여 로만 프로타세비치(Роман Протасевич)를 체포해갔다. 이 사건으로 EU는 벨라루스의 주요 수입원인 석유 제품, 염화칼륨, 담배 제품 생산에 사용되는 상품 거래를 제한시켰으며 EU 자본시장 접근도 제한되며, 벨라루스 정부나 공공 기관에 보험, 재보험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더불어 벨라루스에 인터넷, 전화 통신 감시나 도청을 위한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 군민 양용 제품과 군사용 기술을 직간접적으로 판매하거나 공급하는 것도 금지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도 벨라루스 9개 국영기업을 제재하겠다고 밝혔고 인도주의적, 또는 국가 보안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미국과 벨라루스 간 항공권 판매를 금지했다. 이러한 EU의 제재를 받게 된 벨라루스는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로부터 난민들을 초청하여 벨라루스와 접경한 EU 국가들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라트비아로 보냈고 . 벨라루스군은 난민들에게 임시 거처를 주고 EU 국경을 넘는데 도움을 주면서 EU로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특히 벨라루스는 국영 항공사 벨라비아 항공과 이라크 항공의 시리아-이라크행 항공편 증편을 통해 난민들을 중동으로부터 데려왔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실상 난민들을 이용한 보복조치를 감행한 것이다. 비교적으로 국경 수비가 적었던 EU-벨라루스 국경으로 수백 수천명의 난민들이 몰려들자 양국군간의 대치 상태 및 폴란드와 발트 3국 등 과거 난민들의 유입이 적었던 지역들에서 난민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 비교적 EU의 육로 왕래가 자유로웠던 벨라루스-폴란드의 국경 도시 브레스트 국경도 전면 폐쇄됐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벨라루스와의 국경에 군을 배치하고 철책, 방벽 등을 설치하면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강화, 특히 해당 난민 사태에 중추 역활을 행한 벨라비아 항공 등지에 EU 내 활동 금지령 등을 내리면서 벨라루스를 압박했고 루카센코는 유럽행 가스 공급을 차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야말-유럽 가스관이 지나가는 경유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벨라루스 루카센코가 가스관을 잠근다고 해서 함부로 잠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스 자체가 벨라루스의 것이 아니고 러시아의 것이며 러시아 최대 가스재벌인 "가스프롬"의 소유다. 그렇기에 벨라루스가 잠근다고 해서 자기 맘대로 잠글 수 있는게 아니기에 그 배후가 푸틴으로 지목하고 있는 이유다. 푸틴 대통령이 벨라루스가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을 끊지 말아야 한다며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 EU 측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푸틴이 루카센코에게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현재 우크라이나 국경 일대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군세를 강화하고 있는 푸틴이 벨라루스 난민 사건으로 EU의 관심을 돌리게 하고 그 사이 우크라이나 일대에 10만 대군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를 완료하여 돈바스 친러 성향의 반군들에게 지원할 채비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고 미국은 유럽 동맹들에게 러시아 군사행동을 경고했지만 이 보도가 나간지 얼마 안 되어 벨라루스 난민 사건이 터지면서 우크라이나가 아닌 뜬금없이 벨라루스가 주목을 받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지 얼마 안 되어 왜 하필 벨라루스일까? 어쩌면 러시아-벨라루스가 난민 문제로 사이드 라인을 가동한 다음 현재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는 돈바스 지역, 루한스크 인민공화국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을 합병하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우려가 있다. 그래서 러시아 공영방송인 РОССИЯ 1과 РОССИЯ 24에서 어제부터 우크라이나 관련된 뉴스를 자국에 자꾸 내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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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에 대한 이야기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 가입에 초읽기에 들어갔다. 다만 나토 회원국이 되려면 기존 회원 30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한다. 미국은 나토의 개방 정책, 핀란드와 스웨덴이 자국의 미래와 외교 정책을 결정할 권리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과 산나 마린 총리는 핀란드 정부는 나토에 가입을 신청하기로 공식 신청한 상태다. 나토 가입 신청안은 16일 핀란드 의회에 제출되어 비준을 받은 뒤 나토에 제출될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두 나라가 테러 조직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며 이들이 나토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찬성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터키를 방문하는 등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 앞서 터키 아나돌루 통신은 지난 5년간 스웨덴과 핀란드가 쿠르드 노동자당인 PKK 소속 범죄인 인도 요청을 터키가 했는데 그 중에 33건 중 19건을 거부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만약 터키가 스웨덴,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게 되면 이들은 나토 가입을 할 수 없다. 그러면 스웨덴과 핀란드는 터키와 협상을 하려 할 것이지만 PKK 당 관련 범죄인 인도를 하는 선에서 타결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PKK는 Partiya Karkerên Kurdistanê의 약자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쿠르디스탄 노동자 당"을 의미한다. 이름 그대로 극좌 성향을 갖고 있으며 터키 정부에서는 이들을 극좌성향의 테러조직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테러조직과는 그 성향이 다른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매우 세속적이고 이슬람주의자도 아니며 무슬림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종교와의 연합도 서슴치 않는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중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는 터키에 대한 반감으로 아르메니아군과 같이 행동하면서 그들과 연대를 이루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국가다. 다른 이슬람권에서도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나뉘어 내전을 치를 때 사회주의적 국가 체제와 이슬람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공존했었으며, 이란 혁명기 중 호메이니의 이슬람주의 세력이 확고하게 승리하기 이전에 이란은 '이란 혁명의 선구자적 사상가'로 불렸던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 같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좌파적 이념과 무슬림으로서의 신앙을 상당히 유연하게 왕래했기 때문에 이슬람교와 세속적 좌파 사상은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과 아랍권에서 친소경향의 세속주의 군사 정권들, 그리고 이슬람주의 세력들간의 전쟁을 통해 형성된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상극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마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해방신학이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있는것과 같이 이슬람과 좌파는 절대적으로 공존 불가능한 이데올로기적 체계는 아니기에 그들 사이에서도 발생이 가능하다. 쿠르드 PKK의 경우 또한 그런 예외에 속하지만 공산주의 속성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갖고 있기에 그냥 명목상의 무슬림인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테러는 매우 위협적이다. 본래 이들 쿠르드 테러조직은 에슈키야(Eşkiya)라고 불리던 마적단 출신들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쿠르드 부족들의 자치 전통이 존재했을 때 해당 지역의 대지주들의 황포에 저항해 소작민들이 마을을 탈출해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대지주의 집과 농장 터는 도적이 되었다. 이들이 이후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산주의 게릴라 같은 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빠르띠쟌의 투쟁이념이 이들에게 들어가면서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된 터키 내 좌우파의 갈등에 개입했고 중앙정부와 결탁해 절대권력을 가진 지주들에게 저항하는 에슈키야들이 바로 PKK였던 것이다. 이들 PKK는 창설 이후 폭력시위나 사보타주, 폭탄테러를 벌이는 식으로 터키에게서 분리독립하는것을 지향해왔고, 서구에 있는 터키인들의 외교시설과 상점까지 공격하였기 때문에 터키는 물론이고 서유럽 국가들, 미국에게 테러단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같은 테러단체여도 PKK와 ISIS, 알 카에다 등의 조직과의 사이도 매우 상극이었는데 PKK가 IS 격퇴에 성공을 거둠에 따라 국제 여론은 PKK를 극좌 테러그룹으로 여기는 대신 중동의 민주주의와 자유 등을 위해 IS와 싸우는 최고의 희망으로 바뀌고 있는 어이 상실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민간인 목숨을 노리는 테러단체라는 것은 둘 다 똑같은데 말이다. 현 스웨덴에서 활동 중인 쿠르드족 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연일 터키를 비판하고 PKK를 옹호하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그동안 PKK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서유럽 국가들, 미국에게 테러단체로 지정된 자들을 보호하며 옹호하고 있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을 승인하게 되면 테러단체를 옹호하는 국가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ISIS 같은 자들과 싸워왔던 나토의 명분은 힘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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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시위의 영향 두 번째 이야기와 민주화 시위를 도우려 했던 대한민국 학생들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시위 당시 북한 유학생만 시위대를 도우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 8명이 헝가리의 자유화를 돕기 위해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이란 단체를 조직해 헝가리로 들어가는 것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의용군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 매우 낯선 단어로 여겨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 의용병들과 같이 타국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가들이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의용병으로 참전하는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 학도의용병이라고는 했지만 대학생은 지식인의 일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의용병이라는 단어는 나름 고품격스러운 멋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헝가리가 한국의 명백한 적성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정부가 제지했고 연세대 대학생들로 구성된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의 헝가리 진입은 실패했다. 당시 한국에서 여권은 사회 고위층만 가지고 있었던데다 해외로 출입국하는 것 자체가 자유롭지 못해 통제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공산국가로 민주화 운동을 위해 총들고 싸우러 가는 행위가 이승만 정부의 눈에는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국가를 민주화시키기 위해 간다는 것은 반공정신이 투철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젊은 학생들의 의기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이어 독재를 운운하기 이전에 정상적인 국가라면 국민이 남의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겠다 할 때 못 가게 막는 것이 정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66년이 지난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국제 용병으로 이근 대위를 비롯한 한국인 몇 명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참여한 것도 그 보다 앞선 1956년에 이와 같은 시도가 이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만 해도 ISIS에 대항하는 쿠르드족 민병대에 가담했던 한국인이 강제로 한국에 끌려와 여권을 압수당하는 조치를 당했었던 캐이스 또한 존재하기도 했다. 거기에다 서방 국가들도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한국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한국에서 괜히 소련을 자극하는 행위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이 의용군 멤버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유재건 변호사는 후일 헝가리가 민주화되었을 때 헝가리 정부로부터 각기 '십자대훈장'과 '십자중훈장'을 수여 받았다. 한편 시인 김춘수는 헝가리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듣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로 피해를 입은 헝가리 시민들을 추모했다. 당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15세의 소녀병 셀레시 에리카(Szeles Erika)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혹시 에리카를 염두해 둔 것이 아니냐는 평이 있었다. 한 때 이른바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반공을 촉구한 시로 평가 절하 당하기도 했으나, 요즘에는 깊게 연구되는 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혁명 60년 기념 특별 사진전에서는 에리카의 사진 옆에 김춘수가 당시에 쓴 시를 같이 전시했다. 그리고 한 예술가가 소녀 에리카를 사진 예술로 승화시킨 적이 있었다. 이 사진에 나타나는 낫과 망치의 유무는 현재 민주화 된 헝가리의 상황과 대조되는 세월이 느껴지고 있다. 민주화 시위 60주년을 맞은 2016년, 헝가리 현지 보드게임 회사가 당시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보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은 <분노의 날들 : 부다페스트 1956(Days of ire : budapest 1956)>으로 당시 민주화 시위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 장소들을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 당시 불렀던 'Avanti ragazzi di Buda (일어나라 부다)'라는 노래는 현재 이탈리아 세리에A 소속의 축구클럽인 SS 라치오가 응원가로 사용하고 있다. K리그에서도 FC 서울과 포항 스틸러스가 원곡에서 음을 살짝 바꿔 만들어 쓰고 있다. 헝가리 민주화 시위의 의의를 보자면 좌우 세력 모두에게 상당한 왜곡을 받았던 사건이기도 했다. 우익 측에서는 사건을 반공 의거 정도로 취급하며 시위대에서 노동 계급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반대로 스탈린주의 좌익진영에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물든 반(反) 혁명 운동으로 매도하고 있는 입장이다.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 의거한 반(反) 스탈린 봉기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당시 시위대는 스탈린의 동상을 파괴하고 침을 뱉기도 했지만, 레닌주의 저작들도 모아서 불태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단순히 반(反) 스탈린 봉기로만 보기는 어렵다. 이를 주시하고 있었던 서방 좌파 사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신의 패권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불법 침공으로 유혈 진압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존재했다. 당시 많은 좌익들이 공산주의에 실망하여 우익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중에 영국 공산당원(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들은 탱크를 보내 진압하라며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했고 이 때 이들을 비하하는 탱키(Tankie)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오늘날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극렬 좌익들을 비판하는 용어로 남아 사용되고 있다. 헝가리 시민들을 탱크로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찬성을 표했던 영국 공산당은 이와 같은 행위들로 인해 영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이미지가 폭락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때는 이를 비난하는 등 어느 정도 교훈을 얻었으나 이와 같은 소련의 행위를 적극 찬성하고 주도했던 스탈린주의자 극렬 좌파들은 프라하의 봄 당시의 소련의 강제 진압 행위까지도 옳다고 주장하는 등 끝까지 소련의 강경노선에 대해 찬성하며 빈축을 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유럽에서는 유럽 공산주의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한편 민주화 운동 후반기에 시위대가 망명을 목적으로 T-54A를 끌고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왔는데, 이 사건으로인해 T-54A를 입수한 영국군 관계자들은 이 전차가 당대의 서방의 전차보다 우월한 파괴력을 지닌 것에 충격을 받았고, 기능의 열세를 타개하기 위해 로열 오드넌스 L7 105mm 전차용 강선포가 개발되었다. 당시 영국군의 최신 주력전차였던 센추리온 전차 Mk. 5가 각각 전면 상부 장갑이 120mm으로 강화된 Mk. 5/1, 주포가 20파운더에서 L7A1으로 변경된 Mk. 5/2로 개량되었고 두 개량점이 합쳐진 Mk. 6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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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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