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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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에서 냐싱베로 개명한 이후, 그는 국민들에게 아프리카식으로 이름을 개명할 것을 권유했으며 냐싱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고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식당에서 냐싱베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을 정도로 냐싱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냐싱베는 1974년 1월 24일에 발생한 비행기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고 2주 전, 중요한 인산염 광산 회사를 국유화 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광석을 착취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프랑스 정부가 꾸민 음모이자 그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고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추락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측근들이 사고를 조사하여 사고의 원인이 기체 결함이라 발표하자 냐싱베는 기체 결함이 분명히 프랑스 정보부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사보타주일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반발했다. 물론 정황이야 그렇다쳐도 프랑스 정보부가 기체 결함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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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냐싱베 에야데마 토고 대통령이 1월 13일 토고 로메에서 집권 38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출처 : Associated Press / The Spokesman-Review

 

이 사고 이후 토고 대통령의 전용기는 걸프스트림 II로 교체되었으나, 이 기체도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2월 26일에 충돌 사고가 발생해 승무원 3명이 사망했다. 참고로 사고 기종에 탑승한 승객 3명은 전원 생존했으며, 이들 중 냐싱베는 이 전용기에 타고 있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에 프랑스 언론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1월 24일 사고로 생존한 사람은 냐싱베 1명만이 아니었는데, 냐싱베의 친구이자 사고기의 동승자였던 프랑수아 루(François Roux) 목사는 2013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냐싱베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사고기 탑승자 수까지 6명에서 5명으로 축소해가며 사고 정보를 일부러 잘못 전달한 측면이 강하다. 한편 사고 이전 국유화 한 인산염 광산 회사는 수익성이 좋아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어 국가 개발을 위한 세입을 증가시켰고, 주변국과 비교하면 정치 상황도 그나마 안정적이었기때문에 1970년대에 토고는 1960년에 73달러였던 GDP가 1970년에 116달러로 급속히 상승하면서 언젠가는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냐싱베 정부의 잘못된 관리와 막대한 부정부패로 인해 토고의 경제 사정은 더욱 피폐해지게 된다. 


이는 1980년에 1인당 GDP 400달러로 정점을 맞이했지만 1984년에 토고의 1인당 GDP는 4년 만에 222달러로 급속히 추락했고, 이후에도 토고의 경제는 성장과 폭락을 거듭하며 그가 사망한 2005년 시점에는 1인당 GDP가 399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화폐 가치 변동을 고려하면 실질 경제 수준은 오히려 독립했을 당시에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 셈이다. 그리거 1980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개를 죽이려는 사람은 먼저 개가 분노했다고 비난한다며 토고는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으며 토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고 정부를 부러워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피오의 자식들이라며 비난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미 토고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냐싱베는 토고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던 소작농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즉, 대다수의 국민들의 당시 토고의 문맹률이 87%에 달하는 상황이었기에 정부가 하는 일에 대다수가 관심이 없었던데다 그나마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나머지 엘리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냐싱베 정권에 저항할 토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냐싱베의 주장에 의하면 외부에서 보는 것 같이 억압적인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면 왜 냐싱베의 지지를 반대하는 자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가지 않고 용병들에게러 가는지 되물으며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아니라고 전면 부인한 바가 있었다. 실제로 냐싱베는 1977년에 토고의 망명자들이 용병을 동원하여 자신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을 영국 MI6로부터 정보를 접수한 미국 대사로부터 전해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 말미에 저와 같은 인터뷰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와 같은 정부 전복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독재는 그에 대한 전격적인 우상화로 이어졌다. 냐싱베는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우상화 했는데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는 북한의 김일성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의 우상화를 모델로 하여 자신을 신(神)으로 만들었다. 냐싱베도 이러한 모부투 세코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대부분의 상점에 자신의 초상화를 장식하게 하고는 15초마다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빛나는 손목시계를 만들어 판매한 부분이다. 


또한 토고의 라디오 방송국은 냐싱베가 토고를 통치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식의 노래를 방송 시작과 후마다 송출해야 했고, 그가 순행할 때에는 무려 1,000여 명의 무희들이 그를 수행하며 노래와 춤을 제공하고 수도 로메에는 냐싱배의 거대 동상까지 세워졌다. 여기에 매일 수도 로메의 시민들은 하루에 냐싱베가 대통령궁과 관저를 4차례 왕래하는 동안, 길 위에서 박수를 쳐서 그를 환영해야 했고, 박수를 치지 않거나 박수를 빨리 멈추게 되면 경찰에 체포되거나 심할 경우, 고문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냐싱베는 여러 차례 자신을 향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아 '불멸의 인간' 이미지를 만들어 선동하는데 적극 활용했으며 자신의 경호원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자신을 수술한 외과의사가 제거한 총알을 부적으로 가지고 다니기까지 했다. 냐싱베가 암살 시도에서 살아 남은 날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향연'이라 묘사되어 그 날은 토고의 국경일이 되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전횡에 참을 수 없었던 프랑스 유학생과 엘리트 지식인들, 깨어 있는 로메 시민들을 중심으로 1990년 10월부터 시민혁명이 시작된다.


1990년 10월 10일,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토고 역사상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열리게 된다. 이 때 냐싱베는 시위의 조건을 받아들여 정치적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한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만드는 것에 승인했고, 그에 따라 1990년 12월 13일에는 토고 내 최초의 야당인 토고민주동맹(ADT)이 창립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토고에는 야당이 존재하긴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토고 운동(MTD)과 아프리카 민족 민주 협약(CDPA)이 있었지만 사실 있으나 마나한 야당이나 다름 없었다. 냐싱베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통합 야당에 대한 승인에 사인하지 않았으며 1991년 1월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사면하는 꼼수까지 부리면서 야당 승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3월 1일~4월 30일 동안 시민들은 냐싱베의 꼼수를 파악하고 로메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파업과 폭력 시위가 지속적 발생하게 된다. 이에 냐싱베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 투척, 실탄 발포 등을 통해 여러 명을 살해하면서 혁명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프랑스와 집단 서방은 냐싱베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4월 10일에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냐싱베는 다당제를 승인하게 된다. 


같은 해, 5월에 시민들은 냐싱베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냐싱베는 1967년부터 역임한 국방부 장관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냐싱베는 같은 해, 6월 12일에 국민회의 개최를 인정했으며 7월 8일에 시작된 국민회의는 1991년 8월 27일에 조셉 코쿠 코피고(Joseph Kokou Koffigoh, 1948~ ?)를 총리로 추대하고 냐싱베는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격하되었다. 당시 냐싱베는 코피고를 총리로 추대할 때 국민회의를 군대로 포위하여 즉각 반발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코피고의 총리 추대를 인정했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얼마 안 가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코피고가 야권의 단결 대신 공기업 사장직에 자신의 지지자 외의 친구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계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같은 해, 11월 26일에 코피고가 이끄는 과도 정부인 공화국 고등평의회(HCR)가 토고인민연합당(RPT)의 존속을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이틀 뒤에 코피고의 퇴진과 냐싱베가 임명하는 새 총리 임명, HCR 해산과 모든 결정 무효화, RPT 합법화를 요구했다. 


냐싱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군부는 코피고에게 도시를 초토화 시키겠다고 위협했고, 군부 쿠데타를 우려하여 이에 굴복한 코피고는 나싱베의 지지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냐싱베는 자신의 군대 및 군부보다 많은 로메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프랑스는 하루 뒤인 11월 29일에 토고에 거주하던 3,000명의 프랑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300명의 프랑스 군을 이웃 국가인 베냉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2월 3일, 군 부에서 먼저 움직여 의회 관저를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로 포위한 후 최소 17명, 최대 200명을 살해했다. 이러한 살육과정에서 대통령 경호 사령관이자 냐싱베의 이복 형이 절명했다. 이 군부 쿠데타의 배후는 냐싱베가 있었고, 냐싱베는 이를 통해 코피고의 이전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12월 31일에 개각을 발표하며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토고의 민주화는 짧게 막을 내렸다.


- 내일 下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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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서아프리카 토고의 총선과 냐싱베 가문의 이야기, 냐싱베 에야데마(Gnassingbé Eyadéma, 1967~2005)의 독재화, 토고의 민주화 실패 (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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