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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우크라이나 지역당(Партія регіонів), 사진출처 : prm.ua

 지난 2022년 1월경부터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임박 가능성을 제기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런 위기감 조장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고 위화감 조성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서방 지도자들이 당장 전쟁이 발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라며 “현재 우크라이나가 마주한 가장 큰 위협은 불안정한 국내 상황”이라고 했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다른 독립 국가와 달리 더 불안정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로 인한 체제 변화는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최악의 경제 위기를 내재하고 있었다. 


구소련 시절부터 전체적으로 경제가 나빠져 산업구조가 중화학 공업 정책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떨어졌다. 

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 내에는 소련의 경제 계획 추진의 실패로 인한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체르노빌 사태가 터진 것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경제적 자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 이렇다 할 공업 자원이 부족한 우크라이나는 흑토(黑土)라고 불리는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자국의 경제를 농업 위주로 끌고 왔다. 그러다 보니 소련에서 독립한 후에도 구소련의 잔재로 남은 몇 안 되는 중화학 공업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을 힘겹게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 낙후된 경제만큼이나 심각했던 부분도 바로 사회적 갈등(Соціальний Конфлікт)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다른 국가들보다 사회적 갈등이 매우 심한 나라에 속한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주민의 이렇다 할 찬반투표도 없이 갑자기 진행되어 영내의 갈등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친러 세력이 많은데다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와 가족 같은 관계를 맺어왔다. 러시아 영내에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이 30%가량 되고 우크라이나인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도 즐비하다. 우크라이나 영내에서도 약 20% 정도로 러시아인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이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노선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개중에는 서로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여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영내의 친러 네트워크는 우크라이나 각지에 퍼져 있는 친러 세력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그러한 구심점의 정점은 우크라이나 의회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최고 라다(Верховна Рада)이다. 최고 라다(Верховна Рада)는 우크라이나의 단원제 의회를 말하며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 450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소선거구제로 선출된 225명,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225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5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현재는 강력한 친러 네트워크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친러 성향의 최다 득표 야당인 인생을 위한 야권 연단(Опозиційна платформа — За життя)이 보수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이전에 친러 성향의 강력한 보수 정당은 우크라이나 지역당(Партія регіонів)이다. 


본래 이 정당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Леонід Кравчук) 대통령을 비판하고 다음 대선 주자인 레오니드 쿠치마(Леонід Кучма)를 전격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러면서 쿠치마를 친러, 우크라이나 보수 정권의 상징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래서 초창기 친러 네트워크들은 1997년 10월 26일에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을 광적으로 지지하는 정치 조직의 목적으로 당이 설립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1세대 친러 네트워크로 2002년 총선거에서 같은 친러 네트워크이자 그 성향이 과격한 정치 연합인 통일 우크라이나당을 합병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과격 친러 세력답게 지역당의 당원은 옛 소련의 관료, 국가 공무원, 러시아계가 상당수 분포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출신의 기업인들, 지방자치체 행정관 자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을 그들의 지지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친(親) 러시아적인 외교 정책과 정치, 경제적인 밀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쿠치마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쿠치마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친러 세력의 지지 기반을 통해 경제 개혁에 나서게 된다. 쿠치마는 자국 우크라이나 흐리브나 통화의 안정을 위하여 통화 발행을 억제해 물가상승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하지만 여전히 지하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던데다 산업 기반이 허약하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미국이나 서방의 원조도 심각한 부정부패로 인해 경제 성장률을 받쳐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쿠치마의 경제운용 능력에 대한 의문점이 재기 되며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선 투표에 올라온 자가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공산당 후보였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염증을 느낀 서부 지역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서부 테르노필 지역에 기반을 잡고 서부 지역 주민들의 인기가 최고조인 빅토르 유셴코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서부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샀다. 



물론 기존 친러 정책 수행과 친러 세력들을 친 서방에 가까운 서부 우크라이나 출신 정치인과 융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동, 서부는 서로를 극렬히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보았기에 심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쿠치마의 노력은 성과를 보이며 이때부터 우크라이나 경제가 성장세로 돌아섰다.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완전 정상화에 성공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7%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적을 잔인하게 탄압했고 반정부 성향의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Українська правда)'의 공동 창립자인 ‘기오르기 곤가제’가 2000년 11월 3일 키예프 근교의 한 숲에서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쿠치마의 정적 탄압에 대한 잔인성이 드러났고 10억 달러가량의 거액을 러시아로 빼돌린 최악의 대통령 비리 사건이 폭로됐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러 정서가 강화되며 쿠치마 지지율은 다시 급락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지역당이 총선과 대선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쿠치마 정권은 종결되고 쿠치마가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지역당 소속 인재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전면 부각하기 시작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기반을 둔 빅토르 유센코는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하던 시절, 우크라이나 화폐인 흐리브나를 창설하는데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이는 기존에 사용한 카르보바네츠의 초인플레션을 극복하고 새로운 화폐를 창설하면서 경제 관료로 주목받았다. 


그가 총리로 집권하던 시절 우크라이나의 경제 성장률이 본격적인 플러스 형태로 돌아서기 시작하여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셴코는 그의 개혁적인 경제정책으로 인해 당시 우크라이나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던 우크라이나 공산당이나 올리가르히 세력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적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친러 세력의 집중 견제까지 받게 된 유센코는 2004년 유세 중에 "다이옥신 수프" 사건으로 암살의 위기까지 맞게 된다. 그렇게 선거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됐다. 그러나 유셴코 진영은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키예프에서만 50만의 시민들이 마이단 광장에 모여 정부가 재선거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했다. 


이것이 바로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이른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그러나 유센코가 집권했어도 전체적인 사회 기반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친러 세력을 평화적으로 끌어안기 위해 자신의 정적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후 2010년 2월 8일에 실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당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친서방주의 율리야 티모셴코와는 거의 경쟁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하면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키예프 시장을 포함한 많은 당원과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며 우크라이나 동부 출신 역시 지역당에서 탈당하게 되었다. 


야누코비치의 실각 이후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조기 총선에서는 참여를 거부하여 원외 정당이 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많은 지역당 출신들이 인생을 위한 야권 연단(Опозиційна платформа — За життя)에 모여들면서 가장 강력한 야당이자 친러 정당이 되었고 이들은 2세대 친러 네트워크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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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내 친러 네트워크의 역사, 1세대 친러 네트워크는 우크라이나 지역당(Партія регіоні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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