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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라트비아 리가의 독립 요구 횃불 행렬, 사진출처 : Wikipedia, Independence Day (Latvia)

 

1986년 소련 정부는 발트 3국 경제를 개발하는 차원으로 라트비아의 가장 큰 강인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고 리가에 지하철을 놓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이는 파격적인 계획이었는데 때에 따라 환경적인 재앙을 부를 수도 있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지형적으로는 발트 해 연안은 저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해류의 흐름에 따라 홍수도 간혹 발생하던 곳이었다.

 

 다우가바 강 일대는 비옥한 토양이 이루어져 발트 3국 중 가장 곡물생산량이 높은 나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소련이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는 것은 농업적인 부분이 아닌 발트 해 일대와 더불어 최대의 공업지대를 만들겠다는 고르바초프 개혁의 일환이었다. 

 

당시 소련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관심이 덜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같은 대규모 고속도로 체계나 항공 물류 체계를 적극적으로 갖추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소련은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 등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도 매우 인색했다. 

 

따라서 인프라가 개설되는 속도가 매우 지지부진하였고,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단위의 도로망 구축 및 관리가 상당히 부실했다. 그 결과 인해 소련 내 물류 운송은 극도로 비효율적이 되었으며 이는 물자 공급의 지연으로 이어져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이 후일 컴퓨터와 로봇으로 이어질 자동화 기계와 정보 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 산업 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인해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까지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소련 내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취약한 소비재 산업이 국민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 일명 '제2의 경제'가 점점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농업에서는 소련 전체 경작지의 3%에 불과한 개인 소유의 농장에서 생산해 거래되는 작물들이 소련 농업 전체 생산량의 25%를 차지하였으며 육류는 40%를 차지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소련 내에서 약 1,5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암시장에 참여할 정도였다. 사실상 이미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맞이한 침체기를 직시하고 있었다. 

 

1979년부터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군비에 쓰이는 예산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고 추가적인 경제개혁은 성과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지면서 소련이 갖고 있는 기술의 부재 및 부작용에 대해 발트 3국의 국가들은 소련의 건설 사업을 비롯한 여러 기술 사업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고 리가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은 제2의 체르노빌과 같은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사고는 그만큼 같은 연방 내의 공화국에서도 소련의 기술에 강한 불신감을 가질 정도로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더불어 1973년에 폴란드 정부의 주도 하에 발트 해 국가들이 “그단스크 협약”이라고 불리는 “발트 해 생물자원의 보호와 어업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Fishing and Conservation of the Living Resources in the Baltic Sea and the Belts)”에 합의한 바 있었다. 

 

1974년에는 수산 자원뿐만 아니라 발트 해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을 포함한 포괄적 성격의 “헬싱키 협약”이라고 불리는 “발트 해 해양 환경 보호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Marine Environment of the Baltic Sea Area)”이 체결되면서 이 체결 조인식에 발트 3국의 인사들이 소련 대표로 참여한 바 있다. 


그래서 현지 라트비아인들은 라트비아의 인문 유산과 자연 유산을 파괴하는 계획을 소련이 세우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우선 1986년 7월, 라트비아 발트 해의 작은 항구 도시인 리예파야(Liepaja)에서 노동자 3명이 1974에 지정된 헬싱키 협약과 1975년의 헬싱키 협정을 지지하며 ‘헬싱키-86’(Helsinki-86)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소련에 반대하는 최초의 반공 조직으로 기록되었다. 1974년 헬싱키 협약에 이어 1975년의 헬싱키 협정은 미국, 소련 등 35개 국이 참여해 동서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조약으로, 인권과 기본권 보장, 민족자결권 존중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절에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을 한 이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었다. 

 

‘헬싱키-86’의 구성원은 고작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조직에 라트비아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이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은 군티스 울마네스(Guntis Ulmanis)였다. 군티스 울마네스(Guntis Ulmanis)를 1993년 라트비아 의회에서는 제5대 대통령으로 그를 선출하게 된다. 


1986년 12월 26일 라트비아 청년 300명이 수도 리가의 성당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레닌 거리를 지나 소련 점령 시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자유 기념비에 헌화한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가라. 라트비아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했다.

 

 1987년 6월에는 ‘헬싱키-86’이 이끄는 시위에 5,000명의 군중이 참가해 라트비아 민족 가요를 부르며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을 성토하게 된다.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초반에는 이 시위를 저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점점 더 불어나게 되면서 1987년 11월 소련의 지시를 받은 라트비아 지방 당국은 시위대를 적극 저지하게 된다.

 

라트비아 현지 언론들은 이와 같은 시위대 탄압 소식을 널리 보도하여 리가가 아닌 일개 소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같은 라트비아 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고 1987년 2월 28일 환경 보호회가 전후 라트비아 최초의 시민단체로 결성되어 이를 주도해 나가게 된다. 결국 소련은 건설 자금 부족까지 겹치게 되어 리가 지하철 계획과 댐 건설을 취소했다.


소련에 승리를 거두어 자신감이 생긴 라트비아에서는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 라트비아 독립운동 등 라트비아인 민족주의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거부와 독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1988년 여름에는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이 주도하여 '라트비아 의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며 거의 매일 시위를 벌였다. 마침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체제로 인해 발트 3국 각지에서는 현지 민족주의자들이 현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소비에트 최고회의에 진출했고, 소비에트 최고회의와는 별도로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의회를 결성하면서 저항해 나갔다. 

 

그리고 1988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00여 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리가-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으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 이는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열린 시위였다. 

 

마침내 1990년 5월 4일에 라트비아가 리투아니아에 이어 독립을 선포하면서 공식적으로 라트비아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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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독립, 인문 유산과 자연 유산 보호 시위가 기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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