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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와 중국, 표리부동의 상호관계 속에 실익 추구
    러시아와 중국은 과연 상호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는 겉보기와 달리 현안별로, 상황에 따라 의외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게 된 것은 헤이룽(러시아명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타라바로프(중국명 인룽) 섬, 볼쇼이우수리스키(중국명 헤이샤즈) 섬, 밍위에 섬이라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푸위안 삼각주(혹은 이 삼각주 전체를 헤이샤즈 삼각주라고 부른다)를 둘러싼 국경분쟁이 서로 타결된 이후일 것이다.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일어난 양쪽 국경분쟁은 2005년 6월 2일에 비로소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때 타결된 내용은 타라바로프 섬을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하고, 볼쇼이우수리스키 삼각주를 동·서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에 반환된 삼각주의 면적은 총 약 327제곱 킬로미터 중 약 174제곱 킬로미터로 사실상 중국영토의 가장 동쪽 끝이 되는 셈이다. 이에 러시아와 중국은 약 4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을 육상 국경선과 해상 경계선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3개의 섬이라고 하지만, 작은 섬들도 그 삼각주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어서 엄밀하게 국경선을 획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 타결로 인해 영토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은 영토분쟁에 관한 한 서로 별다른 문제가 없고, 현재 이 지역은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은 영토 문제에 매우 민감한데,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할당받는 영토를 일부 돌려줌으로써, 이를 통해 대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경제적-외교적 관계에서 거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중국은 정치적 관계에 의한 국익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든 러시아든 전부 반환이냐 전부 보전이냐의 문제로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협상은 결코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협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 각각의 내부 사정과 국제질서의 급변이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두 국가는 미국에 맞서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계산법은 현안별로 다르다. 미국에 맞선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보를 보인다. 서로 정상회담도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문화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협력 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CSO)와 구소련연방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지속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러시아는 최근 이른바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서쪽 세네갈에서부터 동쪽의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육상 실크로드인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식 자유 경제 지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침체와 미국의 대중국 제재 그리고 일대일로에 일부 참여국들이 빚더미로 몰리는 상황은 우려를 낳는다. 더욱이 중국은 최근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공사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의 터무니 없는 후려치기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중국에 관해 유럽보다 할인가격으로 천연가스를 팔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가격 차별화를 통해 자원을 한편으로 무기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미래 성장시장으로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의 원래 계획은 천연가스의 유럽 시장이 축소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시장을 돌려서 안정된 수출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려고 했고, 이른바 ‘시베리아의 힘-2’는 몽골을 걸쳐 중국의 동북아 지역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힘-1’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터무니없는 가격 인하 요구로 진전이 없고, 몽골에서도 별로 진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은 중국이 향후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게 되면, 천연가스의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굳이 현재 시점에서 천연가스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러시아가 공급하겠다면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라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로는 그런 가격이면 그동안에 싼 가격으로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해 왔는데, 천연가스의 가격을 훨씬 더 낮추라고 하니, 그러면 러시아도 안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소극적 태도가 불만이었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아무리 관계가 친밀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같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도 한쪽은 영향력 유지를, 다른 한쪽은 영향력 확대를 희망한다. 또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참여들 독려하면서 국가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때 중국은 경제적 투자를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이른바 과거 서방의 식민지, 특히 옛 프랑스 식민국가를 중심으로 바그너그룹을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적-경제적 측면이 강한데, 과거에 서방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던 아프리카는 이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는 서구 식민지에 해방되었고, 서방의 지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정정(政情) 불안과 정변, 종족 분쟁과 영토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국민은 그동안 서구화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잦은 분쟁과 전쟁의 씨앗으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틈을 군벌들이 활개를 치고 들어가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는 반서방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방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핵심은 경제적 지원이고, 각종 치안 불안과 정권 안정을 위해 이제는 서방보다 오히려 러시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근 행보를 보면 중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북한과 베트남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다소 소원하고, 베트남과는 이른바 사사(파라셀)군도와 난사(스프레틀리)군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는 이 두 국가에 관해 후원국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는 외교술로 유연하면서도 균형 외교를 중시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많이 챙겼다.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마도 유라시아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을 하나로 묶으면서 미국- 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러시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베트남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러시아가 개입을 내심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영향력을 희석화시키는데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구도는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행보로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中편
    오스만투르크는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이에 대응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면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의 회담이 에르주룸에서 열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측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력으로 독립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행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니냐는 오스만 제국의 합리적 의심으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할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실망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청년 투르크당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은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거의 없었기에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청년 투르크당은 결국 반기를 들었는데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현지의 무슬림들은 청년 투르크당 지지 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둘하미트 2세에 대한 청년 투르크당의 반기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탄지마트 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5,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이후에 발생한 정책이었다. 터키에서는 이 "아다나 시위 진압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아다나의 소요 사태는 시리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가 획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다나는 시리아와 가까운 지역이고 프랑스령 가지안테프와 인척 지역이었으며 이 시위에 시리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상당한 양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프랑스 측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보복을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외세의 탓을 하면서 터키를 비판했다. 그러나 터키를 비판했을 뿐이지 이 사건에 아르메니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을 이용해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해 역사에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이 전후 1920년 세르브 조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근거로 작용하곤 한다. 프랑스는 오스만 정부를 인종주의적 성향의 학살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계가 시위를 벌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터키의 편을 드는 행위를 처벌하라는 주장이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15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온 터키에 대한 규탄, 프랑스와 연관된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라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반(Van)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반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하필이면 해당 지역이 프랑스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보다 카프카스를 넘어 남하를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더 큰 적이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충분하지 못해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점점 청년 투르크당이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오스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와 인도주의 같은 사상을 갖춘 세력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서구 열강의 오스만 제국을 침탈하는 과정들을 보고 겪으며 서구의 제국주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투르크당에 속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재상인 탈라트 파샤(Talat Pasya)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Zemal Pasya),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Teshukilet Mahsusa)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Behaedin Shakir) 등은 무슬림이지만 세속주의자였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은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청년 투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지배의 대상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로 보있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에 붙어 투르크 민족의 안보를 해치려고 하는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몰리고 있는 오스만의 입장이라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의 영토 안에서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탈라트 파샤와 제말 파샤의 회고록과 이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적행위와 행동을 보고 한 발언들과 행동, 이러한 형세를 보고 전술했던 유럽의 저널리스트들도 이를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기술했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공격하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에는 약탈과 방화, 학살은 꾸준히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오스만 정부에서는 이들을 테러 분자로 규정하고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면서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현재 4월 24일을 대학살 추모일로 정하고 지금도 추모하고 있다. 장군인 엔베르 파샤의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리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돌아선다. 오스만 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이 나오긴 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이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제브뎃 베이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문서가 있기에 이를 근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5월 30일에는 탈라트 파샤가 러시아와 내통하는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이주에 따른 기아와 질병,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막의 혹독한 기후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조직적인 학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탈라트 파샤의 이주 명령서를 학살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주 명령서에는 학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터키 측은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 양식과 전혀 다른 서류이고 이는 조작되었다고 맞서고 있는 상태다. 더불어 이를 아르메니아와 함께 규탄하고 있는 집단 서방은 발칸반도 터키인 및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을 감으며 철저히 이중잣대로 나서고 있다. 이는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터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 때처럼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는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표방하여 나서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로,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측면이다.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터키는 70만 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자료들에 따르면 희생자는 60만~15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라나 학살자 숫자는 조직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느냐 혹은 불가항력이었는지는 지금도 큰 논란이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 인구는 오스만 제국의 통계에 의하면 129만 5,000명이었다.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150만 명으로 집계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통계대로라면 그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에 대한 근거는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 시민들의 상당수가 학살, 기아,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 명에 이른다는 점에 있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는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서구의 자료들인 105만~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 지금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에 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재기해 터키 정부를 악인으로 만들어 "투르크포비아"에 일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핵심적인 부분은 '전쟁 중 일어났던 우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비극이었는지, 혹은 계획된 조직적인 인종청소였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문제와도 닮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기된 소련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이다. 스탈린의 정책으로 인한 운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인지, 계획적인 스탈린의 학살인지, 이 부분에 대한 것도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으로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나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마주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진 연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사이비 어용학자들에 의해 근거없이 해석되고 악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터키-아르메니아,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양측의 민족적 앙금과 역사적 적개심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5
  • 오늘은 6.25, 한국전쟁 74주년을 기념하여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下편은 내일로 미루고 중요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여태까지 누누히 주장해왔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게 되면 러시아는 북한을 지렛대 삼아 우리를 압박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보낸다면 러시아 또한 북한에 살상무기를 보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여러 고민을 해봐야 한다. 지금은 74년전의 6.25 전쟁 때와 입장이 다르다. 군의 전술과 전략, 국가 간의 정책 및 국제 정세는 시기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동맹국들과 미국 또한 기조 전략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오바마 시기부터 주한미군을 축소해오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국제 정세와 정책, 대 동북아 전략이 바뀌고 있음 의미한다. 주한미군을 뺀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를 빠르게 감지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어야 한다. 한국은 늘 안전불감증과 오랜 평화에 맛들여 전혀 긴장하지 않고 대책 또한 세우지 않고 있는데 지금부터 착실히 대책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안보는 앞으로 보장할 수가 없다. 미국은 대 동북아 전략을 상황에 따라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이 영원히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게 아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고 사실상 전시나 다름없다. 휴전 협정을 조인한 지 71년째인 현재이고 그동안에 우리는 거의 긴장을 놓다시피 살고 있지만 사실 세계사에서 가장 기록적인 휴전 기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74년 전, 6.25 때와 지금이 국제 정세적으로 같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 대다수 사람들의 특징은 세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일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처럼 무장이 허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중동 국가들도 과거 6~70년대처럼 무장이 허접해 이스라엘이 상대해도 모두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변했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식이라 착각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은 여전히 선진국이고 미국은 세계 최강이며, 러시아와 중국은 가난하고 여전히 후진국이며 공산국가에 소달구지 끌고 다니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과 안전불감, 그리고 변하지 않은 인식이 상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은 매우 위 험한 적신호라 볼 수 있다. 74년 전 그 때는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5년 밖에 안됐던 때였다. 그때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 줄 여력이 있었고 냉전 사상 첫 지상전이 6.25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74년 전과 지금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냉전 시대는 끝났고 미군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고 한 때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지만 결국 패퇴하여 도망나왔다. 이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전략적 철수라고 하는데 전략적 철수가 아니라 패배해서 도망나온 것이다. 미군의 첨단무기를 카불 공항에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을 보면 그만큼 미군이 급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그 후로 미국이 지원하여 대리전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상대들이 녹록치 않아 고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그러하고 이스라엘도 가자를 쉽게 점령하고 하마스를 전멸시킬 줄 알았지만 개전한지 9개월이 넘어가는데 꽤 고전하고 있다. 게다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상대로 쉽지 않다는 보도들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온다. 이어 한 줌도 안 되는 예멘 후티군마저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게 지금까지 냉철하게 판단한 미국의 현 주소다. 더불어 미국은 장기적인 지상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고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대만을 지원하고 있는 판국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미국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한미군도 이전에 비해 계속되는 축소로 인해 몇 없으며 이들조차도 침공해오는 적을 6.25 때처럼 목숨 걸고 상대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들은 여의치 않으면 부산에서 사이공의 프리퀀드 윈드 작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처럼, 그리고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세력에 밀릴 때처럼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럴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지만 그들과 우리가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가? 남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장개석의 국민당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우리는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과 다르게 미국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인가? 우리는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채로 미국에 의지하면 결국 미국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들을 상기하여 앞으로 미국을 대비해 러시아를 보험용으로 생각해 잘 지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다. 러시아는 중국, 북한을 설득하거나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믿음보다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외교적으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묘안을 내놓아야 할 때다. 러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안보의 보험용으로 들여놨듯이 우리도 우리 안보를 보험용으로 러시아를 설정해놓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며 일본,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6:4 정도로만 맞춰 놓는게 현 시점에 있어 최상의 전략이다. 우리는 다른 때보다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말 그대로 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이전과 같이 안전불감에 이전과 같겠지라는 방심을 하고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 때 되면 후회해봤자 늦는다. 아직까지는 골든타임이 남아 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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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오늘이 빅토르 최 탄생 62주년 되는 날, 그를 기억해 본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따지고 보면 비록 모계지만 빅토르 최도 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짜이꼽스끼와 똘스또이를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있는 현재 우크라이나가 설마 빅토르 최에 대한 노래나 흔적 등을 지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뻬레스뜨로이까 시절에 청년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구소련 국가에서 그만한 인기를 가진 스타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최고의 락 가수이자 그룹 키노(Кино)는 최고의 락 그룹이다. 당시 소련 정부가 락 음악을 허가함으로 인해 신문들은 락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인 키노(Кино)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의 그룹 키노(Кино)는 그 노래가 지금 러시아, 러시아 뿐만아니라 소련에 속해 있었다가 독립한 구소련 국가 가요계에서도 끝없이 리메이크 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산주의 보수적 관료주의 물들어 있는 기성 세대와 다른 공산주의의 시대적인 일탈을 꿈꿔온 자유를 갈망한 젊은이들의 언어로 쓰여진 키노의 노래는 젊은이들이 쉽게 공감하는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락 음악에서 키노의 라이벌이자 또 다른 그룹인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는 키노와 빅토르 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거야’ 라고했다.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빅토르 최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고 있는 감정에 대한 것이 많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Перемен)!’도 그가 직접 작사한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합리화했다. ‘변화(Перемен)!’가 수록된 엘범이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다음 해 개봉한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의 전설적인 영화 <아싸(Асса)>로 인해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Перемен)는 ‘뻬레스뜨로이까를 상징하는 노래’로 각인되었다. 이 노래의 배경은 당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을 때인데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 자체가 별로 힘들지 않았으며, 교대 사이에 휴식 시간이 많은 교대 근무제로 조직되었다. 특히 집회, 행진, 기타 공적인 행사들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당시 소비에트 시스템에 의하면 중앙화된 난방 시스템에서 한 지역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보일러실은 구역의 온수 파이프를 관리하는 제어장치와 밸브들이 있는 방이었고 기술자들이 하는 일은 파이프의 압력을 확인하고 온수와 냉수를 켜고 끄며, 어쩌다 문제가 생기면 수리공을 부르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보일러실 기술자들은 근무시간 내내 보일러실에 있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4일에 한 번씩 24시간 교대제로 일했다. 비록 한 달에 60~70루블로 공공기관 임금 중 가장 낮았지만 이 직업은 엄청나게 많은 자유시간을 제공했다. 당시 많은 아마추어 락커들이 이런 직업을 가졌고, 그들은 은어로 "보일러실 락커"라고 불렀다. 음악가로서의 전문적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없었던 그들은 얼마간의 돈을 벌면서 소비에트 의무고용법도 만족시키고 더불어 음악에 쓸 최대한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다. 현재 보일러실은 러시아 락 음악의 성전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음악들이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 인근 유르말라 슬로카-탈시(Jurmala Sloka-Talsi) 도로 35km 지점에서 오전 11시 28분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건질 수 있었던 온전한 물건은 그의 유작으로 알려지게 된 앨범인 Кукушка (뻐꾸기)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은 KGB가 의도적으로 빅토르 최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빅토르 최가 당시 소련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버스가 고의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스러운 것이 많긴 하다. 그가 졸거나 교통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버스가 오히려 돌진했다는 것이고 버스 기사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재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는 것, 시체가 부검 없이 서둘러 관에 담아 매장했다는 것 등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현재도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참 묘한 죽음이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노래가 얼마나 되는지, 뻐꾸기야 말해봐, 노래해봐 (Песен ещё не написанных сколько? Скажи кукушка, пропой)로 시작되는 가사인 빅토르 최의 유작 Кукушка (뻐꾸기).. 원래 슬라브족 전설에 의하면 뻐꾸기에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면 뻐꾸기는 남은 햇수만큼 울어서 알려준다고 한다. 이 뻐꾸기를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녹음했을 때 초이의 남은 생애의 날짜를 몇 번이나 예측하고 울었을까?.. 나도 엠게우 학위 과정 때 젤 좋아했던 노래가 Группа Крови (그루빠 끄로비, 혈액형)이었다. Кино (키노, 빅토르 최가 소속된 그룹)에 환장했던 나는 지금도 다운받아 듣고 다닌다. 그가 탄생한지 오늘이 62년째 되는 날, 빅토르 최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의 전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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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3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베트남에서 회담을 주목하며
    북한을 떠나 20일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은 곧바로 일정을 가졌다. 야쿠츠크-평양-하노이로 이어지는 일정은 다른 국가 정상이었다면 피곤할 수도 있는 일정이다. 미국 바이든 같으면 그런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각에서 푸틴이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이 제기되었지만 그런 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고도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 등은 전 세계 뉴스 찌라시들의 헛소리이자 희망 사항으로 밝혀졌다. 이번 베트남 방문 또한 북한 방문에 이어 또 다른 의미의 방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1. 지정학적 외교적인 부분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현재까지 좋은 관계다. 그러나 상호 간에 그리 미덥지 못한 관계인 것은 맞다. 최근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이 지연되고 있다. 러시아는 2022년 손상된 노르드스트림1 송유관과 거의 같은 양인 연간 500억 입방미터(bcm)의 가스를 러시아 북부에서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운반할 새로운 가스관을 건설하기 위해 협의해 왔다. 그런데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주요 세부 사항에 대해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시베리아의-2 전력을 운영하게 될 가즈프롬은 2030년까지 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을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대한 합의는 아주 요원한 상태다. 중국과 러시아 측은 여전히 계산과 추정을 하고 있고 경제적 이익에 대해 합의가 신통치 않다. 후문에는 중국이 가스값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이 후려친 가격으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겉으로 큰 부분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이 좋은 협력관계로 보이지만 세부적인 면으로 볼 때,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미 삐걱거리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도 있기에 정치, 외교적으로 겉으로는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사실상 세부적으로 볼 때 서로 아직까지 완전히 믿지 못하는듯 싶다. 그렇다고 중국이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전히 지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단서방, 미국 등과 맞서기 위해 상호 간의 친밀감을 과시하며 견제하는 용도일 뿐이다. 이를 서로 간에 경제적으로 러시아가 먼저 들어가면 중국이 따라 들어오고 중국이 먼저 들어가면 러시아가 따라 들어오는 스텐스를 취하며 저마다 국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오월동주(吳越同舟)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 당사자들끼리 친밀감을 과시하면서 속으로 서로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음이 여기저기서 보여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국제 관계의 속성상, 중국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 베트남이라는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기 위해 볼 수 있겠다. 게다가 둘 다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여차하면 중국을 지렛대로도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국민 감정도 좋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중국이 베트남의 적성 국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북한과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그동안 중국에 경제적으로 많이 의존하였지만 때에 따라서 서로 견제하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파트너로 맞아 들인 부분도 있다. 최근 베트남에는 화교 집단들의 세력이 커지며 당 중앙에까지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부정부패 사건을 터뜨려 이를 계기로 숙청을 단행하고 있다. 최근 베트남 국가 주석인 보 반 트엉이 푸 쫑 서기장에게 숙청을 당했는데 이는 명목상 부정부패였으나 실질적으로 베트남 남부 지역 화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보 반 트엉은 호치민과 남부 지역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남부 지역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갈 때 화교에 대한 권익을 많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친중적 성향을 갖게 된 배경이 있다. 따라서 푸 쫑은 이를 적극 견제에 나서 보 반 트엉을 실각시키고 외부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중파 각료들과 화교 집단, 이들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인 것도 있다. 그런 의미로 베트남은 러시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UN의 결의안 투표에서 여러 번 기권을 택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물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베트남은 모두와 친구로 지내되 공식적인 동맹은 맺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과거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과도 협력하고 러시아와도 동시에 우방관계를 유지 중에 있다. 이는 모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특히 스프래틀리 군도 분쟁과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영토 분쟁은 베트남 홀로 중국을 상대하기 보다는 러시아를 통해 대화의 창구 및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베트남은 지정학적, 혹은 외교적인 부분에서 상호 지렛대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하노이 방문함으로써 이를 공고히 하려는 이유가 크다. 그리고 러시아는 베트남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약화시키려는 부분도 함께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다양한 전술, 전략으로 북한과 베트남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서 푸틴 대통령 지정학적인 전략을 잘 구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경제적인 부분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는 세계 시장에 통합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베트남의 대러 무역 규모는 중국, 아시아, 미국, 유럽에 비해 훨씬 더 적은 편이다. 이는 거리상의 문제도 있지만 90~2000년대에 러시아 경제가 파탄 상태에서 서서히 끌어 올라오는 시기였기에 양국 경제적인 부분에서 협력은 그만큼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베트남 또한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를 받아 축적하는 것을 늘리고 남중국해 석유 탐사에서 러시아 석유 기업과의 파트너십에 합의했다. 더불어 사할린 에너지의 안드레이 오호트킨 이사가 밝히길 사할린-2에서 생산하는 LNG 수출 지역을 베트남을 거쳐 인도까지 늘린다고 했다. 게다가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1981년 소련의 사회과학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전례가 있기에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 손수 챙겨왔었고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 그룹 창업자 팜 냣 브엉(Phạm Nhật Vượng) 회장 역시 러시아 유학생 출신이다. 이러한 인연들로 인해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강화 및 확대는 푸틴 대통령의 하노이 방문으로 인해 대폭 이루어질 전망이다. 더불어 베트남 또한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전력량 사용이 급증하고 있고 최대 300% 이상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과 달리 납부기한을 초과하는 즉시 얄짤없이 전기가 끊긴다. 베트남의 시골에는 이유 없이 전기가 나가 1시간 가까이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도시의 경우, 태풍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아니고는 발생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호치민의 경우, 간간히 끊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전 용량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을 내 전기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전반적으로 전기 수급이 원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남부 지방에는 메콩델타 최대 발전사업으로 현재 베트남전력공사(EVN)와 싱가포르 회사가 협정을 맺어 발전단지를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원전을 짓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원전 기업인 로사톰(Росатом)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기술 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 원전 기술 제공을 도울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원전에 대해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고질적인 베트남의 전력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북극항로와의 연결점이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북극항로에 있어 동해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각선 정점에 부산이 위치해 있고 러시아는 이런 형식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이자 그 종심적 역할을 베트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인도네시아까지 나아갈 수 있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요충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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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2
  • 2022년 카라칼팍스탄 시위의 배경과 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고민
    카라칼팍스탄은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위치한 자치공화국으로 주로 카라칼팍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는 우즈베크어보다 카자흐어에 더 가깝지만, 장시간 동안 우즈베키스탄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볼 때 우즈베크인과 더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크기에 비해, 카라칼팍인은 우즈베키스탄 인구의 2.2% 정도이며 약 75만 2천 명밖에 되지 않는 인구다. 역사적으로 카라칼팍스탄의 영토는 여러 제국에 소속됨을 반복하다가, 17세기 히바 칸국에 소속된 유목 민족과의 연합으로 현재와 비슷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카라칼팍인들은 카자흐인과 문화적인 교류를 했으며 언어도 카자흐어와 비슷한 킵차크 투르크어계에 속하며 오구즈 투르크계 언어를 가진 우즈베크인과 다른 언어를 형성하였지만 같은 투르크계 언어로써 볼 때 큰 차이는 없다. 소련의 수립을 거치며, 스탈린 집권 시대의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 초기에 파악한 인구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주의 지도층이 참여한 지역 공산주의 기구의 주도로 공화국 간 경계를 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여러 지역에서 다중 언어 사용이 가능한 인구가 많고 스스로를 여러 국가의 소속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환경에서 새로운 경계가 형성되자, 언어와 인종으로 나누었던 경계는 도시와 농촌을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1925년 카라칼팍 자치주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소속으로 설립되었고, 이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1932년에는 카라칼팍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며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완전히 병합되었으나 자치권은 그대로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 갈등은 현재까지도 진행 중에 있다. 1990년 12월 뻬레스뜨로이까 도중 카라칼팍 최고 평의회에서 밝히기를, 소련으로부터 한 '국가 자주 선언'을 통해, 주민 투표를 거쳐 독립할 수 있음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실패한 8월 쿠데타 직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도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이 당시 카라칼팍스탄은 소련 중앙정부에서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1991년 11월 최고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평의회 의장인 다울레트바이 샴셰토프(Даулетбай Шамшетов)가 카라칼팍스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92년 6월,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영수인 카리모프가 강제 권고하여 사퇴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써 직무를 수행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인 1992년 1월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92년 우즈베키스탄에 헌법이 도입됨과 더불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자치공화국으로 복속되었다. 1993년에는 20년 간 지속되는 카라칼팍스탄의 우즈베키스탄 합병 조약을 논의하며, 주민투표를 통해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당시 조약에는 국민 투표로 우즈베키스탄을 탈퇴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고 이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헌법 17장 74조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헌법 제71조에는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은 독자적인 헌법을 가지며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헌법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헌법과 배치될 수 없다고도 명시되어 있다. 이쯤되면 독립하는게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합병조약의 시효가 만료됐음에도 카라칼팍스탄의 자주권 증대 및 독립 요구 등은 우즈베키스탄 당국의 동화 전략과 이주 정책 등으로 인해 유무형적인 탄압으로 묵살되고 있다. 약속된 20년 째 되던 2013년에 이 조약이 만료되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탄압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독립의 기운이 말라가며 조약이 만료된지 10년이 다 되어가던 2022년 6월 말,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 미르지요예프는 우즈베키스탄 헌법에 대해 170가지 수정안을 제시해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하였다. 당시 수정안 중 대표적인 논란 사항은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고, 임기 횟수 제한을 없애는 것이 주 내용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카라칼팍스탄의 자치권을 상당수 소멸시키고 주민투표를 통해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에 7월 1일, 카라칼팍스탄의 수도 누쿠스에서 헌법 개정 안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한다. 이는 카라칼팍스탄의 변호사이자 기자인 다울렛무라트 타지무라토프(Даулетмурат Тажимуратов)가 누쿠스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 체포된 것이 시위가 촉발된 원인이었다. 시위 다음 날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카라칼팍스탄의 자치권과 관련된 헌법 개정안을 취하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카라칼팍스탄 정부는 시위대가 정부 건물에 무단으로 진입하려 시도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인터넷 접속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의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7월 4일에는 정치인 풀라트 아후노프(Пулат Ахнов)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비상사태 선언과 통금령 개시를 통해 상황이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으나, 이 시위가 우즈베크인과 카라칼팍인 간의 민족 분쟁으로 격화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틀 전, 주말에 미르지요예프는 카라칼팍스탄을 두 차례 방문하여 카라칼팍스탄의 친 정부파 인물들을 만나 헌법 개정 안에 대한 대중의 반대를 미리 파악하여 전달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다. 그리고 7월 4일 열린 카라칼팍스탄 대리인과의 회담 이후, 미르지요예프는 시위대 지도층이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 정부 건물을 탈취하려고 시도했다면서, 사람 수가 많은 것을 이점으로 삼아, 사법부 소속 인물들을 공격해 심한 폭행으로 상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당시 미르지요예프의 언급에 따르면, EU 정상회의 대표 샤를 미셸과 시위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위한 회담을 열었으며, 여기서도 폭력 사태의 책임을 범죄 조직에게 돌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민간인과 경찰 모두에게서 사상자가 나온 점을 인정하였으며, 폭동을 일으킨 자들이 파괴적인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풀라트 아후노프는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최소 5명이 사망했다고 사망자수를 고의적으로 축소하기도 했다. 카라칼팍스탄 보건부 장관 술탄베그 지야예프(Султанбег Зияев)는 누쿠스의 병원이 경찰과의 충돌로 부상을 입은 시위대로 넘쳐났으며, 수천 명이 병원에 실려갔다고 밝히기도 했다. 7월 4일 우즈베키스탄 대검찰청은 누쿠스에서 18명이 쥭고 243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으나, 반대 측은 이 수치가 실제로는 더 높다고 밝혔다. 이후 7월 18일 검찰청은 병원에서 3명이 더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우즈베키스탄 방위군 대변인 다브론 주마나자로프(Даврон Зуманазаров)는 7월 1일부터 2일까지 516명이 구금되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누쿠스(Nukus)를 방문하여 카라칼팍스탄 대표단에 사과했으며, 개헌 과정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자 시위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이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통제력이 갑자기 강화되었다. 그 전까지 외국인 체류자들에 대해 완화된 거주등록이 갑자기 3일 안에 반드시 거주등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강화되었고 거주등록증을 여권과 함께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유심 카드에 대해서도 IMEI를 강화해 반드시 휴대폰 기기 등록을 해야 하며 IMEI를 등록하지 않고는 아무리 심카드를 끼워도 통화와 인터넷 이용이 불가능하도록 설정했다. 그리고 2016년 이전 전임 대통령인 이슬람 카리모프 때처럼 타슈켄트 시내에 경찰들이 대폭 늘어났다. 물론 카리모프 때처럼 100m에 경찰 한 명씩 여권과 소지품 검사를 하는 등의 검문을 강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시위와 선동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특히 7월 9일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통령 선거가 조기에 치뤄지기 때문에 보안을 강화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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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1
  • 푸틴이 방북, 두만강 개발에 대한 이야기에도 초점을 맞춰야
    18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북한을 국빈 방문하기로 한 푸틴 대통령이 19일 새벽 북한에 도착했다. 오전 2시가 넘은 시각 푸틴 대통령이 북한 수도 평양에 도착했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은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러북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곳에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2년 전부터 푸틴 대통령이 동방으로 눈을 돌리겠다고 발표한 이후, 앞으로 러, 북, 중 3자 간 회담도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방문 일정의 기간이 1박 2일에 불과하기에 많은 얘기보다는 양국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에 주목될 예정이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안보 문제를 포함한 각 부문 협력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협정은 기존의 러북 간에 체결된 문서들, 즉 1961년 소련과 북한의 소-북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 2000년 '우호·선린·협조 조약', 2000년과 2001년 러북 선언 등을 대체할 것이라 했다. 또한 당연히 국제법의 모든 기본 원칙을 따르고 어떠한 도발적 성격도 없으며 어느 국가를 직접 겨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언론들이 말한 것처럼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 전략적인 부분을 주고 북한은 러시아에게 대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사 무기를 공급하는 등의 상호 군사 협력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리고 북한과 "군사동맹" 체결하려 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뉴스랍시고 보도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두 정상은 또 경제와 안보, 에너지, 우주항공, 교통, 국제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하게 되는데 경제, 에너지 등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생각된다. 데니스 만투로프 제1 부총리와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 부문 부총리를 비롯해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미하일 무라시코 보건장관, 유리 보리소프 로스코스모스(연방우주공사) 사장, 올렉 벨로제로프 철도공사 사장 등이 푸틴 대통령을 수행하기에 단독 비공식 정상회담에서는 수행원 중 특정 인원들이 포함되며,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들이 논의될 예정이기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할애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러시아 입장에서 군사적인 부분보다 가장 중요한 현안은 두만강 문제다. 과거 1960년대 소련은 중국, 북한과 더불어 두만강 일대의 개발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영토분쟁이 발발하고 북한과 중국 간의 협의도 강화되면서 이는 사실상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두만강개발계획(TRADP : Tume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me)의 일원이자 유엔개발계획의 지원으로 출범한 광역두만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 GTI)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의 참여 국가는 대한민국, 북한, 중국, 몽골, 러시아였지만 2009년 북한이 이 프로젝트에서 탈퇴해 현재 대한민국, 중국, 몽골, 러시아만 회원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5년 만에 북한이 이 프로젝트 합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본래 이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부산에서 울산과 속초를 이어주는 동해안 일대, 북한의 나진, 선봉시 등 두만강 유역, 중국의 동북 3성과 내몽골 몽골 동부지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일부를 아우르는 매우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동북아시아 최대 개발 계획이며 다자간 대형 프로젝트로 키우려고 했었다. 한반도 동부 회랑으로 알려진 환동해 지역이 이 계획에서 중심점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는 가입 회원국들 간 서로 이익이 어느 정도 충돌하지 않으면서 주도권이 어느 정도 분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 관련 총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대한민국에게 이것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러시아와 몽골이 매우 소극적이고 북한이 탈퇴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러시아-중국 간의 정상회담에서 두만강 프로젝트 논의가 나오면서 이 일대 개발 이야기가 공론화 되었다. 러시아는 그동안 중국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중국 선박 항해에 부정적이었으나 서방 제재를 받는 러시아와 북한이 접근하는 등 3국간 역학관계가 바뀌어 이제는 두만강이 중요해지게 됐다. 우선 러시아-중국이 합의했지만 문제는 북한의 동의와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가 성사되면 중국 입장에서는 동북 3성 일대의 물류 허브가 생성되는 것이고 비약적 경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연변이나 만주 일대, 하얼빈의 조선족들이 더 이상 한국을 찾지 않을 것이다. 자국 내 경제가 성장하는데 대한민국에 일하러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지역이 잘 되면 대한민국에 있던 조선족도 한국 생활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조선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우리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희소식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낙후된 하산 일대를 군사 지역에서 민간 지역으로 개방하고 하산 지역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동안 버려진 깡촌에 불과한 하산이 중국 심천과 같은 경제 물류 허브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하산의 잠재적 가능성은 높았었지만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었던데다 북한, 중국 등과의 관계가 냉랭해져 사실상 활용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러시아-북한 간의 정상회담으로 이 지역의 길이 열린다면 하산 지역은 육로 지역으로 판별해 볼 때 3국 간 육상 최대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는 나진, 선봉 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 부총리와 올렉 벨로제로프 철도공사 사장이 이번 방북에 동행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진, 선봉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 그리고 중국의 지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환동해의 새로운 물류 허브로 탄생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나진, 선봉보다 속초와 부산을 염두해 두고 환동해물류 허브로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인해 생각보다 느리게 진척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나진, 선봉이 열리면 속초는 가능성이 희미해지고 이를 목적으로 만들었던 양양 국제공항은 막대한 적자를 내며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집중하고 있는 북극 항로의 문제도 여기에 있는데 나진, 선봉이 열리며 굳이 물류 선박이 부산에 기항하지 않아도 된다. 나선 지역에 기항하고 동남해안으로 그냥 통과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부산도 사실상 손해를 보게 된다. 그만큼 환동해 경제적인 부분으로 볼 때 우리 대한민국에도 매우 중요한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한테도 아직 골든타임은 남아 있다. 가장 시급한 부분은 우리 대한민국과 블라디보스톡 간의 항공 운행이 재개 되어야 한다. 모스크바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블라디보스톡만큼은 이전처럼 항공 운행이 재기되어야 연해주 지역 문제에 다시 관여할 수 있다. 그러면서 환동해 지역 전체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를 끌어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광역두만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 GTI)의 회원국이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제 환동해 지역은 러시아와 중국의 대 동방 정책으로 인하여 동북아시아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숟가락 담그지 못하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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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0
  •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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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6
  •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집단서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대 굴욕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은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대국민회의군은 앙카라 인근 사카리아 강까지 몰려온 그리스군을 상대로 장장 21일 동안 밤낮없이 백병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그리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다.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은 민병대에게 패배하여 카프카스 본토로 철수했고 남부전선의 프랑스군도 가지안테프에서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을 힘을 쓰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터키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카리아 전투에서 전 국민과 함께 그리스 침략자와 싸워 이긴 덕택에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집단 서방의 연합군이 몰리는 형세로 접어들었다. 1922년 사기가 오른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몰아붙여 이스탄불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병력과 무기의 우위에 있었던 그리스군이 도리어 열세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터키군은 패퇴하는 그리스군의 장비와 탄약, 포탄을 넉넉하게 노획했고 이를 그리스군에 도로 공세를 퍼부으면서 오히려 그리스군이 수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스탄불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은 전장에서 발을 빼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군부는 터키 의회에 전쟁을 그만 매듭짓자고 요청했고 특사로 이스메트 파샤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의 요구에 따라 터키 의회는 이스메트 파샤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양측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만나 장장 1년 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로잔에서의 회의에서 영국은 터키와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군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리스가 선전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 중 하나가 에디르네와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하고 이즈미르는 터키의 영토로 하며 아나톨리아를 보전시키겠다는 제안을 하여 결정을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이런 회의는 의미가 없다며 초강경 자세로 버텼다. 영국도 그리스에 대한 물자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군에 물자를 대주면서 선전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지만 현실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 계속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지원한 물자는 터키 민병대에게 탈취당하거나 전투에서 노획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적백내전이 평정되면서 국내 사정이 안정된 소련 볼셰비키는 터키 독립 전쟁에 비로소 관여하게 되면서 터키 독립군에게 각종 무기와 탄약, 물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이에 오히려 물량으로 터키가 그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터키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인근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그리스 본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와 왕당파 정권에 여론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연전연패의 소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리스가 또 다시 터키에 정복당하는거 아니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 정파의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는 군부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Georgios II)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스 측은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6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내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 카라아아츠(Karagac)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협박했다. 더불어 이즈미르 본거지를 잃은 그리스 군은 부르사도 터키군에 내주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동트라키아로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동트라키아를 지키기 위해 반격 준비에 나섰고 터키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이스탄불과 동트라키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터키 의회에 최후 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다시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반대했기에 결국 영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렇게하여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터키 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터키군은 동트라키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잔에서의 2중 조약은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패배해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메트 파샤에게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와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세르브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기존의 세르브 조약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걸려 있었다. ① 그리스 왕국 : 스미르니를 위시로 한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을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의 획득 ② 이탈리아 왕국 :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콘야-안탈리야) 할양 ③ 프랑스 공화국 :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 할양 ④ 영국 :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할양 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 동부 (트라브존-에르주룸-반 호수) 할양 ⑥ 쿠르디스탄 자치령 : 아르메니아 영토와 영국령 제외 전역, 쿠르디스탄의 확실한 독립 그러나 더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그리스마저 터키에게 점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반발을 누르고 폐기에 합의했다. 또한 그와 같이 다급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소련은 터키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터키 동부 지역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빠르게 장악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내려와 도시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이에 놀란 아타튀르크 케말은 소련과 카르스에서 만나 협상에 돌입했고 당시에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도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출병하자 소련은 현 아르메니아 땅을 장악하고 동부 지역은 터키가 장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철군하게 된다. 이로써 이라크에서 출병한 영국군은 도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아타튀르크 케말은 영국에 강한 경고를 날리자 영국군은 즉시 이라크로 퇴각했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이렇게 하여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터키는 동트라키아를 선택하고 에게 해의 섬들과 키프로스를 포기함으로써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약속한 쿠르디스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로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과정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대표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집단서방, 영국이 쿠르디스탄은 대표를 보낼 필요 없이 영국이 알아서 독립을 약속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르디스탄은 영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쿠르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쿠르드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어 끝난 상황이었고 터키군이 갑자기 쿠르디스탄 영토에 진주하면서 쿠르디스탄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터키에게 굴복했다. 자신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세에 의존한 민족의 최후였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대의 교훈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민족적 후회가 어떻게 남아있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독립을 약속 받지만 결국 이용당하며 또 다시 팽해지는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20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100주년을 맞이해 터키 동남부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요구하였고 독립에 대한 주민들 찬반투표가 공식적으로 열려지도록 터키 의회에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쿠르드족은 한 번의 기회를 외세에만 의존해 독립을 날려버린 비운의 민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최장기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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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쿠르드족의 통합을 방해한 쿠르디스탄 내전(1994~1998년) 이야기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가 철저히 다국적군에 의해 폭격을 받아 파괴되면서 이라크의 패배가 확실시 되는 결과를 보고 쿠르드족은 이에 고무되어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봉기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인 아르빌에 미군 고위급 장성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빌 공군 비행장에서 내린 뒤, 당시 이라크 쿠르드족의 수장인 마수드 바르자니(Masoud Barzani)를 만나 1시간여 동안 회담을 하고 악수를 한 뒤, 다시 미군 기지로 돌아갔다. 당시 마수드 바르자니와 회동했던 그 미군 장성은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미국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파월과 바르자니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다. 당시는 비밀 회동이었기 때문에 여러 추측만이 난무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과 쿠르디스탄과 사이가 어떠했으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파월이 쿠르드족을 방문했다는 얘기 또한 미국 내에서도 사실상 군사기밀이었고 이를 아는 것은 쿠르드족 고위 인사들 몇 뿐이었다. 나는 오래 전, 쿠르디스탄 고위 인사들과 만나 몇 차례 얘기 나누고 걸프전 당시,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 몇몇 자료들을 훑어 보면서 알게 된 일이다. 나는 쿠르드어를 모르지만 몇몇 쿠르드인 지인들이 통번역을 통해 도와주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나는 미국과 쿠르드족과의 관계 및 교섭의 역사를 가지고 450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과연 파월과 바르자니가 당시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라크 내에서의 소요 사태를 일으켜 이라크 내 분쟁을 야기하는 것이고 이라크 내 군사력이 분산되어 스스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당시 다국적군은 F-16과 F-18, F-15E 등의 막강한 전폭기와 미국제 M1A1 ,영국제 챌린저 1 전차 등의 당시 기준 화려한 무기들을 보유하고 이를 쏟아 부었지만 전쟁에서의 핵심은 국가 내 분란을 일으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있다. 걸프전이 42일 만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무기와 더불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봉기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국이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쿠르디스탄 장악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세 번째,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단 한 개의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미국은 쿠르디스탄을 지원하긴 했지만 사담 후세인의 손에서 결국 보호하지 못했으며 독립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1994년부터 쿠르디스탄의 내전이 시작되는 원인이 된다. 당시 쿠르드족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민주당(الحزب الديمقراطي الكردستاني)이 큰 계파를 차지했고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대표였다. 그 외에도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 1933~2017)의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이 있었지만 민주당에 비해서는 당시에 세력이 약했다. 그러나 본래 이들은 어느 정도 쿠르디스탄 지역에 양대 산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화해와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르자니가 쿠르디스탄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면 탈라바니는 좌익, 공산주의를 추종했다. 서로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탈라바니는 본래 민주당이었지만 1975년에 탈당하여 애국 동맹을 만들었다. 애국 동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을 표방한 5개의 정당 연합체로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탈라바니는 본인이 민주당에 입당했던 1960년대에 줄곧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탈라바니는 키르쿠크와 실레마니 전선을 지휘하고 마와트, 레잔, 카라다그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와 타슈켄트에서 만나 이같은 문제를 논의한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바르자니와 충돌을 빚었다. 1962년 3월, 탈라바니는 소련제를 무기를 지원받아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샤르바제르 지구를 탈환하게 된다. 바르자니의 허락도 없이 소련제 무기를 가지고 공세를 펼쳤다는 것에서 그는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바르자니와의 이러한 대립에서 탈라바니는 이 때부터 탈당해 새로운 사회주의 동맹 정당을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탈라바니는 1964년 민주당과 결별하고 이라크를 떠나 이란에 들어가 팔레비 왕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탈라바니는 꾸준히 바르자니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쿠르디스탄에 있는 자신이 거느리는 군대에게 소련제 무기를 수입해 보냈다. 결국 그는 바르자니의 진노를 사 쿠르디스탄 민주당과 쿠르디스탄 주민 자격을 박탈당했다. 1970년에 이라크 정부와 쿠르디스탄이 협상 분위기에 돌입하고 이 때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바르자니는 대쿠르디스탄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탈라바니를 다시 민주당에 받아들였고 이 때부터 약 5년 간 민주당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1975년 알제 협정에서 이란이 이라크와의 국경 협정을 조건으로 쿠르디스탄과의 지원 안을 파기했다. 이 협정은 이라크가 샤트 알 아랍 수로와 후제스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불거진 사건인데 이 사건은 후일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을 통로로 계속 소련제 무기를 들여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한 탈라바니와 바르자니의 사이에서 격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탈라바니는 자신을 추종하는 지도층과 갈라서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을 창단했다. 1976년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내에서 쿠르드족 독립을 위한 무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탈라바니는 이란의 사회주의 집단인 MEK와 만나면서 상호 협력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는 다수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 요원들이 MEK와 함께 팔레비 왕가를 뒤엎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한 호메이니와 사회주의 성향의 MEK가 갈라서게 되면서 탈라바니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은 호메이니의 탄압으로 이란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면서 쿠르드 애국동맹은 호메이니의 편을 들게 되고 바르자니 또한 이란에게 붙어 애국 동맹과 함깨 사담 후세인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상황은 걸프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92년에 첫 쿠르디스탄 자치구 선거가 치뤄지고 이 때 민주당은 애국 동맹과 2석 차이로 제1당을 차지하면서 승리한다. 이 때 탈라바니의 애국 동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키르쿠크로 돌아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치구를 따로 인정받고자 후세인을 만나게 된다. 후세인 입장에서는 둘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노렸다. 둘의 통합은 걸프전에서 패배하면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후세인에게 분명 정치적으로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 때 두 세력의 분열을 조장하여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같은 쿠르드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그 힘이 약화될 것이고 이라크 정부는 이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인은 탈라바니와 애국 동맹을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로 인정해버렸다. 여기에서 바르자니는 크게 반발한다. 마침내 1994년 바르자니는 군을 움직여 키르쿠크를 기습하면서 4년 동안의 내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미 여러 전쟁에서 경험이 많은 애국 동맹을 이기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이 4년 간의 내전으로 쿠르드인 약 10만 명이 죽고 180만 명의 난민을 낳았다. 후세인은 이 내전을 지켜보다가 1997년부터 뒤늦게 군사 작전을 지시한다. 이 내전의 여파가 이라크 본국에까지 퍼질 가능성이 있었고 난민이 늘어나면서 이 내전이 서구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집단 서방은 이를 고의적인 분열로 인한 인종청소를 용인했다며 후세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국제적 비난과 이라크 본국에 내전의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 후세인이 진압을 지시한 셈이다.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디스탄 지역 남쪽,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북부로 밀고 들어가 전장을 확장하면서 바르자니의 쿠르드족과도 전투를 벌였는데 아르빌 자치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진압군인 이라크군이 고전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빠른 시간 내에 진압에 성공할 줄 알았던 후세인은 장기전으로 갈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는 걸프전 패배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후세인은 바르자니와 탈라바니를 초청하여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후세인은 쿠르디스탄 통합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으며 당시 지도자인 바르자니의 4년 임기의 통합지도자로 인정하고 4년 후, 탈라바니가 통합지도자가 되는 조건으로 내전을 마무리했다. 이 내전을 보고 집단서방은 이라크 위도 36도 이북, 32도선 이남으로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현재까지도 이 구역을 비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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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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