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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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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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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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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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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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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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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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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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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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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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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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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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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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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 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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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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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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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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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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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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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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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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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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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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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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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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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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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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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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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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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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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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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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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 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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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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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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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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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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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