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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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의 승리도. 사진출처 : Bức tranh Panorama - tái hiện toàn cảnh 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9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91일은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필자가 직접 운영하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2)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9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2023년은 92(토요일)91(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4(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2023년 독립기념일은 91일부터 9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래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지며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앞세운 혹독한 진압으로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했다.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다.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만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이 프랑스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다.

 

이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 인정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되고 사이공에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에는 일본 총독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됐다.

 

이때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일본과 게릴라전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 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군을 배신하며 몰아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을 절대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도 무너졌다.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며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 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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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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