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한국 부자들 해외로 떠난다… 백만장자 2400명 탈한국, 3년 새 6배 증가
    한국 백만장자들의 '엑소더스' 가속화: 웩시트(Wexit) 현상 심화와 그 파급력 [서울=2025.07.05.] 2025년 현재,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백만장자의 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이민 컨설팅 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발표한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한국을 떠나는 백만장자는 총 2,400명으로 집계되어 2022년의 400명 대비 불과 3년 만에 6배나 급증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순유출 규모로, 영국, 중국, 인도만이 한국보다 더 많은 부유층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적 웩시트(Wexit) 현상과 한국의 특수성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에 따른 구조적 이탈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선일보는 이를 '웩시트(Wexit, Wealthy + Exit)'로 명명하며, 전 세계적으로 부자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했다. 실제로 올해 전 세계적으로 14만 2,000명의 백만장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현상을 넘어 각국의 세금 정책, 정치적 안정성, 교육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높은 상속세율과 불확실한 국내 경제 상황이 부자들의 이탈을 가속화하는 주요인으로 지목된다. 해외 주요국들의 상속세율을 비교해보면, 프랑스(최대 45%), 독일(최대 50%), 일본(최대 55%) 등 선진국들도 높은 상속세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최대 60%**에 이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성, 즉 고물가, 고금리 지속과 성장률 둔화 우려 등이 맞물리면서 자산가들은 더욱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례로, 최근 한국의 한 IT 기업 창업주는 수천억 원에 달하는 상속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이주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업의 영속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토로하며, 국내의 과세 환경이 기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고 밝혔다. 부자들의 주요 이주 목적지와 그 이유 부자들의 주요 이주 목적지는 세금이 낮거나 거의 없는 국가들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아랍에미리트(UAE)는 소득세·양도세·상속세가 없어 세계 부자들이 몰리는 1순위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두바이는 이미 전 세계 부호들의 '세금 피난처'이자 '투자 허브'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에는 한국의 유명 연예인 및 자산가들도 두바이로의 이주를 검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 역시 여전히 매력적인 이주 대상국이다. 특히 자녀 교육, 투자 기회, 세금 부담 등의 이유로 자산가들이 미국 등지로의 투자이민을 선택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변호사 송지현 씨는 "올해 들어 투자이민 상담이 3배 가까이 늘었다"고 밝히며, "특히 미국 EB-5 투자이민 프로그램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과거에는 은퇴 후 이민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녀의 유학을 겸해 온 가족이 이민을 고려하는 젊은 자산가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최근 강남의 한 성형외과 원장은 자녀의 미국 명문대 진학과 본인의 투자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자산을 모았지만, 세금 부담과 자녀 교육 문제로 인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외 이주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웩시트(Wexit)의 파급 효과와 대한 이러한 고소득자 이탈은 장기적으로 국가 세수 감소 및 내수경제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부유층의 이탈은 단순히 세금 수입 감소를 넘어, 소비 위축, 고급 인력 유출, 투자 감소 등 복합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은 부유층 1%가 해외로 이주할 경우 연간 약 1조 원의 세수가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세금 체계 개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상속세 대신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는 방식, 또는 상속세와 자본이득세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과세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는 상속세가 없는 대신 자본이득세율이 낮아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스웨덴은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한 이후 기업 승계가 원활해지고 투자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령화와 기업 승계 문제 현재 한국 중소기업 대표자 중 **60세 이상 비율은 36.8%**로, 고령화에 따른 기업 승계 문제가 이민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으로 분석된다. 가업 승계 시 막대한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기업을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의 활력을 저해할 수 있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싶지만, 상속세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차라리 해외에 자산을 이전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지만, 향후 기업 승계 문제로 인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로의 사업 확장을 넘어 영주권 취득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웩시트(Wexit)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를 넘어선 국가 경제의 중대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과세 체계 개편, 안정적 투자 환경 조성, 그리고 기업 승계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인 정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국이 이러한 '부자들의 엑소더스'를 멈추고 다시금 투자를 유치하는 매력적인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정부의 향후 정책 방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뉴스
    • 사회
    2025-07-05

칼럼 검색결과

  • 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이미 배타적 경제수역 (EEZ, Exclusive Economic Zone) 같은건 무의미하게 됐다. 중공이 대만 포위 훈련 할때부터 일본의 베타적 경제수역은 허물어진거나 다름없다. 1951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창한 전략 구상 도련선(島鏈, Island chain) 또한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중국 헤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1980년대에 이를 ‘근해 적극방위전략’의 핵심 지역들을 자국의 해군 전략에 편입하여 미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을 방어 경계선으로 공식화했다. 중국 근해인 제1 도련선과 좀 더 멀리있는 제2 도련선이 현재 미국이 설정한 대중국 방어선이다. 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이은 가상의 선이라 해서 도련선(島鏈線)인데 실질적으로는 중국 해군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래 중국은 제1 도련선 돌파에 이어 2020년까지 제2 도련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2040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독점 지배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제1 도련선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제2 도련선 또한 올해 6월,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중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함대를 보내 이미 제2 도련선을 돌파해버렸다. 이 자체가 경악할만한 일인데 모두가 당시 중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그대로 묻혀져 버렸다. 중국이 미국에게 통보하고 미국과 함께 설정한 도련선은 미국이 발표한 2개지만 중국이 발표한 것은 3개다. 제1 도련선의 경우,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류큐열도,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본토 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1 도련선은 대체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시킬 경우 제1 도련선이 완전히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었고 이에 대한 견제도 전무했기에 사실상 제1 도련선이 완성되고 해당 해안 일대가 중국에 넘어간거와 다름 없게 되었다. 제2 도련선의 경우, 외곽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시작으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 이르며 이는 서태평양 연안 지대 전체를 이르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을 중국의 영향 아래 예속시킬 경우 제2 도련선이 완성된다는 입장인데 이번 달에 그 경계가 뚫렸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제3 도련선은 알류샨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일대를 활처럼 휘어 있는 선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장악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선의 목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것은 제2 도련선까지로 여겨지는 데, 제3 도련선으로 넘어가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발표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도련선 만으로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은 확고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도련선들은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독립전쟁 이후, 태평양의 미국이 설정한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설정한 절대 방위선과 많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의 영역과 중국식의 국제 질서 지역의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동안 중국의 앞바다를 통제하여 압박하려던 것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도련선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 전부 중국과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많아 이와 같은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항공모함 전단이 지난 6월 7~8일 처음으로 일본 동쪽 끝 서태평양 내부의 일명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 지역을 넘어서 훈련을 벌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중국 항공모함인 랴오닝함과 산둥함 전단이 일본 동쪽 끝 미나미토리시마 주변의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이 항의했지만 중국에서는 연례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정기훈련으로 국제법 및 국제 관행을 준수하고 특정 국가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도련선 확장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제1도련선 내 국가들에 전략 자산 배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를 지난 4월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등 각종 전략무기를 제1 도련선에 배치하려 한다고 검토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의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중국의 해상능력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도 돌파당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일대에 대한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특히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미국 측이 아닌 일본 해상자위대가 파악하고 알렸다는 것은 미국의 대 태평양 지역 감시 정보가 많이 약화되었음 시사한다. 보통의 태평양 전력이 강했을 시기의 미국이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보고 되어 함대를 출동시켜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중동에 신경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상시 주둔 대신, 필요시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해군력(7함대)과 연합훈련,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모두 무력화 된 셈이다. 미군의 영향력은 상시 주둔 숫자가 아니라, 위기 시 신속 투입 능력,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첨단 정보 · 감시 · 정찰 자산, 해군력 운용 등 복합적 전략에 기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제2 도련선 돌파하며 중국의 항공모함들이 해상 훈련을 실시 할 때, 앞서 언급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한 내용들은 완전 무위로 돌아갔다.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따위도 없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복합적 전략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관여하는 다른 지역들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다른 관여 지역은 쉽게 뚫릴 수도 있다는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전략적 실험(Strategic Experiment)"일 수도 있다. 미국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출몰했을 경우, 미국의 대응 능력을 살펴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해상 훈련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2 도련선까지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구축한 제2 도련선까지의 인도-태평양 연합 QUAD와 AUKUS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실험이다. 일단 제2 도련선까지 가보고 이를 해상 훈련이라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된다. 해상 훈련을 하면서 이들의 반응을 떠보고 해당 지역들의 정보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모의 실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돌아가서 여태까지 실험한 내용과 취득한 정보들을 모아 또 다른 전략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져 있는 전략들을 대폭 수정할 것이다. 이를 구체화 한다면 이제 친중 국가들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목을 환기 시킨 다음,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나라는 대만이고 그 다음이 한국과 일본, 혹은 필리핀 및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제2 도련선을 기준으로 해상 훈련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가장 유리해지고, 이득을 볼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차적으로 아, 태 지역의 긴장이 풀어져 이번처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을 것이고, 2차적으로 이란에게 물자를 지원하며 벌이도 쏠쏠해질 것이며, 3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예속화 과정의 심화와 더불어 일대일로의 확장은 더욱 가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는 베트남과 일본, 러시아와 공조를 강화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해 미국과 호주, 인도에까지 넘겨줘야 한다. 특히 다극화 시대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불편한 공생(Uncomfortable Coexistence)"을 하고 있는 격이지만 그 때 되면 서로를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정치-외교적 관계 등을 보면 단순히 경제적 관계 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서로 협조적이지만 이 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국가들이다. 둘이 상호 견제 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이득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2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5
  •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2
  • 트럼프의 난민 통제 정책으로 인한 여러 논란들과 떨고 있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난민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인 사유로 허용되었던 난민들에 대한 임시 보호 조치들을 트럼프 정부에서 전격적으로 폐기하면서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바이든이 대통령 재임 시기 때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인 약 24만 명에게 부여했던 임시적인 합법 체류 자격을 2025년 4월부터 전면 취소하면서 이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우크라이나로 대거 강제 귀환당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몇 년 전, 전쟁을 피해 미국에 안착했던 수십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다시 추방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이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포용 정책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뿐만 아니라 쿠바, 아이티,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출신 53만여 명에 대한 패롤(Parole)에 대해서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트럼프는 패롤(Parole)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남미와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신청을 전면적으로 중단했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이민자들은 주로 2년 동안의 임시 취업 허가와 추방 유예를 받았으며, 이 기간 내에 영주권이나 망명 등 추가적인 이민 혜택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민 신청 절차가 중단되면서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탈레반 정권을 피해 난민 신청을 해썬 아프가니스탄인 7만여 명에 대한 임시 체류도 재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총 180만 명 이상의 중동 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의 이민자들의 법적 지위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모두 트럼프가 바이든의 이민 정책은 법치를 넘어선 것이라 주장하며 선거 기간부터 공약을 펼친 바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2025년 1월 20일에 서명된 행정 명령을 통해 모든 카테고리별 패롤 프로그램 종료가 공식화 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추방 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데 이것이 현재 나타난 LA 폭동이라 보면 된다. 이에 우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나 탄압을 피해 온 난민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역할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경우, 현지로 송환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전 아프가니스탄 정보 요원 중 한 명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체류 자격이 취소되어 구금되자 미국과 동맹을 맺고 싸웠던 자신이 트럼프에게 배신당했다고 탄식했다. 그는 자신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는 목숨 걸고 미국을 도운 대가가 결국 미국에서의 추방이라면 충격적이라며 실망을 표했는데, 이러한 사연이 마침내 언론에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에게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미국의 이와 같은 송환 움직임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젤렌스키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불화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인 난민까지 돌려보내려 하자 키예프 당국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실망과 유감을 표명했다. 따라서 유럽의 인권 단체들 또한 세계 난민들의 위기 속에 미국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민자들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필자는 가족 초청으로 인해 합법적인 형태로 들어온 한국국적 영주권자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자신의 경력을 늘리고 자본금을 축적하기 위해 6개월 정도 미국에 방문하며 왕래했던 나오는 사람들도 거주 의사가 없어보인다며 세컨더리 룸에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소문들이 돌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들었다. 이 외에 영주권을 지닌 대학 교수의 부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연좌제로 추방 조치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난민 정책에 대해 미국 국내 정치 차원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 내 강경파와 트럼프 지지층들은 불법 이민을 억제하는 것과 법 집행을 강조하며 대규모 추방을 지지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인권 옹호 단체들은 비인도적인 조치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 주지사들과 시장들은 가혹한 대대적인 추방 작전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주 경찰과 교정 당국으로 하여금 연방의 대규모 이민 단속에 동참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일부 이민자 보호 도시 정책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도 지난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난민 정책에 대해 일부 노선을 변화하려는 조짐이 있어, 무제한적인 이민 옹호에서 벗어나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범 동조 및 중범죄 이민자 추방에는 협조하겠다는 스탠스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몇몇 민주당 인사들은 범죄를 저지른 불법이민자 추방은 모두가 지지할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무차별 단속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죄 없는 사람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방 정책이 일괄적인 접근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들을 반영하며 이민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패롤 철회 조치에 대해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연방 법원이 제동을 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으며, 18세기 제정된 '적성국 국민법(AEA)'을 난민들에게 적용한 것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라는 미국 연방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몇몇 미국 내 학자들은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은 미국 내 노동력 부족을 심화시키고 일부 산업, 농축산이나 건설 등 노무자들의 부족으로 인한 인력난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지하에 숨어 지내던 불법체류자들이 더욱 음지화되어 지역 사회와의 단절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이민자를 포용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국제 도덕적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향후 수개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 단속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인권 침해 사례들이 추가적인 정치적 쟁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의견을 표명한 외국계 학생들이 미국의 이민 세관단 속국(ICE)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고 있는데, 일례로 한 터키계 유학생은 길을 걷다 사복 차림의 이민국 요원에게 체포되어 손이 묶인 채, 표시가 없는 차에 태워진 후 구금되었다. 체포에 대한 근거로 하마스를 지지한 것을 들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반이스라엘 시위로 비자가 취소된 대학생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입국장은 SNS를 검열했다고 하며 이 중에 반유대주의나 트럼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가에 적대적이라며 입국을 거부한 사례도 나타났다. 반대로 독재와 인권 탄압 국가로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이 비난하는 러시아는 SNS 검열을 하지 않으며 푸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는 치졸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전력이 있는 하버드 대학 소속 러시아인 과학자가 미국에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미국 이민 당국에 구금된 사례가 나오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실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은 그 명분도 좋고 불법 이민은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도가 매우 강하고 심지어 각 주에 위치한 국경 심사대에게 성과 할당제를 부여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매우 강압적인 형태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세컨더리 룸에 끌려 가서 겁박을 당했다는 사례들이 끝도 없이 올라 오고 있다. 정작 중국인이나 베트남 불법 이민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은 대한민국도 저렇게 해야한다며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에 상당히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민 단속은 적법한 절차와 합법적으로 국적을 취득한 외국계 모두에게도 위협을 주고 있어 그 논란은 매우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8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7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2

포토뉴스 검색결과

  • 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이미 배타적 경제수역 (EEZ, Exclusive Economic Zone) 같은건 무의미하게 됐다. 중공이 대만 포위 훈련 할때부터 일본의 베타적 경제수역은 허물어진거나 다름없다. 1951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창한 전략 구상 도련선(島鏈, Island chain) 또한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중국 헤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1980년대에 이를 ‘근해 적극방위전략’의 핵심 지역들을 자국의 해군 전략에 편입하여 미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을 방어 경계선으로 공식화했다. 중국 근해인 제1 도련선과 좀 더 멀리있는 제2 도련선이 현재 미국이 설정한 대중국 방어선이다. 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이은 가상의 선이라 해서 도련선(島鏈線)인데 실질적으로는 중국 해군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래 중국은 제1 도련선 돌파에 이어 2020년까지 제2 도련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2040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독점 지배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제1 도련선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제2 도련선 또한 올해 6월,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중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함대를 보내 이미 제2 도련선을 돌파해버렸다. 이 자체가 경악할만한 일인데 모두가 당시 중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그대로 묻혀져 버렸다. 중국이 미국에게 통보하고 미국과 함께 설정한 도련선은 미국이 발표한 2개지만 중국이 발표한 것은 3개다. 제1 도련선의 경우,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류큐열도,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본토 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1 도련선은 대체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시킬 경우 제1 도련선이 완전히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었고 이에 대한 견제도 전무했기에 사실상 제1 도련선이 완성되고 해당 해안 일대가 중국에 넘어간거와 다름 없게 되었다. 제2 도련선의 경우, 외곽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시작으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 이르며 이는 서태평양 연안 지대 전체를 이르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을 중국의 영향 아래 예속시킬 경우 제2 도련선이 완성된다는 입장인데 이번 달에 그 경계가 뚫렸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제3 도련선은 알류샨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일대를 활처럼 휘어 있는 선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장악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선의 목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것은 제2 도련선까지로 여겨지는 데, 제3 도련선으로 넘어가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발표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도련선 만으로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은 확고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도련선들은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독립전쟁 이후, 태평양의 미국이 설정한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설정한 절대 방위선과 많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의 영역과 중국식의 국제 질서 지역의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동안 중국의 앞바다를 통제하여 압박하려던 것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도련선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 전부 중국과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많아 이와 같은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항공모함 전단이 지난 6월 7~8일 처음으로 일본 동쪽 끝 서태평양 내부의 일명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 지역을 넘어서 훈련을 벌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중국 항공모함인 랴오닝함과 산둥함 전단이 일본 동쪽 끝 미나미토리시마 주변의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이 항의했지만 중국에서는 연례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정기훈련으로 국제법 및 국제 관행을 준수하고 특정 국가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도련선 확장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제1도련선 내 국가들에 전략 자산 배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를 지난 4월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등 각종 전략무기를 제1 도련선에 배치하려 한다고 검토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의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중국의 해상능력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도 돌파당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일대에 대한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특히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미국 측이 아닌 일본 해상자위대가 파악하고 알렸다는 것은 미국의 대 태평양 지역 감시 정보가 많이 약화되었음 시사한다. 보통의 태평양 전력이 강했을 시기의 미국이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보고 되어 함대를 출동시켜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중동에 신경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상시 주둔 대신, 필요시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해군력(7함대)과 연합훈련,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모두 무력화 된 셈이다. 미군의 영향력은 상시 주둔 숫자가 아니라, 위기 시 신속 투입 능력,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첨단 정보 · 감시 · 정찰 자산, 해군력 운용 등 복합적 전략에 기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제2 도련선 돌파하며 중국의 항공모함들이 해상 훈련을 실시 할 때, 앞서 언급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한 내용들은 완전 무위로 돌아갔다.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따위도 없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복합적 전략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관여하는 다른 지역들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다른 관여 지역은 쉽게 뚫릴 수도 있다는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전략적 실험(Strategic Experiment)"일 수도 있다. 미국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출몰했을 경우, 미국의 대응 능력을 살펴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해상 훈련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2 도련선까지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구축한 제2 도련선까지의 인도-태평양 연합 QUAD와 AUKUS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실험이다. 일단 제2 도련선까지 가보고 이를 해상 훈련이라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된다. 해상 훈련을 하면서 이들의 반응을 떠보고 해당 지역들의 정보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모의 실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돌아가서 여태까지 실험한 내용과 취득한 정보들을 모아 또 다른 전략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져 있는 전략들을 대폭 수정할 것이다. 이를 구체화 한다면 이제 친중 국가들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목을 환기 시킨 다음,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나라는 대만이고 그 다음이 한국과 일본, 혹은 필리핀 및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제2 도련선을 기준으로 해상 훈련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가장 유리해지고, 이득을 볼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차적으로 아, 태 지역의 긴장이 풀어져 이번처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을 것이고, 2차적으로 이란에게 물자를 지원하며 벌이도 쏠쏠해질 것이며, 3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예속화 과정의 심화와 더불어 일대일로의 확장은 더욱 가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는 베트남과 일본, 러시아와 공조를 강화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해 미국과 호주, 인도에까지 넘겨줘야 한다. 특히 다극화 시대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불편한 공생(Uncomfortable Coexistence)"을 하고 있는 격이지만 그 때 되면 서로를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정치-외교적 관계 등을 보면 단순히 경제적 관계 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서로 협조적이지만 이 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국가들이다. 둘이 상호 견제 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이득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2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5
  •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2
  • 트럼프의 난민 통제 정책으로 인한 여러 논란들과 떨고 있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난민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인 사유로 허용되었던 난민들에 대한 임시 보호 조치들을 트럼프 정부에서 전격적으로 폐기하면서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바이든이 대통령 재임 시기 때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인 약 24만 명에게 부여했던 임시적인 합법 체류 자격을 2025년 4월부터 전면 취소하면서 이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우크라이나로 대거 강제 귀환당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몇 년 전, 전쟁을 피해 미국에 안착했던 수십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다시 추방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이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포용 정책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뿐만 아니라 쿠바, 아이티,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출신 53만여 명에 대한 패롤(Parole)에 대해서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트럼프는 패롤(Parole)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남미와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신청을 전면적으로 중단했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이민자들은 주로 2년 동안의 임시 취업 허가와 추방 유예를 받았으며, 이 기간 내에 영주권이나 망명 등 추가적인 이민 혜택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민 신청 절차가 중단되면서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탈레반 정권을 피해 난민 신청을 해썬 아프가니스탄인 7만여 명에 대한 임시 체류도 재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총 180만 명 이상의 중동 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의 이민자들의 법적 지위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모두 트럼프가 바이든의 이민 정책은 법치를 넘어선 것이라 주장하며 선거 기간부터 공약을 펼친 바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2025년 1월 20일에 서명된 행정 명령을 통해 모든 카테고리별 패롤 프로그램 종료가 공식화 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추방 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데 이것이 현재 나타난 LA 폭동이라 보면 된다. 이에 우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나 탄압을 피해 온 난민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역할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경우, 현지로 송환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전 아프가니스탄 정보 요원 중 한 명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체류 자격이 취소되어 구금되자 미국과 동맹을 맺고 싸웠던 자신이 트럼프에게 배신당했다고 탄식했다. 그는 자신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는 목숨 걸고 미국을 도운 대가가 결국 미국에서의 추방이라면 충격적이라며 실망을 표했는데, 이러한 사연이 마침내 언론에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에게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미국의 이와 같은 송환 움직임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젤렌스키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불화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인 난민까지 돌려보내려 하자 키예프 당국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실망과 유감을 표명했다. 따라서 유럽의 인권 단체들 또한 세계 난민들의 위기 속에 미국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민자들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필자는 가족 초청으로 인해 합법적인 형태로 들어온 한국국적 영주권자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자신의 경력을 늘리고 자본금을 축적하기 위해 6개월 정도 미국에 방문하며 왕래했던 나오는 사람들도 거주 의사가 없어보인다며 세컨더리 룸에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소문들이 돌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들었다. 이 외에 영주권을 지닌 대학 교수의 부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연좌제로 추방 조치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난민 정책에 대해 미국 국내 정치 차원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 내 강경파와 트럼프 지지층들은 불법 이민을 억제하는 것과 법 집행을 강조하며 대규모 추방을 지지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인권 옹호 단체들은 비인도적인 조치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 주지사들과 시장들은 가혹한 대대적인 추방 작전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주 경찰과 교정 당국으로 하여금 연방의 대규모 이민 단속에 동참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일부 이민자 보호 도시 정책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도 지난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난민 정책에 대해 일부 노선을 변화하려는 조짐이 있어, 무제한적인 이민 옹호에서 벗어나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범 동조 및 중범죄 이민자 추방에는 협조하겠다는 스탠스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몇몇 민주당 인사들은 범죄를 저지른 불법이민자 추방은 모두가 지지할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무차별 단속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죄 없는 사람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방 정책이 일괄적인 접근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들을 반영하며 이민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패롤 철회 조치에 대해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연방 법원이 제동을 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으며, 18세기 제정된 '적성국 국민법(AEA)'을 난민들에게 적용한 것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라는 미국 연방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몇몇 미국 내 학자들은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은 미국 내 노동력 부족을 심화시키고 일부 산업, 농축산이나 건설 등 노무자들의 부족으로 인한 인력난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지하에 숨어 지내던 불법체류자들이 더욱 음지화되어 지역 사회와의 단절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이민자를 포용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국제 도덕적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향후 수개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 단속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인권 침해 사례들이 추가적인 정치적 쟁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의견을 표명한 외국계 학생들이 미국의 이민 세관단 속국(ICE)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고 있는데, 일례로 한 터키계 유학생은 길을 걷다 사복 차림의 이민국 요원에게 체포되어 손이 묶인 채, 표시가 없는 차에 태워진 후 구금되었다. 체포에 대한 근거로 하마스를 지지한 것을 들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반이스라엘 시위로 비자가 취소된 대학생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입국장은 SNS를 검열했다고 하며 이 중에 반유대주의나 트럼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가에 적대적이라며 입국을 거부한 사례도 나타났다. 반대로 독재와 인권 탄압 국가로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이 비난하는 러시아는 SNS 검열을 하지 않으며 푸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는 치졸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전력이 있는 하버드 대학 소속 러시아인 과학자가 미국에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미국 이민 당국에 구금된 사례가 나오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실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은 그 명분도 좋고 불법 이민은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도가 매우 강하고 심지어 각 주에 위치한 국경 심사대에게 성과 할당제를 부여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매우 강압적인 형태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세컨더리 룸에 끌려 가서 겁박을 당했다는 사례들이 끝도 없이 올라 오고 있다. 정작 중국인이나 베트남 불법 이민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은 대한민국도 저렇게 해야한다며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에 상당히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민 단속은 적법한 절차와 합법적으로 국적을 취득한 외국계 모두에게도 위협을 주고 있어 그 논란은 매우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8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7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