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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80년 만에 빛을 본 독립 운동가들의 역사관
    이종찬 광복회장(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 전 국정원장)은 평생 의문을 품고 있었다. 1936년 상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항일투사였던 가족들로부터 국사를 배웠다. 하지만 그가 배운 역사와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왜 이렇게 다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 해답은 명백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발행된 모든 《역사(국사)교과서》는 국정과 검인정을 막론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발간한 《일본서교과서》 내의 조선사 부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곡된 시간과 공간 모든 역사 서술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는 이 두 가지가 크게 왜곡되어 있다. 현재의 교과서는 단군을 지움으로써 우리 역사의 시간을 축소했다. 시간을 축소한 역사가 공간을 축소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은 만주는 물론 북한 강역도 고대 중국 땅이라는 주장이다. 북한 유사시에 중국이 북한을 차지하고 동북4성으로 만들 것이라는 정보도 있다. 중국의 핵심 논리는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의 군현(한사군)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 강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검인정 교과서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 강역을 차지하고 “대한민국 교육부에서 인정한 한국사 교과서에 북한 땅이 우리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은 북한 강역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및 요녕성 서부에 있었음에도 한국사 교과서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침을 따라서 우리 역사 공간을 팔아먹고 있다. 2천여 리 잘라먹은 고려 북방 강역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의 강역을 압록강에서 현재의 원산만까지 사선(斜線)으로 그려놓고 ‘천리장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려는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한 볼품없는 나라가 된다. 조선의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두만강까지 국경을 확대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1909년 일본이 간도협약으로 두만강 북쪽 ‘간도’를 청에 넘겼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고려가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조선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한 것이 최대 국경이라면 간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 원래 ‘남의 땅’인 간도를 일본이 청에 팔아먹었다는 말인가? 고려 북방 강역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남쪽의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였다. 이 ‘철령~공험진’ 국경선은 명 태조 주원장을 비롯해 명의 여러 군주들이 인정한 국경선이고, 이런 사실은 우리 측의 《고려사》, 《태종·세종실록》와 중국의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에 명확히 나와 있다. 그러나 이병도가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높였던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와 역사 조작의 달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한국사를 ‘반도사관’의 틀로 조작한 고려·조선사를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이 여순감옥에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조선상고사》 등을 집필했다. 하지만 이케우치 히로시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등의 지원과 사랑에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하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는 광복 후에도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 관련 국가기관과 모든 대학의 사학과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황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격상시켰다. 이 분야는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보수, 진보의 구분도 없이 황국사관 카르텔 하나로 뭉쳐 있다. 그 결과가 지금 사용하는 한국사 교과서다. 고대사 말살, 기계적인 독립운동사 서술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사 말살 교과서다. 현행 교과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고려 때까지의 100만 년의 장구한 역사를 1/10 분량으로 축소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지침대로 단군을 말살했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발해)의 역사도 눈을 크게 뜨고 찾지 않으면 찾기 힘들 정도로 사실상 삭제했다. 물론 대륙백제 및 가야의 일본 열도 진출사도 모두 삭제했다. 9/10 분량의 나머지는 어떤가? 수많은 내용을 분절적으로 서술해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게 서술했으며, 노론일당 독재에서 노론 몇몇 가문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인 것처럼 서술했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애국계몽운동이나 외교독립론보다 무장투쟁론을 중시하면서 최초로 노선별 독립전쟁사를 서술해 민족주의 독립전쟁사는 물론 그간 교과서에서 소외되었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독립전쟁사도 생생하게 서술했다. 또한 일제의 역사 침략과 그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과 역사 투쟁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대일항전기와 역사전쟁 대일항전기는 한편으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의 시기이자 빼앗긴 역사를 되찾기 위한 ‘역사전쟁’의 시기였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영토를 일부 되찾았지만, 역사는 여전히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 교과서는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관통하는 사관이 필요하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를 관통하는 사관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총독부 황국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이다. 이 사이에 독립운동사, 민주화 과정 등이 끼어들어가 있으니 혼란스럽다. 앞의 설명과 뒤의 설명이 맞지 않으니 외우는 수밖에 없다. 또한 역사는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있는 분야인데, 현행 교과서는 너무 재미가 없다. 학생들은 혐오 과목으로 여긴다. “이래도 한국사를 공부할래?”라면서 선조들의 역사를 혐오하게 만든 조선총독부의 계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구석기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서술했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 잡다한 지식 외우기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의미를 익힌다. 또한 근거 사료를 풍부하게 제시해 사실에 입각했음을 밝혔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100만 년, 단군조선 수립부터 현재까지 반만 년의 역사를 서술한 《한국사사전》이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각종 역사 사전들은 조선총독부 황국사관과 조선 후기 노론사관이 뒤섞인 편향된 사전(斜典)이자 거짓을 써놓은 사전(詐典)이라면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진정한 《사전(史典)》으로서 우리 역사의 전 분야에 대한 표준 역할을 할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 대해 의문이 있거나 앞뒤가 맞지 않아 이상한 점을 느꼈다면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를 보면 해결될 것이다. 새로운 역사 교사 양성 과정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역사 교사 양성과정(전 11주)’을 진행하고 있는데, 책이 발간되기도 전에 소문을 듣고 수강 신청한 사람들로 강의실이 비좁을 정도다. 강사는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의 집필진 및 감수진들이다. 수강자들은 30여 년 경력의 역사 교사부터 전·현직 구청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한 고위 공직자 출신 및 대학교수들과 기업인들,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일반 시민들로 다양하다. 바른 역사에 대한 희구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역사 교사 양성과정’을 수강자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 각종 강좌에 강사로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소수의 식민사학자들이 거의 100% 장악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계의 카르텔을 집단지성으로 무너뜨려 한국사를 한국 국민들의 품에 돌려보내는 시초가 될 것이다. 이것이 광복 80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30만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의 영령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는 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부합하는 자유발행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가 광복 80년을 앞두고 최초로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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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윤석열 대통령, "오월의 정신으로 자유와 번영 이룩"…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기넘식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운 연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3년 연속으로 기념식에 참석해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오월의 정신을 이어온 유공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했다. 윤 대통령의 3년 연속 기념식 참석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특히 올해는 5·18 정신이 대를 이어 계승된다는 의미로 5·18 유공자 후손들과 함께했다. 그는 국립5·18민주묘지 입구에서 5·18 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유가족 대표들을 태운 버스를 영접하고 '민주의 문'으로 동반 입장해 헌화 및 분향을 함께하며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이 오월의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워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은 "우리가 또 다른 시대적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정치적 자유는 확장됐지만 경제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 성장을 통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고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나누고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해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서민과 중산층 중심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온 국민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오월의 정신을 이 시대에 올바르게 계승하는 일이며, 광주의 희생과 눈물에 진심으로 보답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기념식을 마친 후 윤 대통령은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에 안장된 고(故) 박금희, 고(故) 김용근, 고(故) 한강운 유공자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오월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 기념식은 윤 대통령의 참여뿐만 아니라 많은 5·18 유공자 후손들과 시민들이 함께해 그 의미를 더했다. 참석자들은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그들이 이룬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다. 또한, 윤 대통령의 발언은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기념사와 행보는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도전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 경제적 자유와 복지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접근은 국민들이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번 기념식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번영을 지켜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그동안의 희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모든 국민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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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조국혁신당 대표 조국, 윤석열 대통령 임기 단축 헌법개정안 제안
    조국혁신당 대표 조국이 1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안했다. 조 대표는 '국회 개헌특위 설치 및 제7공화국 개헌 제안' 브리핑을 통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지방선거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새로운 대통령을 지방선거와 함께 선출하자고 밝혔다. 이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재임기간도 2026년으로 줄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조 대표는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안의 배경을 설명하며, 1987년 헌법이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한 이유는 독재정권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이어 "대한민국은 이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자연스러운 나라가 됐다. 국민 역량을 믿고 대통령 중임제를 채택할 시점이 됐다"고 덧붙였다. 현행 헌법 제70조는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조 대표는 이를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연이어 선출되는 경우에만 한 번 중임할 수 있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직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에 대해서도 조 대표는 "혁신당은 가능한 한 다음 지방선거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대통령 선거를 지방선거 때 함께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며, "대선과 지방선거 시기를 맞춰 전국 단위 선거 횟수를 줄이면 그만큼 국력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부칙 조항을 두어 현직 대통령 재임 기간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매일경제 기자가 '윤석열 대통령 다음 임기부터 4년 중임제를 적용하는 방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조 대표는 "개헌특위에서 논의하겠죠"라고 답하며, "윤 대통령 임기 5년을 보장해 주고 그다음 대통령부터 4년 중임제를 한다는 결정을 개헌특위가 할 수도 있겠지만, 저와 저의 당은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 대표는 "부칙을 통해 현직 대통령의 임기를 줄이는 방안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조국 대표는 또한 헌법 개정 사항으로 헌법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을 수록하는 것을 넘어 부마민주항쟁, 6·10 민주항쟁을 추가로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현재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부마항쟁, 5·18, 6·10 정신의 계승을 포함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또 '수도는 법률로 정한다'는 조항 신설, 검찰의 영장청구권(신청) 조항 수정, '사회권' 강화 일반 조항 신설, 동일 가치 노동 동일 수준 임금 명문화, '토지공개념' 강화 등을 제안했다. 부마항쟁과 6.10을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헌법 전문에 수록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미디어오늘 기자가 질문하자, 조 대표는 "5.18의 경우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도 동의했다"고 답했다. 이어 "5.18 이전에 부마항쟁이 있었고, 이후 6.10이 있었고, 1987년 6.29 헌법을 직접 만들도록 촉발하게 한 직접적 행동은 6.10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조 대표는 "5.18 이전에 전사를 만들어냈던 국민들의 직접 행동은 부마항쟁이고, 다 연속해서 넓은 의미의 국민들의 저항권이자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정당방위로 보고 있다"며 "모두 법률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이미 된 사안이라서 다 포괄할 수 있고 이를 반대하는 여론과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반대하는 정당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검찰 영장청구권 헌법 삭제를 두고 검사 출신의 박은정 조국혁신당 당선자는 "지금 검찰 독재 정권으로 흐르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검찰권 남용인데 검찰은 수사권, 기소권, 영장 청구권, 수사종결권, 공소 취소권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며 "검찰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수사-기소 분리와 동시에 영장 청구권과 관련해 검찰이 사법통제 인권 보호 기관이어야 함에도 검찰의 입맛에 따라서 인신을 구속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검찰이 검사만이 영장 청구권을 가진다는 헌법의 근거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헌법에서는 없애는 대신 영장청구를 누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법률로 정하고 그때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황운하 당선자는 "법관이 영장을 발부하는 것이 영장주의의 본질이지 신청권자나 청구권자가 누구인가는 헌법에 규정될 사항이 아니다. 헌법에 신청권자를 규정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법률에서 신청권자를 누구로 할지는 법률에서 논의할 사항이긴 하나 헌법에서는 삭제돼야 한다"고 답했다. 영장청구권을 누가 가져야 하느냐는 여러 차례 질문에 대해 황 당선자와 박 당선자 모두 법률에서 정할 때 논의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번 조국 대표의 헌법 개정 제안은 윤석열 대통령 임기 단축을 포함해 다양한 개정 사항을 담고 있어, 향후 개헌 논의의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국혁신당의 제안은 앞으로의 정치적 논쟁과 국민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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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조국 혁신당 대표,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면 인사에 대한 소회 밝혀
    조국 혁신당 대표는 5년 만에 공식 석상에서 만난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에게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한 것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조 대표는 16일 오전 유튜브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30~40㎝ 거리에서 매우 과장된 웃음의 표정을 지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전날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열린 '불기 2568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에 참석했다가 퇴장하는 길에 윤 대통령과 대면 인사를 나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조 대표는 "직접 눈을 마주치면서 2~3초 같이 있었다"면서 "과장된 억지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묘사했다. 이어 "정면으로 마주친 상태에서 저는 웃지 않았고 윤 대통령은 (웃는) 저 표정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22대 국회에서 혁신당이 원내 3당을 차지하게 된 점을 언급하며 "(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국민의힘 대표 다음에 앉게 되니까 저런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한편, 조 대표는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차기 당 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언급하면서 "저와 악수하기 전 윤 대통령이 한 전 위원장과도 악수할 텐데 저 표정을 짓지 않겠나"라며 "재밌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조 대표는 또한 최근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등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인사에 대해 "검찰총장의 의견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총장이 통상의 인사철이 아닌 만큼 인사를 미뤄달라고 했다는데 이를 무시하고 총장이 지방에 출장을 간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총장의 수족들을 날렸다"면서 "윤석열 정부 인사를 보고 '중전마마 옹위 보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 건국 이래 검찰 인사를 이렇게 한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조만간 있을 중간 간부 인사에서 김 여사 관련 수사팀을 승진하는 방식으로 전국에 흩어 해체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 대표는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개입이 확인된다면 '탄핵 사유'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윤 대통령이 명시적·묵시적 지시를 했든지 말로 했든지 행동으로 했든지 상관이 없다"며 "분명히 뭔가를 했기 때문에 최고위층이 다 움직인 것이다. 국방부와 국가안보실 모두를 움직이게 할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했을 때 유죄 판결 난 것이 아니었던 만큼 탄핵할 때 명백한 증거가 안 잡혀도 된다"며 "기소할 수 있을 정도의 이른바 '행상책임'만 있으면 탄핵 소추가 가능하고 탄핵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조 대표는 혁신당의 원내 입지 강화와 향후 정치적 행보에 대한 전망,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다각도로 언급했다. 조 대표는 특히 검찰 인사 문제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으며, 윤 대통령에 대한 날선 평가와 더불어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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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윤석열 대통령,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참석 "부처님의 마음으로 올바른 국정 펼칠 것"
    윤석열 대통령은 부처님오신날인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서 "늘 부처님의 마음을 새기면서 올바른 국정을 펼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축사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분들의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아드리고 민생의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서 국민의 행복을 더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의 평화와 사회의 행복 강조" 윤 대통령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할 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평화로울 때 우리 사회도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며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이 나라에 큰 빛이 되어 평화롭고 행복한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기를 서원한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민국이 위기를 이겨내고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도록 저와 정부의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 국민과 함께하는 불교" 윤 대통령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언급하며 "한국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 언제나 국민과 함께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교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민의 마음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고 덧붙였다. 불교계의 선 명상 프로그램 강조 윤 대통령은 "특히 불교계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선 명상 프로그램은 우리 국민의 정신 건강 증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며 "저와 정부도 국민의 마음을 보살피는 불교계의 노력에 더욱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봉축법요식 참석 인사들 이날 행사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성파대종사, 총무원장 진우스님, 대덕스님 등 불교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또한,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오세훈 서울시장,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등을 비롯해 싱하이밍 중국대사 등 각국 외교 대사들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대통령실에서는 정진석 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전광삼 시민사회수석,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 인성환 안보2차장 등이 함께했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의 다짐 윤 대통령의 이번 부처님오신날 축사는 국민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앞으로도 정부는 불교계와 협력해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윤 대통령은 이를 위해 국민들의 협조와 참여를 당부하며,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한 사회를 꿈꾸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복지 정책을 강화하고, 불교계와의 협력을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앞으로도 윤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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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 추미애 vs 우원식 양자 대결로 압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이 추미애 경기 하남갑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 간의 양자 대결로 치러진다. 당내에서는 추미애 당선인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15일 민주당에 따르면, 오는 16일 22대 국회 민주당 전반기 국회의장단 선거가 진행될 예정이다. 당초 6선의 추미애 당선인, 조정식 의원과 5선의 우원식 의원, 정성호 의원이 출마했지만, 친명계인 조 의원과 정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명심 마케팅 경쟁 최고조 추미애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의 '명심 마케팅' 경쟁이 치열하다. 추 당선인은 13일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잘 좀 해주시면 좋겠다고 이재명 대표가 말씀하셨다"며 이재명 대표의 지지를 시사했다. 이에 우원식 의원은 같은 날 같은 방송에서 "이재명 대표가 '국회는 단호하게 싸워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정감 있게 성과를 내야 한다'며 자신이 적격이라고 말했다"고 반박했다. 당내 중진을 중심으로 조 의원과 정 의원의 사퇴 과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조 의원과 정 의원을 각각 만나 설득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국회의장 후보 등록 이후 사퇴는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사실상 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내 갈등과 비판 4선 우상호 의원은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5선, 6선 중진이 처음부터 나오지 말든가, 나와서 중간에 드롭하는 모양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박찬대 원내대표나 이재명 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이 권유를 받아 중단한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회의장 선거에서 대표가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를 당대표나 원내대표가 결정한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3선 정청래 최고위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의장 1명이 어른이고, 국회의원 299명은 어린아이냐. 국회의장은 국민의 뜻을 대의하는 국회의원의 뜻을 대의해야 마땅하다"고 맞받아쳤다. 추미애 당선인의 당선 가능성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라는 뜻의 신조어)를 뛰어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 중진 의원은 "추미애가 확실하다"며 "내부에 반발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대세엔 아무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회 관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다. 의원들이 거스르고 우원식 의원을 찍기는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은 추미애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진행되고 있다. 친명계의 지지를 받는 추미애 당선인의 당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으며, 이는 당내 권력 구조와 향후 당내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경선 결과에 따라 더불어민주당의 방향성과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명확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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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의 독도 방문, 일본 기자 질문에 대처법
    2024년 5월 13일, 조국 혁신당 대표 조국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양국 간의 긴장이 다시금 고조되었다. 이날 일본 후지TV의 기자가 조국 대표에게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라고 질문하며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조 대표는 이에 대해 "누구시죠? 누구신지.. 일단 처음 뵙는 분이라서"라며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자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 장면은 일본 FNN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FNN은 조 대표를 '양파 남자(玉ねぎ男)'에 비유하며 "왜 다케시마에 갑니까?. 한국 제3당 조국 대표 다케시마 향해 출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양파 남자'라는 별명은 조 대표가 딸 조민 씨와 배우자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가 입시 비리에 연루되고, 본인도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등 여러 의혹이 계속 드러나는 것을 빗대어 일본 언론에서 사용해온 것이다. 독도 방문의 의의와 조국 대표의 발언 조국 대표는 독도에 도착한 후 성명을 통해 "우리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독도는 바로 그 부속 도서 중 하나"라며 독도의 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불과 2년 만에 다시 일본 식민지가 된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국익과 국토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하라"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또한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1년 팔도총도, 1737년 조선왕국전도 등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사료들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그리워하는 것이냐. 대한민국의 해방을 부인하고,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이냐"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일본에 경고한다. 이제 그만 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일본 정부의 반응 일본 정부는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외무성은 "사전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강행됐다"며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으로 독도는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 간의 영토 분쟁과 역사 인식 차이를 다시금 부각시키며 양국 관계에 긴장감을 더했다. 일본 언론은 조국 대표의 독도 방문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며 한국 정치인들의 행동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한편, 한국 내에서는 조 대표의 독도 방문이 국토 수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조국 혁신당 대표의 독도 방문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양국 간의 역사와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양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해결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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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가상화폐 투자 성공,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남편의 사연 화제
    가상화폐 투자에 성공한 아내 덕분에 명예퇴직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고 있다는 한 남편의 사연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EBS 다큐 유튜브 채널, 특별한 부부의 이야기 전해 최근 EBS 다큐 유튜브 채널에는 ‘명예퇴직하고 왔더니 26억 생겨서 전업주부 시작한 남편’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게재됐다. 이는 2018년 6월 10일 방송된 ‘특집 다큐 - 인터뷰 대한민국 2018 3부 대박의 꿈’의 일부를 편집한 것이다. 영상에는 이다은 씨와 강호건 씨 부부의 이야기가 담겼다. 영상은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하는 아내 대신 식사를 준비하는 강 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강 씨가 된장찌개를 끓이는 동안, 이 씨는 바쁜 손길로 일을 하고 있었다. 가상화폐로 성공한 아내, 전업주부가 된 남편 과거 주부였던 이다은 씨는 현재 가상화폐에 투자하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강 씨는 선박회사 계통에서 근무하다가 10년 전 명예퇴직 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강 씨는 “부산에서 살다가 아내가 서울로 진출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같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다은 씨는 “이더리움을 가지고 있었다”며 “샀다가 가격이 오르면 팔고, 조금 떨어지는 것 같으면 현금화시켜놓는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고 말했다. 그녀가 방송에서 밝힌 수익은 26억원에 이른다. 부채를 갚고 풍족해진 생활 이다은 씨는 “1억원 넘게 있던 빚도 조금 갚고, 남편에게 시계 하나 사줬다”며 “돈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월급을 받으면 저축을 하면서 생활을 맞추지만, 지금은 풍족한 느낌이 든다”고 덧붙였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 노후 대비에 대한 조언 그녀는 “투자를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갖고 있는 것의 가치가 올라가며 수익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100만원을 넣어놓고 내일모레 팔면서 200만원이 생기길 바라는 건 투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동산도, 주식도 투기가 될 수 있다”며 투기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도 이제 노년 세대에 접어들었는데, 할머니들 가운데 노후 준비가 안 돼 있어 폐지를 줍는 분들을 많이 봤다”며 “과하게 빚을 내면서까지는 하지 말고, 투기 형식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충분한 노후자금을 확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제의 영상, 다양한 반응들 해당 영상은 4일 만에 유튜브에서 25만 회 넘게 조회됐고,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재되며 화제가 됐다. 네티즌들은 “부럽다”, “실패하면 투기, 성공하면 투자”,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가상화폐 투자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꿈과 현실을 보여주며, 노후 대비의 중요성과 더불어 투자와 투기의 경계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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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 조국, 윤 대통령에 특검 관련 직설적인 질문…"왜 특검을 거부하느냐"
    조국 혁신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왜 특검을 거부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조국 대표는 7일 밤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에 출연해 9일 오전 10시로 예정된 대통령 기자회견에 대해 "만약 조 대표가 기자라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왜 김건희 씨 특검법을 거부하느냐, 왜 채 상병 특검법을 거부하느냐고 묻고 싶다"고 답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검찰총장 시절에 항상 내세웠던 것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수사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살아 있는 권력이 관여되어 있는 수사를 스스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조국 대표는 "(대통령) 본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김건희 씨도 살아 있는 권력 중 하나다. 김건희 특검법은 당연히 김건희 씨와 관련되어 있고, 채 상병 특검법은 본인과 관련돼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막느냐"고 덧붙였다. 조국 대표는 "총선 민심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정 기조를 바꾸라는 경고, 윤석열 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방향을 바꾸라는 경고일 뿐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 개인의 행태도 바꾸라는 경고였다"고 강조했다. 진행자가 "개인의 행태는 무엇이냐"고 묻자, 조 대표는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봉건시대 왕처럼 행동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기자들과 자주 만나고 김치찌개 만남도 하겠다'고 한 점에 대해 조 대표는 "김치찌개는 끓여주고 비판적인 얘기하면 잡아넣고, 방송사에 벌점 매기고, 그게 말이 되냐"며 그런 행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민의힘이 채 상병 특검법 등에 대해 "야당이 임명하는 특별검사"와 "피의사실 외 수사 과정에 대해 언론 브리핑을 할 수 있다는 건 '독소 조항'"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조 대표는 "특별검사 임명 방식은 과거 드루킹 특검 등과 유사하다"고 여당의 주장을 반박했다. 또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국정농단 수사팀에 있었다. 그 수사팀을 가동시킨 국정농단 특검법을 보면 정기적으로 브리핑을 하게 했다"며 "당시 자신이 수사할 때는 브리핑을 즐겼고 지금은 브리핑을 못하게 한다? 이건 진짜 윤로남불이다"고 비판했다. 조국 대표의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부터 강조해 온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공정한 수사'라는 원칙이,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검 문제는 앞으로도 정치권에서 주요한 논쟁거리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야당에서는 윤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에 대한 특검 요구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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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 저출생 그늘 드리운 대한민국, 2044년까지 생산 가능 인구 1000만명 감소 예상
    우리나라에 저출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이 6일 발간한 '2024년 인구보고서'에 따르면, 2044년까지 경제 성장의 핵심 기반인 생산 가능 인구 1000만명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이후 2060년에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5배가량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급속한 인구 노령화, 중위연령 50세 돌파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했을 때 정중앙에 위치한 사람의 나이를 뜻하는 중위연령은 2023년 기준 45.5세에서 2031년에는 50.3세로 상승할 전망이다. 이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50세 이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와 경제적 영향 저출생으로 인해 15∼64세에 속하는 생산 가능 인구는 2023년 3657만명에서 2044년 2717만명으로 940만명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연은 "생산 가능 인구 감소는 소비 활력을 떨어뜨려 내수 시장 붕괴를 야기하고, 노인 부양 부담이 커져 경제 성장 속도가 둔화하면서 장기 저성장이 고착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동 수 급감, 병력 자원도 줄어 초등학교 입학 나이인 7세 아동 수는 2023년 약 43만명에서 10년 후인 2033년에는 약 22만명으로 반토막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인구 절벽 현상으로 인해 병력 자원도 급감할 것으로 보인다. 신규 현역 입영 대상자인 20세 남성 수는 2023년 약 26만명에서 2038년에는 약 19만명으로 줄어들어 20만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홀몸 노인 가구 증가와 초고령사회 진입 노인 인구가 늘면서 혼자 생활하는 홀몸 노인 가구도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기준 전체 가구의 9.1%(199만 가구)였던 65세 이상 1인 가구의 비율은 2049년에는 20.2%(465만 가구)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2050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1891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망자 증가와 출생아 감소, 자연 인구 감소 예견 2060년 사망자 수는 74만6000명으로 출생아 수(15만6000명)의 4.8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인구는 자연 감소하게 되며, 한국의 총인구는 2023년 기준 5171만명에서 2065년에는 3969만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구 감소의 심각성 인지와 대책 마련 한미연은 우리 사회가 인구 구조 변화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인실 한미연 원장은 "인구 감소에 따른 재앙은 대한민국의 존립이 달린 사안"이라며 "인구 회복의 골든 타임을 놓치면 우리 사회가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육아 휴가·휴직 환경 조성과 인구 정책 방향 전문가들은 직장 및 사회 분위기가 육아 휴가·휴직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나영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남성들이 육아 관련 휴가·휴직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직장 및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며 "일정 시점까지는 남성들이 이 제도를 강제로 활용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계봉오 국민대 교수는 "혼인율과 유배우 출산율의 상승을 위한 인센티브 제공이 기본적인 인구정책 방향이겠지만,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 복원을 통해 출산율 반등을 시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저출생 현상과 인구 고령화는 우리나라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사회적 인식 개선과 함께 적극적인 정책 개입을 통해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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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스포츠 검색결과

  • 분데스리가 한국 선수 대결, 김민재, 정우영 맹활약…슈투트가르트, 뮌헨 제압
    대한민국의 '괴물 수비수' 김민재(28·바이에른 뮌헨)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직전 경기에서의 부진을 극복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소속팀 뮌헨은 슈투트가르트에 1-3으로 패하며 리그 2위 자리마저 위태로워졌다. 이 경기에서 승리를 이끈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국 대표팀 공격수 정우영(25·슈투트가르트)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헤더골을 기록하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뮌헨은 4일(한국시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독일 분데스리가 32라운드 슈투트가르트와의 원정 경기에서 1-3으로 패했다. 이로써 뮌헨은 리그 우승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2위 자리를 지키는 것도 불안해졌다. 현재 뮌헨은 22승 3무 7패로 리그 2위에 위치해 있지만, 이날 3위 슈투트가르트에 패하면서 두 팀의 승점 차는 2점으로 줄어들었다. 이날 경기에서 김민재는 에릭 다이어와 함께 선발 센터백으로 출전했다. 김민재는 지난 1일 열린 유럽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경기에서 부진해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 이에 명예 회복이 필요했고, 다행히 토마스 투헬 감독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김민재는 풀타임을 소화하며 태클 2회, 걷어내기 3회, 가로채기 2회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공중볼 경합에서도 4차례 모두 승리해 성공률 100%를 기록했고, 패스 성공률도 91%로 높았다. 덕분에 김민재는 3실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점을 받았다.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은 그에게 평점 6.92를, 소파스코어는 평점 7.0을, 풋몹은 평점 6.5를 부여했다. 반면, 슈투트가르트의 정우영은 슈퍼조커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후반 27분 교체로 들어간 정우영은 1-1이던 후반 38분에 실라스 카톰파 음붐파의 크로스를 강력한 헤더 슈팅으로 연결해 골망을 흔들었다. 이는 월드 클래스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도 막을 수 없는 골이었다. 이는 정우영의 시즌 첫 골이기도 했다. 지난 해 여름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한 그는 올 시즌 리그 24경기에 출전해 1골 2도움을 기록했다. 골을 넣은 후 정우영은 두 팔을 벌리며 슈투트가르트 팬들을 향해 뛰어가는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정우영은 이날 경기에서 볼터치 17회, 패스 성공률 92%, 태클 1회를 기록했다. 후스코어드닷컴 기준으로 정우영은 평점 7.34를, 소파스코어는 평점 7.6을, 풋몹은 평점 7.7을 부여했다. 이날 경기의 첫 골은 슈투트가르트의 레오니다스 스테르기우가 전반 29분에 기록했다. 뮌헨은 전반 37분 해리 케인이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케인의 36호 골이자 시즌 리그 32경기에서 기록한 골이었다. 그러나 슈투트가르트는 후반 38분 정우영의 헤더골로 다시 리드를 잡았다. 후반 추가 시간에는 정우영의 골을 도왔던 음붐파가 쐐기골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슈투트가르트가 뮌헨을 잡고 승점 3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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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문화 검색결과

  • 김경란 CMC-CAT 회장
    한 집안의 대통령상 두 개 -김경란 회장 어머니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세 분이 모두 미용을 하셨지요 하지만, 미용은 힘든 직업 어머니와는 다른 미용을 위해 불철주야 공부했지요 세상은 노력하는 자를 버리지 않네 울산 1호 미용예술학 박사 울산 1호 명장 선정 울산 1호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 여기에 더하여 대한미용사회 울산협의회장 및 동구지회장 CMC-CAT 세계미용예술연합회 한국회장 찬란하여라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 두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미용을 하고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네 3대가 함께하는 미용인의 삶 한 집안에 대통령상이 두 개 부러울 것이 없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네 미용인의 권익향상 이미지 부각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달려간다네 3대 미용인 미용인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직업적으로도 평균 이상의 수익을 올리면서 미용인은 우리 사회에서 꽤 괜찮은 직업군으로 분류된 지 오래됐습니다. 여러 가지 지표가 이를 방증하지만 우리 미용계에 2세 미용인이 많다는 것은 이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표식이 될 것입니다. 성공한 미용인 치고 한 두 자녀가 대를 이어 미용을 하지 않는 미용인 집안은 드뭅니다. 앞의 시(詩)에서도 언급했듯이 김경란 회장은 미용인 집안 출신입니다. 어머니, 큰어머니, 작은어머니께서 미용을 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힘든 삶을 몸소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따라서 미용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피는 속일 수가 없었나 봅니다. 결국은 미용을 택했고, 대신 어머니와 다른 미용 길을 걷고자 노력에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김경란 회장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해 2014년에 울산1호 미용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고, 2015년엔 전국 최연소 지역 명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1년에는 울산1호 미용 산업현장교수로 선정되는 등 산업도시이자 공업도시인 울산에서 미용을 알리고 뿌리내리는 일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김경란 회장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22년엔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경사를 맞습니다. 뒤에서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둘째 따님까지 대통령상을 받았으니 한 집안에 대통령상을 2개나 보유한 미용 집안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지만 미용계로서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경란 회장을 생각하면 유명 텔레비전 MC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미용계에는 3대 유명 사회자가 있습니다. 신한대학교 김민정 교수, 청암대학교 이수희 교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김경란 회장 이렇게 세 분입니다. 이 세 분은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우리 미용계 행사에서 탁월한 실력을 자랑합니다. 세 분은 우리 미용계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소중한 자산이라고 기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이 모자랄 만큼의 역할 김경란 회장은 한 자리에서 미용실을 23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용실 운영과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올해는 14년간 강의했던 영산대학교 강의를 접고 집 근처의 울산과학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미용실 원장님을 대상으로 기술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대한미용사회 울산협의회장 및 울산 동구지회장을 맡고 있으며, 울산광역시에서 선정한 울산광역시 명장님들의 모임인 울산광역시 명장회 회장을 2대 째 연임 중입니다. 울산에서 두 단체의 회장을 맡아 숙련기술인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기술교육이 필요한 후배들을 만나 특강을 하는 등 후학양성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CMC-CAT(세계미용예술연합회)의 회장 직까지 맡고 있으니 몸이 서너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CMC-CAT(세계미용예술연합회)는 87년의 역사를 가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미용단체입니다. 한국회장을 맡아 이어가며 언어의 벽이나 거리의 어려움들이 있어 힘이 들긴 하지만 미용계의 산 증인들과 함께하는 단체라는 뿌듯함과 의미를 기억하며 단합된 모습으로 서로에게 시너지를 불어 넣을 수 있는 단체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열정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따님과 함께하는 행복 김경란 회장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따님을 두고 있습니다. 두 따님은 엄마의 뒤를 이어 자랑스런 미용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때 미용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두 딸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두 자녀는 대학생활 동안 전체 장학생을 유지하며, 큰 자녀는 미용고등학교 교사로 현재 재직 중에 있고 둘째 자녀는 2022년 국제기능올림픽 헤어디자인직종 국가대표로 세계대회 출전해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오는 감사하고 대견스러운 일을 해냈어요. 자식자랑은 밤을 새며 이야기해도 다 못할 것 같습니다. 자녀까지 3대째 미용을 천직으로 알고 살다 보니 가족 간에 대화가 많아지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일들이 생기다 보니 더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정다운 국가대표는 한국산업인력공단 홍보대사로 선정되어 각종 방송 프로그램 출연과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해 미용인들의 이미지 쇄신 등 삶의 가치를 올리는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녀가 같이 미용을 하며 25살의 나이에 국가대표,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살롱실무 능력까지 겸비한 자녀로 성장하고 있다 보니 아바타라고 해야 할까요? 힘든 일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하고 이래서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미용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용인으로서 미용계 전체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으니 미용계의 보석이라고 여길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용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최선 이처럼 행복한 미용 생활을 영위 중인 김경란 회장은 미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미용을 시작하며 명예로운 미용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에 열심히 공부하며 후학양성을 위한 노력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는 미용인의 이미지 쇄신이라고 해야 할까요? 미용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더 올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용인들이 하기 힘든 많은 다양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출마, 대출심사, 자격시험 심사, 학교 운영위원장, 민주평통자문위원회 울산여성위원장, 체육회 이사, 기능경기대회 지도교사, 회계멘토, 컨설턴트, 미용대회 MC 등이 다 이런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의 깊이에 따라 그 조직의 앞날이 좌우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조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미용계가 김경란 회장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김경란 회장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기자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현재의 삶에 너무 만족하며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획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제자들,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들과 미용인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노력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나 미래는 현재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만족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 보면 미래의 삶 또한 미소가 가득한 일만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계발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미용계의 한 사람으로서 미용인의 사회적 권익 신장 및 이미지 쇄신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김경란 회장이 있기에 우리 미용인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하며 기자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경란 회장은 우리 잡지에도 지난 2018년부터 매달 빠짐없이 연재를 하고 계시니 우리 뷰티라이프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우리 모든 뷰티라이프 식구들 사랑합니다. 프로필 -2022년 대통령 표창 「직업능력의 달」 -2021년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선정 (울산1호) -2021년 백년가게 선정 -2017년 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자 선정 -2015년 울산광역시 명장 선정 (울산1호) -2014년 미용예술학박사 (울산1호) -울산광역시 명장회 회장 -사)한국미용장협회 중앙회 이사 역임 -사)대한미용사회 울산협의회장 및 동구지회장 -CMC- CAT 세계미용예술연합회 한국회장 -한국표준협회 회계멘토 -방어진중학교 운영위원장 역임 -국제기능올림픽 은메달 부지도위원 -기능경기대회 지도교사 -영산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울산과학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의 중 -아모담 by 김경란 박사 대표 -미용기능장, 이용기능장 -지방기능경기대회 2년 연속 금메달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수상
    • 문화
    • 인터뷰
    2024-04-24
  • 영화 '파묘' 미스터리 공포의 심장을 울리다.
    2024년 2월 22일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최신 미스터리, 공포 장르 영화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등급이 매겨진 이 영화는 총 134분의 러닝타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쇼박스에 의해 배급된 이 작품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은 품질을 보여준다. 영화는 초반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탁월하며, 관객들을 자리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미스터리 요소가 스릴러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극적인 흡입력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점차적으로 펼쳐지며, 각 캐릭터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각본과 연출은 이 장르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연출자는 적절한 시점에서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관객의 감정을 완벽하게 조종한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는 이야기의 몰입감을 더욱 깊게 해, 특히 주연 배우의 섬세하고 강렬한 연기는 극의 긴장감을 한층 더한다. 시각적으로도 이 영화는 관객에게 큰 충격을 선사한다. 어두운 톤과 음산한 배경 음악은 영화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완벽하게 살린다. 특히, 섬세하게 구현된 특수 효과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그로 인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다. 모든 실마리가 하나로 모이며, 충격적이면서도 만족스러운 해결을 제공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들며, 영화의 재관람 욕구를 자극한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미스터리와 공포 장르의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다. 감독과 배우들의 뛰어난 역량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2024년 한 해 동안 큰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이며, 한국 영화의 진화하는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 문화
    • 평론
    2024-04-22

칼럼 검색결과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 벨라루스의 2020년 시위 당시,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의 변화!(Перемен!)
    벨라루스 2020년 시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1991년부터 동구권에서 울려퍼졌던 민주화의 상징인 노래 Виктор Цой (빅토르 최)의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도 함께 불렸다.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인 가수가 빅토르 최였는지도 모른다. 이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 2020년 유럽에서 마지막 장기집권국가인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시민들, 서유럽식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다시 불려졌다. 이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소련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로마노프 왕조 이후, 가장 최악의 서민 경제 상황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원하는 그 마음을 대신한 노래였다.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Перестройка (뻬레스뜨로이까)와 Гласность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한 직후에 이 음반이 나왔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진 대작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이 노래는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으로 "변화를 원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동유럽의 열망인 개방의 상징인 노래가 된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 "아사"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노래가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노래가 바로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이다. 그리고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0년 후, 이번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벨라루스 경찰당국은 2020년 8월 12일 민스크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뻬레멘!'이 울려퍼지자,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 디제이(DJ)들을 즉각 연행해 갔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반주없이 '뻬레멘!'을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끌려간 DJ들은 풀려난 뒤 내무부 차관급 인사에게 밀실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의 MZ 세대들은 구시대적인 루카센코의 체제에서 벗어나 서방이 추구하는 민주국가로써의 Перемен! (변화)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벨라루스만의 Перемен!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원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특히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뻬레멘(Перемен)을 모든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은 지금 현재, 현 세대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뻬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쎄르짜)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뼤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글라자)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브 나쉠 쓰메헤 이 브 나쉬흐 슬라자흐)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이 브 뿔싸씨이 볜)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믜 쥐둄 뻬레멘)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에릭뜨리췌스끼이 스볫 쁘라달좌엣 나쉬 뎬)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이 까로브까 앗 스삐췍 뿌스따) 성냥갑은 비어버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노나 쿠흐녜 씨님 츠볘뜨꼼 가릿 가즈)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 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에따 스헤마 쁘로스따) 간단한 일이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이 볼쉐 녯 니췌고, 브쎄 나하딧쌰 브 나쓰)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믜 녜 모쥇 빠흐바스땃쌰 무드라스뜌 글라즈)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이 우멜릐미 줴스따미 루끄)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남 녜 누쥐노 브쎄 에따, 취또븨 드루그 드루가 빠냐뜨)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딱 자미까엣쌰 끄루그)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이 브드룩 남 스따노빗쌰 스뜨라쉬나 췌또-따 메냣)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벨라루스 MZ 세대들의 시위가 이웃인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 일부 도시에서도 경제 문제와 더불어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들이 폭발해 반(反) 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세이 나발니 등 몇몇 반(反) 정부, 반(反) 체제인사들은 벨라루스 시위대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했다. 한편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가 성공한다 해도 루카셴코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 분배 정책을 허사로 돌려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국가주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구좌파적인 루카센코의 성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카센코는 현재 무소속이지만 과거에는 급진 좌파정당 소속이였고 현재도 구소련 시기와 비슷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그 문제인데 그러한 정책들이 극우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조지아, 우크라이나는 목적이 반러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도 같은 목표점을 두었던 반면 벨라루스 반(反) 체제 인사, 시위자들도 반러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반러 운동이 목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루카센코의 실각이며 루카센코를 밀어주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가족이자 친척이라 생각하고 동족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이 조지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러 시위와는 다른 부분이다. 물론 벨라루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부를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루카센코를 몰아내더라도 친러 정권을 유지하자는 시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경우 반러감정에다 지역주의가 결합된 경우이지만, 벨라루스는 크게 특정 지역에서 이민족들이 벨라루스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이탈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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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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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30
  •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를 프랑스어로 재해석한 이름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세에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얼마 후 남편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던 실로 당시 드물게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길로틴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창의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온갖 혐의를 쓰고 갖은 중상 모략을 당했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시민들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이었지만 놀랍게도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죄목 하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근친상간의 혐의였다. 이는 본인의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장남인 루이 조지프는 8세에 죽었고 차남인 루이 17 또한 당시 재판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8세였다. 즉, 어머니가 8살의 아이를 겁탈했다는 얘긴데 지금 들어도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 위한 억지 죄목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7세의 변론과 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죄목 및 당시 재판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포스팅하고자 한다. 이미 그녀의 어떤 변론과 증언도 이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사형이라는 처결을 결론 지어 놓고 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상당한 양의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파리 군중들에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처형하기 위한 정당성, 국민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후대에 창작한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왕비로써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로부터 국제적인 이득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자신의 친모 및 친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22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 앙트아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 루머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 군중들은 왕비를 왜 마녀로 만들었을 정도로 증오했을까? 첫 번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를 연결시키려는 정략결혼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승계한 국가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력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인데 이는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보다 상류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정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에 대한 사실적인 부분보다는 각종 정치 선전성 루머에 의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었다. 이는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는데 이는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의 타락, 그로 인해 테레지아와 앙투아네트가 그를 멀리하자 그에 대한 앙심으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여 이 사건을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작된 루머는 진범이 앙투아네트이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재판에서 이 사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고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당시에 시대상을 지배했던 상류층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일본의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이와 같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의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生涯)』를 집필하면서 이 혁명재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자였고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하면서 그녀를 풍자했다. 대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제목만 보아도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인 장교를 비롯하여 자신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역사적 근거와 별개로 그녀를 성적으로 음탕하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로 몰고 갔다. 여기에 발기 불능인 국왕 루이 16세를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존재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수위의 성희롱을 3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고증과 전혀 상관없는 가십용 거리로 전락한 앙투아네트의 모습과, 네티즌들이 온갖 악플 및 악의적이고 근거없는 가십거리로 루머를 만들어 퍼트려 몇몇 여성 연예인들을 자살로 이끌게 만드는 요즘과 별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워 이를 기정 사실로 덮어 씌우고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 때문애 그녀를 희생시켰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그녀는 단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요즘과 같이 MZ 세대가 대두되고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별 대립 및 성 차별 등등의 각종 양극화적 논란으로 볼 때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 재판은 지금의 관점과 비교하여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였고 상류층, 부르주아 혐오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으며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 된 사회와 매우 유사한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시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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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차가타이(Чагатай)를 소환한 현 시대 대한민국
    요즘 차가타이와 그의 나라,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티무르 제국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의 시대상 변천을 함께 보면서 느낀 바 있다. 칭기즈칸, 바투나 수부타이, 재배, 카이두 및 아리크부카나 쿠빌라이 칸 등의 영웅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만 칭기즈칸의 차남인 차가타이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나는 다른 영웅들보다 차가타이를 매우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고 하는 두 가지의 기본 철칙이 있었고 그런 기본 철칙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는 것이 부족한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차가타이는 성격이 불같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은 차가타이에게 몽골의 법전인 <에케 야사>를 창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차가타이의 동생인 오고타이가 대칸이 된 이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칸이 술자리를 했는데, 차가타이가 취중에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를 했다. 다음 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차가타이는 아우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벌해달라고 청했다. 오고타이 칸은 이를 "뭘 그런거 가지고..." 하면서 그대로 넘어갔지만 차가타이는 끝내 <에케 야사>의 법률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벌했다고 전해진다. 차가타이는 매우 엄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오고타이 칸이 술에 취해서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면 법의 수호자이자 무서운 형님이 되어 동생을 혼냈는데 취중에도 오고타이 칸은 형이 오면 무서워하였다는 설화도 존재하고 있다. 차가타이의 동생이자,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장남이자 후일 몽골의 대칸이 되는 몽케가 차가타이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며 차가타이는 몽케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고도 전한다.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 칸국을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카자흐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까지 지배했으며 그의 영토가 상당히 넓었음에도 원리원칙에 따라 주군은 늘 몽골 카라코룸의 대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차가타이는 죽을 때까지 결코 칸을 자칭하지 않았다.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자들 중 처음으로 칸을 칭한 것은 손자인 카라 훌라구였다. 차가타이를 시조로 간주하는 차가타이 칸국은 동유럽을 정복한 킵차크 칸국이나 중국을 정복한 원나라, 그리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페르시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 칸국에 비하면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다른 칸국들은 각각 러시아, 명나라, 맘루크 및 오스만투르크 같은 중세 후기에서 근세 시대 대제국들이 성장하면서 반드시 이겨할 적으로서, 또는 동시와 많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서로 교환한 외교적인 국가로서 세계사의 거대 세력들 역사와 같이 존재감이 컸던 것에 비하면 차가타이 칸국이 있었던 지방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곳이라서 세계사의 중심으로 도약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주목받길 원하지 않고 오로지 <에케 야사> 법전에 나와 있는 대칸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주목 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명성을 떨친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과 같이 독립 국가적인 주체로써 몽골 제국을 확장시켰던 것이 아니라 몽골 울루스의 일원으로써 중앙정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차가타이의 원리원칙론이 작용했기에 일찍부터 중앙아시아 이외 지역에 세력 확장을 하지 못한 이유일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그랬을까?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차가타이 칸국은 아미르 티무르라고 하는 칭기즈칸과 맞먹는 걸출한 대영웅을 배출해내면서 티무르 제국을 만들어냈으며 차가타이와 티무르의 후예는 인도로 들어가 아시아 3대 강국을 칭하는 무굴제국을 건국해 아시아 중근세 제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19세기까지 존립하게 되었다. 내가 차가타이를 관심있게 보았고 그를 소환해 낸 것은 현 대한민국의 정세와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보면 차가타이의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를 갖추고 있는 정치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군주인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해 자기 자신에게 법률 <에케 야사>를 작용해 벌을 내렸던 그런 사법계의 용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런 용기가 있는 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잘못했으면 은폐하기 바쁘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릴 원리원칙주의자가 누가 있을까 싶다. 차가타이는 자신의 군주에게 충성했지만 군주가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대통령이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는 원칙주의자와 공명정대한 인물을 찾기 대단히 어렵다. 원래 이 나라 공직자들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들리는 쓴소리는 차단하기에 바쁘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인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차가타이는 법전에 나와 있는 원리 원칙대로 정당한 비판을 하였지만 이 나라의 인물들은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 유치한 비난과 어린 애들이나 할법한 반박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은 차가타이와 같은 원리원칙적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이 필요하다. 내가 차가타이를 현 시대 대한민국에 소환한 것은 정부 정책의 미흡함, 그리고 한국 정치에서 원리원칙적이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않는 모습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유치한 네거티브 현상들을 보며 해외에 나와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한심해 보여서다. 이 나라는 정말 차가타이 같은 인물이 없는걸까?
    • 칼럼
    • Nova Topos
    2024-04-28
  • 소련과 중공의 분열 및 결렬은 6.25 전쟁부터 시작, 이후 더 이상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택동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6.25 전쟁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 뿐이었고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전투를 벌이는 중국군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6.25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조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기에 동북항일전선은 사실상 일본군에게 패배해 궤멸 상태에 놓였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941년 1월, 한 인물이 소련 볼셰비키에 입당원서를 쓰고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며 볼셰비키 주요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약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볼셰비키 부대에 입대가 받아들여진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되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에 등장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 인물이 바로 김일성(金日星)이다. 이 회의에서 만주를 통일 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고 가결했으며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적 최고 군사 영도 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소련 스탈린에게도 통보했다. 소련은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영내에 남쪽과 북쪽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로프스크 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에서 11월초 사이로 만주에서 패배하고 있는 항일부대들을 소련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항일부대들은 만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대조국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일본이 연해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88국제여단으로 불리는 군대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관계, 혁명 운동에 대한 성실성,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그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소련 군 당국이 김일성을 질책하자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궤변을 하여 살아 남았다고 전한다. 당시 제88 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하여 소련 장교의 지도에 따라 행해졌으며, 총검술과 실탄 사격, 전술 진공, 방수 훈련, 행군 연습, 동계 야외 노영 훈련,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멸망하고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이 제88 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련 지도부와 스탈린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소련군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게 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박헌영은 여기에서 밀려나게 된다. 김일성은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 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된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대륙에서의 내전은 종결되었다. 소련도 대조국 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지게 되었고 스탈린은 탱크와 야포, 전투기 등을 지원하여 북한 군대를 무장시켰다. 군 병력도 강력해지니 자신감이 생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71차례나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으며 모스크바 핵이 투하될 것을 염려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은 꺼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1949년 핵실험을 했고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핵무장까지 완료하게 된다. 스탈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김일성은 이번엔 모택동에게 스탈린을 설득해 달라며 부탁하게 되었고 모택동의 설득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것을 판단하게 되자 미군이 합류하기 전, 적화통일 시키면 된다 인식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6.25 전쟁이다. 중국 지도부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 무기나 장비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에게 우대 가격이라고 속이며 제3 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 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도 6.25 당시 적극적이지 못한 것에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소련 측은 대조국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였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라 재원이 부족했으며 사실 그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공 정부 창립 초기에 중국에 해준 원조(2억달러 유무상 원조)도 적지 않았고 한다. 소련도 안정되었기는 하나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더욱이 자국의 최신형 무기들의 자격증까지도 허가해주는 등, 사회주의 혈맹국인 중공에 대해서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소련은 무기만큼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특히 중국 측이 볼 때 소련이 배신했다고 본 제3 세계에 대한 무기거래는 미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제3 세계(특히 인도)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가성비 대비 파격적인 할인을 해줘야 했지만, 무기와 기술 도입원이 소련 밖에 없는 중국에는 정치 논리 대신 경제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6.25에서의 지원 문제를 두고 대립한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에 비해 중공군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게 되었지만 그나마 코민테른을 지휘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이 공산주의 시작이자 리더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생존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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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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