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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첫 데뷔…실용외교 시험대
- [서울=2025.06.07.]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참석…취임 후 첫 다자외교 데뷔 이재명 대통령이 오는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대통령실은 7일 공식 브리핑을 통해 이 사실을 발표하며, 이는 이 대통령의 취임 이후 첫 국제무대 데뷔이자 다자 정상외교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대통령은 G7 회의 참석에 앞서 6일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정상 외교의 서막을 열었다. 통화는 약 20분간 이어졌으며, 두 정상은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뢰를 쌓는 데 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은 통화 중 암살 위협을 겪은 경험을 나누는 장면도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은 G7 회원국은 아니지만, 의장국인 캐나다의 초청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G7 정상회의에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등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참여하며, 주요 글로벌 이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한국은 과거 2020년부터 세 차례 초청받은 바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성사 여부도 주목된다. 특히 다음 달 9일 종료 예정인 미국의 상호관세 유예 조치와 관련해 양국 간 관세 협상도 핵심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재배치, 한일 정상회담 및 한미일 3자 회담 개최 여부 등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야권은 “정상회의가 국가 위상 회복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평가했지만, 여권은 “실질적 외교 성과를 내야 한다”며 경계심을 나타냈다. 특히 일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대중국 친화적 이미지와 북한 인권 문제 대응을 문제 삼으며 “신뢰 회복을 위한 명확한 태도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이번 회의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할 방침이며,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외교 균형도 고려한 메시지 조율이 이뤄질 전망이다. 회의 이후 미국으로 향해 트럼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질 가능성도 열려 있지만, 대통령실은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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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첫 데뷔…실용외교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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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한국 대선 논평서 '중국 개입' 우려…외교적 파장
- [서울=2025.06.05.] 미국 백악관이 지난 3일(현지시간) 한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논평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 개입에 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언급해 외교적 파장을 낳고 있다. 2025년 6월 3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은 한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논평을 내며,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중국의 민주주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한 우려”를 이례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외교적 수사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 발언으로, 한국 국내는 물론 중국과의 외교적 긴장도 유발하고 있다. 기존의 축하 성명과는 달리 백악관은 한국 대선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중국을 직접 거론함으로써, 외교적 중립성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국무부의 마코 루비오 장관은 보다 원론적인 입장을 내면서 ‘한미일 협력 심화’를 강조했으나, 백악관의 ‘중국 견제’ 언급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번 논평의 배경에는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전방위적인 대중 견제 전략이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초기부터 '중국 봉쇄'를 외교·경제의 핵심 기조로 삼았고, 최근에는 동맹국들에게도 '편 가르기'를 요구하는 압박을 강화해 왔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달 31일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중국과의 경제 협력과 미국과의 국방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행태는 허용하지 않겠다”며 '안미경중' 노선을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백악관의 발언은 단순한 논평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미국과의 협력 기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거리를 분명히 하라는 전략적 압박으로 해석된다. 백악관 발언은 동맹국 선거에 대한 이례적 간섭으로 비칠 수 있어 외교적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한국 외교부는 “대선과 별개 사안”이라는 입장을 내며 공식 대응을 자제했으나, 외교채널을 통해 백악관과 비공식 소통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3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이간질을 중단하라”고 미국을 정면 비판했다. 중국의 이 같은 반응은, 한·중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고, 나아가 한국 정부의 외교적 자율성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백악관 내부에 극우 성향의 비선 인사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진영의 핵심 인물인 로라 루머는 대선 직후 SNS에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장악했다”며 노골적인 혐한 발언을 쏟아냈고, 이를 반영하듯 백악관 대변인 브리핑에서도 혼선이 발생했다. 루머는 공식 직책도 없이 백악관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NN, MSNBC, 로이터 등 주요 외신들은 루머의 백악관 출입 및 트럼프 부통령과의 독대 사실을 보도하며 ‘극우 비선 정치’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다뤘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직 숙청 이후, 루머와 같은 인사들의 입김은 더 강해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 외교를 기조로 ‘균형 외교’를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되, 대만 문제나 미중 갈등의 직접적 개입은 피하겠다는 방향이다. 그러나 미국의 명시적 압박과 중국의 반발 사이에서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한미동맹과 대중 협력 사이에서 보다 정교한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내정에 대한 외국의 정치적 해석을 차단할 수 있는 대응 메커니즘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백악관의 발언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라, 한국을 둘러싼 미중 전략 경쟁의 일환임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 외교의 중립성과 자율성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외교정책은 명확한 원칙과 국민적 공감대 위에 설 때만이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새 정부는 이념적 진영논리나 대외 종속이 아닌, 국익 중심의 실용적 외교와 균형감각 있는 대응을 통해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외교의 본질은 ‘줄타기’가 아니라 ‘지렛대’다. 강대국의 압력 속에서도 당당히 우리 길을 갈 수 있는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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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한국 대선 논평서 '중국 개입' 우려…외교적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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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헌’ 판결…무역 질서 판도 흔든다
- [워싱턴=2025.5.28.] 미국 연방국제통상법원(CIT)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시행한 '상호관세 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28일(현지시간) “관세 부과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 권한”이라며, 트럼프의 상호관세 발효를 영구 금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 이른바 ‘해방의 날’ 행사에서 수입국에 비례한 관세 부과 정책을 공식 발표하며, 10%의 보편 관세와 최대 25%의 국가별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뉴욕 소재 기업 5곳이 헌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관세 부과가 과도한 권한 행사라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향후 미·중·한 등 주요 통상 파트너국과의 협상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중국은 “관세 전면 철폐”를 요구했고, 일본은 “판결의 영향 신중히 검토”라는 입장을 냈다. 한국은 당초 7월 8일까지였던 관세 협상 마감 기한이 무의미해지면서 협상 시간을 벌게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항소를 제기했으며, 무역법 232조나 301조 등 우회 경로를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대통령의 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쓰는 행위를 부정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이 향후 행정권 남용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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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헌’ 판결…무역 질서 판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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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없고 비방만 남았다…6·3 대선 TV토론의 민낯
- “비전은 없고 비방만”…6·3 대선 TV토론, ‘정책 실종’에 유권자 피로감 [서울=2025.05.27.] 대통령 선거를 불과 6일 앞둔 27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열린 ‘6·3 대선 후보 정치·외교 분야 TV토론’이 깊은 실망을 남겼다. 이재명(더불어민주당), 김문수(국민의힘), 이준석(개혁신당), 권영국(민주노동당) 후보가 참석한 이날 토론은 유권자들에게는 후보들의 정책과 비전을 확인할 마지막 기회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무분별한 상호 비방과 과거 행적에 대한 공세가 토론 전반을 장악하면서 ‘정책 실종’, ‘최악의 토론’이라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이날 토론은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해 생중계로 전국에 방영됐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토론은 시작부터 날이 섰다. 이재명 후보는 “이번 대선은 내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규정하며 김문수 후보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김문수 후보는 “이재명 후보야말로 괴물 방탄 독재의 상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김 후보는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와 관련해 “대장동 의혹으로 수사받던 측근들이 사망했는데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아수라’라는 영화가 성남시를 상징한다”며 “그의 주변 인물들이 잇달아 죽었다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후보직에서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명 후보는 이에 대해 “검찰의 강압수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전혀 근거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준석 후보는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기 위해 공격 수위를 높였다. “이재명 후보의 정당 운영이 민주적이지 않다”며 헌법 조항까지 인용해 날을 세웠고, 이 후보의 장남에 대한 과거 온라인상 발언 의혹까지 거론했다. 반면 이 후보는 “정당의 민주성 운운할 자격이 없다”며 이준석 후보가 ‘계엄 해제’ 당시 술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의 초점은 정책이 아니었다. 국정 비전, 경제·안보 전략 등은 뒷전이었다. 미국과 중국 간 통상 전쟁, 북핵 문제, 경제 저성장과 사회 양극화 등 국가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 상황에 대한 논의는 부재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과 과거사 들추기에 소모됐다. 이재명 후보는 “내란 심판의 선거”를, 김문수 후보는 “괴물 독재의 시작”이라며 끝까지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날 토론이 유권자에게 실질적인 선택 기준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대내외 위기 대응 전략이나 정책 비전이 전무했다”며, “국정 운영 능력을 가늠할 기회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는 “이번 대선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 조기 대선임에도 불구하고, 후보들은 과거만 파고들었다”고 꼬집었다. 이재명 후보는 김문수 후보에게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관련 입장을 집요하게 따져 물으며 “윤 전 대통령과 단절하라”고 압박했다. 김 후보는 “이미 탈당한 분이다. 지금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유권자들의 의혹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준석 후보는 “김문수도 이재명도 문제”라며 “이재명의 대항마는 김문수가 아니라 나”라는 메시지를 시청자에게 각인시키려 애썼다. 개헌 논의와 관련해 구체적인 법률적 근거까지 들어 이 후보를 몰아붙였고, SNS상에서는 ‘거북섬’, ‘부정선거론’ 등 이준석 후보의 이슈 주도력이 부각됐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이재명 후보의 논리를 방어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부 시청자들은 “이재명 후보의 변호인을 자처한 듯한 태도”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날 TV토론은 후보자들의 정책 역량이나 국가 운영 능력을 비교하기보다는, 정쟁적 언어와 상호 비난이 주를 이룬 진흙탕이었다. 각 진영은 ‘계엄 심판’, ‘방탄 독재’, ‘괴물 정치’라는 자극적 프레임을 동원해 지지층 결집에만 몰두했다. 유권자들에게 남은 것은 피로감과 정치 혐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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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없고 비방만 남았다…6·3 대선 TV토론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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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 [서울=2025.05.2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 복귀 이후,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2만8500명 중 4500명을 괌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 내 미군 병력의 약 16%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지시간 22일 복수의 국방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구상은 아직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는 않았으며, 북한에 대한 정책 옵션의 하나로 비공식 검토가 진행 중인 단계다. 국방부는 관련 질의에 “발표할 내용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피트 응우옌 대변인도 병력 이전에 대한 언급 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이번 주한미군 재배치 검토는 단순한 병력 이동 이상의 전략적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 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실제로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전략 축은 중국군의 대만 침공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군사전문가들은 주한미군 철수 시 한반도 안보 공백이 우려되며,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 미국의 지역 동맹국들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지난달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새뮤얼 퍼파로 인태사령관은 병력 감축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WSJ는 “만일 주한미군 병력을 괌 등 인태 내 타지역에 계속 주둔시키는 방식이라면 이 같은 우려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괌은 중국군의 접근이 어렵고 전략적 위치상 핵심 병력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방안은 국방전략(NDS) 수립 과정에서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2일 NDS 수립 지시를 내리며, 중국 억제와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주요 지침으로 제시했다. 주한미군의 재배치 여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국의 군사지원 정책 변화 등과 맞물려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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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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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흉기난동 10시간 공포…중국동포 차철남 2명 살해 후 검거
- [시흥=2025.05.19.]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서 19일 오전, 시민 2명을 살해하고 2명을 흉기로 찌른 사건이 발생했다. 용의자인 중국 국적의 57세 남성 차철남은 사건 발생 약 10시간 만인 오후 7시 24분경 시화호 인근에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은 이날 오전 9시 34분께 시작됐다. 차철남은 정왕동의 한 편의점에서 60대 여성 점주 A씨를 흉기로 찌른 후 도주했다. A씨는 얼굴과 복부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오후 1시 21분경, 정왕동 체육공원 인근에서 70대 남성 B씨가 복부에 자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B씨는 차철남이 거주하던 주택의 임대인이며, 평소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차철남의 주거지와 인근 건물에서 각각 시신 1구씩, 총 2구의 시신을 추가로 발견했다. 숨진 이들은 중국 국적의 50대 형제로, 차철남과는 지인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차철남은 범행 후 자전거를 타고 시화호 인근으로 이동해 도주 중이었으며, 경찰은 CCTV와 탐문을 통해 그의 동선을 추적해 검거에 성공했다. 체포 당시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체포됐으며, 흉기는 소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체포 후 경찰서로 압송된 차철남은 범행 동기에 대해 “경제적 거래가 있었다. 돈을 꿨는데 12년 동안 갚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차철남이 모든 혐의를 인정한 만큼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며, 정확한 범행 동기와 경위를 조사 중이다. 시는 사건 발생 직후 오후 4시 40분경 시민들에게 재난문자를 발송해 외출 자제와 안전 주의를 당부했으며, 검거 직후에는 ‘안심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안내 문자를 추가 발송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하루 종일 불안에 떨었으며,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아이 학원이 끝나는데 불안하다”,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글들이 잇따랐다. 경찰은 “단순 묻지마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구체적인 사망 원인과 경위를 국과수 부검을 통해 밝힐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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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흉기난동 10시간 공포…중국동포 차철남 2명 살해 후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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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임신 협박’ 사건…여성과 공범 구속영장 신청
- [서울=2025.05.16.] 손흥민 ‘임신 협박’ 피해…3억 갈취·추가 요구한 공갈 일당 구속영장 신청 2025년 5월 15일, 서울 강남경찰서는 축구 국가대표이자 토트넘 홋스퍼 주장 손흥민(33) 선수를 상대로 허위 임신을 주장하며 금품을 요구한 20대 여성 A씨와 그녀의 지인인 40대 남성 B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A씨는 공갈 혐의, B씨는 공갈미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기 행위를 넘어, 유명인의 사생활을 악용해 거액을 갈취하고 추가로 협박까지 시도한 범죄로, 사회적 충격이 크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6월 손흥민과의 사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아이를 임신했다”며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전달했고, 해당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총 3억 원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결별한 A씨는 자신이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B씨와 공모해, 올해 3월 손흥민 측에 6,500만 원을 추가로 요구하며 언론 폭로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협박을 이어갔다. 손흥민의 소속사 ‘손앤풋볼리미티드’는 “이번 사건은 명백한 공갈이며, 선수는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어떠한 선처 없이 강력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손흥민은 수개월 간 협박에 시달렸고, 최근에서야 매니저를 통해 해당 사실을 보고받은 후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경찰은 지난 14일 두 피의자를 체포하고, 주거지를 압수수색해 휴대전화 및 관련 증거자료를 확보한 상태다. 이 사건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해외 언론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 BBC는 “손흥민이 허위 임신을 주장한 여성에게 협박을 당했으며, 한국 경찰이 형사고발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전하며, “서울 경찰이 두 명의 용의자를 각각 공갈 및 공갈미수 혐의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더 가디언, 데일리 메일, 미러 등 유력 매체들도 관련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 언론들도 “유명인의 사생활을 악용한 충격적 사건”이라며 주요 뉴스로 보도 중이다. 수사당국은 A씨가 제시한 초음파 사진의 진위 여부와 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손흥민 측의 진술과 A씨가 주장하는 임신 시점 사이에 명백한 불일치가 있다”며 “사진의 출처와 조작 정황, 공모관계 등을 집중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 간의 갈등이 아닌 조직적·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공인인 유명 인사가 개인적 관계를 악용당해 심각한 사생활 침해와 경제적 손해를 입은 사례로, 사회 전반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악의적인 공갈 범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손흥민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로 전해졌으며, 오는 5월 22일 예정된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토트넘의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손흥민은 경기 출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팀 전체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공범자 간의 통신 내용과 금융 거래 기록 등을 분석하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은 이번 주 후반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스포츠 스타의 피해 사례를 넘어, 유명인을 겨냥한 사생활 협박 범죄의 심각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이에 따라 공인 보호와 관련한 제도적 보완과 함께, 디지털 증거에 대한 법적 대응 방안 강화 필요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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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임신 협박’ 사건…여성과 공범 구속영장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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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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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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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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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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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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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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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스마일파의 분파, 카르마트파에 대한 이야기
- 카르마트 파는 이슬람의 이스마일 파의 한 분파로 899년경, 카르마트 파의 주류는 후의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였는데, 사와드(Sawad) 같은 종파의 책임자 함단 카르마트(Hamdan Qarmart)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했다. 이 때의 그의 행동을 지지한 사람들을 카르마트 파라고 불렀다. 또한 바흐레인(Bahrein), 예멘, 레이(Rei) 등, 이 정파의 조직도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카르마트 파라고 불렸다. 이라크 남부, 사와드의 교단들은 시리아에 진출해서 10세기 초에 크게 활약했는데, 압바스 왕조 군대의 토벌을 받아 907년에는 사와드, 이어서 시리아의 카르마트 파의 세력들은 일거에 쇠퇴했다. 정치적으로 가장 활발하였던 것은 바흐레인의 교단으로 무미니야(Muminiya)라는 수도를 축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사와드에도 간혹 무력으로 침공하고, 또한 930년에는 메카를 습격하여 카바의 검은 돌을 바흐레인에 가지고 돌아왔다. 바흐레인의 교단은 11세기 후반 무렵까지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결국 소멸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계파의 영향은 아가 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8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7이맘파라고도 한다. 제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제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로 보인다. 이것과는 달리 12이맘파는 자파르 알 사디크(Zafar Al Sadiq)의 차남 무사 알 카딤(Musa al-Kadhim)을 제7대 이맘으로 세웠다. 장남인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Zafar)는 자파르 알 사디크보다 먼저 사망했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수니파 이슬람에 환생이나 윤회에 관련된 교리는 없지만 이스마일 파에는 전생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교리가 있다. 이스마일 파는 전통적인 시아파 교리에서의 마흐디(구세주) 관련 교리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며 이스마일 파 이맘이야말로 진정한 이맘이라고 선언했다. 카르마트의 사상은 기존의 이슬람 사상과는 크게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샤리아의 폐지를 주장했고 샤리아 법 제도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의 부활도 부정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또한 부정하는 것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시아파의 분파로 분류되었지만, 사이드 알 마으루프(Said Al Mhrup, 마흐디)에게서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한 이후 시아파의 이맘조차 거부하고 독자적인 진리로의 믿음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주 이질적으로 나타난다. 카라미타의 군대는 일반 무슬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으며, 많은 순례객들과 낙타 대상도 공격하였다. 카르마트 파가 930년 메카를 습격할 당시, 난폭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순례의 의무를 폐지시키고, 이슬람의 순례, 단식, 예배 등이 내적 의미만을 지니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일 뿐이라는 이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카르마트 파는 강경한 채식주의를 고수하여 바클리야(Al-Baqliyyah), 채소 상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카르마트 파의 조직은 마치 공산당 조직과 흡사했으며, 사회주의의 원시적 형태로 언급되기도 한다. 중세 파티마 왕조는 이맘의 승계와 역사의 종말론적 순환개념을 재 정의하여 자신들이 제6대 이맘의 주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구세주의 등장과 역사의 종말은 먼 미래로 미루어졌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해당 이론으로 인해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여러 개념들이 이스마일파의 사유방식에 혼합되었다. 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카르마트 종파의 신자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발티스탄(Gilgit Baltistan)과 아자드 카슈미르(Azad Qashmir), 인도령 카슈미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지방의 일부 종파 신도들이 거주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 극소수가 존재하고 있다.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리 파의 제44대 이맘 하산 알리 샤(Ḥassan ʻAlī Shāh, 1800~1881)가 페르시아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북인도로 이동했으며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는 1971년생 아가 칸 5세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가 칸은 공식적인 영토는 없지만 14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와 1,500만 명 이상의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한 국가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 및 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 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강하며,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아가 칸 4세는 극단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스마일 파를 세속, 온건 성향으로 개혁하는 인물로 이스마일 파 소수민족들이 사는 산간 일대에 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지어주고 투자해주는 정책을 통해 이스마일 파 신도 전반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악명 높은 극단파 암살단의 후예가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세속주의 온건파로 바뀌었다. 아가 칸 가문이 유럽 대륙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지가 오래되었고 아가 칸 4세만 해도 이미 혈통의 1/2이 유럽인이며 영국에서 영국인으로 성장한 데다 아가 칸과 아들들도 유럽 및 미국인과 결혼했으니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아무래도 서구적 가치관에 익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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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스마일파의 분파, 카르마트파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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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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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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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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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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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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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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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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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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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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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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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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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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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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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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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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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스마일파의 분파, 카르마트파에 대한 이야기
- 카르마트 파는 이슬람의 이스마일 파의 한 분파로 899년경, 카르마트 파의 주류는 후의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였는데, 사와드(Sawad) 같은 종파의 책임자 함단 카르마트(Hamdan Qarmart)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했다. 이 때의 그의 행동을 지지한 사람들을 카르마트 파라고 불렀다. 또한 바흐레인(Bahrein), 예멘, 레이(Rei) 등, 이 정파의 조직도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카르마트 파라고 불렸다. 이라크 남부, 사와드의 교단들은 시리아에 진출해서 10세기 초에 크게 활약했는데, 압바스 왕조 군대의 토벌을 받아 907년에는 사와드, 이어서 시리아의 카르마트 파의 세력들은 일거에 쇠퇴했다. 정치적으로 가장 활발하였던 것은 바흐레인의 교단으로 무미니야(Muminiya)라는 수도를 축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사와드에도 간혹 무력으로 침공하고, 또한 930년에는 메카를 습격하여 카바의 검은 돌을 바흐레인에 가지고 돌아왔다. 바흐레인의 교단은 11세기 후반 무렵까지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결국 소멸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계파의 영향은 아가 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8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7이맘파라고도 한다. 제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제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로 보인다. 이것과는 달리 12이맘파는 자파르 알 사디크(Zafar Al Sadiq)의 차남 무사 알 카딤(Musa al-Kadhim)을 제7대 이맘으로 세웠다. 장남인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Zafar)는 자파르 알 사디크보다 먼저 사망했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수니파 이슬람에 환생이나 윤회에 관련된 교리는 없지만 이스마일 파에는 전생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교리가 있다. 이스마일 파는 전통적인 시아파 교리에서의 마흐디(구세주) 관련 교리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며 이스마일 파 이맘이야말로 진정한 이맘이라고 선언했다. 카르마트의 사상은 기존의 이슬람 사상과는 크게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샤리아의 폐지를 주장했고 샤리아 법 제도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의 부활도 부정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또한 부정하는 것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시아파의 분파로 분류되었지만, 사이드 알 마으루프(Said Al Mhrup, 마흐디)에게서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한 이후 시아파의 이맘조차 거부하고 독자적인 진리로의 믿음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주 이질적으로 나타난다. 카라미타의 군대는 일반 무슬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으며, 많은 순례객들과 낙타 대상도 공격하였다. 카르마트 파가 930년 메카를 습격할 당시, 난폭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순례의 의무를 폐지시키고, 이슬람의 순례, 단식, 예배 등이 내적 의미만을 지니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일 뿐이라는 이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카르마트 파는 강경한 채식주의를 고수하여 바클리야(Al-Baqliyyah), 채소 상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카르마트 파의 조직은 마치 공산당 조직과 흡사했으며, 사회주의의 원시적 형태로 언급되기도 한다. 중세 파티마 왕조는 이맘의 승계와 역사의 종말론적 순환개념을 재 정의하여 자신들이 제6대 이맘의 주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구세주의 등장과 역사의 종말은 먼 미래로 미루어졌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해당 이론으로 인해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여러 개념들이 이스마일파의 사유방식에 혼합되었다. 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카르마트 종파의 신자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발티스탄(Gilgit Baltistan)과 아자드 카슈미르(Azad Qashmir), 인도령 카슈미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지방의 일부 종파 신도들이 거주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 극소수가 존재하고 있다.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리 파의 제44대 이맘 하산 알리 샤(Ḥassan ʻAlī Shāh, 1800~1881)가 페르시아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북인도로 이동했으며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는 1971년생 아가 칸 5세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가 칸은 공식적인 영토는 없지만 14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와 1,500만 명 이상의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한 국가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 및 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 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강하며,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아가 칸 4세는 극단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스마일 파를 세속, 온건 성향으로 개혁하는 인물로 이스마일 파 소수민족들이 사는 산간 일대에 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지어주고 투자해주는 정책을 통해 이스마일 파 신도 전반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악명 높은 극단파 암살단의 후예가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세속주의 온건파로 바뀌었다. 아가 칸 가문이 유럽 대륙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지가 오래되었고 아가 칸 4세만 해도 이미 혈통의 1/2이 유럽인이며 영국에서 영국인으로 성장한 데다 아가 칸과 아들들도 유럽 및 미국인과 결혼했으니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아무래도 서구적 가치관에 익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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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이스마일파의 분파, 카르마트파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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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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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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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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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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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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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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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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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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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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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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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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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