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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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령 아메리카(Русская Америка, Russian America)는 1799년부터 186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알래스카를 말한다. 1812년부터 1841년까지 점유했던 캘리포니아의 로스 요새(крепость Росс) 정착지도 포함된다. 미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맺어진 알래스카 조약에 의해 알래스카는 미국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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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하와이 엘리자베스 포트, 사진출처 : MAKANA Charters and Tour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의 아메리카 진출은 가속화되어 1812년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에는 러시아-미국 회사의 고문인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쿠스코프가 러시아군이 주둔할 기지인 로스 요새(Fort Ross)를 건설했다. 로스 요새는 러시아(Russia)의 이름을 축소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러시아의 영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로스 요새는 주변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식량을 북쪽의 알래스카에 설치된 러시아 식민지에 공급하면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와의 무역을 수행할 거점으로 설립되었다. 


로스 요새가 담당하는 전체 면적은 대략 29㎞ 정도였으며, 주위의 강가와 계곡에서 수달을 잡아 모피를 얻는 무역 사업이 주된 수익원이었다. 로스 요새에서 생산하는 모피들은 대부분 육로로 미국이나 해상을 통해 태평양을 건너 청나라로 수출되었다. 기후가 추운데다 황량한 알래스카에 비하면 로스 요새가 들어선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비교적 따뜻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했으며, 로스 요새의 주변 토양은 상당히 비옥했다. 


그래서 한동안 로스 요새에서는 농사가 잘 되어, 알래스카로 식량을 지속적으로 수송선을 통해 실어 날랐고 정착한 러시아 인들도 인디언들과 큰 마찰 없이 교류하며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다고 한다. 로스 요새가 건설된 이후 러시아 인들이 정착하자, 알류트 족 같은 북태평양의 원주민들은 물론 핀란드 인과 우크라이나 인, 에스토니아 인, 그리고 많은 유럽의 외지인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고 거주했으며 그들의 정착촌들이 건설되어 캘리포니아 내륙 지역으로도 확대해 나갔다.


러시아령 캘리포니아의 초대 총독인 바라노프도 새로운 땅을 찾는 탐험에 열성이어서 1808년 배를 타고 알래스카 남쪽을 항해하다가 하와이 제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와이 섬의 군주인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 제도는 여러 개의 섬들을 각각 다스리고 있던 부족장들끼리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바로 카메하메하 1세였다. 후일 카메하메하 1세는 다른 부족장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와이 제도 전체를 통일하여 하와이 왕국을 세웠던 하와이 원주민들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카메하메하 1세와 만난 바라노프는 그에게 러시아령 알래스카와 하와이 사이의 교역을 제안했다. 러시아령 알래스카는 하와이로 모피와 가죽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하와이는 러시아령 알래스카로 돼지고기와 닭고기 및 바나나와 고구마 등의 식량들을 수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카메하메하 1세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고, 이렇게 해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식민지를 설치한데 이어, 남쪽의 하와이와도 무역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미국 회사의 내부에서는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 족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처럼, 하와이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알래스카 회사의 경영진들은 그런 여론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했고 은연 중에 성공한다면 모든 영광을 독차지 하지만 실패한다면 발을 뺄 생각까지 염두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인 1815년 1월 30일, 베링 해협에서 약 10만 루블 어치의 모피를 싣고 가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소유의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하와이 제도 서쪽의 카우아이 섬의 해안에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원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들이 싣고 가던 물품들은 모두 카우아이 섬의 지배자인 카우무알리(Kaumualii)에게 압수당했다. 카우무알리는 자신이 카우아이 섬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카우아이 섬의 해안에 밀려 온 물건들은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나마 선원들은 러시아령 알래스카의 수도인 시트카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기에, 서둘러 시트카로 돌아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귀중한 상품인 모피들이 카우아이 섬의 족장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서는 사태의 해결 방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레자노프가 죽은 이후, 회사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던 바라노프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주장했고, 다른 직원들도 그 제안에 동의했다. 


이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가진 군사력은 몇 군데 거점과 무역로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먼 곳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군사력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바라노프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직원이자 독일인 의사인 게오르그 안톤 스카페르(Georg Anton Schaffer: 1779~1836년)를 카우아이 섬으로 파견하여, 그곳의 지배자인 카우무알리와 만나서 그가 몰수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소유의 모피들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1815년 10월, 하와이로 떠난 스카페르는 카메하메하 1세와 그의 왕비가 중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스카페르는 우선 곧바로 카우아이 섬으로 가지 않고, 먼저 하와이 섬으로 향하여 카메하메하 1세와 그의 왕비를 만나서 그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러자 카메하메하 1세는 스카페르에게 그가 머물 건물과 병원을 지어주었고, 그는 하와이 섬에서 약 7개월 동안 머무르며 다른 주민들에게도 의료 봉사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카메하메하 1세는 하와이 제도의 최강자였고, 카우무알리는 그에게 복종하는 신하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스카페르는 카우무알리보다 먼저 카메하메하 1세를 만나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도움을 얻으려는 생각이었다. 만약에 스카페르가 카메하메하 1세가 아닌 카우무알리를 먼저 만나게 되면 카메하메하 1세가 자신의 권위를 무시당했다고 여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와 스카페르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행한 결정이었다. 


해가 바뀐 1816년 5월 8일, 하와이 주민들에 대한 의료 봉사를 모두 마친 스카페르는 카우아이 섬에 도착하여 마침내 카우무알리를 만났다. 스카페르와의 회담에서 카우무알리는 자신이 몰수한 러시아-미국 회사 소유의 모피들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과 카우아이 섬이 러시아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러시아 제국에 복종하고 싶다는 내용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카우무알리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스카페르는 찬성했고, 자신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대신하여 카우무알리를 러시아 제국의 신하로 인정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카우아이 섬에 러시아 군대의 요새를 지었으며 러시아 군사들이 주둔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카우무알리가 돌려준 모피들을 배에 싣고 시트카로 돌아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일개 직원이 전체 회사를 대신해서 외부 집단과 멋대로 조약을 맺은 것은 엄밀히 말해 월권행위였다. 


그러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서는 스카페르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전해준 조약의 내용대로 카우아이 섬에 주둔할 러시아 군대와 무기 및 장비들을 보내주었다. 회사의 최고 경영진인 바라노프는 아마도 카우아이 섬의 지배자가 자발적으로 러시아 제국에 복속하겠다고 먼저 제안했으니 명분상 문제될 것이 없으며,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이어 하와이에까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스카페르가 가져온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카우무알리와 스카페르의 회담이 있은 지 다음 해인 1817년 스카페르는 약속대로 300명의 러시아 군사들과 그들이 사용할 군수 물자들을 가지고 카우아이 섬을 방문했다. 그리고 카우아이 섬의 남동쪽인 와이메아(Waimea) 계곡과 강 근처에 세 개의 러시아 요새를 건설했다. 요새들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황후인 엘리자베스 및 러시아 군대의 원수인 바클레이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르 요새(Fort Alexander)와 엘리자베스 요새(Fort Elizabeth)와 바클레이 요새(Fort Barclay)라고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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