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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국에 파병된 터키군, 사진출처 : Welotekno, Kore’ye Giden Türk Ordusunun Beraberinde Getirdiği Göğsümüzü Kabartan Sırlar, 할리 하산 야부즈(Halil Hasan Yavuz) 기자

 

2023년 터키-시리아 지진으로 인해 우리의 구호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이어지고 있다. 터키하고 한국 은 형제 국가이면서, 혈맹이다. 그리고 터키 앙카라에 가면 한국 사람은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터키군 6.25 참전 추모탑이다. 이 추모탑은 앙카라 중앙역 근처 Kore parkı (한국 공원) 안에 있다. 6.25 혈맹인 터키의 6.25 전쟁 참전 비화 및 터키의 나토 가입 배경에 대해서 언급할까 한다.

 

터키의 멘데레스는 총리에 집권한 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이뇌뉘의 공화인민당은 아직도 강력했고 그를 견제했기에 그는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정치적 묘수가 필요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동조하여 파병할 것인지에 대해 첨예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뇌뉘는 터키가 아직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파병할 여건이 되지 않으며 굳이 머나먼 동방의 끝에 가서 터키의 젊은 장병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터키나 UN 창립 회원국이면서 국제 평화를 실천할 권리가 있다며 참던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터키의 민심은 참전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앙카라에서는 참전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와 멘데레스에게 미국 대사인 존 호버트가 찾아와 터키를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주겠다며 설득한다. 


이 6.25 전쟁으로 인해 터키는 나토에 가입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멘데레스는 미국의 약속을 받자마자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했고 후속부대로 5천여 명을 부산에 입항시켰다. 당시 터키는 소련과 적국이었고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공산당을 축출했기 때문도 있지만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소련에게 카프카스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당시 터키 대국민 정서는 소련이 원수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UN 측의 기록에 의하면 15,000여명이 지속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우 아마 민사부분을 제외한 순수한 군사 부문의 인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3년 간의 전쟁 기간 동안 손실된 병력 보충을 포함해 총 3번 부대 임무 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같이 등장한 군대가 총 3만 정도 되었고 그 규모는 미국, 영국 다음 세 번째였다. 그 중 터키군은 최전선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이 파병되어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확인해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터키군은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966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터키군은 적진으로 돌격해서 북괴군이나 중공군을 상대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다. 과연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의 후예다운 강한 군기와 두려움 없는 돌격은 오히려 북괴군과 중공군이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총포가 날리는데도 무조건 돌격은 어쩌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이런 돌격전은 참전국 중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들이 나온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군부와 이뇌뉘를 비롯한 케말주의자, 야당인 공화인민당 인사들은 전쟁에 귀한 병력을 파견해 쓸데없이 피를 흘리게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멘데레스는 이 한 마디로 불만을 일축했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세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전후 미국은 약속대로 터키가 6.25 전쟁에 적극 참여해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줬다. 멘데레스는 그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이 자본금으로 수십년 동안 외면 받아온 터키 농촌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으며 비로소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약화시키고 절대적인 권력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쿠르드가 우리를 도왔다드니, 병력 대부분이 쿠르드였다드니 하는 근거없는 낭설이 몇 년 사이에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쿠르드족을 일소시키고 난 다음에도 병력이 2만 가까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병력으로 이미 앙카라를 점령하고도 남았을 병력이다. 육박전이나 백병전에 능한 2만의 병력이 육군 중에서 어떤 수준을 자랑하는지 군대 갔다 온 우리 남자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그리고 쿠르드의 원수가 터키인데 지휘관 대부분이 터키인이다면 지휘체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겠는가? 그리고 터키 2대 총리 이스메트 이뇌니는 쿠르드계 출신으로 6.25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다.


만약에 어떤 조건이 있었다면, 수많은 쿠르드 청년들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대단한 조건이 터키 정부와 쿠르드 사이에 있었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 근거를 대야 한다. 그런데 근거도 없이 참전해봤자 일개 소수에 불과한 몇몇 참전 군인의 증언만 듣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중공이나 북한에 세뇌가 된 자들이 분명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왜곡된 주장을 싣는다는 것은 혈맹인 터키를 증오하는 좌익분자들이 작은 소소한 부분을 확대 재생산하여 선전, 선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터키군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1973년 터키 공화국 50주년 되던 해 우리 정부가 이곳 한국 공원에 참전 터키군 추모탑을 만들었고 나도 앙카라에 방문할 때 마다 헌화하고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함을 잊지 않고 있다.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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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6.25 전쟁 당시 참전하게 된 계기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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