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원주민들의 잔혹사 "우서 학살 사건"
무지개 다리의 전사들, 고산족(高山族)의 항일운동
때는 2011년,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등 메이저 영화제 등에서 한 영화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영화 이름은 "시디크 발레(Seediq Bale)", 이 영화는 2011년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 자본 합작으로 장장 러닝타임 276분의 시간동안 우서 사건의 비극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제48회 타이완 금마장 영화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워리어스 레인보우"라는 이름으로 1, 2편으로 나누어 국내에도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우서 사건은 어떤 비극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일본의 이러한 대만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의 실상은 식민지배의 공고화와 더불어 또 다른 차별의 연속이었다. 일본인들은 고산 지대에 사는 대만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여겼다. 원주민들 삶의 터전인 숲의 나무와 천연자원들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대만 원주민이 사는 고산 지역의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내 본토로 실어 날랐으며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서 대만 원주민들이 겪은 일제강점시기는 유화책이라는 일본 정부의 기조 정책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자신들의 산과 계곡, 사냥터를 온전히 지키고 그곳에 들어온 침입자의 목을 베어야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조상들의 영혼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대만 고산족들은 그러한 전설로 인해 "무지개 다리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당시 14개의 종족으로 분류되는 대만 내 원주민들 중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알려진 시디크 족은 일본인들의 침입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시디크 족 마을 중 마흐푸 마을의 족장이자 침입자의 목을 가장 많이 베어 대만의 최고의 전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모우나 루도는 부족과 함께 산 위에서 숲과 구름과 안개, 비를 이용하여 숲에 몸을 숨기는 게릴라 전을 감행해 아래 계곡을 따라 침입하는 일본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적의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려는 시디크 족의 용맹성은 일본이 동원한 근현대적 무기로 인해 패배가 이어지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터전들도 일본군에 내줘야 했다. 모우나 루도 족장은 본래부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그의 아끼는 여동생이 일본 경찰관의 부인이 되었으나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게 되면서 자식들과 함께 버려졌던 일이 생기자 모우다 루도는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 10월 9일 모우다 루도는 루산 지역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이 일대를 순찰 돌고 있었던 일본 경관 요시무라가 모나 루다오의 아들 다호 모나의 결혼식에 들려 참석하게 된다. 다호 모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라 요시무라에게 받아 마시기를 권유했으나 요시무라는 짐승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으며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성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호 모나가 계속 잔을 받아 마시기를 권하자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후려쳤고, 이에 결혼식장에서 큰 싸움이 발생해 요시무라는 부상당하게 된다. 그 다음 날 모우다 루도는 일본 측에 사과하기 위해 요시무라에게 포도주를 다시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하게 된다.
10월 27일 우서소학교에는 때마침 육상 경기가 있어 일본인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는데, 모우다 루도는 자신의 아들인 다호 모나가 심각한 폭행을 당했던 당시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학교를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중국 본성인들을 살해했다.
모우나 루도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성냥의 화약 부분을 벗겨 수십 년간 모았다. 시디크 족에 대한 멸시와 폭력, 노동 착취, 차별을 일삼던 일본에 언젠가는 성냥을 모아 화약을 만들었다. 한편 대만총독부는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시디크 족이 거주하는 산간 지대에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항복한 일부 시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시디크 족에 대해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행위를 임시적으로 허용하기도 하였다. 시디크 족도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일본군에 저항했다. 일본이 동원한 군대와 기관총 대포 등 중화기에 좌절하여 시디크 족의 1,200명의 전사 중 644명이 살해되었다.
3주 동안에 이어진 봉기를 벌인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죽기 싫었던 원주민들은 가족 모두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숲 속 큰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항전을 계획할 때 이미 부족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던 모우나 루도도 자결했다. 일본군과 싸웠던 시디크 족은 우서 사건이 끝난 이후 1,600여 명 중 겨우 298명만이 살아 남았다.
1931년 들어 우서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시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4월 25일 일본 측에 넘어간 원주민들에 의해 시디크 족 생존자들이 습격 당해 216명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종차별적 발언에 의해 벌어진 일본군의 잔인한 우서 학살 사건은 이후, 국민당 정권이 대만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통치보다 더 무자비한 학살로도 이어지며 거의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
이런 국민당의 강압적 통치는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은 물론이고 원주민들까지 반대급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그리워했다. 적어도 일본의 지배자들은 유화책을 쓰며 대만인들을 달래는 정책을 행했기 때문에 유화책 없이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국민당보다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는 말이 나오게 되면서 정치, 사회적인 차별 등 일본 식민정치의 폐해들이 잊혀질 정도였다. 2.28 학살사건 이후, 국민당 정권은 나라의 안정을 이유로 본성인과 원주민 수만 명을 학살했다. 결국 국민당 정권으로 잊혀진 우서 사건이 2011년 "시디크 발레(Seediq Bale)" 라는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