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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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적, 르네상스적인 기반 속에는 나침반의 실용화와 지리상의 여러 발견들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점령당하고 난 이후에 오스만투르크의 세도를 피해 인도와 교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하는 직접적인 필요성이 야기되었고, 긴 항로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재정상의 자금도 함께 축적되어지는 동시에, 인문주의, 르네상스적인 새로운 정신 풍토가 조성되어 지리상의 큰 발견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도래 했다. 용감한 항해사의 노력은 종합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영국의 물자 보급의 도움을 입어 두 갈래의 방향으로 항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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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Genoa vs. Venice: A Historic and Layered Rivalry, 사진출처 : THE COLLECTOR 메디슨 위플(Madison Whipple) 기자 Sep 22, 2023 기사

 

첫째, 아프리카를 주항하면서 인도 영해에 이르는 항로와 둘째,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에 닿는 항로였다. 그리고 훨씬 뒤에 또 다른 방향, 이를테면 지구 전체를 주항하는 항로가 추가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주항하는 탐색 항해는 포르투갈 출신인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o Diaz)가 1486년에 시도하여 현재의 희망봉에 상륙할 수 있었고, 1497∼1498년에 스페인 출신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포르투갈의 원조를 받아 모든 계획을 실현시키면서 인도의 서쪽 연해인 캘리컷(Calicut)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미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에 이르는 항로 역시 개척되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고, 스페인 정부의 원조를 얻어 1492년, 1493∼1495년, 1498년, 1502∼150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항해를 시도했다. 비록 아시아 영해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새로운 대륙을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한 것은 콜럼버스의 세 번째 항해 시 재정을 부담했던 피렌체 출신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아메리카의 광대한 대륙 발견으로 유럽의 지배 계급들은 새로운 행운과 번영을 멀리서 바라보며 낡은 대륙의 경제적, 사회적인 기존 상태를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투르크의 선박과 실세에 눌려 동방 제국과의 기존의 무역 항로는 어렵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의 해상 무역 선박은 점차적으로 투르크의 상선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지중해의 해상 항로는 대서양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적 구조에 대한 균형에 심각한 변화가 가해진다.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수공업, 특히 견직물과 모직물은 유럽의 상거래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1500년에 들어서면서 약간의 성숙기의 변동은 있었지만 대체로 심각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그 당시 경제적 생활의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던 농업 역시 시대에 후진적인 경작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독일, 폴란드에서는 농촌의 경제적, 사회적 조직을 대토지 소유자인 영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교역과 그 창의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던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무역 활동이 정체되든지 독일 야콥 푸거(Jakob Fugger)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해 가는 형편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적, 상업적 활동 역시 독일 금융계가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제와 제약도 일반적으로 유동적인 자본의 부족으로 느슨해졌다. 이는 무역 확대로 얻어진 이윤의 대부분이 토지에 투입되고, 정치 생활의 불확실로 이탈리아를 통제하기 위한 주둔군의 부정적인 결과는 그와 같은 사업에서 철수하는 반면, 금전을 저축하는 것에 방향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폐 유통의 침체와 중단은 화폐 단위의 현저한 절상을 야기 시켰다. 전제 군주들이 정치 · 군사적 유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던 시대이니만큼 막대한 금전을 조달할 수 있는 소수의 금융업자와 동맹을 맺는 것이 절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상호간에 체결되는 깊은 유대가 그들의 재정적인 최후의 지주였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는 제노바 출신이나 베네치아 출신의 이탈리아 인들도 활약했고, 이탈리아 금융계의 자본이나 전문 지식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전후로 하여 여러 기업들에 적극적으로 가세함으로써 많은 수익을 이탈리아에 주었던 사실은 비교적 정확하다 볼 수 있다. 실상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지난 과거의 번영을 이야기해 주는 화려한 궁전의 많은 부분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것보다는 오히려 16~17세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지리상의 대륙 발견이 추진된 하나의 계기는 오스만투르크의 근동 제압으로 인해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 근동 지방의 상업 기지를 약탈당하고, 무역상의 독점적인 특권을 탈취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상 무역의 독점권 상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중해 무역의 진출을 허용했던 반면, 피사와 리보르노의 항구를 장악한 피렌체(토스카나 공국)에게 해상 무역의 규모를 확장해 갈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리보르노 항은 영국 선박의 기지로 이용되기도 했고, 그 선주들은 포르투갈의 여러 항구와 통상 관계를 유지하면서 1600년대의 동서 중계 무역에 많은 번영을 누리게 했다. 제노바는 15세기 말경 다시금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는 것 이 외에 약간의 식민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여, 오스만투르크에 연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오스만투르크의 보호 하에 동방 무역의 안전을 보장받아 동방 무역의 번창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경유하는 베네치아 중계 무역으로 종래의 향료 무역이 되살아나 베네치아는 향료의 거래량으로는 포르투갈을 능가할 수가 있었고, 서남 독일의 광산업의 번창으로 독일-이탈리아 상호간의 통상은 16세기에 크게 확장되었다.


제노바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서 근동 상업에 크게 세력을 유지해 오면서 모직물 공업을 비롯한 견직물 공업과 유리 공업 등이 번창하는 수출 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제노바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북 ·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17세기 초에 와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 지대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자본은 유럽의 국제 금융 시장으로 흘러가 이탈리아의 금융 활동은 16세기 후반 국내 대도시에 공립 은행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또, 16세기 중엽 제노바의 영향을 받은 인근 도시인 밀라노의 상공업의 번영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심적 주요 도시와 정기적으로 결속하는 공립 우편 제도를 발달시켰다. 16세기와 비교하여 17~18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정치, 경제, 사회생활 전반에 현저한 침체 현상이 일어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 침체의 근본적인 요인으로서는 근대적 번영의 기반이 될 산업 자본가 계급의 성장이 처음부터 단절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북 · 중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전진 지역에서 중세 도시의 국가적 정치 · 경제 체제가 너무나 강하게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의 도시 번영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이에 대신해서 새로운 번영을 일으킬 요소가 구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 사회는 막대한 농지를 농민이 아닌 도시민들이 소유하여 지배적인 소작 제도(Mezzadria)로 운영되고 있어서, 유럽에서 보는 근대 자본주의 발달의 기반인 독립 자영 농민층이 결핍되어 있었다. 더구나 도시 중심의 통제적 식량 보급 정책이나 전쟁과 흉작 등이 악영향으로 작용하여 농작물 상품 생산의 발전이 막혔고, 중 · 소지주의 몰락과 종교 단체와 대 귀족들의 대 농토 소유와 소작 제도로 인한 봉건적인 사회 제도가 다시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낙후 지역이었던 남부 이탈리아에도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 붙어 이득을 취하는 대소작인들의 중간착취로 농촌의 빈곤을 가속화시켰다. 이탈리아에 있어서 근대사는 중세 시기가 막을 열었던 것과는 별 차이가 없는 상태의 역경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중세사가 야만인들의 지배라고 하면 근대사는 외국인들의 패권 장악에 있다. 아무튼 이러 저러한 운명 속에 이탈리아는 매우 큰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자치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정원을 향해 홍수들이 밀려오는 것과 같이, 야만적인 종족들이 내려와서 로마 전통의 흔적 위에서 군주 국가를 세워 나갔다. 반대로, 근대사는 이미 전쟁에 숙달된 군대를 거느리며 민족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알프스 이북의 여러 강대국들이 이탈리아 방면으로 확장해 오면서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그 세력권에 예속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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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성립과 해상 무역으로 인한 지중해 경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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