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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와 한국 문화, 네팔과 쿠바에서도 배운다. 세종학당 18곳 신규 개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늘 24일, 올해 열다섯 나라에 세종학당 18곳을 신규 개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설로 인해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 256곳으로 확대된다. 특히 네팔과 쿠바에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마련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세종학당이 새로이 문을 연다. 네팔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많은 노동자가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 한국어 학습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학습 여건이 미흡한 상황이었다. 문체부는 카트만두에 세종학당이 지정됨에 따라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확산이 더욱 체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쿠바 역시 한국과 지난 2월 수교를 맺어 다양한 문화와 인적 교류가 예상된다. 중남미 지역은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관계자는 "중남미는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권역"이라며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의 거점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세종학당의 확장은 네팔과 쿠바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일의 베를린과 뷔르츠부르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스웨덴의 스톡홀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지자흐,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인도의 벵갈루루, 중국의 청두, 카자흐스탄의 코스타나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태국의 방콕, 폴란드의 카토비체, 필리핀의 일로일로와 케손시티, 호주의 퍼스에 세종학당이 신규 개설된다. 이번 개설로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에 256곳이다. 지난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한 수강생은 21만 6,226명으로 전년 대비 20.8% 증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셈이다. 이러한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학당재단 관계자는 "올해 세종학당 공모 경쟁률이 5.4대 1에 달할 만큼 각 나라의 한국어 학습 열기가 뜨겁다"라며 "내실 있게 운영되도록 관리·감독을 한층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세종학당은 앞으로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세종학당의 확장은 단순히 한국어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확산과 교류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각 나라의 세종학당은 한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현대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하며 한국과 해당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세종학당의 신규 개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네팔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세종학당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많은 사람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뉴스
    • 교육
    2024-06-24
  • 글로벌 웹툰 전시로 K-콘텐츠 확장, 필리핀부터 유럽까지 전략 진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대상으로 한국 만화·웹툰 전시를 개최하면서 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BTS와 블랙핑크 같은 K-팝 아티스트들이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넓혀온 방식을 웹툰에 적용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웹툰 인구를 확장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2022년 세계 시장에서 동남아시아 만화·웹툰 시장의 비중은 5%로 비교적 작지만, 한류에 대한 높은 관심 덕분에 이 지역에서의 수요 창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또한, 유럽에서는 이미 확립된 일본 망가 소비층이 웹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필리핀에서 시작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등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각 국에서의 전시는 현지에서 인기 있는 K-콘텐츠 성격을 반영하여 선호도가 높은 웹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필리핀에서는 특히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가 인기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 비서가 왜 그럴까'와 '옷소매 붉은 끝동'을 중심으로 전시가 진행된다. '김 비서가 왜 그럴까'는 이미 현지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OTT 플랫폼 Viu에서 3주 연속 정상에 오르는 등 흥행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전시장은 웹툰 속 부회장실과 비서실 등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방문객들의 흥미를 끌 계획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경우, 작화를 맡은 조혜승 작가가 직접 현지에서 홍보 활동을 벌이며, 이야기 콘서트와 만화 그리기 연수회 등을 통해 웹툰에 관심을 촉발시킨다. 이 외에도 각 나라에서 재외 한국문화원을 통해 웹툰 공모, 이야기 콘서트, 사업 교류회, 웹툰 연수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이번 웹툰 전시는 한국 웹툰의 다양성과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한국 문화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국내 웹툰 기업들의 해외 시장 진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팬층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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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행사
    2024-06-20

문화 검색결과

  •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문화 예술 교류 '현대무용' 공연 열려...
    지난 28일 용산 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현대무용 공연은 양국 간의 문화 예술 교류를 재확인했다. (사)국제문화개발연구원(ICDI) 주최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한국의 MUT DANCE와 이탈리아의 GDO DANCE COMPANY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이번 공연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되었던 문화 예술 교류의 재개를 의미한다. 이탈리아문화원과 (사)무트댄스, 그리고 GDO(Gruppo Danza Oggi)/UDA(Urban Dance Academy)가 주관했다. 특히 협업 공연은 이탈리아 대사관 후원으로 두 번째 성사되며 양국 간의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다. 주한 ‘미켈라 린다 마그리’ 이탈리아문화원장은 “2024년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과 2024·2025 한국·이탈리아 문화 교류의 해를 맞았다.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이 양국 간 열리는 이번 문화 교류 공연을 주관해 앞으로 주한이탈리아 대사관과 특히 공관장인 에밀리아 가토 이탈리아 대사님과 함께 더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현대무용 작품으 구성되었다. 첫 번째로 GDO 무용단의 일레냐 로씨가 선보인 'That’s Life'는 두 남자와 한 여성 사이 사랑의 다툼을 다루며 인간 내면의 긴장과 감정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예상치 못한 전개와 퇴색, 그리고 아이러니를 통해 순수한 인간적 삶의 느낌을 전달했다. 두 번째 작품인 'Query'는 김정아 예술감독이 이끄는 MUT DANCE에 의해 선보여졌다. 이 작품은 4차 산업 혁명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간, 이성, 가치관을 표현하며 무대 뒤 스크린 영상을 통해 혼돈의 상황을 그렸다. 작품 'Query'는 제38회 한국무용제전에서 우수작품상 수상도 했다. 세 번째 작품인 'SOSPESO-SOSPESO'는 다시 일레냐 로씨가 등장하며 선보였다. 한 남자의 불안정한 심리적 변동을 다루면서 인간의 정지된 영혼과 그 주변의 변화를 묘사했다. 마지막 작품 'At the end Inter-Action'은 한국과 이탈리아의 안무자 및 무용수들이 공동으로 협업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일상 속 선입견과 편견의 부재를 드러내며 사람들 사이의 무의미한 생각을 탐구했다. 이번 공연은 임실비아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단장 겸 예술 총감독의 인사말로 마무리했다. 임 감독은 “참석자들의 발걸음이 이번 공연을 빛내주었다.”라며 “앞으로 용산이 국제문화교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에 찬 인사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과 이탈리아는 수교 140주년을 맞이해 양국 간 문화적 유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문화 교류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용산구청장 박희영은 공연이 용산에서 열린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용산을 국제문화교류의 핵심지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 공연은 양국 간의 문화 예술 교류가 더욱 성숙하고 지속적인 협력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게 했다.
    • 문화
    • 예술
    2024-06-03

칼럼 검색결과

  •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에서 나온 결과
    2023년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이 열렸다. 여기에서 '평화 협정(Peace treaty)'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도 이스탄불에서의 협상이 끝난 뒤 별도로 가진 양국 대표의 기자 회견을 통해 전해졌다. 양측의 회견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하루 만에 끝났다. 본래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최종적으로 합의까지 이르기에는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스탄불 회담을 중재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가지 협상 쟁점 중 4가지 부분에 있어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합의가 될 수 있는 4가지 조건은 첫 번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철회하는 것,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세 번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안보 보장, 네 번째,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이다. 물론 타결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돈바스의 독립과 더불어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핵심적인 목표로 내세웠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비무장화와 나치의 세력인 아조프 대대 및 프라비섹토르 세력의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돈바스를 보호하는 조건에 있어 협상 내용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나치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치의 깃발을 앞세워 선동하는 세력들을 거의 제압했다 여겼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당시 남부 항구도시이자 최대 격전지인 마리우폴의 도심 돈바스 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고 아조프 대대의 근거지였던 마리우폴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CNN 방송도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보도했으며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역 대부분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며 마리우폴 함락을 사실상 인정했다. 터키 언론인 휘리옛과 TRT에 의하면 이스탄불 협상이 이전 4차 만남에서 러시아 협상단이 우크라이나 협상단에게 문서로 정리해 넘긴 제안서에 대한 답변 문서를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협상단은 협상에서 구두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문서로 전달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협상단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레믈린 보좌관은 협상 종료 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지위와 비핵국가 지위의 추구를 확인하는 제안을 문서로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에 의하면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거부하는 것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외국 군사기지와 더불어 외국의 군대 배치 금지 조항이 포함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해주는 EU 국가 및 나토 국가들의 동의 없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제안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국제법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영구적 중립국을 선포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나 비교적 최근의 민스크 협정보다 더 강화된 다국적으로 조약을 비준하여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다비드 아라카미아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대표가 말하기를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 동안 보증했던 국가들이 서명하고 비준하는 국제 조약의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터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참여 가능한 국가들을 안전 보장의 보증 국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들로부터는 이미 참여를 허락을 받았다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할 경우, 보증 국가들은 3일 간의 협의 후 우크라이나에 무기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영공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하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TRT는 협상 중 휴식 시간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논의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관한 국제 조약이라 역설하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조약 및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 받는 것이 서로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차후에 다시 있을 6번째 만남의 쟁점은 모든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휴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푸틴과 젤렌스키가 정상 회담을 가지며 승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으로 방침을 최근에 바꾸었고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와 최고 의회 라다에서의 승인 및 안보 보증 국가 의회의 비준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군이 개전 전날의 위치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안보 협정의 국제적 조약 서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대한 근접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협상이 싸인되지 않으면 군사작전 종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상호 간의 신뢰를 높이고 향후에 협상할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키예프와 체르니코프에 대해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 이 말은 북쪽의 전선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열세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따라서 북쪽 전선은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오늘 러시아 영내에 있는 벨고로드 군수창고 폭발하여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리아 노보스티(РИА Новости) 국영 통신사는 러시아 긴급 구조대 대표 말을 인용해 "벨고로드 인근에서 발생한 군수창고 폭발은 인재"라고 보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열세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의 협상단은 군사활동의 축소가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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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3
  • 유럽의회 선거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카드는 독배인가 아니면 승부수인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유럽의회 선거는 유럽 연합회원국들이 자국의 선거법에 따라 정당에 투표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각 회원국은 인구에 비례해서 할당된 의석수 내에서 당선인을 배분해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프랑스의 경우에 할당된 의원 수는 총 720석 중 81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 지지율인데, 프랑스 집권 여당인 중도성향의 자유당 그룹에 속하는 ‘르네상스당’은 약 14.5% 정도를 득표했던 반면,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에 속하는 ‘국민연합’은 약 31.4% 정도를 득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준으로 총선을 생각해 보면, 집권 여당은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현재 249석이니까, 그 절반 정도인 125∼15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국민연합은 현재 89석보다 150석 정도가 많은 235∼26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정치 일정대로 총선이 실시된 경우에, 집권 여당은 완패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각국 집권당에 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해 있는 제3당인 중도 자유당 그룹은 현재 102석에서 79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극우 정당인 정체성과 민주주의가 현재 49석에서 58석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멜로리 총리가 속하는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유럽의 보수와 개혁’이 현재 69석에서 73석으로 늘어나게 되면, 이 두 정치 그룹의 예상 의석수는 합쳐서 128석이 되기 때문에, 제3당이 자유당 그룹을 앞지르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소속과 기타 정당의 의석수가 100석 정도로 극우에 가깝다고 하면,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극우파의 약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의회해산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표심의 결과에 따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외견상으로 이것은 분명히 ‘국민연합’의 허를 찌른 것이다. 르펜은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기세를 몰아 원래 정치 일정대로 진행하게 되면, 2027년 4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2022년에 패배를 설욕하게 되고, 그해 6월에 총선이 실시될 것이니까, 총선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이 시나리오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원래의 정치 일정을 뒤집어서 3년이나 앞당겨서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르펜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변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 국민연합의 대표인 바르델라도 현재는 르펜과 함께 하지만, 그 결과에 따라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라면, 총리가 바르델라가 되면, 르펜은 대선후보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대통령도 총리도 되는 최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중도성향으로 프랑스의 정치지형으로 보면 주류 정치와 다소 거리가 멀고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1차 선거 결과로 24.01% 득표율을, 2차에서는 66.10% 득표율로 당선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과거에 7년이었지만, 시락크 대통령 재임 때 임기를 5년으로 단축했고, 1번 연임은 가능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에 1차에서 27.85% 득표율을 기록했고, 2차에서는 58.54% 득표율로 재선으로 당선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면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에서 표심을 모으는데 분명히 일가견(一家見)이 없지는 않다. 사실 그는 제3의 길을 지향하다 보니, 자신의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인해 때론 좌충우돌과 돌출발언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카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녹록하지 않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극우파가 약 29.5% 지지율을, 좌파가 약 18.5% 지지율을, 중도파가 약 18% 지지율을 보인다. 이번에 마크롱 대통령의 총선 조기 실시에 관해 프랑스의 원로정치인들도 극우파의 집권을 걱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여세로 극우파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정통 우파인 ‘공화당’의 시오티 대표가 ‘국민연합’과 동맹을 제안했다가, 제명 위기로 번졌다. 아무리 그대로 나치독일에 맞서 드골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정통우파 정당의 대표가 극우파인 ‘국민연합’과 손을 잡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개인적 의견이라고 해도, 극우파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은 정도(政道)를 넘어섰다는 당 안팎에서 강한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초라한 공화당의 현재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좌파 연합(‘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도 공천 문제로 균열의 조짐이 벌써 나타나기도 한다. 극우파에 맞서 4개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좌파 연합은 극좌 성향의 멜랑숑 대표가 온건파를 공천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내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많은 문제가 정치적으로 있지만, 그래도 극우파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전국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수십만의 시위 인파가 반극우세력 연대의 물결로 가득 채우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도박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과감하게 그리고 빨리 던진 것은 직접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의 하원 선거(총선)에서 중도파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라는 카드 이외에 다른 마땅한 카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집권 여당의 의석수는 총 577석 중 250석으로 야당 전체가 327석보다 적다. 그러다 보니 각종 정부 정책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도파가 그동안에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손익계산만을 분주히 했을 뿐,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성과 성찰이 우선 필요하다.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현재 집권 세력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비전 그리고 국민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각종 개혁과제와 경제침체 등등으로 인한 국민의 실망감과 분노, 젊은 층들의 미래에 관한 절망감 때문이다. 또 거기에 편승해서 포퓰리즘적인 정책 남발로 극우파가 표심을 파고들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정책이 수행될 수 있는 것처럼, 표심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극단주의가 득세하게 되면, 그 역풍은 누구도 어떤 세력도 결코 막을 수 없게 된다. 또 극단주의가 프랑스적인 정서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치욕과 악몽을 경험했기 때문에, 극우파의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극단주의란 결국 서로를 스스로 파멸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취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조기 총선을 앞두고 각 정파는 합종연횡을 통해 의회 권력에 서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누가 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대이변’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격동에 휩싸일 것이고, 마크롱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에 상당한 사임 압박에 더욱 시달릴 것이다. 현재의 조기 총선으로 인한 일시적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이 벌어진다면, 사실 극우파는 오히려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극우도 극좌도 싫다면, 이번 총선의 투표가 최선도 최악도 아니라면, 결국 프랑스 국민은 차악(遮惡)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마크롱 대통령의 어설프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카드가 독배도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마크롱 대통령은 독배를 마신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독배였음을 알게 될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독배가 아니었는데, 마크롱 자신이 독배로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든 이번 프랑스 조기 총선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9
  •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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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집단서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대 굴욕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은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대국민회의군은 앙카라 인근 사카리아 강까지 몰려온 그리스군을 상대로 장장 21일 동안 밤낮없이 백병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그리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다.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은 민병대에게 패배하여 카프카스 본토로 철수했고 남부전선의 프랑스군도 가지안테프에서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을 힘을 쓰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터키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카리아 전투에서 전 국민과 함께 그리스 침략자와 싸워 이긴 덕택에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집단 서방의 연합군이 몰리는 형세로 접어들었다. 1922년 사기가 오른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몰아붙여 이스탄불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병력과 무기의 우위에 있었던 그리스군이 도리어 열세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터키군은 패퇴하는 그리스군의 장비와 탄약, 포탄을 넉넉하게 노획했고 이를 그리스군에 도로 공세를 퍼부으면서 오히려 그리스군이 수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스탄불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은 전장에서 발을 빼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군부는 터키 의회에 전쟁을 그만 매듭짓자고 요청했고 특사로 이스메트 파샤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의 요구에 따라 터키 의회는 이스메트 파샤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양측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만나 장장 1년 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로잔에서의 회의에서 영국은 터키와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군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리스가 선전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 중 하나가 에디르네와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하고 이즈미르는 터키의 영토로 하며 아나톨리아를 보전시키겠다는 제안을 하여 결정을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이런 회의는 의미가 없다며 초강경 자세로 버텼다. 영국도 그리스에 대한 물자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군에 물자를 대주면서 선전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지만 현실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 계속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지원한 물자는 터키 민병대에게 탈취당하거나 전투에서 노획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적백내전이 평정되면서 국내 사정이 안정된 소련 볼셰비키는 터키 독립 전쟁에 비로소 관여하게 되면서 터키 독립군에게 각종 무기와 탄약, 물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이에 오히려 물량으로 터키가 그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터키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인근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그리스 본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와 왕당파 정권에 여론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연전연패의 소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리스가 또 다시 터키에 정복당하는거 아니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 정파의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는 군부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Georgios II)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스 측은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6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내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 카라아아츠(Karagac)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협박했다. 더불어 이즈미르 본거지를 잃은 그리스 군은 부르사도 터키군에 내주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동트라키아로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동트라키아를 지키기 위해 반격 준비에 나섰고 터키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이스탄불과 동트라키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터키 의회에 최후 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다시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반대했기에 결국 영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렇게하여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터키 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터키군은 동트라키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잔에서의 2중 조약은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패배해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메트 파샤에게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와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세르브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기존의 세르브 조약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걸려 있었다. ① 그리스 왕국 : 스미르니를 위시로 한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을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의 획득 ② 이탈리아 왕국 :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콘야-안탈리야) 할양 ③ 프랑스 공화국 :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 할양 ④ 영국 :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할양 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 동부 (트라브존-에르주룸-반 호수) 할양 ⑥ 쿠르디스탄 자치령 : 아르메니아 영토와 영국령 제외 전역, 쿠르디스탄의 확실한 독립 그러나 더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그리스마저 터키에게 점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반발을 누르고 폐기에 합의했다. 또한 그와 같이 다급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소련은 터키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터키 동부 지역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빠르게 장악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내려와 도시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이에 놀란 아타튀르크 케말은 소련과 카르스에서 만나 협상에 돌입했고 당시에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도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출병하자 소련은 현 아르메니아 땅을 장악하고 동부 지역은 터키가 장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철군하게 된다. 이로써 이라크에서 출병한 영국군은 도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아타튀르크 케말은 영국에 강한 경고를 날리자 영국군은 즉시 이라크로 퇴각했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이렇게 하여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터키는 동트라키아를 선택하고 에게 해의 섬들과 키프로스를 포기함으로써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약속한 쿠르디스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로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과정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대표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집단서방, 영국이 쿠르디스탄은 대표를 보낼 필요 없이 영국이 알아서 독립을 약속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르디스탄은 영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쿠르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쿠르드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어 끝난 상황이었고 터키군이 갑자기 쿠르디스탄 영토에 진주하면서 쿠르디스탄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터키에게 굴복했다. 자신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세에 의존한 민족의 최후였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대의 교훈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민족적 후회가 어떻게 남아있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독립을 약속 받지만 결국 이용당하며 또 다시 팽해지는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20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100주년을 맞이해 터키 동남부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요구하였고 독립에 대한 주민들 찬반투표가 공식적으로 열려지도록 터키 의회에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쿠르드족은 한 번의 기회를 외세에만 의존해 독립을 날려버린 비운의 민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최장기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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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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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집단 서방
    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시작점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라비아 선박의 비 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의 도시들은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으며 시민들의 손과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미리(Miri) 학살 사건과 커리(Curry) 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학적인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다른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그렇지 않아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직접 향신료 산지로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고 있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했다.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리케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아 4척의 범선과 170여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 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코 다 가마는 여행기를 서술했는데,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라비아 인 상인 2명이었다. 이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인도까지 왔는지 의아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Jamorin)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상인들이 보기에는 탐험대의 무역 상품들이 한심해 할 정도로 저 품질이었고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것을 버리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황금을 가져오라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 내려져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에 인기가 많은 캘리코 면직물의 본 고장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이 외에도 당시의 유럽 문명은 선박과 화약 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역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로 인해 통상 교역을 하는데 실패했고 함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에 나서 1499년 9월, 마침내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최근 예멘 후티 군대에 의해 홍해가 차단당하고 있다. 후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이유로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잇따라 공격하면서 글로벌 해상 물류가 큰 차질을 빚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상선을 공격하는 예멘 앞 바다의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은 중동과 유럽을 잇고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주요 해상 수송로이다.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30%가 홍해를 지나고 있다. 덴마크 국적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는 “수에즈 운하를 지나 예멘 앞 바다(바브 알 만다브 해협)를 통과할 예정이던 모든 선박에 이 지역 운항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하파크-로이트도 최소 18일 동안 이 회사 선박의 홍해 통과를 중단키로 했고, 스위스 MSC와 프랑스 CMA-CGM 등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물동량 기준 세계에서 유명한 글로벌 해운사로,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약 53%를 차지하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지난 15일 머스크의 화물선 ‘머스크 지브롤터’와 MSC의 ‘팔라티움 3′ 화물선, 하파크-로이트의 컨테이너 함선 ‘알 자스라’ 호를 미사일과 무인기로 공격한 것에 따른 조치다. 후티 군대는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발발 이후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10여 차례 공격했다. 하루 동안 상선 3척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만든 상품을 실은 컨테이너 함선과 중동 걸프만에서 나온 원유를 나르는 유조선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주로 뱃길이 짧은 수에즈 운하를 지나왔다. 하지만 후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면서 주요 해운사들은 자사 선박들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앞을 통과하는 우회로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뱃길이 5,000㎞ 이상 길어지고, 화물 도착일도 7~10일 가량 늦어질 수 있다고 해운 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운로는 일찍이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항로와 유사하다. 집단 서방은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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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많은 시사점을 준 유로 2020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지난 2020년 유로대회에서 개개인적인 기량은 최상이지만 조직력이 모래알 같던 프랑스 축구는 마침내 한꺼번에 무너졌다. 프랑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2020년 유로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레키프>와 같은 프랑스 언론은 대회 전에 음바페와 올리비에 지루 간에 은근한 신경전부터 시작하여, 앙투안 그리즈만의 롤을 시기질투한 음바페, 숙소 선정 문제 등, 프랑스 대표팀의 모래알과 같은 조직이 조기탈락을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레키프>는 이번 프랑스 대표팀을 선수들이 레옹 도메네크 감독 항명 스캔들을 일으켰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의 프랑스 대표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게 축구 뿐이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훈족의 유럽 침공은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을 일거에 서진시켰다. 이들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은 로마제국 영내에서 불법 이주하여 살게 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용할지 골몰하게 된다.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최악을 달리고 있었는데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지역과 사산 왕조의 침입을 많이 받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개별적인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산 왕조와의 전쟁은 끝이 없었고 로마 제국은 노예 수급이 차단됨에 따라 적잖은 곤란을 겪고 있었던 판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인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로마인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고 이러한 노예들은 군대에서 용병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게르만의 수용 인원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이 로마인보다 오히려 숫자적으로 우위를 보이자 이들은 로마인과 결혼을 통하여 혼혈민들을 로마 미래의 주역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점차 게르만 인들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이용되면서 군에서 게르만 인들의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의 군에서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즉, 로마 군 내에서도 게르만 인들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르만 계통의 민족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자들은 로마의 군 내에서 장교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오히려 로마의 순혈인보다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순혈인인 로마인들을 복종시키게 되면서 군이 거의 게르만 인의 손에 장악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마는 게르만 인들을 학대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힘으로 누르자 게르만 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반기를 들어 각 도시들을 제압했고 심지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로마 영내를 침입하자 이들은 훈족에 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공동의 적인 훈족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화해와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군의 실권자인 서고트 족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게 된다. 게르만 인들에 대한 무조건 적인 관용과 그들을 노예로 활용하려는 인권 유린, 그리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와 비리, 게르만인들에 대한 무시와 야만족이라는 멸시, 그로 인한 안일한 대처 등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제는 민족이나 순혈이라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다문화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점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 축구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고작 축구나 과거의 역사로만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현 시점과 앞으로 다가오는 점점 희미해지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대체하느냐, 혹은 어떻게 더 강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사회와 가정 내부를 보면 서로 마음에 안 들게 되었을 때 그 집단과 집단 안에 소속된 개인을 음해하거나 갈등을 표면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힘든 일 하기 싫다고 노역을 거부하며 화이트칼라를 노리는 젊은이들로 인해 결국의 국가의 근간 산업이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고 앞서 이자스민처럼 정치에도 관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보다는 오로지 동남아시아 인들의 편의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원칙이 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최근에 한동훈씨가 이민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 반복되는 부분에서 어떠한 실책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부분인데 한동훈씨는 그러한 심각성과 역사의 무서움을 여전히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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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독일과 폴란드의 무역전쟁 이야기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한 폴란드는 20세기 초, 독일과의 북부 실레지아 분쟁이 터지면서 심각해졌다. 북부 실레지아 영토 분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북부 실레지아의 73%를 독일에 귀속시켰으며 25%를 폴란드에 넘겨주고 나머지 2%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넘겨주어 분할된다. 이러한 실레지아 분할 사건은 독일과 폴란드, 양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이는 독일 입장에서 볼 때 당시 폴란드에게 넘어간 25% 지역이 인구의 40%가 넘는 비교적 높은 비율이 거주하면서 북부 실레지아 전체 산업시설의 80%가 위치한 핵심 지역이었기에 독일 측의 불만은 대단했다. 그 중에서 카토비체와 쾨니히스휘테, 루블리니츠 등의 주(州)들은 독일 측의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억울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계가 더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들은 독일 표가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도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농촌 지역은 폴란드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대다수가 독일에 잔류하게 된 것 또한 불만이었다. 이처럼 애매한 주민투표의 결과 때문에 주민투표를 주도한 협상국가들도 양국 국민들과 정부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국제 연맹이 중재에 나섰고 이를 통해 1922년 제네바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자 간의 합의로 겨우 실레지아에 대한 재분할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양국이 모두 만족할 해결책은 아니었다. 1924년 10월 26일,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Zeitung)에서 처음으로 폴란드에 대한 무역 공격을 시사하는 사설이 게재되었다. 해당 사설에 의하면 '폴란드의 무례함을 공격하여 분쇄하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매기고 이를 통해 폴란드에게 매우 "결정적인(Entscheidend)"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수상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는 1924년 11월 비밀리에 폴란드산 물건에 대한 수입 거부 조치 준비를 지시했다. 우선 북부 실레지아의 73%만 차지하게 된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을 무시하고 1925년 1월 6일부터 폴란드의 석탄, 철광석과 강철에 대해 무관세를 철폐하고 수입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폴란드의 국민들이 독일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Władysław Grabski) 폴란드 수상이 독일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독일의 한스 루터(Hans Luther) 수상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 전체를 폴란드가 독일에게 돌려줄 때까지 수입거부와 관세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포즈난의 경우, 이미 독일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인이 더 많이 살았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포즈난 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실레지아 땅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가져간 카토비체 지역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 폴란드에 넘어간 이후 독일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를 오펠른으로 옮겼으니 자신들의 영토의 주도를 침탈한 폴란드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시 폴란드에서는 단 한 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특히 독일이 무역 전쟁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이 명백해지자 폴란드 역시 1925년 5월 독일산 공산품에 대해 대대적인 보복관세를 매겼다. 그러자 독일은 이와 같은 폴란드의 보복을 예상했었다. 1925년 6월 폴란드의 모든 제품에 대해서 최소 50%~최대 200%에 달하는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국가 무역의 40%를 독일에 의존하던 제2 폴란드 공화국은 독일에 반발했으나 독일의 이와 같은 보복 조치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독일은 폴란드가 영국의 차관을 얻는 것까지 막고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1925년 7월이 되자 오히려 수세에 몰린 폴란드는 독일에게 영토 문제에 대한 협상을 할 것이니 무역 전쟁을 철회하자고 제안했지만 독일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의 즉각적인 전체 반환 없이는 일체의 협상도 없다며 이를 완전히 거절했다. 1925년 8월 당시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Reichsbank, 제국은행)의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는 폴란드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약간이라도 늦춘다면, 독일이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며 당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폴란드와의 협상 자체를 중단할 것이며 앞으로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각에 밝혔으며 이는 그대로 승인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폴란드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1926년에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했기 때문에 기타 국제 연맹 국가들을 통해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혹독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동정적이었던 흐름이 생기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제연맹은 독일과 폴란드의 평화적 해결을 주문한다며 시간만 끌게 된다. 국제연맹에서는 대공황 때까지 무역 전쟁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 1929년 9월,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결국 무역 전쟁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독일, 폴란드 둘 다 대공황으로 인한 후폭풍이 상당했기 때문이며 특히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에게 보호무역 조치를 더더욱 강화했고, 이 때문에 양국의 무역량은 바닥을 치게 됐다. 결국 독일과 폴란드는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 더욱 큰 GDP의 하락을 보이게 된다. 특히 독일보다 폴란드가 심각졌기 때문에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총액 GDP는 20.7% 감소했고 실업률은 47%까지 증가했다.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의 세력이 급격히 커졌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카톨릭 중앙당은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독일 내부에서는 폴란드와의 협상 분위기는 더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후 1933년에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비해 폴란드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독일이 재군비도 안 한 상황에서 폴란드와 무역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당시 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한테도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먼저 당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폴란드 국가원수 앞으로 독일-폴란드 간의 무역 전쟁을 해결하자는 전보를 보내고, 이를 받은 피우수트스키가 즉시 폴란드 정부에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1933년 10월 먼저 독일이 최고 200%까지 매겼던 폴란드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고, 폴란드 역시 11월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독일과 폴란드는 상호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부속 조약으로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은 1934년 3월 2일부로 효력을 발휘했고,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무려 9년 2개월만에 해결되었다.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공산품에 대해서는 상호 무관세, 농산물에 대해서는 상호 5%의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폴란드 모두 무역 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단 독일은 끝내 폴란드에게서 요구한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다. 무역 전쟁을 9년이나 지속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 땅에서 사업을 하던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도 무역 전쟁으로 인해 외화 수입이 끊겼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어 1920년대에 시작하려 했던 공업화를 한참 이후로 미루어야 했다. 결국 폴란드는 1933년까지 농업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1939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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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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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집시 민족과 그들의 현실성
    유럽 국가들 중에서 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집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이다. 집시의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집시의 기원에 관한 문제도 분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루마니아의 집시 전문가인 콘라드 베르코비치(Konrad Bercovici)는 “세상에서 집시의 수 만큼이나 집시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던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집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집시라는 용어의 시작은 그리스어 아칭가노이(Atsinganoi)에서 유래하고 있다. 아칭가노이라는 용어는 동유럽에서 많이 통용되었으며, 또한 집시들 자체에서가 아닌 외부인들이 그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종 경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마니아 집시들은 이 용어보다 산스크리트 기원의 집시 언어인 ‘Rrom’이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하고 있다. 집시들은 다양한 국가들에 흩어져 생활했으며, 그 곳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요소들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곳의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집시라는 민족의 정체성은 항상 긍정적인 요소들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 집시들의 노예제도와 관련한 여러 가지 흔적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 구조 속에서 남아있으며, 루마니아 인들과의 관계 및 루마니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집시 민족의 사회 내에서는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후유증을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노예 제도가 지속됨으로 인해 집시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책임으로 행하는 진취적인 정신 또한 약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건에 대하여 체념하는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집시들은 과거 자신들이 속했던 계급이나 직업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지주, 수도원 그리고 영주 등 그들이 어디에 귀속되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예 제도는 아직도 집시들의 정신세계에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 생활에도 비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과거보다는 적게 나타나지만 아직도 집시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집시의 정체성은 종종 열등 혹은 하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집시들의 동향을 보면 이탈리아와 로마 시 정부가 이탈리아 사회에 동화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중,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비르지니아 라지 로마 시장은 1인당 연간 최대 1000유로(약 133만원)를 주는 조건으로 본국인 루마니아로 돌아가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안건을 내놓았다. 라지 시장은 최근 루마니아를 방문해 집시 재정착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집시들에 대한 사회보장을 루마니아가 해줘야만 이행될 수 있는 부분이라 역설했다. 하지만 철거가 이루어진 거주촌에서 루마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한 집시들은 14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집시들은 길거리에 거지같은 신세로 현지인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들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는 다른 집시 거주촌들도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실질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겉으로나마 경제적인 유인을 내걸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집시를 추방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맞섰던 네오나치 민병대 출신들이 크림반도를 상실한 분노의 화살을 집시에게 돌리고 있다. 수도 키예프에서는 지난 4월 ‘C14’라는 극우 단체가 집시들의 천막촌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행사해 집시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이후에도 네오나치들, 프라비 섹토르 집단들의 집시 거주촌 공격이 잇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탄압하고 있다. 집시들은 야생화 부케를 팔아 생활을 유지할 뿐 키예프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극우 단체들은 이들이 절도와 구걸을 하며 도시를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공격 이후 키예프에서는 집시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폭력을 방관해왔다고 지적했다. ‘C14’는 철거 폭력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버젓이 인터넷에 올려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합리화했다. 2016년 우크라이나의 다른 극우 단체 회원들, 특히 동부의 아조프 대원들은 집시 남성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집시 추적 장면을 ‘집시 사냥’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정부가 미온적으로 방관했던 이유로는 극우 인사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과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엔 등이 항의하는 가운데 2017년에야 집시 거주촌 폭력 사건 관련자에게 가택 연금 처분을 내린 것이 인권 유린에 대한 처분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이 ‘소프트 타겟’으로 점철된 집시에 대해 탄압을 노골화하는 것을 두고 나치즘 또는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시 30만 명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하지만 집시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도자들은 이에 대한 인권 유린을‘사회 정화’라고 하면서 이러한 행동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했다. ‘C14’를 이끄는 예우헨 카라스가 언급하기를 "우리는 파시스트로 불린다.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다"며 “범죄자들에 대응하는 것일 뿐 인종주의적 차원의 공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도 자신은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아니며 이탈리아 인을 우선으로 한 노선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하며 집시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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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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