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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중국 외교부 왕이(가운데), 알리 샴카니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서기(오른쪽), 무사아드 빈 모하메드 알 아이반 사우디아라비아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회담 중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China Daily) / 로이터(Reuters) 통신

 아랍의 맹주이자 수니파 이슬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인 이란은 서로 앙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주도 하에 단절됐던 외교 관계를 7년 만에 회복하기로 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수니파와 시아파 진영의 종주국인 양국 관계가 개선되면서 분쟁이 잇따랐던 중동 지역에 화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둘 다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하나 된 이슬람에서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정통 칼리프의 시대 때, 함께 3개 대륙 원정까지 나섰다. 같은 무슬림으로 따지고 보면 아라비아계와 비()아라비아계의 정치, 종교와 융합된 내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융합되기 어려운 갈등은 사막 유목 민족의 특성으로 자신들 소속 집단이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과 지독한 폐쇄성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을 창시했을 때 이슬람 안에서는 무함마드를 따랐던 무하지룬(المهاجرون)과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쿠라이시 가문에 패배해 추방되었다. 이때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 사건 이후, 메디나에서부터 무함마드를 따르게 되었던 안사르(Ansar) 집단이 서로 대립했다. 당시 무함마드는 양자 간에 형제 관계를 맺어 충돌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후 무함마드가 죽고 후계자, 즉 칼리파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사르는 그들의 대표자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무하지룬에서 칼리파를 세웠고 이 과정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가 안사르 집단을 포용하면서 다행히 큰 충돌로 빚어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3개 대륙을 함께 석권했다. 하지만 이들의 분열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4대 칼리프 무하마드 알리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이었다. 알리가 4대 칼리프가 추대되기 전, 쿠라이시 가문의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를 칼리프를 추대해야 한다고 아랍계가 주장했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직접적인 혈통인 무하마드 알리를 추대해야 한다고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주창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 레반트, 이집트 일대의 무하마드 혈통 파가 알리를 칼리프 추대에 동조했다. 숫자가 적은 아랍계는 칼리프 선거에서 밀려 패배하면서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더구나 알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미망인인 아이샤도 알리를 지지하게 되자 이 대립은 결국 이라크 쿠파로 향하던 알리와 그의 일족들이 카와지리 파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알리의 피살 이후, 알리의 장남인 하산이븐 알리가 칼리파위를 승계하려 했다.

 

그러나 수완이 뛰어난 무아위야는 거액의 보수를 제시하여 하산의 하야를 권유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분쟁에 지쳐있었던 하산은 무아위야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랍 제국의 권력 쟁탈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후세인 이븐 알리는 계속 저항하며 결국 "카르발라의 비극"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아랍인들이 무하마드의 혈통을 암살했다고 믿게 되었다. 다섯 번째 칼리프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추대되고 우마이야 왕조가 건국되자 이들은 아랍계의 우마이야와 항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이러한 역사는 압바스 제국으로 연결되고 투르크-몽골, 타타르의 지배 등, 중동의 무슬림들은 서로 통합되지 못했다.

 

이슬람도 칼리파 추대 문제로 인해 아랍계의 수니파와 페르시아계의 시아파로 크게 분열되었다. 무아위야를 추종하는 아랍계 수니파의 수장국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었다. 또 알리를 추종하는 페르시아 시아파의 수장 국은 오늘날 이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칼리파를 두고 선거냐, 세습이냐를 두고 무려 1,300년 이상을 싸워왔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슬람교 교리까지 비화 되어 오늘날까지 왔다. 이슬람의 3자인 사람들은 그깟 칼리파 싸움이 뭐길래 하면서 부질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우선 아랍인들의 기본 문화는 사막 유목문화에서 기인한다.

 

아라비아반도 자체가 사막화된 지역이 많다 보니 오아시스에 씨족 별로 모여 살았다. 또 해안가 지역의 씨족들은 장사를 통해 먹고 살았다. 따라서 해안가 지역은 상업이 주된 경제였고 아라비아반도 내륙 지역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약간의 농업과 목축업이 주된 경제였다.

 

그러다 보니 해안가의 아랍인은 사업 수단이 발달했고 상업의 가치와 개방성, 포용성을 두루 갖춘 자들이었다. 다만 내륙의 아랍인은 다소 폐쇄적이며 포악해 약탈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예언자 무하마드 또한 해안가 상업 도시 메카 출신으로 상업 집단의 대상을 따라 사막을 가로질러 멀리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무역하던 집단의 자손이었다.

 

이처럼 무역하며 쿠라이시 가문은 상당한 양의 재력을 소유한 메카의 지배자 가문이었다. 반면 무하마드는 아라비아 통일 전쟁을 통해 막대한 자금과 부조리한 문화를 가진 내륙의 유목민을 통합했다. 유목민의 잔인성과 포악함으로 약탈을 잘하는 특성을 이용해 이들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아라비아가 통합된 이후, 외부 정복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 아랍인은 해양과 내륙인이 통합되었으나 해양인이 주류가 되어 아랍인을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개방과 포용을 갖춘 민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약점은 문화 수준이 매우 낮고 문맹률도 높았다. 정복한 지역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 또한 매우 부족했다.

 

당시 정복한 국가들에서 가장 문화적,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자들은 페르시아계와 시리아계, 그리고 이집트계였다. 그들 중 페르시아계의 역량을 실로 막대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 두 차례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그로 인해 문화가 매우 융성했으며 문맹률도 아랍에 비해서 낮고 제국을 통치한 경험과 정치력이 뛰어났다.

 

그런 페르시아인이 본 아랍인은 야만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줄곧 세습 군왕제도에 익숙한 페르시아인에게 혈통적 세습은 당연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반면 아랍인은 씨족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족장을 선택했기에 이런 정주 국가의 보편적 정치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지배층이었던 아랍인은 페르시아인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에게 전쟁에 패해 나라를 잃었지만, 문화적 소양이 낮은 아랍인들을 무식한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부분들이 1,300년 동안 종파 분쟁이 이어지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때 이란에 팔레비 왕조가 존속했을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좋았었다. 1929년에 두 나라는 공식적 수교와 1960년대부터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이란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친선 관계가 시작되었다.

 

1968년에는 사우디-이란 간 경계 협정을 맺으며 페르시아만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왕이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에게 세속화 정책을 조언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관계는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이 발생하면서 깨지게 된다.

 

신정국가가 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단자, 전제군주국가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종교성 시비로 비화 되며 두 나라 관계는 양립 불가능한 상태까지 오게 된다.

 

2010년대 들어 대이란 경제제재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동참했다.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 정부를,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더 나빠졌다. 20151020, 사우디와 이란 양국이 시리아 사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결국 20161,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수니파-시아파 갈등으로 빚어진 외교 문제로 인하여 이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7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국교를 회복했다. 이 사건은 국제 정치, 외교뿐 아니라 종교사에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종교적인 문제에도 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란의 순례객이 메카로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교 단절을 이유로 이란인의 메카 순례를 거부했었다. 메카와의 순례길이 재개되면 평생에 한 번이라도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계율로 삼아온 이란의 무슬림들에게 있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될 것이다. 올해 하지에는 이란 시아파들의 순례객들을 7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학부 때 터키-이슬람 문화사를 전공하고 지금까지도 복합적으로 이슬람을 연구했던 필자에게도 매우 뜻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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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는 국제 정치, 외교 뿐 아니라 이슬람 종교사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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